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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과 예배: 포로기에서 회복기까지(하나님 품성 중심의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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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 과 예배: 포로기에서 회복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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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절: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학1:6)

 

 

첫째 날(일) “인자야 보았느냐?”

 

“배도의 과정은 서서히 진행된다.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타협하며, 시대의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엄격성을 조금 완화시키고 사회와 문화적 흐름에 따르다 보면 한두 세대 이전 사람들이 기겁할 행동을 나라 전체가 행하게 되는 것이다.”(교과 136쪽)

 

에스겔 8장은 당시의 문화에서 행해졌던 관습을 성전에서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시에 창조주 하나님을 잃어버림으로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롬1:23)습니다.

 

이런 행동은 창조주 하나님을 잃어버린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문화를 수용함으로 점점 더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다른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가 되어버렸습니다.

 

문화와 예배에 대한 지혜로운 조화가 필요합니다.

 

 

둘째 날(월) 우상숭배

 

다니엘 3장의 이야기는 요한 계시록 13장에서 반복 될 것입니다.

다니엘 3장은 어떤 하나님을 경배하느냐의 문제와 더불어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둘째 계명이 관점이 된 반면 요한계시록 13장은 어떤 하나님을 경배하느냐의 문제와 더불어 그것을 외적으로 보여주는 안식일 계명이 표면적인 쟁점이 될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받아들일 때 두라 평지에 놓인 우상에게 경배할 수 없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받아들일 때 창조력의 기념일을 기억하게 하는 안식일 대신 인간의 생각을 높이는 일요일 예배를 할 수 없게 됩니다.

이 문제는 처음부터 있었던 선과 악의 논쟁이었고 이 논쟁은 마지막 시대에 최고점에 달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어떤 품성을 가지신 분인가에 따라서 예배의 대상을 바르게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바른 선택을 흐리게 하는 폭력과 경제적 위기가 있지만 창조주 하나님이 생명이시고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에 대해 민감하게 책임지시는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확신이 외부적 위협에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하는 믿음이 되게 합니다.

 

 

셋째 날(화) “자기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렘29:10-14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품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재앙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평안과 소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분으로서 우리의 선택에 대해 그 결과를 우리에게 묻거나 선택의 결과에 대하여 재앙을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우리의 선택에 대하여 책임지시는 아버지 이십니다.

 

12-13절의 말씀이 오해될 수 있는 구절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부르짖고 기도해야만 들어주시는 분처럼 표현되어 있고, 전심으로 찾고 찾으면 만나지는 하나님처럼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열심히 부르짖고 전심으로 찾고 찾지 않아도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고 싶으신 사랑의 아버지십니다.

 

언제나 함께 하시고자 하시는 아버지의 품성을 오해하는 우리들을 위해 하나님은 아예 새로운 이름을 추가로 지으셨습니다.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란 이름입니다.(사7:4; 마1:23)

하나님을 오해하고 떠나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은 그 사람의 상태가 사망이므로 그를 창조하신 창조주의 사랑은 떠나 있는 그 사람에게 더욱 다가서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을 오해하고 떠나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다가오실 때 하나님을 무서워함으로 다가오시는 만큼 더 멀리 도망갑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랑의 관계 속에 있을 때만 생명이 되는데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하여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을 보실 때 하나님은 다가가서 하나님의 사랑을 쏟아주시고 관계를 회복하여 생명 속에 있게 하고 싶으신데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는 그 사람의 한계 때문에 다가서지 못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마치 에덴동산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동산에 오셨을 때 두려워서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아담과 하와의 모습과 같은 상황입니다.

 

사단의 거짓말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하여 하나님을 떠나기로 선택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죽은 그 사람들에게 가장 큰 필요는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받아들여서 생명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가서실 수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오신 이유를 그들이 오해해서 그들의 행동에 대해서 벌을 하실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은 아담을 부르시는 일이었습니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있는냐”(창3:9)

 

글자로만 보면 하나님의 전지전능성에 문제가 있는 것 같은 상황입니다.

겨우 나무 뒤에 숨어 있던 두 사람을 찾지 못해서 부르는 것처럼 표현되고 있는데 이것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부르실 때 최대한 그동안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아담이 편안한 상태 속에 있을 때 부르셨던 그 음성과 톤을 생각하셔서 부르셨을 것입니다.

 

아담의 선택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놀라거나 혼내줄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도록 하나님은 평상시의 음성과 톤으로 부르셨을 것입니다.

 

아담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예전과 같다고 느꼈을 때 아담은 용기를 내어 하나님과 대화를 시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마음에 있는 두려움이 갑자기 하나님께서 다가설 때 더 두려워져서 더 도망갈 것을 염려하셔서 아담이 숨어 있는 곳이 어디인지 모르시는 것처럼 아담을 부르신 것입니다.

 

야고보는 그래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약4:8)고 말씀하였습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고 싶으시고 사랑을 쏟아주고 싶으신 하나님이시지만 우리의 한계로 인해 하나님을 오해하고 더 멀리 떨어진 것을 염려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품성을 알고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서는 거리만큼만 안심하고 다가오셔서 하나님의 품성을 보여주시고 깨닫게 하셔서 하나님과 다시 밀접한 관계를 갖게 하시고 생명을 주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배려하시는 사랑입니다.

 

예레미야의 말씀도 이런 측면에서 이해하면 12-13절이 사실적인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적 표현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오해하여 우상숭배와 애굽을 의지했던 남방유다 사람들의 선택의 결과로 인해 바벨론에 포로가 갈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곳에서 70년 만에 다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소망과 평안의 기별을 전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70년 후에 약속의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십니다.

성전 건축을 통해 온 세상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오실 메시야의 사명과 임무를 깨닫게 하기 위해 성전 건축을 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성전 건축이 내부와 외부의 방해로 인해 사업이 지연되었습니다.

세상의 덫과 욕망 심지어 세속적인 필요가 영적인 의무를 게을리 하게 되었고 그것은 결국 그들 자신들에게 만족할 만한 결과가 이르러 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을 우리 삶에 최우선 순위에 두고 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그대가 세상 편에 그대의 온 정력을 쏟고 있는 동안 그대의 품성에 그리스도의 은혜를 짜 넣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대는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지상에 보화를 쌓아 올리는 일에 성공할지 모르지만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을 것“이다. 영원한 관심사는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이 될 것이다. 그대는 예배의 외적 형식에는 참여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대의 예배는 하늘의 하나님께 가증한 것이 될 것이다.”(청지기에게 보내는 권면, 217)

 

넷째 날(수) 너희 조상들이 어디에 있느냐?

 

슥1:1-6에서 인간의 자유의지와 선택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포로 잡혀가기 전 사람들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단절이 죽음이므로 생명을 주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은 돌아오라고 호소하셨습니다.

 

그런데 포로 잡혀 가기 전의 사람들의 선택은 놀랍게도 “듣지 아니하고 내게(하나님께)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슥1:4)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너희 조상들이 어디 있느냐?”(5절)고 말씀하심으로 전에 있던 자들의 실수를 반복하지 말고 과거로부터 교훈을 삼으라고 하십니다.

 

설교의 역할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품성)를 보여주고 과거의 경험을 통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하나님 중심의 삶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람들의 최우선 순위에 두는 선택을 하도록 촉구하여 하나님과 절대적 관계 속에서 확신과 평안을 누리게 해야 합니다.

 

“비록 그들이 죄와 허물로 죽었을지라도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을 설교함으로 그들의 관심이 일깨워질 수 있다. 사람은 죄의 악함을 깨달아야 한다. 범죄자의 눈은 빛을 얻어야 한다. 그리스도께 이끌린 모든 사람이 그분의 사랑의 이야기를 하도록 하자.”(교회증언 6권, 66)

 

 

다섯째 날(목) 느헤미야의 기도

수많은 약속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중건은 순조롭지 못했습니다. 이때 이 소식을 접한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기도함으로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어떤 부분에 조력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기도하는 동안 자신이 할 만한 일을 발견한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실 것에 대한 강한 확신으로 왕 앞에 나아가서 성전재건을 위해 자신이 가도록 허락해 주실 것과 성전 건축에 필요한 모든 재목 등을 구비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마침내 왕이 조서를 내려서 느헤미야가 성전 개건을 위해 협력하도록 허락하게 되었습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되었고 기도하는 느헤미야의 마음을 바꾸어서 무엇을 할지에 대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듣게 하였습니다.

 

느헤미야의 기도처럼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하나님께 여쭈어 보는 시간이 기도여야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이 바뀌어 지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예비 일(금)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속인들을 감화시키기 위하여 저희가 어느 정도 세상과 일치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될 위험이 끊임없이 있다. 그러나 비록 이와 같은 행동이 큰 이익을 줄 것처럼 보이나 항상 영적 손실로 끝난다.”(선지자와 왕. 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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