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과 타성, 양보, 위기(도입과 부가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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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과 타성, 양보, 위기
8월 20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19분
도입)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간다.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자신의 일을 위해, 승진을 위해, 화합 때문에' 모두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면서 말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타협하는 순간, 빛의 빛 됨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생명력을 빼앗기는 것이다. 그 순간, 더 이상 소금이 아니다. 그때부터 세상의 노예로 전략한다.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릴 권세가 있음을 망각해 버린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빛을 잃고 짠맛을 잃은 그리스도인들은 타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마태복음 5장 13절)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세상을 변화시키고 세상에서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사는 일이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믿는다. 설령, 성경 지식에 통달하거나 복음을 전하는 데 열심이 있더라도, 삶이 타협으로 일관된다면 그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존재가 될 수 없다. 더불어, 온전한 안식일성수가 매우 중요하다. 적어도 양육 받은 제자들은, 안식일에 친척이나 형제들의 결혼식이 있어도 가지 않는다. 물론, 당사자에게 미리 설명하여 지혜롭게 양해를 구하도록 가르친다. 축의금도 두 배씩 많이 하라고 알려준다. 이렇게 해서, 관계가 깨진 사람은 아직까지 없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숭고한 신앙이다. 안식일 성수는 역사의 종말, 곧 그리스도께서 재림 하셔서 부활과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우리는 어쩌면, 이 땅에서 너무도 편하게 예수를 믿는지도 모른다. 어느 누구도 예수를 믿는다고, 생명의 위협을 당하거나 생계를 잃는 경우는 없다. 좋은 환경이 오히려 신앙을 편의주의에 물들게 만들고, 생명력 없는 신앙으로 좋은 몰아 갈수도 있다. 예수는 생명을 걸고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신앙의 타협이란 절대 있을 수 없다.
기억절 :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히 5:14).
결론: 우리의 의향과 하나님의 명백한 지시를 절충하려는 시도는 거짓 예배를 부릅니다. 엘리야의 기별은 우리에게 회개하고 순종하며 유일하신 참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첫째 날(일) 8월 14일
다른 관점
도입)
노아 시대에 사람들이 깊이 타락했다. 세상을 심판하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보실 때 세상이 악하다고 하면 정말 악한 것이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사람 지었음을 한탄하셨다’고 표현했다. 그래서 하나님도 마음에 근심하셨다고 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지 않으면 안될 정도의 죄악이 관영했다는 것이다. 하와가 유혹에 넘어갔듯이 인간들은 죄의 유혹에는 잘 넘어간다. 마치 사스가 구제역이 발병하면 아무리 단속을 해도 전염되듯이 죄가 바로 이렇게 전염된다. 그래서 세상에 죄악이 관영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온 세상에 다 퍼졌다는 것이다. 죄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교훈: 타락한 환경 속에서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살면 죄를 자연스럽게 여긴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이 죄악인지 성경을 통해 명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부가적용)
왜 인간들의 마음이 이렇게도 악한가? 그 이유는 로마서1:28절 말씀에 있다. 인간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시어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시기 때문이라고 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근심하고 한탄하셨다고 했다. 하나님이 한탄하셨다고 해서 인간의 마음처럼 후회하셨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님이 후회할 일을 하셨겠는가? 여기서 ‘한탄하다’는 단어는 ‘긍휼이 여기다’ ‘권고하시다’ ‘마음을 편하게 하다’등의 의미를 가진 “나함”이란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고린도후서7:10절에 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했다. 죄악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근심은 침체되고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적이고 진취적이며 엄청난 변화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서곡인 것이다. 하나님의 근심하심은 사랑하는 자식이 죄와 사망의 길에서 돌이켜 의와 생명의 길로 돌아오기만을 안타깝게 기다리시는 어버이의 마음인 것이다. 사랑이 깊을수록 근심도 깊고 진노도 크듯이 하나님의 사랑도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이 큰 것이기에 근심이 컸던 것이다. 아울러 진노하심도 컸던 것이다. 하나님의 근심은 사랑의 아픔이었다.
•영감의 교훈 •
▶ 모든 사람이 죄인임
“순종을 조건으로 사람에게 약속된 불멸(不滅)은 범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바 되었다. 아담은 자신이 소유하지 못한 것을 그의 후손에게 전해 줄 수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의 희생으로 불멸을 그들의 손에 닿는 곳에 두지 아니하셨을 것 같으면 타락한 인류에게 소망이 없었을 것이다”(각 시대의 대쟁투, 533).
둘째 날(월) 8월 15일
타협의 죄
도입)
솔로몬이 지혜의 왕이라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만큼 자랑거리가 많고 은혜를 많이 받은 자이다. 부왕 다윗의 총애를 받고 태어나 세계에 내어 놓을 수 있는 아름다운 성전을 지었다. 그는 박학다식한 학문으로 잠언을 기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 왕은 미래는 어리석은 한낮 필부와 같이 전락하고 말았다.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솔로몬은 부친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솔로몬의 성공과 축복은 부친 다윗의 교훈을 따를 때에 이루어졌다. 그는 처음에는 그 교훈을 잘 따랐지만 나중에는 변질되고 말았다. 신명기에 명령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파괴한 것이다. 이에 대해 역사가들은 솔로몬이 탐욕의 죄를 범했기 때문이었다고 기술하기도 했다. 아내로 삼은 이방 여인이 그를 어리석은 자로 만들었다. 동방에서는 후궁이 강력한 통치자의 척도가 되었다. 이로 인하여 백성에게 중과세를 물리게 되고 노예 생활에 가까울 정도로 백성들의 생활을 고역으로 몰아갔으며, 그 결과 빈부의 격차는 무섭게 벌어졌다. 결과적으로 솔로몬의 ‘지혜’는 엄청난 어리석음으로 나타나고야 말았다. 그의 타락한 삶이 그 자신과 나라와 왕조를 어디로 끌고 가는지 볼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그는 영적인 복을 받고서 육적인 방법으로 어리석게 산 사람이다. 그는 특별한 관계에서 출생했고, 형들을 물리치고서 하나님의 은혜로 왕위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자기 본분을 망각하고 육적인 방법으로 전락한 모습이다. 영적인 방법, 즉 성령의 거룩한 인도하심에 따라서 살지 않고 육신의 본성을 따라서 움직이고 있었던 결과를 거둔 것이다.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따름같이 따르지 아니하고”(왕상 11:6).
교훈: 솔로몬은 타협의 정치를 추구했으나 그것은 그를 종교적 배도로 이끌었고, 이스라엘 전체에서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부가적용)
많은 사람들은 위험에 대하여 눈을 감고, 사단에 의해 얼이 빠지고 현혹당하여 그들 자신의 길로 나아가다가 결국은 그의 유혹에 굴복해 왔다. 그런 다음에 그들은 자포자기하고 절망에 빠진다. 이것이 솔로몬의 역사이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도움이 주어졌다. 그는 자신의 죄악된 생애를 진심으로 회개하여 도움을 얻었다. 어떤 사람도 후일에 회복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갖고 솔로몬처럼 감히 죄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 무한한 손실을 무릅쓰겠다고 한다면 죄를 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타락한 사람은 그가 어떤 사람이든지 간에 자포자기 하여 절망에 빠질 필요는 없다. …솔로몬이 고상한 재능들을 잘못 사용한 일은 모든 사람에게 경고가 되어야 한다. 선량함만이 참된 위대함이다. 모든 사람들은 선악간에 한 유산을 물려줄 것이다. 감람산의 남쪽 언덕에는 솔로몬의 배도를 기념하는 돌들이 잇다. … 패기만만한 젊은 개혁자인 요시야는 종교적 열성을 품고 아스다롯과 그모스와 몰록의 우상들을 타파했지만, 그 파쇄된 조각들과 폐허더미는 하나님의 성전이 서있었던 모리아산 건너편에 남아 있었다. 여러 세대 후에 외지인들이 “여호와의 성전 맞은 편에 있는 저 폐허는 무엇을 의미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들은 이런 답변을 들었다. “저 곳에는 솔로몬의 죄악의 산이 있지요. 그는 이방인 아내들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그 곳에 우상숭배용 단을 세웠지요.” (서신 8b, 1891)
•영감의 교훈 •
▶ 솔로몬의 치명적 과오
“솔로몬은 그의 지혜와 모본의 힘이 그의 아내들을 우상숭배에서 참하나님을 섬기도록 인도할 것이며 이렇게 체결된 동맹은 주위에 있는 열국들로 이스라엘과 긴밀한 접촉을 갖게 할 수 있다고 자만했다. 이 얼마나 헛된 희망인가! 자기 자신이 이교 동맹자들의 감화를 저항할 만큼 충분히 강하다고 생각한 솔로몬의 과오는 치명적이었다”(선지자와 왕, 54).
셋째 날(화) 8월 16일
거짓 예배
도입)
종교의 원조 짝퉁 브렌드 창시자는 여로보암이었다. 비슷하게 만들어다 놓고, 사람들 모아서 홍보해주고, 보다 나은 홍보를 위해서 제사장들도 자기 맘대로 임명하고....필요한 거짓예배의 모든 요건들은 다 갖추고 열심히 짝퉁 종교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거짓 종교를 팔았다. 이스라엘의 왕이 파는 것이니, 많은 백성들은 그 가르침에 맹종했을 것이고, 결국은 종말의 길로 열심히 달려간 것이다.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왕상 12:28).
1. 희생 제사를 드리며 비(非)레위인 제사장을 세웠다(31~33절).
2. 금송아지를 경배하게 했다(28절).
3. 벧엘에 제단을 만들었다(29절).
4. 단에 제단을 만들었다(29절).
5. 초막절에 버금가는 절기를 제정했다(32절).
6. 산 위에 산당을 세웠다(31절).
진짜처럼 보여야 위조지폐도 유통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거짓 예배에도 백성들에게 익숙한 요소들이 많이 포함되어야 함을 여로보암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다음 여로보암은 금송아지를 가리키며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고 선언하였다.
교훈: 거짓 예배는 참 예배와 많은 부분 유사하나 결정적인 면에 있어서 하나님의 명령에 어긋난다.
부가적용)
열왕기서에서는 여러 번 반복해서 등장하는 표현이 바로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였다”는 말이다. 요즘 말로 치자면, 거짓된 복음, 변질된 복음과 타협해서 살아가는 모습을 칭할 때 쓰는 말이다. 우리는 현대교회에서 횡횡하는 거짓복음이 무엇이며 변질된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여로보암은, 여호와예배를 완전히 폐지시킨 것이 아니다. 다만 비슷하게 바꾸었을 뿐이다.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고 하였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혼합시킨 예배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싫어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로보암은 아이 아비야는 죽을 것이라고 선포된다. 우리의 신앙이 혼합되고 변질되지 않기 위해서 항상 하나님의 말씀으로 점검받고 하나님과 교제해야 한다.
•영감의 교훈 •
▶ 거짓 예배의 결과
“여로보암의 통치 기간 중에 들어온 배도는 더욱 현저하게 되어 마침내 이스라엘 나라의 완전한 멸망을 초래하였다”(선지자와 왕, 107).
넷째 날(수) 8월 17일
엘리야와 바알의 선지자들
도입)
우리는 북이스라엘 아합왕의 시대에 있었던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 450명의 대결에 대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엘리야의 해피엔딩으로 끝난 그 사건에 대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저 '수천년전에 있었던 위대한 신앙적 승리'라고 생각하고만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성경의 많은 사건들은 그 시대만의 상황과 교훈을 말해주는 것 이상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성경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성경의 많은 사건들에는 인류의 역사 전시대를 거쳐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자가 담겨져 있다. 정말로 지혜로운 자는 과거의 사건들을 보면서 그것이 지금 이 시대에 어떻게 반복되고 있는지를 분별해야 하며 예비하고 있으라는 경고인 것이다(마24:44). 엘리야 시대에 있었던 바알 선지자와의 대결 사건도 역시 우리에게 동일한 역할을 하고 있다. 엘리야와 그를 둘러싼 바알선지자 450명의 대결, 그리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 제물을 태우는 장면과 바알 선지자들을 죽이는 장면들은, 흡사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최후의 전쟁과 하나님의 심판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계시록의 마지막 전쟁에서는 하나님을 따르는 성도들의 진과 그 진을 둘러싼 사단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의 대결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사단을 따르는 무리들을 소멸하게 될 것이다(계20:7-10).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명이로다”(왕상 18:22).
교훈: 바알의 예배와 참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진정한 예배는 오직 하나님께 초점을 맞춘다.
부가적용)
엄숙하고 경건하고 조용하고 감동적인 엘리야의 예배와 소란하고 흥분적이고 이성을 마비시키는 듯한 감정적인 바알의 예배는 현저한 대비가 되고 있다. 그리고 이 두 예배는 현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무엇이 참 예배이고 무엇이 거짓 예배인지에 대해 명확하게 알려주는 예가 된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만, 그러나 예배를 드리는 마음과 태도와 방식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만한 참 예배가 되든지, 아니면, 마치 바알 선지자들이 드렸던 이방신을 섬기던 것 같은 거짓 예배가 되든지 하는 것이다.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한다. 예배는 경건하고 엄숙하고 조용한 가운데, 진정으로 자신을 살피고 회개하는 심령으로, 또 하나님 앞에 온전히 자신을 낮추고, 바치며, 경배하는 가운데 드려야 한다. 예배는 성령 안에서, 올바른 진리 안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방식으로 드려야 할 것이며, 진리 안에서 이성적으로, 복음이 가르치는 바에 맞게, 참되고 경건한 예배를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예배를 기뻐 받으실 것이다.
•영감의 교훈 •
▶ 예배의 기초
“제칠일의 예배뿐 아니라 모든 예배의 진정한 기초는 창조주와 피조물을 구별하는 데서 나타나게 된다. 이 큰 진리는 결코 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잊어버려서도 안 된다”(각 시대의 대쟁투, 438).
•기도 •
아버지, 제가 예배할 때 하나님의 사랑에 잠기기 원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저의 굳은 마음이 부서지고 성령의 전
으로 다시 지어지기를 원합니다. 견딜 수 없는 말씀의 감동과 권위 앞에 굴복하기를 원합니다.
다섯째 날(목) 8월 18일
엘리야의 기별
도입)
어느 길로 가야 할지 선택하기에 어려움을 느껴본 적이 있다. 둘 중에 하나만을 선택해야 할 때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이냐는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특히 그 선택에 내 이익이나 손해가 달려있다고 한다면 더 어렵다. 어느 길을 선택하는 것이 옳은지는 알고 있는데, 그 선택의 결과가 나에게 심각한 손해와 어려움을 준다면 선택은 더욱 어려워진다. 나를 포기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면 더욱더 힘이 든다.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가? 왕과 왕비가 명령한 바알숭배를 거부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의 목숨을 내놓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섬기며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래서 말씀을 따라 순종하고는 싶지만, 즐거움과 이익, 나아가 자기의 생존마저 포기해야 하는 선택을 그리 쉽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원하시는 길, 옳은 길을 선택할 때 손해인 것 같으나 이익이 되게 하시고, 어려운 것 같으나 함께하시고 힘을 주셔서 승리하게 하신다. 나 혼자 힘으로 세상을 사노라면 힘들고 어렵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능히 감당할 수 있는 힘을 공급받게 됨을 믿고 순종의 길을 선택하자.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묻고 계신다. “어느 때까지 세상과 교회 사이에서, 어느 때까지 죄악과 하나님 사이에서, 욕심과 순종 사이에서 머뭇머뭇하겠느냐?” 어느 길을 선택하려는가? 하나님을 따라 그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떠난다는 것이다.
“그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말 3:18).
엘리야와 바알의 선지자들과의 대결은 그들과 함께 있었던 백성들에게 던진 이 질문으로 압축되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왕상 18:21). 성경은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과연 참하나님을 경배하며 따르는가? 그렇지 않은가? 어쩌면 우리는 정말 오랫동안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조만간 이편이든 저편이든 결정해야 할 것이다.
대쟁투가 끝나는 마지막 때에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말 3:18)로 영원히 나눠질 것이다. 예수께서는 분명하고 직설적으로 말씀하셨다.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눅 11:23).
엘리야의 갈멜산 이야기를 염두에 두고 말 3:16~4:6을 읽어 보라. 하나님은 여기서 무엇을 말하고 계신가? 예배의 문제에 있어서 종말의 사건 가운데 “엘리야의 기별”이란 무슨 의미인가?(계 14:7~12 참고).
예수께서 “엘리야”(마 17:11~13)라고 지목했던 침례 요한이 개혁, 회개, 굴복의 기별을 전하였던 것처럼 말라기는 세상 끝에 “엘리야”가 다시 나타날 것임을 밝혔다(말 4:1, 5). 계시록은 마지막 세대에게 경고의 기별과 순종하라는 부르심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께 경배하라는 초청의 기별을 선포하였다. 갈멜산에 있었던 백성들처럼 사람들은 아주 극적인 방식으로 영원한 결과를 가져올 가장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다. 다행인 것은 열방이 선악간에 결정적 투쟁을 펼치는 최후의 사건들이 일어나기 전에 우리는 매일의 선택을 통하여 주님의 편에 설 수 있도록 잘 준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교훈: 마지막 시대에 엘리야의 기별이 다시 한번 외쳐질 것이다. 우리는 선과 악 사이에, 참하나님과 거짓 신 사이에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
부가적용)
빨리 선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옳은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나에게 유익한 길을 선택하기보다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 넓고 편한 길보다는 좁고 험한 길이라고 해도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길을 믿음으로 선택하고 순종할 때,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깊은 기쁨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마 12: 30)”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자.
•영감의 교훈 •
▶ 선택해야 함
“주께서는 당신의 사업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에 무관심과 불충실을 미워하신다. 온 우주는 말할 수 없는 큰 관심을 가지고 선악 간에 대쟁투의 마지막 장면을 주목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원한 세계의 경계선에 접근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보다 그들에게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선지자와 왕, 148).
예비일(금) 8월 19일
비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선지자와 왕, 99~108 “여로보암”, 114~116 “국가적인 배도”, 119~128 “디셉 사람 엘리야”, 139~142 “단호한 견책의 음성”, 143~154 “갈멜.”
“오늘날에 성행하고 있는 배도는 선지자 엘리야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널리 퍼졌던 그것과 동일하다”(선지자와 왕, 170).
“하나님께서는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수많은 … 사람들을 가지고 계신다. 그리고 알지 못하고 바알을 예배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으며 이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아직도 애를 쓰고 계신다”(상동, 171).
“20세기의 유명한 설교자 A. W. 토저(Tozer)는 ‘유희의 신’에 바치는 경배를 거부한다는 내용으로 자주 설교하였다. 교회가 아무리 노력한다 할지라도 세상의 쇼를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이다. 토저는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은 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말했다.” - A. W. 토저, 예배인가? 쇼인가?, ed. Jame L. Snyder(Camp Hill, PN: Wing Spread Publishers, 1997),
108, 109.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그대가 속한 문화는 오늘날 도덕적 문제에 관하여 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➋성경은 바알 숭배가 대단히 유희적이었으며 대중적이었음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예배에 있어서 그러한 오락적 성격을 기대하도록 격려하기보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와 두려움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요?
➌재림교회의 예배는 지난 20년간 어떻게 변했습니까? 어떻게 좋아졌으며 또는 어떻게 나빠졌습니까? 20년 뒤에 재림교회의 예배가 어떻게 변화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8월 20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19분
도입)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간다.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자신의 일을 위해, 승진을 위해, 화합 때문에' 모두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면서 말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타협하는 순간, 빛의 빛 됨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생명력을 빼앗기는 것이다. 그 순간, 더 이상 소금이 아니다. 그때부터 세상의 노예로 전략한다.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릴 권세가 있음을 망각해 버린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빛을 잃고 짠맛을 잃은 그리스도인들은 타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마태복음 5장 13절)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세상을 변화시키고 세상에서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사는 일이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믿는다. 설령, 성경 지식에 통달하거나 복음을 전하는 데 열심이 있더라도, 삶이 타협으로 일관된다면 그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존재가 될 수 없다. 더불어, 온전한 안식일성수가 매우 중요하다. 적어도 양육 받은 제자들은, 안식일에 친척이나 형제들의 결혼식이 있어도 가지 않는다. 물론, 당사자에게 미리 설명하여 지혜롭게 양해를 구하도록 가르친다. 축의금도 두 배씩 많이 하라고 알려준다. 이렇게 해서, 관계가 깨진 사람은 아직까지 없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숭고한 신앙이다. 안식일 성수는 역사의 종말, 곧 그리스도께서 재림 하셔서 부활과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우리는 어쩌면, 이 땅에서 너무도 편하게 예수를 믿는지도 모른다. 어느 누구도 예수를 믿는다고, 생명의 위협을 당하거나 생계를 잃는 경우는 없다. 좋은 환경이 오히려 신앙을 편의주의에 물들게 만들고, 생명력 없는 신앙으로 좋은 몰아 갈수도 있다. 예수는 생명을 걸고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신앙의 타협이란 절대 있을 수 없다.
기억절 :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히 5:14).
결론: 우리의 의향과 하나님의 명백한 지시를 절충하려는 시도는 거짓 예배를 부릅니다. 엘리야의 기별은 우리에게 회개하고 순종하며 유일하신 참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첫째 날(일) 8월 14일
다른 관점
도입)
노아 시대에 사람들이 깊이 타락했다. 세상을 심판하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보실 때 세상이 악하다고 하면 정말 악한 것이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사람 지었음을 한탄하셨다’고 표현했다. 그래서 하나님도 마음에 근심하셨다고 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지 않으면 안될 정도의 죄악이 관영했다는 것이다. 하와가 유혹에 넘어갔듯이 인간들은 죄의 유혹에는 잘 넘어간다. 마치 사스가 구제역이 발병하면 아무리 단속을 해도 전염되듯이 죄가 바로 이렇게 전염된다. 그래서 세상에 죄악이 관영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온 세상에 다 퍼졌다는 것이다. 죄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교훈: 타락한 환경 속에서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살면 죄를 자연스럽게 여긴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이 죄악인지 성경을 통해 명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부가적용)
왜 인간들의 마음이 이렇게도 악한가? 그 이유는 로마서1:28절 말씀에 있다. 인간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시어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시기 때문이라고 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근심하고 한탄하셨다고 했다. 하나님이 한탄하셨다고 해서 인간의 마음처럼 후회하셨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님이 후회할 일을 하셨겠는가? 여기서 ‘한탄하다’는 단어는 ‘긍휼이 여기다’ ‘권고하시다’ ‘마음을 편하게 하다’등의 의미를 가진 “나함”이란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고린도후서7:10절에 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했다. 죄악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근심은 침체되고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적이고 진취적이며 엄청난 변화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서곡인 것이다. 하나님의 근심하심은 사랑하는 자식이 죄와 사망의 길에서 돌이켜 의와 생명의 길로 돌아오기만을 안타깝게 기다리시는 어버이의 마음인 것이다. 사랑이 깊을수록 근심도 깊고 진노도 크듯이 하나님의 사랑도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이 큰 것이기에 근심이 컸던 것이다. 아울러 진노하심도 컸던 것이다. 하나님의 근심은 사랑의 아픔이었다.
•영감의 교훈 •
▶ 모든 사람이 죄인임
“순종을 조건으로 사람에게 약속된 불멸(不滅)은 범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바 되었다. 아담은 자신이 소유하지 못한 것을 그의 후손에게 전해 줄 수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의 희생으로 불멸을 그들의 손에 닿는 곳에 두지 아니하셨을 것 같으면 타락한 인류에게 소망이 없었을 것이다”(각 시대의 대쟁투, 533).
둘째 날(월) 8월 15일
타협의 죄
도입)
솔로몬이 지혜의 왕이라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만큼 자랑거리가 많고 은혜를 많이 받은 자이다. 부왕 다윗의 총애를 받고 태어나 세계에 내어 놓을 수 있는 아름다운 성전을 지었다. 그는 박학다식한 학문으로 잠언을 기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 왕은 미래는 어리석은 한낮 필부와 같이 전락하고 말았다.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솔로몬은 부친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솔로몬의 성공과 축복은 부친 다윗의 교훈을 따를 때에 이루어졌다. 그는 처음에는 그 교훈을 잘 따랐지만 나중에는 변질되고 말았다. 신명기에 명령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파괴한 것이다. 이에 대해 역사가들은 솔로몬이 탐욕의 죄를 범했기 때문이었다고 기술하기도 했다. 아내로 삼은 이방 여인이 그를 어리석은 자로 만들었다. 동방에서는 후궁이 강력한 통치자의 척도가 되었다. 이로 인하여 백성에게 중과세를 물리게 되고 노예 생활에 가까울 정도로 백성들의 생활을 고역으로 몰아갔으며, 그 결과 빈부의 격차는 무섭게 벌어졌다. 결과적으로 솔로몬의 ‘지혜’는 엄청난 어리석음으로 나타나고야 말았다. 그의 타락한 삶이 그 자신과 나라와 왕조를 어디로 끌고 가는지 볼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그는 영적인 복을 받고서 육적인 방법으로 어리석게 산 사람이다. 그는 특별한 관계에서 출생했고, 형들을 물리치고서 하나님의 은혜로 왕위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자기 본분을 망각하고 육적인 방법으로 전락한 모습이다. 영적인 방법, 즉 성령의 거룩한 인도하심에 따라서 살지 않고 육신의 본성을 따라서 움직이고 있었던 결과를 거둔 것이다.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따름같이 따르지 아니하고”(왕상 11:6).
교훈: 솔로몬은 타협의 정치를 추구했으나 그것은 그를 종교적 배도로 이끌었고, 이스라엘 전체에서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부가적용)
많은 사람들은 위험에 대하여 눈을 감고, 사단에 의해 얼이 빠지고 현혹당하여 그들 자신의 길로 나아가다가 결국은 그의 유혹에 굴복해 왔다. 그런 다음에 그들은 자포자기하고 절망에 빠진다. 이것이 솔로몬의 역사이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도움이 주어졌다. 그는 자신의 죄악된 생애를 진심으로 회개하여 도움을 얻었다. 어떤 사람도 후일에 회복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갖고 솔로몬처럼 감히 죄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 무한한 손실을 무릅쓰겠다고 한다면 죄를 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타락한 사람은 그가 어떤 사람이든지 간에 자포자기 하여 절망에 빠질 필요는 없다. …솔로몬이 고상한 재능들을 잘못 사용한 일은 모든 사람에게 경고가 되어야 한다. 선량함만이 참된 위대함이다. 모든 사람들은 선악간에 한 유산을 물려줄 것이다. 감람산의 남쪽 언덕에는 솔로몬의 배도를 기념하는 돌들이 잇다. … 패기만만한 젊은 개혁자인 요시야는 종교적 열성을 품고 아스다롯과 그모스와 몰록의 우상들을 타파했지만, 그 파쇄된 조각들과 폐허더미는 하나님의 성전이 서있었던 모리아산 건너편에 남아 있었다. 여러 세대 후에 외지인들이 “여호와의 성전 맞은 편에 있는 저 폐허는 무엇을 의미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들은 이런 답변을 들었다. “저 곳에는 솔로몬의 죄악의 산이 있지요. 그는 이방인 아내들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그 곳에 우상숭배용 단을 세웠지요.” (서신 8b, 1891)
•영감의 교훈 •
▶ 솔로몬의 치명적 과오
“솔로몬은 그의 지혜와 모본의 힘이 그의 아내들을 우상숭배에서 참하나님을 섬기도록 인도할 것이며 이렇게 체결된 동맹은 주위에 있는 열국들로 이스라엘과 긴밀한 접촉을 갖게 할 수 있다고 자만했다. 이 얼마나 헛된 희망인가! 자기 자신이 이교 동맹자들의 감화를 저항할 만큼 충분히 강하다고 생각한 솔로몬의 과오는 치명적이었다”(선지자와 왕, 54).
셋째 날(화) 8월 16일
거짓 예배
도입)
종교의 원조 짝퉁 브렌드 창시자는 여로보암이었다. 비슷하게 만들어다 놓고, 사람들 모아서 홍보해주고, 보다 나은 홍보를 위해서 제사장들도 자기 맘대로 임명하고....필요한 거짓예배의 모든 요건들은 다 갖추고 열심히 짝퉁 종교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거짓 종교를 팔았다. 이스라엘의 왕이 파는 것이니, 많은 백성들은 그 가르침에 맹종했을 것이고, 결국은 종말의 길로 열심히 달려간 것이다.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왕상 12:28).
1. 희생 제사를 드리며 비(非)레위인 제사장을 세웠다(31~33절).
2. 금송아지를 경배하게 했다(28절).
3. 벧엘에 제단을 만들었다(29절).
4. 단에 제단을 만들었다(29절).
5. 초막절에 버금가는 절기를 제정했다(32절).
6. 산 위에 산당을 세웠다(31절).
진짜처럼 보여야 위조지폐도 유통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거짓 예배에도 백성들에게 익숙한 요소들이 많이 포함되어야 함을 여로보암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다음 여로보암은 금송아지를 가리키며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고 선언하였다.
교훈: 거짓 예배는 참 예배와 많은 부분 유사하나 결정적인 면에 있어서 하나님의 명령에 어긋난다.
부가적용)
열왕기서에서는 여러 번 반복해서 등장하는 표현이 바로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였다”는 말이다. 요즘 말로 치자면, 거짓된 복음, 변질된 복음과 타협해서 살아가는 모습을 칭할 때 쓰는 말이다. 우리는 현대교회에서 횡횡하는 거짓복음이 무엇이며 변질된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여로보암은, 여호와예배를 완전히 폐지시킨 것이 아니다. 다만 비슷하게 바꾸었을 뿐이다.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고 하였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혼합시킨 예배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싫어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로보암은 아이 아비야는 죽을 것이라고 선포된다. 우리의 신앙이 혼합되고 변질되지 않기 위해서 항상 하나님의 말씀으로 점검받고 하나님과 교제해야 한다.
•영감의 교훈 •
▶ 거짓 예배의 결과
“여로보암의 통치 기간 중에 들어온 배도는 더욱 현저하게 되어 마침내 이스라엘 나라의 완전한 멸망을 초래하였다”(선지자와 왕, 107).
넷째 날(수) 8월 17일
엘리야와 바알의 선지자들
도입)
우리는 북이스라엘 아합왕의 시대에 있었던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 450명의 대결에 대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엘리야의 해피엔딩으로 끝난 그 사건에 대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저 '수천년전에 있었던 위대한 신앙적 승리'라고 생각하고만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성경의 많은 사건들은 그 시대만의 상황과 교훈을 말해주는 것 이상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성경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성경의 많은 사건들에는 인류의 역사 전시대를 거쳐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자가 담겨져 있다. 정말로 지혜로운 자는 과거의 사건들을 보면서 그것이 지금 이 시대에 어떻게 반복되고 있는지를 분별해야 하며 예비하고 있으라는 경고인 것이다(마24:44). 엘리야 시대에 있었던 바알 선지자와의 대결 사건도 역시 우리에게 동일한 역할을 하고 있다. 엘리야와 그를 둘러싼 바알선지자 450명의 대결, 그리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 제물을 태우는 장면과 바알 선지자들을 죽이는 장면들은, 흡사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최후의 전쟁과 하나님의 심판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계시록의 마지막 전쟁에서는 하나님을 따르는 성도들의 진과 그 진을 둘러싼 사단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의 대결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사단을 따르는 무리들을 소멸하게 될 것이다(계20:7-10).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명이로다”(왕상 18:22).
교훈: 바알의 예배와 참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진정한 예배는 오직 하나님께 초점을 맞춘다.
부가적용)
엄숙하고 경건하고 조용하고 감동적인 엘리야의 예배와 소란하고 흥분적이고 이성을 마비시키는 듯한 감정적인 바알의 예배는 현저한 대비가 되고 있다. 그리고 이 두 예배는 현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무엇이 참 예배이고 무엇이 거짓 예배인지에 대해 명확하게 알려주는 예가 된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만, 그러나 예배를 드리는 마음과 태도와 방식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만한 참 예배가 되든지, 아니면, 마치 바알 선지자들이 드렸던 이방신을 섬기던 것 같은 거짓 예배가 되든지 하는 것이다.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한다. 예배는 경건하고 엄숙하고 조용한 가운데, 진정으로 자신을 살피고 회개하는 심령으로, 또 하나님 앞에 온전히 자신을 낮추고, 바치며, 경배하는 가운데 드려야 한다. 예배는 성령 안에서, 올바른 진리 안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방식으로 드려야 할 것이며, 진리 안에서 이성적으로, 복음이 가르치는 바에 맞게, 참되고 경건한 예배를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예배를 기뻐 받으실 것이다.
•영감의 교훈 •
▶ 예배의 기초
“제칠일의 예배뿐 아니라 모든 예배의 진정한 기초는 창조주와 피조물을 구별하는 데서 나타나게 된다. 이 큰 진리는 결코 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잊어버려서도 안 된다”(각 시대의 대쟁투, 438).
•기도 •
아버지, 제가 예배할 때 하나님의 사랑에 잠기기 원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저의 굳은 마음이 부서지고 성령의 전
으로 다시 지어지기를 원합니다. 견딜 수 없는 말씀의 감동과 권위 앞에 굴복하기를 원합니다.
다섯째 날(목) 8월 18일
엘리야의 기별
도입)
어느 길로 가야 할지 선택하기에 어려움을 느껴본 적이 있다. 둘 중에 하나만을 선택해야 할 때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이냐는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특히 그 선택에 내 이익이나 손해가 달려있다고 한다면 더 어렵다. 어느 길을 선택하는 것이 옳은지는 알고 있는데, 그 선택의 결과가 나에게 심각한 손해와 어려움을 준다면 선택은 더욱 어려워진다. 나를 포기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면 더욱더 힘이 든다.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가? 왕과 왕비가 명령한 바알숭배를 거부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의 목숨을 내놓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섬기며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래서 말씀을 따라 순종하고는 싶지만, 즐거움과 이익, 나아가 자기의 생존마저 포기해야 하는 선택을 그리 쉽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원하시는 길, 옳은 길을 선택할 때 손해인 것 같으나 이익이 되게 하시고, 어려운 것 같으나 함께하시고 힘을 주셔서 승리하게 하신다. 나 혼자 힘으로 세상을 사노라면 힘들고 어렵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능히 감당할 수 있는 힘을 공급받게 됨을 믿고 순종의 길을 선택하자.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묻고 계신다. “어느 때까지 세상과 교회 사이에서, 어느 때까지 죄악과 하나님 사이에서, 욕심과 순종 사이에서 머뭇머뭇하겠느냐?” 어느 길을 선택하려는가? 하나님을 따라 그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떠난다는 것이다.
“그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말 3:18).
엘리야와 바알의 선지자들과의 대결은 그들과 함께 있었던 백성들에게 던진 이 질문으로 압축되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왕상 18:21). 성경은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과연 참하나님을 경배하며 따르는가? 그렇지 않은가? 어쩌면 우리는 정말 오랫동안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조만간 이편이든 저편이든 결정해야 할 것이다.
대쟁투가 끝나는 마지막 때에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말 3:18)로 영원히 나눠질 것이다. 예수께서는 분명하고 직설적으로 말씀하셨다.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눅 11:23).
엘리야의 갈멜산 이야기를 염두에 두고 말 3:16~4:6을 읽어 보라. 하나님은 여기서 무엇을 말하고 계신가? 예배의 문제에 있어서 종말의 사건 가운데 “엘리야의 기별”이란 무슨 의미인가?(계 14:7~12 참고).
예수께서 “엘리야”(마 17:11~13)라고 지목했던 침례 요한이 개혁, 회개, 굴복의 기별을 전하였던 것처럼 말라기는 세상 끝에 “엘리야”가 다시 나타날 것임을 밝혔다(말 4:1, 5). 계시록은 마지막 세대에게 경고의 기별과 순종하라는 부르심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께 경배하라는 초청의 기별을 선포하였다. 갈멜산에 있었던 백성들처럼 사람들은 아주 극적인 방식으로 영원한 결과를 가져올 가장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다. 다행인 것은 열방이 선악간에 결정적 투쟁을 펼치는 최후의 사건들이 일어나기 전에 우리는 매일의 선택을 통하여 주님의 편에 설 수 있도록 잘 준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교훈: 마지막 시대에 엘리야의 기별이 다시 한번 외쳐질 것이다. 우리는 선과 악 사이에, 참하나님과 거짓 신 사이에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
부가적용)
빨리 선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옳은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나에게 유익한 길을 선택하기보다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 넓고 편한 길보다는 좁고 험한 길이라고 해도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길을 믿음으로 선택하고 순종할 때,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깊은 기쁨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마 12: 30)”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자.
•영감의 교훈 •
▶ 선택해야 함
“주께서는 당신의 사업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에 무관심과 불충실을 미워하신다. 온 우주는 말할 수 없는 큰 관심을 가지고 선악 간에 대쟁투의 마지막 장면을 주목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원한 세계의 경계선에 접근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보다 그들에게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선지자와 왕, 148).
예비일(금) 8월 19일
비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선지자와 왕, 99~108 “여로보암”, 114~116 “국가적인 배도”, 119~128 “디셉 사람 엘리야”, 139~142 “단호한 견책의 음성”, 143~154 “갈멜.”
“오늘날에 성행하고 있는 배도는 선지자 엘리야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널리 퍼졌던 그것과 동일하다”(선지자와 왕, 170).
“하나님께서는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수많은 … 사람들을 가지고 계신다. 그리고 알지 못하고 바알을 예배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으며 이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아직도 애를 쓰고 계신다”(상동, 171).
“20세기의 유명한 설교자 A. W. 토저(Tozer)는 ‘유희의 신’에 바치는 경배를 거부한다는 내용으로 자주 설교하였다. 교회가 아무리 노력한다 할지라도 세상의 쇼를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이다. 토저는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은 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말했다.” - A. W. 토저, 예배인가? 쇼인가?, ed. Jame L. Snyder(Camp Hill, PN: Wing Spread Publishers, 1997),
108, 109.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그대가 속한 문화는 오늘날 도덕적 문제에 관하여 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➋성경은 바알 숭배가 대단히 유희적이었으며 대중적이었음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예배에 있어서 그러한 오락적 성격을 기대하도록 격려하기보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와 두려움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요?
➌재림교회의 예배는 지난 20년간 어떻게 변했습니까? 어떻게 좋아졌으며 또는 어떻게 나빠졌습니까? 20년 뒤에 재림교회의 예배가 어떻게 변화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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