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과 타성, 양보, 위기(하나님 품성 중심의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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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 과 타성, 양보,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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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절: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히5:14)
첫째 날(일) 다른 관점
인간의 심성이 기만적이고, 부패하였고 죄에 대하여 면역성을 가진 사람이 없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짐으로 인해 발생한 부작용들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선택을 한 이유는 사단의 거짓말에 속아 하나님의 품성에 대해서 오해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창3:4-5)
사람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의 본질이 무(無)임을 밝히셨고 무인 사람을 흙덩이로 빚어 사람이 되게 하셨으며 흙덩이인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생령 즉, 살아있는 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창2:7)
흙의 성질은 티끌로서 흩어지려고 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그냥 두면 흩어질 수밖에 없는 사람의 한계를 하나님의 생명에너지로 흩어지려고 하는 성질보다 더 큰 힘으로 흩어지지 않게 붙들고 계심으로 사람이 이 모습의 형태를 지속하게 된 것입니다.(욥38:37-38)
뿐만 아니라 생기(호흡)을 지속적으로 공급하셔야만 사람이 지속적으로 살아있는 존재가 됨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속적으로 살게 하기 위해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121:4)시는 분이실 수밖에 없습니다.
창조하신 하나님의 주시는 생명에너지와 사랑에너지를 통해서만 사람은 존재할 수밖에 없는 절대적 관계 속에 있는 사이가 되었습니다.(행17:25)
사람의 존재와 생명에 절대적인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여 절대적 관계를 선택하면 생명의 공급에 따라 지속되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창조주 되심을 의심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버리는 선택을 하게 되면 강제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품성에 의하여 그 선택을 인정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사람의 본질인 흙 더 정확히 말하면 티끌(무(無))로 돌아가 버리게 됩니다.
그것을 “죽는다”(창2:17)라고 표현했고 죽는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입니다.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는 말씀을 “네가 먹는 날에는 (하나님이) 정녕 죽이리라”고 읽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선택의 자유를 주셨는데 그 선택의 자유대로 선택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벌을 주셔서 죽이신다는 것은 논리의 모순이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거절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면 그 결과로 인해 사람의 본질인 창조전의 상태로 갈 수밖에 없음을 미리 말씀하셔서 사람의 본질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산다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사랑으로서만 이어질 수 있는 관계입니다.
사랑의 관계는 신뢰를 바탕으로만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사단은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거짓말쟁이처럼 사람을 속인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어도 절대 안 죽는다”(창3:4)고 거짓말함으로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는 분으로 인식하도록 하였습니다.
사람이 사단의 거짓말을 믿게 되자 하나님과의 관계는 끊어졌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자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어주는 선악과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도 받아들일 필요가 없게 되어 선악과를 먹게 된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행위가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이 죄(사망)이고 죄(사망)이 되었으므로 죄들(사망의 일들)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은 사단의 거짓말을 믿었으며 하나님의 품성을 그릇되게 나타내는 사단의 유혹에 넘어감으로 아담의 생애는 변화 되었고 망쳐진바 되었다"(1 기별. 345).
사단은 하나님의 품성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여 아담을 속였습니다 (창3:5) 아담이 이 사단의 거짓말을 믿는 순간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하게 되고 마음속에 이미 하나님과 분리되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자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명하신 그 열매를 따 먹는 불순종이 시작 되게 된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거절한 순간 아담 속에서 태어날 모든 인류도 그때 함께 하나님을 거절했고 함께 죽었습니다.(고전15:22)
그 결과 사람들은 나면서부터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하게 되었고 하나님과 반대편에 서게 되었습니다.(롬8:6-8)
죄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하여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하는 것이 죄라면 죄의 용서에 대한 정의도 달라져야 합니다.
죄의 용서란 하나님의 품성을 깨닫게 되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이고 관계의 문제는 품성의 문제입니다.
둘째 날(월) 타협의 죄
솔로몬이 이방나라와 동맹을 맺고 이방 나라의 공주와 결혼한 것은 두 가지의 착각
때문이었습니다.
첫째는 사람의 본성에 대한 착각이었고
둘째는 자신의 신앙에 대한 착각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하나님을 영접한 사람도 역시 하나님을 싫어하는 본성이 여전히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접하지 아니한 사람과 결혼을 통해서 살게 되면 하나님을 영접한 사람의 감화보다 하나님을 영접하지 아니한 사람의 감화가 훨씬 더 클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 부족과 자신의 신앙에 대한 과신이 타협의 길로 들어서서 이교 동맹을 맺게 되었고 그 결과 솔로몬은 하나님을 떠나서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솔로몬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서 이스라엘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심각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진리와 원칙에 대한 부분을 조금 양보하게 되면 타협으로 인해 더 큰 어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셋째 날(화) 거짓 예배
거짓 예배를 통해 여로보암과 북방이스라엘은 신속히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거짓 예배의 특징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다른 하나님”(고후11:4)을 예배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예배의 특징은 창조주 하나님의 품성이 드러나는 예배였습니다.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의 선택에 대한 결과에 대하여 책임지시는 분으로서 양처럼 대속하여 돌아가시는 분임을 보여주는 예배였습니다.
하나님의 희생을 보여주는 예배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사람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품성을 보게 하고 그 사랑의 품성을 확신함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선택하게 합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이 만든 거짓 예배는 그 예배를 받으시는 신의 품성이 다른 예배였습니다.
금송아지의 형상의 신은 창조주가 아니기에 대속하여 돌아가시는 신이 아니었고, 송아지처럼 힘이 세고 금송아지처럼 화려한 신으로서 사람들이 복을 받으려면 금송아지 앞에서 많은 제물을 바쳐야만 하는 신이었습니다.
상대적 개념의 신이었습니다.
품성이 다른 신의 도입으로 인해 거짓 예배가 되었고 거짓 예배로 인해 북방 이스라엘 전 국민들에게 악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의 품성은 창조주 하나님의 품성인지 아니면 다른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넷째 날(수) 엘리야와 바알의 선지자들
바알의 선지자들이 믿는 신은 상대적 관계에 있는 신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정성과 행위에 따라 달리 반응하는 신이었습니다.
바알신은 사람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큰 소리로 부르짖고 사람의 몸을 칼로 긋고 하는 극단적인 행위의 크기와 강도에 따라서 달리 반응하는 상대적 관계 속에 있는 신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알을 믿는 선지자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중요했습니다.
사람의 행위에 따라 상과 벌을 주는 신이었으므로 열심과 열정과 경건과 많은 제물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바알은 사람들의 극진한 행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에서 불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바알신은 사람들이 만든 신일뿐 스스로 존재하는 신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면에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들과 절대적 관계에 있는 신이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의하여 사람이 창조되고 태어난 것이므로 창조주 하나님은 사람들의 존재와 생명에 절대적인 연결 속에 있으시고 사람들의 존재와 생명을 위해 창조주께서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셔야만 했습니다.(행17:25)
하나님께 잘하고 정성을 다 바치는 사람에게만 구별해서 주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절하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똑같이 햇빛과 비를 주시는 분이셔야만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들은 이해관계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먼저 시작된 절대적 관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갈멜산에서의 엘리야의 기도는 바알의 선지자들처럼 애걸복걸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현재의 상황을 엘리야보다도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면 되는 문제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바알과 여호와 하나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백성들을 위해 여호와 하나님의 품성대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시기 위해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제물을 태움으로 우주를 다스리시고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기 원하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임을 보여주셨습니다.
다섯째 날(목) 엘리야의 기별
어떤 하나님을 선택할 것인가의 기별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사랑의 품성을 가지신 분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사람이 만든 신으로서 상대적 개념의 품성을 가진 신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기별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보게 될 때 창조주 하나님의 품성을 깨닫게 되고 그 품성을 볼 때에 그 사랑에 확신하여 내가 하나님과 절대적 관계 속에서 연결됨으로서만 살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게 되고 나를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버리시는 사랑을 확신할 때에 하나님께 내 자신을 맡기고 신뢰하게 됩니다.
이 시대의 마지막 기별은 하나님의 품성을 이 세상에 보여주는 기별입니다.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하여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자비의 기별, 마지막 긍휼의 기별인 하나님의 품성을 드러내서 사람들이 생명의 빛을 발견하고 생명의 빛으로 나아오게 하는 기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여호와 하나님의 품성을 알아야 합니다.
빛을 봐야 빛을 간직하고 빛을 전할 수 있습니다.(사60:1)
예비 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토저는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은 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말했다.”(교과 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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