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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과 시편 속에 나타난 예배(하나님 품성 중심의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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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과 시편 속에 나타난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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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절:“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84:1-2)

 

 

첫째 날(일) 우리를 만드신 여호와께 경배하라

 

예배와 경배의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의 품성 때문입니다.

창조자와 구속자가 되시는 이유도 하나님의 품성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품성은 주시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나누어 주시기 위해 창조자가 되셨고 주시는 사랑을 거절하여 창조전의 상태(무)가 되었을 때 다시 사랑을 나누어 주시기 위해 구속자가 되셨습니다.

창조와 구속을 위해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시고 생명을 바쳐야 됨에도 불구하고 사랑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기꺼이 자신의 품성대로 기꺼이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품성을 보게 될 때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고 즐겨 예배하게 됩니다.

 

 

둘째 날(월) 성소로부터 오는 심판

 

심판에 관한 문제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행한 대로 심판하셔서 보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착하게 산 사람들은 복을 주시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악하게 산 사람들에게는 벌을 주셔서 징벌하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이 한층 더 나아가 영원지옥설 까지 대두되었습니다.

 

교과의 저자도 “오히려 그분의 심판이 최고의 인간 법정에서도 실현 할 수 없는 공의를 성취할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아벨의 피로부터 시작해서 타락한 인간 역사의 마지막 날까지 이 세상의 범죄와 불공정, 불평 등의 피해자들이 정의에 호소할 것이다. 다행히도 지금은 우리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분의 때에 그분의 방법으로 모든 것을 바로잡으시리라 확신한다.”(교과. 96쪽)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교과 저자의 생각은 하나님의 공의로 세상 시초부터 시말까지의 모든 불공정, 불평 등이 바로 잡아져서 잘한 사람은 상을 받고 잘못한 사람을 거기에 상응하는 보응을 받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가 아니라 저자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공의입니다.

상대적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정의는 상대적 개념의 공의일 수밖에 없습니다.

즉 나에게 잘한 사람은 잘해주고 나에게 못한 사람에게는 받은 만큼 잘 못 대해주는 것이 공의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글로만 보면 성경 말씀 속에서도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출21:24-25)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마5:43)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느니라”(롬12:19)

 

이런 구절들은 글로만 보면 하나님께서도 사람들처럼 상대적 개념의 사랑을 하시는 분처럼 오해할 수 있는 구절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딤후3:16) 성경에는 사실적인 표현도 있고 하나님의 품성 속에서 나오는 표현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역대상10장에는 사실적인 표현과 하나님의 품성적인 표현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대상10:4-5에서는 사울이 자살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고, 대상10:13-14에서는 하나님께서 사울을 죽이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같은 사건에 대하여 같은 장에서 상반된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어서 독자로 하여금 혼란 속에 빠질 수 있는 상황이 되고 있습니다.

글로만 보면 반드시 한쪽은 틀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글들이 성경에는 무수히 나옵니다.

 

그런데 성경은 모순처럼 보이는 전혀 다른 반대의 기록을 거침없이 기록으로 남기고 있고 글로만 보면 모순일 수밖에 없는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모순이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사실적인 기록으로 남겨서 그 사건의 사실이 무엇인지를 전달하고 있고, 한편으로는 그 사실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품성 속에서 기록을 남기도록 하셨습니다.

 

역대상의 경우 사울이 자살한 것이 사실입니다.

사울의 선택으로 인해 사울이 자살 한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울의 선택으로 인한 사울의 자살을 사실적인 기록만 남기길 원치 않으셨습니다.

사울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자살한 것을 하나님께서 사울을 창조하시고 사울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창조주의 입장에서 그의 선택의 결과에 대하여 최종적인 책임지는 사랑을 가지신 분의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죽이신 것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이셨다는 기록은 사실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사울의 선택에 대한 모든 책임을 사울을 창조하신 하나님 자신에게 돌리시는 사랑의 표현법입니다.

이런 성경의 모순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글로 보면 모순이지만 하나님의 품성으로 보면 당연한 표현법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어떤 문제에 대하여 분명한 생명적 말씀을 하고 싶으셔도 그 말씀을 듣고 행해야 하는 사람들의 완악함 때문에 사람의 한계 속에서 제한적으로 말씀하시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의 표현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빠뜨린 사람을 용서해 주시고 서로 생명적 관계를 유지하길 원하시는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완악함이 이를 하나 빠뜨린 사람에 대하여 상대방의 이를 두, 세 개를 빠뜨려야 공정하다고 생각함으로 두, 세 개 빠뜨림으로 일이 계속 더 커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용서해 주는 것이 제일 좋지만 사람들의 완악함도 생각하셔서 상대방의 이를 빠뜨리려면 제발 너도 똑같이 한개만 빠뜨렸으면 좋겠다는 의도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심판도 하나님의 품성 속에서 이해해야 정확합니다.

처음부터 자유의지를 인간에게 주심으로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로 하나님의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생명의 관계가 되는 것이므로 자유의지를 주실 수밖에 없으셨다면 자유의지대로 선택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벌을 주시거나 분노하신다면 그것이야말로 모순입니다.

 

하나님은 창조 전에 이미 하나님의 품성대로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기로 하신 것이고 사람에게 주신 자유의지의 결과에 대하여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선택에 대신하여 책임지시기로 결심하시고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 결심은 “창조 전에 죽임을 당한 어린양”(계13:8)으로서 보여졌습니다.

 

그렇다면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심판이라면 분명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상대적 개념의 심판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란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행한대로 상이든지 혹은 벌을 주는 것이 아닌 사람들이 행한 대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시점에서 사람들의 선택을 인정하는 것을 심판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의 선택의 결과 하나님을 거절할 때 생명과 단절되는 결과가 되고, 사람들의 선택의 결과 하나님을 받아들일 때 생명과 연결되는 결과가 됩니다.

사람들의 선택이 더 이상의 변동이 없을 때 그 선택의 결과대로 이루어질 때를 강제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품성대로 그 선택을 인정할 때 하나님은 사람의 선택에 대한 책임지시는 표현법으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으로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성소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선택의 결과를 책임지심에 따라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시겠다는 것을 보여주는 곳입니다.

 

사람을 위해 대신 죽으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품성을 보고 받아들이면 하나님과 생명으로 연결되지만 끝끝내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굳어지게 되면 하나님과 상관없이 되고 그것은 생명의 단절로 인해 영원히 창조전의 상태인 무로 돌아가 버립니다.

 

하나님의 공의란 하나님의 품성대로 하실 때를 일컫는 말입니다.

하나님다운 행위를 하실 때 하나님께서 공의롭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거나 벌을 주실 때가 아니라 사람의 행위에 대해 창조주로서 당연한 사랑으로 대속하실 때 공의롭다고 합니다.(단9:16)

 

사람들의 선택과 행위에 대하여 사람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으로 대속하시는 사랑을 보여주는 성소를 볼 때에 하나님의 공의를 보게 됩니다.

사람의 행위에 대해 상대적으로 벌주시거나 상주시는 분이 아니라 창조주의 책임지시는 사랑으로 자신의 생명으로 대속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성소에서 보게 될 때 찬양과 예배를 하게 됩니다.

 

 

 

셋째 날(화)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사람의 존귀함은 사람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 있습니다.

그 순간이 먼지에서부터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은 존귀한 존재가 되는 순간입니다.

물질적인 풍요를 의지하고 물질적인 가치를 위해 사는 사람은 존귀를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 사람의 가치는 실현되지 않습니다.

사람의 존귀와 가치가 창조하신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생명의 관계가 있는 예배를 하게 됩니다.

 

 

 

넷째 날(수) 예배와 성소

 

“구약의 모든 성소 봉사의 중심에는 희생의 개념이 자리를 잡고 있다. ....구약의 희생제도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예수님의 죽음을 가리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희생제도는 우리의 노력이 우리를 구원하기에 무력함을 보여 주어야 했다. 그것은 죄의 대가로 무죄한 자의 생명이 바쳐졌음을 보여 주어야 했다.”(교과 100쪽)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을 포함하여 그의 청중들에게 지상의 제도에서 눈을 돌려 그들의 관심과 예배를 예수께 집중시키라고 말했다. 그들은 상징에서 실체로 눈을 돌려 속죄의 죽음 이후 하늘성소에서 봉사하시는 예수님을 봐야 했다.”(교과 100쪽)

 

 

다섯 째날(목) 우리가 잊지 않도록!

 

“역사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모든 세대는 그러한 역사를 기초로 하여서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과거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직하기 위해서는 예배에 있어서 음악뿐 아니라 말씀의 선포가 구세대와 신세대 모두에게 중요한 것이다.”(교과 102쪽)

 

“예배에 있어서 말씀 선포는 예배의 아주 중요한 요소로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역사를 기억하게 하며 우리에게 의로운 삶을 교육시키는 기초가 된다”(교과 102쪽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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