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과 여호와 앞에서 기뻐함: 성소와 예배(7월 23일 안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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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과 여호와 앞에서 기뻐함: 성소와 예배(7월 23일 안식일)
“너희와 너희 자녀와 노비와 함께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요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도 그리할지니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음이니라”(신 12:12).
대상 29:22
“이 날에 무리가 크게 기뻐하여 여호와 앞에서 먹으며 마셨더라”
인생에 있어서 무엇이 제일 기쁠까?
인생에 있어서 무엇이 제일 슬플까?
그것 둘 다 먹는 것과 입은 것과 사는 것에 관련되어있다
남들 먹을 때 못 먹으면 슬프고 남들 입을 때 벗으면 슬프고
남들 사는 집 있는데 나만 천막 생활하면 슬프다
며칠 전 텐트를 메는 줄이 늘어져서 고치려 갔더니
10년 전에 그 회사는 텐트 만드는 것을 중지했다고 한다
산과 바닷가에 널린 게 펜션인데 요즘 누가 텐트치고 야영하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텐트를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프로들이라서 한 가족 텐트 장비가 500여만원 가는 것 보통이란다
펜션을 가도 남의 눈치를 봐야 하고
텐트를 쳐도 고급 장비가 아니면 그들과 어울리지 못한다
그게 현대인들의 장막절 형태이다
먹는 것도 그렇다
사람이 여호와 앞에서 먹을 때는 어떠했을까?
좀 겸손하고 술도 적게 마시고 그랬지 않을까?
저들 끼리 먹고 마실 때는 적당히 했을지라도 여호와 앞에서는 겁도 나고
이것 먹으면 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안했을까?
사람이 즐긴다는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즐거움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지 못하면 유희에 불과하고 놀음에 불과하고 인간적 이기심이 포함된다
이스라엘이 여호와 앞에 자주 섰다
전쟁을 할 때도 여호와 앞에서 싸웠고
어떤 때는 여호와가 앞서서 싸워 주셨다
그래서 여호와 앞은 언제나 신성한 곳이었고
그들 신앙의 표준이었다
대하 34:31
“왕이 자기 처소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이루리라 하고“
히스기아 므낫세 암몬 요시아로 이어지는 남방 유다의 왕가는
위대한 왕 히스기아의 아들 므낫세의 잘못으로 타락에 빠진다
12세에 왕이 된 므낫세는 그 아버지 히스기아가 헐어버린 산당을 다시 세운다
12세에 왕이 되었다
어린 아들을 아마 그 어미가 휘어잡았거나 신료들이 신앙의 길을 잘못 가르쳤을 것이다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고 하늘의 별들을 섬기며
그 아비의 길을 역행했는데 무려 55년을 임금 노릇했다
그 아비 히스기아는 25세에 왕이 되어 29년간 치리했는데
그는 12세에 왕이 되어 55년을 치리했으니 나라꼴이 뭐가 되었을까?
온 산에는 산당이 즐비하고 제사지내는 향불 냄새는 천지를 진동했을 것이다
그리고 암몬이 2년간 그 짓을 계속하자 참지 못한 신하들이 그를 죽이고
그 아들 요시아를 선택해서 왕을 삼았는데 나이 여덟살이었고 죽기 까지
31년을 왕 노릇했다
그는 마음을 겸비이 하고 잃어버린 여호와의 율법책을 찾아 유월절 행사를 하며
백성들을 그 증조할아버지 히스기아의 신앙으로 돌아오게 했다
여호와 앞에서 행한 그들 사적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그 앞에서 행한 모든 기록을 가지고 계시며 그것으로 결정하신다
첫째 날(일) 7월 17일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출 15:17).
여호와 앞이란 말은 첫째로 성소를 중심한 이스라엘의 생활을 이야기한다
성소는 여호와 앞에 서 있는 행위이다
그들이 제물을 바치고 속죄를 행하는 모든 행위가 하나님께의 가납을 의미한다
오늘 우리는 예배 시간에 서서 그리고 앉아서 꿇어서 예배드리는 행위를 한다
그러나 유대식의 무릎을 꿇는다는 행위는 납작 엎드리는 행위이다
자신을 지극히 낮추고 자신이 있음을 거절하는 것이 바로 주님 앞에서의 행위이다
그런 우리 중에 거할 성소를 짓겠다고 하신다
그것도 우리 중에 거할 처소를 짓겠다고 하신다
우리는 그의 놀라운 은혜와 보호하심을 통해서 우리에게 임재하심을 알리신다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의 위력을 본 백성들
그분의 임재하심으로 거룩해 지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저무 자주하니 별 것 않게 느껴졌고
그러다가 차츰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둘째 날(월) 7월 18일 자발적인 마음
“너희의 소유 중에서 너희는 여호와께 드릴 것을 택하되
마음에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릴지니…”(출 35:5).
요즘 기독교 사회에서 문제되는 것 중 하나가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성경적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이 구약의 레위인과 제사장을 위한 것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그들 이야기 들어 보면 그들이야기에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어느 사회에라도 공짜는 없다
심지어 돈을 주고 사 온 노예에게라도 먹을 것 입힐 것은 준비한다.
일하는 소에게조차 멍에를 씌우지 말라 하셨다
그래서 주님을 위해서 전적으로 일하는 자에게 그들 생활비를 준비하는 것은
정직한 것이다
복을 받기 위한 십일조라기보다도 혹시 복을 내리지 않아도 바쳐야 할 의무이다
로마 카톨릭 국가들에는 종교세를 낸다
그가 카톨릭이 아니라 해도 낸다 인두세적 의미이다
십일조는 이런 성격을 가진다
엄격한 의미로 십일금 제도는 구약의 제도이다
신약에서는 그 당시 유대인의 사고방식을 이야기한 십일금 제도뿐이다
초대교회는 십일금을 내는 시대가 아니라 자원하고 자발하는 시대였다
그러나 교회가 조직되고 그 교단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십일조 제도가 필요했다
그래서 교회에 그 제도가 정착된 것이다
그 제도에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또한 성전에 내는 자발적인 헌금도 그런 것이다
이스라엘은 감사한 마음이 들 때마다 하나님을 찾았다
그 감사를 인정하고 그분께 어떤 대가를 드렸다
복을 받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그저 감사해서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바치는 행위가 어떤 대가를 바랄 때는 그것이 올무가 된다
그들이 그의 백성들과 함께하시는 표시로 성소를 지으라 하셨다
그런데 그분은 성소에만 계셨는가?
아니다 그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표시였지 성소에서만 만나겠다는
그런 말씀이 아니였다
셋째 날(화) 7월 19일 상번제(常燔祭)
“매일 …한 어린양은 아침에 드리고 한 어린양은 저녁때에 드릴지며”(출 29:38~39).
양을 드리는 제도는
그리스도는 항상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신다는 표시이다
지금도 죽으시는가?
아니다
죽음은 십자가로 영원한 제사를 단번에 이루셨다
“아들의 죽음으로 원형과 마주쳤다. 큰 희생이 이루어졌다.
지성소로 가는 길은 열렸다. 새로운 삶의 길이 만민을 위하여 준비되었다.
더 이상 죄 많고 슬픔에 찬 인간들은 대제사장이 나오는 것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이제부터는 구주께서 모든 하늘의 하늘에서 제사장과 대언자로서 직무를 행하실 것이다.
이것은 마치 예배하는 자들에게 힘있는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한 것 같았다.
이제 죄를 위한 모든 희생과 제사는 끝났다.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히 10:7)는 당신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다.
그분은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히 9:12) 들어가신다.”
(소망, 757)
넷째 날(수) 7월 20일 하나님과의 교제
예배는 영적 행위이다
그 영적 행위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계약이다
그 계약은 시작과 끝이 분명히 있는데
이 땅에서 시작하여 하늘까지 가는 것이다
즉 예배는 영원을 약속하는 행위이다
그래서 그것은 거룩하다
“하나님의 사업을 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과 교통하여 얻는 결과보다도
더 필요한 것은 없다.
우리는 일상생활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
안식을 얻은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분의 평화가 마음에 차 있으면 얼굴에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음성에 설득력을 더할 것이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품성과 모든 행동에 도덕적 힘을 더할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첫 제자들이 그와 함께 지냈던 것을 알았듯이
우리를 그렇게 알아볼 것이다.
이것은 목사의 설교에서 나오는 것보다 훨씬 큰 힘을 목사의 노력에 더할 것이다.
이 힘을 얻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기도와 하나님 말씀 연구를 통한 교제를 결코 태만히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여기에 힘의 원천이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어떤 다른 일이 이것보다 먼저 되어서는 안 된다.”
(6증언, 47)
구약의 하나님은 성소에서 가르치셨다
성소를 통하여 성소에 의해서 그리고 성소를 배경으로 가르쳐셨다
그것은 단지 양을 잡는 행위 너머에서 가르치시는 거룩한 율법이다
이스라엘은 오랜 세월을 세키나 없는 성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저들은 궁금하지도 않았고 그러면서 오벳 에돔의 집이 복을 받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신성의 충만함이 넘치는 지성소의 불빛 아래
구름 기둥과 불기둥의 아름다운 자태 앞에서 저들은 속죄의 양을 잡았다
죄의식도 없이 말이다
우리는 사색과 활동적인 생애를 살아야 한다
조용한 기도와 열심히 일하는 생애기 필요하다
하나님과의 교제로 말미암아 얻는 힘에다가 조심하고
또 심사숙고하도록 마음을 훈련하는 열심 있는 노력을 더할 때에,
매일의 의무를 수행하며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라도 마음에 화평을 유지하게 된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과 교제하는 업을 이루어야 한다
그 업이 야곱의 업이라 가르친다
땅의 높은 곳에 올린다는 기별이다
다섯째 날(목) 7월 21일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 함
“너희와 너희의 자녀와 노비와 함께 …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요…”(신 12:12).
“이 부패한 시대의 도덕적 어두움 속에서 서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겟세마네에서 어둠의 세력들과 쟁투할 때
그분 자신의 고통으로 사셨듯이 우리도 그런 생각으로 살아갈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아낌없는 긍휼, 그
분의 용서하시는 사랑의 대상일 뿐 아니라 그 이상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기뻐하신다.
그분께서는 우리들에 대해 즐거워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보증인이다.
당신은 거룩한 정신을 갖고
전심으로 당신을 섬기는 모든 이들을 아름답게 해 주실 것이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 행위도 일종의 성소봉사이다
그러나 안식일 학교와 설교예배로 구분되는 성소 지성소 봉사는 아니다
모든 예배는 거룩하고 학교도 신성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배우는 모든 행위는 영적이다
그분 앞에서는 즐겁고 기뻐야 하고 거룩해야 하고 원칙이 서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예배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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