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과 교과해설(하나님 품성중심의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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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과 여호와 앞에서 기뻐함: 성소와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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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절: “너희와 너희 자녀와 노비와 함께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요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도 그리할지니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음이니라”(신12:12)
“예배는 마음과 영혼 그리고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에서 비롯된다”(교과 50쪽)
첫째 날(일)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는 여호와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렘17:12-13)
그러므로 성소는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품성이 무엇임을 증거합니다.
성소의 각 기구들과 예식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품성을 증거합니다.
성소의 뜰에는 양을 잡는 곳과 번제단과 물두멍이 있었습니다.
성소 뜰에서 양을 잡을 때 내가 잘못했으므로 내가 양을 잡아 하나님께 잘못을 용서해 달라는 의미로 잡은 것이 아니라 내가 잘못을 선택하였으므로 내 잘못된 선택의 결과에 대해서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이 땅에 오셔서 죽어가는 양처럼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돌아가심으로 나의 선택에 대한 모든 책임을 대신 지시는 분이심을 믿는다는 것을 표현하는 행위입니다.
번제단에서 짐승을 태웠는데 그 불은 하늘에서 내려와서 태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택에 대하여 자신이 친히 우리의 죄가 되셔서 피 흘려 돌아가셨고 그 하나님의 행위를 아버지 하나님께서 받으셔서 우리의 죄가 대속되었음을 증거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한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죄가 되셨고(롬8:3) 한 하나님은 희생제물이 되신 하나님의 희생을 태움으로 가납하셨고(슥13:7) 한 하나님은 함께 동참하셔서 모든 과정에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의 선택에 대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연합된 사랑이 기초가 된 구원의 행위를 보여줍니다.
물두멍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씻어주시는 행위를 상징합니다.(딛3:5)
성소 뜰에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희생의 사랑을 보아야 합니다.
성소에는 일곱 등대와 진설병상과 분향단이 있었습니다.
성소는 성소의 뜰을 통과한 후 처음 맞이하는 공간입니다.
성소의 뜰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모든 책임지심에 대한 사랑을 깨닫고 성소에 들어오게 되면 성소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지속적으로 깨닫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제시합니다.
일곱 등대는 기름과 불빛이 있었습니다.
기름은 성령하나님을 의미하고 불빛은 조명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일곱 등대는 앞을 향해 비추도록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민8:2-3)
일곱 등대의 앞은 진설병상입니다.
진설병 상에는 12개의 떡이 있었고 떡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성령하나님께서 하시는 여러 많은 사역 중에 가장 핵심적인 사역이 우리의 생명을 위해 산 떡이 되신 예수님의 품성을 조명하는 일입니다.(요16:13-14)
성령님의 사역 중 예수를 주라 시인하게 하고 회개케 하는 사역이 있는데 이런 사역 모두 성령님이 예수님의 품성을 조명하여 우리가 예수님의 품성을 보게 될 때의 결과들입니다.(고전12:3; 롬2:4)
분향단에서 피운 향의 연기가 지성소를 가득 채웠습니다.
분향단의 위치는 성소에 있었지만 기능은 지성소를 위한 것이어서 모세가 기록한 글은 분향단의 위치를 강조하여 성소에 있다고 기록한 반면 바울의 글에는 분향단의 기능을 강조하여 지성소에 있다고 기록하였습니다.(히9:3-4)
분향단의 향은 성도의 기도를 상징합니다.
기도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숨어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와 만나시길 원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입니다.
지성소에는 법궤가 있었고 법궤 속에는 십계명과 아론의 싹 난 지팡이, 그리고 만나 항아리가 있었습니다.
법궤 위 그룹천사들이 지켜보고 있는 법궤 뚜껑에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셰키나의 빛이 있었습니다.
그 빛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생명이심을 증거 하는 생명의 빛이었습니다.(요1:4)
하나님의 보좌는 십계명과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만나 항아리를 넣은 법궤의 뚜껑이었으므로 이것은 법궤 속에 있는 상징들을 기초로 하나님의 보좌(하나님 자신)가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품성의 사본입니다.
명령이 아니라 사랑을 담은 부탁입니다. (레8:35)
생명 없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부탁하시는 하나님의 호소입니다.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지팡이가 죽었지만 죽은 곳에서 싹이 나게 하시는 생명이신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만나 항아리는 우리를 살리시는 창조주의 책임지심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품성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보좌는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창조주로서 생명이시고 사랑이시고 책임지시는 분이심을 증거 합니다.
성소가 상징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품성을 보게 될 때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과 감사의 반응을 하게 되는데 이것을 예배라고 합니다.
나의 정성을 드리는 것이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품성을 보고 반응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주시는 분이시고(행17:25) 우리는 아담이 하나님을 떠난 이래로 나면서부터 죽은 자들이고 없는 자들이므로 드릴 수 있는 존재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소를 통해 우리 중에 거하길 원하십니다.
성소가 하나님의 품성을 증거 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하여 떠난 것이 죽음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면 우리를 다시 살리기 위해서 오해되었던 품성을 다시 새롭게 깨닫게 하셔서 하나님의 품성을 보고 안심하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여 생명 속에 있게 하시는 하나님임을 보여주셔야만 합니다.
이 목적을 위해서 우리 중에 거하시길 원하십니다.
둘째 날(월) 자발적인 마음
교과 54쪽 중간부분을 보면 “이런 예물을 드리도록 명령하기 위하여 화염과 번개와 큰 음성이 동원되지 않았다. 대신 아무도 강제하지 않는 성령의 사역이 있었다. 자원하는 심령으로 드림은 감사와 고마움의 정신을 말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강제하지 않는 성령의 사역이시라면 명령하실 수 없습니다.
명령 자체가 강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명령이란 단어의 적합한 대체 단어는 부탁입니다.(레8:35)
그리고 성령의 사역이란 것이 성소를 위한 재물을 가져오도록 촉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강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역이란 재물에 대한 촉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품성을 보여주시는 일이어야만 합니다.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과거의 경험과 종살이 속에서 하나님도 잊은 채 노예가 자신들의 운명인 줄 알고 살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셔서 출애굽을 약속하셨고 그 일이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바치셨음을 회상하고 명상하도록 이끄셨습니다.
그때에 감사와 찬송과 경배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속에 있었고 그 감사의 마음이 즐겨 여호와 하나님을 상징하는 성소의 건축을 위해 넘치도록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품성을 보게 될 때에 일어나는 감사와 찬송과 경배하고자 하는 마음이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품성을 알게 될 때 예배하게 됩니다.(출4:31)
셋째 날(화) 상번제
상번제는 양을 아침과 저녁에 희생 제물로 제사하는 예식입니다.
통상적으로 죄를 지은 사람이 필요에 의해 양을 가지고 와서 뜰에서 잡은 예식과는 구별되게 제사장이 정규적으로 아침과 저녁에 양을 잡은 의식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자신의 죄에 대해 깨닫기도 전에 우리의 선택에 대한 모든 책임을 우리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으로 대속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온 세상의 죄를 위해 피를 흘리신 하나님의 어린 양 곧 미래에 오실 구주의 약속을 이해해야 했다”(부조와 선지자 353, 교과 56쪽 중간부분)
우리의 선택에 대해 우리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죽으심에 대한 감사의 반응이 예배이고 우리를 위해 하나님 자신의 생명까지도 기꺼이 포기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볼 때에 우리도 우리 자신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종(도구)이 되길 기꺼이 자원하게 됩니다.(롬12:1)
여기서 순서를 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살리시기 위해 상번제의 양처럼 돌아가심에 대한 사랑의 반응으로서, 그런 하나님이시라면 내 모든 미래를 주님께 맡길 수 있는 믿음 속에 자신이 주님의 도구가 되길 기꺼이 선택하게 된다는 순서를 잊으면 안 됩니다.
자신을 주님의 도구가 되고자 하는 선택 때문에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십자가에서의 행위에 대한 사랑의 반응이 예배이고 예배를 통해 자신을 주님께 맡기게 되고 주님의 도구가 되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과의 저자가 기록한 “예배란 먼저 우리 자신을 산제사로 온전히 드리는 것을 의미 한다”(교과 56쪽 끝에서 두 번째 줄)는 설명은 다시 해석되어져야 합니다.
먼저 우리가 산제사로 드릴 수도 없고 그것을 예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먼저 드릴 수 없는 이유는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고 없는 사람을 살리는 일은 있는 분(여호와 하나님)의 일이시고 이것을 하나님은 할 수없는 의무나 책임감으로 하시지 않으시고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꼭 하셔야만 하는 일로서 인식하고 계십니다.(창22:8)
창세기 22장 8절은 하나님의 품성을 알고 있는 아브라함의 말입니다.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혹은 아브라함 자신을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생각했습니다.
주시는 하나님이심으로 바치라는 말씀을 하셨어도 그것이 하나님의 속마음이 아니고 하나님도 자신도 다 알지는 못하지만 피치 못할 상황에 몰려서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아들을 바치라고는 말씀 하셨지만 주실 것이고 그것도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준비하실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택을 위해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바쳐 죄의 값을 해결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은 우리를 위하여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의 결과가 우리를 구원하시지만 하나님의 피 흘리심의 궁극적인 이유는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먼지인 우리를 사랑의 대상으로 그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셨고 우리가 아담 안에서 아담과 함께 하나님을 거절하여 없어져 버렸을 때 하나님은 우리가 없어진 그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우리가 없어져서 하나님의 가슴이 허전함으로 평생을 사시기는 것을 견딜 수가 없어서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더라도 우리를 살려야만 하나님 자신이 견딜 수 있으므로 하나님 자신을 위해 친히 대속하셔서 영원한 무(無)가 되는 선택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도 못 말리는 사랑이요,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 사랑입니다.
이런 절대적 사랑(품성)을 성령님의 조명 속에서 보게 될 때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창조주로 신뢰할 수 있게 되고 창조주로서 우리를 위해 대속하신 사랑을 당연함의 담대함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하나님과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로서 절대적 관계가 형성 될 때 그 감사함의 반응이 예배입니다.
넷째 날(수) 하나님과의 교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요17:3)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뭘 알아야만 영생일까요?
그것은 지식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품성입니다.
하나님의 품성이 절대적 사랑임을 확신하게 될 때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관계가 이루어지고 그것이 곧 하나님의 생명과 연결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사랑을 알게 될 때 그것이 생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하나님은 스스로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셔서 하나님 안에서 사랑과 생명이 동의어임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품성인 사랑을 어떤 상황 일지라도 확신할 때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지 않고 하나님과 연결되고 그것이 하나님과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그것이 곧 영생입니다.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하면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예배해야만 그 예배를 받으신 후에야 하나님께서 나의 행위에 맞추어 반응 하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교과의 저자도 58쪽 중간 바로 밑에서 “지금은 우리에게 지상 성소가 없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굴복하면 그분이 우리를 인도하시며 함께해 주시기로 약속 하신다”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굴복은 하나님의 품성을 본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고 그렇게 하는 순종만이 하나님과 연결되게 하는 의미가 있는 것 입니다.
하나님의 품성에 감사함으로 인한 결과의 순복이 아닌, 내가 하나님께 굴복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지 않으실 것이고 함께 하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 속에서 하는 굴복이라면 그것은 하나님과 사랑, 생명의 연결이 아닌 종교적 모습 속에서만 연결된 것이고 그것은 생명과 전혀 상관이 없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이사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였습니다. (사1:11-14)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순종치 아니할지라도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심판하지 않으십니다.(요12:47 앞부분)
오히려 우리의 상태가 하나님과 떨어져 있는 상태 즉 하나님 보시기에 생명이 없는 상태이므로 더욱 은혜를 주셔서(롬5:20) 하나님의 품성을 보여주시고 그 품성에 안심하고 마음을 열도록 방문하시는 분이십니다.(요12:47 뒷부분)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분이시라면 내 자유의지를 어떻게 사용하든지 그것에 대해서 벌을 주시면 안 됩니다.
아담에게 하나님의 창조를 거부할 수 있는 자유를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아담이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거절하여 없어졌을 때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의 책임지시는 사랑이 하나님 자신이 책임지셔서 자신이 십자가에서 아담의 창조전의 상태인 없는 상태가 되셔서 대속하시고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모든 사람을 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고전 15:22)
아담의 생명으로 태어나는 모든 사람을 다 살리시지만 여전히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거부할 때도 성내거나 벌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은 계속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지만 돌아오지 않는 시점이 확인될 때 강제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에 의하여 그들의 선택대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시점에 하나님은 눈물을 머금고 인정하셔서 결국 창조전의 상태로 가는 것을 인정하시게 됩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아담과 아담 속에서 태어난 모든 인류를 다 살리셨지만 여전히 선택의 자유를 주시는 사랑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진정한 예배는 그대로 하여금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위해 더욱 마음을 열게 할 것인데, 그 이유는 예배가 그대로 하여금 믿음과 순종의 태도를 가르치기 때문이다. 이런 예배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교과 58쪽 밑에서 3째 줄부터 끝 절까지)라는 교과 저자의 해설은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지에 대한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해설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내 자신부터 출발하지 않습니다.
내 자신은 하나님 보시기에 없기 때문에 내 자신으로부터 출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존재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고 그 의미를 설명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예배가 시작되었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으로 책임지시는 사랑을 양 잡는 의식 속에서 바라보고 확신하게 될 때 나의 선택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품성을 보게 되고 마음으로 깨닫게 되어 감사와 찬양으로 반응하게 되고 그런 하나님의 품성을 볼 때에 하나님께 대한 신뢰(믿음)가 생기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나도 하나님의 품성처럼 섬기고 봉사하고 싶은 마음의 선택을 하고 싶어집니다.
마음은 간절해져서 선택하지만 그것을 행할 능력은 여전히 나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나 선택하면 하나님을 그 선택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께서 행하십니다.(요14:10; 빌2:13; 4:13)
다섯째 날(목)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 함
예배는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의 책임지시는 행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그런 사랑의 행위를 하시는 하나님의 품성을 보게 됨으로 즐거움의 반응으로서의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8:10)
하나님의 품성을 보고 신뢰하게 되고 그런 하나님이시라면 나의 미래를 맡길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예배는 하나님의 생명력 가득한 예배가 되고 하나님의 생명력으로 활력과 기쁨과 회복이 일어나게 됩니다.
예비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책임지시는 사랑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봅시다.
개인블로그에는 지난 1-3과의 해설이 다 있습니다.
http://blog.naver.com/01hyung
네이버 검색창에 박용범목사 를 치고 오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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