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과 여호와 앞에서 기뻐함: 성소와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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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과 여호와 앞에서 기뻐함: 성소와 예배
7월 23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49분
도입)
어느 마을에 나뭇짐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있었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 믿음이 어찌나 좋던지 혼자 살면서도 늘 신앙생활에 힘쓰며 입에서는 찬송이 떠나는 날이 없었다. 산에 가서 나무를 해가지고 내려올 때에는 언제나 교회 앞에 나뭇짐을 세워 놓고 성전에 들어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기도를 드린 뒤에 기쁜 얼굴로 나오곤 했다. 날마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목사님이 하루는 그 할아버지한테 물었다. "할아버지는 무슨 소원이 그렇게 많아서 늘 기도를 하십니까 ?" 할아버지가 대답한다. "아닙니다. 저는 특별히 무엇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다지 필요한 것도 없습니다. 저는 다만 이 성전에 나와서 하나님 얼굴을 바라볼 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저를 내려다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마주보는 것만이 저의 유일한 행복입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오늘 하나님과 마주 보고 사는 것 이것이 인생을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지를 배우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님은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실 것이다. 주님과 함께 사시기 바란다.
기억절 : “너희와 너희 자녀와 노비와 함께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요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도 그리할지니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음이니라”(신 12:12).
결론: 성소에서 드려진 제사들은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고 날마다 우리를 성결케 하기 위해 제공된 하나님의 은혜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 제사들은 하나님과 가까이 소통하며 그분의 선하심을 송축하기 위해 주어진 방편이었습니다.
첫째 날(일) 7월 17일
내가 그들 중에 거할…
도입)
우리가 보통 생각하기에 그 집이 하나님의 집이라면, 그 성전이 굉장히 커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거대한 건물을 지으라고 하시지 않았다. 성전에서 중요한 것은 규모가 아니라 구조였다. 성전을 짓는 목적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존재인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도 죽지 않고 도리어 영생을 얻으려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소를 만들라고 하셨다. 성소를 만들라는 이유는 그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이다. 이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신랑이 되어주시고 왕이 되셔서 함께 사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사시는 것을 좋아하신다. 처음 에덴동산에서부터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살기 원하셨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와 함께 사시기 위하여 먼저 이스라엘을 부르셔서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해 주셨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부활 후 성령을 통해 자기에게 문을 여는 모든 사람에게 들어오셔서 함께 사신다.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출 15:17).
교훈: 우주의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손으로 만든 성소에 거하시며 백성들과 함께 계셨다.
부가적용)
성막은 하나님의 언약과 뜻이 담긴 증거판가 그 중심에 있는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며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만나는 장소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성막'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하나님의 집이다. 신비한 상징들로 구성된 성막의 구성요소 하나하나는 놀라운 구원의 진리와 구원받고 하나님의 성전 된 성도들이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며,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해주고 있다. 하나님이 계신 성소에는 존귀와 위엄이 있다. "존귀와 위엄"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의 성소에 천지의 왕으로서의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모든 신들의 주요,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왕으로서 존귀와 위엄을 갖추셨다.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서면 하나님의 존귀와 위엄에 압도당하지 않을 수 없다.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였으며, 이로 인해 하나님의 성소를 귀중하게 생각했다. 또한 성소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아름다움"이 나타나 있었다. "능력과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은 모든 대적을 멸할 수 있는 능력과 아름다움이 있다는 말이다. 성소에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나타나 있다.
•영감의 교훈 •
▶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곳
“그 백성들이 광야에서 지루한 유랑 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 그들과 함께 있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우리 인간의 진영 가운데 당신의 성막을 세우셨다. 그가 사람의 장막 곁에 당신의 장막을 치신 것은 그가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거룩한 품성과 생애에 친숙하게 만드시기 위해서였다”(시대의 소망, 23).
둘째 날(월) 7월 18일
자발적인 마음
도입)
이사야 선지자는 자원하는 헌신된 마음이 없이 제물만 가져오는 이스라엘의 예배를 마당만 밟는 행위라고 경고하였다(사1:12). 우리는 의무감이 아닌 즐겁고 기쁜 마음, 자발적인 마음에서 나오는 예물을 드려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아무것이나 많이 가져오라고 하시지 않고 그들이 가져올 목록을 하나하나 말씀해 주셨다. “너희의 소유 중에서 너희는 여호와께 드릴 것을 택하되, 마음에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릴지니, 곧 금과 은과 놋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실과 염소 털과...” 하나님은 어떤 용도의 건물을, 어떤 모양으로 지어야 한다는 것을 계획하시고, 그것을 모세에게 알려주셨으며, 그렇게 짓기 위해서는 어떤 재료가 필요하다고 그것을 가져와야 한다고 알려주셨다. 성전은 규정대로 지어야 했고 신앙생활도 말씀대로 해야 사랑과 구원을 받는 것이다.
“너희의 소유 중에서 너희는 여호와께 드릴 것을 택하되 마음에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릴지니…”(출 35:5).
교훈: 성소를 건축하기 위해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드린 모든 헌신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되었다.
부가적용)
자발적으로 헌신을 해야 참된 헌신이 된다. 자발적으로 자원해서 하는 헌신에는 놀라운 힘이 실리게 된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스스로 원해서 자발적으로 자원한 것이라면 능히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충성하게 될 것이다. 자발적으로 헌신할 때 헌신하는 사람도 기쁘게 되고 헌신을 받는 쪽에서도 기쁘게 흐믓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원하시기 때문에 자발적인 헌신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지금도 헌신하는 자를 요구할 것이다. 자발적인 헌신자 말이다.
•영감의 교훈 •
▶ 주님을 위한 나의 최선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를 좋아하고 그분의 거룩한 임재의 축복을 귀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그들을 만나실 집을 준비하는 데 있어서 동일한 희생의 정신을 나타낼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소유물 중에서 제일 좋은
것을 하나님께 헌물로 드리기를 원할 것이다. 하나님을 위하여 짓는 집은 빚이 남아서는 안 된다”(부조와 선지자, 344).
셋째 날(화) 7월 19일
상번제(常燔祭)
도입)
이스라엘 백성들은 상번제를 드려야 했다.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제사를 드려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과 늘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거룩한 하나님을 늘 만나기 위하여 늘 거룩한 장치가 있어야 하였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에 거룩하지 않으면 만날 수가 없기에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제사를 드려야 했다. 그렇게 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만나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말씀드릴 수가 있다. 제사 드리는 그곳에서 만나주시고 하나님께서 임하심으로 거룩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사장을 세워서 아침과 저녁으로 상번제를 드리게 하시는 이유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살기 위한 장치가 된다. 그런데 왜 번거롭게 매일 제사를 드려야 하는 것인가? 일주일에 한번만 드리면 안 되는가? 이런 마음이 들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인간은 죄인이라서 그렇다. 사람이 죄를 일주일에 한번만 짓는 것 같으면 일주일에 한번만 제사를 드려도 되겠지만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하기에 항상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항상 제사를 드리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우리를 위한 것이다. 이런 속죄가 없이는 하나님과 함께 살기는커녕 죽을 수밖에 없기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신 조치가 제사이다. 그래서 제사로 언약을 맺었다고 한다.
교훈: 매일 드리는 제사가 주님의 희생을 바라보게 한 것처럼, 우리는 매일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산제사로 드려야 한다.
부가적용)
7대 불가사의를 건축한 사람들의 동기를 들여다보면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인도의 타지마할은 자기 왕비가 죽은 뒤에 행복한 곳에서 살라는 미래에 대한 소망이 담겨 있고, 이집트의 피라밋은 죽은 왕이 생명의 태양이 떠오르는 어느 날, 벌떡 일어나 살아 나오라고 동쪽을 향하여 창을 냈다. 그러니까 부활과 영생의 소망 때문에 그런 어마어마한 건축을 한 것이다. 올림피아의 제우스상이나, 에페소의 아테미스 신전을 거대하게 지은 것은 그들이 신에게 크게 공을 세워서 사죄의 은총을 입으려는 것이었고, 중국에서 발굴된 진시황의 병마총은 죽은 뒤에 자기를 호위할 군사와 말들을 만들어 자기 무덤에 묻은 것이었다. 모두가 구원을 갈망하여 그렇게 거대한 건축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거대한 건축을 한 사람보다 성전을 지은 솔로몬이 더 큰 사랑을 받았고 영광을 누렸다. 하나님은 인간이 공을 세우고 그것을 내세워서 인정받아 보려는 시도를 인정하지 아니하시고, 당신이 알려주신 방법으로 믿는 사람만 구원하셨다. 인간의 구원은 자기 공로가 아니라 말구유에 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믿고 그분을 의지하도록 하시어 구원을 얻도록 하셨다. 거창한 공을 세우는 것이 아니고 위대한 헌신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의 삶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날마다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생활을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놀라운 기적의 도우심을 주실 것이다.
•영감의 교훈 •
▶ 의미 있는 제사
“우리는 우리의 몸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제물을 할 수 있는 대로 완전하게 만들고자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육체적, 정신적, 도덕적 복리에 필요한 모든 교훈을 주셨다. 그러므로 모든 면에 있어서 우리의 생활 습관을 하나님의 표준에 일치시키는 것이 우리 각 사람의 의무이다”(증언보감 2권, 214).
넷째 날(수) 7월 20일
하나님과의 교제
도입)
우리는 왜 주님과 교제하기를 원하는가? (그분으로부터)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서이다. 교제하는 자는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야 한다. 이 ‘은혜의 보좌’는 구약에서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지성소(속죄소)를 가리킨다. 더 구체적으로 지성소 내에 있는 시은좌(the mercy seat)를 가리킨다. 이곳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 다른 표현도 있는데 왜 하필 하나님이 앉으신 보좌를 ‘은혜의 보좌’라고 하셨을까? 이유는 분명하다. 하나님은 당신 앞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에 ‘은혜의 보좌’라고 하신 것이다. 이 ‘은혜의 보좌’에 때를 따라 담대히 나아가 하나님과 교제를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를 원하신다.
교훈: 순종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며, 그분의 인도를 받게 된다.
부가적용)
예배는 현대 복음주의 진영에서 잃어버린 진주와 같다. 오늘날의 교회는 잘 조직되어 일하고 있고, 추구하는 아젠다(agenda)가 분명하며, 사역에 필요한 대부분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복음적 교회들조차 예배의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며, 예배에 미숙하다. - A. W. 토저 예배는 성도의 삶의 중심이다. 안식일 예배는 성도의 일주일간의 삶의 클라이맥스이다. 그래서 매 안식일마다 우리가 드리는 공적인 예배(corporate worship)는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에드워드 페이슨은 <기도의 능력>이라는 책에서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첫째도 기도요, 둘째도 기도요, 셋째도 기도”라고 말했다. 사도 바울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기도했으며, 다니엘은 중요한 일도 제쳐놓고 하루에 세 번씩 오랜 시간 기도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모범 되시는 예수님께서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으로 나아가 기도하셨다. 끊임없는 기도로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나누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업이다.
•영감의 교훈 •
▶ 자신의 성소를 마련하라
“높거나 낮거나, 도시 안이거나 거친 산중 동굴 속이거나, 비천한 오두막이거나 광야이거나 간에 성소를 가지고 있는 자들은 복이 있다. 만일 그것이 주님을 위하여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최상의 곳이라면, 그분께서는 당신의 임재로써 그 장소를 거룩하게 하실 것이며, 그곳은 만군의 여호와께 거룩한 곳이 될 것이다”(교회증언 5권, 491).
다섯째 날(목) 7월 21일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 함
도입)
제사제도의 본래 목적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시는 것이었다. 그 사랑의 현장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온 가족 뿐만 아니라 노비인 종들과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들과 함께 잔치를 여는 기쁨이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분과 함께 즐겁게 먹고 마시며 사랑의 유희를 마음껏 즐기는 것, 그것이 기독교요 신앙이다. 그분과 함께 기쁨을 나누며 우리를 지으시고 천지를 지으신 분 그분의 사랑을 마음껏 노래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주님은 이것을 요한복음에서 정확하게 말씀하고 계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예수님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온 가족이 모여 잔치를 벌이며 기뻐하며 음식을 나누었던 그 어린양이셨다.
“너희와 너희의 자녀와 노비와 함께 …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요…”(신 12:12).
교훈: 우리는 말씀과 진리에 입각하여 예배드려야 한다. 그러한 예배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음을 확신해야 한다.
부가적용)
우리의 삶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게 될 때 우리는 가장 행복한 상태요 또 가장 큰 즐거움과 복을 누릴 수 있다. 라고 말할 수 있겠다. 우리의 즐거운 일은 무엇인가? 장사하는 사람은 돈을 버는 일이 즐거울 것이다. 회사원들은 진급하는 것이 즐거운 일이다. 학생들에게는 좋은 점수를 받는 것이 즐거운 일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무슨 일이 즐거워야 하나? 시편은 여호와를 즐거워하라고 한다. 하나님이 나의 기쁨이 되신다는 생각을 가지고 사는 그리스도인이 몇이나 될까? 사람들은 환경에 좌우된다. 나는 하나님을 찬양할 일도 없다. 뭐 해준 게 있어야지 찬양하지? 이렇게 반문하실 그리스도인이 있을 줄 안다. 이런 사람은 상황에 좌우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찬양이 아니다. 찬양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이다. 어떤 상황에 의하여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늘 찬양하는 것이다. 의인들과 정직한 자는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 적어도 그렇게 해석해도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바울은 옥중에서 기도하고 찬양하였다. 그러자 옥문이 열렸다. 적어도 우리는 불평을 하거나 회의에 빠져있을 밤중에 바울은 찬양을 하였다. 밤이란 시간은 묘하다. 우울하거나 부정적인 기분이 드는 시간이 밤이란 시간이다. 그래서 밤 시간에 가장 많은 시험을 받을 수 있다. 특히 바울과 실라의 환경이라면 더욱 그렇다. 왜 내가 옳은 일을 하는데 옥중에 갇히고 매를 맞아야 하는가?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까?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찬양을 통해 하나님께 예배하였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하나님을 예배 속에서 찬양해야 한다. 어떤 환경에서도 찬양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바울과 실라는 그 모범을 보였다. 즐거운 소리는 기쁨으로 외치는 소리이다. 마음이 기쁜데 모기소리를 내지 않는다. 기쁘면 큰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여기서 공교히는 원어로 “건전하다, 아름답다, 최선을 다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찬양을 아름답고 최선을 다하여 불러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이다. 우리는 좋은 일이 있기 때문에 기쁨으로 찬송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기쁜 일이거나,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찬송을 한다. 우리는 어떤 결과를 바라고 찬송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찬송의 결과는 당신의 삶에 놀라운 축복으로 가득 채운다. 우리 모두 놀라운 축복을 체험하고 싶다면 기쁨으로 주님을 찬양하고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반드시 우리의 찬양에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임할 것이다.
•영감의 교훈 •
▶ 기쁨을 주는 예배
“그리스도 위에 신앙이 놓일 때에 진리는 영혼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며 예배는 지루하고 재미없는 것이 되지 않을 것이다”(교회증언 6권, 437).
•기도 •
주님, 저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는 즐거움을 알게 하소서. 진리를 배우는 재미를 느끼게 하소서. 하늘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고 싶습니다. 영광의 임재 속에 천군천사와 함께 부르는 찬양 속에서 전율하게 하옵소서.
예비일(금) 7월 22일
)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부조와 선지자, 343~358 “성막과 그 봉사”, 359~362 “나답과 아비후의 죄”, 367~373 “율법과 언약”, 실물교훈 288~290 “주님의 포도원”, 화잇주석, 사 6:1~7, 1~8.
거룩한 쉐키나(shekinah)로부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알려 주셨다. 하나님의 기별은 때때로 구름 속에서 들리는 소리를 통해 대제사장에게 전달되었다. 때로는 오른쪽 천사 위에 빛이 비치어 시인 또는 가납을 표하고, 왼쪽 천사에게 그늘이나 구름이 머물러서 불가 또는 거부를 나타냈다”(부조와 선지자, 349).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그대는 어떻게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십일금과 헌금을 드림이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행위임을 보여 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십일금과 헌금을 드리지 않는다면 무엇과 타협하고 있는 것입니까?
➋그대가 다니는 교회의 예배를 살펴보십시오. 예배가 냉담하고, 형식적이며, 메마르고, 기쁨이 없습니까? 아니면 감정, 흥분, 분위기에 너무 휩쓸립니까? 아니면 양 극단 사이에서 적절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습니까?
➌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예배 형식을 심하게 바꾸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물론 좋은 목적에서 그렇게 하지만, 어떤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까요?
➍예배 형식의 변화를 제안했을 때, 단지 오랫동안 똑같은 예배 형식을 따랐기 때문에 변화를 싫어하는 교회가 있다면 그대는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➎지상 성소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지극히 성스럽고 거룩한 장소였습니다.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곳에서 즐거워했습니다. 이 사실은 예배에 대하여 어떤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7월 23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49분
도입)
어느 마을에 나뭇짐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있었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 믿음이 어찌나 좋던지 혼자 살면서도 늘 신앙생활에 힘쓰며 입에서는 찬송이 떠나는 날이 없었다. 산에 가서 나무를 해가지고 내려올 때에는 언제나 교회 앞에 나뭇짐을 세워 놓고 성전에 들어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기도를 드린 뒤에 기쁜 얼굴로 나오곤 했다. 날마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목사님이 하루는 그 할아버지한테 물었다. "할아버지는 무슨 소원이 그렇게 많아서 늘 기도를 하십니까 ?" 할아버지가 대답한다. "아닙니다. 저는 특별히 무엇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다지 필요한 것도 없습니다. 저는 다만 이 성전에 나와서 하나님 얼굴을 바라볼 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저를 내려다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마주보는 것만이 저의 유일한 행복입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오늘 하나님과 마주 보고 사는 것 이것이 인생을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지를 배우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님은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실 것이다. 주님과 함께 사시기 바란다.
기억절 : “너희와 너희 자녀와 노비와 함께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요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도 그리할지니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음이니라”(신 12:12).
결론: 성소에서 드려진 제사들은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고 날마다 우리를 성결케 하기 위해 제공된 하나님의 은혜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 제사들은 하나님과 가까이 소통하며 그분의 선하심을 송축하기 위해 주어진 방편이었습니다.
첫째 날(일) 7월 17일
내가 그들 중에 거할…
도입)
우리가 보통 생각하기에 그 집이 하나님의 집이라면, 그 성전이 굉장히 커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거대한 건물을 지으라고 하시지 않았다. 성전에서 중요한 것은 규모가 아니라 구조였다. 성전을 짓는 목적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존재인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도 죽지 않고 도리어 영생을 얻으려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소를 만들라고 하셨다. 성소를 만들라는 이유는 그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이다. 이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신랑이 되어주시고 왕이 되셔서 함께 사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사시는 것을 좋아하신다. 처음 에덴동산에서부터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살기 원하셨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와 함께 사시기 위하여 먼저 이스라엘을 부르셔서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해 주셨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부활 후 성령을 통해 자기에게 문을 여는 모든 사람에게 들어오셔서 함께 사신다.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출 15:17).
교훈: 우주의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손으로 만든 성소에 거하시며 백성들과 함께 계셨다.
부가적용)
성막은 하나님의 언약과 뜻이 담긴 증거판가 그 중심에 있는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며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만나는 장소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성막'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하나님의 집이다. 신비한 상징들로 구성된 성막의 구성요소 하나하나는 놀라운 구원의 진리와 구원받고 하나님의 성전 된 성도들이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며,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해주고 있다. 하나님이 계신 성소에는 존귀와 위엄이 있다. "존귀와 위엄"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의 성소에 천지의 왕으로서의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모든 신들의 주요,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왕으로서 존귀와 위엄을 갖추셨다.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서면 하나님의 존귀와 위엄에 압도당하지 않을 수 없다.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였으며, 이로 인해 하나님의 성소를 귀중하게 생각했다. 또한 성소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아름다움"이 나타나 있었다. "능력과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은 모든 대적을 멸할 수 있는 능력과 아름다움이 있다는 말이다. 성소에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나타나 있다.
•영감의 교훈 •
▶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곳
“그 백성들이 광야에서 지루한 유랑 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 그들과 함께 있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우리 인간의 진영 가운데 당신의 성막을 세우셨다. 그가 사람의 장막 곁에 당신의 장막을 치신 것은 그가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거룩한 품성과 생애에 친숙하게 만드시기 위해서였다”(시대의 소망, 23).
둘째 날(월) 7월 18일
자발적인 마음
도입)
이사야 선지자는 자원하는 헌신된 마음이 없이 제물만 가져오는 이스라엘의 예배를 마당만 밟는 행위라고 경고하였다(사1:12). 우리는 의무감이 아닌 즐겁고 기쁜 마음, 자발적인 마음에서 나오는 예물을 드려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아무것이나 많이 가져오라고 하시지 않고 그들이 가져올 목록을 하나하나 말씀해 주셨다. “너희의 소유 중에서 너희는 여호와께 드릴 것을 택하되, 마음에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릴지니, 곧 금과 은과 놋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실과 염소 털과...” 하나님은 어떤 용도의 건물을, 어떤 모양으로 지어야 한다는 것을 계획하시고, 그것을 모세에게 알려주셨으며, 그렇게 짓기 위해서는 어떤 재료가 필요하다고 그것을 가져와야 한다고 알려주셨다. 성전은 규정대로 지어야 했고 신앙생활도 말씀대로 해야 사랑과 구원을 받는 것이다.
“너희의 소유 중에서 너희는 여호와께 드릴 것을 택하되 마음에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릴지니…”(출 35:5).
교훈: 성소를 건축하기 위해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드린 모든 헌신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되었다.
부가적용)
자발적으로 헌신을 해야 참된 헌신이 된다. 자발적으로 자원해서 하는 헌신에는 놀라운 힘이 실리게 된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스스로 원해서 자발적으로 자원한 것이라면 능히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충성하게 될 것이다. 자발적으로 헌신할 때 헌신하는 사람도 기쁘게 되고 헌신을 받는 쪽에서도 기쁘게 흐믓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원하시기 때문에 자발적인 헌신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지금도 헌신하는 자를 요구할 것이다. 자발적인 헌신자 말이다.
•영감의 교훈 •
▶ 주님을 위한 나의 최선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를 좋아하고 그분의 거룩한 임재의 축복을 귀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그들을 만나실 집을 준비하는 데 있어서 동일한 희생의 정신을 나타낼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소유물 중에서 제일 좋은
것을 하나님께 헌물로 드리기를 원할 것이다. 하나님을 위하여 짓는 집은 빚이 남아서는 안 된다”(부조와 선지자, 344).
셋째 날(화) 7월 19일
상번제(常燔祭)
도입)
이스라엘 백성들은 상번제를 드려야 했다.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제사를 드려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과 늘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거룩한 하나님을 늘 만나기 위하여 늘 거룩한 장치가 있어야 하였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에 거룩하지 않으면 만날 수가 없기에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제사를 드려야 했다. 그렇게 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만나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말씀드릴 수가 있다. 제사 드리는 그곳에서 만나주시고 하나님께서 임하심으로 거룩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사장을 세워서 아침과 저녁으로 상번제를 드리게 하시는 이유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살기 위한 장치가 된다. 그런데 왜 번거롭게 매일 제사를 드려야 하는 것인가? 일주일에 한번만 드리면 안 되는가? 이런 마음이 들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인간은 죄인이라서 그렇다. 사람이 죄를 일주일에 한번만 짓는 것 같으면 일주일에 한번만 제사를 드려도 되겠지만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하기에 항상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항상 제사를 드리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우리를 위한 것이다. 이런 속죄가 없이는 하나님과 함께 살기는커녕 죽을 수밖에 없기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신 조치가 제사이다. 그래서 제사로 언약을 맺었다고 한다.
교훈: 매일 드리는 제사가 주님의 희생을 바라보게 한 것처럼, 우리는 매일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산제사로 드려야 한다.
부가적용)
7대 불가사의를 건축한 사람들의 동기를 들여다보면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인도의 타지마할은 자기 왕비가 죽은 뒤에 행복한 곳에서 살라는 미래에 대한 소망이 담겨 있고, 이집트의 피라밋은 죽은 왕이 생명의 태양이 떠오르는 어느 날, 벌떡 일어나 살아 나오라고 동쪽을 향하여 창을 냈다. 그러니까 부활과 영생의 소망 때문에 그런 어마어마한 건축을 한 것이다. 올림피아의 제우스상이나, 에페소의 아테미스 신전을 거대하게 지은 것은 그들이 신에게 크게 공을 세워서 사죄의 은총을 입으려는 것이었고, 중국에서 발굴된 진시황의 병마총은 죽은 뒤에 자기를 호위할 군사와 말들을 만들어 자기 무덤에 묻은 것이었다. 모두가 구원을 갈망하여 그렇게 거대한 건축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거대한 건축을 한 사람보다 성전을 지은 솔로몬이 더 큰 사랑을 받았고 영광을 누렸다. 하나님은 인간이 공을 세우고 그것을 내세워서 인정받아 보려는 시도를 인정하지 아니하시고, 당신이 알려주신 방법으로 믿는 사람만 구원하셨다. 인간의 구원은 자기 공로가 아니라 말구유에 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믿고 그분을 의지하도록 하시어 구원을 얻도록 하셨다. 거창한 공을 세우는 것이 아니고 위대한 헌신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의 삶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날마다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생활을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놀라운 기적의 도우심을 주실 것이다.
•영감의 교훈 •
▶ 의미 있는 제사
“우리는 우리의 몸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제물을 할 수 있는 대로 완전하게 만들고자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육체적, 정신적, 도덕적 복리에 필요한 모든 교훈을 주셨다. 그러므로 모든 면에 있어서 우리의 생활 습관을 하나님의 표준에 일치시키는 것이 우리 각 사람의 의무이다”(증언보감 2권, 214).
넷째 날(수) 7월 20일
하나님과의 교제
도입)
우리는 왜 주님과 교제하기를 원하는가? (그분으로부터)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서이다. 교제하는 자는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야 한다. 이 ‘은혜의 보좌’는 구약에서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지성소(속죄소)를 가리킨다. 더 구체적으로 지성소 내에 있는 시은좌(the mercy seat)를 가리킨다. 이곳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 다른 표현도 있는데 왜 하필 하나님이 앉으신 보좌를 ‘은혜의 보좌’라고 하셨을까? 이유는 분명하다. 하나님은 당신 앞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에 ‘은혜의 보좌’라고 하신 것이다. 이 ‘은혜의 보좌’에 때를 따라 담대히 나아가 하나님과 교제를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를 원하신다.
교훈: 순종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며, 그분의 인도를 받게 된다.
부가적용)
예배는 현대 복음주의 진영에서 잃어버린 진주와 같다. 오늘날의 교회는 잘 조직되어 일하고 있고, 추구하는 아젠다(agenda)가 분명하며, 사역에 필요한 대부분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복음적 교회들조차 예배의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며, 예배에 미숙하다. - A. W. 토저 예배는 성도의 삶의 중심이다. 안식일 예배는 성도의 일주일간의 삶의 클라이맥스이다. 그래서 매 안식일마다 우리가 드리는 공적인 예배(corporate worship)는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에드워드 페이슨은 <기도의 능력>이라는 책에서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첫째도 기도요, 둘째도 기도요, 셋째도 기도”라고 말했다. 사도 바울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기도했으며, 다니엘은 중요한 일도 제쳐놓고 하루에 세 번씩 오랜 시간 기도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모범 되시는 예수님께서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으로 나아가 기도하셨다. 끊임없는 기도로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나누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업이다.
•영감의 교훈 •
▶ 자신의 성소를 마련하라
“높거나 낮거나, 도시 안이거나 거친 산중 동굴 속이거나, 비천한 오두막이거나 광야이거나 간에 성소를 가지고 있는 자들은 복이 있다. 만일 그것이 주님을 위하여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최상의 곳이라면, 그분께서는 당신의 임재로써 그 장소를 거룩하게 하실 것이며, 그곳은 만군의 여호와께 거룩한 곳이 될 것이다”(교회증언 5권, 491).
다섯째 날(목) 7월 21일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 함
도입)
제사제도의 본래 목적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시는 것이었다. 그 사랑의 현장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온 가족 뿐만 아니라 노비인 종들과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들과 함께 잔치를 여는 기쁨이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분과 함께 즐겁게 먹고 마시며 사랑의 유희를 마음껏 즐기는 것, 그것이 기독교요 신앙이다. 그분과 함께 기쁨을 나누며 우리를 지으시고 천지를 지으신 분 그분의 사랑을 마음껏 노래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주님은 이것을 요한복음에서 정확하게 말씀하고 계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예수님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온 가족이 모여 잔치를 벌이며 기뻐하며 음식을 나누었던 그 어린양이셨다.
“너희와 너희의 자녀와 노비와 함께 …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요…”(신 12:12).
교훈: 우리는 말씀과 진리에 입각하여 예배드려야 한다. 그러한 예배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음을 확신해야 한다.
부가적용)
우리의 삶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게 될 때 우리는 가장 행복한 상태요 또 가장 큰 즐거움과 복을 누릴 수 있다. 라고 말할 수 있겠다. 우리의 즐거운 일은 무엇인가? 장사하는 사람은 돈을 버는 일이 즐거울 것이다. 회사원들은 진급하는 것이 즐거운 일이다. 학생들에게는 좋은 점수를 받는 것이 즐거운 일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무슨 일이 즐거워야 하나? 시편은 여호와를 즐거워하라고 한다. 하나님이 나의 기쁨이 되신다는 생각을 가지고 사는 그리스도인이 몇이나 될까? 사람들은 환경에 좌우된다. 나는 하나님을 찬양할 일도 없다. 뭐 해준 게 있어야지 찬양하지? 이렇게 반문하실 그리스도인이 있을 줄 안다. 이런 사람은 상황에 좌우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찬양이 아니다. 찬양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이다. 어떤 상황에 의하여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늘 찬양하는 것이다. 의인들과 정직한 자는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 적어도 그렇게 해석해도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바울은 옥중에서 기도하고 찬양하였다. 그러자 옥문이 열렸다. 적어도 우리는 불평을 하거나 회의에 빠져있을 밤중에 바울은 찬양을 하였다. 밤이란 시간은 묘하다. 우울하거나 부정적인 기분이 드는 시간이 밤이란 시간이다. 그래서 밤 시간에 가장 많은 시험을 받을 수 있다. 특히 바울과 실라의 환경이라면 더욱 그렇다. 왜 내가 옳은 일을 하는데 옥중에 갇히고 매를 맞아야 하는가?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까?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찬양을 통해 하나님께 예배하였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하나님을 예배 속에서 찬양해야 한다. 어떤 환경에서도 찬양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바울과 실라는 그 모범을 보였다. 즐거운 소리는 기쁨으로 외치는 소리이다. 마음이 기쁜데 모기소리를 내지 않는다. 기쁘면 큰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여기서 공교히는 원어로 “건전하다, 아름답다, 최선을 다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찬양을 아름답고 최선을 다하여 불러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이다. 우리는 좋은 일이 있기 때문에 기쁨으로 찬송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기쁜 일이거나,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찬송을 한다. 우리는 어떤 결과를 바라고 찬송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찬송의 결과는 당신의 삶에 놀라운 축복으로 가득 채운다. 우리 모두 놀라운 축복을 체험하고 싶다면 기쁨으로 주님을 찬양하고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반드시 우리의 찬양에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임할 것이다.
•영감의 교훈 •
▶ 기쁨을 주는 예배
“그리스도 위에 신앙이 놓일 때에 진리는 영혼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며 예배는 지루하고 재미없는 것이 되지 않을 것이다”(교회증언 6권, 437).
•기도 •
주님, 저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는 즐거움을 알게 하소서. 진리를 배우는 재미를 느끼게 하소서. 하늘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고 싶습니다. 영광의 임재 속에 천군천사와 함께 부르는 찬양 속에서 전율하게 하옵소서.
예비일(금) 7월 22일
)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부조와 선지자, 343~358 “성막과 그 봉사”, 359~362 “나답과 아비후의 죄”, 367~373 “율법과 언약”, 실물교훈 288~290 “주님의 포도원”, 화잇주석, 사 6:1~7, 1~8.
거룩한 쉐키나(shekinah)로부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알려 주셨다. 하나님의 기별은 때때로 구름 속에서 들리는 소리를 통해 대제사장에게 전달되었다. 때로는 오른쪽 천사 위에 빛이 비치어 시인 또는 가납을 표하고, 왼쪽 천사에게 그늘이나 구름이 머물러서 불가 또는 거부를 나타냈다”(부조와 선지자, 349).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그대는 어떻게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십일금과 헌금을 드림이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행위임을 보여 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십일금과 헌금을 드리지 않는다면 무엇과 타협하고 있는 것입니까?
➋그대가 다니는 교회의 예배를 살펴보십시오. 예배가 냉담하고, 형식적이며, 메마르고, 기쁨이 없습니까? 아니면 감정, 흥분, 분위기에 너무 휩쓸립니까? 아니면 양 극단 사이에서 적절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습니까?
➌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예배 형식을 심하게 바꾸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물론 좋은 목적에서 그렇게 하지만, 어떤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까요?
➍예배 형식의 변화를 제안했을 때, 단지 오랫동안 똑같은 예배 형식을 따랐기 때문에 변화를 싫어하는 교회가 있다면 그대는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➎지상 성소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지극히 성스럽고 거룩한 장소였습니다.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곳에서 즐거워했습니다. 이 사실은 예배에 대하여 어떤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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