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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과 구약의 믿음(도입과 부가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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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과 구약의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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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9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38분

 

도입)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을 믿는 믿음을 요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이 믿음을 요구하시는가? 우리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다. 우리의 믿음은 이성적으로 볼 때 합리적이지 않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다. 믿음은 세상의 법칙을 뛰어넘는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다. 믿음 없는 이 세대에서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요구하신다. 믿음은 긍정이 아니다. 긍정은 이 세상에서만 통하는 신념이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나라에서 통하는 우리의 신앙이다. 믿음은 신실한 자들이 갖는 신앙의 무기이다. 이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구속의 모든 사실을 믿는 철저한 믿음이다. 이 믿음이 있는 자들은 우리의 마음의 의심을 모두 잠재워버릴 수 있다. 의심과 걱정은 기계속의 모래와 같다면 믿음은 기계속의 기름과 같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어야 한다. 믿음은 우리의 모든 아픔에서 독을 빼준다. 믿음은 우리의 모든 손실을 보상하여 준다. 믿음은 우리의 고통에서 해방시키신다. 구약의 믿음이나 신약의 믿음이나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십자가의 사랑과 그 구원의 사실을 믿는 믿음이 우리를 살리고, 그 믿음이 교회를 살리며, 그 믿음이 우리의 가정을 살리기 때문에 오직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함으로 나아가야 한다.

 

기억절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연구 범위: 갈 3:1~14, 롬 1:2, 4:3, 창 15:6, 12:1~3, 레 17:11, 고후 5:21.

 

결론: 구약은 제사 제도를 통해서 죄의 참혹한 대가가 무엇인지 그리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의 처지를 대신하여 드려진 완전한 대속이 무엇인지 보여 주었습니다.

 

첫째 날(일) 10월 23일

어리석은 갈라디아인들

 

도입)

어리석은 자라고 말하는 바울의 이야기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그 무엇을 구원을 위해 붙잡으려고 하는 잘못된 태도 즉 변질된 믿음에 대하여 탄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십자가로 말미암은 구원으로 충분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 그 이상의 무엇을 바라보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인정하는 듯 하면서도 율법 그리고 할례를 그 위에 더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왜 그럴까? 주님만으로 충분하게 여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로만 만족하지 못하기에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 이외의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다. 주님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나아가는 것을 그는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는 어리석음이라 말한다. 믿음의 바른 확신 가운데 살기 위해 그러므로 오직 은혜를 붙들어야 한다. 믿음에 바로 서기 위해서는 들음에서 주어진 믿음을 붙잡아야 한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

 

교훈: 갈라디아 교인들은 십자가를 바라보고 복음을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하지만 나중에 자신의 행위에 의지하는 영적 함정에 빠지게 되었다.

 

부가적용)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 있었던 것으로 이젠 십자가로 말미암아 믿음의 절정을 보여주신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 이전의 율법으로 돌리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율법으로 돌리려고 하면 율법 이전의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라. 믿음은 율법에 할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외의 것을 바라보지 말라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어 구원의 믿음의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의 십자가와 그의 은혜만을 바라보며 살아가자는 것이다. 그 주님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이 어리석음이 아니라 참 지혜의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이다. 오직 주님으로 만족하며 살아가야 한다.

 

•영감의 교훈•

▶ 성령으로 시작한 신앙

“사도는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인 생애에 있어서 그들의 최초의 경험을 주의 깊이 생각하도록 하였다”(사도행적, 384).

 

둘째 날(월) 10월 24일

성경에 근거를 둠

 

도입)

아브라함은 행위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 그는 듣고 믿고 의롭다고 여기시고 믿음의 조상으로 복을 누리게 하셨다. 실제 아브라함은 율법 이전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모세 이전의 사람으로서 그는 모세의 율법 없이 살아갔다. 그는 모세의 율법으로 살아간 사람이 아니지만 믿음으로 복의 근원이 된 사람이 되었다. 그러므로 율법 없이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모세의 율법은, 결국 사람을 살리지 못했다. 의에 이르는 길은 제시했지만, 사람들이 그 길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실패하고, 언약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갔다. 그 때 하나님은 새 언약을 주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을, 그들 속에 두어서 언약적 요구를 이루시는 것이다. 마른 뼈들처럼 죽은 영혼들을.. 다시 살려내시는 것이다. 바울이 말한 ‘믿음’, 같은 맥락으로 야고보가 말한 ‘행함’ 그 목적은 ‘하나님의 법을 순종/준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사실 실패했다. 이제 하나님은 신약에 성령을 보내사, 성령이 우리 안에서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도록 역사하신다. 그 예언을 에스겔이 36~37장에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을 강조한 바울도 성령을 강조했다. 바울의 주장은, <믿음을 통해서 성령을 받는다>는 것이다. ‘율법의 행위’(할례와 절기준수 뜻함)로는 <성령을 못 받는다>고 했다. (갈3:2~5, 14, 롬8:2, 13등)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갈 3:8).

 

교훈: 아직 신약성경이 없었을 때, 바울은 구약성경을 기초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복음을 설명하였다.

 

부가적용)

믿음을 통해서, 성령을 받고서... 그것이 끝이 아니다. 믿음을 통해서, 성령을 받고서, 그런 모든 과정들이 지향하는 목표는 언약의 회복/ 하나님의 말씀의 준수/ 성화의 삶에 있는 것이다. ‘믿음’ 그 자체가 목적/종착역이 아니다. ‘믿음’으로 ‘성령’받아...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나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이 회복되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으로/진정으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삶/성화의 삶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이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데살로니가에서, 에베소에서, 빌립보에서.. 막 이루어져갔던 것이다. 바울은 자기가 복음을 전할 때 나타나는 역사들을 보고서 겔37:14, 내 (성)영을 주리니 너희가 살리라는 말씀을 기억했을 것이다. 구약의 언약이 실패해서, 포로로 잡혀갔는데, 에스겔을 통해 새언약이 예언되고 그 새언약이 신약시대에 자기를 통해 막 이루어져 감을 보고 놀랐을 것이다. (물론 예루살렘에서 다른 사도들도 보고 놀랐다. 행1~7장)

 

•영감의 교훈•

▶ 말씀으로 말을 판단함

“위기가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는 사람들이 진리라고 우리에게 소개하는 모든 것들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소위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고 공언하는 자들이 우리에게 와서 그들에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기별이 있다고 말할 때에 우리는 이것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신중하게 자문자답해 볼 필요가 있다”(가려 뽑은 기별 2권, 99).

 

셋째 날(화) 10월 25일

의롭게 여김을 받음

 

도입)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것도 그가 완벽하게 선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롬 3:6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에서 보는 것처럼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는 자, 즉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의지하는 자에게 주어진 것이다. 결국 믿음으로 사는 자는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바라보면 참으로 부족하고 죄 많을 뿐이고, 때로는 너무나 교만해서 그것조차도 모를 때가 많다. 우리 자신의 어떠함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용서하시고 부어주시는 은혜가 있기에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롬 3:6).

 

교훈: 아브라함은 순종의 모본이자 믿음의 모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를 의롭게 한 것은 순종이 아니라 믿음이며, 순종은 의의 결과였다.

 

부가적용)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것은 우리가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선한 행위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안에 죄성이 있고 하나님의 기준이 너무나 높기 때문이다. 만약에 완벽하게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면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시지도 않았을 것이고,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죽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이 율법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임을 밝히 드러내 준다. 하지만 갈라디아 성도들은 처음에는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임을 받아들였다가 거짓 교사들에 의해서 율법주의로 전락했다. 즉 율법을 지키는 선한 행위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고 했다. 물론 선하게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선행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다. 우리가 선하게 살아가려고 하지만 우리 안의 죄성으로 100% 선하게 살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한 행위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일종의 영적 교만이고, 하나님의 거룩한 기준을 모르는 영적 무지이다. 그래서 선한 행위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이들은 절망에 빠지거나 교만에 빠진다. 즉 실수하고 잘못했으면 절망하게 되고, 좀 잘했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으면 교만에 빠지게 된다. 그러한 삶으로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의로운 행위를 의지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의지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용서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 값을 대신 치러 주셨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한 감사로 인하여 우리가 선하게 살려고 하는 것이고, 때로는 선한 일을 했어도 그 모든 것이 결국 하나님의 은혜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그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용서하여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것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것이고,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영감의 교훈•

▶ 믿음의 결과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믿음으로 좇아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롬 14:23)가 되기 때문이다. 요망되는 믿음은 단순히 교리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으로 역사하고 심령을 정결케 하는 믿음이다. 겸손과 온유와 순종은 믿음이 아니다. 그것들은 믿음의 결과요 열매이다”(교회증언 5권, 438).

 

넷째 날(수) 10월 26일

구약의 복음

 

도입)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실 때, 아브라함 자신을 중심인물로 선택하시고 그로 인하여 모든 이방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복이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 즉 영생의 복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씨에서 메시야가 태어나실 것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 예수님은 요 8:56절에서 당신을 무시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아브라함이 복음으로 전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믿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삭을 모리아 산에 데려가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려고 했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이삭을 살리실 수 있다고 하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믿음으로 이삭을 제단에 드리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은 히 11:17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다. 이 같은 아브라함의 믿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실 부활에 대한 그의 믿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런 믿음을 보시고 그에게 의롭다 하심을 주신 것이다. 히 11:9절에서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고 말씀해 준다. 이 복은 무슨 복인가? 히 11:10절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았다”고 했다. 이것은 천국의 유업으로 이 유업은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갈 3:8).

 

교훈: 구약의 언약도 진실로 복음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분을 위한 우리의 약속이 아닌, 우리를 위한 그분의 약속에 기초해 있었기 때문이다.

 

부가적용)

구약은, 언약백성의 탄생과 그 실패로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는데, 이때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새언약’을 약속하시고, 에스겔을 통해 ‘성령으로 회복’을 약속하신다. 바울이 전한 ‘믿음으로 의롭게 됨’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한다. 즉, ‘언약백성의 회복’이다. 구약은 예언이고, 바울은 성취다. 실제로 바울이 세운 신약의 교회들에게서, 그 언약이 성취된다. 포로기 전, 예레미야는 아주 절망적으로 이스라엘의 상태를 예언한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17:9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렘13:23 그러나 포로기가 끝날 무렵, 에스겔은 다소 희망적으로 이스라엘의 상태을 예언한다. 이스라엘이 절대 율법 준행이 안 되는 것은, 표범이/구스인이 피부색 바꾸는 것만큼 절대 안 되는데 한 가지 새 희망은.. <하나님의 영을 너희 속에 두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었다. 인간 스스로 주의 율례를 온전히 행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선지자들은 이제 ‘하나님이 직접’ 행하시는 어떤 역사를 꿈꾸게 된다. 언젠가 날이 이르면, 하나님이 직접 나서서, 이 일을 행하실 것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것은 성령을 주시사, 그 성령의 역사로 우리가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었다.

 

•영감의 교훈•

▶ 율법주의를 주의할 것

“율법주의적 종교는 사람을 하나님과 조화되게 하지 못한다. 바리새인의 까다롭고 완고한 정통, 즉 회개와 온유와 사랑의 결핍은 죄인들을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에 불과했다. 그들은 맛을 잃은 소금과 같았다. 그들의 감화는 이 세상을 부패에서 방지하는 아무런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일한 참 믿음은 심령을 정결케 하는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라디아서 5장 6절)이다. 그것은 품성을 변화시키는 누룩과 같은 것이다”(산상보훈, 53).

 

다섯째 날(목) 10월 27일

저주로부터 구원받음

 

도입)

사람으로냐 하나님으로냐, 이 문제의 연속으로 바울이 던지는 질문은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이다. 이것은 연속성을 갖는 개념이다. 사람에 의존하는 것이 곧 율법의 행위를 중시하는 것이고, 하나님에 근거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과 복음전도의 근거를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계시)에서 찾듯이, 구원과 구원받은 자의 삶의 근거를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말씀을 듣고 믿는 것에 둔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았다는 사람들 중에 이 믿음을 다시 율법주의로 변질시키는 경우가 있다. 예수님이 베푸신 은혜를 듣고 믿는 것을 부족하게 여겨, 사람이 뭔가 종교적인 행위를 해야 구원의 대열에 들어간다고 생각을 한다. 까다로운 율법적 요구들을 계속 유효한 것으로 두고 그것을 만족시키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얻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아니라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의식이다. 그것은 결국 자기만족이다. 이와 달리 하나님은 율법이 있기도 전부터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셨다. 아브라함이 그 명확한 증거가 된다. 그는 율법이 있기 전에 이미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고, 그것은 그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믿음을 인하여서다. 믿음이 이렇게 중요하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격적이신 하나님께서 인격적인 존재로 창조된 인간을 대하시는 인격적인 방식이다. 말씀을 듣고 그것을 믿는 것이야 말로 사람이 하나님께 할 수 있는 인격적인 소통이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갈 3:10).

 

교훈: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 얻으려는 자는 여전히 저주 아래 있는 자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구원 얻으려는 자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의 저주에서 놓인다.

 

부가적용)

우리가 받는 구원과 영생의 복은 율법으로 받게 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믿음으로 받게 된 복이다.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고 했는데 왜냐 하면 율법으로 의를 얻고자 하는 자들은 율법 책에 기록된 모든 계명을 지켜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율법의 저주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누구나 율법을 지킬 수 없으므로 율법의 저주 아래서 살게 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율법으로는 의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적인 의를 요구하지 않으신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의를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의를 견고히 잡아야 한다.

 

•영감의 교훈•

▶ 무한한 대가

“그리스도께서는 접촉할 수 있는 범위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고자 오셨다. 갈바리의 십자가에서 그분은 잃어버린 세상을 위하여 무한한 구속의 대가를 지불하셨다. 그분의 극기와 자아 희생, 그분의 이기심 없는 활동, 그분의 굴욕, 무엇보다도 그분의 생명을 내어 주신 것은 타락한 인류를 위한 그분의 사랑의 깊이를 증거한다. 그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교회증언 5권, 603).

 

예비일(금) 10월 28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우리의 대리자요 보증인이 되시는 그리스도께 우리 모두의 죄가 놓여졌다. 우리를 율법의 정죄에서 구속하시려고 그분은 범죄자로 헤아림을 받으셨다. 아담의 모든 자손의 죄가 그분의 마음을 눌렀다. …죄인들의 괴수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시는 것이 그분의 과제였다. 그러나 이제 그분이 지신 죄의 엄청난 무게로 인하여 그분은 화해를 나타내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이 최대의 고민의 시간에 구주께로부터 하나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돌리심으로 인하여 인간이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슬픔이 그분의 마음을 찔렀다.

…그리스도께서는 범죄한 인류를 위하여 더 이상의 자비의 탄원이 없을 때에 죄인이 느끼게 될 고민을 느끼셨다. 그분이 마신 잔을 그처럼 쓰게 하고 하나님의 아들의 심장을 파열시킨 것은 인류의 대속자인 그분에게 아버지의 진노가 쏟아지게 만든 죄에 대한 의식이었다”(시대의 소망, 75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오늘날에도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믿음으로 얻은 구원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중요한 진리를 수용하지 못하는 배경은 무엇일까요?

 

➋ 바울은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의 신학적 오류를 강하게 지적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바른 신학의 중요성에 대하여 무엇을 배우게 됩니까? 누군가 오류를 가르치고 있다면 우리는 교회로써 어떻게 강력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습니까?

 

요약: 그리스도인 삶의 시작부터 끝까지 구원의 기초는 오직 믿음 위에 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 칭함을 받은 이유도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그의 믿음 때문이었다. 오늘날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동일한 의의 선물을 받을 수 있다. 우리가 잘못해도 정죄받지 않는 이유는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죗값을 치르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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