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도입과 부가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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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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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2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47분
도입)
어느 부자가 롤스로이스로 사막을 횡단하는 모험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사막 한가운데서 차가 고장 나 버려 완전히 못 움직이게 되었다. 부자는 어쩔 수 없이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챙겨둔 무전기로 롤스로이스 측에 고장신고 연락을 했다. 그러자 저~ 멀리 수평선 너머에서 대형 헬기가 나타나더니 그에게 번쩍번쩍한 새 롤스로이스 신차를 내려준 후, 고장난 차를 싣고 떠나버렸다. 어안이 벙벙하면서도 그 엄청난 대응속도와 일처리에 감탄한 그는 그대로 무사히 사막횡단 여행을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롤스로이스 측에서 아무런 연락이나 청구서가 날아오지 않았다. 새 차를 헬기로 보내준 만큼 분명히 비싼 돈이 청구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의심스럽게 생각한 그는 롤스로이스 측에 찾아가 물어보았지만, 담당자는 그런 서비스는 들어본 적도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너무나 황당했던 그는「아니 분명히 내가 사막에서 여행할 때 차가 고장나서...」 라고 말했지만, 그 순간 담당자는 그의 말을 끊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고객님, 저희 롤스로이스는 고장 나지 않습니다」영국의 롤스로이스(Rolls-Royce)는 어떤 차인가? 세계 최강의 명예와 자존심을 자랑하는 최고급 초호화 수제 자동차이다. 전세계적으로 연간 6천여 대만 생산해서 1천여 대밖에 팔지 않는다. 컨베이어 같은 양산 시스템의 도움이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일이 기술자의 수작업으로 만든다. 차 한 대 만드는 데 꼭 사람처럼 10개월이 걸린다. 그러니 자동차 값부터도 수십억을 호가하는 비싼 가격이지만, 아무리 돈이 많아도 구매자의 신분이 자격 미달이면 팔지 않는다. 구매자의 유동 자산이 최소한 3천만 달러 이상이 되어야 하고, 그에 합당한 명예와 인격,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지위를 갖춰야 한다. 이 롤스로이스는 세계에서 가장 우아하게 달리는 자동차로 알려져 있다. 시속 125km로 달려도 차 안에서는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밖에 들리지 않고 커피 잔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괜히 명품이 아니다. 롤스로이스를 한 대 사면 이 차를 만들고 검사하는 모든 과정이 기록된 역사책이 한 권 동봉된다고 한다. 한번 고객에게 판매된 차는 폐차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회사가 그렇게 자기네 명예를 걸고 끝까지 책임진다. 저 부자의 일화가 실화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나님의 칭의 교리에 대해서 잘 설명할 수 있는 예화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 문제에 관한 한, 겨우 병 주고 약 주는 식의 땜질 처방을 준비하시지 않았다. 구원은 죄사함 그 이상이다. 죄만 용서하는 게 아니라 아예 그걸 깨끗이 잊어 기억도 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의롭다고까지 인정하신다는 것이다. 구원받은 우리 개개인을 롤스로이스보다 훨씬 더 귀중한 인격체로, 아예 예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것이다. 이 너무나 놀랍지 않은가? 그 놀라운 계획을 안다면,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할 줄 뻔히 알면서 왜 선악과나 만들었나?" 같은 불평은 절대 안 하게 된다. 평소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던 감정, 교회의 같은 지체들 사이에서 불편하던 감정, 쓴 뿌리 같은 것도 100%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은 그냥 해소된다. 큰 숲을 보는 안목이 생기면, 작은 나뭇가지 사이에서 아웅다웅하는 다툼은 거의가 무익하고 의미 없다는 걸 깨우치기 때문이다. "고객님, 저희 롤스로이스는 고장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는 애초에 죄를 지은 적이 없다." 히 10:16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10:17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10:18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기억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연구 범위: 갈 2:15~21, 엡 2:12, 빌 3:9, 롬 3:10~20, 창 15:5~6, 롬 3:8.
결론: 믿음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용서와 회복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분 앞에 나갈 수 있게 해 줍니다. 믿음을 통해 우리는 자아에 대해서 죽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서 그분의 생명으로 사십니다.
첫째 날(일) 10월 16일
“칭의”의 문제
도입)
칭의는 사람이 죄를 짓지 않은 것 같이 의롭게 되는 것을 하나님의 선포하시는 행위다. 이것은 죄의 용서 이상의 것으로서 죄의 용서는 죄의 형벌에서 자유함을 얻는 것이지, 죄책감에서 자유함을 얻지는 못하는 것이다. 칭의는 모든 죄책감과 죄책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가령 여기에 나라에 죄를 범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주지사는 이 사람을 용서해 주었지만, 죄책감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칭의란 하나님이 죄인을 용서해 주실 뿐 아니라, 그 사람을 죄가 없는 의로운 자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주지사가 주는 죄의 사면을 거절하고, 죄의 용서뿐 아니라 전혀 무죄하다고 선포해 줄 것을 요구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죄의 형벌에서 구원하실 뿐 아니라, 지옥으로부터 구원해 주실 뿐 아니라, 죄를 전혀 짓지 않는 것과 같이 만들어 주는 것을 의미한다. 칭의는 죄책감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 범죄한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전혀 죄를 짓지 않은 것같이 선포(Declare)하는 것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전혀 흠이
없는 것처럼 되는 것이다. 복음은 단지 구속, 죄사함, 칭의, 화목, 정결케 함, 거듭남 등과 같은 문제들만 포함하지 않는다. 이런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한 방면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에는 하나의 목표가 있다. 그 목표는 아들의 명분이다. 이것은 구속, 죄사함, 칭의, 화목, 정결케 함, 거듭남 등의 모든 것이 그분의 표현이 되는 많은 아들들을 가지시려는 하나님의 갈망의 성취를 위한 것임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은 영화롭게 된 아들들로 조성된 한 몸을 통해 그분이 표현되시는 것이다. 원래 하나님에게는 다만 한 아들, 즉 그분의 독생하신 아들만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성취되었기 때문에, 그분에게는 많은 아들들이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수백만의 죄인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갈 2:16).
교훈: 바울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위임받은 백성이라는 사실을 인정했지만, 의롭게 되는 길은 그 특권과는 무관한 것임을 분명히 했다.
부가적용)
누가 칭의를 필요로 한가? 우리 모두이다.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했고, 로마서 3장 10절에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했다.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분이므로, 죄인으로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의의 옷을 입혀주시고, 죄가 하나도 없는 사람과 같이 만들어 주시고 선포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다 칭의의 은혜가 필요한 것이다. 카네이션 씨의 예화(例話)는 이것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카네이션 씨가 흙 속에 넣어지면 그 씨는 죽는다. 그러나 이 죽음은 부활을 위한 길을 예비한다. 결국 그 씨는 싹트고 성숙한 식물로 성장하여 카네이션 꽃들을 맺는다. 카네이션이 꽃이 필 때, 그것은 인정된다. 카네이션 꽃은 카네이션 씨의 인정됨이다. 카네이션씨는 표(딱지)를 붙임으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땅 속에 묻힘으로써 꽃피는 카네이션으로 성장함으로 인정된다. 이는 카네이션 씨가 그 속의 생명에 의해 인정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즉 그것은 생명에 의해 인정된다. 만일 내가 흙 속에 돌을 넣는다면 돌 안에는 생명이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카네이션 씨가 땅속에 두어진 다음에는 그 속의 생명에 의해 인정될 것이다. 동일한 원칙으로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을 때, 그분은 그분 안에 있었던 거룩의 영에 의해 부활로써 능력으로 인정되셨다. 이제 그분은 전보다 더 놀랍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 왜냐하면 지금 그분은 신성한 본성과, 부활되고 변화되고 높이 올려지고 영화롭게 되고 인정된 인간 본성을 다 가지셨기 때문이다. 신성과 인성을 다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이제 하나님의 아들들을 대량 산출하기 위한 원형이며 모형이시다. 하나님은 오직 한 아들, 즉 독생자만을 갖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그분은 많은 아들들을 갈망하시는데, 그들은 모두 맏아들의 대량 산출이다. 로마서 1장에는 원형이 있지만 8장에는 대량 산출이 있다. 8장은 독생자가 많은 형제들 중의 맏아들이 되심을 분명하게 계시한다.
•영감의 교훈•
▶ 무력감에서 얻는 힘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영광을 티끌 속에 내던지고,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인간을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이다”(목사와 복음교역자에게 보내는 증언, 456).
둘째 날(월) 10월 17일
율법의 행위
도입)
율법은 나를 보게 하여 주님에게로 나아가게 한다. 율법은 등대이다. 높은 곳에서 나를 조명한다. 그 무엇으로도 구원이 불가능한 존재임을 비추인다. 오직 주님의 대신하심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알게 한다. 그래서 율법으로 나갈 수 없고 오직 은혜의 주님으로 가게 한다. 갈라디아서는 어떤 사람이 갈라디아에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주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은 사실이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또한 율법을 행해야 한다."고 말했음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들은 믿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기를 원했지만, 그들은 또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바울의 말은 매우 강하다. "만일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주 예수를 믿고서도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고 죄인으로 나타나며 여전히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마치 내가 병에 걸렸을 때 십 일 동안 어떤 의사의 진료를 받다가 병이 여전히 낫지 않아서 다른 의사를 불러오는 것과 같다. 만일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여전히 율법을 지켜야 한다면, 나는 아직 구원받지 못한 죄인이라는 말이다. 만일 내가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면 나는 다시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게 된다. 그러나 만일 내가 여전히 죄인이라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인가? 바울은 내가 주 예수를 믿고서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했다면 주 예수님이 나로 죄를 짓게 하는 자냐고 말한다.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신약에서 바울은 수차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는 말을 언급했다. 헬라어에서 이 단어는 성구(成句)이고, 영어로 번역하면 'God forbid'로서 바로 고서(古書)에서 말하는 '하늘이 금하셨다'는 뜻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이다. 하늘이 이것을 금하고 거절하며 하늘에는 이러한 법이 없다. 그러므로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것에다 또 율법을 지키는 것을 추가할 수 없음을 보아야 한다.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교훈: 바울이 말하는 “율법의 행위”란 구약의 모든 율법에 순종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김을 받으려는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적 자세였다.
부가적용)
우리는 다시 로마서 3장으로 돌아가자. 여기서 우리는 바울 형제의 분명한 한 마디를 볼 수 있다. 28절 :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이것은 결론을 짓는 말이다. 지금은 믿음의 문제이고 율법과는 조금도 상관이 없다.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예수님으로 충분하다. 성경이 믿음을 중요시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중요시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우리가 모든 것을 다만 받아야 함을 보여 준다. 어떤 사람은 복음을 전할 때에 사람을 높이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성경을 안다면, 하나님의 역사하심 외에 사람에게는 어떤 길도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다음 두 마디를 기억해 두라. 즉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율법을 행함으로써가 아니요 믿고 또 율법을 행함으로써도 아니다." 믿음에 율법을 섞어 놓는 이것이 보편화된 첫 번째 부류의 오류이다. 복음으로, 사랑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산다. 율법의 정죄를 받지 않고 복음으로 산다. 주님의 섬기심으로, 사랑으로 산다. 그리고 율법으로 다시 일어난다. 버림 받음과 두려움이 아니라, 종이 아니라 새생명과 사랑을 나의 온 세포에 주입하며 율법을 이룰 수 있는 주님의 자녀로 세워진다. 나는 이렇게 변화된다. 주님의 자녀로 새로워진다. 율법으로 죽고 율법으로 산다. 율법은 복음과 하나 된다. 율법을 주님에게 감사드린다. 유대인들 중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율법을 따른다고 했지만 실제로 미쉬나라는 율법의 규범집을 따랐다. 안식일에 밀 이삭을 먹은 제자들을 비난한 것은 율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규례에 의하여서이다. 율법을 해석한 인간의 규례가 유대인에게 오히려 짐이 되었다. 유대인을 속박하고 억압하였다. 자신의 교리나 신조가 절대로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바리새인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 결코 성경과 같은 위치에 놓일 수 있는 교리나 신조는 없다. 인간의 교리나 신조로 상대방을 배척하고, 적으로 간주하기까지 한다.
•영감의 교훈•
▶ 칭의는 용서의 동의어
“회개한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뉘우치고 그리스도의 속죄가 그를 위한 것임을 깨닫고 이 속죄를 이생과 내생의 유일한 소망으로 받아들일 때, 그의 죄가 용서를 받는다.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이다. 모든 믿는 영혼은 자신의 뜻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일치시키고 회개와 뉘우침의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구속자의 속죄의 공로를 믿는 믿음을 나타내어 능력에서 능력으로, 영광에서 영광으로 전진해야 한다. 용서와 칭의는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다”(믿음과 행함, 103).
셋째 날(화) 10월 18일
칭의의 기초
도입)
칭의란 무엇인가? 칭의란 하나님의 의(義)의 표준에 따라서 사람들을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표준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의(義)이며 우리의 의(義)가 아니다. 우리가 의롭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의는 보잘 것 없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의롭거나, 의롭다고 생각할지라도 우리의 의는 그 높이가 한 치도 못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義)는 얼마나 높은 것인가? 그것은 무한대(無限大)이다. 당신의 의(義)는 하나님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당신은 어떤 사람-당신의 부모, 당신의 자녀, 당신의 친구-에게는 의로울지 모르지만 당신의 의(義)는 하나님 앞에서 당신을 의롭게 하지 못한다. 당신은 당신의 의(義)의 표준으로 당신 자신을 의롭다 할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표준에 따라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는 없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믿음에 의한 칭의란 우리가 하나님의 의(義)의 표준에 따라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어떻게 이것을 하실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실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칭의가 그리스도의 구속에 근거(根據)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이 우리에게 이루어질 때 우리는 의롭다 함을 받는다. 만일 그러한 구속이 없다면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구속은 칭의의 근거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말하기를 자기들은 그리스도의 의(義)를 갖고 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말이다. 우리는 이렇게 말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의(義)는 그리스도의 의(義)가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인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의(義)의 속성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자로서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義)가 되셨다(고전 1:30). 그리스도의 의(義)가 우리의 의(義)가 되었다고 말하지 말라.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나의 의(義)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의(義)는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인격이시며 하나의 속성이 아닙니다. 의로우신 그리스도가 나의 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체현(體現)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의 의로 만드셨다. 칭의 교리는 인간의 노력을 통해 구원받으려고 하는 모든 종교나 철학이나 도덕의 자력 구원을 부정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말해 주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9).
교훈: 칭의의 기초는 율법의 행위나 우리의 믿음에 있지 않고,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행함과 그분의 신실함에 있다.
부가적용)
로마서 3장 24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 받는다는 것을 본다. 은혜란 하나님이 값없이 주신 또는 행하신 어떤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며 나타남이다.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우리를 값없이 의롭다 하셨다. 그러므로 칭의란 값없는 선물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의롭다 함을 받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다. 이것은 하나님이 의로우시기 때문에 그분이 그분의 은혜로써 우리를 의롭다 하실 합당한 근거를 가지셔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구속을 떠나서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 하실 근거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속은 필요하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에 대한 은혜를 갖게 하시며 그분의 의는 그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한 구속을 성취하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롭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문제이자 우리를 위하여 성취하신 하나님의 의의 문제이다. 그래서 칭의란 그분의 의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이다.
•영감의 교훈•
▶ 믿음에 대한 오해
“믿음에 공로를 둘 때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에 위험이 생긴다”(믿음과 행함, 25).
넷째 날(수) 10월 19일
믿음의 순종
도입)
믿음의 순종은 신앙의 바탕이라 말할 수 있다. 믿음이란 진리에 대한 확고한 신뢰이다. 진리란 '아버지의 말씀'(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다른 무엇에 대한 확고한 신뢰가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에 대하여 변치 않는 확고한 믿음인 것이다. 순종이란 진리에 대한 확고한 실행이다. 진리(아버지의 말씀)을 실행하는게 순종인 것이다. 하지만 신앙에서의 순종은 단순히 행동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믿는 바를 실행하는 굳센 의지를 순종이라 말할 수 있다. 먼저는 믿음이다. 말씀(진리)에 대한 믿는 바이다. 그리고 다음에 순종인 것이다. 즉, 믿는 바(믿음)을 실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겠다. 믿음을 실행하는게 순종이다. 믿음이 아닌 것을 실행하는 행동을 두고 순종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믿음이 아닌 것을 실행하는 행동은 얼마든지 많다. 말씀이 아닌 것들을 실행하는 행동을 두고 순종이라 할 수 없다. 그러하기에 믿음이 먼저인 것이다. 믿음이 있고 난 후에 그 믿음을 실행에 옮기는게 신앙의 순종인 것이다.
교훈: 믿음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우리의 반응으로써 우리의 정신뿐 아니라 삶의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친다.
부가적용)
믿음은 믿음 자체만으로도 놀라운 복이요 의미가 있다. '믿음'이란 간혹 추상적 신념을 토대로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대개는 '경험'을 근거로 형성되기 마련이다. KFC(켄터키 프라이드치킨) 이야기: 전 세계에 체인점을 둔 미국 튀김 닭 기업. 켄터키가 20대 초에 사업 실패, 아내 도망가. 자살하려고 수면제 먹었는데, 누가 발견하고 병원에 대려가. “누가 날 살렸느냐?”소리치며 주사도 안 맞고 먹는 것도 거절하고 3일을 지냈다. 그런데 이른 아침에 어떤 여인이 잔잔하게 부르는 노래 소리 들렸다. “내주를 가까이 하게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찬송 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복도 문을 열어보니, 청소하는 초라한 흑인 여인. 그런데 얼굴은 밝고 평화로운 모습에 그에게 물었다. “아침부터 뭐가 그리 기뻐서 노래를 부르느냐?”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니 때문에 항상 기뻐요. 청년은 예수님 안 믿어요?” 그 여인과 자주 대화하다가 예수님을 영접했다. 퇴원 때 그 여인이 적은 돈을 주었어요. 그 돈으로 닭 한 마리 사서 튀겼는데, 너무 맛있어서 혼자 먹어버릴 수 없어. 부위별로 잘라 팔아- 그 돈으로 닭 세 마리를 사서 튀겨 팔아- 9마리를 사서 또 튀겼다.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그는 항상 찬송대로 주님을 가까이하면서 일하여 세계적인 부자가 되었다. 양로원과 고아원들을 만들고 수많은 선교사들을 돕고 많은 일을 해. 그가 죽었을 때 미국 남부의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한다. 그 여인의 확실한 믿음의 열매이다. 확실한 믿음은 이렇게 자신만이 아니라 남을 온전하게 세워준다.
•영감의 교훈•
▶ 믿음이란
“믿음은 우리의 무지 대신에 하나님의 지혜를, 우리의 약한 것 대신에 하나님의 힘을, 우리의 죗된 것 대신에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받아들이게 한다. 우리 생명, 우리 자신은 이미 하나님의 것이 된다. 믿음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축복을 받아들인다”(교육, 253).
다섯째 날(목) 10월 20일
믿음이 죄를 조장하는가?
도입)
율법이 구원을 약속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율법을 헌신짝처럼 취급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형식적인 율법주의를 배척했지 율법 그 자체를 배척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형식적이고 의례적으로 드리는 십일조에 대해 금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드리는 십일조가 하나님의 義, 忍, 信을 위해서 드리도록 요구하셨을 뿐이다.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마태복음 23장 23절) 내용은 중요하다. 그것을 담는 틀, 형식, 시스템도 중요하다. 다만, 내용보다 형식만을 중요시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대개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부류에 속한다. 한 번 어긋난 화살은 멀리 갈수록 과녁에서 벗어난다. 궤변이 궤변을 낳더니 마침내 “선을 위하여 악을 행하자”는 말까지 나온다. 이 모두가 인간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는 착각의 결실이다.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말은 옳다. 그러나 죄가 많기 때문에 은혜가 넘치는 것은 아니다. 낮에 켠 촛불보다 밤에 켠 촛불이 더 밝게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밝게 보이는 것일 뿐, 밤이기 때문에 촛불이 더 밝은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갈 2:17).
교훈: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소식은 죄를 더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과의 더 깊은 관계로 우리를 초청한다.
부가적용)
의사는 병을 치료하는 데에는 자신이 있지만 병명이나 병의 원인을 찾아내는 일에는 고가의 장비를 이용한다. 사람의 경험만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암은 육안이나 문진으로 찾을 수가 없다. X-레이기로는 위암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최근에는 최첨단 정밀 검진기를 통해 어지간한 병인은 다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그 다음은 의사가 할 일이다. 치료방법을 찾아서 치료하는 것은 의사의 몫이다. 화타가 다시 살아온다 하더라도 병명과 병인을 알아내지 못한다면 치료할 방법이 없다. 암은 초기에 자각증상이 없다. 죄도 그렇다. 처음부터 큰 죄를 짓는 것이 아니다. 마귀는 얼마나 간교한지 모른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죄가 슬금슬금 우리의 모든 생활에 침투할 때까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암이 퍼져 더 이상 가망이 없을 때 고통은 시작된다. 죄 또한 그렇다. 암은 초기에 발견하면 생명은 건진다. 죄 또한 커지기 전에 회개하고 돌아서면 작은 징계로 구원을 받는다. 암을 발견하는 것은 의사가 아니다. 우리의 죄를 발견하는 것은 목사가 아니다. 암은 고도의 정밀 진단기계를 통해서만 발견될 수 있다. 죄 또한 율법이라는 검진장치를 통해서 발견된다는 점이다. 율법은 우리의 죄를 걸러내는 장치인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죄인인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 죄가 퍼져서 죽을 지경이 되어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는 순간, 살길은 열린다. 그래야 십자가를 붙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모세의 놋뱀을 보는 순간 생명을 얻듯이 십자가를 붙잡는 순간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죄를 깨닫지 못하면 십자가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다. 기독교 복음은 죽음으로써 다시 사는 역설이다. 죽지 않고는 다시 살 수 없다는 것이다. 나의 의지, 나의 유익, 나의 감정, 나의 자아가 죽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은 율법의 행위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율법은 사람에게서 하나님께로 행해야 할 법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 주어진 은혜이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기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할 수 있게 하셨다. 얻을 수 있게 하셨다. 이룰 수 있게 하셨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야 한다.
•영감의 교훈•
▶ 믿음은 회개와 갈망을 낳는다
“그리스도는 모든 옳은 동기의 근원이 되신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 마음 가운데 죄에 대한 증오심을 넣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진리와 순결에 대한 모든 욕망-우리 죄에 대한 모든 감각-은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의 마음에서 활동하시는 증거이다”(정로의 계단, 26).
예비일(금) 10월 21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가려 뽑은 기별, 367.
“한 백성으로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에 대해 잘못된 사상들을 받아들일 때의 위험이 나에게 반복해서 제시되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사탄이 이 관점에 대하여 마음을 혼란시키기 위해 특별한 방법으로 활동하는 것을 보았다. 마치 가인의 제사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율법과 그분과의 관계를 거의 인식하지 못한 채 하나님의 율법이 회중들에게 크게 강조되고 제시되어 왔다. 나는 구원에 대한 잡다하고 혼란한 사상들 때문에 그리고 목사들이 잘못된 방법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접근하고자 활동해 왔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믿음으로부터 분리된 것을 보았다. 수년 동안 나의 마음에 강조되어 온 요점은 그리스도의 입혀진 의이다. …타락한 인간이 자신의 가장 좋은 선행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보다 더욱 열렬하게 강조하고 더욱 빈번하게 되풀이하고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더욱 확실하게 정립시켜 주어야 할 필요가 있는 요점은 없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믿음과 행함, 18~19).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위의 인용문에서 엘렌 화잇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보다 더 강조할 주제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 권면이 오늘날에도 해당되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토론해 보십시오.
➋ ‘만약 율법을 통해 의롭게 된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헛되다.’는 바울의 말은 무슨 뜻이라고 생각합니까?
요약: 안디옥에서 보여 준 베드로의 행위는 할례를 받지 않으면 이방인들은 진정한 신자가 될 수 없음을 암시하였다. 바울은 그러한 사고의 오류를 지적하였다. 하나님은 인간의 어떤 행위도 의의 기초로 삼으시지 않았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는 유일한 길은 그분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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