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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의 역학(力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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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의 역학(力學)

 

예배의 결과는 엄청난 에너지가 생성되는 것이어야 된다고 본다.

 

이 엄청난 에너지가 예배에서 어떻게 생성 될까?

이 에너지는 바로 우리의 생명력이기도 하다.

 

예배의 목적은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 경배 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예배는 반드시 지성소에서 만 드려야 한다.

왜냐, 하나님은 반드시 지성소에서 만 인간을 만나실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신다면 그 곳은 바로 지성소가 구성 되어야 만 한다.

이러한 구성이 없이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면 인간이 소멸 되기 때문이다.

 

원형의 지성소가 하늘에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지성소의 기능은 어디에나 있을 수가 있다고 본다.

지성소를 이룰 수 있는 기능은 아래 네 가지로 구성이 된다.

 

1.     하나님

2.     죄인

3.     계명

4.     속죄의 피

 

이 것 중 한가지만 빠져도 지성소의 기능은 이루어 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이 것 중 한가지만 빠져도 예배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

예배는 인간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1,2 만 가지고 예배를 보는 많은 교회가 있다.

1,2,3 만 가지고 예배를 보는 많은 교회가 있다.

1,2,4 만 가지고 예배를 보는 많은 교회가 있다.

 

* Note: 여기의 1 은 하나님 이름만 가지고

 

위의 것들은 다 참 예배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세상의 거의 대부분의 교회들이 이러한 예배들에 만족하고 있다.

 

십계명을 하나로 집약 한다면,

안식일 계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안식일은 계명의 표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안식일은 시간 속의 지성소이다.

십계명이 있는 곳이 바로 지성소이기 때문이다.

이래서, 하나님을 만나려면 지성소인 안식일 날 예배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지성소에 들어가 보자.

죄인이 하나님 앞에 설 때는 죽어야 한다.

이유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그 계명 때문이다.

그래서 계명이 있는 곳에 인간과 하나님이 대치하게 되는 것이다.

이 대치상황을 해소해 주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피다.

이 속죄의 피만이 대치 상황 즉 인간을 죽음에서 보호해 줄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용서의 에너지가 우리 두뇌에 감동을 줄 때

이것은 바로 생명력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지성소-> 회개 -> 보혈 -> 용서 -> 사명

 

이러한 참 예배의 한 모델을 우리는 이사야 6 2~8 에서 볼 수가 있다.

한 인간 이사야가 지성소에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모습이다.

 

(1)   “스랍들은 모셔 섰는 데”(2)

                  지성소: 경배 드리는 곳

               

(2)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부르짖는다”(5)

      회개: 지성소의 계명이 회개를 하게 만든다.

     

(3)   “단에서… 핀 숯을 ..내 입에 대며”(7)

      보혈: 그리스도의 희생을 말함이다.

     

(4)   “네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7)

      용서: 경배의 결과로 용서를 받는다. 그리고 구원과 부활을 경험한다.

     

(5)   “내가 여기 있나이다”(8)

      사명: 기쁨으로 사명감을 갖게 된다.

 

위의 일련의 순서가 참 예배에서 일어나야 하는 이벤트들인 것이다.

 

이 순서가 바뀌어도 안 된다.

예를 들면 교인들에게 사명감(5)을 고취시키면서 그 결과로 구원(4)을 얻을 수 있다는 암시를 주는 것은

하나님의 뜻도, 참 예배도 아니며 인간을 죽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명감(5)은 용서와 구원(4)을 얻은 결과인 기쁨으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가

순서라 생각한다.

여기서 우리는 몸의 생리적인 미케니즘을 잘 이해 할 필요가 있다.

(4) 의 경험 없이 (5) -> (4) 로 가게 되는 것은

우리 두뇌에 스트레스 홀몬을 생산하게 되여 결국 우리 몸을 망하게 한다.

그러나 (4)->(5) 로 진행되는 것은 우리 두뇌에 활기를 주는

각종 호르몬들을 내뿜게 해 우리 몸에 생명력을 주는 요소가 된다고 본다.

어느 것이 옳고 틀린 지는 우리 몸이 판단해 준다.

잘 못된 예배는 우리를 파괴 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모세, 그도 지성소의 사람이었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25 22)

 

예수님이 왜? 유독 안식일 날 병자들을 많이 고치셨을까?

단지, 선한 일을 보이시기 위함이 였을까?

아니다!

결코 아니다!

그것은 참 예배를 보이시기 위함이다!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7:48)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5:20)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9:2)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반신불수가 뛰어 다니는 그 힘은,

“죄 사함” 즉 용서의 힘이 였다.

 

“죄 사함”은 지성소에서 만 일어나는 일이다.

 

                 “예수께서 초림하신 목적중의 하나가 바로 이 예배의 개혁과 갱신에 있었다. 유대교의 죽은 예배를 

                 탈피하여 전혀 다른 예배를 확립하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하실 사업이었다.(DA 157)

 

 

예배는

지성소에서,

십계명 앞에서,

우리의 속절없음을 절망하며,

예수의 속죄의 피를 사모하게 하여,

용서함을 받고,

일어나는 엄청난 감동 에너지 즉 생명력,

부활을 경험케 하는 것이며,

그로 인하여 헌신의 마음이 용솟음 치며 기뻐 날뛰는

현장이 바로 예배다.

 

이 용서의 감동에너지는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힘이며,

소경이 눈을 뜨는 힘이며,

부활과 해방을 경험케 하는 생명력 그 자체인 것이다.

 

나 자신의 약함을 더 낮게 느낄수록,

예수님의 보혈의 피의 그 고귀함을 더 높이 느낄 수록,

감동 에너지의 폭은 더욱 커지게 될 것이며,

그 생명력은 더욱 강렬해 질 것이다.

 

이 일은 지성소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인간이 만들어 낼 수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예배를 설교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어느 인간이 설교 하나로

이러한 생명력을 창출해낼 수 있겠는가?

 

이러한 원리로 볼 때,

세상의 거의 대부분의 교회들이 참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대부분은 이 지성소의 기능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지성소 대신 자기가  자리에 앉아,

하나님 대신 교인들에게서 섬김을 받고,

명예와 돈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교회들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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