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과 계시록에 나타난 예배(도입과 부가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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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과 계시록에 나타난 예배
9월 24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27분
도입)
우리가 생각하는 순수하고 진실된 예배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하지만 매우 깊은 뜻을 담고 있다. 순수하고 초월적인 예배는 근본적인 예배이며 영원한 예배이다. 이 예배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자 더 높은 예배이다. 모든 예배의 그 중심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신다. 그리스도의 행하심이 모든 예배의 핵심이 된다.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을 향한 예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또한 예수님을 향한 영적인 예배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계시록에 나타난 예배의 참된 정신을 이해하고 그 예배의 원리를 깨닫는 것이 참된 예배의 내용이 되어야 할 것이다.
기억절 :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 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계 14:3).
결론: 우리의 왕이요 창조주시며, 심판자요 구세주이신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은 우리에게 최고의 기쁨입니다.
첫째 날(일) 9월 18일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도입)
가끔씩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더 이상 예배 같지 않을 때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예배에 ‘잡동사니’들을 많이 혼합시켜왔다. 그래서 우리가 경험하는 예배는 점점 더 비현실화 되었다. 대중문화에 속해 있는 상당수의 사람들은 지속적인 혼란과 문제들 속에서 안정감을 누리지 못한다.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그냥 인상이 좋으신 분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전율을 느끼거나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교회로 와서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예배 후에 사람들의 말을 귀 기울여보면 “오늘 예배 괜찮았나요? ”나는 그다지 건진게 없었어요,“ 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저들이 정작 예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들은 예배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예배는 오직 주님이 보시기에만 합당하게 해야 하며 오직 주님이 들으시기에 합당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종종 우리가 느끼기에 좋은 모습을 보여주거나 듣기 좋은 소리를 시현하는 정도에 그치고 만다. 고객 지향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예배의 풍경이다. 이러한 종류의 예배는 ‘기분 전환’에 있다. 이런 ‘예배’는 순간적으로는 풍성하게 보일지라도 진실되지 못하다. 그리고 결국 공허함만을 남긴다.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진정한 예배는 우리의 환경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예배는 신비 그 자체이며 영적인 것이다. 예배를 강력하게 만드는 것은 기교가 아니라 마음이다. 환상적인 음악이나 인간의 저작물들을 온종일 접할 수 있겠지만 이것들은 외형적인 면만을 담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겉모양이자 외형일 뿐 예배의 핵심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기교가 아닌 우리의 마음을 읽으시고 우리의 마음을 받기를 원하신다.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계 1:17).
교훈: 온 우주의 창조자 앞에 선다는 생각은 우리에게 두려움과 경외심 그리고 회개의 마음을 일으킨다.
부가적용)
우리의 예배에서는 우리의 역동성이 부족하고 참된 경외심이 결여되어 있다. 우리가 만드는 예배의 참된 동력은 우리의 마음에서 표현되는 우리의 헌신이다. 만약 우리 내적인 마음속에 이런 예배자의 자세가 없다면, 우리가 표현하는 기교적인 산출물들은(그것이 잘 표현되고 진실 되어 보인다 할지라도)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될 뿐이다. 많은 경우에 교회의 예배에 사람들의 ‘기분 전환’에만 몰두한다. 그들은 보기에는 좋지만 가치가 없는 것들과 듣기엔 좋지만 깊이가 없는 음악들을 중요하게 여긴다. 오늘날 사용가능한 다양한 종류의 예배 모델이 존재한다. 교회지도자들이 최신 유행하는 예배 스타일에 맞추려고 혈안을 한다. 그러나 천국에서 드려지는 예배의 내용과 그 초점은 하나님이시다. 곧 주님의 성품과 속성, 주님의 행하심과 주의 기뻐하심에 있다. 예배는 거룩한 아름다움이다.
•영감의 교훈 •
▶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분의 눈에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분 앞에서 두려워 떨어야 할 것이다. 고대에 하나님께서 거룩하다고 선언한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맞이한 최후로부터 현대인들도 경고를 받아야 한다”(치료봉사, 435).
둘째 날(월) 9월 19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도입)
천상예배의 초점은 하나님과 그분의 거룩하심이다. 그것은 천상예배가 암시하는 다른 모든 것들 위에 거룩하심의 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거룩하심의 속성만이 삼중으로 선언하신 수준에 이르게 되고, 그곳에 계셔야 할 중요성을 나타내신 것이다. 성경은 강조를 위한 문학적 도구로 반복을 사용한다. 오직 한번이 아닌 하나님의 속성이 연속적으로 세 번 언급되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거룩, 거룩, 거룩하시다라고 하셨다. 성경은 결코 하나님은 사랑, 사랑, 사랑이라고 말씀하시거나 자비, 자비, 자비라고 하시거나 진노, 진노, 진노라고 하시거나, 공의, 공의, 공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성경은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그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다고 말씀하고 있다. 특히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 속성을 다른 모든 것 위에 알려지기를 원하셨던 같다. 타에슨(Thiessen)은 쓰기를,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하나님께서 산에 내려오심으로 그 시내산에 세웠던 영역에 의해 강조된다. 성막의 구분과 성소와 지성소로 나뉜 성전의 구분으로. 이스라엘 사람이 하나님께 접근하려면 가져와야 하는 제물을 규정함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하는 특별한 제사장 제도에 의해서. 부정에 대한 많은 율법 규정을 둠으로. 이스라엘 절기를 정해 놓으심으로. 팔레스틴에서 이스라엘을 고립시키심으로 거룩을 강조한다고 말했다. 거룩의 개념이 주어지는 중심 위치는 이 속성으로 하여금 하나님 그분의 모든 것을 규정하는 원리가 되게 하고 있다. 그분은 그분의 거룩하심의 기초위에 그분의 전을 세우셨다(시. 47:8). 그리고 거룩함은 하나님 되심의 어떤 것보다 그 이상으로 정의하고 있다. 현대 예배에서는 거의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그리고 가공할 만한 거룩함 때문에 존경하거나 두려워하는 감각이 없어졌다. 오히려 약간의 크리스찬들의 길들여진 무기력한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그들이 소망하는 어떤 태도로든지 접근되어질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 결과로 그들은 하나님과 감명적이지도 않고, 거의 매일의 삶에 부수적인 것으로 그분을 바라보게 된다. 그 초점이 자기 자신이 된 것이다. 행복이나 완성이 모든 절실한 것이 되고, 우리 자신을 부인하라는 성경적 외침과 하나님을 따르라는 것은 단지 어렴풋하게 들려지고 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 5:12).
교훈: 우리가 하늘에 계신 주님께 경배하듯이 하늘도 이 땅에서 행하신 주님의 일로 인하여 그분을 경배하고 있다.
부가적용)
선지자 이사야는 자신의 비전속에서 '단지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 안에서만 삶이 거룩하다'는 사실을 체험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점점 더 거룩한 의미와 판단이 흐려지게 된다. 도대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을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간구하며 기도하는 중에, 우리 자신이 동행하게 된다. 아무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잘 알지는 못한다. 예수님보다 더 좋은 동반자는 결코 없다. 예수님은 바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에서 우리를 불러 주시고 초청해 주신다. 우리는 세번 연이어 "거룩하다"고 반복하는 찬양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을 소리 높여 찬양하는 구절을 마주 한다.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시고자, 십자가에 매달려 스스로 죽음으로써도 모자라 죽음을 넘어서까지 우리와 동행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오실 그리스도 예수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고 찬양해야 할 것이다. 곧 오실 예수 그리스도, 소망이요 생명이요, 임마누엘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거룩하게 찬양하는 복된 하루가 되시길 바란다.
•영감의 교훈 •
▶ 영원한 주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영원토록 구속받은 자들의 연구와 찬양의 대상이 될 것이다”(각 시대의 대쟁투, 651).
셋째 날(화) 9월 20일
요한계시록 13장
도입)
한번은 아프리카의 넓은 평원에 수백 마리의 아프리카 들소 떼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그런데 뱀이 그 중 한 마리의 발목을 물었다. 들소는 깜짝 놀라서 껑충 뛰더니 갑자기 뛰기 시작하였다. 한 마리가 뛰기 시작하니까 옆에 있던 들소들도 영문도 모르고 함께 뛰기 시작하였고 나중에는 수백 마리의 들소 떼 전체가 한 방향으로 뛰기 시작하였다. 수많은 들소 떼들이 뛰고 있는데 뛰는 이유를 아는 들소는 오직 한 마리뿐이다. 왜 나머지 들소 떼들은 정확한 이유도 모르면서 뛸까? 다 뛰는데 나만 혼자서 가만히 있으면 괜히 불안하기 때문에 뛰는 것이다. 마음의 안정과 평안을 위해서 뛰는 것이다. 수백 마리의 들소 떼들이 함께 뛰기 때문에 혼자만 가만히 있을 수도 없다. 뛰지 않으면 다른 들소 떼들 발에 밟혀 죽기 때문이다. 얼마 후에 절벽이 나타났는데 선두에 서서 뛰던 들소가 멈추어 서려고 했지만 뒤에서 밀려드는 들소 떼에 밀려서 절벽 아래로 떨어져 수많은 들소들이 죽고 말았다. 성경은 지구 역사의 마지막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것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다. 성경은 마지막 시대에 전 세계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사형 명령이 내려지는 예언을 말하고 있는데, 이때 들소처럼 군중심리에 의해서 휩쓸려 다니는 사람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짐승의 표를 받을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위에 굳게 서있는 사람들은 순교를 당하거나 살아남기 위해서 궁벽한 곳을 찾게 되는 것이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지구 역사의 마지막 장면이다. 그것은 중세기 종교암흑시대에 핍박을 피하여 알프스 산 깊은 곳으로 숨어 들어갔던 역사를 연상케 하는 사건이 될 것이다.
“그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계 13:15).
종말의 대쟁투는 경배의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될 것이다. 경배는 결코 작은 사안이 아니다.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경배에 달려 있다. 계시록 13~14장은 이런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계시하고 있다. 계시록 13장을 읽고 다음의 질문에 답하라.
교훈: 종말에 이를수록 경배는 대쟁투의 가장 중요한 쟁점이 될 것이다. 진실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절하지 않을 것이다.
부가적용)
요한계시록 13장에는 "짐승에게 경배하니" 라는 말이 5번이나 반복되면서, 마지막 시대에 벌어지는 선과 악의 대쟁투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이 "누구에게 경배"(worship, 예배)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맞추어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시대에 우리 모두가 겪게 될 위기는 각 사람이 어떠한 경배(예배)를 드릴 것인가에 달려 있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것은 거의 모든 세상이 짐승의 편에 서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요한계시록은 말하기를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예배)하리라"고 하였다(계 13:8). 많은 사람들이 "모두 다 그렇게 하는데…."라는 군중 심리를 가지고 아무 생각 없이 다수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이 성경 말씀은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모든 사람들이 다 짐승에게 경배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따른다고 하여 생각 없이 따라가는 일을 조심해야 한다. 심판의 날에 "모두가 다 그렇게 했는데요."라는 핑계는 아무런 효력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단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없애려고 두 가지 작전을 세워 두었다. 첫째 전략은 그들을 죽여서 없애는 것이고 둘째 전략은 그들로 하여금 영적으로 타협하게 만들어서 뒤로 물러가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자들과 함께 하시는데 그러한 자들이 하늘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살 자들이다.
•영감의 교훈 •
▶ 두 예배
“그 갈등의 문제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크게 두 부류 즉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들과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표를 받은 자들로 나누어질 것이다. 비록 교회와 국가가 그들의 힘을 연합하여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계 13:16)로 짐승의 표를 받게 하고자 강요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것을 받지 않을 것이다”(교회증언 9권, 16).
넷째 날(수) 9월 21일
요한계시록 14장
도입)
하나님의 계명 중에서 경배(예배)에 관련된 계명이 있는가? 십계명 중에서 오직 넷째 계명만이 예배와 관련된 계명이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8-11).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 “왜 짐승의 표 환난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사형 명령이 내려지나?” 왜냐하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성도들은 십계명 중에서 예배에 관한 계명인 넷째 계명을 올바로 지킴으로써 짐승의 표를 거절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써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는 사형 명령을 받게 된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짐승의 표를 거절하는 144,000인의 특징을 설명하면서 “성도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고 기록하였고(계 14:12), 바로 그들이 마지막 시대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받을 자들인 것이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계 14:7).
교훈: 안식일은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에게 표징과 인으로 주어졌으며 그 의미는 마지막 때에 크게 부각될 것이다.
부가적용)
우리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 즉 조물주(造物主)와 피조물(被造物)의 관계를 논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조물주(창조자, 조성자, 지은자)요,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우주만물들은 피조물이다. 피조물이라는 말은 만든 자 즉 조물주가 있다는 말이다. 안식일은 바로 이러한 창조주가 계시다는 참된 인정이다. 안식일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제정한 날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 그가 창조주이신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까지 자랐을 때(엡4:13,15)라도 그런 사람과 그리스도와의 구별은 그분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라는 관계이다. 이 관계는 태초로부터 영원까지이다. 안식일은 바로 이런 관계의 표이며, 그것은 피조물로서 인간의 정체성의 표이다. 사람은 어떤 경지에 이른다하더라도 피조물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을 기억하고 그래서 창조주를 경배하고 찬양할 때 자기의 아름답고 행복한 존재와 생명을 유지하게 된다. 이것을 부인하면 곧 그는 창조주를 부인하기 때문에 창조주에게 받은 자기를 반납해야 한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겸손히 인정하고 창조주의 창조하신 섭리 안에서만 피조물이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피조물(被造物)에는 온 우주만물(宇宙萬物)이 포함되므로 인간과 모든 생물체(生物體)도 당연히 포함 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인격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기를 지으신 조물주(造物主)를 찾는 속성이 있는데 그 속성은 고향을 찾는 마음과 종교성으로 나타난다. 연어를 비롯한 동물들은 자기가 태어난 고향을 향해 회귀하는 본능이 있고, 사람도 일생 고향을 그리워하며 사는 것은 고향은 자기가 태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태어난 곳을 찾는 속성도 조물주를 향한 회귀성(回歸性)의 본능(本能)이라고 할 수 있다.
•영감의 교훈 •
▶ 마지막 때 쟁점으로 부각될 안식일
“성경상 안식일을 주장하는 자들을 대항하는 데 있어서 성경 말씀으로 반증할 근거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그 부족을 채우기 위하여 강압적인 법령을 이용할 것이다. 인기와 후원을 얻기 위하여 입법자들은 일요일 법령의 요구를 수락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십계명의 조항을 깨뜨리는 제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싸움터에서 진리와 오류 사이의 마지막 대쟁투가 전개된다”(증언보감 2권, 150).
다섯째 날(목) 9월 22일
하나님께 경배하라
도입)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우리의 마음이 따라가는 예배이다(잠23:26, 신6:4). 이런 예배를 위해 우리가 노력해야 할 몇 가지가 있다. 준비된 예배를 드려야 한다(시130:5-6). 습관성 예배를 드려선 안된다. 찬양에 힘써야 한다(골3:16, 엡5:19). 예배를 방해하는 것들은 과감하게 처리해야 한다. 우리가 마음을 담아 하나님께 예배드리면 이사야처럼 하나님의 보좌와 영광을 볼 수 있다. 우리 영혼의 귀에 은은하게 속삭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자비로우신 품안에 안겨 하나님이 주시는 신비로운 행복을 맛볼 수 있다. 세상의 수고와 슬픔으로 상처 입은 우리의 마음을 싸매어 주시고, 하루하루 힘 있게 살 수 있는 능력을 부어 주실 것이다.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그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두루마리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계 22:8~9).
교훈: 예배란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신 하나님께 우리도 전적으로 자신을 드리며 믿고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가적용)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는 귀찮은 의무라기보다 구원 받은 성도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럽고 감격스러운 특권이다. 계시록 19장은 예배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가를 잘 보여 준다. 아울러 예배의 제 요소들에 대한 매우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첫째, 우리는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야 한다.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1절).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2절).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6절). 따라서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사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하나님,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영원히 통치하시는 높으시고 크신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것이다. 둘째, 예배자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이에 대해 1절에서는 ‘하늘에 있는 허다한 무리’, 5절에서는 ‘하나님의 종들’이라고 말씀한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고 의롭다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백성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예배는 오직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드릴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어떻게 예배할 것인지 알아야 한다. 본문에 나오는 예배자들은 한결같이 ‘할렐루야’로 예배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예배했다(1,6절). 뿐만 아니라 엎드려 경배했고 크게 기뻐하면서 예배했다(4,7절). 오늘날 하나님께 예배하는 우리의 태도 역시 이러해야 한다.
•영감의 교훈 •
▶ 살아 있는 예배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은 모범과 교훈으로 참삶의 원칙을 세상에 가르칠 만한 생활을 하도록 하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절제생활, 191).
예비일(금) 9월 23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각 시대의 대쟁투, 582~592 “절박한 최후의 위기”, 603~612 “최후의 경고”, 662~678 “대쟁투의 종막.”
“예배란 우리를 만드신 자 앞에서 그분의 거룩함과 우리가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인정하며 허리는 숙이는 것이다. 예배란 그분의 장엄한 임재에 대한 반응이며 그분의 통치권에 대한 굴복이다”(리처드 M. 데이비슨, 구약성경의 예배, 3).
“시편 기자는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시 2:11)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는 기쁨과 두려움 사이에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예배는 거룩한 기쁨이 되어야 한다. … 우리의 예배는 엄숙한 두려움과 활기찬 기쁨이 있어야 한다”(상동, 30).
“구속받은 자들이 일제히 다음과 같은 찬양의 노래를 부르는데, 그 소리는 하늘 공간에 메아리치고 또 메아리친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계 7:10). … 그 빛나는 무리들 가운데는 마치 자기 자신의 능력과 선행으로 승리한 것처럼 구원을 자기 공로에 돌리는 자는 한 사람도 없다. 그들이 어떠한 일을 하고 어떤 고난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는다. 오직 모든 찬미의 내용과 모든 찬양의 주제는 구원하심이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다는 것이다”(각 시대의 대쟁투, 665).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성육신, 예수님의 죄 없는 생애와 죽음 그리고 재림의 약속 등 모든 구속의 계획이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이유가 됩니까?
➋우리가 교회에 있지 않아도 주님께 예배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항상 주님께 예배하지 않고서 안식일에만 주님을 예배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9월 24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27분
도입)
우리가 생각하는 순수하고 진실된 예배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하지만 매우 깊은 뜻을 담고 있다. 순수하고 초월적인 예배는 근본적인 예배이며 영원한 예배이다. 이 예배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자 더 높은 예배이다. 모든 예배의 그 중심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신다. 그리스도의 행하심이 모든 예배의 핵심이 된다.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을 향한 예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또한 예수님을 향한 영적인 예배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계시록에 나타난 예배의 참된 정신을 이해하고 그 예배의 원리를 깨닫는 것이 참된 예배의 내용이 되어야 할 것이다.
기억절 :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 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계 14:3).
결론: 우리의 왕이요 창조주시며, 심판자요 구세주이신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은 우리에게 최고의 기쁨입니다.
첫째 날(일) 9월 18일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도입)
가끔씩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더 이상 예배 같지 않을 때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예배에 ‘잡동사니’들을 많이 혼합시켜왔다. 그래서 우리가 경험하는 예배는 점점 더 비현실화 되었다. 대중문화에 속해 있는 상당수의 사람들은 지속적인 혼란과 문제들 속에서 안정감을 누리지 못한다.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그냥 인상이 좋으신 분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전율을 느끼거나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교회로 와서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예배 후에 사람들의 말을 귀 기울여보면 “오늘 예배 괜찮았나요? ”나는 그다지 건진게 없었어요,“ 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저들이 정작 예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들은 예배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예배는 오직 주님이 보시기에만 합당하게 해야 하며 오직 주님이 들으시기에 합당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종종 우리가 느끼기에 좋은 모습을 보여주거나 듣기 좋은 소리를 시현하는 정도에 그치고 만다. 고객 지향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예배의 풍경이다. 이러한 종류의 예배는 ‘기분 전환’에 있다. 이런 ‘예배’는 순간적으로는 풍성하게 보일지라도 진실되지 못하다. 그리고 결국 공허함만을 남긴다.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진정한 예배는 우리의 환경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예배는 신비 그 자체이며 영적인 것이다. 예배를 강력하게 만드는 것은 기교가 아니라 마음이다. 환상적인 음악이나 인간의 저작물들을 온종일 접할 수 있겠지만 이것들은 외형적인 면만을 담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겉모양이자 외형일 뿐 예배의 핵심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기교가 아닌 우리의 마음을 읽으시고 우리의 마음을 받기를 원하신다.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계 1:17).
교훈: 온 우주의 창조자 앞에 선다는 생각은 우리에게 두려움과 경외심 그리고 회개의 마음을 일으킨다.
부가적용)
우리의 예배에서는 우리의 역동성이 부족하고 참된 경외심이 결여되어 있다. 우리가 만드는 예배의 참된 동력은 우리의 마음에서 표현되는 우리의 헌신이다. 만약 우리 내적인 마음속에 이런 예배자의 자세가 없다면, 우리가 표현하는 기교적인 산출물들은(그것이 잘 표현되고 진실 되어 보인다 할지라도)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될 뿐이다. 많은 경우에 교회의 예배에 사람들의 ‘기분 전환’에만 몰두한다. 그들은 보기에는 좋지만 가치가 없는 것들과 듣기엔 좋지만 깊이가 없는 음악들을 중요하게 여긴다. 오늘날 사용가능한 다양한 종류의 예배 모델이 존재한다. 교회지도자들이 최신 유행하는 예배 스타일에 맞추려고 혈안을 한다. 그러나 천국에서 드려지는 예배의 내용과 그 초점은 하나님이시다. 곧 주님의 성품과 속성, 주님의 행하심과 주의 기뻐하심에 있다. 예배는 거룩한 아름다움이다.
•영감의 교훈 •
▶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분의 눈에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분 앞에서 두려워 떨어야 할 것이다. 고대에 하나님께서 거룩하다고 선언한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맞이한 최후로부터 현대인들도 경고를 받아야 한다”(치료봉사, 435).
둘째 날(월) 9월 19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도입)
천상예배의 초점은 하나님과 그분의 거룩하심이다. 그것은 천상예배가 암시하는 다른 모든 것들 위에 거룩하심의 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거룩하심의 속성만이 삼중으로 선언하신 수준에 이르게 되고, 그곳에 계셔야 할 중요성을 나타내신 것이다. 성경은 강조를 위한 문학적 도구로 반복을 사용한다. 오직 한번이 아닌 하나님의 속성이 연속적으로 세 번 언급되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거룩, 거룩, 거룩하시다라고 하셨다. 성경은 결코 하나님은 사랑, 사랑, 사랑이라고 말씀하시거나 자비, 자비, 자비라고 하시거나 진노, 진노, 진노라고 하시거나, 공의, 공의, 공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성경은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그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다고 말씀하고 있다. 특히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 속성을 다른 모든 것 위에 알려지기를 원하셨던 같다. 타에슨(Thiessen)은 쓰기를,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하나님께서 산에 내려오심으로 그 시내산에 세웠던 영역에 의해 강조된다. 성막의 구분과 성소와 지성소로 나뉜 성전의 구분으로. 이스라엘 사람이 하나님께 접근하려면 가져와야 하는 제물을 규정함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하는 특별한 제사장 제도에 의해서. 부정에 대한 많은 율법 규정을 둠으로. 이스라엘 절기를 정해 놓으심으로. 팔레스틴에서 이스라엘을 고립시키심으로 거룩을 강조한다고 말했다. 거룩의 개념이 주어지는 중심 위치는 이 속성으로 하여금 하나님 그분의 모든 것을 규정하는 원리가 되게 하고 있다. 그분은 그분의 거룩하심의 기초위에 그분의 전을 세우셨다(시. 47:8). 그리고 거룩함은 하나님 되심의 어떤 것보다 그 이상으로 정의하고 있다. 현대 예배에서는 거의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그리고 가공할 만한 거룩함 때문에 존경하거나 두려워하는 감각이 없어졌다. 오히려 약간의 크리스찬들의 길들여진 무기력한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그들이 소망하는 어떤 태도로든지 접근되어질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 결과로 그들은 하나님과 감명적이지도 않고, 거의 매일의 삶에 부수적인 것으로 그분을 바라보게 된다. 그 초점이 자기 자신이 된 것이다. 행복이나 완성이 모든 절실한 것이 되고, 우리 자신을 부인하라는 성경적 외침과 하나님을 따르라는 것은 단지 어렴풋하게 들려지고 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 5:12).
교훈: 우리가 하늘에 계신 주님께 경배하듯이 하늘도 이 땅에서 행하신 주님의 일로 인하여 그분을 경배하고 있다.
부가적용)
선지자 이사야는 자신의 비전속에서 '단지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 안에서만 삶이 거룩하다'는 사실을 체험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점점 더 거룩한 의미와 판단이 흐려지게 된다. 도대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을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간구하며 기도하는 중에, 우리 자신이 동행하게 된다. 아무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잘 알지는 못한다. 예수님보다 더 좋은 동반자는 결코 없다. 예수님은 바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에서 우리를 불러 주시고 초청해 주신다. 우리는 세번 연이어 "거룩하다"고 반복하는 찬양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을 소리 높여 찬양하는 구절을 마주 한다.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시고자, 십자가에 매달려 스스로 죽음으로써도 모자라 죽음을 넘어서까지 우리와 동행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오실 그리스도 예수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고 찬양해야 할 것이다. 곧 오실 예수 그리스도, 소망이요 생명이요, 임마누엘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거룩하게 찬양하는 복된 하루가 되시길 바란다.
•영감의 교훈 •
▶ 영원한 주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영원토록 구속받은 자들의 연구와 찬양의 대상이 될 것이다”(각 시대의 대쟁투, 651).
셋째 날(화) 9월 20일
요한계시록 13장
도입)
한번은 아프리카의 넓은 평원에 수백 마리의 아프리카 들소 떼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그런데 뱀이 그 중 한 마리의 발목을 물었다. 들소는 깜짝 놀라서 껑충 뛰더니 갑자기 뛰기 시작하였다. 한 마리가 뛰기 시작하니까 옆에 있던 들소들도 영문도 모르고 함께 뛰기 시작하였고 나중에는 수백 마리의 들소 떼 전체가 한 방향으로 뛰기 시작하였다. 수많은 들소 떼들이 뛰고 있는데 뛰는 이유를 아는 들소는 오직 한 마리뿐이다. 왜 나머지 들소 떼들은 정확한 이유도 모르면서 뛸까? 다 뛰는데 나만 혼자서 가만히 있으면 괜히 불안하기 때문에 뛰는 것이다. 마음의 안정과 평안을 위해서 뛰는 것이다. 수백 마리의 들소 떼들이 함께 뛰기 때문에 혼자만 가만히 있을 수도 없다. 뛰지 않으면 다른 들소 떼들 발에 밟혀 죽기 때문이다. 얼마 후에 절벽이 나타났는데 선두에 서서 뛰던 들소가 멈추어 서려고 했지만 뒤에서 밀려드는 들소 떼에 밀려서 절벽 아래로 떨어져 수많은 들소들이 죽고 말았다. 성경은 지구 역사의 마지막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것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다. 성경은 마지막 시대에 전 세계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사형 명령이 내려지는 예언을 말하고 있는데, 이때 들소처럼 군중심리에 의해서 휩쓸려 다니는 사람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짐승의 표를 받을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위에 굳게 서있는 사람들은 순교를 당하거나 살아남기 위해서 궁벽한 곳을 찾게 되는 것이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지구 역사의 마지막 장면이다. 그것은 중세기 종교암흑시대에 핍박을 피하여 알프스 산 깊은 곳으로 숨어 들어갔던 역사를 연상케 하는 사건이 될 것이다.
“그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계 13:15).
종말의 대쟁투는 경배의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될 것이다. 경배는 결코 작은 사안이 아니다.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경배에 달려 있다. 계시록 13~14장은 이런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계시하고 있다. 계시록 13장을 읽고 다음의 질문에 답하라.
교훈: 종말에 이를수록 경배는 대쟁투의 가장 중요한 쟁점이 될 것이다. 진실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절하지 않을 것이다.
부가적용)
요한계시록 13장에는 "짐승에게 경배하니" 라는 말이 5번이나 반복되면서, 마지막 시대에 벌어지는 선과 악의 대쟁투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이 "누구에게 경배"(worship, 예배)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맞추어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시대에 우리 모두가 겪게 될 위기는 각 사람이 어떠한 경배(예배)를 드릴 것인가에 달려 있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것은 거의 모든 세상이 짐승의 편에 서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요한계시록은 말하기를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예배)하리라"고 하였다(계 13:8). 많은 사람들이 "모두 다 그렇게 하는데…."라는 군중 심리를 가지고 아무 생각 없이 다수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이 성경 말씀은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모든 사람들이 다 짐승에게 경배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따른다고 하여 생각 없이 따라가는 일을 조심해야 한다. 심판의 날에 "모두가 다 그렇게 했는데요."라는 핑계는 아무런 효력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단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없애려고 두 가지 작전을 세워 두었다. 첫째 전략은 그들을 죽여서 없애는 것이고 둘째 전략은 그들로 하여금 영적으로 타협하게 만들어서 뒤로 물러가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자들과 함께 하시는데 그러한 자들이 하늘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살 자들이다.
•영감의 교훈 •
▶ 두 예배
“그 갈등의 문제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크게 두 부류 즉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들과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표를 받은 자들로 나누어질 것이다. 비록 교회와 국가가 그들의 힘을 연합하여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계 13:16)로 짐승의 표를 받게 하고자 강요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것을 받지 않을 것이다”(교회증언 9권, 16).
넷째 날(수) 9월 21일
요한계시록 14장
도입)
하나님의 계명 중에서 경배(예배)에 관련된 계명이 있는가? 십계명 중에서 오직 넷째 계명만이 예배와 관련된 계명이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8-11).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 “왜 짐승의 표 환난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사형 명령이 내려지나?” 왜냐하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성도들은 십계명 중에서 예배에 관한 계명인 넷째 계명을 올바로 지킴으로써 짐승의 표를 거절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써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는 사형 명령을 받게 된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짐승의 표를 거절하는 144,000인의 특징을 설명하면서 “성도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고 기록하였고(계 14:12), 바로 그들이 마지막 시대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받을 자들인 것이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계 14:7).
교훈: 안식일은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에게 표징과 인으로 주어졌으며 그 의미는 마지막 때에 크게 부각될 것이다.
부가적용)
우리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 즉 조물주(造物主)와 피조물(被造物)의 관계를 논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조물주(창조자, 조성자, 지은자)요,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우주만물들은 피조물이다. 피조물이라는 말은 만든 자 즉 조물주가 있다는 말이다. 안식일은 바로 이러한 창조주가 계시다는 참된 인정이다. 안식일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제정한 날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 그가 창조주이신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까지 자랐을 때(엡4:13,15)라도 그런 사람과 그리스도와의 구별은 그분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라는 관계이다. 이 관계는 태초로부터 영원까지이다. 안식일은 바로 이런 관계의 표이며, 그것은 피조물로서 인간의 정체성의 표이다. 사람은 어떤 경지에 이른다하더라도 피조물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을 기억하고 그래서 창조주를 경배하고 찬양할 때 자기의 아름답고 행복한 존재와 생명을 유지하게 된다. 이것을 부인하면 곧 그는 창조주를 부인하기 때문에 창조주에게 받은 자기를 반납해야 한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겸손히 인정하고 창조주의 창조하신 섭리 안에서만 피조물이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피조물(被造物)에는 온 우주만물(宇宙萬物)이 포함되므로 인간과 모든 생물체(生物體)도 당연히 포함 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인격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기를 지으신 조물주(造物主)를 찾는 속성이 있는데 그 속성은 고향을 찾는 마음과 종교성으로 나타난다. 연어를 비롯한 동물들은 자기가 태어난 고향을 향해 회귀하는 본능이 있고, 사람도 일생 고향을 그리워하며 사는 것은 고향은 자기가 태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태어난 곳을 찾는 속성도 조물주를 향한 회귀성(回歸性)의 본능(本能)이라고 할 수 있다.
•영감의 교훈 •
▶ 마지막 때 쟁점으로 부각될 안식일
“성경상 안식일을 주장하는 자들을 대항하는 데 있어서 성경 말씀으로 반증할 근거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그 부족을 채우기 위하여 강압적인 법령을 이용할 것이다. 인기와 후원을 얻기 위하여 입법자들은 일요일 법령의 요구를 수락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십계명의 조항을 깨뜨리는 제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싸움터에서 진리와 오류 사이의 마지막 대쟁투가 전개된다”(증언보감 2권, 150).
다섯째 날(목) 9월 22일
하나님께 경배하라
도입)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우리의 마음이 따라가는 예배이다(잠23:26, 신6:4). 이런 예배를 위해 우리가 노력해야 할 몇 가지가 있다. 준비된 예배를 드려야 한다(시130:5-6). 습관성 예배를 드려선 안된다. 찬양에 힘써야 한다(골3:16, 엡5:19). 예배를 방해하는 것들은 과감하게 처리해야 한다. 우리가 마음을 담아 하나님께 예배드리면 이사야처럼 하나님의 보좌와 영광을 볼 수 있다. 우리 영혼의 귀에 은은하게 속삭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자비로우신 품안에 안겨 하나님이 주시는 신비로운 행복을 맛볼 수 있다. 세상의 수고와 슬픔으로 상처 입은 우리의 마음을 싸매어 주시고, 하루하루 힘 있게 살 수 있는 능력을 부어 주실 것이다.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그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두루마리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계 22:8~9).
교훈: 예배란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신 하나님께 우리도 전적으로 자신을 드리며 믿고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가적용)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는 귀찮은 의무라기보다 구원 받은 성도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럽고 감격스러운 특권이다. 계시록 19장은 예배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가를 잘 보여 준다. 아울러 예배의 제 요소들에 대한 매우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첫째, 우리는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야 한다.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1절).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2절).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6절). 따라서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사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하나님,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영원히 통치하시는 높으시고 크신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것이다. 둘째, 예배자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이에 대해 1절에서는 ‘하늘에 있는 허다한 무리’, 5절에서는 ‘하나님의 종들’이라고 말씀한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고 의롭다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백성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예배는 오직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드릴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어떻게 예배할 것인지 알아야 한다. 본문에 나오는 예배자들은 한결같이 ‘할렐루야’로 예배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예배했다(1,6절). 뿐만 아니라 엎드려 경배했고 크게 기뻐하면서 예배했다(4,7절). 오늘날 하나님께 예배하는 우리의 태도 역시 이러해야 한다.
•영감의 교훈 •
▶ 살아 있는 예배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은 모범과 교훈으로 참삶의 원칙을 세상에 가르칠 만한 생활을 하도록 하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절제생활, 191).
예비일(금) 9월 23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각 시대의 대쟁투, 582~592 “절박한 최후의 위기”, 603~612 “최후의 경고”, 662~678 “대쟁투의 종막.”
“예배란 우리를 만드신 자 앞에서 그분의 거룩함과 우리가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인정하며 허리는 숙이는 것이다. 예배란 그분의 장엄한 임재에 대한 반응이며 그분의 통치권에 대한 굴복이다”(리처드 M. 데이비슨, 구약성경의 예배, 3).
“시편 기자는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시 2:11)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는 기쁨과 두려움 사이에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예배는 거룩한 기쁨이 되어야 한다. … 우리의 예배는 엄숙한 두려움과 활기찬 기쁨이 있어야 한다”(상동, 30).
“구속받은 자들이 일제히 다음과 같은 찬양의 노래를 부르는데, 그 소리는 하늘 공간에 메아리치고 또 메아리친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계 7:10). … 그 빛나는 무리들 가운데는 마치 자기 자신의 능력과 선행으로 승리한 것처럼 구원을 자기 공로에 돌리는 자는 한 사람도 없다. 그들이 어떠한 일을 하고 어떤 고난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는다. 오직 모든 찬미의 내용과 모든 찬양의 주제는 구원하심이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다는 것이다”(각 시대의 대쟁투, 665).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성육신, 예수님의 죄 없는 생애와 죽음 그리고 재림의 약속 등 모든 구속의 계획이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이유가 됩니까?
➋우리가 교회에 있지 않아도 주님께 예배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항상 주님께 예배하지 않고서 안식일에만 주님을 예배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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