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과 초대교회의 예배(도입과 부가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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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과 초대교회의 예배
9월 17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38분
도입)
유대인 기독교 신자들은 적어도 팔레스틴에서는 조상의 예배형식에 익숙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재정된 것이었다. 그들은 망설이면서 안식일과 월삭 및 각종 절기를 지켰다. 매일 세 번의 기도(9시, 정오, 3시)를 드렸고 모세의 의식을 따랐으며 여기에다 기독교의 안식일과 성찬식을 지켰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열심파 유대인들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되자 그들의 조상의 유전을 기독교인의 의식과 함께 지키는 것도 중단되었다. 예루살렘에 있던 성전이 무너질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던가! 이것은 유대교도들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 기독교인들도 같이 괴로워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눈에는 냉정하게 보여도 결과는 언제나 더 좋은 것인 줄을 누가 알았을까? 돌로 지은 성전은 무너졌다. 그러자 신자들은 손으로 지은 성전이 아닌 참된 성전 그리스도의 몸을 기억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성전을 통하여 천지의 주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경배하게 되었다. 성소가 어디일까? 하나님이 계신 곳이 곧 성소이다. 그렇다면 어디에나 계시는 거룩한 하나님을 경배하는 데 특정한 장소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육신에 갇혀서 사는 인간들은 한정시키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하나님 경배할 집’ 곧 성전을 필요로 하였다. 초대 교인들은 물론 예루살렘의 성전이나 각 지역의 회당에 자주 모였다. 그러나 기독교 신자들만을 위해서 그들은 개인 집에서도 자주 모였다. 거기에서 교제와 성찬을 나누었다. 교회가 처음 시작된 것도 오순절 날의 어떤 신도의 다락방에서가 아니던가? 처음 신자들 가운데 예루살렘의 마가, 요한, 가이사랴의 고넬료, 빌립보의 루디아, 데살로니가의 야손, 고린도의 유스도, 에베소서의 브리스길라, 골로새의 빌레몬 등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집을 기꺼이 예배 처소로 내놓았다. 로마같이 큰 도시에는 여러 군대의 개인 집에서 예배와 강론이 계속되었다. 회당이 복음을 전하는 좋은 장소이기는 하지만 거기 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기독교인으로 전향시킬 수는 없었다. 그래서 믿는 이들만이 모이는 개인 집이 당연히 구별되게 되었다.
기억절 :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고전 13:1).
결론: 하나님의 율법과 말씀, 그분이 함께하셨던 시간과 역사, 그분의 구속 사역,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미래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기초이자 우리 믿음을 지켜 주는 방패입니다.
첫째 날(일) 9월 11일
많은 “증거들”
도입)
어떤 것이 거짓말이나 망상이라 할지라도 누군가는 그것을 “확신”할(convinced) 수 있다. 또 “많은 증거들”이 있어도 여전히 거짓일 수 있다. 예를 들면 진화론 같은 경우이다. 또한 많은 변호사들이 해왔던 것처럼, “의심할 여지없이” 증명되고서도 여전히 실수할 수 있다. 어떤 것이 “제시되어”(demonstrated) 그것을 “확신”(sure)할 수 있다 해도 여전히 그것은 틀릴 수가 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씀하실 때, 500명에게 부활하신 몸을 보여 주시고, 40일 동안 이 땅에 계시면서 제자들과 함께 지내며 식사를 같이 하시고, 성경 말씀을 강론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씀할 때 “무오한”(infallible - 테그메리온 tekmerion) 증거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 것이다. 무오한 성경이 제시하는 부활의 증거는 확실한 증거가 아니라 무오한 증거이다.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 1:3).
교훈: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는 증거와 확신이 있어야 한다.
부가적용)
기독교는 기적의 종교이다. 기적이란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신구약 성경은 수많은 기적을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가 기적이다. 홍해를 육지같이 걸어가고, 광야40년간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200만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여 살린 것이 기적이다. 굳건한 성 여리고를 무기한번 쓰지 않고 무너뜨린 것과 아얄론 골짜기에서 태양을 멈추게 한 것이 기적이다. 사자 굴에서 다니엘과 뜨거운 풀부물 속에 들어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죽지 않고 살아난 것이 기적이다. 다윗과 히스기야와 구약의 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체험했다. 예수님의 삶과 사역은 기적의 중심이었다. 예수님의 사역의 첫 번째 기적은 갈릴리 가나의 잔치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사건이었다. 이것을 이적 혹은 표적이라고도 한다. 표적이라 함은 그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거하는 표징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이런 모든 확실한 증거는 복음을 전하는 증인들이 제자들에게 능력을 주었을 것이다.
•영감의 교훈 •
▶ 조급하지 않고 갈급함
“우리는 우리의 침착하지 못한 태도 때문에, 또한 반성과 기도의 순간을 장려하지 못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귀중한 교제를 많이 상실한다. 영적 상태를 가끔 살펴보고 마음과 정신이 의의 태양에게로 끌려갈 필요가 있다”(교회에 보내는 권면, 249).
둘째 날(월) 9월 12일
말씀을 선포함
도입)
말씀 선포는 사도들의 고유한 임무였다. 이 일이 아니라면 굳이 사도가 있을 필요가 없었다. 예수에게 일어난 일을 전하기 위해서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 그러니까 오늘의 목사가 사도의 직무를 이어받았다고 한다면 이 말씀 선포는 결코 유보될 수 없는 절박하고 본질적인 행위이다. 이 임무가 얼마나 소중했으면 이 일을 위해서 다른 일은 일체 다른 제자들에게 위임하겠다고 결정했겠는가? 말씀을 선포하려면 우선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본 사람이어야 한다. 실제로 사도들은 예수 사건을 직접 경험한 이들이었다. 본 것을 가르쳐야만 권위가 있다. 예수님도 "나는 본 것을 말한다"고 말씀하셨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는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말씀 선포를 곧 가르침이니까 우선 자기의 경험이 중요하다. 그래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행 2:40).
교훈: 말씀 선포는 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설교는 놀라운 영적 결실을 거두게 된다.
부가적용)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었던 이들 사도들은 그저 믿음만 강조하면서 주먹구구식으로 교회를 이끌어간 게 아니라 매우 합리적이면서도 현실적으로 이끌어 갔다. 식탁에서 봉사하는 일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시간을 빼앗겨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사도들은 일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지혜이다. 무조건 열심을 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일의 순서를, 그 질서를 가려내는 일이 중요하다. 오늘의 교회에서도 역시 그렇다. 우리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있는데, 어떤 것에 우선권을 두어야 하는지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지혜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니다. 본질적인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의 차이를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이런 지혜가 없는 사람들은 늘 허둥지둥 한다. 무엇을 먼저 해야 하고 무엇을 나중에 해야 할지 구분하지 못하고 그저 일에 파묻혀 있거나, 그러다가 결국에는 아무 일도 바르게 처리하지 못한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도 이런 원리가 작용된다. 가정생활에서도 그렇다. 남편과 아내 사이도, 부모와 자녀 사이도 그렇다. 우리는 무엇을 우리 가정의 가장 우선순위에 자리 매김했는가? 사람은 한 가지 일만 할 수밖에 없다. 물을 마시면서 숨을 쉴 수는 없다. 피아노를 치면서 요리를 할 수는 없다. 물론 음악을 들으면서 커피를 마실 수 있습니다만, 그런 것은 그저 휴식을 취할 때나 가능하지 집중할 수 있는 일을 오직 하나이다. 하나님이 공평하신 것 같다. 시간도 똑같이 주셨으니까 말이다. 똑 같은 시간 안에서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선택해야 한다. 사도들의 현실적인 지혜를 배워야 한다.
•영감의 교훈 •
▶ 확실성과 결의(決意)
“진리 안에는 산 능력이 있으며 성령께서는 인간의 마음에 진리를 깨닫게 하는 작용을 하신다. 그러나 진리를 선포하는 목사들과 일꾼들은 확실성과 결의를 보여 주어야 한다. 저들은 믿음으로 나가야 하며 저들이 틀림없이 믿은 말씀처럼 증거해야 한다”(복음전도, 168).
셋째 날(화) 9월 13일
아레오바고에 선 바울
도입)
아프리카 선교사 죠지 그렌펠이 한번은 콩고 강의 한 지류를 따라 올라가다 그곳 원주민의 가사로 된 '예수의 이름 권세여'란 매우 감동적인 찬송을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죠지 그렌펠이 그 마을을 자세히 살펴보니 그곳은 몇 년 전에 자신이 복음을 전할 때 심한 박해와 조롱을 받았던 마을이었다고 한다. 복음 전파에는 실패란 없다. 여기서 나타난 바울의 아덴 선교도 실패한 것처럼 나타난다. 복음의 결실이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음 전파에 당장 결실이 없다고 실패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너무 성급한 판단이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척박한 철학과 우상의 도시 아덴에서도 최선의 노력을 다해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행 17:22).
우리는 초대교회 시대에 예배에 관한 또 다른 기사를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 3대 철학자들(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활동 무대였던 아테네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바울이 상대해야 했던 청중들은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상대했던 경건한 유대인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행 17:15~34에서 바울의 아테네 설교를 읽어 보라. 오순절의 청중들에게 했던 베드로의 설교와 아테네인들을 대상으로 한 바울의 설교는 어떻게 달랐는가?
베드로와 가장 뚜렷한 차이점은 바울이 여기서 성경을 인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신 그는 이방 시인의 글을 인용하였다. 동시에 그는 논리와 이성에 호소하였다. 그는 창조된 세상을 바라보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놀라운 증거들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종의 자연 신학(natural theology)을 이용하여 천연계를 가리키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믿어야 할 근거를 제시하려고 했다.
예배에 관하여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것이다. 이 사람들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있었다. 바울은 우상과 헛된 것에게 바쳐졌던 그들의 예배와 헌신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돌리고자 했다. 인간들은 무엇인가를 경배하고 싶은 내적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참으로 경배를 받기에 합당한 분이 누구인지 가르쳐 주고 싶었다.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 무엇이 문제였는가? 왜 그것이 문제가 되었는가?
논리와 이성 그리고 자연 신학에 호소하는 방법에는 한계가 있었다. 바울은 그 다음에 그들에게 회개, 심판, 부활, 믿음에 필요한 가르침을 주고자 했지만,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비록 소수의 개심자를 얻었지만 대부분은 그를 떠났다.
교훈: 이성과 논리에 호소하고 자연 신학에 의존하는 방식으로는 사람들의 회심을 이끌어 내기 어렵다.
부가적용)
바울은 에피루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이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라고 조롱기 섞인 질문을 던졌지만, 이에 개의치 않고 정성을 다해 복음을 증거 했다. 사실 복음 전도자들이 당하는 가장 난감한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믿지 않는 이들의 조롱과 멸시이다. 불신자들이 야유조로 툭툭 내뱉는 멸시와 조롱 섞인 말들은 전도자의 힘을 그렇게 빼놓을 수가 없다. 하지만 불신자들의 조롱과 멸시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참된 전도자의 길을 걸어갈 수 없다. 사실 예수님 자신이 우리를 위해 얼마나 많은 멸시와 조롱을 당하셨는가? “그는 사람들에게 미움과 멸시를 받았으며, 아픔과 고통을 많이 겪었다. 사람들은 그를 바라보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미움을 받았고, 우리 가운데 아무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사 53:3).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이러한 주님을 생각하고 사도 바울의 본을 받아 어떠한 조롱과 멸시도 극복하고 꿋꿋이 복음을 전하시기 바란다.
•영감의 교훈 •
▶ 십자가만 드높임
“그(바울)는 고린도인들 중에서는 정교한 논쟁이나 토론을 피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고전 2:2, 4) 그들에게 전도하고자 하였다”(사도행적, 244).
넷째 날(수) 9월 14일
율법에 어긋나는 예배
도입)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앤드루 뉴버스 교수는 " 종교는 뇌의 현상"이 라고 했다. 그는 깊은 명상에 빠졌을 때 대뇌의 한 부분인 두정엽 (頭頂葉) 의 활동이 줄어든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두정엽의 활동이 정지되면 사람들은 우주와 하나가 된 듯한 몰아의 경지에 빠지게 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캔자스대학교의 대니얼 뱃슨 교수는 "두뇌가 종교를 만든다고 주장하는 것은 피아노가 음악을 만든다고 강변하는 것과 다름없다" 고 강변했다. 기독교의 신앙이란 하나님을 창조자로 믿고 예배하는 인간의 기본 정신에서 시작된다. 인간은 하나님께 예배하고 경외할 때에 비로소 인간의 참된 모습을 되찾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아는 것이 지식과 지혜의 근본이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눅 19:41).
교훈: 우리는 예배의 형식과 전통에 얽매임으로써 예배의 중심이신 그리스도와 진리를 놓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부가적용)
형식적인 생각과 행동은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어렵게 열린 마음까지도 닫게 할 수 있다. 예수님도 형식적이지 않으셨다. 그 분의 말씀과 삶에는 조건 없는, 끝없는 사랑이라는 형식으로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다가가셨을 뿐 결코 형식적이지 않으셨다. 형식도 중요하지만 형식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간다면 형식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기독교 정신에 있어서의 형식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진실하고 개인적인 의미와 가치를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대의 바리새인이 될 수 있다. 전통과 형식과는 거리 먼 인생을 살았고 현대 문화 자체가 탈 정통, 탈 형식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기존의 예배형식을 딱딱하고 적응하기 힘들어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래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예배 형식(사실 우리가 고집하고 싶은 유일한 형식)만을 현대인들과 종교적 접근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까지 천편일률적으로 따라오라 요구 하는 것도 한편으로 형식이 있는 예배에 형식적 자세로 인도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할 수 있다. 형식적인 삶의 가치관이 진실한 가치를 잃고도 더 단단하게 진실의 벽을 막게 될 수 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 속에 예수라는 알맹이를 놓치게 되면 모든 것을 놓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영감의 교훈 •
▶ 본말전도
“바리새인들은 까다로운 형식주의와 예배의 허식과 자선 행위로써 돋보이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신앙을 토론의 주제로 만들어서 자신의 열성을 증명하였다. 교리가 다른 사람들과의 논쟁은 요란하고도 지루하였다”(치료봉사, 31).
다섯째 날(목) 9월 15일
사랑이 제일이다
도입)
우리가 기도하고 예배하는데도 왜 나에게는 응답이 없으며 삶의 변화가 없는지를 한탄하기 전에 구별된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라. 호세아 6장 6절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당신은 예배 자리에 나올 때, 제사를 드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예배시간에 참석하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무엇을 구별하는가? 또 하나의 선택적 예배가 아니라 그분을 가장 사랑하는 고백이 있는가? 시간의 구별을 생각해 보라. 당신이 어떤 예배를 드려도 상관없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남는 시간을 드리는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구별된 시간을 드리는가? 당신이 어떤 예물을 드려도 상관없다. 그러나 많은 물질 중의 하나를 지갑에서 꺼내 드리는가? 아니면 특별하게 구별된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는가? 당신이 드리는 헌신과 봉사가 자신의 남는 시간과 자신의 즐거움으로 드리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찾아 구별하여 드리는 헌신인가?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교훈: 훌륭한 예배를 위해서는 신자들에게 부여된 성령의 은사가 잘 활용이 되어야 하지만 그중에 가장 중요한 은사는 사랑이다.
부가적용)
많은 신자들이 성경을 읽고 설교를 많이 듣지만 더욱 큰 은사 곧 제일 좋은 길을 알지 못하고, 허무하고 일시적인 것들에 매달려 목숨을 걸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신자는 마땅히 보이지 않는 절대적인 것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것만이 영혼의 속사람 중심이고 영원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신자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고 예수 이름으로 보이는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의 역사가 있을지라도, 자기 영혼 속에 예수님의 사랑이 없으면 소리만 내는 꽹과리요 아무것도 아니요 아무 유익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비밀이다. 모든 은사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고전13:8-11말씀에"-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한 말씀을 비추어 보면, 온전한 것으로서의 '사랑'이 구별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사랑의 아들의 영으로 오는 것이라야 온전한 것이고 절대로 폐할 수 없고 영원한 것이 된다. 보이는 은사도 필요하지만 그런 것은 하나님의 구원 섭리상 일시적이며 기능적이고 도구적인 것들이어서, 신자의 속사람의 변화와 구원의 완성을 위한 본질과 원리에는 직접적 관계가 되지 못한다. 모형이요 그림자요 외모요 껍데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절대적인 더욱 큰 은사, 제일 좋은 길은 사랑의 성령으로 말미암는다.
•영감의 교훈 •
▶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포도원에서 성결하고 이타(利他)적인 열매를 얻고자 하신다. 그는 사랑과 선의 원칙을 찾으신다. 온갖 예술이 만들어 내는 어떠한 아름다움도 그리스도의 대표자들이 나타내는 품성의 아름다움과 전혀 비교할 수 없다”(실물교훈, 298).
예비일(금) 9월 16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사도행적, 35~46 “오순절”, 47~56 “성령의 선물”, 201~210 “십자가를 높임”, 243~254 “고린도”, 309~322 “높은 표준에 도달하도록 부르심.”
“성결이란 황홀경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완전한 복종이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요, …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요,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사랑을 신뢰하는 것이다”(사도행적, 51).
“과거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핍박을 견딘 사람들의 힘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하나님과 성령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었다. 사탄은 질책과 박해로 많은 사람들을 세상 친구로부터 분리시키긴 했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에서는 결코 끊을 수 없었다”(상동, 85).
“헌신적인 사신들은…그리스도(를)… 훼손시키는 자만적인 생각을 결코 용납하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권위나 탁월성을 탐하지 아니하였다”(상동, 209).
“(바울이) 의미하는 우상숭배는 신상을 숭배하는 것만이 아니요 자신을 섬기는 것, 안일에 대한 사랑, 식욕과 정욕의 만족을 다 의미한다”(상동, 317).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우리는 믿음에 대하여 어떤 “증거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의 신앙에 대하여 확신을 줄 만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증거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신앙에는 어떤 도전이 있습니까? 그런 도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이것을 믿어야 합니까?
➋그대가 경험했던 가장 감동적인 예배에 대하여 생각해 보십시오. 그 예배가 특별히 감동적이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떤 요소가 그 예배를 특별하게 만들었을까요? 만약 그런 요소가 현재의 교회에 없다면 어떻게 그런 요소를 도입할 수 있을까요?
9월 17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38분
도입)
유대인 기독교 신자들은 적어도 팔레스틴에서는 조상의 예배형식에 익숙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재정된 것이었다. 그들은 망설이면서 안식일과 월삭 및 각종 절기를 지켰다. 매일 세 번의 기도(9시, 정오, 3시)를 드렸고 모세의 의식을 따랐으며 여기에다 기독교의 안식일과 성찬식을 지켰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열심파 유대인들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되자 그들의 조상의 유전을 기독교인의 의식과 함께 지키는 것도 중단되었다. 예루살렘에 있던 성전이 무너질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던가! 이것은 유대교도들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 기독교인들도 같이 괴로워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눈에는 냉정하게 보여도 결과는 언제나 더 좋은 것인 줄을 누가 알았을까? 돌로 지은 성전은 무너졌다. 그러자 신자들은 손으로 지은 성전이 아닌 참된 성전 그리스도의 몸을 기억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성전을 통하여 천지의 주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경배하게 되었다. 성소가 어디일까? 하나님이 계신 곳이 곧 성소이다. 그렇다면 어디에나 계시는 거룩한 하나님을 경배하는 데 특정한 장소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육신에 갇혀서 사는 인간들은 한정시키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하나님 경배할 집’ 곧 성전을 필요로 하였다. 초대 교인들은 물론 예루살렘의 성전이나 각 지역의 회당에 자주 모였다. 그러나 기독교 신자들만을 위해서 그들은 개인 집에서도 자주 모였다. 거기에서 교제와 성찬을 나누었다. 교회가 처음 시작된 것도 오순절 날의 어떤 신도의 다락방에서가 아니던가? 처음 신자들 가운데 예루살렘의 마가, 요한, 가이사랴의 고넬료, 빌립보의 루디아, 데살로니가의 야손, 고린도의 유스도, 에베소서의 브리스길라, 골로새의 빌레몬 등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집을 기꺼이 예배 처소로 내놓았다. 로마같이 큰 도시에는 여러 군대의 개인 집에서 예배와 강론이 계속되었다. 회당이 복음을 전하는 좋은 장소이기는 하지만 거기 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기독교인으로 전향시킬 수는 없었다. 그래서 믿는 이들만이 모이는 개인 집이 당연히 구별되게 되었다.
기억절 :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고전 13:1).
결론: 하나님의 율법과 말씀, 그분이 함께하셨던 시간과 역사, 그분의 구속 사역,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미래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기초이자 우리 믿음을 지켜 주는 방패입니다.
첫째 날(일) 9월 11일
많은 “증거들”
도입)
어떤 것이 거짓말이나 망상이라 할지라도 누군가는 그것을 “확신”할(convinced) 수 있다. 또 “많은 증거들”이 있어도 여전히 거짓일 수 있다. 예를 들면 진화론 같은 경우이다. 또한 많은 변호사들이 해왔던 것처럼, “의심할 여지없이” 증명되고서도 여전히 실수할 수 있다. 어떤 것이 “제시되어”(demonstrated) 그것을 “확신”(sure)할 수 있다 해도 여전히 그것은 틀릴 수가 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씀하실 때, 500명에게 부활하신 몸을 보여 주시고, 40일 동안 이 땅에 계시면서 제자들과 함께 지내며 식사를 같이 하시고, 성경 말씀을 강론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씀할 때 “무오한”(infallible - 테그메리온 tekmerion) 증거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 것이다. 무오한 성경이 제시하는 부활의 증거는 확실한 증거가 아니라 무오한 증거이다.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 1:3).
교훈: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는 증거와 확신이 있어야 한다.
부가적용)
기독교는 기적의 종교이다. 기적이란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신구약 성경은 수많은 기적을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가 기적이다. 홍해를 육지같이 걸어가고, 광야40년간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200만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여 살린 것이 기적이다. 굳건한 성 여리고를 무기한번 쓰지 않고 무너뜨린 것과 아얄론 골짜기에서 태양을 멈추게 한 것이 기적이다. 사자 굴에서 다니엘과 뜨거운 풀부물 속에 들어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죽지 않고 살아난 것이 기적이다. 다윗과 히스기야와 구약의 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체험했다. 예수님의 삶과 사역은 기적의 중심이었다. 예수님의 사역의 첫 번째 기적은 갈릴리 가나의 잔치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사건이었다. 이것을 이적 혹은 표적이라고도 한다. 표적이라 함은 그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거하는 표징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이런 모든 확실한 증거는 복음을 전하는 증인들이 제자들에게 능력을 주었을 것이다.
•영감의 교훈 •
▶ 조급하지 않고 갈급함
“우리는 우리의 침착하지 못한 태도 때문에, 또한 반성과 기도의 순간을 장려하지 못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귀중한 교제를 많이 상실한다. 영적 상태를 가끔 살펴보고 마음과 정신이 의의 태양에게로 끌려갈 필요가 있다”(교회에 보내는 권면, 249).
둘째 날(월) 9월 12일
말씀을 선포함
도입)
말씀 선포는 사도들의 고유한 임무였다. 이 일이 아니라면 굳이 사도가 있을 필요가 없었다. 예수에게 일어난 일을 전하기 위해서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 그러니까 오늘의 목사가 사도의 직무를 이어받았다고 한다면 이 말씀 선포는 결코 유보될 수 없는 절박하고 본질적인 행위이다. 이 임무가 얼마나 소중했으면 이 일을 위해서 다른 일은 일체 다른 제자들에게 위임하겠다고 결정했겠는가? 말씀을 선포하려면 우선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본 사람이어야 한다. 실제로 사도들은 예수 사건을 직접 경험한 이들이었다. 본 것을 가르쳐야만 권위가 있다. 예수님도 "나는 본 것을 말한다"고 말씀하셨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는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말씀 선포를 곧 가르침이니까 우선 자기의 경험이 중요하다. 그래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행 2:40).
교훈: 말씀 선포는 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설교는 놀라운 영적 결실을 거두게 된다.
부가적용)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었던 이들 사도들은 그저 믿음만 강조하면서 주먹구구식으로 교회를 이끌어간 게 아니라 매우 합리적이면서도 현실적으로 이끌어 갔다. 식탁에서 봉사하는 일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시간을 빼앗겨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사도들은 일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지혜이다. 무조건 열심을 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일의 순서를, 그 질서를 가려내는 일이 중요하다. 오늘의 교회에서도 역시 그렇다. 우리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있는데, 어떤 것에 우선권을 두어야 하는지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지혜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니다. 본질적인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의 차이를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이런 지혜가 없는 사람들은 늘 허둥지둥 한다. 무엇을 먼저 해야 하고 무엇을 나중에 해야 할지 구분하지 못하고 그저 일에 파묻혀 있거나, 그러다가 결국에는 아무 일도 바르게 처리하지 못한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도 이런 원리가 작용된다. 가정생활에서도 그렇다. 남편과 아내 사이도, 부모와 자녀 사이도 그렇다. 우리는 무엇을 우리 가정의 가장 우선순위에 자리 매김했는가? 사람은 한 가지 일만 할 수밖에 없다. 물을 마시면서 숨을 쉴 수는 없다. 피아노를 치면서 요리를 할 수는 없다. 물론 음악을 들으면서 커피를 마실 수 있습니다만, 그런 것은 그저 휴식을 취할 때나 가능하지 집중할 수 있는 일을 오직 하나이다. 하나님이 공평하신 것 같다. 시간도 똑같이 주셨으니까 말이다. 똑 같은 시간 안에서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선택해야 한다. 사도들의 현실적인 지혜를 배워야 한다.
•영감의 교훈 •
▶ 확실성과 결의(決意)
“진리 안에는 산 능력이 있으며 성령께서는 인간의 마음에 진리를 깨닫게 하는 작용을 하신다. 그러나 진리를 선포하는 목사들과 일꾼들은 확실성과 결의를 보여 주어야 한다. 저들은 믿음으로 나가야 하며 저들이 틀림없이 믿은 말씀처럼 증거해야 한다”(복음전도, 168).
셋째 날(화) 9월 13일
아레오바고에 선 바울
도입)
아프리카 선교사 죠지 그렌펠이 한번은 콩고 강의 한 지류를 따라 올라가다 그곳 원주민의 가사로 된 '예수의 이름 권세여'란 매우 감동적인 찬송을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죠지 그렌펠이 그 마을을 자세히 살펴보니 그곳은 몇 년 전에 자신이 복음을 전할 때 심한 박해와 조롱을 받았던 마을이었다고 한다. 복음 전파에는 실패란 없다. 여기서 나타난 바울의 아덴 선교도 실패한 것처럼 나타난다. 복음의 결실이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음 전파에 당장 결실이 없다고 실패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너무 성급한 판단이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척박한 철학과 우상의 도시 아덴에서도 최선의 노력을 다해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행 17:22).
우리는 초대교회 시대에 예배에 관한 또 다른 기사를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 3대 철학자들(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활동 무대였던 아테네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바울이 상대해야 했던 청중들은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상대했던 경건한 유대인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행 17:15~34에서 바울의 아테네 설교를 읽어 보라. 오순절의 청중들에게 했던 베드로의 설교와 아테네인들을 대상으로 한 바울의 설교는 어떻게 달랐는가?
베드로와 가장 뚜렷한 차이점은 바울이 여기서 성경을 인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신 그는 이방 시인의 글을 인용하였다. 동시에 그는 논리와 이성에 호소하였다. 그는 창조된 세상을 바라보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놀라운 증거들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종의 자연 신학(natural theology)을 이용하여 천연계를 가리키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믿어야 할 근거를 제시하려고 했다.
예배에 관하여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것이다. 이 사람들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있었다. 바울은 우상과 헛된 것에게 바쳐졌던 그들의 예배와 헌신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돌리고자 했다. 인간들은 무엇인가를 경배하고 싶은 내적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참으로 경배를 받기에 합당한 분이 누구인지 가르쳐 주고 싶었다.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 무엇이 문제였는가? 왜 그것이 문제가 되었는가?
논리와 이성 그리고 자연 신학에 호소하는 방법에는 한계가 있었다. 바울은 그 다음에 그들에게 회개, 심판, 부활, 믿음에 필요한 가르침을 주고자 했지만,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비록 소수의 개심자를 얻었지만 대부분은 그를 떠났다.
교훈: 이성과 논리에 호소하고 자연 신학에 의존하는 방식으로는 사람들의 회심을 이끌어 내기 어렵다.
부가적용)
바울은 에피루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이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라고 조롱기 섞인 질문을 던졌지만, 이에 개의치 않고 정성을 다해 복음을 증거 했다. 사실 복음 전도자들이 당하는 가장 난감한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믿지 않는 이들의 조롱과 멸시이다. 불신자들이 야유조로 툭툭 내뱉는 멸시와 조롱 섞인 말들은 전도자의 힘을 그렇게 빼놓을 수가 없다. 하지만 불신자들의 조롱과 멸시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참된 전도자의 길을 걸어갈 수 없다. 사실 예수님 자신이 우리를 위해 얼마나 많은 멸시와 조롱을 당하셨는가? “그는 사람들에게 미움과 멸시를 받았으며, 아픔과 고통을 많이 겪었다. 사람들은 그를 바라보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미움을 받았고, 우리 가운데 아무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사 53:3).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이러한 주님을 생각하고 사도 바울의 본을 받아 어떠한 조롱과 멸시도 극복하고 꿋꿋이 복음을 전하시기 바란다.
•영감의 교훈 •
▶ 십자가만 드높임
“그(바울)는 고린도인들 중에서는 정교한 논쟁이나 토론을 피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고전 2:2, 4) 그들에게 전도하고자 하였다”(사도행적, 244).
넷째 날(수) 9월 14일
율법에 어긋나는 예배
도입)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앤드루 뉴버스 교수는 " 종교는 뇌의 현상"이 라고 했다. 그는 깊은 명상에 빠졌을 때 대뇌의 한 부분인 두정엽 (頭頂葉) 의 활동이 줄어든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두정엽의 활동이 정지되면 사람들은 우주와 하나가 된 듯한 몰아의 경지에 빠지게 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캔자스대학교의 대니얼 뱃슨 교수는 "두뇌가 종교를 만든다고 주장하는 것은 피아노가 음악을 만든다고 강변하는 것과 다름없다" 고 강변했다. 기독교의 신앙이란 하나님을 창조자로 믿고 예배하는 인간의 기본 정신에서 시작된다. 인간은 하나님께 예배하고 경외할 때에 비로소 인간의 참된 모습을 되찾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아는 것이 지식과 지혜의 근본이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눅 19:41).
교훈: 우리는 예배의 형식과 전통에 얽매임으로써 예배의 중심이신 그리스도와 진리를 놓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부가적용)
형식적인 생각과 행동은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어렵게 열린 마음까지도 닫게 할 수 있다. 예수님도 형식적이지 않으셨다. 그 분의 말씀과 삶에는 조건 없는, 끝없는 사랑이라는 형식으로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다가가셨을 뿐 결코 형식적이지 않으셨다. 형식도 중요하지만 형식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간다면 형식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기독교 정신에 있어서의 형식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진실하고 개인적인 의미와 가치를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대의 바리새인이 될 수 있다. 전통과 형식과는 거리 먼 인생을 살았고 현대 문화 자체가 탈 정통, 탈 형식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기존의 예배형식을 딱딱하고 적응하기 힘들어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래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예배 형식(사실 우리가 고집하고 싶은 유일한 형식)만을 현대인들과 종교적 접근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까지 천편일률적으로 따라오라 요구 하는 것도 한편으로 형식이 있는 예배에 형식적 자세로 인도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할 수 있다. 형식적인 삶의 가치관이 진실한 가치를 잃고도 더 단단하게 진실의 벽을 막게 될 수 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 속에 예수라는 알맹이를 놓치게 되면 모든 것을 놓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영감의 교훈 •
▶ 본말전도
“바리새인들은 까다로운 형식주의와 예배의 허식과 자선 행위로써 돋보이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신앙을 토론의 주제로 만들어서 자신의 열성을 증명하였다. 교리가 다른 사람들과의 논쟁은 요란하고도 지루하였다”(치료봉사, 31).
다섯째 날(목) 9월 15일
사랑이 제일이다
도입)
우리가 기도하고 예배하는데도 왜 나에게는 응답이 없으며 삶의 변화가 없는지를 한탄하기 전에 구별된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라. 호세아 6장 6절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당신은 예배 자리에 나올 때, 제사를 드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예배시간에 참석하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무엇을 구별하는가? 또 하나의 선택적 예배가 아니라 그분을 가장 사랑하는 고백이 있는가? 시간의 구별을 생각해 보라. 당신이 어떤 예배를 드려도 상관없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남는 시간을 드리는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구별된 시간을 드리는가? 당신이 어떤 예물을 드려도 상관없다. 그러나 많은 물질 중의 하나를 지갑에서 꺼내 드리는가? 아니면 특별하게 구별된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는가? 당신이 드리는 헌신과 봉사가 자신의 남는 시간과 자신의 즐거움으로 드리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찾아 구별하여 드리는 헌신인가?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교훈: 훌륭한 예배를 위해서는 신자들에게 부여된 성령의 은사가 잘 활용이 되어야 하지만 그중에 가장 중요한 은사는 사랑이다.
부가적용)
많은 신자들이 성경을 읽고 설교를 많이 듣지만 더욱 큰 은사 곧 제일 좋은 길을 알지 못하고, 허무하고 일시적인 것들에 매달려 목숨을 걸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신자는 마땅히 보이지 않는 절대적인 것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것만이 영혼의 속사람 중심이고 영원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신자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고 예수 이름으로 보이는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의 역사가 있을지라도, 자기 영혼 속에 예수님의 사랑이 없으면 소리만 내는 꽹과리요 아무것도 아니요 아무 유익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비밀이다. 모든 은사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고전13:8-11말씀에"-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한 말씀을 비추어 보면, 온전한 것으로서의 '사랑'이 구별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사랑의 아들의 영으로 오는 것이라야 온전한 것이고 절대로 폐할 수 없고 영원한 것이 된다. 보이는 은사도 필요하지만 그런 것은 하나님의 구원 섭리상 일시적이며 기능적이고 도구적인 것들이어서, 신자의 속사람의 변화와 구원의 완성을 위한 본질과 원리에는 직접적 관계가 되지 못한다. 모형이요 그림자요 외모요 껍데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절대적인 더욱 큰 은사, 제일 좋은 길은 사랑의 성령으로 말미암는다.
•영감의 교훈 •
▶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포도원에서 성결하고 이타(利他)적인 열매를 얻고자 하신다. 그는 사랑과 선의 원칙을 찾으신다. 온갖 예술이 만들어 내는 어떠한 아름다움도 그리스도의 대표자들이 나타내는 품성의 아름다움과 전혀 비교할 수 없다”(실물교훈, 298).
예비일(금) 9월 16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사도행적, 35~46 “오순절”, 47~56 “성령의 선물”, 201~210 “십자가를 높임”, 243~254 “고린도”, 309~322 “높은 표준에 도달하도록 부르심.”
“성결이란 황홀경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완전한 복종이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요, …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요,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사랑을 신뢰하는 것이다”(사도행적, 51).
“과거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핍박을 견딘 사람들의 힘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하나님과 성령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었다. 사탄은 질책과 박해로 많은 사람들을 세상 친구로부터 분리시키긴 했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에서는 결코 끊을 수 없었다”(상동, 85).
“헌신적인 사신들은…그리스도(를)… 훼손시키는 자만적인 생각을 결코 용납하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권위나 탁월성을 탐하지 아니하였다”(상동, 209).
“(바울이) 의미하는 우상숭배는 신상을 숭배하는 것만이 아니요 자신을 섬기는 것, 안일에 대한 사랑, 식욕과 정욕의 만족을 다 의미한다”(상동, 317).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우리는 믿음에 대하여 어떤 “증거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의 신앙에 대하여 확신을 줄 만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증거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신앙에는 어떤 도전이 있습니까? 그런 도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이것을 믿어야 합니까?
➋그대가 경험했던 가장 감동적인 예배에 대하여 생각해 보십시오. 그 예배가 특별히 감동적이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떤 요소가 그 예배를 특별하게 만들었을까요? 만약 그런 요소가 현재의 교회에 없다면 어떻게 그런 요소를 도입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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