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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서신들을 쉽게 이해하기(갈, 고전, 고후, 롬)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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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서신 연구(고린도 전후서, 로마서, 갈라디아서)

 

(최근에 이 글에 관련된 설교를 앤드류스 한인교회에서 하였습니다. 아래의 주소를 클릭하시면 그 설교 동영상을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http://www.akasda.com/?document_srl=42740#0

 

사울(회심 전 바울)과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죽인 이유는 이렇다.

 

행 6:11-13 “... 이 사람이 **모세**와 및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스려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모세의 율법은 어긴 사람을 사형에 처할 정도로 유대인들의 절대적 신봉의 대상이었다.

스데반은 모세의 율법을 어긴 죄목으로 죽임을 당하는데, 그렇다면 스데반이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지키려고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행 7:39, 51, 53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치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모순적이게도 사울(바울)과 스데반은 모세의 율법으로 서로를 정죄하고 있다.

두 사람이 같은 것을 옹호하는데 한 사람은 죽이고 나머지 사람은 죽임을 당한다.

어떻게 이런 상황이 발생할 수 있을까?

 

<예화>

필자가 거주하고 있는 앤드류스 대학교의 입구에는 표지판이 있다.

그 표지판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Andrews University"

 

그런데 정작 앤드류스 대학엔 그것이 실제 앤드류스 대학인지 알아낼 만한 단서가 없다.

그냥 땅과 건물들만 있을 뿐이다.

그곳을 처음 방문한 사람들에게 그곳이 앤드류스 대학이라는 걸 인지하게 해주는 것은 앤드류스 대학 자체가 아니고 다른 무엇인데, 그것이 바로 표지판이다.

 

사실 그 사물의 정체성을 제대로 나타내자면, 표지판에는 "앤드류스 대학 표지판”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왜 표지판은 자기 자신이 앤드류스 대학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는 것일까?

사람들이 남의 이름을 도용하여 그 사람인척 하면 사기죄로 처벌을 받는데...

 

앤드류스 대학은 자기의 정체성을 스스로 나타낼 수 없다.

그래서 그 역할을 대신해줄 수 있는 뭔가를 찾게 되었다.

그 필요를 따라 표지판이 간택(?)된 것이다.

어떤 건 철판으로, 어떤 건 돌로...

 

표지판은 앤드류스 대학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앤드류스 대학은 표지판의 존폐여부를 결정한다.

이렇게 이 둘은 서로 기가 막힌 상호보완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표지판에 쓰여 있는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그 표지판이 실제 앤드류스 대학이라고 생각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들은 앤드류스 대학을 이렇게 묘사할 것이다.

 

“앤드류스 대학은 철을 주재료로 하여 만들어졌으며 긴 기둥에 화살표 모양의 어떤 판을 붙여놓았는데, 그 판의 바탕색은 초록색이고 그 위에 “앤드류스 대학”이라는 하얀색 글씨가 쓰여 있다.”

 

그 표지판을 실제 앤드류스 대학이라고 여기며 그곳을 부여잡고 사는 사람들을 상상해보라.

사계절 비바람, 눈보라에 또 쌩쌩 달리는 차들의 위험 속에서 앤드류스 대학(표지판)을 수호하는 그들의 모습...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어리석어보이기도 하고, 한편 측은하기도 하고 그럴 것이다.

 

후에 바울서신들을 기록한 사울이 그런 사람이었다.

표지판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그 표지판이 가리키는 실체 안에 거하는 사람들을 죽인 것이다.

 

모세의 율법과 예수님은 표지판과 실체와 같은 관계다.

예수님과 그분의 사역에 대한 비가시적인 어떤 관념을 형상화한 것이 모세의 율법인 것이다(바울서신 쉽게 이해하기 I 참조).

그러므로 모세의 율법을 성실히 따르는 사람은 그 율법이 가리키는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도 그 사실을 강조하셨다.

 

요 5:46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참고> 예수님과 그분의 구속사업을 모세의 율법을 통해 형상화 한 것들.

 

* 의 => 세마포

* 마음 속에 새겨진 하나님의 법 => 돌비에 새겨진 하나님의 법(고후 3:3)

* 순교 => 전제(관제, 마 22:42, 44, 딤후 4:6)

* 그 외 다수(바울서신 쉽게 이해하기 I 참조).

 

자, 그럼 간단한 문답으로 위에 설명한 내용이 잘 이해되었는지 확인해보자.

 

(질문 1)

모세의 율법(표지판)에서 가리키는 도덕법은 어디에 새겨야할까?

 

답 : 돌비에서 심비로(고후 3:3 도덕법이 폐한 것이 아니고 돌비가 폐한 것임. 사람의 손에 의해 기록된 돌비에 있던 도덕법이 성령의 필사(筆寫)로 인해 우리의 마음에 기록되었음으로 돌비는 더 이상 필요치 않음. 따라서 도덕법은 폐한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새겨졌으므로 오히려 완전하게 되었음.)

 

(질문 2)

모세의 율법(표지판)에서 가리키는 전제(관제)는 오늘날의 우리는 어떻게 지켜야 할까?

 

답 : 순교의 삶을 산다(막 10:38-40, 눅 12:49, 50, 요일 5:6-8 물의 침례, 성령의 침례, 피의 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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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분위기를 바꾸어 고린도 전서, 고린도 후서, 로마서에 대해서 좀 살펴보자.

 

바울로 개명을 한 사울은 이제 스데반이 받들던 복음을 전하러 다닌다.

이젠 그의 운명도 스데반과 마찬가지로 죽이러 다니는 자에서 죽으러 다니는 자로 바뀌었다.

특히, 바울은 3차 전도여행(주후 53-58년 경) 중에 죽을 각오로 유대인의 본거지인 예루살렘을 입성하기로 결심한다.

그때 그가 저술한 책들이 고린도 전서, 고린도 후서, 로마서이다(북 갈라디아 설을 받아들일 경우 갈라디아서 포함).

(참고 : 갈라디아서의 기록연대에 관해서는 크게 두 가지의 견해를 놓고 논란이 있어왔는데, 재림교회 안에서도 주해 복음성경은 주후 57-58년경 설을, 이번 기 교과의 저자는 주후 49년경 설을 각각 받아들이고 있다. 기록 연대가 어느 해에 해당하든 본문 중심의 성경연구를 하는 필자는 고린도 전후서, 로마서, 갈라디아서의 문맥이 서로 잘 어우러져 있기 때문에 이들 서신들 중 어느 하나를 연구할 때 언제나 나머지 서신들을 같이 놓고 대조하며 연구한다.)

 

자, 그럼 한번 각각의 서신들을 한번 연구해보자.

먼저 고린도 전후서와 로마서를 기록한 목적을 살펴본다.

 

결론적으로 고린도 전후서와 로마서는 성도들의 헌신을 받아내기 위해서 기록한 책이다.

다소 성스러운 감이 떨어지겠지만 우리의 체감에 쉽게 다가설 표현으로 하자면 서신을 보내는 지역의 성도들에게 돈을 좀 거두어서 바울이 지나는 길에 건네 달라는 이야기인 것이다.

 

“복음”이니,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이런 거창한 이야기는 일단 접어두자.

중요한 건 바울이 이 글을 쓰면서 그가 진정으로 신경 쓴 분야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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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질문들을 생각해보자.

 

<질문>

리포터 : “이번 여행(Tour)의 목적이 무엇이지요?”

 

<응답>

골프 선수 : “골프요.”

테니스 선수 : “테니스요.”

가수 : “노래요.”

사단 : “인류를 망치는 거다.”

바울 : “복음을 전하는 거요.”

 

말은 맞는데 어쩐지 이상하지 않는가?

지나치게 당연한 말은 표현함으로써 오히려 더 이상해지는 법이다.

그럼, 다시 한 번 질문에 대한 답을 자연스럽게 만들어보자.

 

<질문>

리포터 : “이번 여행(Tour)의 목적이 무엇이지요?”

 

<응답>

골프 선수 : “예, 이번에 절치부심해서 갈고 닦은 실력으로 빼앗긴 1위 자리를 탈환하는 겁니다.”

테니스 선수 : “예, 이번에 저희 동료선수 몇이서 순회 경기를 해서 얻은 수익금을 아프리카 지역의 테니스장 건립하는 일에 기부하려고 합니다.”

가수 : “이번에 새로 만든 7집 앨범을 홍보하는 것입니다.”

사단 : “한층 업그레이드 된 Three S(Screen, Sports, Sex) 사업을 전파하려 한다.”

바울 : “아 이번이 4차 전도여행이 될 텐데 그 일에 필요한 자금을 모금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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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전도여행이 막바지에 이를 때 에베소에서 바울은 어떤 중대한 결심을 한다.

 

“...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행 19:21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행 19:1, 21

 

에베소에 머무르고 있을 동안 4차 여행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고린도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것이 고린도 전서이다.

 

고전 16:1-9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나아가서... 너희가 나를 나의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유하려 함은...”

 

돈 이야기를 해야 돼서 그런지 고린도 전서와 로마서는 다른 서신들보다 참 길다.

그리고 고린도서는 그렇게 길게 썼음에도 불구하고 또 장문의 편지를 더 써서 보낸다.

그것이 고린도 후서이다.

지역차별을 하는 것일까?

그 정성을 다른 지역에 나누어서 보내면 안 되었을까?

 

본문을 통해 바울의 심리상태를 살펴보면, 고린도 전서나 로마서의 바울은 상당히 안정되어 있고 태도도 당당하다.

하지만 고린도 후서의 바울의 상태는 매우 예민하고,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를 보인다.

고린도 전서를 기록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고린도 전서를 보낸 후에 그는 그의 경영하는 바가 방해를 받고 있었음을 고린도 후서를 통해 감지된다.

그는 그런 방해를 타개하기 위해 자신의 신원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결백성과 또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당위성을 역설한다.

그리고 고린도 후서의 많은 부분을 자신이 당한 환난을 묘사하는데 할애하고 있다.

 

교인들이라면 선교사들이 선교자금 마련을 위해 각 교회를 순회하며 간증집회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선교사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복음전파를 한 이야기를 들려주면 교인들은 감동을 받아 열린 마음으로 물심양면의 헌신을 하게 된다.

 

그런데 그런 집회를 할 때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아니, 여기 교회도 지금 코가 석잔데 바깥에 쏟을 정력을 이곳에 쏟으면 안 되나? 꼭 안에서 일 제대로 안하는 사람들이 바깥으로 나돌면서 자기 혼자 하나님 사업 다하는 척 한단 말이야. 난 못줘.”

 

아마도 선교자금 명목으로 돈을 거두어서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가짜 선교사들을 많이 겪어본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비록 오해를 받았지만 바울만큼은 순수한 선교사였음을 우리는 안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가 계획하는 여행이 마지막이 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자신의 재산 축적에 무슨 관심이 있었겠는가?

 

행 20:22-24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자, 그럼 자금을 마련하는 일에 걸림돌을 제거하고 또 돈을 최대한 많이 모금하기 위한 목적으로 바울이 기록한 고린도 후서를 보자.

이곳에서 다른 서신들에서는 흔치 않은 바울의 연약한 인간성, 잔꾀, 또 그만의 어떤 사정 , 자격지심(?), 열등감(?), 분노, 아첨, 박쥐같음(?), 변명... 이런 것들을 발견해보자.

 

독자들에게 많은 성경절로 부담을 주기가 정말, 정말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도 줄이고, 줄여서 남겨놓은 것들이니까 이 성경절들만이라고 꼭 깊이 명상하고 또 이해하도록 하자.

 

고후 1: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고후 1:16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에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보내줌으로 유대로 가기를 경영하였으니

 

고후 2:4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 6:8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고후 7:2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가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고후 7:8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바울이 마게도냐와 고린도 사람들로 하여금 헌금 경쟁을 벌이도록 하는 장면)****

고후 8:1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고후 8: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고후 8:3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고후 8:20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로 인하여 아무도 우리를 훼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마게도냐(빌립보,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아가야(고린도, 아덴,...) 사람들을 자랑하였음. 하지만 9:3, 4를 보니까 이 자랑에서는 바울의 무책임한 면이 발견됨. 확신도 없이 자랑을 미리 하다니...)****

 

고후 9:1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나니

고후 9:2 이는 내가 너희의 원함을 앎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마게도냐인들에게 아가야에서는 일 년 전부터 예비하였다 자랑하였는데 과연 너희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을 격동시켰느니라

고후 9:3 그런데 이 형제들을 보낸 것은 이 일에 너희를 위한 우리의 자랑이 헛되지 않고 내 말한 것 같이 준비하게 하려 함이라

고후 9:4 혹 마게도냐인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의 준비치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

 

고후 10:9 이는 내가 편지들로 너희를 놀라게 하려는 것 같이 생각지 않게 함이니

 

고후 11:1 원컨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컨대 나를 용납하라

 

고후 11:19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고후 11:20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 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고후 11:8 내가 너희를 섬기기 위하여 다른 여러 교회에서 요를 받은 것이 탈취한 것이라

고후 11:9 또 내가 너희에게 있어 용도가 부족하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함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거니와 또 조심하리라

 

고후 12:6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

 

고후 12:11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에게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내가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

 

고후 12:17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

고후 12:18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

고후 12:19 이 때까지 우리가 우리를 너희에게 변명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

 

고후 13:1 내가 이제 세번째 너희에게 갈 터이니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

고후 13:2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전에 죄 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그렇게 불편한 말들을 많이 해놓고는 마지막에 이런 글을 썼다.****

 

고후 13:11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 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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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을 했다.

이후에 또 어떤 목적을 가지고 로마서를 기록한다.

그 목적은 다음과 같다.

 

롬 15:23, 24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스페인)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

 

그러니까 바울의 목적은 스페인으로 가는 거였고 로마는 그냥 그리로 지나가는 길에 들리려고 했던 것뿐이었다.

바울이 로마서를 쓴 목적은 로마의 교인들로 하여금 바울을 스페인으로 보내주도록 하는 것이었다(이 편지를 읽은 로마교인들은 이 일을 위해 헌신을 해야 할 것임).

그러나 바울은 지나가다 들리려던 그곳에 오랫동안 머물렀고 또 그곳에서 그의 서신들 중 절반을 기록했다.

그리고 다소에서 출생한 바울은 마침내 로마에서 순교함으로 그의 생애를 마감했다.

 

로마서에서 발견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정보는 바울의 고린도 교회에 대한 목적의 성취여부이다.

 

롬 15:25, 26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그렇다.

우리는 로마서를 통해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계획한 바울의 구제를 위한 자금 확보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 성취감에 취해 로마서를 기록해서 그랬을까?

로마서에는 바울의 안정된 모습과 또 그의 파워풀하고 영감적인 글들이 다시금 넘쳐난다.

그래서 그런가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게 바울서신의 백미를 꼽으라 하면 로마서가 단연 우세하다.

 

갈라디아서, 고린도 전후서, 로마서의 본문 연구를  다음으로 미루고 오늘 기록은 일단 여기서 마쳐야겠다.

그전에 고린도 전후서, 로마서를 기록한 목적을 다시 한 번 짧게 요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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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전후서, 로마서의 기록 배경>

“...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행 19:21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행 19:1, 21

 

<고린도 전서>

고전 16:1-9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나아가서... 너희가 나를 나의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유하려 함은...”

 

<고린도 후서>

고후 1:16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에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보내줌으로 유대로 가기를 경영하였으니”

 

<로마서>

롬 15:23, 24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스페인)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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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연구를 즐기는 사람 모두가 하늘의 지혜를 받아서 성경에 감추인 수많은 보화를 발견하고 소유하는 기쁨을 누리기를 소망한다.

 

- 존재와 도덕의 무거운 중력을 그리스도의 은혜로 넉넉히 이기며 살아가는 실낙원의 연약한 인간 중 하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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