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과 하나님의 거룩함(하나님 품성 중심의 해설) > 안교교과

사이트 내 전체검색

안교교과

제 5 과 하나님의 거룩함(하나님 품성 중심의 해설)

페이지 정보

글씨크기

첨부파일

본문

제 5 과 하나님의 거룩함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기억절: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시99:9)

 

첫째 날(일) “기록되었으되”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딤후3:16)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신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부분에 대해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9)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구약 성경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선지자를 통해 우리들에게 전달하셨습니다.

 

성경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기록하였다면 그 말씀은 분명히 하나님의 생각 즉 하나님의 품성을 기초로 말씀하셨으므로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 글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면 하나님의 품성 안에서의 말씀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품성대로 말씀이 기록되었는데 우리의 품성대로 읽거나 기록된 글자로만 보고 해석하게 된다면 전혀 다른 말씀으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성경에 기록된 글자로만 본 사람들(서기관들, 제사장들, 바리새인들 등)이 구약성경을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직접 오셔서 말씀하실 때에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구약성경에 입각하여 맞서고 있는 장면은 글과 글을 말씀하신 분과의 연결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짐작케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5:40)라고 말씀하셔서 글자에 머물고 있던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또한 성경 글자에는 충실하게 믿고 살지만 그 글을 말씀하신 예수님과 연결되지 않으면 생명 속에 있다고 할 수 없음도 생각하게 합니다.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성경대로 산다고 자부하고 있던 율법사에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10:26)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율법사는 성경말씀 그대로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10:27)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율법에 기록된 대로 이야기 한 율법사의 대답이 기록된 대로는 맞다고 말씀하시고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눅10:28)고 말씀하심으로 그 율법사가 율법에 기록된 대로 살고 있지만 아직 생명의 연결 속에 있지 않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에 기록된 대로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율법을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을 율법 속에서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하나님과 사랑으로 연결되어 생명으로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생명은 율법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말씀하신 하나님 자신이 생명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품성의 사본으로서 하나님의 품성을 증거할 뿐입니다.

 

율법에 기록된 대로 내가 다 지키기 때문에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말씀하신 하나님을 율법을 통해 만날 때 하나님과의 생명의 관계가 형성되며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으로 율법에 기록된 대로 성령하나님께서 이루어 나가게 하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품성으로 기록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하나님의 품성 속에서 생각할 때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12장 39-40절의 말씀을 글자로 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거절한 이유를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하나님께서)저희 눈(이스라엘 사람들)을 멀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이스라엘 사람들)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하나님)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고 마음을 완고하게 하셔서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함으로 구원받지 못하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시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품성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여 구원받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전혀 다른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글로서 이해하려고 하면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고 싶으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 하나님의 품성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요12:41)

 

주의 영광이란 주의 품성입니다.(출33:18-19)

 

이사야 선지자는 주님의 품성을 보게 되니(사6장) 주님이시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눈을 감고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예수님을 거절한 사건들조차도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을 멀게 하고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예수님을 거절하게 만들어서 구원받지 못하게 했다라고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므로 이사야가 하나님의 품성에 입각한 기록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사실이 아닙니다.

 

사실일수가 없습니다.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의 눈을 감고 마음을 닫아버려서 예수님을 거절해 버린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사실적인 기록은 마13:14-15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입니다.

 

같은 이야기를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품성의 입장에서, 마태복음은 사실적인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같은 이야기가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로, 마태복음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율법에 기록된 대로” 믿는다면 어떤 것을 믿어야 할까요?

 

“율법에 기록된 대로” 믿으면 둘 중에 하나는 반드시 틀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이 하나님의 품성대로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게 되면 두 가지 기록 모두 맞게 됩니다.

 

요한복음을 기록은 하나님의 책임지시는 사랑의 품성대로 기록한 것이고, 마태복음을 사실적인 기록입니다.

 

이런 예는 성경의 무수히 등장합니다.

 

사울의 자살과 하나님께서 죽이심 중 어느 것이 맞는 것일까요?

 

대상 10:4 “자기 병기 가진 자에게 이르되 너는 칼을 빼어 나를 찌르라 저 할례 없는 자가 와서 나를 욕되게 할까 두려워하노라 그러나 그 병기 가진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즐겨 행치 아니하매 사울이 자기 칼을 취하고 그 위에 엎드러지니”

 

반면에 대상120:13-14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더라”

 

같은 장에서 전혀 다른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율법에 기록된 대로” 읽으면 어떤 기록이 맞는 걸까요?

 

사울이 자살한 것이 맞는 것인가요? 아니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죽이신 것이 맞는 것인가요?

 

율법에 기록된 대로 읽으면 둘 중 하나는 반드시 틀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하나님의 품성대로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면 둘 다 맞게 됩니다.

 

사울이 자살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울이 자살한 것이 사실이지만 사울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품성은 사울의 행위를 하나님께서 하신 것처럼 기록하셔야만 합니다.

 

그것이 사울을 창조하셨고 사울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다운 모습입니다.

 

심지어 성경의 기록은 사단이 한 일조차도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대상21:1)

 

그런데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삼하24장은 주체가 전혀 다릅니다.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삼하24:1)

 

같은 사건을 대상에서는 사단이 한 것으로, 삼하에서는 여호와께서 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기록된 대로 믿는다면 어떤 기록을 믿어야 할까요?

 

율법에 기록된 대로 믿는다면 분명히 둘 중 하나의 기록은 잘 못 될 수밖에 없습니다.

 

둘의 기록이 반대의 입장이라면 어떤 것을 택해야 할까요?

 

다윗과 이스라엘을 위험 속에 빠뜨리고 싶어 하는 존재는 사단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단이 한일이 사실이고 우리의 품성으로는 그것으로만 기록해야만 되지만 하나님의 품성에서는 사단이 한 일조차도 하나님께서 하신 것처럼 표현하십니다.

 

그 이유는 루스벨을 창조하시고 그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께서 사단이 한 일도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싶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패턴은 애굽의 바로에게도 똑 같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애굽에 출애굽을 위해 보내시면서도 모세의 요구에 응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는 데에 결정적인 일을 해야 할 바로의 마음은 강퍅하게 하여 보내지 않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출7:2-4)

 

글로 보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 글은 하나님의 품성대로의 기록이지 사실대로의 기록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품성대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서 모세의 요구를 거절하게 할 것이라는 기록이 있어도 글을 믿지 말고 그 말을 하신 하나님의 품성 속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출7:3-4의 글이 사실일 수 없는 이유는 만약 출7:3-4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의 품성과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모세를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낸다고 하시고, 한편으로는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못 보내게 하신다면 믿기 어려운 하나님이 되십니다.

 

또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신다는 것은 강제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품성에 비추어 봐도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실은 무엇일까요?

 

바로가 스스로 마음을 강퍅해 하여 모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행히 이 부분에 대해서 사실의 기록이 있습니다.

출8:32 “그러나 바로가 이때에도 마음을 완강케 하여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완강케 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가 자신의 마음을 완강케 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임에도 하나님은 바로가 스스로 완강케 한 일 조차도 하나님께서 하신 것처럼 표현하시는 분이십니다.

 

바로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주신 자유의지로 완강케 하여 거절하는 것에 대한 모든 책임을 하나님 자신이 지시는 표현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글로 보면 이해가 안가지만 하나님의 품성으로 보면 그곳에 하나님의 절대적 창조주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가 많은 곳에 은혜를 더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루스벨이 사단이 되는 하늘에서의 상황도 같은 패턴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계12:7-9의 내용을 보면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지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 쫓기니 그이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전쟁이란 표현도 그렇고 싸운다는 표현과 쫓아내신다는 표현 모두 하나님답지 않은 표현처럼 보여 집니다.

 

창조주와 피조물 간에 전쟁이나 싸움이 될 수 있을까요?

 

피조물의 생명이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생명을 받아야만 사는 존재가 자신의 생명의 근원과 전쟁하고 싸운다는 것 자체가 이상합니다.

 

가장 적합한 표현이 있다면 논쟁일 것입니다.

 

각 시대의 대 쟁투의 표현도 각 시대의 대 논쟁이 적합한 것 같습니다.

 

루스벨과 하나님 사이의 논쟁입니다.

 

강제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품성대로 루스벨의 의문에 대해서 대화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루스벨의 논리에 많은 천사들이 동조하였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품성과 존재를 부정하며 떠나는 선택을 하는 것이 그들에게 사망을 가져옴을 아시기 때문에 그들의 생각의 잘 못되었음을 설명하셔야만 하셨습니다.

 

그러나 끝끝내 루스벨은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아니하였고, 하늘의 존재들도 더 이상 자신의 논리에 귀 기울이지 않음으로 더 이상 하늘에 있을 필요를 느끼지 못함으로 하나님 보좌를 떠나게 됩니다.

 

사단의 행위를 하나님은 사단을 창조하신 창조주의 책임지시는 표현법으로 하나님께서 쫓아내신 것으로 기록하셨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쫓아내신 것이라면 욥기에 나오는 하나님 앞에서 가진 하나님의 아들들의 모임 속에 사단이 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계12장에는 하나님의 품성의 기록도 있지만 사실적인 기록도 남기셔서 이 사건의 진상을 알게 하셨습니다.

 

계12:12에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 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 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라고 기록하여서 하나님이 쫓아내셔서 나간 것이 아니라 마귀가 스스로 하늘을 떠나 내려갔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또한 유 6절에도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이라고 기록하여서 하나님이 쫓아낸 것이 아니라 천사들이 스스로 자기 처소를 떠났음을 명백히 밝히고 있어서 쫓아내셨다는 오해를 바로 잡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하나님의 품성대로 기록한 내용만 기록되어 있지 않고 사실대로의 기록이 남겨져서 오해를 해소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어떤 것들은 하나님의 품성대로만 기록되고 사실의 내용을 담지 않아서 오해의 요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고라의 반역으로 인한 죽음입니다.

 

하나님과 반대편에 서는 선택을 할 때 하나님께서 죽였다는 기록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땅을 갈라서 죽였다는 기록만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반역하면 하나님께서 죽이신다고 생각할 수 있는 기록입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위의 다른 내용들처럼 하나님의 품성적 기록과 사실적 기록이 함께 있으면 혼란이 없겠지만 한편의 기록만 있을 때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적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것뿐이므로 이런 문제들은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통해 하나님의 품성을 기초로 곰곰히 생각해 봐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고라처럼 하나님을 반역하는 선택을 하게 될 경우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님의 품성다운 행동일까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요12: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하는 것은 그 사람의 선택입니다.

 

그 선택의 힘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주신 자유의지대로 할 수 있는 선택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자신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마음껏 사용한 것입니다.

 

자유의지를 남용하면 그 악한 결과는 고스란히 자신에게 오지만 그렇다고 그의 선택에 대해서 그에게 벌을 주시면 그건 모순 입니다.

 

자유의지의 남용대로 되지만 그것 때문에 벌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자유의지가 남용될 소지가 있지만 혹 남용된다 할지라도 그 남용의 결과에 대해서 자유의지를 주신 창조주께서 대신 책임지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품성이고 그래서 하나님은 창조 전에 이미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 되신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불순종하는 선택을 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선택 때문에 벌을 주시거나 죽이시지 아니하시고 그 사람의 선택의 결과인 죽음을 그 사람을 대신하여 창조주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십니다.

 

대속하시는 사랑을 볼 때에 하나님의 품성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셔서 생명 속에 있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 이십니다.

 

그래서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대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고라의 반역에 대해 하나님께서 죽이셨다고 기록이 되어있어서 하나님이 죽이셨다고 믿으면 글만 보는 것이지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적인 기록이 따로 남겨져 있지 않아서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하나님께서 고라를 죽이셨다는 기록이 있어도 글로서만 받아들이면 여러 가지 성경 자체의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굳이 죽이실 필요가 없는 이유는 사람은 스스로 생명이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재림교회가 성경의 진리 중 하나인 영혼멸절을 지지하는 이유는 사람은 스스로의 생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존재이고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야만 사는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므로, 하나님을 거절하게 되면 그 존재 자체가 창조 전의 상태로 돌아감으로 영혼이 안 죽고 벌 받는다는 영혼불멸설과 영원 지옥설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야만 사는 존재가 자신의 생명의 근원되는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 자체가 이미 죽음인데 굳이 하나님께서 죽이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또한 이미 하나님을 떠나 죽은 사람이라면 굳이 벌을 주실 필요가 있을까요?

 

하나님은 미워하심도 조금도 없으신 분이십니다.(요일1:5 , 9절)

 

다만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반역한 선택을 한 고라에게 더 큰 은혜를 주셔서 그를 구원하고 싶으시지만 고라가 끝끝내 자신의 선택을 돌이키지 않을 때 하나님은 고라가 바뀌지 않을 것을 아시고 확신하실 때 눈물을 머금고 그의 선택대로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 때에 고라가 그의 선택대로 죽은 것입니다.

 

사울이 한 행위도, 사단이 한 행위도, 바로가 한 행위도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말씀하고 싶으신 하나님을 보셔야 합니다.

십자가는 사람의 품성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사건입니다.

 

사람의 잘 못에 대해 사람의 품성으로는 잘 못한 사람이 달려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아닌, 사람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고 하나님께서 달리신 일이 사랑이며 동시에 공의입니다.

 

“죄를 처리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켜며 동시에 사랑을 충족시킬 유일한 방법은 십자가였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는 자신의 선언을 충족시키셨으며, 동시에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롬 5:8) 하셨다.”(박금하장로님의 교과해설 중 인용)

 

사람의 상대적 개념의 사랑 속에서는 잘 못한 사람이 십자가에 달리는 것이 공의이지만 절대적 개념의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께서는 공의나 심판을 행할 때에도 하나님의 품성에 따라 행하심으로 사람의 잘 못에 대해서 사람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자비에 못지않게 그분의 공의에도 표현되어 있다. 공의는 그분의 보좌의 초석이며 그분의 사랑의 열매이다. 진리와 공의로부터 자비를 분리시키려는 것이 사단의 목적이다.”(시대의 소망, 762쪽)

 

죄가 많은 곳에 은혜를 더 주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품성으로 하나님은 죄인에게 더 큰 은혜를 쏟으시지만 끝끝내 그 은혜와 사랑을 거부하고 더 이상 시간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하나님께로 돌아올 확률이 완전히 사라질 때, 강제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품성대로 그의 선택을 인정하게 되고 그 인정하심의 때를 심판이라고 하며 사람은 그 스스로가 선택한대로 창조전의 무로 돌아가는 심판이 집행되게 됩니다.

 

무로 돌아가 버린 선택을 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없이 크지만 “자기 유익을 구치아니하고 무례히 행치 아니하”(고전13:5)시는 품성대로 모든 것을 참으시면서 모든 것을 견디시면서 그 사람의 선택을 인정하십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가슴에는 불이 일어납니다.(호11:8)

 

하나님의 품성을 통해 기록한 성경이므로 글이 아닌, 성령 하나님의 조명하심 속에서 하나님의 품성을 통해 성경을 보게 될 때 예수님께로 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요5:40)

 

둘째 날(월) 구별함

 

거룩에 대한 성경의 첫 번째 개념은 구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을 생각할 때 하나님은 창조에 속한 모든 것과 구별됨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존재에 있어서 다른 창조물들과 구별됩니다.

 

모든 창조물들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신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반면 여호와 하나님은 스스로의 생명으로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품성에 있어서 다른 창조물들과 구별됩니다.

 

모든 창조물들은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졌고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사랑과 생명을 받아야만 사는 존재인 반면 창조주 하나님은 사랑과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겨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품성인 반면 사람들의 품성으로는 작은 자가 큰 자를 섬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잘 못 한 사람이 거기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사람들의 품성인 반면(눅15장의 맏아들의 생각, 28-30절) 하나님의 품성은 하나님께서 대신 대속하시고 죄가 많은 곳에 은혜를 더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롬5:20)

 

 

셋째 날(화) 티끌과 재 위에서 회개함

 

하나님의 임재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사라질 것 같은 위기를 초래 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빛이 사람들의 어둠을 사루어 버릴 듯한 위기를 느끼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공격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어둠이 빛에 의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요1:5)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에 자신의 무가치함과 더불어 더 많이 하나님의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자신의 무가치함과 죄인임을 깨닫게 될 때 사망 속에 있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절대적 사랑의 은혜를 붙잡게 됩니다.

 

 

 

넷째 날(수) 나를 떠나소서

 

 

하나님을 보게 될 때 사람들은 자신의 상태를 보게 되고 그때에 절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절망은 동시에 희망이기도 합니다.

 

스스로는 그 절망에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알기에 사람의 절망을 해결하기위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창조주 하나님의 품성 속에서 희망을 갖게 됩니다.

 

 

다섯째 날(목) 마귀가 말할 때

 

마귀가 예수님을 볼 때에 두려워 떨었습니다.

 

하나님의 빛이 자신의 어둠을 살라 버릴 것 같은 두려움과 함께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마귀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품성은 잘 못에 대해서 벌을 주시고 죽이시는 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사야도 하나님을 보았을 때 두려워서 떨었습니다.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

 

이사야의 죗됨 어두움이 빛이신 하나님에 대해서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과 함께 이사야가 알고 있던 하나님의 품성은 부정한 사람에 대해서 벌을 주실 것이라는 생각 때문 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보좌에 있던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와서 이사야의 입에 대며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사6:6-7)고 하셨습니다.

 

단은 번제단으로 해석할 수 있고 핀 숯은 번제단 위에 올려진 나무와 어린 양의 희생의 결과로 해석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의 입술이 부정하고 죄 속에 있는 상황에 대해서 이사야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벌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이사야를 대신하여 돌아가시는 분임을 이사야에게 알려주셨습니다.

 

내 선택대로 벌주시는 분이 아니라 내 선택에 대한 모든 책임을 대신 지셔서 대신 돌아가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품성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핀 숯을 입게 닿게 한 스랍의 말은 “이 일로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다”고 했습니다.

 

악이란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오해의 상태입니다.(마25:24-26)

 

죄란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하여 하나님을 거절하고 떠난 상태를 말합니다.(유6, 벧후2:4, 창3:4-5)

 

몸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고 제물을 풍성하게 바쳐도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하여 하나님과 멀리 떠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악이고 죄입니다.(사1:11-13)

 

이제야 하나님의 품성을 알게 된 이사야는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하여 잘 못된 신앙 속에 행위적이고 율법의 조문대로의 열심을 내는 백성들을 위해 누가 가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 하나님의 질문에, 같은 문제로 고통 속에 있다가 하나님의 품성을 통해 생명이 연결된 자신의 경험을 볼 때에 자신이 가야될 것 같은 확신 속에 자신이 가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하기 위해 이사야를 보내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품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6:9-10)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여 이사야의 기별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함으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염려한다고 하셨습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말씀입니다.

 

만약 이사야가 이 말씀을 문자대로만 이해했다면 반드시 이렇게 하나님께 말씀을 드려야 합니다.

 

“저를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와서 구원 받기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의 귀를 막고 눈을 감기게 하고 마음을 둔하게 하여 구원 못 받게 하신다고 하십니까? 어떤게 사실입니까? 제가 가서 그들을 믿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인가요? 아니면 정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 못 얻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가요? 어떤 것이 사실입니까?”라고 질문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품성을 깨달은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실적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품성 속에서의 말씀임을 깨닫고 위의 질문을 하지 않고 어느 때까지 그들이 기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지에 대해서만 질문합니다.(사6:11)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과 귀와 눈을 닫게 하여 못 믿게 하는 분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강퍅하여져서 마음과 귀와 눈을 닫고 믿지 않는 것을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표현법으로 말씀하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은 요12:39-40절에서 인용되었고 이사야가 이렇게 기록한 이유도 하나님의 품성을 알았으므로 하나님이시라면 이스라엘 백성이 한 것도 하나님께서 하실 분이라는 확신 속에 기록되었음을 41절에서 남겼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과 창조주로서 책임지시는 사랑의 품성을 볼 때에 그 거룩함에 모든 존재들은 무릎을 꿇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사람의 잘 못에 대해서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버리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때에 두려우리 만큼 놀라운 그 사랑에 감격하고 무릎 꿇게 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Copyright © KASDA Korean American Seventh-day Adventists All Right Reserved admin@kasd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