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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과 은혜와 심판의 하나님(하나님 품성 중심의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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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과 은혜와 심판의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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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절: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12:14)

 

 

첫째 날(일) 심판의 날

 

성경에서 말하는 심판의 개념을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과의 저자도 언급하였듯이 “심판의 주제가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지만 심판이 구원이나 복음의 반대 개념이 아니다”(교과, 52쪽)는 사실입니다.

 

““공의와 은혜”, “심판과 구원”의 개념을 대립시키면 안 됩니다.“(교과, 52쪽)

 

하나님께서 하시는 심판이라면 그 심판도 하나님의 품성을 기반으로 한 심판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품성 속에서의 심판이란 사람이 그동안 살아온 내용이 무엇인지를 드러내고 그 선택의 삶에 대해 변하지 않는 시점에 그 사람이 선택한 결과대로 인정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의 선택이 하나님을 거절하는 선택을 하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그에게 사랑을 부어주어서 하나님의 품성을 확신함으로 하나님을 선택하여 생명 속에 있게 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기울이시지만 하나님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거절하는 선택을 하는 사람의 선택이 더 이상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못하다는 것이 하나님의 예지의 측면에서 확실히 보실 때 하나님은 결국 강제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품성대로 그의 선택대로 인정하실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 사람의 선택대로의 결과는 하나님과 영원히 멀어짐으로 인한 생명 단절 즉 죽음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가슴이 타는 안타까움을 인내하면서 그의 선택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심으로 사람을 죽이시는 것이 아니라 강제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품성대로 하나님의 호소가 더 이상 무의미하게 되었을 때 그의 선택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본래 없었던 존재여서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로 인해 그 사람은 창조전의 상태인 무로 돌아가 버림으로 모든 기억도 다 사라지지만 영원하신 하나님은 그 사람과의 모든 추억을 영원히 간직함으로 인한 안타까움을 그대로 안고 가셔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는 하나님 품성대로, 모든 것을 참는 하나님 품성대로 그의 선택을 오래 참음으로 감당하면서 인정하게 됩니다.

 

교과 53쪽은 각 시대의 대쟁투 542쪽을 인용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의 유익을 위하여 또한 당신의 심판을 받는 대상자의 유익을 위하여 악인에게 벌을 내리신다”

 

이 인용구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심판은 하심으로 악인들에게 벌을 내리신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화잇의 글에는 전혀 다른 말씀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시키지 아니하신다. 멸망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스스로 멸망을 자초한 것이 될 것이다. 양심의 경고를 무시하는 자는 불신의 씨를 심는 자이다. 그 씨는 정확하게 불신을 수확하게 될 것이다.”(실물, 64)

 

“우리는 하나님을 죄인을 벌하려고 기다리고 계시는 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죄인이 자기 스스로 벌을 자초하는 것이다. 죄인 자신들의 행동들이 분명한 결과를 가져오는 연속적인 사건들을 돌발시킨다”(1SM, 235)

 

또한 시34:21에서도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잠13:6에서도 “악은 죄인을 패망케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악”이란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하고 있을 때의 하나님의 표현입니다.(마25:24-26)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할 때 하나님과 마음으로 함께 할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을 오해하여 하나님을 두렵게 생각하여 하나님과 함께 있길 원치 않을 때 그것은 생명과의 단절을 의미하고 그 결과가 죽음 즉 창조전의 상태인 무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미워하는 것이 조금도 없으신 분이십니다.(요일1:5; 2:9)

 

미워하는 것을 좀더 전진한 것이 증오하는 것이고 증오하는 것보다 좀 더 전진한 것이 벌을 내리는 것이기 때문에 조금도 미워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벌을 주실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위에 인용한 각 시대의 대 쟁투의 글은 악인이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하여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선택함으로 인한 결과로 인해 창조전의 상태로 가게 된 것을 그 사람을 창조하시고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께서 책임지시는 사랑의 표현법을 사용하셔서 마치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는 것으로 표현하신 것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표현법은 성경에서 무수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상10:4과 13-14절 비교)

 

 

 

둘째 날(월) 에덴에서의 심판과 은혜

 

 

하나님을 거절하는 선택을 하게 되는 창세기 3장의 이야기를 잘 살펴보면 하나님을 거절한 결과를 먼저 이야기 하지 않고 하나님은 구속의 계획을 발표하십니다.

 

사람의 선택에 대해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대신하여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그 값을 지불하시리라는 구속의 계획이었습니다.(창3:15)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봄으로 자신의 선택의 상태와 결과로 인해 좌절하거나 낙담하지 말고 용서하시고 구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셋째 날(화) 홍수

 

 

홍수 사건은 사람들의 선택이 더 이상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못함이 확정되었을 때 사람들의 선택대로 인정하는 장면입니다.

 

창6: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이 말씀은 글로 보면 하나님의 신이 떠나는 장면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품성 속에서 보면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령을 완전히 거절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떠나시지 않습니다.(사49:15-16)

 

그래서 이름조차 임마누엘이란 이름을 새로 만드셨습니다.(마1:23)

 

사람이 하나님의 성령의 음성을 거절함으로(창6:5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선택대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시점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120년의 기간을 더 연장하시고 최후의 호소를 위해 노아를 통해 방주를 짓게 하시고 백성들에게 창조주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도록 호소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의 호소를 거절하였고 더 이상의 시간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그들의 선택에 변화가 없으리라는 사실이 확정되었을 때 하나님의 강제하지 아니하시는 품성대로 그들의 선택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궁창은 지구에 가득한 물을 반으로 나누어서 반은 하늘위에, 반은 땅에 두시고 원래 합쳐 있었던 물이 합쳐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힘을 사용하셔서 붙드심으로 대기권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창조하신 사람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창조주의 행위였습니다.

이런 창조주의 행위는 창조된 사람들이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할 때만 합법적으로 행할 수 있었는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창조주로 거절하게 되면 하나님은 그들의 선택에 반한 강제적인 행위를 하실 수가 없게 됨으로 그들의 선택대로 인정하게 되면 물을 갈라 합치지 못하게 하셨던 손을 거두셔야만 합니다.

 

그래서 홍수가 하늘에서도 내렸지만 땅에서도 솟구쳤던 이유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홍수로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선택대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그들의 선택의 결과를 아는 하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면서 그 선택을 인정함으로 인한 결과가 물의 합쳐짐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선택으로 인한 결과조차도 하나님은 그들을 창조하신 창조주로서의 책임지시는 사랑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여 물로 쓸어버린다고 표현하셔서 사람들의 잘못으로 인한 죽음이 아닌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죽음처럼 처리하시고 싶으신 사랑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의 선택을 인정하기 전의 하나님의 호소를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그들을 살리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호소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넷째 날(수) 정죄와 은혜

 

 

정죄는 사람 스스로의 선택의 결과로 인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용서와 품성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더 큰 사랑을 그들에게 주시지만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게 되면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선택에 의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짐으로 창조전의 상태로 돌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다 아담 안에서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미 죽은 자로서 태어나지만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께서 첫 아담의 선택에 대한 모든 결과를 십자가에서 책임지심을 통해 용서와 구원의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용서와 구원을 마련하셨어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국은 그 사람의 선택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고 그 결과는 스스로를 영원한 멸망 속에 빠지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사랑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호소에 마음을 열고 하나님을 선택할 때 하나님께서 이미 베푸신 용서가 나의 것이 됩니다.

 

 

 

다섯째 날(목) 심판할 때

 

심판의 정의를 마10:26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그 동안 어떤 삶을 살고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드러나게 하는 때가 심판의 때입니다.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드러내서 그 선택이 더 이상 되돌릴 수 없게 되는 때가 심판의 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선택의 삶을 살았는지를 보여주시고 그 선택이 더 이상 되돌려지지 않게 되는 때가 오기 전에 우리의 삶과 선택을 점검해보고 하나님과 연결된 삶의 선택이 되길 호소하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의 품성대로 행할 때 하나님이 공의롭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강제하지 아니하시고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시고 오직 사랑으로서 호소하시고 사람의 선택대로 인정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공의로우신 하나님 이십니다.

 

사랑의 반대 개념이 공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품성인 사랑대로 행할 때 공의라고 합니다.

 

세 천사의 기별은 하나님의 자비의 기별입니다.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지를 잘 점검하여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과 선택이라면 지금 돌이켜서 창조주 하나님과 연결되는 삶과 선택을 하도록 부탁하시는 기별입니다.

 

강제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품성대로 사람들의 선택이 더 이상 되돌려지자 않을 것이 확정되면 그 선택대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 오기 전에 창조주와의 관계를 회복하였으면 좋겠다는 기별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품성대로 행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호소를 받아들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선택을 하는 사람에게 그 선택을 인정하셔서 영원한 생명의 관계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호소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선택을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더 큰 은혜와 사랑을 쏟아서 하나님의 품성을 보여주시지만 끝끝내 하나님의 호소를 거절할 때 하나님은 강제하지 아니하시는 품성대로 그 선택을 인내하심으로 인정하십니다.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과 하나님의 품성을 볼 때 하나님께 끌리게 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볼 때 예수님의 품성을 통해 예수님께 끌리게 됩니다.

 

“여호와를 힘써 알자”(호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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