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과 창조: 성경의 한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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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과 창조: 성경의 한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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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6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49분
기억절: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계14:6~7).
연구 범위: 창 2장, 마 19:4~6, 시 8편, 욥 38:1~21, 욥 42:1~6, 사 45:18, 행 17:22~31.
도입)
창조론과 진화론의 논쟁이 뭐 그리 중요하냐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문제 말고도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문제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잠시만 생각해 보면 이 문제가 가장 근본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문제는, 우리와 이 우주가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를 설명하는 이론 중 하나는 창조주가 있다는 것이 며, 다른 하나는 창조주가 없이 저절로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 이외에 는 다른 경우가 있을 수 없다. 만일 창조주가 있어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만들었다면 우리는 그 뜻에 맞게 사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만일 저절로 우연히 생겨났다면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살아도 될 것이다. 지금의 세상은 진화론의 영향이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사는데 사상적 배경을 제공하고 있다. 따라서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대한 바른 인식은 기독교 신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우리의 미래의 운명의 매우 중요한 선택 사항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알도록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얼굴의 구조에서도 창조주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하셨다. 생명의 원천이 우리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주셨다. 첫째 날의 빛과 관련되어 눈을 만드시고 둘째 날의 궁창의 공기와 관련해 코를 만드시고 셋째 날의 씨맺는 채소와 과목을 내셔서 사람의 입으로 들어갈 양식을 삼으셨다. 모두가 하나님께 의존해야 할 것들이다. 시68:6에 “하나님은 고독한 자로 가속 중에 처하게 하시며 수금된 자를 이끌어 내사 형통케 하시느니라 오직 거역하는 자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 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고독한 자로 가족들과 함께 하게 하실 수도 있고, 갇힌 자들을 이끌어 내어 형통케 하실 수도 있으시나 하나님께 거역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도움을 주실 수가 없으심을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그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하나님께 두지 않는 모든 인생들에게는 그 결국은 사망 곧 죽음에 이르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첫째날(일) 1월 20일
창세기 2장이 그리는 창조
도입)
* 창세기 1장과 2장이 그 내용에 있어 현격히 다른 모습이라고 사람들은 성경의 모순을 들어 말한다. 과연 그럴까? 우선 창세기 2장은 그 내용에 있어 인간의 창조를 중심으로 다시 기록된 것임을 살펴보라. 창세기 1장은 인간의 주소지인 지구를 중심으로 창조를 묘사하고 있는 반면, 창세기 2장은 그 초점을 인간 창조에 두고 있다. 이는 마치 전체 풍경을 촬영한 후 다시 줌을 이용하여 촬영자가 원하는 특정한 풍경을 보다 상세히 촬영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히브리 문학에서는 이러한 식의 대구적 묘사가 자주 나타나는 편이다.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창 2:4).
2. 창세기 2장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인간 즉, 자유 의지를 가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의미를 얼마나 더 잘 이해하게 되는가?
[창2:7,15~1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부가설명>
[시36:9]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
창세기 2장은 선악과라는 것은 우리의 생명의 원천이 하나님께 있음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생명나무에 의존해야 그 생명을 지속시킬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께 의존된 생명이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아직 경작도 하지 않은 땅에 아담과 하와를 자신의 땅의 관리를 맡은 할 동산지기, 즉 청지기였음을 잊지 말아야 했다. 왜냐하면 저들에게는 임으로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정해진 사람들이었다. 천사들에게도 지위가 있었는데 저들은 하나님께서 부리는 영이었을 뿐이다.
[히1:14]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시103:19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이루며 그 말씀의 소리를 듣는 너희 천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21 여호와를 봉사하여 그 뜻을 행하는 너희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22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모든 천사들은 하나님께서 부리는 영이며 여호와를 위하여 봉사하여 그 뜻을 행하는 천사들이다. 천사들은 여호와를 위해 봉사하는 천사들이다. 인간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창조된 피조물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참 모습의 확인이 창세기 2장에 있다. 에덴 밖에서 일어나는 식물의 활동과 에덴 안에서 일어나는 식물의 활동이 동일하지만 에덴동산 안에만 있는 특별함은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그 동산의 중심에 있다는 점이다.
교훈: 창 2:4 이후에 묘사된 인간의 창조 이야기는 창 1장과 함께 우리의 존재와 목적을 더 깊이 깨닫게 해 준다.
둘째날(월) 1월 21일
시편에서 그리는 창조
도입)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생명체는 진화한 것인가, 아니면 창조된 것 인가? 어떤 사람은, 만물이 저절로 진화했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건 아득한 옛날에 일어난 일이 뭐 그리 중요한 일이냐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문제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기원에 관한 개인 의 신앙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본질적인 의미와 궁극적 운명에 관한 견해를 크게 좌우하기 때문이다. 즉 기원에 대한 인간의 입장은 그의 생활철학을 바로 세우게 하는 표준과 같은 역할을 한다. 또한 생활 철학은 다시 인간의 행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오늘날 인간의 직면한 문제들(사회적, 정치적, 인종적, 생태학적)은 인간 행동의 직접 적인 결과이다. 인간 행동은 세계관의 표현, 즉 세계관의 역동적 표출 과정이다. 한 개인은 근본적으로 기원에 대해 두 가지 입장에서 하나를 택할 수 있다. 하나는 창조주가 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창조주가 없다는 것이다. 또 진화론이 기원을 설명해 준다는 것과 설명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창조 대 진화 , 유신론 대 유물론 혹은 자연주의, 그리고 계획 대 우연의 양자 택일이다. 이 시편 기자는 창조론에 입각한 시로서 하나님의 창조를 시로 강해하고 있다.
1. 시편 8편을 읽어 보라. 그대는 시편 8편과 창세기 1장 사이에 어떤 연관성을 발견하는가?
[시8:1~9]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2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5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7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8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9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부가설명)
3000년 전, 고대 근동의 다른 민족들이 천체의 행성과 항성들, 그리고 해와 달들을 신적인 존재로 이해하려 했던 때에, 이미 다윗이 그것들이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임을 고백하고 있다. 변함없이 아침에 붉은 모습으로 동편하늘에서 올라오다가 힘센 장사와 같이 높이 떠 있어 세상에 온기를 가져다 준 후에 다시금 붉은 모습을 띠고 서편으로 내려가는 태양에 대해서도 무서워하거나 경배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그것 역시 하나님께서 만드셨음을 고백한다. 우리가 매일 바라보는 하늘에 대하여 매일 쳐다보는 하늘의 별과 달의 모습 안에서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였다.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그는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무가치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인간은 사실상 깨어지기 쉽고, 아무런 보잘 것 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는 황공하게도 하나님께서 먼지에 불과한 자신에게 사랑으로 오셨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그 영광이 하나님께서 무기력하고 깨어지기 쉽고 유한한 존재인 인간을 고려하신다는 사실이 너무나 놀라운 것이기에 이렇게 고백한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데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약하고 의존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존재가 하나님에 의해 잊혀 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놀라와 하고 있는 것이다.
2. 시편 104편을 읽어 보라. 이 시편이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에 나타난 그분의 선하심을 어떻게 노래하는지 주목하라. 아래 시편 104편의 성경절들과 창세기 1장의 관련성을 찾아보라.
부가설명)
시편 104편의 이 시는 천지창조 기사인 창세기 1장을 강해한 시라고 할 수 있다. 창세기 1장을 강해하는데 시적으로 강해했다. 시편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편은 창세기 1장과 함께 읽으면 은혜가 된다. 시편 104편이야말로 창세기 1장과 함께 읽으면 더욱 은혜로워지는 신앙시 가운데 하나이다. 이 시에는 빛에서 시작해서(2절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 시작해서 사람에 이르기까지(25절 "사람은 나와서 일하며 저녁까지 수고하는도다") 많은 피조물들이 등장한다. 이 피조물들이 소개되는 순서는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순서와 같다. 2절은 빛과 하늘, 5절에서 9절까지는 땅과 바다, 11절과 12절은 짐승과 새, 19절은 달과 해, 23절은 사람, 등장순서가 같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하고 있다. 다윗은 그가 지은 또 다른 신앙시인 시편 19편에서 이 사실을 직접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19: 1)
교훈: 창조를 노래하는 시편도 창세기 1장의 이야기를 회상하고 있다.
셋째날(화) 1월 22일
욥기에서 그리는 창조
도입)
하나님께서 욥의 고난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신 믿음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창조’에 대한 믿음이다. 욥은 아브라함과 같이 모범이 되는 믿음을 보여주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자신을 드러내실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욥을 위로하시고, 회복시켜주셨다. 하나님께서 나타내시고 하는 ‘창조’에 대한 믿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단이 하나님에게 도전한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 요즘은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도 부인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아는 것도 대단한 믿음으로 보이지만, 욥기에서는 그 이상의 믿음이 있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사단은 하나님께 이렇게 도전하고 있다. 하나님이 욥에게 잘 해주지 않으셔도 욥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경외하고 또한 사랑하고 신뢰할 것인가?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사랑하시고, 신뢰하시는데 사람도 하나님에 대하여 그렇게 대할까? 욥기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알고 있느냐에 대한 심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욥기에 나오는 욥의 친구들은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다. 비록 욥의 고난을 하나님의 징계로 잘못 해석하여 하나님께 꾸중을 들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의 말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로 가득 차 있음에도 무엇인가 빠진 것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은 잘 알고 있지만, 이 세상이 왜 악한지에 대하여 설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의인은 복을 받고, 악인은 벌을 받는다는 단순한 논리에 의지하고 있지만 실제 세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욥의 변론을 듣지 않아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욥기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창조주이시라면 왜 이 세상에 악인이 흥하고, 의인이 고난을 받느냐는 질문도 포함하고 있다. 욥기에서 던지는 질문들의 답은 창세기에 이미 잘 나와 있다. 창세기를 통해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 세계가 인간의 불순종으로 어떻게 망가졌으며, 인간들도 노아 시대 대홍수 심판을 받아야 할 정도로 얼마나 타락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들이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 기록되어 있지만, 사람들은 지금도 욥기의 질문들을 계속 던지고 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데 내용을 보면 동방의 부자 욥이 있었는데 사단의 시험으로 고난을 겪게 된다. 그런데 욥은 수많은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이 모든 만물의 창조주임을 확신하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커다란 축복을 받게 된다는 내용이다. 욥이 고난과 어려움을 받을 때마다 욥은 하나님의 창조하신 많은 것들을 보므로 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1. 욥 38:1~21을 읽어 보라. 아래의 성경절에서 창조 주제들을 찾아보라.
[4~7절]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5 누가 그 도량을 정하였었는지, 누가 그 준승을 그 위에 띄웠었는지 네가 아느냐 6 그 주초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이 돌은 누가 놓았었느냐 7 그 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느니라.
※ 지구를 창조하기 전에 이미 창조된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계시한 말씀이다.
[8~11절] 바닷물이 태에서 나옴같이 넘쳐흐를 때에 문으로 그것을 막은 자가 누구냐 9 그 때에 내가 구름으로 그 의복을 만들고 흑암으로 그 강보를 만들고 10 계한을 정하여 문과 빗장을 베풀고 11 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교만한 물결이 여기 그칠지니라 하였었노라.
<부가설명>
하나님께서 욥에게 마지막 나타나셔서 창조의 신비를 열거하신 내용들을 겉으로만 보면 피조세계와 동물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고 돌보시는지를 말씀하고 싶어 하신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를 얼마나 아느냐고 꾸중하시지만, 정작 말씀하시고 싶은 것은 내가 이런 동물들도 사랑하고 돌보는 창조주 하나님이신데, 하물며 나의 자녀로 창조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고 돌보시는 분인지를 말씀하고 싶으신 것이다. 욥은 모든 것을 잃고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는 다시 취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과 주권자 되심에 대하여 추호도 믿음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친구들이 욥의 고난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반박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고난을 통해 정금처럼 단련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사랑을 잃지 않는 믿음이 흔들리고 말았다. 욥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도전한다. 과연 모든 것을 잃고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가? 이 세상에 악이 가득 차 보일 때도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가? 욥기와 창세기를 함께 묵상하면서, 만약 욥이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신뢰하였다면, 악에 대한 최후의 심판, 그리고 죽음너머 부활의 믿음의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해본다. 욥기와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며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준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이시다. 어두운 세상 가운데서 살고 있는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이런 믿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욥기와 창세기를 통해 우리를 격려하시고, 위로하시면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를 더 분명히 깨닫기 원하신다. 우리에게 고난과 시험이 있는 이유 중에 하는 우리의 믿음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나타내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지금도 사단은 끊임없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참소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깨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향해 달려갈 수 있게 되었다. 창조주 하나님을 더 알아갈 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더 닮아가게 되어있다. 욥기에 나타난 창조주 하나님, 창세기에 나타난 창조주 하나님을 통해 창조의 신비를 더 깊이 체험하고 하나님을 경험하길 바란다.
교훈: 창조 세계의 신비를 다 이해할 수 없어도 하나님의 위대함을 인정하고 신뢰하였던 욥처럼 우리도 더욱 그분을 믿고 의지해야 한다.
넷째날(수) 1월 23일
선지서에서 그리는 창조
도입)
우리는 지금 지구와 함께 시속 106,000km라는 엄청난 속도로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 이 지구는 초대형 비행기로 전 세계 69억의 승객을 태우고 비행기보다 약 120배나 빠른 속도로 비행하고 있다. 이것은 과학적인 사실이기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그렇다면 비행기도 설계한 사람이 있고 만든 생산 공장이 있는데 하물며 지구라는 우주선도 당연히 만든 분이 있는 것이다. 저절로 생겼을까? 자동차나 컴퓨터가 우연히 저절로 생겼다고 믿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인간이 만든 비행기는 때로 고장도 나고 종종 사고도 난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든 이 지구 비행기는 고장도, 사고도 없이 일정한 속도로 지구 궤도를 돌고 있다. 태양 주위를 돌되 아주 이상적인 거리에서 돌기 때문에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우연에 의하여 되어 진 것일까? 이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 45:18) 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45:18).
<부가설명>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은 창조로 시작하여 창조로 끝을 맺고 있다. 창세기는 처음 창조를, 요한계시록은 새 창조를 계시하고 있다. 처음 창조와 새 창조를 잇는 연결고리가 이사야서다. 성경은 하나님을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계시하고 있다. 첫 창조는 하나님이 만물에게 베푸신 첫 번째 은혜이며 그 첫 번째 창조는 새 창조의 바탕이다. 처음과 나중은 짝이 되어 온전함을 이룬다. 이사야는 이 일에 대하여 하나님은 토기장이와 같다 하였다. 토기장이가 먼저 흙으로 토기의 형상을 빚지 아니하면 그것을 불가마에 넣어서 온전한 도자기로 만들어 낼 수가 없다. 부모가 아기를 낳지 아니하면 그 아기를 보살피고 길러서 사람답게 살게 할 수가 없다. 처음과 나중은 전혀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여정이요 성장과 성숙과 온전함과 합일에 이르는 생명의 길이다.
교훈: 하나님은 지구를 인류가 거주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드셨는데 이런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연으로 보기 힘든 매우 다양한 요소가 갖춰져야 한다.
다섯 째날(목) 1월 24일
신약에서 그리는 창조
도입)
아덴(아테네)은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이며 서양문명의 발원지다. 아덴은 또 학문의 도시다. 역사 속에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고향이고, 아리스토텔레스, 에피쿠로스, 스토아학파의 활동무대이다. 이곳에 그리스의 대표적인 유적명소인 아크로폴리스가 있어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아크로폴리스는 아테네시의 한 복판에 솟아 있다. 그 꼭대기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1호인, 파르테논 신전이 있고, 그 밖에 에렉티온 신전, 나이키 신전 등 수많은 신전들이 2500년의 역사를 간직 한 채 서 있다. 그런데 이 아크로폴리스 광장을 내려오다가 보면 또 작은 언덕이 하나 있는데 이 언덕이 오늘 성경 본문에 나오는 그 유명한 아레오바고 언덕이다. 이곳에 고대 아테네의 재판소가 있어서 재판을 한 곳이며, 교사들을 심사하여 세운 곳이기도 하다. 바로 이곳에서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과 변론을 하고 또 복음을 전하는 모습이 행 17장에 기록되어 있다(18-19<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 할 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바울이 보니, 산 정상에 우상을 섬기는 신전과 온 사방에 우상천지다. 그래서 바울이 그곳에서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했다고 행 17:16절에 기록하고 있다. 이 때 사도바울의 마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제 아무리 똑똑하고 학문을 많이 연마했다고 해도 결국 마귀의 종노릇 밖에 할 줄 모르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안타까운 마음과, 또 열정적으로 예수그리스도와 부활과 영생을 전했을까? 세상 적으로 아무리 잘 사는 것 같아보여도-권력의 핵심에 살기도하고, 고래 등 같은 집, 돈 냄새 풀풀 풍기고 살아도 그 영혼에 하나님의 생명이 심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이 그 영혼을 감싸고 있지 않으면 허망할 뿐만 아니라, 결국은 썩어 없어져 소멸해 버릴 존재일 뿐이다. 그래서 성경은 선포한다. 시33:12<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사람들이 누군가? 그 심령에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수의 강이 흐르는 사람들이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행 17:24).
답: 하늘의 존재들도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했다고 찬양한다.
<부가설명>
오늘날까지 여전히 그 영향력을 미치는 고차원의 철학을 자랑했던 아덴, 사람의 중지(衆智)를 극단적으로 존중함으로써 민주주의의 꽃을 피웠던 아덴이었지만, 그 아덴의 지식이 '스스로 살아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전혀 지각하거나 인식할 줄 몰랐다. 아니 소위 그 '똑똑한 머리'들은 오히려 온갖 종류의 우상 신들만 '온 성에 가득히' 만들어 놓았을 뿐이었던 것이었다. 아무리 인간의 지식이 발달하고 그 결과 과학과 기술이 우주를 정복하고 인간을 복제한다는 수준에 이른다 하더라도 이 치명적인 핸디캡은 결코 극복될 길이 없다. 그러므로 세상의 그 어떤 현자나 지식인이나 박사라 할지라도, 아무리 '사람들의 중지'를 모은다 해도 참 신을 스스로 찾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본질적으로 '완전타락'하여 하나님을 떠났으며 그 결과 자신의 지식이나 능력으로서는 그 관계를 절대로 회복할 수가 없는 '전적 무능력'의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오직 참된 복음만이 바로 이 맹점을 정확하게 일깨워 준다. 그러나 바울은 헬라인들을 가리켜 "범사에 종교성이 많은"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 헬라인들이 얼마나 '종교적'인 사람들이었는가 하면 그들에게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까지 있을 정도였다. 모든 신을 다 인정하는 범신론자였던 헬라인들은 혹 그들이 섬기는 신들 중에 실수로 빼 놓은 신이 있을까 염려하여 특별히 그런 제단까지 세웠다. 즉 자기네들이 잘 모르는 다른 어떤 민족이나 지역의 신에게서 받을 복을 놓치거나 혹은 그 노여움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소위 '무명의 신'까지 섬겼던 것이었다. 사도 바울은 그처럼 '종교심이 많기는' 하지만 사실상 그 헬라인들이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 즉 '참된 신'이 과연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쳐 주려 했다. 그래서 그는 진짜 신이라면 당연히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 즉 창조주이셔야 마땅하며 또한 "천지의 주재" 즉 우주와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절대적인 주권자가 되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논증했다. 헬라의 갖가지 신들은 사람들이 신전을 지어주고 제물을 바쳐야 존재할 수 있는, 즉 순전히 '사람에게 의존하는 무력한 신'이었지만, 참 하나님은 그 반대로 "만인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무한한 공급자이실 따름인 것이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은 애당초 "인류의 모든 족속"을 "만드사" 이 지구상에 "거하게" 하시고 그들의 생존 연대를 "정하시며" 그들의 거주 공간을 "한하신"(제한하신) 분이라고 했다. 영어 성경에 이 부분을 'He made...'라고 사역동사를 사용해 번역해 둔 것처럼,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권으로써 모든 역사의 진행과 각 인생의 흥망성쇠를 '그렇게 되도록 만드신' 것임을 강조한다. 사도 바울의 복음은 그처럼 '종교성이 많은' 헬라인들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던 '전 우주의 창조주 하나님', '전 인류의 절대주권자 하나님'을 그들에게 선포해 주었던 것이었다.
교훈: 신약 성경의 저자들도 창세기의 창조 기사를 문자적인 사실로 받아들인다.
여섯째날(금) 1월 25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책이며 우리 인간과 이 세계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책이다. 창조 주간의 사건들은 독특하며 초자연적이다. 그것들은 적어도 두 가지 이유에서 과학적인 탐구 영역 밖의 일이다. 첫째, 그것들은 특이성이 있다. 특이성은 오직 한 번 일어난 사건을 말한다. 과학은 특이성을 다룰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다른 상황 아래서 반복되거나 실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창조 사건은 초자연적으로 발생했다. 창조 사건은 하나님이 창조 세계를 유지하는 방식의 자연적 결과라기보다는 하나님의 특별하고 직접적인 행위였다. 과학은 오직 2차적인 원인을 다룰 뿐이며 하나님의 직접적인 행위에 의존하는 어떤 설명도 수용하지 않는다. 창조 사건들은 독특하며 초자연적이기 때문에 과학이 미칠 수 있는 영역 밖에 있다.
세상의 기원에 대한 한 사람의 견해는 인간 본성과 자기 정체성에 대한 그의 견해를 구축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기원에 대한 이해의 중요성 때문에 하나님은 그것을 성경의 첫째 주제에 두셨으며, 성경의 기별은 이러한 창조 기사의 역사성에 기초하고 있다. 과학을 통해 이 세계의 참역사를 알 수 있다는 주장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행위에 호소하지 않고 그것이 설명될 수 있다는 주장으로서 더 심한 오류로 이끄는 오류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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