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과 창조와 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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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과 창조와 타락
2월 9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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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연구 범위: 창 3:1~15, 마 4:3~10, 골 2:20~23, 요 3:17, 계 14:6~7.
도입)
사탄은 여러 가지 별명을 가지고 있으며 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행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사탄은 ‘대적자’혹은 ‘유혹자’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구약에서는 24회 등장하고 신약에서는 사타나스(Satanas)가 34회, 디아볼로스가 36회 등장한다. 사타나스는 사탄과 같은 뜻이고 디아볼로스는 ‘고소자’ ‘참소자’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바알세바, 마귀, 벨리알 등과 함께 이런 말은 사탄을 가리키는 별명들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 보면 악귀의 머리, 이 세상 임금, 궁중의 권세 잡은자, 뱀, 옛뱀, 큰 용, 원수, 살인자, 거짓말쟁이, 미혹의 영 등 많은 이름들이 사탄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사탄을 존재하게 하셨을까? 성경을 보면 인간이 이 땅위에 나타났을 때 이미 천사나 사탄과 같은 영물은 존재하고 있었다고 암시하고 있다. 사탄이 하늘의 존재로 나타나는 대표적인 경우는 욥기서에서 볼 수 있고 또 역대하 21:1과 스가랴3:1-2등 두 곳뿐인 셈이다. 다른 성경구절에서는 사탄이라는 용어가 대적자로서의 사람을 표현하는데 사용되고 있고(왕강11:14,23,25), 훗날 신학자들이 연결 지어 생각하는 것이 보편화 되었습니다만, 실제로 창세기 타락기사에서는 뱀이 사탄이라는 용어로 직접 표현되지는 않았다. 몇몇 구절들은 바다의 괴물들의 형태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이 아닌 다른 세력을 표현하기도 하였다(시27:1,51:9-10,욥7:12,26:12). 성경은 왜 하나님이 사탄이 존재하게 해 모든 일을 선하게만 인도하지 않으시는지에 대하여 자세히는 설명하지 않았지만 인간의 자기 선택을 허용하신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영적인 싸움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엡6:11-12). 아마도 사탄의 등장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하려 할 때 하나님께 서슴없이 불순종하는 타락한 인간의 경우와 같이 타락한 천사가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드는 사탄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사탄의 존재를 허락하신 것은 또 하나의 하나님의 섭리의 방편일 것이다.
결론: 사탄의 공격은 유혹하는 과정에 어떤 역학 관계가 있는지 밝히고 있습니다. 사탄은 하와로 하여금 금지된 나무에 대한 그녀의 자각과 그 열매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 사이에 일종의 부조화를 경험하게 했습니다. 그러한 갈등을 처리하는 하와의 방식은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유혹에 대처할 수 있는지 또는 어떻게 잘못 대처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첫째날(일) 2월 3일
뱀은 훨씬 간교하였다
도입)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창 3:1) ‘간교’하다라는 히브리어적인 표현은 아루브(arub)라는 말이며, 이와 같은 표현으로 사울이 다윗을 쫓을 때 교묘하게 잘 숨는다는 표현에서도 같은 단어로 사용되고 있다. “어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그는 심히 지혜롭게(arub) 행동한다 하나니 너희는 가서 더 자세히 살펴서 그가 어디에 숨었으며 누가 거기서 그를 보았는지 알아보고”(삼상 23:22, 개역개정). 그러므로 이 단어는 그 하는 행동이나 말 또는 생각하는 모든 면에 있어서 지혜로운 것을 말하는 단어인데, 이것이 하와를 설득하는 뱀에게 적용되었다. 결국 뱀이라는 이미지는 다른 사람을 말로써 꼬이고 현혹하는 이미지로 정착되게 된다. 이 뱀은 다시 요한계시록에서도 나타나는데 역시‘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표현된다.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쫓기니라”(계 12:9).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개념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들짐승들 가운데 뱀이 가장 말 잘하는 지혜로운 짐승이었다는 것이다.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
<부가설명>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마 3:7).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 유대인들의 사회에서‘랍비’라는 직업이 왜 필요했을까? 토라의 원리에 근거하여 삶을 살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해주고 그 삶을 가르치는 직업이 바로 랍비였다. 오늘날 유대인들도 여러 가지 인생의 문제들에 부딪혔을 때 상담은 교구 랍비와 한다. 한마디로 랍비는 사람들의 인생을 이끌어서 하나님의 율법에 맞게 살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마치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해야 했던 역할과 비슷하다. 하지만 침례 요한을 비롯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비난하시는데, 그 단어가 바로‘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침례 요한이 바리새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언급하신 것은 단순히 분노에 못 이겨서 욕을 하신 것일까?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표현 안에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근본적인 성격이 들어 있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가르치고 또 토라를 설명해 주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말 잘하는 사람들이었다. 모두 지혜롭게 가르친다. 그러나 예수님이나 침례 요한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은 진정한 율법을 따라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그 사람을 멸망과 파멸에 이르러 죽게 만드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말을 잘해서 지혜로워 보이기는 하지만 그 안에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그런 뱀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하는 말은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간교한 말로 꼬여 결국은 죽게 만든 뱀이 했던 것과 같은 간교한 말이며, 그 간교함을 통해 결국 아담과 하와가 사망에 이른 것처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말 잘하는 것이 에덴동산의 뱀과 동일하다는 표현이다.
사단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기에 깨어있지 않으면 누구도 넘어가지 않는단 보장이 없다. 사단은 무엇인가를 사용한다. 사단이 뱀을 사용하였고, 뱀을 통해 여자에게 접근한 것이다. 뱀 자체가 사단이 아니다. 그러나 사단에게 붙잡혀 사단의 도구가 되었듯이 우리도 뱀처럼 될 수 있다. 내가 사단은 아니지만 사단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사단은 더욱 진보된 메시지로 하와에게 접근하였다.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마력적인 언어로 하와를 유혹하였다. 신선하고 달콤한 제안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높아지고자 하는 명예욕을 한껏 이용하고 있다. 달콤한 말일수록 우리는 다시 한 번 씹어볼 필요가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럴듯한 달콤한 말에 속아 넘어가는가? 속이는 말, 사람의 눈을 흐리게 만들고 마음을 혼란시키고 판단을 잘못되게 만드는 말, 그럴듯하지만 거짓인 말, 추악한 죄악으로 인도하는 말, 교만하게 만드는 말이 있다. 영적 판단력이 필요하다.
교훈: 사탄은 교묘한 방법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의심하도록 우리를 유혹한다.
둘째날(월) 2월 4일
여자와 뱀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창 3:3).
도입)
죄의 창시자요 씨앗인 뱀이 여자에게 말을 건넸다. 어떤 부족함도 없이 가없는 행복과 놀라운 자유를 만끽하며 에덴동산을 돌보고 있는 여자에게 뱀이 다가와서는 대뜸 하나님 이야기를 꺼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라고 은근슬쩍 물었다. 뱀은 자기가 마치 하와의 편인 것처럼, 하와를 대단히 위하는 것처럼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자기 말을 하지도 않았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하신 말씀을 들고 나왔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말한 게 아니다. 살짝 비틀어서 말했다. 하나님은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임의로 먹을 수 있으나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뱀은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느냐며 살짝 비틀어서 말했다. 하나님이 주신 무한한 자유는 슬쩍 빼버리고 하나님이 금지하신 하나의 금령을 전체인 것처럼 탈바꿈시켰다. 그것도 물음의 형식으로 던졌다. 서술 형식으로 말하면 그것으로 말이 종결되기 때문에 물음의 형식으로 던짐으로써 여자로 하여금 스스로 그 말을 곱씹어 생각하도록 유도하는 고도의 전략을 구사했다. 물론 묻는 것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다. 인간은 전지전능하지 않기 때문에 알기 위해서는 물어야 한다. 만물 중에서도 물을 줄 아는 것은 인간밖에 없다. 물음은 가장 인간다운 행위이고, 가장 창조적인 행위이다. 가장 완전한 배움의 행위이다. 제대로 듣기 위해서는 물어야 하고,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물어야 한다. 그런데 뱀이 던진 물음은 아주 사악한 물음이었다. 뱀이 여자에게 던진 물음은 진실을 탐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비틀기 위함이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추락시키기 위함이었다. 여자를 넘어뜨리기 위함이었다.
<부가설명>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은 본래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이러쿵저러쿵 이야기꺼리를 삼을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저 듣고 순종해야 할 분이지 분석하고 따져야 할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뱀은 지금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꺼리로 삼고 있다. 하나님이 그런 말씀을 했다는 소문이 들리던데 그것이 사실이냐고 물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논쟁의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있다. 여자와 뱀이 주체가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이야기꺼리로 삼고 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다고 말했다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느냐며 살짝 비틀어 말했다. 참으로 사악하고 간교한 접근이 아닐 수 없다. 뱀의 질문을 받은 하와는 뱀이 비튼 것을 교정해 준다. 하나님이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한 것은 아니고,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다고 교정해주었다. 하지만 하와도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하나님은 ‘먹지 말라고’만 말씀했는데 하와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덧붙여 말했고, 하나님은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했는데 하와는 ‘죽을까 하노라’고 물타기를 했다. 물론 하와가 고의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만일 고의적으로 했다면 이미 선악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아담과 하와는 아직 선악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고의적으로 했다고는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어쨌든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말하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이렇게 해서 뱀은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덧붙이기도 하고, 적당히 물타기도 하는 걸 보면서 뱀은 여자에게 빈틈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교훈: 뱀의 꼬임에 넘어간 여인은 하나님의 명령에 자신의 생각을 더하는 과오를 범했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를 죄로부터 지켜 주지는 못했다.
셋째날(화) 2월 5일
근거에 의해 속음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도입)
뱀은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때를 놓치지 않고 곧바로 승부수를 던졌다. 이제는 아예 드러내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반박해버렸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될 줄 하나님이 아시고 먹지 말라고 한 것’이라고 아주 대담하게 반박했다. 뱀의 말을 잘 살펴보라. 뱀은 지금 하나님이 중요한 것을 숨기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고 있다. 사실 하나님은 하나도 숨긴 것이 없었다. 오직 아담과 하와를 위해서, 그들이 맘껏 생명을 향유하도록 하기 위해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금하신 것뿐이다. 그런데 뱀은 하나님이 선악을 아는 지식을 혼자 독점하려고 그런 것처럼, 아담에게 말하지 않은 딴 생각이 있는 것처럼, 중요한 진실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꾸몄다. 더욱이 뱀은 선악의 실체를 뒤집었다. 하나님은 선악의 실체가 죽음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했는데 뱀은 선악의 실체를 완전히 뒤집었다. 선악을 아는 것이 마치 하나님만의 특권인 것처럼, 하나님만의 탁월한 능력인 것처럼, 선악을 알게 되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선악의 실체를 완전히 뒤집었다. 선악을 아는 것이 죽음이라는 진실은 감추고 매우 좋은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나님처럼 되는 지름길인 것처럼 속였다. 이처럼 뱀은 비슷하기는 한데 다르게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기는 하는데 약간 비틀어서 말했다. 매우 간교하고 교묘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흐리게 하고, 말씀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여자를 혼돈에 빠뜨렸다. 그리고는 여자가 혼돈에 빠진 틈을 비집고 들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뒤집었다.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아주 확고하고도 과감하게 늘어놓았다. 선악과를 먹어도 결코 죽지 않는다고, 죽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처럼 된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이것이 바로 뱀의 속성이고, 뱀이 사용하는 기본 전략이다. 뱀의 이런 전략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오늘도 교회 안팎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장난치는 자들이 많이 있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하기는 하는 것 같은데 실상은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자들, 하나님의 말씀하고 비슷한 것 같은데 실상은 다른 이야기들이 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이 약속하지 않은 것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남발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정반대되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변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부가설명>
비슷한 것은 가짜이다. 하나님 말씀 비슷한 것은 하나님 말씀이 아니다. 생명 비슷한 것은 생명이 아니다. 믿음 비슷한 것은 믿음이 아니다. 비슷한 것은 우리를 유혹하기 위해 뱀이 던져놓은 덫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슷한 것에 속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 아닌 것에 목매달지 말라. 사람의 말은 무력하고, 사람의 약속은 허망할 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와가 만일 하나님의 말씀에만 집중했다면, 그래서 뱀의 간교한 말에 넘어가지 않았다면 상황은 어떻게 됐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그들은 정녕 에덴에서 쫓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선악을 알지 못한 채로 계속해서 에덴에서 살았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 말씀에 집중한다면, 하나님 말씀에 정직하게 순종한다면 우리 삶이 어떨 것 같은가? 세상의 눈으로 보면 미미하고 실패한 것처럼 보이고, 부러울 것 하나 없는 인생처럼 보일지 모르나 하나님의 눈 - 말씀의 눈으로 보면 정녕 에덴의 삶을 살 것이다. 인생의 항해는 힘겨울지 모르나 그의 내면과 영혼은 샬롬으로 충만할 것이고, 전체적인 삶의 결은 지극히 평온할 것이다. 진정한 자유인으로서 인생길을 가볍게 걸어갈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말씀에 집중했던 예수님이 그랬듯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말씀에 집중하는 그리스도인의 삶도 정녕 그럴 것이다. 반대로 하나님 말씀에 집중하지 않는 자는 세상의 눈으로 보면 대단히 화려하고 성공한 것처럼 보이고, 남부러울 것 하나 없는 인생처럼 보일지 모르나 하나님의 눈 - 말씀의 눈으로 보면 결코 에덴의 삶이 아니다. 인생의 항해가 즐거울 수는 있지만 그의 내면과 영혼은 번민으로 가득하고, 전체적인 삶의 결은 지극히 불안정하고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 자유인이 아니라 우상의 종노릇을 할 수밖에 없다. 교양은 갖출지 모르나 생명을 가지고 살지는 못한다.
교훈: 최초의 인류가 하나님의 명령이 아닌 자신의 판단에 기초한 근거를 가지고 금지된 열매를 먹기로 결심하였다.
넷째 날(수) 2월 6일
에덴에 임한 은혜와 심판 제1부
“네가 어디 있느냐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창 3:9, 11, 13).
도입)
그리스도인의 시작은 '나는 다만 진토임'을 기억해달라는 낮아짐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나는 하나님 앞에 무가치한 자라는 말은 느낌이 아니고 실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인류 최초의 범죄는 자아 사랑으로부터 시작 되었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과는 멀어졌다. 여기서 죄의 대표적 욕구인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은 자아사랑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부가설명>
1996년 작고한 일본인 작가 엔도 슈사쿠는 여러 가지 면에서 가장 별종이었다. 총 인구에서 1%도 되지 않은 나라 일본에서 그는 일생 동안 크리스챤으로 살았다. 그리고 놀라운 일은 일본에서 가장 앞선 소설가인 그가 기독교 주제를 가지고 소설을 쓰기만하면 예외 없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일본 문화계의 영웅 같은 존재였고, 종종 노벨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어머니의 양육으로 13살 때 세례를 받으며 2차 세계대전 이전에 성장기를 보낸 엔도는 항상 소외감을 느꼈다. 학우들이 서양 종교를 믿는다고 못살게 굴었다. 전쟁이 끝난 후 프랑소와 모리악과 조지 버나노스 같은 카톨릭 소설가를 연구하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갔다. 그런데 거기서도 환영 받지 못했다. 이번에는 종교문제가 아닌 인종 차별 때문이었다. 고향에서 퇴짜를 맞고, 영적 고향에서도 퇴짜 맞자 엔도는 심각한 신앙의 위기를 겪게 되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으로 가서 예수님의 생애를 연구하며 몇 년을 보냈다. 그곳에서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을 발견했다. “예수님도 버림 받으신 분이었다”는 점이다. 예수님의 이웃들은 그분을 보고 비웃었다. 가족들은 혹시 귀신들린 것이 아닌지 의심하여 잡으러 다니기도 했다. 가장 가까운 친구들은 그를 배신했다. 그의 동족들은 그분의 생명과 바라바라는 테러리스트의 생명과 맞바꾸었다. 이런 취급 받았던 예수님은 나병 환자들, 세리들, 중풍 병자들, 악명 높은 죄인들처럼 사회에서 버림 받은 사람들을 가까이 하셨다. 이런 예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엔도의 눈을 뜨게 해주었다. 그가 일본에서 가졌던 시각에 의하면 기독교는 승리하는, 정복하는, 힘 있는 서양 종교였다. 그는 신성 로마제국과 빛나는 십자군 전쟁을 연구했고, 유럽의 웅장한 성당 건물들의 사진들을 보고 감탄했으며 크리스천들이 차별 받지 않는 나라에 사는 것을 꿈꿨다. 그런데 그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살 때 치욕을 회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사야서에 의하면 예수님은 고난 받는 종이 되셨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사 53: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래서 엔도의 소설에는 버림 받음과 고통을 주제로 한 것이 많다. <침묵>이 가장 유명한 작품인데 일본의 막부 쇼군의 무자비한 박해를 받고 신앙을 져버린 일본 크리스챤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엔도는 기독교 순교자들의 영웅적인 투쟁에 대해 감동적인 일화를 많이 읽어봤지만 기독교를 배신한 사람의 이야기는 읽어보지 못했다. 그런데 엔도에게 가장 감동적인 예수님의 메시지는 그분의 억제할 수 없는 사랑, 특히 배신한 사람들까지도 여전히 사랑하는 사랑이었다. 제자들은 그분을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반한 제자들을 변함없이 사랑하셨다. 그분의 백성들은 그분을 처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가벗긴 채 치욕적인 모습으로 매달려 운명하기 전에 혼신의 힘을 다하여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외쳤다. 일본에서 기독교가 널리 전파되지 못한 이유는 기독교에 대한 반쪽 이야기만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엔도는 결론을 내렸다. 일본인들은 아름답고 장엄한 기독교만 보았다. 유럽의 장엄한 수도원과 웨스트민스터 성당을 방문하여 아름다운 사진을 찍고 귀국한다. 일본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는 서양의 합창단과 오케스트라처럼 헨델의 <메시아>나 바하의 <미사곡B단조>를 연주한다. 반면에 일본인들은 또 다른 메시지를 놓치고 있다. 스스로 무력한 자가 되신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이다.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면서 눈물을 흘리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잘못을 용서하고 상처를 싸매주며 다른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어머니의 사랑과 같은 하나님 사랑의 이야기이다. 이것은 일본인들만의 경우가 아니다. 대체로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다. 십자가는 패자의 자리이고, 실패의 자리이며 수치의 자리라고 여긴다. 거기에는 흠모할 만한 것도, 매력적인 것도 없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한다고 말하면서도 구세주로 믿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그분이 진정 하나님 아들이었더라면 십자가의 비극적인 종말을 맞지 말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너무도 무기력하게 붙잡혀 갔다. 그리고 저항다운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이분을 어떻게 메시야로 믿겠느냐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이 내리신 구원의 조치를 사람들을 알지 못한다.
교훈: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자마자 하나님이 내리신 첫 번째 조치는 구원의 소망을 주시는 것이었다. 복음이 제시된 다음에 심판이 이어졌다.
다섯째날(목) 2월 7일
에덴에 임한 은혜와 심판 제2부
도입)
하나님과 법을 불순종해도, 죄를 지어도 영원히 산다, 죽지 않는다라고 말했을 때, 인간은 마귀의 손을 들어 주었고 하나님을 대항하였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사실을 심판으로 보여 주셨다. 그러나 그 사실이 증명되고 보여져야 하고 사단의 은밀함과 악함이 드러나야 했다. 그래서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생활의 결과를 보여 주었다.
구원과 심판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심판과 구원이 동떨어진 둘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각각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하나다. 그렇다. 심판과 구원은 둘이 아니다. 심판과 구원은 하나다. 구원에 대한 약속이 있기 때문에 심판이 있는 것이다. 죄악의 권세를 멸하는 것이 심판이고, 죄에 속한 것들을 멸하는 것이 심판이다. 그런 면에서 심판은 은혜이고 축복이다. 심판은 구원의 일부이다.
<부가설명>
[시89:14]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를 앞서 행하나이다” 보좌는 주의 다스리심을 상징한다. 의와 공의가 그 다스리심의 기초다. 만약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불공평하다면 세상의 질서는 매우 혼란할 것이다. 사람들은 어찌 행동해야 할지 모르는 가치관의 혼란을 겪을 것이 분명하다. 이제까지 인류는 다스리심의 기초인 하나님의 의와 공평으로 선과 악을 구분하고 나름대로의 질서체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뉴에이지와 포스트모던을 거치면서 거대 담론이 부정되고 선과 악도 하나의 경향으로 취급되는 현실에 이르렀다. 인권 존중이라는 이름으로 악이 보호되며, 포용의 이름하에 진리와 악한 사상이 혼합된다. 결과적으로 악이 희석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사라지고 있다. 악은 오히려 선을 등에 업고 날개를 펼치고 있다. 실제로 악이 가장 힘을 발휘할 때는 선의 모양을 취했을 때다. 볼셰비키 혁명 때 악은 공평과 정의의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북한은 미제와 그 동조자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자주독립을 완전히 실현한다는 거국적인 명제로 인민을 기아로 몰아넣고 있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진정으로 나라를 위하는 일이 무엇인지 감각을 잃고 어떻게 해서든지 정권을 잡는데 전력한다. 네티즌들은 절대로 공평하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일종의 정신 장애자들이 되었다. 그럼에도 세상은 특히 편향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을 옹호한다. 초록은 동색이기 때문이다. 만약 주의 인자함이 앞서 행하지 않으면 신자를 포함해서 세상에 살아남아 있을 사람은 없다. 더구나 지금 세상은 신자들조차 정체성의 혼돈 속에 자아사랑으로 빠져들고 있다. 자아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반비례 관계에 있다. 그래서 자아를 사랑하는 만큼 하나님 사랑은 멀어질 수밖에 없다. 목회자들은 이를 돌이켜서 자아 사랑에서 하나님 사랑으로 회복시켜야함에도 오히려 자아 존중을 더욱 부축이고 있다.
교훈: 성경의 처음과 마지막 책이 모두 창조를 이야기하고 심판을 말하지만 심판이 은혜를 앞서지는 못한다.
여섯째날(금) 2월 8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하나님은 우리의 시조에게 식물을 주셔서 인류가 이를 먹도록 계획하셨다. 어떤 피조물이든지 그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반대되는 것이었다. 에덴동산에는 죽음이 없을 것이었다”(교회에 보내는 권면, 228).
“사탄은 하나님의 사랑의 율법을 이기적인 율법으로 나타낸다. 그는 우리 인간이 그 율법의 계명들을 순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한다. 그는 우리 시조(始祖)의 타락과 거기에 따른 모든 재난의 책임을 조물주에게 지우고 사람들로 하나님을 죄와 고통과 사망의 창시자로 여기도록 만든다. 예수께서는 이런 기만을 폭로시키실 것이었다”(시대의 소망, 24).
“그러나 사람은 스스로 택한 죄의 참혹한 결과 가운데 그대로 버림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은 구속(救贖)을 암시하고 있었다. 인류의 첫 조상이 듣는 가운데 공표된 이 선언은 그들에게 구속에 대한 약속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몫이 될 수밖에 없는 가시와 엉겅퀴, 수고와 슬픔 그리고 죽어서 돌아갈 수밖에 없는 흙에 대해 듣기 전에 먼저 희망을 가지게 하는 말을 들은 것이다. 사탄에게 굴복함으로 잃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찾을 수 있게 되었다”(교육,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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