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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과 창조와 도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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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57분

 

기억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6~17).

 

연구 범위: 창 2:16~17, 창 1:26~28, 약 3:9, 행 17:26, 잠 14:31, 마 5:44~48, 계 20:11~13.

 

도입)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악과를 먹지말라고 명령하셨다. 동물에게는 이 같은 고등명령을 내리지 않으셨다. 이것은 사람의 뇌의 구조와 기능에 현격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 뇌를 보면 3중 구조로 되어 있다. 첫째는 원뇌인데 이는 본능을 관장하는 뇌로서 이 뇌는 모든 동물이 소유하고 있다. 뇌간, 연수, 시상하부, 그리고 시상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이 원뇌는 철저하게 생명본능에 따라 활동한다. 둘째 부분은 동물뇌(대뇌 변연계)가 있다. 이는 원뇌를 감싸는 듯한 형태의 뇌로서 이것은 개나 고양이 정도 이상의 지능 동물이 가지고 있다. 이 물뇌는 원뇌에 ‘쾌감’, ‘불쾌감’의 감정이 더해진 뇌이다. 그러나 인간과 짐승의 결정적 차이는 이것이다. 셋째가 ‘대뇌 신피질’이다. 이는 제일 바깥쪽에 있는 것으로 인간이 자신을 만물의 영장이라 자랑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이 대뇌 신피질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이는 ‘지와 이성의 뇌’라고 불린다. 대뇌 피질은, 표면에 굵직하게 나있는 몇몇 흠을 기준으로 앞쪽의 전두엽, 위쪽의 두정엽, 뒤쪽의 후두엽, 양옆의 측두엽으로 그 영역을 구분할 수 있다. 전두엽 : 대뇌의 앞쪽 부분으로 사람들이 잊어버린 것을 생각할 때 손바닥으로 짚는 앞이마의 속부분에 해당한다. 전두엽은 인식기능과 언어중추의 역할도 담당한다. 두정엽 : 전두엽 바로 뒤에 높여 있으며, 피부의 감각수용기로부터 감각(팔, 다리, 얼굴 등)과 자세나 위치를 감지하는 부분을 포함하고 있다. 두정엽이 손상되면 마비 상태와 몸이 크게 뒤틀리는 것 같은 감각을 초래하며, 주위 물체와의 공간적인 관계를 인지하지 못하게 된다. 측두엽 : 대뇌의 양측면에 붙어 있는 측두엽은 청각과 후각에 관계되는 감각 부위로부터 정보를 받아 처리하는 역할을 한다. 후두엽 : 대뇌의 뒤쪽에 붙어 있으며, 시신경에서 시각정보를 받아 시각을 분석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인간은 선과 악을 구별하고 판단할 수 있는 고도의 높은 분별과 지각을 가지고 있었다. 저들의 노력 여하에 따라 매우 수준 높은 도덕적 능력을 가질 수 있었다. 인간이 하나님과 같은 능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저들의 지적수준은 매우 높았으며 저들의 사고의 질은 지금의 인간과는 비교할 것이 못되었다. 저들에게 주어진 능력만큼 저들의 책임 또한 컸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낸 이유가 되기도 한다.

 

첫째날(일) 1월 27일

창조주에 대한 우리의 의존성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도입)

인간의 도덕적 판단의 능력은 인간의 지각의 수준이 결정한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인간에게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셨다.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잠20:27) 성경은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고 하였다. 하늘의 창공에 별이 있다면 인간의 마음속에는 양심이 있다. 이 양심이 있으므로 우리가 인간이 되는 것이다. 짐승은 그저 본능대로만 살면 그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다. 화인 맞은 양심을 대속의 피 권세로 살려서 말씀을 따라 살며 예수님을 알고 섬기게 한다. 이 양심의 불이 꺼지면 인간의 심령이 캄캄하여 본능대로 산다. “사람의 일은 사람의 속에 있는 영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2:11)”라고 한다.

 

<부가설명>

인간에게는 자유의지를 넘어 인간에게는 양심을 두셨다.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고후 1:12) 라고 하신다. 우리는 무엇인가 결정할 때 우리의 결정의 기준을 생각한다. 내 양심에 비추어……. 혹은 남들이 볼 때 이것쯤은…….* 혹은 위법은 아니잖아……. 그러나 우리는 세상과 다른 기준으로 결정해야 한다.“이것이 성경에 맞는 것인가?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가?”라는 것이 우리의 기준이다. 성경에서는 “사람의 靈魂(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잠20:27)” 라고 말한다. 여기서 영혼은 사람의 양심과도 같다. 그래서 침례요한 켜서 비추는 등불(요 5:35)이라고 하였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의 빛에 비추어 그 자신의 인생을 비추는 등불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교감과 교제가 없게 되면 그 양심의 빛이 어두워지게 되어 있다.

 

교훈: 하나님은 우리를 손수 만드시고 사랑하시며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의지해야 하며 당연히 그분의 명령을 따를 의무가 있다.

 

부가 예화)

* 어느 수도원에 훌륭한 원장이 있었습니다. * 그는 많은 제자 중에 특히 한 아이를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볼품없고 , 지능도 뛰어나지 않은 아이여서 다른 제자들은 그런 아이를 좋아하는 원장에 대한 불만이 대단했었습니다. 이에 어느 날 수도원 원장은 제자들에게 작은 새 한 마리씩을 주고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해질 때까지 그 새를 죽여 오라고 했습니다. 드디어 해 질 녘이 되자 제자들이 하나 둘씩 모였고 마당에는 새의 주검이 쌓였습니다. 그런데 한참 뒤에 돌아온 아이의 손에는 작은 새가 산 채로 있었습니다. 머뭇거리던 아이는 “원장님,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새를 죽이라고 하셨는데……. 아무리 조용하고 으슥한 곳을 찾아보아도 하나님은 보고 계셨어요. 그래서 새를 죽일 수 없었어요.”라고 하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갈등을 겪습니다. 왜 갈등을 겪어야 할까요? 누가 보지도 않는데요...이것은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등불이기 때문입니다.“사람의 일은 사람의 속에 있는 영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2:11)”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다는 생각, 우리의 마음에 양심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둘째날(월) 1월 28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

 

도입)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고 한다. 인간은 도덕적 능력뿐만이 아니라 그 생각의 깊이가 그 발전의 가능성이 하나님과 닮았다. 인간은 마음에 품은 생각을 눈에 보이는 현실이 되게 하는 재주를 가졌다. 작금 이 세상은 인간의 상상력을 현실이 되게 하는 놀라운 재주와 속성으로 하늘을 날아다니고 우주를 여행하고 먼 거리에 있는 사람과 통화가 가능하며 그것도 선 없이 방해받지 않은 상태에서 교감이 가능한 것이다. 인간의 능력은 그 가능성에 있어 그 끝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잠재적 능력을 가진 자들이다. 그렇게 높이 자라가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며 목표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이 불순한 마음을 가지게 될 때, 하나님께 원하시는 모습으로 선한 모양으로 쓰여지지 않게 될 때 이 땅에 엄습하게 될 불행과 슬픔은 그 끝을 가늠하기 어렵다. 인간은 매우 그 능력이 크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제하지 않게 될 때 오게 될 인간은 불행은 그 불행이 너무도 크다.

 

부가설명>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수많은 토론과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영이신데 형상을 가졌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이야기를 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이미 사람의 모습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제 존재하셨는가의 문제이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골2:9-10) 라고 하셨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1:15-17)고 하셨다. 그 자신이 어떤 형상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단 7:14절에 “인자 같으신 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은 이미 우리와 같은 모습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심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같은 영성과 도덕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교훈: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성경의 가르침 속에는 도덕성의 개념이 강력하게 내포되어 있다.

 

셋째날(화) 1월 29일

한 혈통으로 창조됨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행 17:26).

 

도입)

저희의 연대(年代)를 정하시며 거주(居住)의 경계(境界)를 한(限)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起動)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金)이나 은(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技術)과 고안(考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 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서든지 사람을 다 명(命)하사 회개(悔改)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定)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天下)를 공의(公義)로 심판할 날을 작정(作定)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證據)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행17:16~31)

이들은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그 세계와 나라대로라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땅의 열국(列國) 백성이 나뉘었더라 (... and from these the nations were divided on the earth after the flood.) (창10:32)

 

답: 사람을 멸시하고 학대하는 것은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다. 사람을 존중하는 것은 창조주를 존중할 때 가능하게 된다는 것을 나타낸다.

 

<부가설명>

하나님은 어느 한 부족이나 민족에게 속한 신이 아니다. 이스라엘만의 하나님도, 기독교인들만의 하나님도 아니시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라면 세상의 어떤 것도 하나님과 무관한 것은 없다. 무신론자를 자처하는 사람이라 해도, 불가지론자라 해도, 신성모독자라 해도 하나님은 그들을 쉽게 버리지 않으신다. 그들은 깨닫지 못한 사람이지 없애버려야 할 대상이 아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셨다고 말한다. 사는 곳도 다르고 시대도 다르지만 모두가 한 호흡으로부터 태어난 존재이다. 아프리카나 다른 빈곤 지역에서 태어나 극한 상황 속에 사는 이들이나 부유한 지역에 사는 이나 모두 하나님께는 소중한 존재이다. 하나님을 그런 분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그들의 고통에 대해 모른 척 할 수 없다. 세상에 만연한 고통에 눈을 감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도 멀어질 수밖에 없다.

 

교훈: 모든 민족이 한 조상의 후손이라는 성경의 진리는 인간이 모두 평등하며 존엄하다는 도덕을 가르친다.

 

넷째날(수) 1월 30일

우리 창조주의 품성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마 5:45).

 

도입)

구약의 두 가지 가르침 즉 보복법과 이웃사랑에 대해서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을 넘어서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율법이 제시하는 도덕적인 기준보다 더 높은 기준을 제시하고 계시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더 높은 기준을 제시하는 것일까?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첫째는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백성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자녀로 부르셨기 때문이다.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한 사람이 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에는 부족하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요구되는 도덕적 기준은 바리세인들의 도덕적 기준을 능가한다. 둘째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 모두에게 동일한 해와 비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 또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신다. 모세의 율법만을 지키려는 율법주의의 마음으로는 우리에게 아픔을 주었던 그들을 용서하거나 사랑할 수 없다. 그 마음이 거듭나 참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해야한다.

 

답: 하나님은 인종의 차별 없이 자비로우시다는 것을 가르치고 우리도 누구에게든지 선한 이웃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는 본을 친히 보이셨다. 하나님이신 분이 사람이 되시되 종의 형상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셔서 인간을 섬기셨다. 그것이 도덕의 모델이다.

 

<부가설명>

하나님의 도덕적 기준은 어떤 것보다 높다. 그 당시 가장 높은 도덕을 원하던 바리세인들보다도 한 차원 높은 도덕적 기준을 제시하셨다. 그러나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면 네 형제에게 문안한다면 세리와 같은 죄인들보다 이방인들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고 예수님은 물어보시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높은 도덕적 기준의 끝은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그것은 하나님의 온전함에 이르는 것이다. 온전함은 거룩함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하나님의 흠이 없는 완벽한 상태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러한 온전함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라고 계신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그러한 온전함에 이를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면 나의 오른 뺨을 때린 자에게 왼 뺨을 내어주고 원수도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의지로 사랑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도덕적인 기준을 높게 잡으셨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높은 기준이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만이 가능하다. 우리와 같은 죄인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제물로 희생하면서 보이신 그 크신 사랑을 우리가 깨닫고 이해하고 그 사랑이 내 안에 채워져야 만이 가능하다. 그 사랑이 우리 안에 차고 넘쳐서 우리가 결코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할 때 그 때 그 사랑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가 될 것이다. 그 사랑 안에서 우리 가정이 하나가 될 것이다. 그 사랑 안에서 우리 교회가 하나가 될 것이다.

 

교훈: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개념 속에는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이 아닌 평화와 배려의 원칙이 포함되어 있다.

 

다섯째날(목) 1월 31일

도덕성과 책임

 

도입)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 현저한 차이점 중 하나는 인간은 도덕성을 가지고 있고 동물은 도덕성이 없다는 것이다. 맹수가 사냥한 먹잇감을 불쌍해서 놓아 주는 경우를 본 적이 있는가? 동물은 그저 본능에 의해 살면서 배고프면 다른 동물을 잡아먹고 배가 부르면 잡아먹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자기가 위험한 줄 알면서도 물에 빠진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물속에 던지기도 하고, 자기 보호의 본능을 역행하면까지 남을 위해 희생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도덕적 삶은 오직 인간에게만 있다. 오직 인간이 절대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아 도덕성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도덕적 직관과 그 의무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설명이다. 특히 도덕은 하나님의 인격성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에 도덕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인격성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격 없는 동물에게는 도덕성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세계적인 유전학자 프랜시스 콜린스는 인간에게만 주어진 옳고 그름의 도덕법 때문에 무신론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신의 언어'에서 '신앙을 가진지 28년이 흘렀지만 도덕법은 내게 하나님을 암시하는 가장 확실한 팻말로 여전히 굳건히 서 있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다. 과학자 도킨스는 도덕성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지만 과학자 콜린스는 그 끝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았고 만났다.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행 17:30~31).

 

답: 바울은 창조하신 사실에서 시작해서 심판하시는 사실을 말함으로 설교를 끝마쳤다. 심판은 사람이 행한 대로 책임을 물으시는 것이다. 그것은 도덕성과 직결되는 것이다.

 

<부가설명>

소수집단에 지나지 않고 대부분이 하층민 출신이었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로마제국이 새로워질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정직성과 도덕성으로 인함이었다. 하나님을 믿기에 영원히 정직하고 순결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정직하고 도덕적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정직성과 도덕성을 통로로 삼아 친히 역사하신 것이었다. 그러나 로마제국 사람들이 정직성과 도덕성을 상실했을 때, 그들은 외부의 침입이 있기 이전에 내부적으로 먼저 붕괴하고 말았다. 자신들의 부정직성과 부도덕성에 대해서 스스로 값비싼 대가를 치른 것이었다. 한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힘은,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도덕성과 정직성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임과 동시에 인간의 역사인 세속사의 교훈이기도 하다. 언제부턴가 돈이 절대가치가 되어버린 우리 사회에서 도덕성과 정직성은 실종되고 말았다. 돈이라는 우상 앞에서 인간의 도덕적 해이와 부정직성, 온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부정부패와 성적타락, 그로 인한 인간의 윤리의식 실종은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서고 있다. 우리사회가 이대로 가다가는 언젠가 내부적으로 붕괴하고 말 것이다. 인간의 부도덕성과 부정직성은 반드시 값비싼 대가를 치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교훈: 인간의 성경적 기원뿐 아니라 마지막 날의 심판은 우리의 도덕적 책임을 상기시킨다.

 

여섯째날(금) 2월 1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성경에 따르면 아담은 하나님이 특별히 흙으로 창조한 첫 번째 인류이다. 도덕성의 기원은 아담의 기원에서 찾을 수 있다. 도덕성에 대한 성경의 개념은 인류 기원에 대한 성경의 개념과 불가분의 관계이다.

아담을 첫 번째 인류로 인식하는 것은 어떤 화석이 아담 또는 인류의 조상일 가능성을 반박한다. 그렇다면 이런 화석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몇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째, 인류 화석은 정상적인 지성을 가졌지만 오늘날 인류와 같지 않은 성장 특성을 가진 인류의 모습일 가능성이 있다. 둘째, 그 화석들이 당시 생활 방식 또는 환경적 중압감 내지 다른 요인으로 인하여 퇴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셋째,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사탄이 창조 세계를 직접적으로 타락시키려 했던 시도의 결과일 수 있다. 그밖에 그것들이 형태학상 유사할 뿐 인류가 아닐 가능성도 있다. 저마다 선호하는 설명이 다를 수 있지만, 문제를 해결할 확실한 증거가 없다면 어림짐작으로 독단적인 견해를 밝히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화석은 ‘5억만 년 전 중국산’ 식의 꼬리표를 달고 나타나지 않는다. 과학자마다 견해가 다양할 수밖에 없는 지구 역사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우리가 화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에 대하여 나름의 기준을 제시하지만, 그런 해석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결국 해석에 불과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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