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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과 안식일: 에덴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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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과 안식일: 에덴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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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6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40분

기억절: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마 12:8).

 

연구 범위: 창 2:1~3, 히 4:3~4, 신 5:12~15, 겔 20:12, 막 2:27~28, 벧후 3:3~7.

 

도입)

하나님의 원래 의도는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지키도록 한 것이다. 우리는 율법의 종이 아니라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율법은 좋은 것이지만 율법주의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쉬지 않고 일하면 죽을 것 같으니 쉬면서 일하라고 안식일을 주신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누리면서 살도록 창조되었다. 예수께서 맹인의 시력을 안식일에 얻게 하신 것은 풍성한 생명의 회복을 경험케 한 진정한 안식의 축복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 축복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무엇이 수단이고 무엇이 목적인지 구별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셨다. 안식의 목적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고, 그것을 위한 수단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다. 안식일 준수가 일을 거룩하게 만들며 일이 안식일을 귀하게 만든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다른 날보다는 안식일에 더 많은 이적을 일으키신다. 참된 안식의 정신은 사랑과 생명에 있음을 알려 주신 것이다.

 

결론: 안식일은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유한한 존재임을 기억하기 위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설정하기 위한 도구로써 주어졌으며, 우리가 하나님과 친교를 나눌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첫째날(일) 3월 10일

창조와 제칠일 안식일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창 2:1~2).

 

도입)

쉼이 없이 일하는 자들은 종들 밖에 없다. 종은 쉼이 없이 주인의 생산성을 도모하기 위해 사는 자들이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인생은 종과 같이 일한다. 실상 저들에게는 내일에 대한 기약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장래와 미래를 위해 저들이 존재하는 동안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물질들을 쌓고 돈을 쌓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저들은 쉼 없이 일한다. 비록 쉰다할지라도 마음에 숙제를 가지고 있어 쉼이 없는 쉼을 살아가고 있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참된 안식이 없는 것은 이 땅에 가득한 괴로움과 슬픔과, 질고와 고통이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의 핵심이다. 모든 창조의 대미를 장식한 것이 인간이다. 인간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의 제 칠일 중에 처음 경험하는 첫 날은 안식일이었다. 왜 인간이 가장 먼저 맞는 날이 안식일 되도록 하셨는가? 이 안식일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하나님은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딤전 1:17)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썩지 아니하시는 분이시기에 거룩하신 분이시다. 썩지 아니하니 할 것이기 때문에 거룩하며 구별된 것이다. 그래서 안식일은 썩지 아니할 자, 영생을 가진 자, 구별된 자들이 향유하는 축복의 날이었다. 하나님께서 복주시고 거룩하게 하셨다고 하셨는데 하나님께서 명하신 복이란 영생(시 133:3)이다. 예수께서 병자들을 회복시키고 죽어가는 자들을 살리신 것은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죽음과 병듬 이런 것은 모두가 거룩하지 못한 더러운 것들이다. 하늘에는 이런 아픔, 슬픔, 괴로움, 병들이 없는 곳이며 가장 완전하고 가장 완벽한 쉼이 마련된 장소이다. 안식일은 실제로 이런 완벽한 자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들만이 모여 누릴 수 있는 장소였던 것이다. 실상 썩어져 없어져 버릴 인생, 영생이 없는 자들에게는 진정한 쉼과 안식이 없다. 저들은 썩어져 없어져 버릴 것들이지만 저들의 하루하루의 생존을 위해 일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에게는 참된 쉼과 참된 평안이 없다. 그래서 안식일은 실제로 영생을 소유한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여유로운 시간이요 축복의 날이었던 것이다.

 

교훈: 신약과 구약은 모두 인간의 타락 전 육 일간의 창조 뒤에 제칠일 안식일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둘째날(월) 3월 11일

안식일 휴식의 풍성한 의미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 5:15).

 

도입)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던 자들에게 안식일은 지켜질 수가 없었다. 저들은 종이었기 때문에 쉼 없이 일해야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들을 구원하시어 내시어서 이제 저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신다. 자유함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들, 종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안식일이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는 축복이요 선물인 것이다.

 

부가적용)

애굽 땅에서 종되었던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후에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다. 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는가? 출31:14에 보면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지며 무릇 그 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부지런히 일하는 자가 왜 죽어야 했을까? 쉬지 않고 일하는 자는 노예 밖에는 없다. 일하는 것이 그 날을 더럽히는 것이 된다고 말씀하신다. 왜 안식일에 일하는 것이 이 날을 더럽히는 것인가? 안식일은 본래 하나님께서 복주시고 거룩한 날이라 하셨는데 거룩한 날이라는 말의 의미는 썩지 아니할 사람들, 죽지 않는 사람들(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만이 가지고 누릴 수 있는 구별된 날을 의미한다. 고전15:50에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 하셨다. 죄지은 인간은 낮은 몸(빌 3:21)이 되어 썩어질 몸이 되었다. 인간은 썩어질 몸이었기 때문에 더러운 것이고 거룩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셨을 때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3:4-5)”고 하셨다. 썩어져 없어질 사람들은 종이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일을 시켰다. 아무런 쉼도 없이 인간을 다만 저들의 생산성을 높이는 자신의 이익의 도구로만 인간을 활용하였다. 다만 부려야 할 종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누군가의 종으로 만드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향유하며 누리며 살도록 계획하신 사랑받는 존재다. 이 세상은 모든 사람은 일해야 산다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안식일은 종이나 나귀나 문안에 유하는 모든 객이라도 모두가 쉬어야 할 강제적 규정을 통해 일하지 말도록 하신 날이다. 이는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가 일에 매인 노예로 만드신 것이 아닌 하나님 만드신 이 세상의 모든 축복을 향유하여 누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교훈: 우리가 안식일을 준수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으며, 우리를 구속하셨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셋째날(화) 3월 12일

예수님과 안식일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막 2:27~28).

 

도입)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인간의 복지와 행복을 위하여 하신 것이다. 안식일도 사람을 위하여 제정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 성경의 복음이 무슨 복음인가를 알아야 한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고 하셨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우리의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에게 은혜를 쌓아두신 분이시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시31:19).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분, 당신의 쌓아 두신 은혜를 베풀어 모든 인생이 향유하는 날이다. 이 날을 거룩하게 구별하심으로 모든 축복의 근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우리는 안식일을 지킬 때마다 깨우침을 받아야 하였다.

 

<부가설명>

세종 문화회관의 파이프 오르간이 고장이 난다면 이 오르간을 만든 제작회사에서 애프터 서비스를 나와 고쳐 줄 것이다. 이와 같이 삶에 지치고 망가진 육체가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곳은 바로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우리의 주님이시다.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고 말씀했다. 우리에게 쉼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상처받고, 눈물 많은 이 땅에서 우리의 친구가 되어 주시고 위로해 주시며 안식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우리의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신 33:16절에 “신33:16에 “땅의 보물과 거기 충만한 것과 가시떨기나무 가운데 거하시던 자의 은혜로 인하여 복이 요셉의 머리에, 그 형제 중 구별한 자의 정수리에 임할지로다” 고 하셨다. 가시떨기나무 가운데 거하시던 자의 은혜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이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신 그분의 은혜 속에 우리가 사는 것이다. 딤후 3:15절에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하셨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모든 인간이 구원에 이른다.

 

교훈: 예수님은 안식일을 폐지하거나 다른 것으로 대체한 것이 아니라, 그것의 참의미와 바른 준수의 모본을 보여 주셨다.

 

넷째날(수) 3월 13일

안식일과 마지막 때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벧후 3:3~4).

 

도입)

영국의 소설가요 문명 비평가인 허버트 웰즈가 쓴 『장님의 나라』라는 아주 유명한 문명 비판서가 있다. 내용은 이렇다. 어떤 청년이 깊은 산 속을 탐험하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져 정신을 잃게 되었다. 얼마 후 깨어난 그는 그곳에서 큰 마을을 발견하고, 그 마을 한 가운데 있는 우물에서 우물물을 마시게 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마을은 꽤 커 보였는데, 한 낮에 움직이는 사람이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다친 몸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우물가에 있는데, 날이 저물자 동네 여자들이 우물물을 길러 나오는 것을 보았다. 살았다는 생각과 함께, 그는 그 마을 사람들이 모두 앞을 못 보는 장님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앞을 못 보는 장님들이었기 때문에 뜨거운 한낮에는 생활하지 않고 모두가 시원한 밤에 활동을 하였다. 그는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치료를 받을 수 있었고, 조금씩 회복할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도 처음에는 그 청년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래서 청년이 어떻게 자신들이 사는 마을에 오게 되었는지 물어 보았다. 청년은 자신이 앞을 볼 수 있다는 사실과 새로운 세상이 있다는 것을 마을 사람들에게 설명을 하였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앞을 볼 수 있다는 청년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아직까지 그 마을에서는 앞을 보았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다. 그리고 앞을 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청년은 이상한 사상을 가진 사람으로 여겨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생겼다. 그렇게 되자 청년은 앞을 볼 수 있음에도 볼 수 없다고 하였고, 그가 이야기 한 것은 모두 상상으로 만들어 낸 이야기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도 장님처럼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청년은 장님들이 사는 마을에서 살다가 로테라는 아름다운 처녀와 사랑에 빠졌다. 그는 처녀에게 프로포즈를 하였고, 마을 사람들 모두가 결혼에 찬성하였다. 단, 조건이 있었다. 청년이 앞을 본다는 이상한 사상에 빠진 사람이기 때문에 이 기회에 두 눈을 뽑으면 결혼을 시키자는 것이었다. 청년은 고민을 하였다. 두 눈을 잃고 영원한 장님이 되어 사랑하는 사람과 살아야 하는지, 아니면 마지막 기회를 틈타 도망을 가서 보이는 세계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지 말이다. 청년은 한참의 고민 끝에 남들이 다 자는 대낮을 틈타 자신이 처음 떨어졌던 그 절벽을 죽을힘을 다해 기어 올라갔다. 옷은 다 찢어지고 온 몸은 피투성이가 되고 너무도 지쳐 엎드러진 채 하늘의 뜬 별을 바라보면서 그 청년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면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이 이야기는 현대 문명이란 마치 장님의 나라와 같다는 것을 말한다. 그는 여기서 “자기가 눈이 멀었는지도 모르고 있는 이 세대의 가치관에 물들지 말라. 어떠한 희생이 있다 할지라도 눈은 뜨고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현대의 문명만을 비판하고 있지 않는다. 바로 이 세상은 영적으로 앞을 못 보는 영적소경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우리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영의 눈이 떠져서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정신병자취급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과 그의 나라가 있음을 안다. 우리는 주의 재림이 날과 마지막 날을 믿는다. 그것을 믿음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인 소경인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어리석다고 말하고 있다.

 

<부가설명>

서울, 부산 간 KTX열차가 개통되면서 이 열차를 타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시간이 2시간 20분으로 단축이 되었다. 서울에서 아침6시에 기차를 타면 부산에 8시20분에 도착해서, 아침을 간단하게 먹고, 9시에서 10시 사이에 업무를 처리하고, 10시에 부산에서 출발하는 열차를 타면 서울에 12시 20분에 도착해서 점심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전국이 반나절 생활권이 된 것이다.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시간은 이것보다 훨씬 짧다. 20~30분 정도 비행을 하면 된다. 그러나 비행기는 공항까지 이동시간과 탑승절차에 걸리는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어느 것이 더 효율적인지는 계산해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KTX 열차를 타거나 비행기를 타는 방법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빠른 교통편이 발달했어도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가는 것만큼 빠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시간만 말한 것이 아니다. 비록 사랑하는 사람과 여행을 하면 물리적인 시간은 많이 걸릴지 모르지만 심리적인 시간은 매우 짧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비록 물리적인 시간이 천년일지라도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긴 시간이 마치 하루 같다고 생각하시는 것이다. 여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오래 참음으로 인내하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아브라함이 자기 집 앞에 있는데 나그네가 지나가고 있었다. 나그네는 몹시 지쳐 있었다. 땀도 많이 흘리고 배고픔도 느끼는 듯 하였다. 아브라함은 그 나그네를 자기 집안으로 불러 들였다. 그리고 잠시 쉬고 가라고 권하였다.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부탁하여 시원한 우유와 빵을 그 나그네에게 대접하였다. 빵과 우유를 먹고 있는 나그네에게 물었다. “당신은 음식을 먹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나그네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나는 페르시아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불을 숭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 말을 들은 아브라함은 그 나그네를 전도하였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믿을 것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페르시아 사람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큰 논쟁이 벌어지고 말았다. 아브라함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래서 나그네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당신 같은 사람은 내 장막에 있을 자격이 없으니 당장 나가시오.” 나그네도 화를 내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아브라함이 떠나는 나그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났다. “아브라함아! 하나님은 저 사람을 위하여 50년을 참으셨는데 너는 한 시간도 못 참는구나!”라고 말씀하였다. 이 말을 들은 아브라함은 너무나 부끄러웠다. 그 후부터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기다리며 참았다고 한다. 마지막 때를 기다리는 성도는 하나님이 기다리셨던 것처럼 기다려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화를 낸다고 같이 화를 내거나 다른 사람들이 참지 못한다고 같이 참지 못하는 것은 옳은 자세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날을 보았고, 그날이 임하게 될 것을 믿기 때문이다.

 

교훈: 마지막 시대의 기별은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촉구하면서 창조와 안식일 진리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다섯째날(목) 3월 14일

안식일 시편

 

도입)

시편 92편은 150편의 시편들 가운데 유일하게 ‘안식일에 부르는 찬송시’라는 표제로 소개되고 있다. 유대 전통에는 이 시를 아담이 첫 안식일에 지었다는 재미있는 전통이 있다. 우리가 안식일 하면 원래 하나님의 창조를 기념하는 날로 제정되었다. 즉 안식일은 ‘창조’와 ‘구원’의 두 주제를 담고 있는 날이다. 그런데 비록 본 시편의 표제에는 ‘안식일에 부르는 찬송시’가 나오지만 본문 안에는 ‘안식일’에 대한 언급이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가 어떻게 안식일의 찬송시로 유대인의 예배에서 수용되었는지 궁금하다. 오늘 본문을 보면, 1절에서 6절까지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행사에 대한 찬양이 나온다. 7절에서 9절까지는 악인의 궁극적 멸망에 관한 말씀이 나온다. 그리고 10절에서 15절까지는 의인의 영원한 흥왕에 관한 말씀이 나온다. 오늘 본문말씀에 보면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온다. 악인과 의인이다. 악인에 비유된 풀(7절)이라는 말은 ‘에세브’ 인데 창조시의 푸른 식물 모든 수목들을 포함하는 말이다. 악인도 비온 뒤의 들의 풀이 피어 오르는 것처럼 흥왕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흥왕할지라도 영원히 멸망한다고 말씀한다. 악인이 땅위에서 번영하여 행복을 누릴 수 있으나 그 행복이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오늘 시편 92편은 의인의 승리를 노래하고 있다. 앞에서 말씀 드린 데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노래를 안식일에 불렀는데 핵심 주제는 ‘악인의 궁극적인 멸망과 의인의 궁극적인 승리’이다. 악인은 필연적으로 멸망하지만 의인은 결국 승리하게 된다는 것이다.

 

부가해석)

그러면 의인과 악인은 각각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가? 신자와 불신자를 가리킨다. 여기서 의인과 악인은 도덕적적인 의인, 도덕적인 악인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신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도덕적으로 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하다. 따라서 도덕적으로 완전한 의인은 하나도 없다.(롬3:10 참조) 자신의 부족함과 허물을 고백하고 인생을 하나님께 의지하는 사람, 즉 신자가 의인(以信稱義 교리)인 것이다. 즉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 의인이고,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이 악인인 것이다. 의인의 일생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 그러나 악인의 일생은 하나님이 심판하신다. 그러므로 이 세상 살면서 때때로 악인이 잘 되고, 오히려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것 같아도 나중에 가서 보면 결국은 의인이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시편에 여러 곳에서 이러한 사실을 잘 말씀하고 있다.(1편, 37편) 시편 기자도 이런 사실을 대조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대조적인 비유법을 통해 설명한다. 7절 보면, “악인들은 풀 같이 자라고 ... ” 그랬다. 말하자면 악인은 ‘무성한 잡초’와 같다는 것이다. 안식일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사람들의 고백이 담긴 날이다. 그러나 안식일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이 은혜를 모르고 그 스스로의 힘으로 살려는 잡초와 같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뽑혀 버리는 것이다.

 

교훈: 우리가 안식일에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위대한 일들과 약속 때문이다.

 

여섯째날(금) 3월 15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여기에 아무런 모호함도 없다. 사람이 하등 동물이나 식물에서 서서히 발전하여 진화되었다고 상상할 여지가 조금도 없다. 이러한 학설은 창조주의 위대한 사업을 사람의 좁고 세속적인 개념의 수준으로 저하시킨다. 사람들은 우주의 주권자의 위치에서 하나님을 축출하는 데 몰두한 나머지 사람을 평가 절하하고 인간의 기원의 존엄성을 그에게서 속여 빼앗는다. 성군(星群)의 세계들을 하늘 높이 두시고, 들의 꽃들을 정교한 솜씨로 물들이시고, 땅과 하늘을 당신의 능력의 경이들로 채우신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스러운 사업의 마지막을 장식하시려고 하실 때, 즉 아름다운 지구의 통치자로 한 존재를 그 가운데 두시려고 하실 때, 사람에게 생명을 주신 당신의 솜씨에 걸맞게 창조하시는 데 실패하지 않으셨다. 영감의 말씀이 밝혀 주는바 우리 인류의 혈통은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진화하는 세균이나 연체동물(軟體動物)이나 사족수(四足獸)의 계열이 아닌, 위대하신 창조주께 이른다”(부조와 선지자,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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