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과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미가)[교사들을위한강해식과정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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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과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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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8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37분
기억절: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연구범위: 미 1:1~9, 고후 11:23~27, 미 2:1~11, 미 5:2, 미 6:1~8, 미 7:18~20.
도입예화)
월간지 「좋은 생각」에 실린 이야기이다. 프랑스영웅 나폴레옹이 폴란드에 진격했다. 농촌 마을의 영주가 나폴레옹을 자기 집에 초대하고 저녁만찬을 베풀었다. 나폴레옹이 도착하자 영주는 문밖에까지 나가 영접했다. 집안으로 들어온 나폴레옹은 식사가 마련된 방으로 안내되었다. 주인은 가장 상석으로 보이는 자리도 그 다음 자리도 그냥 지나치고 세 번째 자리에 나폴레옹을 앉게 했다. 나폴레옹은 기분이 나빠 얼굴을 찡그렸고 이 모습을 본 수행신하가 영주를 꾸짖었다. “대 프랑스 제국의 황제 폐하를 이렇게 대접하다니 영주는 두려움이 없는 모양이군.” 그러자 영주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이 자리는 제 부모님이 앉으시는 자리입니다. 프랑스에선 황제폐하가 제일 높으시되 저희 집에선 제 아버님과 어머님이 제일 높습니다.”라고. 시골영주의 번뜩이는 지혜, 그의 효성이 돋보이는 이야기이다. 여러분과 저에겐 누가 제일 높습니까? 그리고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크고 위대합니까? 나를 사랑하시고 내 죄를 사유하시고 내 죄의 기록을 조건 없이 용서하여 넘겨주신 하나님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서론)
미가는 이사야, 호세아, 아모스와 동시대인으로서 주전 8세기 후반에 활동을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미가를 소개하면서, 모레셋 사람 미가라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에서 선지자를 소개할 때나 사람을 소개할 때 공통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의 가계, 즉 어느 지파사람 누구의 자손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을 본다. 물론 하박국 선지자에 대해서는 이러한 기록이 나타나 있지 않지만, 대부분의 사람을 소개 할 때는 반드시 그 사람이 누구의 지파며, 어디에 사는 사람이며, 최소한 누구의 자손이라는 것을 기록하는 특징이 있다. 그런데, 이 미가선지자는 단지 모레셋의 사람 미가라 기록하고 있다. 이 모레셋이란 지방은 아주 촌 동네며, 한마디로 시골출신의 별로 드러낼 것이 없는 무명의 선지자 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름 있는 누구의 아들이라고 자신 있게 대표적으로 말할 수 있었던 뼈대 있는 그런 집안의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사야는 궁중 선지자였다. 그 신분으로 따지면, 견줄 수 없는 신분의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절에 기록하기를 이 묵시가 미가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미가를 통해 하나님께서 전하고 기별은 무엇이었는가? 미가 선지자가 활동한 시기는 요담왕 전시대와 아하스와 히스기야의 시대이다. 당시에 남유다의 두 가지 큰 죄악은 첫째는 종교적 부패와 둘째는 가진들 자이 못가진 자에게 대한 폭압. 착취. 학대였다. 그래서 종교적으로는 종교지도자들의 부패와 타락 그리고 우상숭배를 앞장서서 조장하는 이러한 하나님의 신앙에 대한 죄악과 사회적으로는 가난한사람, 고아, 객, 과부와 같이 나약한 사람을 무자비하게 착취하는데 앞장서 있는 권력과 재력을 가진 사람의 폭압에 대한 죄가 만연해 있는 그러한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기별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와 그 상황이 비슷하지 않은가? 갑과 을의 관계 속에서 약하고 없는 자에게 행하는 악한 이 세상과 너무나 닮아 있고 또한 종교의 깊은 타락성의 형편 말이다.
미가서는 남왕국 유다의 모레셋 출신의 선지자 미가가 유다와 이스라엘 두 왕국을 대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기록이다(렘 26:18 읽을 것). 그렇지만 대게는 유다에 관한 것이고 이스라엘에 대한 내용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한편 범국가적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과 그 후에 있을 전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미가의 예언은 다른 예언서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공통된 내용이나 이스라엘의 회복과 관련된 메시아의 베들레헴 탄생에 대한 예언은 매우 특이하다(5:2). 기록된 연대는 유다 왕 히스기야 시대로 본다. 미가 선지자의 이름은 '누가 여호와와 같으리오?'라는 뜻이다. 미가는 그 당시 잘못된 신관에 좌우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이 없는 의식 종교를 원치 않으시고 자비와 공의를 찾으신다고 확신하였다. 따라서 그는, 그의 시대의 죄악을 책망하는 동시에 유다나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하여 두려움 없이 선포하였으며, 다른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장래의 소망을 보여 주었으니, 곧, 메시아로 말미암은 구원 축복이었다. 그는 이사야 선지자와 동시대에 사역하였으므로 양자간에 서로 일치하는 문구들이 있다. 이 미가서를 기록한 목적은 이스라엘 및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과 장차 도래할 영광스러운 메시아 왕국에 대해 알려 줌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경성케 할 뿐 아니라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결코 소망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인도하기 위함이다.
중심 사상: 최악의 배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기꺼이 그 백성들을 용서하고 치유하기를 원하신다.
선지자 미가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암울한 시기에 봉사하였다. 나라는 오래전에 두 왕국으로 분리되었었고, 마침내 앗시리아가 북방왕조를 멸망시켰다. 미가는 남쪽 유다로 서서히 옮겨 가는 죄악과 폭력을 보았다. 그는 부정직, 부정의, 뇌물, 불신과 같은 치명적 죄를 경고하였다. 미가는 예루살렘 멸망을 예언한 최초의 선지자가 되었다(미 3:12).
그러나 하나님의 영감을 통해 그는 이런 어두운 시대 속에서 한줄기 빛을 보았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는 임박한 징계 너머를 바라볼 수 있었다. 미가는 격려의 말을 전하면서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통치자가 베들레헴에서 나올 것이라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만국에 평화를 말하며 그들을 가르쳐 이르기를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라고 할 것이었다(미 4:3). 하나님의 꾸짖음은 회복과 궁극적인 복의 도구가 될 것이었다.
결론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품성을 따라 살라고 백성들에게 권면하였습니다. 즉 인애를 보이고 옳은 일을 행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봐야만 우리는 그분을 모방하며 그분처럼 될 것입니다.
첫째날(일) 선지자의 정서적 고뇌
5월 12일
“이러므로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개같이 애곡하고 타조같이 애통하리니 이는 그 상처는 고칠 수 없고 그것이 유다까지도 이르고 내 백성의 성문 곧 예루살렘에도 미쳤음이니라”(미 1:8~9).
교사강해 1)
하나님께서 보내신 참 선지자와 거짓선지자의 차이가 무엇일까? 하나님의 자녀와 사단의 자식의 차이가 무엇일까? 선지자는 심판받아 멸망하는 자들을 위하여 애통하며 애곡하며 벗은 몸으로 그들을 위하여 외치는 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거짓선지자는 원수의 진멸당하는 것을 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참 선지자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시지 않으신다.(겔 18:23) 오직 악이 우리를 죽이는 것이다(시 34:21). 하나님은 우리가 죄악가운데서 멸망하는 것을 슬퍼하시고 안타까워하신다. 하나님은 죄악가운데서 멸망하는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분이시다. 한 밤중에 울려 퍼지는 들개의 울름소리나 타조의 울음소리는 바로 이런 가슴 아픈 하나님의 마음의 아픔을 대변한 울음소리인 것이다.
미 1:1~9에서 선지자는 죄 많은 백성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보라고 온 세상을 초청한다. 그는 남쪽과 북쪽의 수도 예루살렘과 사마리아를 지목하였다. 왜냐하면 그 지도자들이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모본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두 도시는 가장 먼저 멸망의 고통을 받게 되었다.
파괴적 심판이라는 주제는 미가의 생애에 현실적인 긴장감을 조성했다. 선지자로서 부르심을 입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목적과 연합시켰기 때문에 그는 조만간 닥칠 일을 선언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선지자는 자기 민족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포로로 끌려간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슬퍼하였다. 또한 나쁜 소식은 자주 선지자의 마음과 육신의 건강을 크게 해쳤다.
다음의 성경을 보면 우리는 선지자들의 쓰라린 운명에 대하여 무엇을 알게 되는가?(민 11:10~15, 왕상 19:1~4, 렘 8:21~9:2, 겔 24:15~18, 고후 11:23~27)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그들이 선포하는 기별에 상당히 깊이 개입하였다. 그들은 장차 일어날 끔찍한 일들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즐기지 않았다. 그들은 임박한 재난을 묘사하기 위해 종종 애가를 사용하였다. 그들은 생생한 고통을 경험했다. 선지자들은 예언적 언어와 함께 외적 표현을 동원하여 청중들에게 기별을 전하였는데, 종종 그 기별에서 비롯된 심한 고통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미가의 반응은 포로가 겪어야 할 수치를 가시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거의 벌거벗은 채, 맨발로 삼 년을 다녀야 했던 이사야 선지자를 연상시킨다. 엘렌 G. 화잇도 봉사하는 기간 동안 정말 큰 고통을 경험해야 했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종 미가가 어떤 고난을 헤쳐가야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부가적용)
미가는 지금 자신의 민족이 죄를 깨닫지 못하고, 심판의 채찍에 맞을 미래를 내다보면서 안타까워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애곡”하고 있다. 그가 내는 소리는 매우 슬픈 소리였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었을 때 상주들과 함께 우는 사람들을 세웠다. 우리도 부모의 상중에 대신 울어주는 사람을 들여 슬픔을 나타내듯이 유대인들 또한 슬픈 일이 있을 때 우는 소리를 낸다. 이 소리는 처절한 소리이다. 그래서 “들개같이 애곡하고 타조같이 애통하리니”라고 하였다. 들개의 우는 소리는 매우 흉하고, 타조의 울음소리는 매우 슬프게 들린다고 한다. 이는 미가의 슬픈 마음을 통하여 그 민족의 슬픔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 같은 미가의 마음은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유다의 죄악과 그 징벌의 결과로 멸망할 예루살렘을 생각하며 통회하는 마음과 흡사하다. 그리고 “벌거벗은 몸으로”라고 했다. 이것은 맨발이라는 의미와 같다. 그는 이렇게 유다의 멸망을 미리 내다보면서 몸과 마음과 소리로 이 같은 슬픔을 표현했다. 그의 유다를 향한 애증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징벌에 대한 예언자적 통찰력을 확실하게 나타내고 있다. 그는 멸망이 임박했다고 말한다. 북이스라엘을 지나서 남유다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원한 멸망을 경험할 영혼들이 갖게 될 슬픔의 서곡일 뿐이다. 오늘 우리는 이 세상이 멸망하기 전에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우리의 가족들이나 친구들이나 백성들을 향하여 얼마나 애통하여 기도하고 있는가?
교훈: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심판을 경고했던 미가는 그 기별 때문에 심각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경험해야 한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성경에서 예언하는 장래의 일들 때문에 그대는 얼마나 슬퍼합니까?
세상에 임할 운명을 미리 알게 된 선지자들은 종종 커다란 충격과 정서적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다니엘은 2300주야 이상을 보고 “여러 날 앓”았습니다. 사도 요한도 이상 중에 두루마리를 펴기에 합당한 사람이 없어 “크게 울었”습니다. 혼란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고 미래를 내다볼 만큼 영적으로 민감하였기에 그들의 고통은 더 컸던 것 같습니다. 또한 그들의 슬픔은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연민과 동정을 대변하기도 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슬퍼해야 할 이유를 모른다면 진정으로 예언을 깨닫지 못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 적용 |
그대는 예언을 아는 백성으로서 세상에 대하여 어떤 부담감이 있습니까?
영감의 교훈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기뻐하라- “하나님의 종들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일하고 있다. 그들은 그분의 대사들이다. 그들은 그들의 편안과 안락과 쾌락과 욕망과 편의를 도모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고,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모든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따를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해야 한다”(교회증언 1권, 431~432).
기도
아버지, 제게도 영적인 예민함을 주셔서 아버지의 슬픔을 알고, 영혼에 대한 부담감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그래서 잃은 자를 구원하시려는 아버지의 일에 동참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둘째날(월) 죄악을 꾸미는 자들
5월 13일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미 3:11).
교사강해 2)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은 정의와 진실이 없었다. 재판장은 뇌물을 따라서 돈을 많이 내는 자에게 유리하도록 재판하였다. 유전 무죄요. 무전 유죄였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과 같지 않은가? 또한 제사장은 삯을 따라서 교훈하였다. 삯을 많이 주면 말씀을 전하고 삯을 주지 않으면 말씀을 전하지 않았다. 그들은 삯군 목자였다.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쳤다. 돈만 가져다주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계시고 축복이 임할 것이라고 거짓 안전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첫째 지도자는 이익에서 자유로워야한다. 지도자는 진실과 정의가 있어야 한다. 둘째 참된 사랑은 죄를 보고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죄를 보고도 괜찮다고 하는 자는 함께 망하는 자들이다.
미 2:1~11와 미가 3장을 읽어 보라. 어떤 죄목 때문에 이 백성들에게 심판이 이르게 되었는가?
“이사야와 그 동료들은 아하스가 왕위에 오름으로 지금까지 유다 나라에 존재했던 어떤 상태보다도 더 소름끼치는 상태를 맞게 되었다. 전에 우상숭배의 매혹적인 행습의 감화를 저항해 오던 많은 사람이 이제는 이방신들의 예배에 참여하라는 권고를 받아들여 그 일에 가담하였다. 이스라엘 방백들은 맡은 일에 불충실함이 드러났고, 거짓 선지자들은 백성들을 타락시킬 기별을 가지고 사방에서 일어났으며, 제사장들 중에 어떤 이들은 삯을 위하여 가르치고 있었다. 그러나 배도의 지도자들은 여전히 하나님께 대한 예배 형식을 유지하였으며 하나님의 백성중에 계수함을 받는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난세에 증언을 한 선지자 미가는 시온의 죄인들이 ‘여호와를 의뢰하’노라고 주장하면서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고 참람되이 자랑하고,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미3:11, 10)기를 계속한다고 선언하였다”(선지자와 왕, 322).
남방 유다에 존재하는 고질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는 우상을 숭배하는 어리석은 이방인들과는 반대로 그들이 참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시 115:4~9 참고) 그러한 특별한 지위가 징벌에서 그들을 어느 정도 면제시켜 줄 것이라는 망상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그들의 특별한 지위 때문에 죄에 대한 책임이 더 클 수 밖에 없었다.
부가적용)
아무리 암울한 시대에도 참 복음의 뜻을 전하는 사람들은 있다. 오늘 성경에서 미가가 그러한 믿음의 사람임을 볼 수 있다. 미가는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거짓된 선지자들이 많은 그 시대 속에서도 이스라엘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미가는 결코 시대의 흐름을 따라간 사람이 아니라 그릇된 흐름 속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외친 참 믿음의 사람이었다. 우리 믿음의 성도들은 어느 자리에서나 이 미가와 같은 역할을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바른 것을 추구하고 바른 말을 하는 참된 믿음의 종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교훈: 남방 유다의 지도자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면서도 선민으로서의 지위 때문에 심판을 모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백성들을 기만하였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불순종하면서 구원을 바라는 정신에는 어떤 문제점이 있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신명기는 모든 복과 보호와 번영이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그들의 순종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여러 번 강조한다.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리하여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신 4:9).
| 적용 |
우리에게 있는 잘못된 선민의식은 어떻게 교정되어야 합니까?
영감의 교훈
받은 빛에 의해 심판을 받음-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성소의 저울에 달려질 것이다. 이 교회는 그가 받은 특권과 이점들에 의해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교회의 영적인 경험이 그리스도께서 무한한 값으로 부여하신 특권들에 상응하지 않는다면, 또한 교회에 주어진 축복을 가지고도 교회에 위탁된 일들을 수행하지 않았다면 그 교회는 ‘부족함이 보였노라’라는 선고를 받게 될 것이다. 받은 빛과 기회에 의해서 교회는 심판을 받을 것이다”(마지막 날 사건들, 58~59).
기도
하나님 아버지, 진정한 회개와 반성 없이 이 교회가 남은 교회라고 자랑했던 우리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진정한 믿음과 사랑의 실천 없이 예수의 믿음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고 자만했던 우리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셋째날(화) 베들레헴 태생의 새로운 통치자
5월 14일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 5:2).
교사강해 3)
구약은 오실 메시야에 대해 300회 이상 예언했다. 그 중에도 정확하고도 분명한 장소까지 예언된 것은 미가서 5: 2 이다. 2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나올 것이라” 하나님 나라에서의 통치자-곧 통치자의 출생의 비밀과 그 사역의 구체성과 의미 그 자체에 대하여 예언하여 놓았다. 베들레헴은 현재 사용되는 지명이고, 에브라다는 베들레헴의 옛 이름이다. 에브라다는 열매를 많이 맺는다는 이름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베들레헴은 떡집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베들레헴의 옛 지명 에브라다를 함께 사용한 것은 다윗의 집 다윗의 고향을 가리키기 위한 말씀이다. 다윗의 집, 다윗의 가문, 다윗의 족속을 통하여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을 지어서 말씀을 하시기 위함이다.
미가서는 종종 암울한 말씀에서 희망 찬 말씀으로 분위기를 신속히 전환한다. 메시아의 강림을 예언한 말씀 중에 가장 유명한 미가의 예언을 보면 우리는 그런 희망을 볼 수 있다. 미 5:2을 읽어 보라. 여기서 화자는 누구이며,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메시아에 대하여 무엇을 알게 되는가?(요 1:1~3, 8:58, 골 1:16~17 참고)
유다의 작은 마을에서 이스라엘을 통치할 사람이 나타날 것이었다. 미 5:2은 선지자들이 약속한 이상적인 지도자를 간절히 기다리는 백성들의 소망을 북돋기 위해 기록되었다. 메시아의 통치는 능력과 정의와 평화의 시대를 이끌 것이었다(미 5:4~6).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이었고 ‘에브라다’로 불리기도 했다(창 35:19). 지명을 언급한 이유는 백성의 참목자가 될 미래의 후계자의 소박한 출생을 강조한다(미5:4). 선지자 사무엘은 이 작은 마을에서 이새의 막내아들 다윗에게 이스라엘의 왕이 되도록 기름부었다(삼상 16:1~13, 17:12).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막 탄생한 유대인의 왕을 보기 위해 왔을 때, 헤롯왕은 성경학자들에게 그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 물었다(마 2:4~6). 그러자 그들은 미가서의 말씀을 인용하여 메시아가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날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우리의 유한하고 타락한 지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바로 영원한 하나님이며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셨다. “영원한 시대로부터 주 예수그리스도는 아버지와 일체이셨다”(시대의 소망, 19). 믿기지 않는 이 놀라운 사상은 기독교의 가장 근본적인 진리 가운데 하나이다. 즉 창조주 하나님이 인성을 쓰시고 우리의 죄를 위해 자신을 제물로 드리셨다.
부가적용)
미가서는 주전 700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주전 700년경에 미가를 통하여서 예언하셨고 700년 후 예수님께서는 유대 땅 베들레헴의 한 여인숙에서 태어나셨으며 누울 곳이 없어서 말구유에 누이셨다고 하였으며 예언된 말씀대로 죄인들의 죄를 십자가로 대속하셨고 장사 된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으며 하늘에 올라가셨다. 예수 그리스도 그의 근본은 상고에 (히)케뎀;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를 이르는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베들레헴, 에브라다에 나시기 전부터 영원 전부터 계신 영원하신분이라는 말씀이다. 그를 창조주라고 하셨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하셨다.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를 이르는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베들레헴, 에브라다에 나시기 전부터, 영원 전부터 계신, 영원하신 분,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시며 영원토록 변하지 아니하시는 분이라는 말씀이다. 영원하시며 변하지 아니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유다의 가문을 통하여 오셔서 죄인들의 죄를 십자가로 대속하셨기 때문에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마다 구속함의 은총을 받는 것이다. 예수님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죄인들의 죄를 십자가로 대속하셨으며, 예수님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스리시는 분이시며,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토록 존재하시는 창조주시다..
교훈: 미가는 주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했지만 그 가운데 인류에게 진정한 구원의 소망이 되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남겼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세상의 통치자와 메시아의 통치가 내 삶에 미치는 영향은 어떻게 다릅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우리가 이 진리를 통하여 우리의 생명의 가치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을 깊이 묵상한다면 인생의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이 삶의 목적과 의미를 찾기 위해 씨름하지만, 근본은 십자가에 있다. 십자가는 우리를 진정한 삶의 의미에 고정시켜 줄 뿐 아니라, 세상이 줄 수 없는 훨씬 위대한 소망을 제공한다.
| 적용 |
그대가 메시아의 통치를 바라는 개인적인 이유를 아래 적어 보십시오.
영감의 교훈
다함이 없는 주제- “베들레헴의 이야기는 다함이 없는 주제이다. 그 속에는 깊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롬11:33)이 숨기어 있다. 우리는 하늘의 보좌를 구유와 바꾸시고 경배하는 천사들과의 교제를 외양간의 가축과 바꾸신 구주의 희생에 경탄한다. 사람의 자만심과 자부심은 그의 임재 앞에 견책을 받는다”(시대의 소망, 48~49).
기도
우리는 아직도 사람에게서 희망을 찾고자 하지만 매번 실망만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주님만 바라봅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과 해답이 되십니다. 메시아의 돌나라가 온 땅에 충만하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넷째날(수) 무엇이 선한 것인가?
5월 15일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
교사강해 4)
미가 4, 5장은 신약시대가 되면 시온산이 모든 산 위에 제일 높은 산이 될 것이라는 소망의 메시지이다. 즉, 기독교가 가장 최고의 종교가 될 것이고, 이방인들도 전부 시온산에 올라 여호와를 경배하는 것을 예언하였다. 메시야를 통해 유대인 중에 남은 자들과 이방인 중의 택한 자들을 구원하여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하나님 역사 운행의 모략이고 계획이다. 미가 6장은 메시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남은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고, 여호와께서 구원받은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 6:8).
미가 6장을 보면 하나님과 백성의 대화에서 한 성전 예배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지 물었다. 무엇이 하나님께 가납될 만한 제물일까? 일년 된 송아지? 아니면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 아니면 예배자의 첫째 자녀? 여기에 열거된 제물의 규모와 가치는 점점 커지고 있다.
미 6:1~8을 읽어 보라. 핵심적인 진리는 무엇인가? 이 진리가 특히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에게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이 옳은 교리와 예언에 대한 자세한 이해보다 얼마나 더 중요한가?(마 23:23 참고)
하나님은 이미 그분이 원하시는 바를 밝히셨다. 모세의 가르침을 통해 백성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행하셨던 일들을 알고 있었다(신 10:12~13). 따라서 미가의 대답은 하나님의 요구에 변화가 있음을 암시하는 새로운 계시가 아니었다. 제사와 제사장의 사역은 하나님의 일차적인 관심사가 아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바람은 꾸준한 헌신과 주를 향한 사랑을 가지고 이웃에게 정의를 행하는 백성을 소유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최상의 제물은 순종이다.
미 6:8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밝힌 가장 간명한 진술이다.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여기에 참신앙에 대한 모든 선지자의 가르침이 함축되어 있다. 정의란 하나님의 영의 감동을 받아 사람들이 행하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특별히 착취를 당하는 약자나 힘 없는 자들에게 공정하고 평등하게 대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인자란 다른 사람에게 자발적으로 사랑과 신뢰와 성실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 한다는 것은 그분을 첫째로 삼고 그분의 뜻에 순응하여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부가적용)
하나님께 나가는 사람은 자신의 예배의 태도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한다. 당시의 사람들은 번제(燔祭)를 잘 드리면 되는 줄로 생각했다. 또 동물 가운데 있는 많은 기름을 드리면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혹은 몸의 열매인 맏아들을 드려야 죄를 속량 받는 줄 오해하는 이들도 많이 있었던 모양이다. 선지자 미가의 말씀이 있다.『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했다. 신앙생활의 진수가 무엇인가를 우리는 여기에 있는 구절을 통하여 분명하게 배울 수 있다. 첫째로 하나님은 종교의 의식보다도 그 의식을 행하는 이들의 마음과 생활을 더 중하게 여기신다. 그리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사야 1:13절 이하에 이런 말씀을 주셨다.『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저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니라. 이는 너희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이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했다. 하나님은 예배의 어떤 의식보다도 예배를 드리는 이들의 마음과 생활을 보시는 분이시다. 둘째로 예물을 드리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예물 자체보다도 예물을 드리는 이의 마음과 생활을 보시는 것이다. 산상 보훈에서 우리 주님도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셨다. 또 한 번은 주님께서 연보 궤에 앉아서 여러 사람이 연보 드리는 것을 보시다가 두 엽전을 드리는 과부의 정성을 보시고 이 과부가 실상은 제일 많이 드렸다고 칭찬하셨다. 하나님은 마음과 생활을 보신다. 셋째로 기독교는 이러한 윤리적 종교이다. 세상에는 윤리가 없는 종교도 있다. 모든 우상숭배 종교가 그러하다. 일본의 신도 같은 것이 그렇다. 신사 참배만 하면 무슨 짓을 해도 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다.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윤리적 신이시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들에게 옳은 윤리 생활을 요구하는 것이다.
교훈: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말 바라시는 바는 무의미한 제사나 예배가 아니라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을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반드시 성실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배의 참정신을 잃게 되면 어느덧 예배를 드리는 행위를 하나의 공로로 여기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런 예배는 마치 그리스도가 빠진 제물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받기를 원하시는 예배는 그리스도가 있는 예배입니다. 즉 그분의 모습이 반사되는 우리의 삶이야말로 하나님이 바라시는 최고의 예배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 적용 |
그대는 앞으로 어떻게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하나님과 동행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각 영혼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 “선지자들과 주님께서 친히 하신 이 분명한 말씀을 우리들은 각 영혼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괴로움과 압박을 당하는 자들을 위하여 은혜를 베풀고 친절히 앞날을 생각해 주고 그리스도인적 호의를 보일 기회를 잃지 말아야 한다. 그 이상 할 수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 곧 동정과 사랑의 길을 통하여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의 말을 해 줄 수 있다”(선지자와 왕, 327).
기도
그저 교회만 다닐 뿐, 생활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 저의 예배가 아버지께 기쁨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작고 사소한 것부터라도 예수님의 모본을 따르며 순종하는 삶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녀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다섯째날(목) 깊은 바다에
5월 16일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미7:18~19).
교사강해 5)
미가서 7:18-19절의 말씀은 하나님과 다른 신들의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밝혀 준다. 그것은 한마디로 완전히 용서하신다는 것이다. 용서는 사랑에서 비롯된다. 헬라 신화나 로마신화를 보면 전쟁, 보복, 복수, 증오로 얽혀 있다. 그러나 성경이 밝혀주는 하나님의 모습은 사랑과 용서이다. 본문 역시 하나님의 용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 가를 밝혀 주고 있다. 본문 18절은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로 시작된다. 18절을 보면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라고 했다. “사유하신다”는 것은 히브리어로 “노세”라는 말이다. 그 뜻은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 무거운 짐을 다른 데로 옮기는 것이다. 이사야 53:6을 보면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대신 지시고 우리에게서 죄의 짐을 옮겨 주셨다는 것이다. 애국자는 국가를 위해 공산당은 공산주의와 그 사상을 위해 죽을 수 있다. 그러나 죄를 옮겨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내가 가져야할 죄의 짐을 대신 져 주셨다. 구약시대는 짐승이 대신 죽음으로 우리가 죄사함을 받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직접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사유해 주셨다. 에베소서 2:1을 보면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라고 했다. 이 모습이 사유함 받기 전의 모습이다. 그러나 2:5을 보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했다. “죽었고 - 살았고” 그 사이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는 것이다. 내 죄는 완전히 용서함을 받은 것이다.
미가서는 심판을 묘사하면서 시작하지만 소망의 말씀으로 끝난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달리 해석하거나 부인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택한 백성은 심판받지 않는다고 믿었던 미가 시대의 사람들처럼 덫에 걸려든다. 하나님의 공의는 그분의 사랑과 관심의 다른 표현이다. 미가가 전하는 복음에 따르면 심판은 절대 하나님의 최종 목표가 아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행동은 줄곧 심판에서 용서로, 징계에서 은혜로 그리고 고난에서 소망으로 이동하였다.
미 7:18~20을 읽어 보라. 여기서 제시하는 복음은 무엇인가? 여기서 볼 수 있는 모두를 위한 소망은 무엇인가? 왜 그것이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가?
미가서는 희망이 넘치는 찬양으로 끝난다. “누가 하나님과 같은가?” 하는 질문은 미가의 이름과 같다. 이 질문은 하나님의 유일성과 그분과 같은 존재가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은 유일한 창조주이시며 만물이 그를 통해 창조되었다. 그뿐 아니라 그분은 은혜와 용서의 하나님이시며, 멸망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상상할 수조차 없는 극한의 대가를 치르신 하나님이시다. 히브리 민족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
우리 주위에는 힘든 상황과 고통스런 경험으로 가득하다. 우리는 왜 하나님이 이런 일들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시는지 고민하지만 이런 일들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이러한 때에 우리의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겠다고 약속하시는 여호와께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 있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기억한다면 미래에도 소망이 있을 것이다.
부가적용)
미 7:18절을 보면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라고 했다. 열왕기상 19:18을 보면 바알신에게 무릎 꿇지 않고 바알에게 입을 맞추지 않은 남은 자 7천명이 있다고 했다. 아합 왕과 왕비 이세벨이 바알우상을 숭배했던 탓으로 장관도 대신도 신하도 모조리 바알을 숭배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고 입맞추지 않은 7천명을 남겨 두셨다. 에스겔서, 이사야서, 예레미야서를 보면 “남은 자”라는 말이 여러 차례 나온다. 이방신을 섬기거나 우상에게 절하지 않고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만 섬기도록 남겨둔 사람들을 남은 자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그들은 하나님이 숨겨둔 사람들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본문 18절은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라고 했다. 남은 자의 허물이란 남은 자도 허물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을 우리들의 얘기로 바뀌면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도 허물이 잇다는 것이다. 예수 믿고 죄사함 받고 구원받았습니다만 욕심이 남아있고 유혹에 흔들리고 우리 안에 여전히 못난 자아가 살아 꿈틀거리고 시기, 질투, 분냄 등 온갖 육의 열매가 매달려 있다. 성경 안에는 죄를 사한다는 것을 다양한 말로 표현하고 있다. 넘긴다, 덮는다, 씻는다, 희게 한다, 대신한다, 기억도 안 한다, 넘어간다는 말은 곧 죄를 사유한다는 뜻이다. 본문 18절의 경우는 “넘기신다”고 했다.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나의 허물과 죄가 빼곡하게 기록된 노트를 들여다보고 계셨다. 결코 자랑할 수도 누구에게 내놓을 수도 없는 과거며 지은 죄들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한동안 심각한 표정으로 드려다 보시던 하나님이 “그냥 넘기는 게 좋겠다”며 책장을 넘기셨다. 그리고 그 다음 페이지에 “제 죄를 사유하고 넘겼다”고 친필로 글씨를 쓰셨다. 그 이유는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3:25)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동안 내가 저지른 죄, 내 행동, 내 삶을 하나님이 간과하여 넘겨주셨기 때문에 오늘 내가 여기 설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책장마다 붉은 줄을 긋고 “너처럼 형편없는 녀석은 처음 본다. 너는 끝장 낫다. 너는 벌을 받아야 된다. 죄 값은 사망이다. 나는 너에게 심판과 멸망을 선고하노라”고 쓰셨다면 오늘 내 모습과 여러분의 모습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하나님의 사랑은 크고 완전하시다. 용서도 완전하시다. 그분은 우리를 심판하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싶어 하신다.
교훈: 심판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의지하는 우리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풀며 유일한 소망이 되기를 바라신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가 하나님께 어떤 믿음과 소망을 두어야 할지 아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십시오.
“나의 대적이여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에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 그의 진노를 당하려니와 마침내 주께서 나를 위하여 논쟁하시고 심판하시며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시리니 내가 그의 공의를 보리로다”(미 7:8~9).
| 적용 |
하나님이 그대의 삶에서 특별히 바다에 던지기 원하는 죄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영감의 교훈
용기를 주는 말-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말을 하라. 그들이 기도로써 하나님을 쳐다보게 하라. 시험에 정복당한 많은 사람은 그들의 실패 때문에 굴욕감을 느끼고 그들이 하나님께로 접근하는 것이 소용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죄를 지었으므로 기도할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 바로 그때가 기도할 때라는 것을 그들에게 말해 주라. …그들이 죄를 자복하면 미쁘시고 의로우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고 그들을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실 것이다”(치료봉사, 181~182).
기도
죄로 인한 고생은 당연한 것이지만 저는 여전히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을 바라봅니다. 저를 주의 보혈로 정결하게 씻어 주시고 죄에서 속량하여 주옵소서. 죄가 제 삶에서 흔적 없이 사라지도록 저 깊은 바다에 던져 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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