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과 희망의 묵시(스가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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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과 희망의 묵시(스가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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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5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55분
기억절: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슥 3:10).
연구범위: 슥 1~2장, 롬 15:9~18, 엡 3:1~8, 슥 3~4장, 출 25:31~40, 슥 7장.
중심 사상: 비록 이스라엘이 죄로 인하여 징계를 받았지만,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그분과 다시 관계를 맺고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도입)
롸든 리빙스톤 씨의 '아버지가 있었다'라는 글을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나는 혼자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다가 언뜻 네게 대한 뉘우치는 마음이 있어 네 방에 몰래 들어와 너의 침상 곁에 무릎을 꿇었단다. 네게 대한 미안한 생각이 있어 네 침실에 들어왔더니 너는 한 손을 뺨 아래 넣고 황금색 머리털은 네 눈에서 흘러 내린 눈물에 젖어 붙어 있는 채 숨소리도 고요히 잠들어 있구나. 사랑하는 내 아들아! 그동안 나는 너를 너무 많이 괴롭혔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프구나. 아침마다 깨끗이 세수하라고 호통을 치고 집안을 어지럽힌다고 야단을 했으며 식탁에 앉으면 잘 씹어 먹어라. 음식을 흘리지 말아라, 팔꿈치는 식탁에 올려놓지 말아라, 버터는 너무 많이 먹지 말아라, 그리고 밖에 나가 노는 것을 보면 가슴을 펴고 다니라, 옷을 더럽히지 말아라, 빵구 난 양말을 신은 것을 보면 친구들 앞에서 야단을 치고, 집에 들어와서는 왜 혼자 돈을 버는 아버지를 생각하지 못하느냐고 잔소리가 많았구나. 그러나 내 아들아! 이 모든 것은 결코 네가 미워서 한 말이 아니었단다. 너에게 너무 큰 기대를 가지고 어른들의 척도로 너를 재어 본 아버지의 잘못이었단다. 어두운 밤 네 곁에 찾아와 이와 같이 무릎을 꿇고 앉은 것은 이런 부끄러움 때문이란다. 그러나 내 사랑하는 아들아! 나는 내일부터 새 아버지가 되련다. 입술 악물고서라도 성질을 참고 입을 무겁게 하련다. 고요히 잠든 너의 모습을 보니 너는 아직도 어린아이로 깨끗하고 귀엽고 아름답기만 하구나.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네가 이처럼 어린아이인 줄을 모르고 너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던 일을 용서하려무나." 꾸지람을 듣고 눈물방울이 맺힌 채 고요히 잠든 자식을 바라보며 반성하는 아버지의 글이다. 스가랴서를 보면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자식들이 이 아버지의 마음을 볼 수 있고 읽을 수 있으면 스가랴서를 매우 잘 이해할 수 있다. 이 속에 아버지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이 녹아져 있기 때문이다.
서론)
중부 유럽의 한 낡은 성벽에 다음과 같은 짧은 라틴어 문구가 새겨져 있다. ‘둠 스피로, 스페로(dum spiro, spero)! ’ 이 말은 ‘숨을 쉬는 한 내게 희망은 있다.’는 뜻이다. 스가랴가 백성들에게 전하는 기별도 그와 같이 요약된다. 바벨론에서 귀환한 뒤 약 이십 년이 지나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그 백성들과 함께 계시는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실망감이 이전의 열성을 대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라는 이름의 뜻을 가진 스가랴는 학개가 사역을 시작한 지 몇 달 후에 선지자로서 봉사하기 시작했다(학 1:1, 슥 1:1). 일련의 예언적 이상을 통하여 스가랴는 현재와 미래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가 곧 임할 것이었다. 그러나 선지자는 그 당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지금 여호와를 섬기라고 호소하였다. 이 책의 상당 부분은 여호와를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번 주와 다음 주 우리는 스가랴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사실들을 보게 될 것이다.
결론 하나님의 말씀과 용서와 성령의 임재는 우리의 삶에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이것들의 조합에서 진정한 삶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역경 중에 있는 그분의 백성들을 도우셔서 그들이 죄와 유혹을 이기게 해 주십니다.
첫째날(일) 위로를 주는 생명의 말씀
6월 9일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슥 1:3).
교사강해 1)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배반하고 죄악에 빠졌던 이스라엘을 교정하기 위해 앗수르나 바벨론과 같은 열국들을 사용하여 징계하셨다. 우리는 자식을 징계하는 부모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사실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조금만 노하였거늘 그들은 힘을 내어 고난을 더하였음이라”(슥 1:15)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스라엘을 향한 열국들의 과도한 징계로 인해 이스라엘이 생각보다 너무 크게 고난을 당한 이스라엘과 유다의 어려움을 가슴 아프게 지켜보고 계셨다. 당신의 백성들이 고난과 아픔을 당할 때 그 아픔을 지켜보는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더 아프셨는지를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일로 하나님께서는 은근히 부화가 나고 질투가 나셨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여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안일한 열국을 심히 진노한다”(슥 1:15)고 말씀하신 것은 이스라엘을 집어 삼키고 이스라엘을 혹독하게 다루었던 바벨론이라든지 앗수르는 지금 안일하게 평안하게 사는 것에 대해서 분노와 질투를 느끼신 것이다. 당신의 백성은 죽어라고 고난을 당했는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향해 자신은 조금 노했는데 이 다른 큰 나라 강대국들은 힘을 더해가지고 당신의 백성들을 괴롭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은 지금 편안하고 안일하게 지내는 열국 큰 나라를 보면서 “시온을 위해 크게 질투”(슥 1:14)한다고 말씀하셨다. 손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징계하시는 것은 저들의 교정을 위해서이지 멸망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나치게 이스라엘 학대하고 고생시킨 열국들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심기가 매우 불편한 모습을 그려내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얼마나 그리고 여전히 사랑하시는지를 사실을 보여주신 말씀이다.
스가랴 1장을 읽어 보라. 핵심 기별은 무엇인가? 특별히 슥 1:3을 주목하라. 여호와께서는 백성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바벨론에서 귀환한 남은 백성들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귀환은 근심거리이기도 했다. 그 땅에서 안전하게 살 수 있을까? 원수들이 다시 그들을 위협하지는 않을까? 하나님이 과거의 죄를 용서하실까? 아니면 계속 징계하실까? 하나님의 택한 백성과 나라를 위해 미래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스가랴는 이상 속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유다를 위해 중재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언제까지입니까?’라고 질문하였다. 이 질문은 고난 중에서 여호와께 도움을 요청하는 백성들이 자주 사용했던 표현이다(시 74:10, 사 6:11, 단 8:13). 질문에 대한 답변은 천사를 통해 직접 선지자에게 전달되었다. 그 기별에는 하나님의 인자와 위로를 약속하는 말씀이 포함되어 있었다.
스가랴는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대하여 질투하신다고 선포하도록 명령을 받았다(슥 1:14). 질투는 부정적인 어감을 가진 말이지만,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을 사랑하시며 그들이 신실하기를 기대하신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대한 그분의 사랑과 대조적으로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백성을 학대하는 국가들에게 진노하신다. 이 국가들의 가장 큰 죄는 포로들이 받아야 할 징벌보다 훨씬 더 가혹한 고통을 주었다는 것이다.
슥 1:15~17은 하나님의 분노를 드러내면서 한편으로는 백성들에게 위로의 보상을 약속하시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분의 목적은 연민의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는 것이였고, 선지자는 이를 선포하라는 사명을 받았다. 여호와께서는 시온을 위로하시는 반면 원수들에게는 진노를 발하실 것이었다(사 40:1 참고). 예루살렘은 회복될 것이며 다시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곳이 될 것이었다.
부가적용)
우리가 당신의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심기를 이해할 수 있다면 스가랴의 기록은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이스라엘을 향해 조금 노를 발하여 당한 저들의 고난을 생각하고 이제는 저들을 다시 회복시키시려는 하나님의 모습을 본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고난 중에 저들의 죄를 깨닫고 당신께 돌아와 과거 솔로몬의 성전과 같은 큰 집도 아닌 더 작은 성전을 짓는다고 해도 개의치 않고 기뻐하셨다. 회개하고 돌아온 당신의 백성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에는 저들이 아버지의 집, 성전을 지으려는 저들의 가상한 노력만 보아도 기뻐 말씀하신다. 그리고 저들에 대한 축복을 말씀하신다. 슥1:16-17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긍휼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치어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슥1:17 다시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 여호와가 다시 시온을 안위하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나님께서 스가랴를 통해 예언한 것은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치어지리라는 것, 하나님의 집이 다시 건설될 것을 인해 기뻐하시고 저들의 이런 노력을 보시면서 저들을 축복하시려고 말씀하신다. 당신의 백성들의 성읍이 다시 풍부하여 질 것이라고 약속하여 말씀하시고 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해 헌신하는 마음, 하나님을 향해 돌아온 저들의 헌신만으로도 기뻐하시고 행복해 하신 것이다.
교훈: 스가랴는 귀환한 포로들에게 그들을 동정하며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을 전하였다. 반면 하나님은 그들을 학대했던 나라들에게 진노하셨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어떻게 하나님께 돌아갑니까?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렀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매번 같은 죄를 반복하여 더 이상 돌아갈 염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그럴지라도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맞습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희망은 오직 그분에게만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찾고, 그분과 가까운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못을 뉘우치고 죄를 고백하는 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용서와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 적용 |
그대가 지금 하나님께 돌아간다면 무엇을 회개하고 무엇을 회복해야 합니까?
영감의 교훈
위로하는 말씀- “성경의 역사는 낙심하는 마음을 하나님의 자비의 소망으로 붙들어 준다. 다른 사람들도 우리와 같은 실망 가운데 투쟁하고 우리가 넘어진 것처럼 유혹에 넘어졌으나 그들의 위치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것을 볼 때, 우리는 낙담할 필요가 없다. 영감의 말씀은 잘못한 영혼을 위로하고 격려한다”(교회증언 3권, 15).
기도
우리를 동정하며 불쌍히 여기시는 하늘 아버지, 죄 많은 저를 또다시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떤 상황이 닥칠지라도 죄 중에 낙담하지 않고 아버지께 돌아올 수 있도록 제 마음을 항상 성령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둘째날(월) 주께서 오신다
6월 10일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와서 네 가운데에 머물 것임이라 그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에 머물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슥 2:10~11).
교사강해 2)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악을 인해 하나님께서 열국을 사용하였지만 다시 돌아오는 당신의 백성들을 향해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라, 탕자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기뻐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비록 포로로 잡혀가 고생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보는 것은 아버지의 본심이 아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애3:33)고 말씀하신 것처럼, 당신의 백성들이 고생하며 사는 것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시다. 슥2:8-9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를 노략한 열국으로 영광을 위하여 나를 보내셨나니 무릇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내가 손을 그들 위에 움직인즉 그들이 자기를 섬기던 자에게 노략거리가 되리라 하셨나니 너희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리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나치게 힘들게 만들었던 이 열국들을 하나님께서 벌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의 고통에 대한 자신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으로 표현한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의 고통과 아픔을 얼마나 크게 느끼셨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눈동자는 얼마나 예민한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당한 고통을 그 자신의 가장 예민한 부분의 고통처럼 아프게 여기신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시 돌아오는 당신의 백성들을 보며 춤을 추듯 기뻐하시고 내가 저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늘 아버지께서도 자식을 향한 우리 육신의 아버지와 같은 똑 같은 사랑의 부성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스가랴 2장을 읽어 보라. 스가랴는 한 이상 중에서 재건된 예루살렘을 보았다. 그 도시는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백성으로 가득했다. 그 도시는 셀 수 없이 많은 이방인들도 받아들였다. 이는 유다 백성들에게는 매우 낯선 상황이다. 10절은 기뻐하라는 초청의 말로 시작한다. 그와 같은 환희의 이유는 여호와께서 그분의 백성 가운데 거하기 위해 오시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재건된 성전에 거하기 위해 돌아오신다는 소식은 귀환 포로들이 찬양해야 할 이유였다. 우주의 대왕이 계시는 시온은 애정이 담긴 예언적 명칭으로서 ‘딸 시온’이라고 불렸다. 밝은 미래를 보는 관점에서 하나님이 친히 그 백성들을 돌보실 것이기 때문에 선지자는 시온에게 기뻐하라 격려한다. 하나님의 백성을 범하는 자는 그분의 눈동자를 범접하는 것과 같다(8절).
선지자는 여호와의 날에 수많은 이방인이 와서 여호와와 언약을 맺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원래 계획은 참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복을 받고 번영하는지를 보여 줌으로써 주변 백성들을 여호와의 백성으로 삼기 위해 인도하는 것이었다. 여호와께서는 그렇게 한 백성이 된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하나님을 믿는 이방인들 가운데 거하시려고 했다.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아브람과 사라의 후손들을 통하여 만국이 복을 받겠다고 했던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되는 것이다(창 12:1~3).
이 예언은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롬 15:9~18, 엡 3:1~8) 스가랴의 예언을 통해서 하나님은 열국의 멸망이 아닌 그들이 언약의 백성에 포함되리라는 사실을 약속하셨다.
부가적용)
슈바이쳐의 글인 “나의 생애와 사상”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예수가 가르쳐 주었고 사고에 의해 파악되는 기독교의 본질은 우리가 사랑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결합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모든 생생한 인식은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마음속에서 사랑의 의지로 체험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또한 “사랑의 이념이 무한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빛임을 깨닫는 사람은 종교에서 초감각적인 것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구하지 않는다. 기독교가 필요로 하는 것은 예수의 정신에 완전히 충만하여 예수의 정신 속에서 내면화하고 사랑의 살아있는 종교로 정신화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기독교의 사명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에만 기독교는 인류 정신생활의 누룩이 될 수 있다.”고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신의 눈동자와 같이 사랑하시지만 또한 열국의 이방인들 중에 하나님을 기억하는 이방인들도 그와 같이 사랑하신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말씀하시지만 이 심판을 구원을 위한 심판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교훈: 스가랴는 하나님을 믿는 이방인들이 유다의 남은 자손과 연합할 것이며 그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거하시리라는 계시를 보았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하나님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구원하려고 계획하실까요?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약속된 미래는 하나님의 사역의 결과이며 성경의 선지자들이 열망해 왔던 바가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받아들이기만 하면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구원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도록 명령하셨다. 사도 바울은 이런 하나님의 계획을 영세 전부터 감춰진 신비라고 불렀다(롬 16:25).
| 적용 |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그대가 참여할 수 있을까요?
영감의 교훈
위대한 수확의 결실- “잠시 그분은 장래를 내다보셨고 온 세상 각처에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라고 전파되는 음성을 들으셨다. 그분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장벽이 무너지고 모든 민족과 방언과 백성이 구원의 기별을 듣게 될 때에 이러한 이방인들 가운데서 위대한 수확의 결실이 있을 것을 보셨다. 그분은 이러한 일에 대한 기대 즉, 그분의 소망의 성취를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는 말로 표현하셨다”(시대의 소망, 622).
기도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 주셨지만 우리는 아직도 이기심에 머물러 있습니다. 나만, 우리만 구원받는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모두를 구원하고픈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셋째날(화)
6월 11일
즐겨 용서하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슥 3:4).
교사강해 3)
성경의 가르침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영생이다. 영생을 표현하는 비유 중에 가장 중요한 표현이 바로 옷에 대한 비유이다. 성경 전체의 이야기를 두 마디로 요약한다면 벗김과 입힘의 이야기이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였을 때 저들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옷, 빛으로 저들을 둘러쌓았던 썩지 아니할 영광의 옷이 벗겨지는 수모를 당하였다. 남들 앞에 옷이 벗겨지는 수모를 당하는 일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다. 아담과 하와가 그래서 저들은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었다. 죄는 언제나 사람들의 수치를 드러내게 하며 사람들을 수치스럽게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저들의 죄로 말미암아 벗김을 당한 수치, 저들의 의의 옷은 더러워졌다. 그러므로 다시 새로운 의의 옷을 입혀야 했다. 죄악을 제거하여 버림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의의 옷, 구원의 옷을 입혀야 했다. 여호수아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죄지은 인간에서 새 옷을 입히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말씀하신 것이다.
스가랴 3장을 읽어 보라. 여기에서 복음은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가? 이사야 53장을 제외한다면 구약 성경에서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진리를 스가랴 3장만큼 잘 설명하는 곳도 없다. 이상 속에서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사탄의 고소로 재판을 받고 있다. 대제사장이 받고 있는 고소는 그가 대표하는 나라에도 해당하였다. ‘여호수아(또는 예수아)’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이며 ‘예수’라고 발음할 수도 있다(마 1:21 참고).
성경에서 오른쪽은 변호와 보호의 위치를 의미한다. 시편 기자는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 16:8, 44:3 참고). 이런 경우 고소자는 반대편에 선다(시 109:6).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서 중재하는 동안, 사탄은 백성들의 죄를 근거로 그들을 고소하고 있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자비로 여호수아를 선택했던 것임을 상기시키며 고소를 거부하셨다. 더욱이 그분의 백성들은 이미 온전한 분량의 징계를 받았다. 여호수아와 남은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라는 소멸의 불에서 끄집어낸 나무 막대 같았다(암 4:11 참고).
여호와의 사자의 명령에 따라 백성들의 죄를 상징하는 여호수아의 옷이 제거되었다. 그가 정결케 되자, 구원과 의를 상징하는 예복이 주어졌다.
결국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길을 따르도록 명령을 받았다. 왜냐하면 이런 태도의 결과로 하나님의 많은 복이 이르러 오기 때문이다.
부가적용)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로 말미암아 저들은 열국의 포로가 되어 종살이를 하는 모습이다. 종살이를 하는 모습은 죄가 가져다주는 결과를 경험하게 하여 주는 것이다. 죄는 인간을 그 죄의 결과로 인간을 종으로 전락시킨다. 이스라엘이 수없이 반복하며 경험한 것은 저들의 죄가 나타날 때마다 하나님께서 열국의 포로가 되게 하셔서 수치를 당하게 하셨다. 온 인류는 죄로 말미암은 종살이를 사는 것과 같다. 스9:8-9에 “이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잠깐 은혜를 베푸사 얼마를 남겨 두어 피하게 하신 우리를 그 거룩한 처소에 박힌 못과 같게 하시고 우리 눈을 밝히사 우리로 종노릇 하는 중에서 조금 소성하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비록 노예가 되었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그 복역하는 중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바사 열왕 앞에서 우리로 긍휼히 여김을 입고 소성하여 우리 하나님의 전을 세우게 하시며 그 퇴락한 것을 수리하게 하시며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울을 주셨나이다”고 고백하고 있다. 죄로 인한 저들의 고난은 죄로 말미암아 당하는 인류의 죄된 종살이와 같다. 이 종살이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이 영광의 옷이 벗겨짐을 당한 수치와 같다. 돌아온 탕자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시는 아버지의 모습과 여호수아 제사장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시는 사건은 구원의 이야기는 죄의 수치스러운 인간의 모습을 없애시고 다시 인간을 치료하시고 회복시키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요19:23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속옷까지 벗겨짐을 당한 수치를 당하셨다. 인간이 철저히 죄로 말미암아 벗김을 당했던 수치를 십자가에서 당하셨다. 그러나 그분께서 당하신 십자가는 우리로 구원의 옷으로 옷 입하시기 위해 당하신 것이다. 여호수아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 크신 구원의 작은 예표일 뿐이다.
교훈: 사탄의 고소에도 불구하고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정결케 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정결케 하시며 의롭게 여기시는 분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사탄은 어떤 죄목으로 그대를 고소하며, 주님은 어떻게 그대를 변호하실까요?
우리는 부끄러운 죄를 감추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탄에게는 가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죄를 짓는 순간 하나님과 사탄이 그 사실을 목격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특권을 누리며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입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지불한 속죄의 피를 제시하면서 우리가 자백한 죄가 용서되었으므로 의롭다고 선언하실 것입니다.
| 적용 |
어떻게 그대는 용서받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살 수 있을까요?
영감의 교훈
백성을 위한 중재- “대제사장은 사탄의 참소에서 자기 자신이나 그 백성을 방어할 수 없었다. 그는 이스라엘이 죄가 없다고 주장하지 아니한다. 그가 그들의 대표자로 백성의 죄악들을 상징하는 더러운 옷을 입고 그 천사 앞에 서서 그들의 죄를 자복한다. 그리고 그는 그들의 회개와 겸비를 지적하면서 죄를 용서하시는 구주의 자비에 의지한다. 믿음으로 그는 하나님의 약속들을 주장한다”(선지자와 왕, 583~584).
기도
주님, 우리는 부끄러운 지도자이며, 부끄러운 백성들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합니다. 우리를 사하시고 정결케 하시옵소서. 사탄의 고소로 주님을 난처하게 만들지 않도록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해 주옵소서.
넷째날(수)
6월 12일
인간의 힘으로 안 됨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
4:6).
교사강해 4)
BC538년 바사왕 고레스는 바벨론을 정복한 후 조서를 내렸다. ‘이스라엘 백성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라’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해방을 받아 성전건축의 사명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BC536년 예루살렘 성전 기공을 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을 비롯해서 주변 민족들의 방해로 16년간 성전공사가 중단되었다. BC522년 성전공사를 다시 시작한다. 그러나 또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이 있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스가랴 선지자를 보내서 성전재건의 총 책임자인 총독 스룹바벨을 격려하기 위해 주신 말씀이다. “이는”이 성전건축은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슥 4:7절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고 하셨다. 스룹바벨 앞에는 큰 산이 있었다. BC522년 16년간 중단되었던 성전공사를 다시 시작했으나 그러나 주변원수들의 방해가 심했다. 성전공사를 또 중단할 수밖에 없는 위기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 성령으로 충만한 스룹바벨 앞에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이 태산과 같다고 할지라도 무너져 평지가 되리라고 했다. 9절 ‘스룹바벨의 손이 이 성전의 기초를 놓았은즉 그의 손이 또한 그 일을 마치리라’ 원수의 방해가 아무리 심하고 태산 같은 장애물이 있어도 스룹바벨이 마침내 성전 공사를 성공하리라는 말씀이다.
스가랴 4장을 읽어 보라. 여기서 백성들에게 주는 소망은 무엇인가? 스가랴는 이상 속에서 한 등잔대를 보았는데 그것은 광야의 성소 안에 있었던 등잔대를 연상케 하였다. 그것은 두 감람나무로부터 기름을 공급받고 있었고(출 25:31~40 참고) 기름통 역할을 하는 큰 그릇 주위를 일곱 등잔이 빙 두르고 있었다.
충분한 기름을 공급하는 이 그릇은 성령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충만한 능력을 상징한다. 일곱 등잔은 모든 어둠을 물리치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임재의 상징으로 풍부한 빛을 비추었다. 인간 대리자 없이 감람유가 나무로부터 등대 위 그릇으로 직접 공급된 것처럼, 하나님에게 나오는 능력은 항구적이고 충분하며 인간 대리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선지자가 본 계시는 예루살렘 성전이 조만간 중건될 것이라는 의미였다. 인간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영께서 사업의 완성을 보증하신다. 이 대담한 기별은 건축자들이 ‘산’처럼 커 보이는 장애를 맞이한 상태에서 주어졌다(7절).
선지자는 등대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두 감람나무가 유다의 두 지도자,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이라고 확신한다. 세속적으로 표현하자면 스룹바벨의 지위는 그의 조상 다윗과 솔로몬의 왕권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그 건축자들의 노력과 재원은 형편없었다. 그러나 군대가 많다고 왕이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며 힘이 세다고 용사가 목숨을 지키는 것은 아니다(시 33:16).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다른 것보다 모든 예식을 지도하시는 성령이 계셔야만 한다. 이것이 선지자가 하나님께 들은 기별이다.
부가적용)
스가랴 4장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결정적 회복을 미리 묘사하며 그들에게 희망을 전하도록 하나님께서 예언자 스가랴에게 단 하룻밤 동안에 잇달아 보여주신 여덟 가지 환상 중 다섯 번째의 것에 관한 서술의 일부이다. 스가랴가 다섯 째 환상 속에서 본 것은 순금 등잔대와 두 감람나무였다. 슥 4:2절에는 먼저 이 순금등잔대의 모양이 묘사되어 있다. "... 순금등잔대가 있는데 그 위에는 기름그릇이 있고 또 그 기름그릇 위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기름그릇 위에 있는 등잔을 위하여 일곱 관이 있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일곱은 완전을 상징하는 숫자이다. 4:10절 하반절에 보면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셨다고 했다. 그렇다면 일곱 개의 등잔이 있는 이 순금등잔대는 다름 아닌 온 세상 모든 것을 보고 살피시는 하나님 자신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4:3절에서는 등잔대의 좌우 곁에 두 감람나무가 서있었는데 그 두 감람나무의 뜻은 밑의 14절에서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이라고 해석되어졌다. 4:12절의 "금기름을 흘리는 두 금관 옆에 있는 이 감람나무 두 가지"라는 말은 그 두 감람나무가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두 사람을 가리키는 것임을 뒷받침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임금과 대제사장만이 기름부음을 받음으로써 공직에 취임한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이 환상은 정치적인 지도자 스룹바벨과 영적, 신앙적 지도자 여호수아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학개와 스가랴 두 예언자의 효과적인 도움을 받은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이스라엘백성들을 이끌며 이 예루살렘성전재건을 완성한 사실은 에스라 5장과 6장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슥 4:6절에서 읽는 대로 하나님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셨다는 말씀, 즉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하는 말씀이다. 여기서 "힘"이란 무엇이며 "능력"이란 무엇인가? 어떤 학자에 따르면 전자는 군사력 또는 전사의 용감성을 뜻하며, 후자는 신체적 힘이나 도덕적 용기 때로는 폭력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전자는 군사력이나 경제력을 뜻하는 단어이고, 후자는 노동력을 의미하는 말이며, 따라서 "힘"은 총독 스룹바벨의 정치적 지도력을 시사하는 것이고, "능력"은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노력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말들은 뒤따르는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라는 말씀과 함께 예루살렘성전 재건의 완성, 그리고 이스라엘 공동체의 회복과 메시아왕국이 이루어지는 것이 인간적인 역량과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그가 주시는 영적 능력에 의해서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말씀이라는 데에는 아무런 이의가 없다.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즉 그 어떤 위대한 지도자라 할지라도 그의 인간의 힘을 신뢰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함을 가르치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교훈: 스가랴가 본 일곱 등잔의 이상은 하나님의 일이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그분의 영과 능력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하나님의 일을 자신의 지혜와 힘으로 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이 예언서에서 그리스도인이 기억해야 할 중요한 교훈은 이렇다. 하나님은 어려운 사명을 감당하도록 우리를 부르시지만, 그분의 영의 사역을 통해서 목적을 이루신다(빌 2:13, 4:13). 하나님은 그 당시에 그렇게 하신 것처럼 오늘날도 성령을 통하여 우리가 그분의 사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능력을 베푸신다. 그러므로 주의 사업은 인간의 능력이나 힘이 아니라 자신을 도구로 드리는 자들을 통해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이다.
| 적용 |
지금 인간의 수단과 방법을 내려놓고 오직 주의 영으로 해야 일은 무엇일까요?
영감의 교훈
많은 일이 하늘에서 이루어짐- “영혼들이 회개함에 있어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일들이 하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는 하늘의 사자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일해야 한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통하여 감동되지 아니하면 그들은 결코 감동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약속을 구하며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해야 한다. ‘힘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능으로 되지 아니하며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교회증언 6권, 50).
기도
아버지, 우리가 부흥과 개혁을 외치며 많은 방법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서 나온 것은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오직 주의 영이 임하시기를 겸손하게 간구하며 우리를 드립니다.
다섯째날(목)
6월 13일
금식을 넘어서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슥 7:5~6).
교사강해 5)
스가랴 7장 5절에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라고 했다. 금식의 목적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자기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것에 대하여 일침을 놓은 것이다. 금식도 사실은 주님을 위해서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 뒤 6절에서는 “너희의 먹으며 마심이 전혀 자기를 위하여 먹으며 자기를 위하여 마심이 아니냐”라고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금식을 자기 목적 달성을 위해서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7절에서는 “여호와가 이전 선지자로 외친 말을 너희가 청종할 것이 아니냐. 그때에는 예루살렘과 사면읍에 백성이 거하여 형통하였고 남방과 평원에도 사람이 거하였었느니라”고 했다. 무엇보다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말씀을 청종하는 것이 금식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스가랴가 사역을 시작한 지 제삼 년에 예루살렘의 제사장과 선지자에게 어떤 문제를 묻기 위해 벧엘에서 온 자들이 있었다(슥 7:1~3 참고). 유대 민족은 바벨론 포로로 있었을 때, 성전 파괴를 애도하기 위해 제오 월 동안 금식하였었다(왕하 25:8~9). 이 관습은 제사 월, 칠 월, 시월에 행하였던 금식에 추가된 것이었다(슥 8:19). 제사 월에 그들은 예루살렘 성벽 파괴를 기억하였다(렘 39:2). 제칠 월에 있는 속죄일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명하신 유일한 금식일이다(레 16장 참고). 마지막으로 시월에는 예루살렘 포위를 애도하였다(렘 39:1). 포로기는 끝났고, 성전은 거의 중건되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제오 월에 여전히 금식할 필요가 있는지 궁금했다.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답을 읽어 보라(슥 7:8~14).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방식으로 적용될 수 있는가?
스가랴에게 주신 하나님의 답은 이중적 의미가 있다. 첫째, 하나님의 백성들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과거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여호와는 조상들이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지속적인 반역 때문에 그들은 포로로 끌려가는 징계를 받았다. 따라서 백성들은 과거의 잘못으로부터 교훈을 배워야 했다. 둘째로 여호와께서는 백성들의 굶주림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금식하며 하나님 앞에 겸비할 때, 그들의 행위에 회개와 낮춤의 정신이 있어야 했다. 자신을 동정하기 위하여 금식하는 것은 시간과 노력의 낭비이다. 금식은 무엇보다 자신을 버리고 타인을 위해 봉사하기 위한 자아의 죽음을 상징해야 한다. “참된 금식과 기도의 정신은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하나님께 내어 맡기는 것이다”(식생활과 음식물에 관한 권면, 189).
부가적용)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이제는 해방을 받아 예루살렘에 돌아왔으니 금식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했던 것이다. 이들은 바벨론 포로 70년 동안 많은 금식기도를 드렸다. 예루살렘의 함락과 성전의 잿더미가 된 것을 안타까워하며 금식한 것이다. 이에 하나님의 답변은 너희가 예루살렘 함락 전에 선지자들의 말에 순종하였더라면 금식할 필요도 없고 예루살렘도 안전하였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교훈: 포로 이후의 백성들은 자기를 동정하기 위한 금식이 아니라 과거를 회개하고 자아를 희생하여 봉사하는 정신을 상징하는 금식을 해야 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어떤 마음으로 금식합니까?
많은 사람이 건강과 다이어트를 위하여 절식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기 위한 금식은 보기 드뭅니다. 진정한 금식은 육체적 필요보다 영적 필요를 앞세웁니다. 그것은 때로 음식을 거절할 뿐 아니라 TV나 인터넷과 같은 미디어와의 단절을 포함하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님께 마음을 집중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더욱이 참된 금식은 한시적인 절제를 넘어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이타적인 신앙으로 발전합니다.
| 적용 |
그대가 현재 금식하는 자세로 하나님께 마음을 드려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참된 금식- “참된 금식은 단순히 형식적인 의식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으며’,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사 58:6, 10) 하는 것이라고 묘사한다. …참헌신의 정신은 쓸데없이 슬퍼하는 일에나 단순히 육체를 괴롭히며 많은 재물을 바치는 일 가운데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자원하는 봉사에 자신을 바치는 가운데 나타 난다”(시대의 소망, 278).
기도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아버지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 금식하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알게 해 주시고, 주님처럼 이기심과 욕망을 버리고 남을 위해 살 수 있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여섯째날(금)
6월 14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사탄은 하나님께 용서와 은혜를 구하는 자들은 그것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죄악을 제시하여 낙담시키려 한다. 사탄은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대적하여 끊임없이 고소할 기회를 찾고 있다. 사탄은 그들의 최선의, 최고의 받으실 만한 봉사까지라도 불순하게 보이도록 하려고 노력한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교활하고 잔인한 계교로써 사탄은 그들을 정죄하려고 노력한다.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는 원수의 비난을 막을 수 없다. 인간은 죄로 물든 옷을 입은 채 자기의 죄를 자복하며 하나님 앞에 선다. 그러나 우리의 대변자 예수께서는 회개와 믿음으로 자기의 영혼을 지켜 주시도록 당신께 맡기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열렬히 탄원하신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변호하시고 갈보리의 힘 있는 논증으로 그들의 참소자를 이기신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순종하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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