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과 중요한 일을 먼저 하라!(학개)[교사들을위한강해식과정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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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과 중요한 일을 먼저 하라!(학개)
6월 8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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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절: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학 2:8).
연구범위: 학 1장, 요 2:19, 스 3:1~6, 마 1:23, 12:6, 학 2장, 눅 24:13~27.
중심 사상: 학개의 기별은 단순하다. 우리의 우선순위는 어떠한가? 왜 그것을 바르게 세우는 일이 중요한가?
도입)
어느 큰 저택이 불타고 있었다. 그 집 여주인은 겁에 질려 뛰쳐나왔다가 다시 불 속으로 용감하게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귀중품이 들어있는 보석 상자를 안고 나오면서 “참으로 다행이다.”고 외쳤다. 그런데 얼마 뒤 사람들이 “저기 보세요. 아이들이 창가에 있어요.”라고 외치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들은 그녀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내 아이들! 내 아이들!”하고 소리쳤지만 이미 불은 아이들의 생명을 삼켜버렸다. 그 여인은 물질에만 눈이 어두워 자녀들의 귀중한 생명을 건지지 못한 것이다. 우선순위가 잘못된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던 사람들의 한결같은 특징이 있다. 우선순위가 하나님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라면 목숨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혼란스러운 인생을 사는 사람들의 문제점의 하나는 우선순위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이다. 신학자 존 네이스빗은 “우선순위를 잘못 선택하면 삶의 목표에서 멀어진다.”고 말했다. 또 찰스 휴멜은 “우리들이 삶에서 만나는 온갖 딜레마들은 시간과 물질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일의 우선순위를 잘못 선택함에서 온다.”고 주장했다. 주님은 우리에게 삶의 우선순위를 가르쳐주고 있다. 먼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 하나님 우선,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라고 말씀하신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떤 것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까?
서론)
삶의 우선순위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어떤 이는 “한 사람이 자신의 시간과 물질을 어디에 사용하는지 살펴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이 뜻은 그 사람이 시간과 물질을 사용한 내역을 추적하면, 그 사람이 인생에서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는지 그 가치를 알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자신의 우선순위를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지금까지 지내온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우리가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무엇을 위해 자신의 물질과 땀과 시간을 투자했는지 살펴보면, 우리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그 정체를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우선순위는 외침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난 열매이다. 우선순위는 마음의 생각이 아니라, 그 마음의 가치가 매일의 삶에서 연속적으로 나타난 열매이다.
학개서는 성경에서 가장 짧은 책 가운데 하나로서 유다 국가가 위기에 처해 있던 시절에 기록되었다. 바벨론에 끌려간 포로들이 귀환한 지 20년이 흘렀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귀환한 이유를 잊은 듯했다. 그들은 폐허 속에 놓인 하나님의 성전을 방치한 채, 자신들의 집을 짓는 데 힘을 쏟았다.
그래서 선지자는 귀환 포로들에게 그들의 상황을 신중하게 고려하도록 촉구하였다. 그의 기별은 단순하면서도 논리적이었다. 백성들은 열심히 일했지만 소득이 충분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우선순위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었다. 그들은 모든 일 가운데 하나님을 우선시할 필요가 있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그때처럼 지금도 생활에 얽매이다 보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우리의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쉬 잊게 된다.
결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보증하시며, 우리에게 복 주시려는 소망을 피력하셨습니다. 시대의 소망이 되신 분께서는 다시 오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환난의 시기에도 그분의 인도와 보호를 신뢰해야 합니다.
첫째날(일) 열심히 심지만 적게 거둠
6월 2일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학 1:4).
교사강해 1)
포로시대에 귀환한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먼저 자신들의 안정된 삶을 찾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다. 일단 자신의 삶이 중요하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사람에게 생태적인 것 말고 중요한 것은 없다. 그들이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 일을 늦춘 이유는 그들의 삶이 성전을 건축하기에는 어려운 형편이라고 했다. 지금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때가 아니라고 한 것이다. 지금은 자신들의 형편이 어려워 전을 건축할 때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게 말씀하셨다. 저들이 황폐한 삶을 살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성전이 황폐하여 저들의 삶이 황폐한 것으로 말씀하셨다. 판벽한 집이라는 말은 완공된 집이라는 의미이다. 판을 배고 지붕을 씌운 집이라는 의미이다. 그 집이 고급은 아니지만 성전은 지붕이 없는데 너희는 완전한 집에 있다는 것을 책망하시는 말이다. 하나님의 전은 폐허가 되어있는데 그들은 판벽한 집에 거하는 그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대하셨겠는가? 1:6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수확이 적으며, 배부르지 못하며, 흡족하지 못하며, 따뜻하지 못하며,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과 같다고 하셨다. 지금 그들의 형편이 어려운 것은 하나님의 전이 폐허된 채로 놓아두고 자신들은 편벽한 집에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학 1:1~11을 읽어 보라.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런 일이 벌어진 이유는 무엇인가? 그 같은 원리가 오늘날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우리가 동일한 일을 저지른다면 그것은 얼마나 큰 잘못이겠는가?
“일 년 이상이나 성전은 돌보지 아니하였고 거의 포기 상태로 있었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집에 거하면서 현세의 번영을 얻고자 노력하였으나 그들의 형편은 비참하였다. 그들은 일하는 것만큼 번영하지 못했다. 모든 자연의 요소들은 저희를 해하려고 음모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이 성전을 황폐된 채로 버려 둔 까닭에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재산에 황폐케 하는 가뭄을 보내셨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당신의 은총의 표로 들과 과원의 실과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내려 주셨었으나 그들이 이 풍부한 선물들을 매우 이기적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축복들은 제거되었다”(선지자와 왕, 573).
학개는 백성들에게 그들의 현 상황을 직시하게 했다. 노동의 빈곤한 결실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긴 결과 이르러온 저주였다(레 26:16, 20). 그들이 먼저 해야 할 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이상, 풍요는 없을 것이었다.
학개는 성전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백성들이 성전 재건을 속히 마치기를 바랐다. 성전에는 관심이 없고 안락만을 추구하는 백성들의 안일함과 선지자의 열망은 서로 어긋났다. 학개의 최대 관심사는 성전이었던 반면 백성들의 관심은 그들의 집이었다.
여호와께서는 학개를 통해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하나님의 사업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셨다. 하나님의 집이 무너져 있는 이상 그분이 영광을 받으실 수는 없었다.
부가적용)
BC 538년 고레스 왕 때에 스룹바벨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했다. 이들은 파괴된 솔로몬 성전을 다시 짓기 시작했지만 곧 중단했다. 어려움으로 인해서 잠깐 중단한다는 것이 그만, 16년이나 흐르고 말았다. 결국 하나님은 다리오 왕 2년(BC 520년)에 선지자 학개를 보내 성전을 다시 짓도록 명령하신다(1절). 그들은 호화로운 장식으로 치장한 판벽한 저택에 거하면서도 하나님의 성전은 아직 건축할 시기가 아니라면서 미뤄 두었다(2-3절). 하나님은 그들에게 황폐한 하나님의 성전은 방치해 놓으면서 자신은 호화로운 집에 거하는 것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행위인지 돌이켜 보라고 하신다. 궁색한 변명으로 하나님을 속이려 했던 유다 백성은 열심히 일해도 소득이 적을 것이고, 먹고 마셔도 만족함이 없을 것이고, 재물을 모으려 해도 모으지 못하게 될 것이라 하신다(4-6절).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리가 다른 것으로 대치될 때 존재론적 갈증은 결코 만족되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살 궁리에 빠져 하나님의 전을 먼저 세워야 할 저들의 사명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교훈: 학개는 귀환 포로들에게 삶의 우선순위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였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업에 먼저 관심을 기울이라고 촉구하였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가시적이고 상징적인 하나님의 집에 대하여 어떤 책임감을 느낍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예루살렘 성전은 타락한 인류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상징이었다. 그것은 전능한 주께서 천지의 하나님이심을 온 세상으로 기억나게 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상징하는 성전과 그것이 담고 있는 구원의 계획이 무너져 있다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참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겠는가?(요 2:19, 마 26:61 참고) 성전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심각한 영적문제를 보여 준다. 즉 그들은 여호와의 남은 백성이 완수해야 하는 거룩한 사명감을 상실하였다.
| 적용 |
어떻게 하면 교회 건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요?
영감의 교훈
하나님의 품위에 맞는 성전- “하나님을 경배하는 집은 그분의 품성과 위엄에 걸맞는 것이어야 한다. 교인들이 하나님의 사업보다 그들 자신의 관심사를 더 중요시하기 때문에 언제나 작은 규모로 머물러 있게 될 작은 교회들이 있다. 그들이 자신들을 위하여서는 크고 안락한 집들을 소유하여 그것들을 끊임없이 개량해 가면서도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가 거하시는 하나님의 예배를 위해서는 가장 적합하지 않은 장소를 소유하는 데 만족한다”(교회증언 5권, 269).
기도
아버지, 우리의 낡고 초라한 교회가 부끄럽습니다. 세상에 빛이 되지 못하여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수치를 모르고 지나온 우리 자신이 더욱 부끄럽습니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아버지의 위엄과 성품을 반사하는 교회를 지을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둘째날(월) 가장 큰 하나님의 약속
6월 3일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희와 함께하노라 하니라 여호와께서…모든 백성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들이 와서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 공사를 하였으니”(학1:13~14).
교사강해 2)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비롯한 모든 백성들은 성전재건을 촉구하는 학개의 선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청종했다(12절). 그런 그들에게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라는 짧지만 강력한 하나님의 격려가 임한다(13절). 학개 선지자가 첫 메시지를 전하고 23일이 지난 6월 24일에 성전재건공사가 재개된다(15절). 일꾼들을 모집하고 자재를 확보하는 등의 기본적으로 필요한 준비기간을 감안한다면, 백성들은 최단기간에 신속하게 순종한 것이다. 또한 그 무렵이 서둘러서 추수를 끝내야 하는, 일 년 중 가장 바쁜 때임을 고려한다면 그들의 순종은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16년이나 미뤄졌던 일이 이처럼 급속하게 진행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은 학개 선지자의 감동적인 설교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백성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셨기 때문이었다(14절). 주님의 일은 인간적인 설득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감동이 바탕이 되어야 이뤄진다.
학 1:12~14을 읽어 보라. 목적의 일체감에 주목하라. 그들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그와 같은 일체감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때 남은 백성과 지도자들은 선지자의 말을 듣고 즉각적으로 순종하였다. 그들은 준비를 갖추고 재료를 모아 삼 주 후에 성전 건축을 재개하였고, 그다음 한주 만에 제단을 쌓고 희생 제사를 회복하였다(스 3:1~6). 그리고 5년 만에 성전재건을 끝냈다.
물질적인 건물이 하나님의 나라일 수는 없지만, 학개서는 하나님이 종종 영적 목적을 위하여 건물과 같은 물질적 사물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기별의 즉각적인 순종을 성공의 척도로 삼는다면 학개는 가장 성공적인 선지자일 것이다. 그의 설교는 백성들이 행동하도록 감동을 주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도우시리라는 약속을 받고, 한 달 안에 성전 건축이 재개되었다.
학 1:12~14은 학개의 기별에 대한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반응을 알려 준다. 모든 백성이 하나님께 순종했다. 왜냐하면 그분이 학개를 보내셨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호와를 경외”(학 1:12)했고, 경외심을 예배로 표현했으며, 그분께 마땅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래서 학개는 하나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기별을 전할 수 있었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학 1:13). 백성들이 여호와께 순종하기로 결심하자마자 책망의 기별은 격려의 말씀으로 대체되었다. 하나님의 임재의 약속은 다른 모든 복을 포함한 약속이었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는 약속은 하나님이 선조들과 모세와 맺으셨던 언약으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그 역사가 깊다(창 26:3, 출 3:12, 민 14:9).
부가적용)
남녀 간의 사랑은 서로 감동이 있고 흥분되지 않고 이루어질 수 없다. 교인들 역시 상호간 피차에 흥분되는 마음이 있을 때 상승작용을 일으켜 성전건축에 매진할 수 있다. 서로 흥분될 때 기쁘다. 기분이 좋고 신나고 감사하며 관심을 갖게 된다. 학1:14절 말씀을 볼 때도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의 마음과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 바 모든 백성들의 마음을 흥분시키시매 그들이 와서 만군의 여호와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 역사를 하였으니”라고 기록돼 있다. 하나님의 성전이 지어지고 있다는 기쁨으로 흥분된 사람들, 성령의 감동으로 충만해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전 건축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자녀가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을 때 느끼는 흥분! 원하는 사업에 성취를 맛보았을 때 누리게 되는 흥분! 그 이상의 흥분된 심령이 있어야 하나님의 성전을 기쁨으로 건축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바쳐진 성전이라야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성전이 될 것이다.
교훈: 백성들이 성전 재건을 촉구하는 선지자의 기별을 즉각적으로 받아들이자, 하나님은 조상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며 그들과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셨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인류와 함께 계시려는 열망을 오랫동안 표현해 오셨습니다. 성소가 대표적인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심으로 언약의 백성들은 큰 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때때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백성도 그러한 사실을 알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과의 관계에서 떠나면 그들은 많은 특권과 복을 잃어야 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죄인을 가까이 하려는 그분의 간절한 열망을 보여 주기 위하여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자녀들과 영원토록 함께 거하시리라는 소망을 알려 주셨습니다.
| 적용 |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인생을 살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요?
영감의 교훈
그리스도인의 강한 조력자- “오늘날 당신의 자녀들에게 여호와께서는 ‘굳세게 할지어다 …일할지어다 내가 너와 함께하노라’고 선언하신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주 안에 강한 조력자를 가지고 있다. 여호와의 도우시는 길을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결코 저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선지자와 왕, 576).
기도
우리가 믿고 전진하면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아버지, 우리가 이 약속을 잊지 않도록 도와주옵소서. 우리가 많은 제목으로 기도를 드리지만,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만큼 만족을 주는 것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셋째날(화)
6월 4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학 2:5).
교사강해 3)
우리가 일을 하다가 두려워 하거나 낙망할 때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힘을 내어야 할 이유를 보게 된다. 첫째는 3절에 나와 있는 대로 지금 재건하는 성전이 이전 것보다 더 영화롭게 된다는 것이고, 둘째는 4절에 나와 있는 것같이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이 받은 하나님의 언약은 그 민족이 영원토록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변치 않는다. 하나님께서 신실하시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 머물러 계시겠다고 하고 두려워 하지 말라고 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다. 게다가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과 우리의 언약의 중심은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약속이다.(출6:7, 레26:12, 렘7:23, 계21:22) 하나님을 향해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긍정적인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변함없으며 하나님의 영이 변함없이 우리 가운데 머물러 있다는 허락이다.
학 2:1~5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일어난 큰 부흥과 발전을 소개한다. 성전 재건이 시작된 지 한 달 후에 하나님은 충분한 자원도 없이 선지자의 지도를 받아 성전 재건을 결심하였던 남은 자손들에게 용기의 말씀을 전하셨다. 학개는 노인들에게 포로 이전의 성전과 비교하여 현재 성전의 모습이 어떤지 물어보았다. 분명현재의 모습이 이전의 영광에 미치지 못했다. 백성들은 같은 자리에 세워졌었던 솔로몬 성전의 영광을 재현하지 못한다는 실망감에 빠질 수 있었다.
그러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이 그들과 함께 계시니 계속 일하라고 격려하였다. 그는 남은 백성의 공동체를 향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시니 담대하게 일하도록 당부하였다. 학개의 말은 마치 모세 사후에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셨던 말씀과 같았다(수 1:5~9). 이스라엘의 힘이 약하고 부족할수록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필요성은 더욱 커져 갔다.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을 이전 영광보다 크게 하실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런데 그것은 성전보다 더 크신 이가 오시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었다(마 12:6 참고).
성령의 임재는 이스라엘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연속성을 확인해 준다. 모세와 장로들을 지도하고, 선지자들을 파송하여 영감적인 기별을 전하게 했던 하나님의 영이 남은 백성들 가운데 있었다.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경건한 반응은 영적개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성령의 임재는 그들을 새롭게 하고,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도록 했을 뿐 아니라 풍성한 복을 보증하였다. 선지자는 공동체의 일원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라고 용기를 북돋웠다.
부가적용)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두려움을 경험하는 되는데, 이 두려움은 엄청난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자신을 낙심하게 만들고 불안하게 만든다. 용기를 잃고 당황하게 만들기도 한다. 무기력하고 무능력하게 만들어서 재능과 기술을 발휘하지 못하게 한다. 창의력 또한 망쳐버리기도 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갖도록 해서 잘못된 결정을 내리게 하기도 한다. 육체와 심령에 질병도 가져다 준다. 심지어 믿음도 무력화 시킨다. 세상 사람들은 두려움에 쌓여 있을 때에 ‘좋은 것을 생각하라’ ‘기분 전환을 해라’ ‘활짝 웃어라’ ‘잊어버려라’ ‘환경을 바꾸어봐라’ 라는 등의 처방전을 내놓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르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학 2:5)라고 말이다. 하나님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를 도와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두려움을 이기도록 힘과 능력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낭비하는 인생으로 살지 않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성경에는 두려움에서 도와주시겠다고 얼마나 많이 약속하셨는지 모른다.
교훈: 믿음을 가지고 사명을 성취하기로 결심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그분의 영이 함께하실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 말라고 격려하셨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어떻게 삶의 의미와 목적을 깨달았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학개는 모진 삶을 겪고, 성취되지 않은 소망에 실망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그는 그들의 관심을 신실하신 하나님께 돌렸다. 그분은 새로운 공동체가 그분의 나라에서 책임 있는 시민들이 되기를 기대하셨다. 그들은 꾸준히 착한 일을 함으로써 삶의 참의미와 목적을 깨달아야 했다.
| 적용 |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의미와 목적을 간단하게 기록해 보십시오.
영감의 교훈
두려워 말라- “하나님의 사업의 전진에 장애물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 말라. 만왕의 왕, 언약을 지키시는 우리 하나님의 전능에는 부드러운 목자의 온유와 보호가 결합되어 있다. 아무것도 그분의 길을 방해할 수 없다. 그분의 능력은 절대적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당신의 백성들에 대한 그분의 약속을 분명히 성취시켜 주신다는 보증이 된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사업의 전진을 막는 모든 방해물을 제거하실 수 있다”(교회증언 8권, 10).
기도
예수님은 목적도 방향도 없는 제게 삶의 이유를 알려 주셨습니다. 하마터면 짧은 인생 가치 없이 살 뻔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영원한 가치와 목적을 알게 해 주셨으니 주와 주의 나라를 위해 살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넷째날(수)
6월 5일
만국의 소망
“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학 2:7).
교사강해 4)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은 백향목과 잣나무를 수입하여 지었고 온통 금으로 장식한 화려한 집이었다. 반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건축하는 성전은 산에서 가져온 나무가 재료였고 금으로 장식하지도 못하였다. 때문에 예전의 화려한 성전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초라한 성전을 지으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한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삼하 7:2절에 보면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라고 말한다. 자신은 백향목으로 지은 궁에 살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궤는 볼품없는 휘장으로 가려놓은 곳에 모셔둔 것을 죄송스럽게 생각하는 다윗의 말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궤는 자신이 거하는 궁보다 더 크고 좋은 집에 모시는 것이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사람이 갖고 있는 기본적 생각이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자기는 좋은 집에 살면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집은 작고 허름한 것을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불신앙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윗의 그러한 생각을 책망하셨음을 생각해야 한다. 즉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은 크고 화려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솔로몬의 화려한 성전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산에서 가져온 볼품없는 나무로 짓고 있는 성전이 눈에 들어오지는 않을 것이다. 초라하게 지어지고 있는 성전을 보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다면서 자책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선지자는 이런 말을 한다. “너희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 중에서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3절) 이전 성전의 영광을 본 사람의 눈에는 지금의 성전은 그야말로 보잘 것 없이 보일 것이라는 뜻이다. 어쩌면 초라한 성전을 보면서 ‘이런 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실까?’라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4절을 보면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말씀하신다. 다시 말해서 성전의 초라함이나 화려함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학 2:6~9을 읽어 보라. 여기에 어떤 약속이 있는가? 그 약속의 성취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나님은 학개를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가 성전에 가득하게 될 여호와의 날에 만국이 크게 흔들릴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선지자는 당대의 사람들이 현재의 역경과 빈곤을 넘어, 성전이 가리키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바라보기를 기대했다.
예루살렘 성전에 영광이 있어야 할 주된 이유는 하나님의 임재의 가치를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위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이 덜 화려한 집에 기꺼이 머무시자, 그곳에 오히려 영광이 임했다. 백성들은 성전 재건축에 들 재정을 과도하게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세상의 모든 보화가 새로운 성전에 거하기로 약속하신 하나님의 것이다. 여호와께서 친히 그 성전에 영광을 입히실 분이었다.
“백성들이 그들의 몫을 다하고자 노력하고 마음과 생활에 하나님의 은혜가 새롭게 되기를 구했을 때에, 그들의 신앙이 보상을 받겠고 저희가 벽을 세우고 있는 성전의 미래의 영광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보증의 기별이 학개와 스가랴를 통하여 그들에게 연달아 주어졌다. 기한이 차면 바로 이 건물 안에 인류의 스승이요, 구주요, 만국의 소망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것이다”(선지자와 왕,577).
하나님은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더욱 클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더 큰 영광이란 다른 종류의 영광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성전이 육체로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는 영광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진실로 그리스도의 임재는 이 새 성전의 영광을 솔로몬 성전의 영광보다 더 눈부시게 할 것이었다.
부가적용)
하나님께서는 외형적으로 드러난 것과는 상관없이 자기 백성에게 함께 하신다. 그런데도 우리는 외형적인 것에 매어 있을 때가 있다. 예배당은 크고 좋은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착각일 뿐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성전의 외형적인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나타나신다. 그 영광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선지자는 이렇게 말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6-8절) 하나님께서 장차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와 모든 나라를 진동시키는 일을 하실 것인데 그 일은 모든 나라의 보배가 임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나라의 보배가 임하게 되면 보잘것없는 초라한 성전은 영광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성전의 영광은 크고 화려한 것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모든 나라의 참된 보배 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성전은 이 보배이신 예수님이 오심으로 진정한 영광이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신자의 영광은 모든 나라의 보배로 오신 그리스도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외형과는 상관없이 우리의 심령에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그것이 무한한 영광이 되는 것이다. 9절을 보면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말합니다. 성전의 나중 영광은 뭐고 이전 영광은 무엇일까? 이전 영광은 솔로몬이 건축한 화려한 성전을 의미한다. 그리고 나중 영광은 보배로 오신 주께서 성전에 함께 하심으로 채워진 영광이다. 그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더 크다고 한다.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는 그 영광이 외형적인 화려함으로 인한 가시적인 영광보다 더 크다는 것이다. 즉 나중 영광이 참된 영광이라는 뜻이다.
교훈: 그들이 재건하는 성전은 비록 솔로몬 성전에 비하면 초라했지만, 이 성전에 오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은 세상에 큰 영광을 보여 주실 계획이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오늘 그대의 삶에 영광의 임재를 영접하였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도록 모세를 부르기 위해 하나님이 임하신 곳은 광야의 볼품 없는 떨기나무였습니다. 예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사람이 되어 임하신 곳은 베들레헴의 한 마구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모시기 위해 삶을 정결하게 준비해야겠지만, 하나님은 상한 심령에도 기꺼이 임하십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 34:18).
| 적용 |
그대는 오늘 어떤 마음과 자세로 주님을 영접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하나님의 성전인 마음- “죄로 말미암아 인류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기를 그쳤다. 사람의 마음은 죄악으로 어두워지고 더러워져서 신령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더 이상 드러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쓰시고 사람이 되심으로 하늘의 목적은 성취되었다. 하나님이 인류 안에 거하시고 또한 구원하는 은혜를 통하여 사람의 마음은 다시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다”(시대의 소망, 161).
기도
주님, 이 낮고 천한 마음에 감히 주님을 초청합니다. 주께서 제 삶의 소망이 되어 주시옵소서. 제 안에 주의 영을 보내 주셔서 제 삶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영광의 빛을 나타낼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다섯째날(목) 여호와의 인장 반지
6월 6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날에 내가 너를 세우고 너를 인장으로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니라”(학 2:23).
교사강해 5)
하나님께서는 스룹바벨을 특별히 선택하시어 그로 하여금 당신의 집 곧 성전을 재건토록 명하셨다. 한편 하나님께서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스룹바벨의 주도하에 무너진 성전을 재건토록 하게 하신 것은 영적으로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즉 스룹바벨은 메시야 예수를 예표하는 인물로, 결국 성전 곧 하나님의 집을 완성하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심을 명확히 보여 주기 위함이다.(요2:18-21). 스룹바벨은 하나님의 성전 재건이라는 막중한 사명을 맡은 인물이었다. 바벨론에 포로 되었던 그가 하나님에게 선택되어 하나님의 종으로 다시 성전을 재건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다윗의 후손이요 하나님의 인장반지로 인정받은 사람이다. 스룹바벨은 바로 인간의 무너져 내릴 몸된 성전을 다시 복원해 내어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게 될 성령의 전인 인간의 영광의 몸을 나타내며 그리스도의 인이 찍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성전의 회복을 이룬 그리스도의 표상이므로 그를 인장으로 인정하신 것이다.
여호와께서 학개에게 주신 마지막 기별은 이전 기별을 주신 같은 날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주어졌다(학 2:22~23 참고). 그분은 심판의 날에 왕국과 나라에 멸망이 임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그러나 선지자의 말에 따르면 같은 날 여호와의 종은 하나님이 맡기신 구원의 사명을 성취할 것이다. 이 일은 재림과 그 후에 일어날 일들을 통해 궁극적으로 성취될 것이다.
그 나라의 지도자는 이스라엘 왕 다윗의 찬란한 통치와 연관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바로 다윗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스룹바벨은 여호야긴 왕의 손자로서 바벨론 유수 이후에 다윗의 왕위를 이을 적손(嫡孫)이었다. 그는 페르시아 다리오 대제 치하에서 유다의 통치자로 지냈으며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뒤에서 주도한 인물이었다. 여호수아도 대제사장으로서 성전 재건을 도운 인물이었다.
선지자는 스룹바벨이 왕실의 권위와 소유권을 증명하는 여호와의 인장 반지라고 말하였다. 왕들이 반지로 법적 문서에 도장을 찍었던 것처럼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종들이 이룬 업적을 통해 온 세상을 감동시키시려 하였다. 성전 재건에 헌신한 스룹바벨의 핵심 역할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는 학개를 통해 하나님이 위탁하신 약속을 다 실현하지는 못했다. 그럴지라도 영감을 받은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을 가리키면서 그분이 다윗과 스룹바벨의 후손으로서 성경이 약속한 메시아의 최종적 성취라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눅 24:13~27을 읽되, 특히 두 사람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말에 주목하라. 예수님은 어떤 중요한 말씀을 하셨는가? 그분의 말씀은 구약 예언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중요하며, 그것이 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과 관계가 깊은가?
부가적용)
"너로 인장으로 삼으리니"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하나님께서 그를 가장 존귀케 하신다는 의미이다. 마치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에게 반지를 끼우듯이 말이다. 그는 여기서 '하나님의 종'으로서 인정받고 있다. 고니야는 '하나님의 오른 손의 인장 반지'였으나 불순종함으로 빼어버린 바 되었다. 하지만 스룹바벨은 믿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될 것이며, 그의 가문도 메시아가 나올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래서 스룹바벨은 메시아의 양대 족보 가운데 모두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마 1:12 ; 눅 3:27). 그렇다면 하나님 오른손의 인장반지는 궁극적으로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분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시다. 왜냐하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주님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반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면 천국을 소유한자가 되는 것이다.
스룹바벨은 비록 4분의 1로 축소된 규모이지만 BC 966년 조상 솔로몬이 처음 지었던 예루살렘 성전을 450년 만에 재건하는 감격을 맛보았던 정치적 지도자였다. 그 때의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 하나님께서는 학개와 스가랴 등 선지자들을 통하여 스룹바벨의 후손이 말세에 택함을 받아(학2:20-23) 하나님의 전을 이 세상에 다시 세울 것임을 선포하고 계신다(슥4:6-10). 그것은 스룹바벨의 가계에서 메시아가 나타나실 것이며(마1:13-16) 그분이 진정한 하나님의 성전을 회복하실 것이라는 뜻인 것인데, 이는 우리의 무너질 성전, 썩어질 성전인 이 몸으로 썩지 아니할, 멸망하지 아니할 영원한 성전인 우리의 신령한 몸, 영광의 몸을 세우실 예수 그리스도, 즉 무너진 솔로몬의 성전을 대신해 지은 스룹바벨은 바로 우리의 인장 반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표상하고 있는 것이다.
교훈: 하나님은 다윗을 택하신 것처럼 스룹바벨을 택하여 성전 재건의 사명을 주도하도록 하셨고 메시아가 그의 후손으로 탄생하게 하셨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하나님의 도장 같은 삶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고, 무엇을 소유하든지 그것을 하나님의 선물로 이해하며 우리와의 대화를 통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배우게 된다면 그리고 어디를 가든지 그곳을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영역으로 여기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실현한다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도장이나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 적용 |
그대는 어떤 사역을 통해 세상에 하나님의 감동을 줄 수 있을까요?
영감의 교훈
예수님에 대한 증거-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역사의 바로 첫 장인 모세의 글에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서 당신 자신에 대한 말씀을 설명하셨다. 만일 예수께서 먼저 자기 자신을 그들에게 알게 하셨더라면 그들은 그것으로 만족했을 것이며, 따라서 그들은 기쁨에 넘쳐서 더 이상 아무것도 갈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의식과 예언을 통해서 주신 예수님에 대한 증거를 저희가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이 증거들 위에 저희 믿음을 세워야만 했다”(시대의 소망, 796~799).
기도
아버지, 저는 영적으로 가난합니다. 아버지의 뜻을 받들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 믿음의 명맥을 이어가야 한다면 부족하지만 제 삶을 드립니다. 이 믿음의 릴레이 끝에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하기 원합니다.
여섯째날(금)
6월 7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그러나 이 암흑 시대에라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없지 않았다.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가 위기를 대처하기 위하여 일어났다. 이 임명된 사자들은 감동적인 증언으로 백성들에게 그들의 고통의 원인을 보여 주었다. 현세에 번영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익을 첫째로 삼기를 게을리한 결과라고 선지자들은 선언하였다. 만일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의 전을 건축하는 일을 첫 번째 사업으로 삼아 그분에게 합당한 존겨ㅇ과 예절을 나타냈더라면 그들에게 하나님이 임재 하셨을 것이고 그분의 축복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선지자와 왕, 573~574).
“둘째 성전은 여호와의 영광의 구름으로가 아니라,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는 분,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직접 임재 하심으로 존귀하게 되었다. 나사렛 예수께서 성전 뜰에서 가르치시고 병을 고치시던 때는 참으로 “만국의 사모하는” 분께서 당신의 성전에 오신 때였다. 다름 아닌 오직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으로 둘째 성전의 영광은 첫 성전의 영광을 능가하였다”(각 시대의 대쟁투,24).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의미와 그 희생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이 우리 각자의 가치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도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을 인간에게 주신 선물로 보는 견해와 오늘날 세상에 유행하는 무신론적 진화론의 견해와는 어떤 차이점이 있습니까?
2. 이사야는 “땅을 진동시키며 열국을 놀라게” 했던 바벨론 왕에 대하여 말했습니다(사14:16~17). 이것과 학개 2장에서 여호와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진동하는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3.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종 하나님의 선지자가 선포한 기별에 불순종하였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이 보내신 기별을 그분의 백성들이 어떻게 거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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