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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과 부흥 : 우리의 가장 절실한 필요(교사들을위한강해식과정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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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과 부흥 : 우리의 가장 절실한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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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6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57분

 

연구 범위

계 3:14~21, 히 12:7~11, 마 25:1~13, 슥 3:1~5, 아 5:2~5.

 

기억절 :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

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도입)

새로운 한 기가 시작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그리고 각 나라마다, 그리고 각 교회마다, 아마도 “우리의 가장 절실한 필요”라는 제 1과의 제목처럼 부흥은 정말 우리의 삶에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기대인 것 같다. 왜 우리에겐 지속적인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가?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에 대한 확신과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매일의 감동적인 영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깨달은 사람들의 마음은 그 심령에 진동을 경험한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4:31) 르비딤에서 물을 찾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불평할 때,, 모세에게 일러 호렙산 바위를 쳐 바위가 터져 생수가 쏟아져 나온 경험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감동이 있었듯이 우리의 가슴에는 성경 말씀을 통해 얻어지는 매일의 부흥의 경험이 필요하다. “비록 새롭게 된 심령이라 할지라도 매일 말씀의 소금을 적용하지 않으면 그 아름다운 상태를 계속 유지할 수가 없다. 매일 하늘의 은혜를 공급받아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을 때 아무도 회심한 상태를 지속하지 못할 것이다.” 사건 66. OHC, 215(1897). 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토록 감동적인 구원의 경험을 가지고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기보다 또 불평하고 하나님을 슬프게 하였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중에 마지막 교회이다. ‘심판받은 백성’이라는 뜻을 가진 라오디게아는 마지막 때를 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알맞은 이름이다.

라오디게아는 터키 남서부의 한 계곡에 위치해 있다. 그 도시는 중요한 경제 수도이자 의류 산업과 교육 그리고 의료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그 시민들은 독립적이고, 자부심이 강했으며, 부유하였다.

하지만 그 도시에 필수적인 천연자원 하나가 부족하였으니 그것은 물이었다. 그래서 로마식 송수로를 통해 남쪽으로 8킬로미터 떨어진 수원에서 물을 공급받았다. 그런데 그 물이 라오디게아에 도착할 즈음에는 수온이 미지근해졌다. 예수께서는 이 상징을 사용하여 미지근한 남은 교회의 상태, 곧 자만과 안주, 냉담과 영적 무관심을 설명하셨다. 그 교회는 열정을 상실하였다. 그래서 영적 부흥이 필요하였다.

그럼에도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기별은 희망이 넘친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백성에게 사랑으로 말씀하시며 그들의 내적 필요를 채우고 깊은 영적 갈망을 소생시키라고 권하신다.

 

결론 : 우리가 예수님을 더 깊이 알고, 그분의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우도록 설득하는 성령께 반응할 때에 주님은 이런 관계를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시고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분과 더 친밀한 관계를 맺도록 이끄십니다.

 

첫째날(일) 라오디게아인들에게 주는 소망

6월 30일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 3:14~15).

 

교사강해 1)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요 5:39) 라고 예수께서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할 것을 권하고 계시다. 성경은 영생과 관련된 책이다. 성경에 대한 무관심은 영생에 관한 무관심이나 진배없다. 우리의 가슴을 부흥으로 이끌 가장 중요한 능력의 주제는 영생이다. 예수 그 자신이 이 땅에 오셔서 이 영생을 소개하시고 그 영생의 주인으로 그 자신을 지목하시고 가르치셨던 그분이 라오디게아 교회에 “우리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라고 말씀하시며 라오디게아 교회의 마비된 영적인 상태를 지적하며 다시 한 번 깨어나도록 권면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면서 그 능력을 잃어버린 가장 주된 원인은 우리가 이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땅의 안락함과 편안함에 도취될 때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하늘에 대한 소망은 약화될 것이고, 우리의 가슴에 남아있는 믿음마저 천천히 식어지게 될 것이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 자신들의 능력을 잃어버렸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은 이 땅이 아닌 하늘인데 우리가 속한 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지 못하고 이 세상에 동화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계시록 2~3장에서 예수님은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그들의 영적 상태에 맞는 칭호를 가지고 자신을 소개하신다. 그 가운데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기별에서 사용하신 칭호는 그분의 호소에 주의하는 자들을 위한 영적 갱신을 보장하는 음성으로 가득하다.

다음의 말씀을 읽어 보라(계 3:14~15, 고후 1:20, 요 3:10~11, 골 1:13~17). 예수께서는 왜 라오디게아 교회에 자신을 “아멘”이요, “충성된 증인”이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로 소개했다고 생각하는가?

계 3:14에 “근본”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는 ‘아르케’이다. 그것이 사람을 지칭할 때는 어떤 사건이나 행위를 시작한 사람이란 의미에서 ‘시작’을 뜻할 수 있다. 이 문맥에서 ‘아르케’는 모든 창조의 첫째 원인 또는 창조를 시작한 분으로서의 예수님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그분은 창조주라는 뜻이다(요 1:1~3, 엡 3:8~9).

이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우주와 지구를 창조하셨고, 말씀으로 생명을 만드신 분이다. 동일한 예수님이 라오디게아 교회에 소망을 말씀하셨다. 전능하신 창조주께서는 능히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실 수 있다. 그분은 우리 마음속에 새로운 영적 갈망을 일으키고 우리의 영적 생활을 변화시키실 수 있다.

고후 5:17과 갈 6:14~15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그대에게 개인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부가적용)

우리는 우리의 창조주 예수를 만나야 한다. 그분에 대한 참된 지식은 우리의 마음을 차갑게 놓아두지 않을 것이다. 인생이 자신의 창조주이신 참된 주인을 만나게 될 때, 그 인생은 참된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예수! 그분이 우리 삶의 변화와 새로운 부흥의 참된 주제요 제목이다. 우리는 성경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과 주제인 영생과 그 영생의 주인이신 창조주 예수 그분을 깊이 인식하고 깨닫게 될 때 우리의 가장 절실한 필요인 부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교훈 : 라오디게아 교회에 소개된 예수님의 호칭은 그분이 그들에게 필요한 새로운 영적 갈망과 변화를 일으키실 수 있는 창조주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예수님은 그대에게 어떤 영적 갈망을 일으키십니까?

나태하고 수동적인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우리의 마음 한편은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기도로써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기를 바라는 갈망이 있습니다. 또한 열성적인 믿음을 가지고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고 긍휼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을 실천하고픈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안일하고 편한 생활에 익숙한 탓에 쉽게 몸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주님의 편지는 오늘 내게 필요한 말씀입니다.

 

| 적용 |

그대의 영적 생활에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 적어 보십시오.

 

영감의 교훈

예수께서 오신 목적 - “우리는 주님 안에서 완전한 제물과 무한한 희생을 발견하게 되며 당신을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오는 모든 영혼과 가장 미천한 자들까지도 구원하실 수 있는 강하신 구세주를 발견하게 된다. 주님께서는 사랑으로써 하늘 아버지를 나타내며 인간을 하나님과 화목시키고 인간을 창조하신 당신의 형상을 따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21).|

 

기 도

아버지, 식어 버린 우리 믿음이 다시 뜨거워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넘어져 있는 신앙심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창조의 근본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둘째날(월) 사랑의 책망

7월 1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5~16).

 

교사강해 2)

우리는 운동경기에서 종종 심판이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들에게 경고의 의미로 노란카드를 내미는 모습을 본다. 경고를 받았지만 노란카드를 받은 선수는 아직 희망이 있는 것이다. 아직 그라운드 밖으로 쫓겨나지 않았기에 그 자신이 지켜야 할 룰 안에서 성실히 선수로서의 자신의 게임에 임하면 그는 여전히 그 게임의 선수의 일원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매우 엄중한 경고를 하고 계신데,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역겨운 모습을 바라보며 저들을 토하여 버리시겠다고 하나님께서 엄중 경고를 하고 계시다. 예수께서 이토록 강력한 경고를 하시는 이유는 아직 저들에게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일원으로 아직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일원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회가 있을 때 우리는 이 기회를 잘 붙잡아야 한다.

 

계 3:15~16을 주석하면서 엘렌 화잇은 이렇게 말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기별을 가장 결정적으로 적용시킬 수 있는 대상은 신앙 경험이 무미건조한 사람들, 곧 단호한 태도로 진리를 증언하지 않는 사람들이다”(화잇 주석, 계 3:14~18). 무미건조한 신앙 경험이란 생명이 없는, 즉 기독교 신앙의 껍데기는 있으나 알맹이는 없고, 외형을 갖췄으나 생명력은 부족한 신앙 경험을 말한다. 라오디게아 신자들은 이단자나 극단적 광신도들이 아니라 단지 영적으로 무관심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도덕적으로 선량한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바울의 말처럼 그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딤후 3:5)는 자들이었다. 예수님도 당시의 종교인들에 대하여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 15:8)라고 말씀하셨다.

히 12:7~11, 욥 5:17~19, 시 94:12, 잠 29:15, 17을 읽어 보라. 하나님이 백성들을 책망하셨던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그들이 멸망하도록 내버려두지 못하신다. 그분은 그들의 심령 속에 영적 불꽃을 일으키기 위해 어떤 대가도 치르실 것이다. 그분이 강력하게 책망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그만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런 마음은 회개를 호소하는 호세아서에서도 공명된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

 

부가적용)

우리는 차려놓은 음식을 먹을 때 짜지도 싱겁지도 않은 음식, 그 어떤 특징도 없는 음식을 먹을 때 참 고역스럽다. 짜지도 싱겁지도 않은 특징 없는 그런 음식을 대할 때 우리 입에서 토하여 내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것, 짜지도 않고 완전히 싱거운 것도 아닌 특징 없는 밋밋한 맛은 참기 어려운 음식이 될 수 있듯이 우리의 신앙 역시 무늬만 그리스도인 경우가 매우 많다. 몸은 교회에 와 있지만 우리의 마음은 딴 곳에 가 있는 사람들도 이 부류 중의 속한 사람들일 것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엄격한 훈계를 하는 것은 이 사안이 그만큼 엄중한 것이고 중요한 문제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직면한 저들의 영적 상태는 그만큼 크게 책망을 받을만큼 중병이었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교훈 : 하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무미건조한 신앙을 호되게 책망하셨다. 그 이유는 그만큼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의 신앙에는 생명력이 있습니까?

주의 형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약 2:17)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지적 동의는 있지만 믿음을 실천할 만큼 뜨거운 동기가 없다면 그것은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그리스도인 형제우애를 나누며, 이웃에게 봉사하고 천국 복음을 전하는 신앙은 단지 교회를 드나드는 것으로 만족하는 신앙과 분명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 적용 |

하나님이 그대에게 어떤 사랑의 책망을 하고 계실지 아래 적어 보십시오.

 

영감의 교훈

하나님께서 견책하시는 까닭 - “하나님이 사람들을 견책하시는 까닭은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을 힘입어 그들이 강하게 되고 균형이 잡힌 정신과 성품을 갖게 되기를 바라신다. 그렇게 될 때에 저들은 하나님의 양 떼에게 모본이 될 것이며 교훈과 모본으로 신자들을 천국으로 더욱 가까이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거룩한 성전을 짓게 될 것이다”(가려 뽑은 기별 1권, 48).

 

기도

아버지, 따끔한 책망도 달게 받겠습니다. 제 안에 믿음의 불꽃을 다시 일으켜 주시옵소서. 죽은 믿음이 아닌 살아있는 믿음으로 아버지께 경배하고 서로를 사랑하며 이웃을 섬길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셋째날(화) 자각과 실재

7월 2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 3:17).

 

교사강해 3)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부요한 물질적 축복은 하늘에 속한 우리의 축복의 시야를 가릴 수 있는 효과적인 것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 땅이 주는 물질적 풍요와 안락으로 인해 정말 인간의 진정한 실체에 대한 이해가 어두워졌다. 인간의 진정한 상태에 대한 무지는 결국 하나님을 떠나게 되는 가장 불행한 결과이다. 예수께서 지적하신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말씀하신 의미를 어떤 영적인 의미로만 풀어서 이해하려 해서는 안된다. 성경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는 영생의 주제이다. 이 성경이 가르치려는 이 영생의 의미를 떠나면 우리는 허울 좋은 도덕적인 이야기로 그 권면을 마치고 말 것이다. 라오디게아의 문제는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풍요로움에 빠져 인간의 진정한 실체를 바라보는 영적인 안목이 어두워졌다. 인간은 참으로 곤고하고 가련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실제적인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입고 있는 우리의 몸은 좋은 의복으로 가리고 있으나 죽을 병에 걸린 우리는 우리의 겉옷인 몸이 날마다 후패한다. 우리는 다 멸망하여 죽을 허망한 존재임을 잊고 사는 것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말과 행동에 차이가 있었다. 심지어 그들이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영적 경험과 실제 영적 경험 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었다.

계 3:17을 읽어 보라.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에 대하여 어떤 평가를 내렸는가? 반면 주께서는 그 교회에 대하여 어떤 평가를 내리셨는가? 어떻게 그들은 자신의 진정한 영적 상태에 대하여 그토록 어두웠는가?

사탄의 가장 위협적인 기만은 우리가 실제 영적 필요를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리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도 자신의 영적 가난함에 대하여 눈이 어두웠다. 모두 성경을 읽으며, 안식일을 준수하고, 십일조를 드리며 메시아의 강림을 기다리는 신자들이었는데도 말이다. 많은 이가 눈이 어두워서 주께서 소개하려 했던 영적 왕국이 어떤 모습인지 알지 못했다. 예수님은 그들을 일컬어 “맹인 된 인도자”(마 23:24)라고 불렀다. 바울도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세상 신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혼미하게 된 자들에 대하여 기록했다(고후 4:4). 그래서 예수님은 눈먼 자들의 시력을 회복시켜 주기 위해 자신이 온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눅 4:18).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분께 맡기면 그분은 우리의 잃은 영적 시력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 맹인들이 눈을 뜰 수 있게 해 주셨을 때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을 확실히 알아볼 수 있도록 마음의 눈을 여시고자 하는 그분의 소망을 나타내셨던 것이다.

마 25:1~13을 읽어 보라. 어리석은 처녀와 라오디게아 신자들 사이에 비슷한 점은 무엇인가?

 

부가적용)

성경의 이야기의 중심은 벌거벗은 인간을 다시 입히시는 이야기이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 느낀 첫 감정은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은 느낌을 가졌던 것은 저들의 몸이 신령한 몸, 즉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던 자가 낮은 몸(빌 3:21)으로 떨어지게 된 것이다. 이는 자신들이 영광의 몸(빌 3:21)과 신령한 몸을 가진 자였다가 이제 죽을 수 있는 낮은 몸이 된 것을 이름이다. 범죄 후 인간은 모두 낮은 몸, 육의 몸이 되고 말았는데 창 6:3절에서도 저들이 육체가 됨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육체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벌거벗은 상태를 말함이다. 인간의 육체는 실제로 죽고 나면 인간의 해골만 남는다. 인간의 골격을 이루는 뼈를 덮고 있는 피부라는 옷을 덧입고 있지만 아담과 하와가 과거처럼 벌거벗어도 부끄럽지 않았던(창 2:25) 상태가 아니라 이제는 썩어버릴 육체가 된 것을 잊어버리는 것은 자신들의 실체를 잊고 사는 것이다. 욥 7:5에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조각이 의복처럼 입혔고 내 가죽은 합창되었다가 터지는구나” 인간은 죽으면 구더기가 먹고 흙 조각이 내 뼈에 의복처럼 입혀질 것이며 내 몸의 살가죽은 합창(굳어졌다가)되었다고 터지는구나 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진실한 형편을 고백한 것이다. 이런 인간의 참된 형편을 모른 채 이 땅에서 그저 잠시 부요롭게 사는 것에 도취되어 인간 자신들의 곤고하고 가련한 인간 자신들의 진정한 형편에 눈감은 자들에게 보내신 경고인 것이다.

 

교훈 :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에 대하여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영적으로 눈멀었다고 진단하셨다.

 

내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영적 빈곤을 느끼십니까?

우리가 정말 영적으로 풍요롭기 때문에 부족을 느낄 수 없다면 다행이지만 대부분 자신에게 없는 것을 있다고 착각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고급 주택은 있지만 행복한 가정은 없고, 비싼 옷은 있지만 고매한 인격은 없으며, 지식은 많으나 진리는 모르고, 빨리 달릴 수는 있지만 목표가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혹시 우리에게 넘치는 영적 유산이 위탁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정말 영적으로 풍요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 적용 |

자신이 얼마나 영적으로 가난하고 병들었는지 고백해 보십시오.

 

영감의 교훈

미련한 처녀 - “미련한 처녀로 대표된 계급은 외식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진리를 존중히 여기고, 진리를 옹호해 왔으며, 또 진리를 믿는 사람들에게 매혹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의 역사에 순종하지 않았다. 그들은 반석 되시는 예수님 위에 떨어져 그들의 옛 성질을 깨뜨리려 하지 않았다”(실물교훈, 411).

 

기도

아버지, 저는 정말 가난함을 느낍니다. 저는 영적 능력도 없고, 감화력도 없습니다. 제 안에 비어 있는 영적 공간을 채우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오셔서 저를 채워 주시옵소서.

 

넷째날(수) 신령한 치료제

7월 3일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8~19).

 

교사강해 4)

성경에 보면 흰옷에 대해 자주 언급된다.“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편에 앉았더라”(요20:12)고 말씀하고 있는데, 두 천사 입은 옷이 흰 옷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늘에 갈 때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계3:5)라고 말한다. 왜 하늘에서는 모두 흰 옷을 입는가? 컬러풀한 옷도 많은데 왜 이기는 자에게 흰 옷을 주는가? 여러분들이 이 흰 옷에 대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예수님의 변형에 대해 살펴보라.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막9:1-3)라고 말하고 있다. “주께서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같이 치시며”(시104:2)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신령한 몸, 하늘의 존재들은 빛을 입은 존재처럼 영광의 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빨래하여서 희어진 것이 아니라 신령한 몸으로 빛과 광채가 나는 모습이 너무 밝아 마치 흰 옷을 입은 것과 같이 하얗게 보이는 것이다. 구속의 이야기는 벌거벗은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구원의 옷을 입히는 사건이 구속의 사건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3:27)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입게 된 이 영광스러운 구원에 대해 아무런 반응이 없고 그 영생을 얻은 것에 대한 합당한 그 열심이 사라진다면 어찌하겠는가? 그러므로 우리의 영적으로 어두워진 우리의 실체를 바로 볼 영적 안약이 필요한 것이다.

 

영적 냉소주의와 무관심으로 병든 모든 자에게도 희망이 있다. 마찬가지로 라오디게아 교회에도 희망이 있다. 우리 주님은 신령한 치료제가 있다. 주께서 이 교회에 말씀을 주셨다는 사실 자체가 백성들이 그분의 권면을 수용하고 따른다면 그 교회에 희망이 있음을 보여 준다.

계 3:18~19에 있는 예수님의 권면을 묵상하라. 불로 연단한 금을 사고, 흰옷을 입고, 안약을 사서 바르라는 말씀이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는가?(벧전 1:7, 슥 3:1~5, 계 19:7~9, 엡 4:30 참고)

“예수님은 집집마다 다니며, 모든 영혼의 성전 앞에 서서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하며 말씀하신다. 하늘의 상인으로서 그는 보화를 풀어 놓으시고 호소하시기를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하신다. 그분이 내미는 금은 불순물이 없는 금으로서 오빌의 정금보다 더욱 귀한 것이다. 이는 그것이 믿음과 사랑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혼에 입으라고 호소하시는 흰옷은 그리스도 자신의 의의 두루마기이다. 바르는 기름은(안약) 그의 은혜의 기름으로서 눈이 멀어 어둡게 된 영혼에 영적 시력을 줄 것이며, 이로 말미암아 그는 하나님의 영께서 하시는 일과 원수의 영이 하는 일을 구별할 수 있게 된다. 크신 상인이시요, 영적 보화를 가지신 그분은 ‘그대의 문을 열라’고 말씀하신다. ‘나와 거래하자. 내 물건을 사라고 권면하는 자는 나 곧 너의 구속자니라.’고 하신다”(화잇 주석, 계 3:18~20).

 

교훈 : 영적 무관심과 냉소주의에 대하여 예수님은 참된 믿음과 사랑 그리고 영적 분별력이라는 치료제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신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예수님이 밖에서 문을 두드리시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문밖에 서서 두드리십니다. 그분은 문을 부수고 들어오시지 않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들어오고 싶을지라도 우리가 들어오시도록 선택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나는 문을 열지 않기 위해 얼마나 저항하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이 나를 붙잡고 있는가? 포기하기 싫은 죄 또는 방종은 무엇이며, 그것이 그렇게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가?’ 물어야 합니다.

 

| 적용 |

금, 흰옷, 안약 가운데 그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라오디게아 기별에 대한 대답 -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의 잘못을 깨닫고 열심히 회개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토록 통탄스러운 가난과 눈멂과 곤고함과 두려운 기만 상태 가운데 빠지게 한 죄들을 벗어 버려야만 한다. 나는 예리한 증언이 교회 안에 살아 있어야 함을 보았다. 이것만이 라오디게아에 보내는 기별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 잘못은 견책을 받아야 하며, 죄는 죄라고 불려져야 하며, 죄악은 즉시 단호하게 처리하여 한 백성으로서 우리에게서 제거되어야 한다”(교회증언 3권, 260).

 

기도

아버지, 눈멀고, 헐벗고, 궁핍한 저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겉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속은 병들고 아픕니다. 제 안에 들어오셔서 마음을 고치시고 주의 의로 덮어 주시며 참된 믿음과 사랑으로 충만하게 해 주시옵소서.

 

다섯째날(목) 끝없는 사랑

7월 4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교사강해 5)

인간은 살아있으나 죽은 자들과 같다. 그냥 내버려 두면 저절로 죽을 자들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제자 중에 또 하나가 이르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마8:21-2)고 하셨다. 죽은 자들이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고 한 것은 이미 죽은 자는 그의 부친이고 또 그의 부친을 장사지낼 사람도 결국 죽은 자들과 진배가 없는 자들이 장례를 치르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제자는 사람을 살리시는 분,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분과 함께 있는 것이다. 그가 지금 무엇을 먼저 선택하여야 하겠는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5:24-25).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고 했는데 이미 이 땅에 사는 모든 자들은 죽은 자들이나 같다. 그러나 바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오신 그분,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예수를 믿는 자들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마음의 문을 열고 우리의 생명이 덧없이 마치기 전에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분이 바로 우리의 생명을 다시 살려주실 구원자이시기 때문이다.

 

계 3:20과 아 5:2~5을 비교해 보라. 두 곳의 말씀에는 어떤 비슷한 점이 있는가? 이 말씀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어떤 사실을 계시하는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중동에서 저녁 식사는 매우 중요하였다. 남자들이 일을 마치고 들에서 돌아오면 온 가족이 저녁 식사를 위해 식탁에 모였다. 사람들은 대부분 대가족을 이루어 함께 살았다. 그래서 저녁 식사에 참여하는 인원은 상당히 많았다. 할아버지, 할머니, 형제자매, 고모와 삼촌, 사촌과 조카들을 포함하여 어른, 아이가 한자리에 모였을 것이다. 고된 하루를 마치고 온 가족이 모여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경험을 나누고, 조언을 받았다. 저녁 식사 시간은 교제의 시간이자, 가족의 온기와 친밀함을 경험하는 시간이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우리와 이런 친교를 나누기 원하신다.

계 3:21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약속은 우리 각자를 위한 그분의 진실한 소망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가?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보좌에 대하여 40번 이상 언급한다. 다른 어느 책보다 보좌에 대한 언급이 많다. 보좌 앞에서 우리는 천사들과 함께 기뻐 외친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계 5:12). 그분은 지겨운 죄의 역사가 끝나면 우리가 장엄한 찬양의 축제에 참여하게 되리라고 약속하신다.

그리스도는 영적으로 냉담한 남은 백성을 위해 가장 큰 동기를 사용하신다. 우리를 영적 졸음에서 깨워야 하는 가장 큰 동기는 예수님의 끝없는 사랑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살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부가적용)

예수께서는 모든 인생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신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여 진 것이지만 그 후에 심판이 있을 것”(히 9:27) 이라고 히브리 기자는 말한다, 이 심판은 어떤 심판인가 하면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보이시고 이 생명을 얻도록 모든 인생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을 떠난 죄값은 이미 죽도록 예비되어 있는 첫 번째 죽음으로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인간에게 집행유예를 주신 것은 구원의 소식을 듣게 하시어 자기를 바라고 기다리는 자들을 살리시기 위해 구원의 잔치를 여신 것이다. 히9:28에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고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어 예수님이 우리로 죄와 상관이 없는 자가 되게 하시어 예수님을 기다리게 하셨다. 이 일을 위해 인간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이 이토록 오래 기다리며 인간의 마음의 문을 열려고 하신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시려고 말이다.

 

교훈 : 예수님은 우리가 진실로 그분과 함께 영원토록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신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주님과 얼마나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 원합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그분의 사랑 말고 우리를 영적 냉담함에서 깨우기에 충분한 것이 무엇이며, 우리로 하여금 무릎 꿇고 부흥을 간구하게 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우리의 혈관에는 왕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우리는 우주의 왕의 아들과 딸들이다. 우리는 그분의 보좌에 앉아 영원토록 그분과 함께 세상을 다스릴 것이다.

 

| 적용 |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목적으로 그대는 기도와 말씀 묵상을 위해 어떻게 시간을 할애

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사랑의 책망과 화평의 약속 - “교회는 결점이 있었다. 그러므로 엄중한 책망과 징계를 받을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요한은 복음의 근본 원칙들을 잊어버리고 그들의 구원의 소망을 위태롭게 하는 자들에게 보내는 경고와 책망과 호소의 기별을 기록하도록 영감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내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시는 책망의 말씀은 항상 부드러운 사랑으로 그리고 참회하는 모든 신도에 대한 화평의 약속과 함께 주어진다”(사도행적, 587).

 

기도

주님은 저와 가까워지기를 원하시는데, 오히려 제가 피하여 주님을 멀리하였습니다. 이제 무릎을 꿇고 말씀을 펴서 저와 가까이 하시려는 주님과 교제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가족과 식솔로 살기를 원합니다.

 

여섯째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7월 5일

 

“부흥과 개혁은 성령의 사역 하에 이루어져야 한다. 부흥과 개혁은 별개의 것이다. 부흥이란 영적 생애를 새롭게 하며, 정신력과 마음의 힘을 일깨워 주고 영적 죽음에서 부활하는 것을 의미한다. 개혁은 재조직, 사상과 이론의 변화 및 습관과 제도의 개선을 뜻한다. 개혁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흥과 연결되지 않는 한 의의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부흥과 개혁은 각각 주어진 역할이 있다. 따라서 이 사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병행되어야 한다”(디 애드벤트 리뷰 앤드 쌔버스 헤럴드, 1902년 2월 25일).

 

“참된 증인이신 분의 권면은 격려와 위로로 충만하다. 교회는 여전히 진리와 믿음과 사랑의 정금을 얻어 하늘의 보화로 부요해질 수 있다.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흰 옷은 품성으로 짜인 그리스도의 의이다. 마음의 순결, 동기의 순결은 자신의 옷을 빨아 어린 양의 피로 희게 하는 모든 이의 특징이 될 것이다”(상동, 1888년 7월 24일).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무엇 때문에 영적으로 미지근해지는 것이 그토록 위험합니까? 그것은 어떻게 우리를 쉽게 자기기만으로 인도합니까?

➋ 어떤 신자는 매우 활발해 보이는 반면 어떤 이는 매우 무관심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격이 다른 것입니까? 아니면 심각한 어떤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➌ 영적으로 무관심해지지 않는 방법에 대해서 토의해 보십시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영적 경험을 활기차고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을까요? 교회로서 우리가 미지근해지지 않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➍ 하나님은 왜 우리가 미지근하기보다 차가운 것이 낫다고 하셨을까요? 얼음장 같은 차가움보다 미지근한 게 낫지 않습니까? 미지근한 것과 차가운 것 중에 무엇이 더 나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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