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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과 개혁 : 성장하고 변화하려는 자발성(강해식과정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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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과 개혁 : 성장하고 변화하려는 자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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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7일 안식일

일몰:오후 6시 53분

 

연구 범위

요일 2:1~9, 빌 2:12~14, 마 26:31~35, 요 20:24~29, 눅 15:11~21, 요 5:1~14.

 

기억절 :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6~7).

 

도입)

하나님을 가까이 할 이유와 예수님이 내게 필요한 근거는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이다. 죄를 깨닫지 못함은 환경적인 요인도 있지만 근본 요인은 자신의 의로움, 교만과 자만심, 잘남과 자신감 등에 있다. 또, 자기를 진짜 모습과는 달리 그럴 듯하게 꾸미려다가 아예 그 꾸민 모습이 진짜라고 속고 있는 까닭도 있다. 자신의 영적인 부족을 분명히 깨닫고, 그 부족함을 주님께 드릴 때 ‘은혜의 삶’이 시작된다. 내가 죄인임을 깨닫는 것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죄성에 매여 있다는 사실, 그 죄성이 자신을 더 깊은 구덩이로 빠져들게 한다는 사실까지도 깨달아야 한다. 신체적, 정신적인 부족은 힘과 노력으로 얼마간 채워질 수 있지만, 영적 부족을 채우기는 내 힘으론 불가능이다. 예수님만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다. 바로 이 부분을 다른 종교에선 결코 제시하지 못한다. 이 부족을 아는 자가 복되다. 성장과 새로워짐, 활력과 근면, 보람과 가치는 부족을 모르거나 부인하는 자에겐 해당사항 없다. 어떤 성장이든, 다 자랐다고 믿는 때가 성장이 그치는 순간이고, 이만하면 됐다고 여기는 때가 퇴보의 시작이다. 자기보다 잘난 사람 보면 열등감 느낄지 모른다. 하지만 예수님 앞에선 열등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비교의 대상이 아닌 사모의 대상이며 우리가 그분을 믿고 섬겨야 할 대상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의 사랑과 은혜로 우리의 부족을 채워가는 삶이 믿음의 삶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토의식으로 교과를 진행하려면 반드시 활동반을 통해 친교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마음이 열려야 입이 열리는 법입니다.

 

오순절 전에 제자들은 상당한 영적 부족을 느꼈다.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희미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명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거룩한 은혜로 감동을 받은 후, 그들의 심령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무너졌다. 그렇게 그들은 부흥과 개혁을 경험하였다.

부흥이란 깊은 영적 갈망을 다시 일으키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의 감동을 통해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감으로써 우리의 영적 욕구를 강화시키는 것이다. 부흥이 일어났다고 해서 우리가 이전에 예수님을 몰랐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안일한 상태에서 벗어나라고 우리에게 호소한다. 그것은 성경의 가치에 따라 삶을 재점검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변화를 일으키도록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성령께 자신을 맡기라고 권유한다.

이번 주에 우리는 자신의 영적 생애에서 성장과 변화를 경험했던 신약 신자들의 삶을 연구하려고 한다.

 

결론 : 제자들의 삶은 그리스도인 삶 속에 존재하는 투쟁의 현실을 증언합니다. 영적 투쟁 없이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개혁은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승리를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것과 다른 습관과 태도를 포기하기로 결심할 때에 일어납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새 신자 또는 구도자와의 일대일 관계가 어떻게 발전하고 있는지 이야기합니다.

❷ 소그룹 모임의 성장을 평가합니다.

❸ 제자 훈련과 소그룹 모임을 위해 기도합니다.

 

첫째날(일) 자라게 하는 은혜

9월 1일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6).

 

교사강해 1)

예배와 하나님의 말씀, 기도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부족을 깨닫기 위함이다. 또한 그 부족을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 채우기 위함이다. 더욱이 영적으로 채워지고 온전해지는 것은 몇 번에 끝나는 치료가 아니라 평생의 일이다. 우리에겐 완전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지해 한다.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은혜 안에서 자라고, 은혜 안에서 강건하게 된다. 영적 성장은 은혜를 아는 만큼 정확히 비례한다. 성도들을 강하게 하고 자라게 하는 것은 교리적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이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그것을 듣고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안 그 날부터 온 세상에서처럼 너희 안에서도 열매를 맺는도다.”(골1:6) 그리스도인들의 성장, 열매 맺음은 그가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아 누리는가에 달려 있다. 구원 받았다는 것은 ‘태어났다’는 말과 같다. 거듭남은 위대하지만, 그 이후로 성장은 더욱 중요하다. 갓난아기가... 그리스도의 군사, 그리스도의 일꾼, 그리스도의 대사, 선한 청지기, 그리스도의 사역자, 그리스도의 고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려면, 유일한 한 가지는 자라나는 것이다. 거기에는 ‘자라게 하시는 은혜’가 필요하다.

 

제자들의 삶은 예수님과 동행함으로써 변함없는 영적 성장을 나타낸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을 당시에 그들의 태도와 행동은 주님의 애정 넘치는 품성을 반영하지 못했다.

눅 9:51~56과 마 20:20~28을 읽어 보라. 이 말씀에 따르면 야고보와 요한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야고보와 요한은 심각한 성격적 결함이 있었다. 그들은 세상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제시할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의 기별을 선포할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자신들의 심각한 성격적 단점에도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품성을 더 완전하게 드러내고자 갈망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태도에 변화와 개혁이 있기를 열망했다. 성장과 변화는 기독교 신앙의 한 부분이다.

요일 2:1~9을 읽어 보라. 이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요한에게 어떤 큰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가? 이 성경절의 가르침에 따르면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우리 삶에 정말 부흥과 개혁이 일어나기를 바란다면, 자신의 영적 성장에 대하여 낙담하기 쉬울 것이다. 그렇게 낙담하고 영적으로 실패하며, 구원받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생길 때, 어떤 약속에 따라 우리가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 하며, 실패할지라도 구원의 확신을 버리지 말아야 하는가?

 

부가적용)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3:7). 사람들은 무엇이든 저절로 자라는 줄 알지만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땅에서 나는 풀이든 들에서 자라는 짐승들이든 간에 생명의 성장은 주님의 은혜에 기인한다. 그분께서 가축이 먹을 풀과 사람이 쓸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음식이 나게 하시되... 시104:14 “그분께서는 하늘을 구름들로 덮으시고 땅을 위하여 비를 예비하시며 산들에 풀이 자라게 하시고.. 시147:8 주님의 은혜를 알면, 성도는 믿음이 자라고 지식이 자란다. 우리의 속사람이 새로워지고 강건해 진다. 꾸준히 은혜의 말씀, 은혜의 영을 받아 은혜 가운데 거할 때 그가 누구이든, 뿌리 깊은 나무처럼 자라나게 되며, 열매를 맺게 된다.

교훈 : 심각한 성격적 결함이 있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 품성이 변화된 제자들처럼 우리도 부흥과 개혁을 통해 성장과 변화를 소망할 수 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의 품성은 지금 어떤 방향으로 변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과거에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자신을 평가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면서, 성격적 결함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세월은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오히려 모진 세상 속에서 더 악화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아버지, 저에게 새 마음을 주시옵소서!’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변화를 소망하는 자를 위해서 일하실 것입니다.

 

| 적용 |

그대가 바라는 품성 변화와 개혁에 대하여 아래에 적어 보십시오.

 

영감의 교훈

요한의 품성 변화 - “요한의 생애 가운데 나타난 것과 같은 품성의 변화는 항상 그리스도와 교제한 결과이다. 개인의 품성에 현저한 결점들이 있을 수 있으나 그가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때에 거룩한 은혜의 능력은 그를 변화시키고 성화시킨다. 거울을 보는 것처럼 주의 영광을 바라봄으로 그는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하여 마침내 그가 사모하던 그분과 같아진다”(사도행적, 559).

 

기도

아버지, 세월이 흐를수록 더 고집스럽고 날카로워지는 이 성격을 아버지께 맡깁니다. 간절히 비오니 예수님을 닮은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할 합당한 종이 되도록 저를 고치시고 새롭게 해 주시옵소서.

 

둘째날(월) 선택의 능력

9월 2일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 2:12~14).

 

교사강해 2)

많은 사람들을 '내가 어떻게 자아를 하나님께 굴복할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그대들은 자신을 그분께 바치기를 원하지만 그들의 도덕적 능력은 약하다. 그들은 의심의 노예가 되어 그대들의 죗된 생애의 습관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다. 그대들의 약속과 결심은 썩은 새끼줄 같아서 쉽게 끊어진다. 그대들은 자신의 생각과 충동과 애정을 지배할 수 없다. 그대들이 깨뜨린 약속과 서약에 대한 기억들이 그대들 자신의 신실함에 대한 자신감을 약화시키며, 하나님께서 그대들을 가납하시지 않으실 것이라고 느끼게 만든다. 그러나 소망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대들이 이해해야 될 것은 의지의 진정한 힘이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본성 안에서 지배하는 힘이 되는데, 즉 결정력이나 선택력을 말한다. 모든 것은 의지의 올바른 사용 여하에 달려 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으므로 사람들은 그것을 임의로 사용할 수 있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으며,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사랑을 하나님께 드릴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을 섬기기로 선택할 수는 있는 것이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의지를 그분께 드릴 수 있다. 그리하면 그분께서는 그대들의 안에서 역사하실 것이며, 당신의 선하신 뜻대로 행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온 본성은 그리스도의 영의 지배 하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대들의 애정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것이 될 것이고, 그대들의 사상은 그분과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다." 정로의 계단, 영문 47.

 

변화는 선택의 순간에 이르고, 개혁은 우리가 우리의 죄를 깨우치는 성령의 능력에 굴복하고 하나님의 뜻에 우리의 의지를 복종시키기로 선택할 때에 일어난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의 의지를 강요하거나 조정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신다. 그분의 영은 우리의 사고에 영감을 주고, 우리의 마음에 가책을 느끼게 하며, 우리가 옳은 일을 하도록 권유하시지만, 성령의 호소에 반응하는 결정은 언제나 우리의 몫이다.

빌 2:12~14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우리가 은혜 안에서 자라기 위해 하나님과 협력해야 할 필요성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바울의 말은 무슨 뜻인가? “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이 우리 안에 아직 이루시지 않은 일을 우리가 활용하기란 불가능하다. 오직 그분이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우리 안에서 일하실 때, 우리는 그분이 우리 삶 속에 이루신 은혜와 능력을 활용하기로 결심할 수 있다.

“유한하고 죄 많은 인간이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룰 때에 그의 안에서 일하시는 분은 자신의 선하신 기쁨을 위하여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과의 협력 없이는 일하지 않으신다.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해야 하며, 자신을 그리스도의 학교에 있는 적합하고 적극적인 학생의 위치에 두어야 한다. 그에게 대가 없이 부여된 은혜를 받아들일 때에 생각과 마음에 계신 그리스도의 임재가 모든 무거운 죄를 내려놓도록 결심하게 할 것이며, 그의 심령은 충만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사랑으로 가득차게 될 것이다”(Fundamentals of Christian Education, 134).

 

부가적용)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강제적으로 이루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데에 있어서, 우리의 협력을 필요로 하신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이성과 양심 속에서 말씀해주시는 성령의 음성을 거절한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은혜를 베푸실 수 있겠는가? 또한 우리가 그분의 진리를 무시하거나 거절한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리의 빛 가운데로 인도하실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협력해야만 하는 것이다. 여러분 중의 어떤 사람들은 복음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는 것을 들었을 것이다. "구원에 대해서 걱정하지 마십시오. 예수께서 그대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다 해주셨습니다. 그대는 그저 십자가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오늘날, 우리 모두는 교회에서 점점 더 이러한 소리를 많이 듣게 된 시대에 살고 있다. 물론,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야 할 선택과 결정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성령께서 우리 양심에 호소하실 때, 우리는 스스로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회개를 하기로 결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 속에는 인간인 우리의 선택과 결정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결심해 주시거나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대신 해주지 않으신다. 물론, 하나님의 영은 우리의 이성과 양심 속에 역사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결심케 하시며, 그분께 우리의 생애를 바치도록 호소하신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결코 우리의 헌신과 결심을 억지로 강요하지 않으신다. 우리 모두는 완전한 자유 속에서 하나님과 사단 중에서 누구를 섬길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대원칙이다.

 

교훈 :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의 뜻대

로 살기로 결심할 때에 우리 안에 변화가 일어나도록 일하신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구원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 하나님과 협력합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개혁은 성령께서 그분의 뜻과 조화롭지 않다고 지적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가 굴복하기로 결심할 때에 일어난다. 우리가 그러한 결심을 하지 않는다면 긍정적이고 영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속에서 어떤 이기적인 생각도 거두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은 불건전한 습관과 은밀한 방종을 기이한 방법으로 낚아채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은 단지 우리의 죄를 지적하시고 무엇이 옳은지 확신시키신다. 그리고 결정은 우리가 해야 한다. 우리가 결정할 때마다 그분은 우리의 결정을 강하게 하신다. 하지만 매일 매 순간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 적용 |

하나님과 협력하기 위해 그대는 지금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합니까?

 

영감의 교훈

올바른 의지의 활용 - “모든 일은 올바른 의지의 활용에 좌우된다. 선과 순결에 대한 욕망을 갖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거기에서 그치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 많은 사람이 그들의 악한 기질들을 정복하고자 바라고 소원만 하다가 멸망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의지를 하나님께 굴복시키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기로 선택하지 않는다”(가정과 건강, 139).

 

기도

아버지,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 나의 습관과 태도를 내려놓기로 지금 선택합니다. 이 결정을 받아 주시고 저를 돕도록 성령님을 보내 주시옵소서. 성령님께 제 의지를 굴복시키기로 결심합니다.

 

셋째날(화) 확신과 의심

9월 3일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마 26:34).

 

교사강해 3)

우리는 베드로를 가리켜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한다. 많은 신앙인이 베드로의 열정과 추진력을 좋아한다. 또한, 그가 초대 기독교 역사에 미친 큰 영향력을 존경해 마지않는다. 그러나 한편 우리는 위의 본문과 누가복음 22장 31절에서 62절에 나타난 베드로의 넘어짐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끝까지 주를 따라가겠다고 호언장담한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며 넘어진다. 베드로가 넘어진 것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단의 영향력을 경고하셨으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 옥에도 가고 기꺼이 죽을 수 있다고 장담하였다. 베드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방어한 것으로 자신의 말을 증명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몇 시간 되지 않아 그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다. 베드로는 지나치게 확신한 나머지 그러한 일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이것이 지나친 확신의 위험성이다. 예수님은 분명 “기도하라”고 명령하셨다. 하지만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고 잠이 들었다. 우리는 언제든지 기도하지 않을 때 넘어지기 쉽다. 사실 기도하지 않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자신을 의지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성격과 열심을 다 잘 알았다. 그리고 연약함도 알았다. 베드로의 미래까지 알고 계셨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후에 일어날 일에 대해 미리 알려 주셨다. 열심은 있지만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지만 연약한 인간일 수밖에 없는 베드로 자신의 모습을 알려 주신 것이다. 그래서 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권면하시기 까지 하셨다. 그러나 그 예수님의 기도의 권면까지도 행동에 옮기지 못했다. 그만큼 베드로가 믿음이 약함을 알고 계셨다.

 

십자가 사건이 있기 전에 베드로의 태도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는가?(마26:31~35)

베드로는 마귀의 계략을 이겨 낼 재간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사탄의 유혹에 맞서고자 했다. 그는 너무 자신만만하여 다가오는 위기를 알아채지 못했다.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한 여종의 질문에 당황하여 그는 자신의 주인을 부인하고 말았다(마 26:69~75). 앞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셨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32). 예수님은 그의 영적 상태를 날카롭게 분석하였다. 그는 자신의 힘을 의지함으로써 주로부터 멀어졌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는 (내게) 돌이킨 후에”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던 것이다. 베드로는 영적 각성이 필요했다. 그는 태도를 바꿔야 했다. 그는 개혁이 필요했다.

요 20:24~29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도마에 대하여 어떤 사실을 말해 주는가? 여기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우리에게 적용해야 하는가?

베드로와 도마에게 뚜렷한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즉 그들은 인간의 관점으로 믿음에 접근하였다. 베드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그리고 도마는 자신이 볼 수 있는 것을 믿으려 했다. 그들은 불완전한 인간적 판단을 의지하였다. 그러나 오순절이 모든 것을 바꾸었다. 변화된 베드로는 두려움 없이 복음을 전했고, 오순절에 3천 명이 침례를 받았다(행 2:41). 그는 자신에게 앉은뱅이를 치료할 능력이 없지만 예수님께 능력이 있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나리라는 사실을 알았다(행 3:2~9). 관리들이 그의 입을 막고자 했지만, 그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20).

 

부가적용)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 베드로는 자신의 얼마나 어리석었는가를 비로소 알았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교만했는지도 알았다. 예수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을 더 믿었던 것이 얼마나 잘못인가를 깨달았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그 십자가 곁에 베드로와 요한이 있었다.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예수님을 만나 뵙기 위해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갔던 사람도 베드로와 요한이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 갈릴리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셨기에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로 갔다. 갈릴리에 가서 고기를 잡으러 갔다. 그런데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그런데 어떤 분이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했다. 그래 한번 던졌더니 고기를 많이 잡았다. 그 때 옆에 있는 요한이 주님이시라고 말하자 베드로는 배가 뭍에 도착하기 전에 겉옷을 입고 물로 뛰어 들어가 예수님께 갔다. 이 때 예수님은 베드로를 반갑게 맞아 주셨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다. 그 때 베드로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 아십니다”고 고백하였다. 주님은 베드로를 사랑했다. 주님은 베드로를 버리지 않았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희망을 가지고 계셨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신다. 우리의 믿음이 적음도 잘 아신다. 우리가 자주 넘어지는 것도 잘 아신다. 그렇지만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우리에게 희망을 가지시고 찾아와 주시며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신다.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베드로의 자신감, 자기 자랑, 자만심이 그에게 가져온 파멸을 보았다. 우리는 우리 자기 자신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신 주님 앞에서 그 능력을 발견하고자 십자가 밑에 엎드려야 한다. 주의 십자가는 모든 것을 회복시키시는 능력이 있다.

 

교훈 : 우리는 자신의 힘과 판단력을 의지할 때 실패할 수밖에 없다. 개혁이란 자신을 믿는 태도를 버리고 오직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자신을 얼마나 불신합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베드로는 새사람이 되었다. 도마 역시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도마는 복음을 전하러 배를 타고 인도에 갔다고 전해진다. 그에 대한 정보가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우리는 그가 오순절 이후에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으리라고 확신한다.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 3:12)고 했던 베드로처럼 우리는 자신이 아니라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 적용 |

그대는 지금 어떤 문제에 대하여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까?

 

영감의 교훈

하나님을 의지한 베드로 - “베드로가 부목자로서 활동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은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된 후의 일이었다. …그가 자기의 연약함을 배우기 전까지는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할 필요성을 알 수 없었다. 시험의 폭풍 중에서 베드로는 인간이 완전히 자신을 불신하고 구주께 의지할 때에만 안전하게 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사도행적, 515).

 

기도

주님, 저의 나약함을 고백합니다. 남도 저를 믿어서는 안 되고, 저도 스스로를 믿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믿고 의지하기로 선택합니다. 제 삶 속에서 성령님이 일하신 흔적이 나타나게 해 주시옵소서.

 

넷째날(수) 돌아가려는 결심

9월 4일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눅 15:20).

 

교사강해 4)

극한 고난을 통해서 이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떠난 행동이 얼마나 미련한 일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는 마침내 자기의 생각을 돌이키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 아버지 집에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많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 품꾼보다 더 어렵게 살면서 굶어 죽기 직전에 있었다. 눅 15:17절에서 "스스로 돌이켰다"고 번역된 말은,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는 뜻으로서, 이 말은 "제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떠난 삶은 자아를 상실한 삶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자기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과 같다. 작은 아들은 굶어 죽게 되자, 비로소 자기 행동이 얼마나 미련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차라리 그 곳에서 사느니, 집에 돌아가서 아버지의 품꾼이 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을 때에는 그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보면, 그것이 얼마나 풍요로운 것인지 깨닫게 된다.

 

눅 15:11~21을 읽어 보라. 탕자의 어떤 구체적인 태도와 행동이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졌는가? 이 비유에서 발견할 수 있는 부흥과 개혁의 원리는 무엇인가?

부흥은 여러 방식으로 정의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정의되든지 빠져서는 안 될 요소가 있다. 부흥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을 더 깊이 알고 싶은 주린 심령이다. 개혁은 변화와 성장으로 이끄시는 성령께 반응하는 선택이자, 하나님과 더 친밀한 관계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든지 포기하는 선택이다. 탕자는 돼지우리와 아버지의 잔치 자리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간단히 말해서 그 젊은이는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 없을 만큼 집을 그리워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고파 가슴앓이 했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이와 같은 가슴앓이가 바로 우리로 하여금 개혁과 부흥을 갈망하게 한다. 아버지의 따뜻한 품에 대한 이와 같은 그리움이 삶의 변화를 수용하도록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한다.

그는 집에 돌아가기 전에 어떻게 사죄할지 미리 계획하였다. 그는 분명 그것을 반복하여 연습했을 것이다. 눅 15:18~19에서 그의 말을 읽어 보라. 20~24절에서 아버지가 그의 말을 어떻게 가로막았는지 읽어 보라. 이런 개입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태도 그리고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에 대해서 어떤 사실을 보여 주는가?

아들은 아버지의 눈에서 멀어질 수는 있어도 마음에서는 멀어질 수 없었다. 아버지의 눈은 매일 지평선을 응시하며 아들을 기다렸다. 우리의 삶에 변화를 일으키는 가장 큰 동기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는 분을 다시는 아프게 하지 않고 싶은 소망이다.

 

부가적용)

둘째 아들은 아버지께 돌아기로 결심한 후에 즉시 행동에 옮겼다. 그는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서 아버지가 계신 집을 향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생각은 둘째 아들의 생각과는 크게 달랐다. 아버지는 그가 집을 떠난 뒤에도 여전히 그를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가 집을 떠난 뒤에도 계속해서 그를 사랑했다. 아버지는 날마다 작은 아들을 기다리면서 그가 돌아오기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어느 날 아버지는 먼 곳에서 돌아오는 작은 아들을 보았다. 그의 모습은 초췌하고 남루하기 짝이 없었다. 아버지는 이러한 작은 아들의 모습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여기에 나오는 '측은히 여긴다'는 말('스플랑크니조마이')은 '도와주지 않으면 도저히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 없는 마음 상태'를 말한다. 아버지는 나이가 마음이 측은해서 급히 달려 나가서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 동양인의 경우에는 아무리 급해도 나이 많은 아버지가 먼저 달려 나가지 않는다. 그러나 이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는 자신의 품위가 떨어지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러한 모습은 죄인이 돌아올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영접해 주시는 지 보여주고 있다. 아버지가 먼저 아들에게 달려간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은 죄를 지은 후에 천천히 하나님께 돌아가지만, 하나님은 회개한 인간을 신속하게 영접해 주신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입을 맞춘 것은 무조건적인 용서를 의미한다(삼하 14:33 참고). 또 '입맞춘다'는 말('카테필레센')은 여러 번 계속해서 입을 맞추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는 돌아온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용서를 잘 보여주고 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관대한 환대를 받고 아버지께서 자신을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서 그 용서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아버지께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는 감히 자신을 아들로 받아달라고 요청할 면목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아버지께 품꾼으로 받아달라고 요청했다. 이러한 장면은 자기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는 조인과 그를 열렬한 사랑으로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감동적인 장면이다. 자기 죄를 회개하고 회개하는 사람들은 작은 아들과 같은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자신의 반역과 무가치함을 인정하고 종으로라도 받아달라고 요청한다. 하나님 나라는 이와 같이 자신의 죄와 무가치함을 인정하는 성도만이 들어갈 수 있다. 하나님은 이렇게 겸손히 자기 죄를 뉘우치고 돌아오는 사람들을 크고 넓으신 자비로 받아주신다.

 

교훈 : 부흥과 개혁은 하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결심에서 시작된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하나님의 임재를 그리워하여 얼마나 가슴앓이를 합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아들이 돼지들과 함께 진흙탕에서 뒹굴고 있을 때에 그 보다 더 고통을 느끼는 사람은 아버지였다. 부흥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찢어질 때에 일어난다. 개혁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는 사랑에 우리가 반응하기로 결심할 때 일어난다. 그것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분리시키는 부정적인 태도, 습관, 사고 그리고 감정들을 포기하기로 결심할 때에 일어난다.

 

| 적용 |

어떻게 하면 그대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영감의 교훈

탕자를 이끈 아버지의 사랑 - “탕자는 비록 가련한 처지에 있었으나 자기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하고 소망을 갖게 된다. 그를 집으로 이끌리게 한 것은 곧 아버지의 사랑이었다. 이와 같이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강권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보증이다”(실물교훈, 202).

 

기도

아버지, 저의 잘못된 선택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제는 외롭고 고달픈 삶에서 벗어나 평화와 위로가 있는 아버지께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회개하는 죄인을 언제나 받아 주시는 줄 믿고 감사합니다. 늘 아버지 은혜 아래 거하게 해 주시옵소서.

 

다섯째날(목) 행동하는 믿음

9월 5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요 5:8~9).

 

교사강해 5)

안식일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이, 이제는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우리 죄인인 인간을 찾아오시는 이야기가 요한복음 5장 이야기이다. 스스로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고, 나뭇가지가 나무에서부터 잘라지니까 그 나뭇가지가 아무 생명도 없이 죽어가게 되는 것처럼 이 베데스다 연못가의 누워있는 중풍병자는 그런 죄인을 표상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찾아오셨다. 우리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스스로 살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계신다. 이 중풍병자가 딴 사람이 아닌 오늘날의 나 자신이라고 적용하며 바라보아야 한다. '2천년 전에 예수님 만났던 중풍병자네'하고 끝나버리면 성경말씀이 왜 오늘날 우리에게 생명이 있겠는가? 우리에게 상관이 없다. 이 성경의 이야기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다 적용되고,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그분이 역사하시는 가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창조주를 믿는 신앙은 말씀을 믿는 신앙이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복주시고 거룩하게 하셨다. 그런데 이 거룩이라는 말은 썩지 아니할 존재들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었다. 38년 된 중풍병자를 안식일에 치료하신 것은 썩어져 없어질 인간을 다시 거룩하게 썩지 아니할 사람들로 다시 창조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중심이다. 안식일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복 주신 영생과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거룩한 사람들이 누리는 축제의 날로 제정된 날이었다. 그러나 이 축제의 날이 망가지고 깨어진 이 땅에서 안식일에 38년 된 무능력한 병자를 회복시키시므로 죄로 말미암아 그 스스로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인간을 다시 재창조하시고 다시 회복시켜 주실 우리의 구주께서 이 병자를 고쳐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기적을 통해서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으로 나타내 보이셨다. 그분은 병든 영혼을 치유하실 수 있는 더 큰 능력을 보여 주시기 위해 병든 몸을 치유하셨다. 그분은 비뚤어진 사고와 마음을 고치시고자 하는 그분의 큰 바람을 증명하시려고 비뚤어진 팔과 다리를 고쳐 주셨다. 예수님의 기적은 어떻게 믿음을 활용하는지 중요한 교훈을 가르친다. 그리고 성장과 변화에 대한 유용한 교훈을 가르친다.

믿음의 힘을 보여 주는 예수님의 가장 확실한 실례는 베데스다 연못에 있었던 병자에게 일어난 기적이다. 그 사람이 질병을 앓은 지는 38년이 되었다. 그에게는 희망이 없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그는 가난과 고통과 비참함으로 살아갈 운명처럼 보였다.

요 5:1~14을 읽어 보라. 예수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요 5:6)고 질문하셨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게 오랫동안 병으로 고통을 겪은 사람이라면 낫기를 바라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그 사람은 어떻게 대답하였는가?(요 5:7)

예수님은 그 사람의 변명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셨다. 그분은 그의 변명을 가지고 논쟁하지 않으셨다. 대신 이렇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 5:8). 그 병자가 자신의 현 상황에도 불구하고 과연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말씀에 따라 행할지가 중요한 문제였다. 다행히도 그가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행동하고자 결심하자마자 그는 건강을 찾았다. 예수님이 주시는 치유의 선물은 그분의 말씀 속에 있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분의 선언을 성취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동반한다.

 

부가적용)

온 인류가 죽을병에 들었다는 사실과 모든 인간이 매일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깊이 느끼지 못하고 사는 것 같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든 인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인 치명적인 질병으로 죽고 있다는 사실을 인간은 간과하며 살아가고 있다. 예수께서 38년이나 된 치료 불가능한 환자를 고치심으로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는 대책 없는 인생에게 살 길을 제시해 주시고 확실한 구원의 길을 보여 주셨다. 죽음의 질병으로 치료 불가능한 인간을 향해 손 내미신 우리의 생명의 구주이신 그분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시며 창조의 주인 되신 그리스도이심을 알리셨다. 예수께서 본래 안식일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려야 했던 영생의 복, 썩지 아니할 거룩한 존재들의 축제의 날이었음을 보여주시는 기적을 행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율법아래 있는 인간은 이 율법에서 인간을 자유하게 하시기 위해 오시고 죽음의 질병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시기 위해 오신 참된 안식의 구주이신 예수님에 대하여 저들의 눈이 멀어 있었다. 부흥과 개혁은 바로 나의 죽음에 이르는 질병으로부터 나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오신 이 예수님을 깨닫고 그분을 영접하는데서 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고 그분의 말씀을 믿고 그분께 반응해야 하며 행동해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교훈 : 부흥과 개혁을 정말 바란다면 우리는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그것을 약속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반응하며 행동해야 한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의 믿음은 행동과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까?

믿음을 수동적인 의미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믿음에 따르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기 때문에 인간은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믿음은 긍정적인 반응을 수반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행동을 이끌어 내시기 위해서입니다.

 

| 적용 |

그대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지금 행동으로 옮겨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느낌이 아니라 약속을 믿음 - “그대가 약속을 믿는다면(용서받고 깨끗해졌다고 믿는다면) 하나님은 이 일을 이루사 마치 중풍병자가 고침을 받은 줄로 믿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걸을 능력을 주신 것처럼 그대도 고침을 받게 된다. 그대가 믿으면 그렇게 된다. 그대가 건강하게 되었다고 느낄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 대신 ‘나는 그것을 믿는다. 그렇게 되는 것은 내가 느끼기 때문이 아니요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라”(정로의 계단, 51).

 

기도

아버지, 우리가 믿는 것은 눈으로 보이는 증거나 마음의 느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입니다. 세상에 여러 장애와 문제가 있지만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행동할 수 있는 진정한 믿음의 용사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여섯째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9월 6일

 

“그러나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인간의 협력이 없이 인간을 위하여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자기를 이기는 위대한 일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아무것도 없다는 견해를 나타내지 말 것이다. 또한 그대들이 인간적으로 최선을 다한 이후에 예수님께서 그대들을 도우실 것이라고 말하지도 말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고 말씀하셨다.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은 하나님과 동역자가 되어야 한다. 성령께서 인간의 심령에 역사하시지 않는 한, 우리들은 발자국마다 걸려 넘어질 것이다.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으며 무가치한 것이다. 다만 그리스도와의 협력만이 승리를 의미한다.…

인간의 편에서 별로 할 일이 없다거나 전혀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인상을 다

른 사람들에게 주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성공적으로 승리하기 위하여 인간이 하

나님과 협력해야 할 것을 가르치라”(가려 뽑은 기별 1권, 381).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하나님이 그분의 말씀대로 행하시리라는 믿음으로 약속을 주장할 때, 그리스도인 삶에

성장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다음의 말씀에서 우리에게 어떤 약속을 주셨습니까?(요일

1:7~9, 빌 4:13, 약 1:5~8, 롬 8:31~39) 어떻게 하면 그대는 이 약속들을 믿을 수 있을까

요? 이 약속들이 그대의 삶 속에서 실현되려면 그대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합니까?

➋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사상에 대하여 더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오직 믿

음으로 얻는 구원에 비추었을 때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토론해 보십시오. 우리가 무엇

을 두려워하며, 무엇 때문에 떨어야 할까요?

➌ 베드로처럼 이전에 하나님께 진심으로 약속했지만 약속에 따라 행하지 못한 적이 있습

니까? 그와 같은 실수를 통해 어떤 교훈을 배웠습니까? 성경에 따르면 우리로 하여금

약속대로 승리를 얻게 하는 원리들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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