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과 자백과 회개 : 부흥의 조건(강해식성경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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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과 자백과 회개 : 부흥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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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0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31분
연구 범위
행 5:30~32, 고후 7:9~11, 레 5:5, 요일 1:9, 히 12:17, 시 32:1~8.
기억절 :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도입)
회개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개념이다. 회개(悔改)라는 말은 그 말의 뜻을 의미해 보면 뉘우칠 悔에 고칠 改로서 뉘우치고 행동을 고치는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하여 회개에 대한 수많은 오해를 가져왔다. 히 12:7절에서 언급한 말씀의 뜻을 새겨보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는 이 의미를 생각해 보자. 먼저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한 자들에게 대하여 그 전 구절에는 히12:16-17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고 하신 말씀에서 음행과 장자의 명분을 판 것이 매우 중요한 구원의 기회를 잃어버린 일로 말하고 있다. 음행하는 자와 장자의 명분을 판 이 두 가지 사건이 오버랩 되어 에서가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된 것일까? 에서는 야곱과 달리 하나님 나라의 장자권에 대하여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하나님 나라의 장자가 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이 땅에서 태어나는 모든 장자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 나라의 장자가 되는 것은 영생을 얻게 되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땅의 세속적인 영광을 가진 자녀들과 하나님 나라에서 얻을 영광의 자녀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마6:29]고 말씀하시며 이 땅에서 누리는 모든 영광도 들의 풀 한포기만도 못한 영광이라고 하셨다. 이 땅의 것은 모두 다 썩어 없어질 것들이나 하나님의 나라는 썩지 아니할 것들,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일들이다.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시73:27)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이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음녀와 같이 음행한 사람과 같고, 주를 멀리 떠난 자들은 결국 멸망 받아 구원의 기회를 얻지 못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예표한 것이다. 회개는 우리의 행동의 개선이 아니라 참된 회개는 우리 하나님께 그 마음을 드려 전적으로 그 마음이 돌아서는 행위를 이른 것이다. 구원은 우리의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종교는 마음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순결을 빼앗긴 것보다 마음을 빼앗긴 것이 더 중요한 것처럼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행위가 신앙의 첫 행위이기 때문이다. 회개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부분적인 행동의 개선이 아닌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을 말한다.
*교과 토의 시간은 믿음과 생각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성경을 보면 회개와 자백은 영적 부흥의 길을 예비한다. 하나님은 큰일을 맡길 자들을 준비시키기 위해 항상 죄에 대한 경건한 슬픔으로 그들을 인도하셨다. 우리가 일단 우리 죄를 인정하고 자백하면 우리는 그것을 이길 수 있는 과정에 선 것이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회개와 고백은 성령의 능력을 풍성하게 받기 위한 선결 조건이다.
이번 주 우리는 성령을 부어 주신 과정에서 진정한 회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사도행전을 통해 살펴볼 예정이다. 그리고 참회개와 거짓 회개를 대조해 보려고 한다. 결국 우리는 회개가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반사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결론 : 제자들은 다락방에서 회개하였고 그들의 죄를 하나님께 그리고 서로에게 자백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화해하였고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오순절에 성령의 강력한 부어 주심을 받기 위해 마음을 준비했습니다. 죄는 성령의 강력한 임재를 방해하지만, 회개와 자백은 성령을 충만히 받을 수 있도록 막힌 마음의 통로를 열어 줍니다.
첫째날(일) 회개 : 하나님의 선물
8월 4일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행 5:30~31).
교사강해 1)
하나님께 희망을 거는 결단, 이것이 곧 회개이다. 회개는 잘못을 반성하는 정도의 차원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지혜가 헛되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오직 하나님께 희망을 거는 행위이다. 세상의 지혜에 의지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지혜를 찾지 않는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 똑같은 처지에 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나고 자라서 죽는 것은 똑같다. 회개를 분기점으로 짐승과 ‘자녀’의 신분이 갈라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싶지만 인간은 자신으로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른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고 무조건 하나님께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다. 예수께서 자녀의 떡을 개에게 던짐이 합당치 아니하다고 말씀하시 가나안 사람을 개에게 빗대셨을 때 가나안 여인은 먹다 남은 부스러기라도 제 주인의 상에서 먹을 권리를 주장하였던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이 먹다 남은 부스러기라도 세상의 지혜보다는 훨씬 더 나을 것이라고 믿고 생각하는 바로 이러한 투신의 행위가 회개이이며 믿음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찾는 누구에게나 부스러기를 주시지 않고 온전한 것, 곧 성령을 내려주신다.
오순절 이전에 몇 주 동안 제자들은 하나님께 열렬히 기도하였다. 행 1:14에 따르면 그들은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 한마음이 되는 경험은 그리스도인 신자 사이에서 회개와 자백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강력한 연합과 조화를 말한다. 기도와 자백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위해 그들을 준비시켰다.
행 5:30~32을 읽어 보라. 베드로의 말에서 우리는 어떤 점을 배워야 하는가?
베드로는 두 가지 핵심을 짚었다. 첫째, 회개는 선물이다. 우리가 성령의 권고하는 음성에 마음을 열 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회개의 선물을 주신다. 둘째, 제자들 본인이 그들의 삶 속에 일어난 실재 회개의 증인들이었다. 그들은 회개를 설교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경험한 자들이었다.
“제자들은 약속이 성취되기를 기다리면서, 참된 회개로 그들의 마음을 겸비하게 하고 그들의 불신을 자복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운명하시기 전에 그들에게 하신 말씀을 상기하였을 때에 그들은 그 의미를 더욱 충분히 깨닫게 되었다. …그들이 그분의 순결하고 거룩한 생애를 명상할 때에, 만일 그들의 생애로 그리스도의 품성의 아름다움을 증언할 수만 있다면 너무 힘들어서 하지 못할 수고나 너무 커서 못할 희생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사도행적, 36).
회개와 자백은 사도행전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제이다(행 17:30~31, 26:19~20). 우리를 회개로 이끄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이며, 용서하시는 구주에 대한 필요성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은 죄를 일깨워 주시는 성령의 능력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성령은 회개하지 않는 마음은 채우지 않으신다(롬 2:8, 행 2:38~39, 3:19). 성령은 이기적인 야망과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망과 개인의 영광을 구하는 동기가 사라진 빈 마음을 채우신다.
부가적용)
구원에 필요한 회개는 죄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을 말한다. "유대인과 또한 헬라인에게도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증거하였노라"(행 20:21). 회개란 단순히 악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악에서 돌아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영생을 얻는 것이다. 또 회개는 단순히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인정과 슬픔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회개는 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복음에 있어서의 회개는 자신이 행한 일이 아니라 바로 죄인 된 자기 존재에 대한 탄식을 요구한다. 이런 회개는 베드로, 욥, 이사야에게서 확실히 나타난다. 이사야가 하나님께 다가갔을 때 그 자신이 행한 잘못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는 『...내게 화로다! 내가 끊어졌도다. 이는 내가 불결한 입술을 가진 사람이며 내가 불결한 입술을 가진 백성 가운데 거하면서...』(사 6:5)라고 했다. 즉 자기가 불결한 행위를 해서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원래 불결한 자임을 고백한 것이다. 욥도 하나님의 신성을 마주대했을 때 내가 실수하고 잘못 말해서 죄송합니다. 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그러므로 내가 나를 미워하고 티끌과 재속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6)라고 했다. 베드로 역시 "나를 떠나가소서. 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라고 말했다. 회개는 믿음 이전에 온다.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회개는 죄 용서 이전에 온다. "모든 민족 가운데 그의 이름으로 회개와 죄 사함이 선포되어야 하리라"(눅 24:47). 복음적인 회개는 죄인 된 자기 존재에 대한 깊은 탄식과 함께 의인이시며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반드시 수반한다. 성경은 "...이제는 어디에 살고 있는 어떤 사람에게도 회개하라고 명령하고 계시니라"(행 17:30)고 말씀한다. 무엇을 회개하라는 것인가?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고후 4:4) 대신 우상을 섬기는 죄를 회개하라는 말씀이다.
교훈 : 회개는 우리가 하나님이 베푸시는 용서와 성령의 부어 주심을 경험할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준비시키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회개하도록 설득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듣습니까?
우리는 연약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죄의 유혹과 시험에 굴복하면 과연 나는 구원받을 가망성이 있을까 절망하여서 때로는 예배와 기도조차 주저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한시라도 빨리 제자리로 돌아오도록 우리에게 호소하십니다. 우리는 절대 회개를 예상하고 죄를 저질러서는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스스로 판단하여 회개를 미루어서도 안 됩니다.
| 적용 |
성령께서 그대를 회개로 이끄셨던 경험을 아래에 간단하게 적어 보십시오.
영감의 교훈
하나님의 선물인 회개 -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시며 성령의 탄원을 통하여 인간에게 회개를 호소하신다. 회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용서하시되 먼저 회개케 하신다.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것에 대하여 전정한 회개를 하고 그리스도를 죄인의 구원자이며 대언자로 믿을 때에 가장 큰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23~324).
기도
아버지, 지금 제가 걷는 잘못된 길에서 돌이킵니다. 알면서 행했던 죄에 대해서도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성령의 음성에 순종합니다. 지체하지 않고 회개하며 아버지께 돌아갑니다. 받아 주시옵소서.
둘째날(월) 참회개의 정의
8월 5일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후 7:9).
교사강해 2)
고린도 후서 7:10을 보면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했다. 세상 근심 걱정이 사망을 이룬 성경에 나타난 몇 가지 사례를 찾아보자. 마태복음 19:22을 보면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고 했다. 어떤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주님은 그에게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그리고 와서 나를 쫒으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는 부자였던 탓으로 근심하며 돌아갔다. 자신의 가진 부나 소유가 근심이 되어 결국 영생을 잃고 마는 모습이다. 창세기 26:34~35을 보면 이삭과 리브가의 큰아들 에서가 40세에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헷족속 유딧이라는 여자와 바스맛이라는 여자를 아내로 취한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 하나도 아니고 둘씩 이방 여자를 아내로 맞은 것이다. "이 일이 이삭과 리브가의 근심이 되었더라"고 했다. 말 안 듣고 제멋대로 사는 아들, 하나님 섬기지 않고 이방여자들을 아내로 삼은 자식은 근심덩어리였다. 오늘도 자식 때문에 걱정하고 근심하고 염려하고 한숨 쉬는 부모들이 의외로 많다. 잠언 17:25을 보면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근심이 되고 그 어미의 고통이 되느니라"고 했다. 그러나 좋은 근심 유익한 근심, 위대한 근심도 있다. 고후 7:9에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고 하였는데 이는 바울의 책망을 받고서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에게 대들거나 낙심하거나 반항하지 않고 근심하고 또 근심한 후에 결국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한 것이었다. 바로 이 점이 짐승과 다른 점이다. 짐승은 야단치고 호통 치면 그때 그 순간만 무서워하고 겁을 낸다. 회개한다든지 개과천선 하는 일이 없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깨닫고 자백하고 고친다. 거룩한 근심, 위대한 근심이 있고 세상 근심이 있다. 죄에 대한 뉘우침으로 그의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참 회개의 모습이다.
사도 바울은 참 회개를 어떻게 설명했는가?(고후 7:9~11)
회개란 죄에 대하여 느끼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슬픔이다. 그것은 또한 성령께서 깨우쳐 주시는 어떤 구체적인 죄라도 버리려는 결심을 포함한다(겔 14:6, 슥 1:4). 진정한 회개는 인간의 악한 본성과 행동 때문에 신자를 깊은 절망의 상태로 인도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고후 7:10)이다. 진정한 회개는 우리의 죄가 아닌 예수의 의에 초점을 맞추도록 이끈다. 그것은 우리가 열심히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게 한다(고후 7:11, 히 12:2).
신약 성경을 보면 우리 죄의 크기는 그분의 은혜의 크기보다 절대 크지 않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롬 5:20)다. 이는 사도 바울의 경험에서도 맞았다.
딤전 1:14~17과 행 26:10~16을 읽어 보라.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바울의 죄악과 예수님의 의로움에 대하여 어떤 사실을 알게 되는가?
자신이 영광의 주를 핍박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바울은 무릎을 꿇고 진정한 회개와 고백에 이르렀다. 그리고 평생 동안 지칠 줄 모르고 자신의 죄악과 하나님의 은혜의 이야기를 전하였다. 회개는 그를 절망의 상태에 빠뜨리지 않았다. 대신 그것은 모든 이를 사랑하고 용서하시는 구주의 팔로 안내하였다. 죄에 대한 자백은 그를 이전보다 더 깊은 죄책감에 빠뜨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불의한지 보기보다 예수께서 얼마나 의로우신지에 초점을 맞췄다.
부가적용)
파스칼은 "사람의 가슴속에는 뻥 뚫린 구멍이 하나씩 있다" 고 말하였다. 하나님을 만나야 채워지는 것도 모르고 사람들은 이 뻥 뚫린 구멍을 채워보려고 돈을 쫓아 다녀보고 술도 먹어보고 기를 써봐야 소용이 없다. 어거스틴이 말하기를 "내가 주를 만나기 전까지 내 마음에 평안이 없었더니 주께서 나를 찾아오시매 내 빈 공간을 꽉 채웠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 내가 내 것으로 채울 때 평안이 없다. 죄 때문에 어떤 사람은 하나님에게 멀어질 수 있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 죄 때문에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기도 한다. 다윗의 회개는 하나님께서 보살피시는 곳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하나님은 죄를 사해주실 뿐 아니라 회개하는 자를 보호해주신다. 회개와 참회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깨우침이 있기를 바란다.
교훈 :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죄를 슬퍼하는 마음이며, 우리를 절대 절망에 빠뜨리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의를 바라보게 한다.
나의 삶 속으로
영감의 교훈
| 묵상 |
그대는 자신의 죄보다 큰 그리스도의 은혜를 경험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죄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죄는 매우 심각한 독성과 전염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나서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용서와 은혜는 가장 악독한 죄도 사할 수 있을 만큼 크고 강력했습니다. 바닷가에 남은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는 한두 번의 파도로 충분하지만 그 파도 뒤에 심연의 바다가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 죄를 사하기 위해 우주보다 큰 사랑과 은혜가 존재합니다.
| 적용 |
그대가 회개함으로 얻은 긍정적인 경험을 아래 적어 보십시오.
참된 회개 -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로부터 최고의 사랑을 받으셔야만 한다. 그리고 주님은 사람이 자기 동료를 위하여 신성한 관심을 가지도록 요구하신다. 구원받은 모든 영혼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사랑을 통해서 구원받을 것이다. 참된 회개란 이기심을 떠나 하나님과 인간 동료를 위한 성화된 애정을 나타내는 것을 의미한다”(가려 뽑은 기별 1권, 115).
기도
아버지, 저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봅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열어 놓은 산 길을 통해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갑니다. 저를 긍휼히 여겨 주시고 그리스도의 의로 덮어 주시옵소서.
셋째날(화) 참 회개와 자백
8월 6일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교사강해 3)
죄책감(Guilty)에는 참된 죄책감과 거짓 죄책감이 있다. 참된 죄책감은 하나님께 죄를 범했을 때 느끼는 정직한 감정으로, 악이 확장되는 것을 억제하고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께 다시 향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거짓 죄책감은 마음속에서 바리새인이 속삭이는 정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데서 시작된다. 흠 없이 완벽하게 살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총을 입게 된다는 거짓말을 받아들일 때 생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다.
우리는 레 5:5 요일 1:9, 사 1:16~18, 행 26:19~20에서 참회개와 자백의 특성에 대하여 어떤 영적 원리들을 배우게 되는가?
진정한 회개에는 언제나 구체적인 죄의 자백이 따른다. 성령은 우리에게 막연한 죄책감을 주시지 않는다. 그분은 우리의 부족을 확실하게 깨닫게 하신다.
“진정한 자복은 항상 구체적인 특성이 있음으로 특정 죄를 인정해야 한다. 죄 가운데는 오직 하나님께만 자복하여야 할 성질의 죄도 있고 또는 해를 입은 당사자에게 자복하여야 할 허물도 있다. 또 어떤 죄는 공적인 성격이 있기 때문에 공중 앞에 자복하여야 할 것도 있다. 어쨌든 모든 자복은 그대에게 책임이 있는 바로 그 죄들을 인정하는 것으로서 분명하고 요점이 있어야 한다”(정로의 계단, 38).
성령께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는 목적은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필요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회개한다고 하나님이 우리를 더욱 사랑하시는 것은 아니다. 회개는 오히려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더욱 감사히 여기게 한다. 우리가 자백한다고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통해 우리가 그분의 용서를 받아들이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한다고 더 사랑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덜 사랑하는 분이 아니다. 그분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 단지 우리의 삶 속에서 일하시는 성령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변수이다.
사실 우리의 영적 동맥이 죄의 오물로 막혀 있는 한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풍성한 복을 받는 데 지장이 있다. 죄는 성령의 음성에 둔감하게 하고 점점 그분께 반응하기 어렵게 한다. 그러나 회개와 자백은 우리의 마음으로 향하는 영적 통로를 뚫어서 넘쳐흐르는 성령의 임재와 권능을 받게 한다.
부가적용)
죄를 자백한다는 것은 하나님 편에 서서 죄를 죄로 인정하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과 나와 죄의 세 방면이 있다. 하나님과 죄는 양편에 있고 나는 그 가운데 있다. 죄를 범한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떠나 죄와 같은 편에 있는 것이다. 내가 죄를 범할 때 즉시 하나님과 멀어진다. 아담은 죄를 범한 즉시 하나님을 피하고 하나님의 낯을 감히 보지 못했다. 골로새서 1장 21절은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이라고 말한다. 범죄는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떠나도록 한다. 죄를 자백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죄를 자백한다는 것은 하나님 편으로 돌아와서 죄와 같이 있지 않고 죄의 반대편에 서서 죄를 유죄 판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빛 자운데서 행함으로 죄에 대하여 깊이 통회하는 사람만이 참되게 죄를 자백할 수 있다. 죄에 대하여 무감각하고 죄 짓는 것을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은 마음도 없이 입으로만 시인하기 때문에 그것은 근본적으로 죄를 자백하는 것이라고 간주될 수 없다.
교훈 : 우리는 우리의 죄에 대하여 슬퍼할 뿐 아니라 그것을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자복함으로 하나님의 용서와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죄를 구체적으로 지목하여 자백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회개하고 잘못을 뉘우치지만, 죄를 구체적으로 자백하는 일에는 종종 실패합니다. 그냥 오늘 잘못한 죄들을 용서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대에게 피해를 입힌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을 진정성 있는 반성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구체적인 자백은 우리로 죄의 깊이를 깨닫고, 은혜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결심과 함께 성령의 도움을 더욱 분명히 간구하게 합니다.
| 적용 |
그대가 구체적으로 자백해야 할 죄목을 마음속에 기록해 보십시오.
영감의 교훈
자복하게 하는 회개 - “진정한 회개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담당하게 하고 그 죄를 속임이나 외식이 없이 자복하게 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는 불쌍한 세리와 같이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 못하고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고 부르짖게 될 것이다. 자기 죄를 자복하는 자들은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될 것이니 이는 예수께서 회개하는 자들을 위하여 당신의 피로써 하나님께 호소하시는 연고이다(정로의 계단, 40~41).
기도
아버지, 죄에 대한 우리의 감각이 무뎌져 있습니다. 우리에게 예민한 양심을 주셔서 죄를 구체적으로 분별할 수 있게 하시고, 작은 죄의 동기라도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이길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넷째날(수) 참회개와 거짓 회개
8월 7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 12:17).
교사강해 4)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약4:4)고 말씀하셨다. 이는 세상과 벗된 것이 곧 간음하는 것이 된 것이다. 시73:27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음녀란 간음이란 바로 주를 멀리 떠난 자들이다. 에서는 그 마음이 세상의 재미에 빠졌다. 그래서 하나님께 그 마음을 두지 못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 히12:16-17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고 하신 말씀에서 음행은 세상과 벗된 것을 말한다. 주를 떠난 자는 음녀 같다고 말씀한 시 73:27절의 말씀처럼 에서는 자신의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야곱에게 팔아버렸는데 자신의 장자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 얻는 썩어질 부와 명예와 물질은 모두가 팥죽 한 그릇에 불과한 것들, 솔로몬의 모든 영광이 들의 풀한포기만 못한 영광이듯이 하늘의 영광, 하나님의 나라의 축복을 잃어버린 이 사건은 가장 큰 것을 하찮은 것으로 바꾼 결과로 온 것이다.
성경에는 회개하려고 했으나 하나님께 용서받지 못한 예가 몇 가지 있다. 그들은 울었으며 슬퍼했다. 그들은 죄를 자백했지만 용서받지 못했다. 바로, 발람, 에서, 유다의 이야기를 읽어 보라(출 12:29~32, 민 22:32~35, 히 12:17, 마 27:4).
회개 또는 자백에 관하여 이야기마다 공통적으로 흐르는 맥락은 무엇인가?
히 12:17 한 절이 모든 것을 잘 요약한다. 에서는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회개하였다. 바로와 발람과 유다와 마찬가지로 에서는 자신의 죄 때문에 가족과 하나님께서 겪은 고통으로 인해 마음이 아프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과거에 잃어버린 장자권에 있었다. 그는 마땅히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했던 것을 받지 못해 아쉬워했다. 그의 동기는 순수하지 못했다. 그의 슬픔은 자신에 관한 것이었다. 거짓 회개는 죄 자체보다 죄의 결과에 초점을 맞춘다.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은 하늘의 법칙이다. 사실 죄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나 회개는 죄 때문에 우리에게 미친 부정적인 결과를 슬퍼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때문에 하나님이 겪는 수치와 비애를 슬퍼하는 것이다.
진정한 회개에는 언제나 다음의 세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는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슬픔이다. 우리가 슬퍼하는 이유는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신 분을 우리가 아프게 했기 때문이다. 둘째는 우리가 저지른 특정 죄에 대한 정직한 자백이다. 진정한 회개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지 않고 다른 사람을 탓하지 않으며,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셋째로, 참회개는 항상 죄에서 돌아서겠다는 결심을 내포한다. 그에 상응한 삶의 개혁이 없다면 진정한 회개라 할 수 없다.
부가적용)
우리가 사는 세상과 하늘의 하나님의 주시는 천국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면 인간은 회개할 수 없다. 영생과 영원한 삶을 경험하지 못하고서는 이 세상의 것을 포기할 수 없고 이 땅의 것을 버릴 수 없다. 부자법관에서 네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을 때, 부자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떠나갔다. 이 세상의 재물과 영생을 비교할 줄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께로 그 마음을 돌릴 수가 있다. 회개는 이런 차이를 알고 하나님께 자신을 헌신한 자들에게서 올 수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3:1)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 영원의 세계를 아는 사람들만이 참된 회개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교훈 : 진정한 회개는 죄 자체를 슬퍼하고 그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시인하지만, 거짓 회개는 죄 때문에 생긴 일을 슬퍼하고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린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참회개를 하고 있습니까? 거짓 회개를 하고 있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반면 거짓 회개는 자기중심적이다. 그것은 죄의 결과에 관심이 있다. 그것은 죄 때문에 빚어진 부정적인 결과로 인해 슬퍼하는 일종의 감정적인 상태이다. 거짓 회개는 변명을 하고 남을 탓한다. 만약 변화에 보상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행위의 변화에 관심이 없다.
| 적용 |
그대가 진심으로 회개하려면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변명은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기 도
참된 회개 - “그러나 슬픔이 참회개를 이루는 것은 아니었다. 백성들은 저희 죄가 그들에게 고통을 가져온 까닭에 슬퍼한 것이지 저희가 당신의 거룩한 율법을 범하여 하나님께 욕을 돌린 까닭에 슬퍼한 것은 아니었다. 참된 회개란 죄에 대하여 슬퍼하는 것 그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악으로부터 결정적으로 돌아서는 것이다”(부조와 선지자, 557).
기도
아버지,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그 죄는 제가 저지른 잘못입니다. 아버지를 슬프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제가 죽어야 할 죄인입니다. 용서해 주시옵소서. 다시 죄를 짓지 않기를 원합니다. 성령의 도움을 주시옵소서.
다섯째날(목) 치유의 힘이 있는 자백
8월 8일
교사강해 5)
우리는 죄의 처리에 대한 하나님의 독특하신 방법을 깨닫게 된다. 이 세상의 법정에서는 죄를 자백하면 큰일이다. 죄를 자백하면 그것이 증거가 되어서 꼼짝없이 정죄함을 받고 그 죄에 대한 값을 치러야 한다. 그래서 죄를 짓고 잡혀 가면 고문을 해서라도 자백을 받아 내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죄 값을 치르게 하기 위해서 벌을 주시기 위해서 죄를 자백하라는 것이 아니다.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죄를 자백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국법을 어기는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벌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숨기고 사는 것보다는 자백을 하고 벌을 받는 것이 평생을 숨어서 고생하는 것 보다 나을지도 모른다. 죄를 짓고 도망 다니면 참으로 더 괴롭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죄를 자백하면 거기에 대해서 문책을 하시거나 벌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깨끗하게 용서를 해 주시기 위해서 자백을 하라고 하시는 것이니까 얼른 자백을 하면 마음도 편하고 용서도 받고 떳떳하고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사람들은 자백하기를 싫어한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기도 싫어한다. 속에서는 그 죄가 곪아 가고 있지만 겉으로는 깨끗한척하고 사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죄를 자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치료방법이다. 죄의 자백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용서하시기 위해서 하시는 최대한의 관용의 조치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자백은 죄의 종기를 찢어 그 해로운 고름을 짜도록 자신을 맡긴다. 자백은 여러 면에서 치유의 효과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한다. 자백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베푸신 용서를 받아들인다. 자백을 통해 우리는 은혜를 받고 치유를 경험한다. 자백은 또한 우리와 다른 사람 사이에 있는 장애들을 제거한다. 그것은 관계도 치유한다.
시 32:1~8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자백과 회개에 대하여 무엇을 가르치는가?
행 24:16을 읽어 보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행 24:16) 힘썼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죄책감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경우에 따라 다르다. 성령이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셔서 우리를 예수께로 이끌 때 생기는 죄책감은 좋은 것이다. 그런데 이미 고백한 죄에 대하여 계속 죄책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파괴적일 수 있다.
“이런 죄책감은 갈보리 십자가 아래 내려놓아야 한다. 죄책감은 생명과 참된 행복의 샘을 오염시킨다. 예수께서는 ‘그것을 모두 내게 맡겨라. 내가 너의 죄를 가져가고 평화를 주리라. 더 이상 자존감을 잃지 말라. 왜냐하면 내가 너를 내 피값으로 샀기 때문이다.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의 약한 의지를 강하게 하리라.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제거하리라’ ”(원고 9권, 305). 죄책감을 해결할 방법은 예수님이다. 그분의 은혜는 죄가 우리에게 지운 파괴적인 죄책감을 소거한다.
때로 우리는 죄를 고백한 후에도 여전히 죄책감을 느낀다. 원인은 무엇일까? 첫째, 어쩌면 마귀가 우리에게서 구원의 확신을 뺏으려고 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는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용서와 구원의 확신을 강탈하고 싶어한다. 둘째, 성령께서 우리가 다른 사람 사이에 무엇인가를 지적하고 계시기 때문일 수도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그 사람에게 우리의 과실을 고백해야 양심의 괴로움에서 놓일 것이다.
부가적용)
사람들은 설교를 들을 때 자신은 빼고 설교를 듣는다. 아 저건 아무개 집사님한테 하는 소리구나 아 저건 이 집사님한테 하는 소리구나 라고 생각하고 정작 자기 자신은 거기 해당이 되지 않는 사람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성경을 읽을 때나 설교를 들을 때나 남의 이야기로 들어서는 안된다. 성경말씀은 과거의 사람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다.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다. 오늘을 사는 바로 나에게 하신 말씀이다.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들으면서 아직도 남에게만 적용을 시키는 사람이 있다면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신앙의 기초도 없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바로 접니다 라고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말씀은 이 말씀을 듣고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이 되는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목사를 비롯해서 장로나 집사나 모든 사람들이 날마다 죄를 자백할 때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겉모습만 가지고 자꾸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하지 말아야 한다. 겉으로 나타난 모습만 가지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내가 더 나아 보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죄가 없어 떳떳해 라고 생각을 해 버리면 죄를 자백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하나님 앞에서 가만히 자기 모습을 살펴보시기 바란다. 얼마나 우리가 추한 죄인인가를 깨달을 때까지 자기를 살피시기 바란다. 그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아직 뭘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란다.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고 그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 죄를 자백하는 것이다. 자백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말로만 그렇게 인정을 하는 정도가 아니다. 자신이 정말로 죄를 지었음을 인정하는 진실된 마음이 있어야 한다.
교훈 : 회개로 이끄는 죄책감은 필요하지만 그 이후에도 계속되는 죄책감은 주님께
맡겨야 한다. 참된 자백은 근본적으로 치유의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어떤 죄에 대하여 오랫동안 죄책감에 시달리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어떤 죄를 하나님께 고백했다면 우리는 이미 용서받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죄에 대한 가책으로 계속 괴로워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바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은혜와 사랑으로 죄의 억눌림에서 벗어나 새롭게 출발하기를 바라십니다. 물론 죄는 우리 마음에 상처를 남깁니다. 그러나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신뢰하면 모든 상처는 치유될 것입니다.
| 적용 |
양심을 괴롭히는 죄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그대는 어떻게 기도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그리스도의 충분한 은혜 - “유혹이 그대를 엄습하고 근심과 걱정과 어두움이 그대의 심령을 둘러싸는 것처럼 보일 때, 그대는 그대가 마지막으로 빛을 본 그곳을 바라보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그리고 그분께서 돌봐 주시는 보호 아래 안식을 얻어라. 죄가 마음을 지배하고자 싸울 때, 죄책감이 심령을 억압하고 양심을 억누를 때, 불신이 마음을 가릴 때, 그리스도의 은혜는 죄를 정복하고 어두움을 몰아내기에 충분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라”(치료봉사, 250).
기도
제가 회개하기 전에 이미 용서하시는 하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따금 과거의 잘못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릴 때가 있지만, 저는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가 완전함을 믿습니다. 제 속에 있는 모든 죄의 상처를 치유하여 주시옵소서.
여섯째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8월 9일
“진정한 회개와 개선이 없는 자복은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한다. 생애에 확실한 변화가 있어야 하며, 하나님께 거리끼는 모든 것이 포기되어야 한다. 이것이 죄를 진정으로 슬퍼하는 결과이다. 우리 편에서 해야 할 일이 우리 앞에 분명 제시되어있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사 1:16, 17). ‘저당물을 도로 주며 강탈한 물건을 돌려보내고 생명의 율례를 지켜 행하여 죄악을 범하지 아니하면 그가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지라’(겔 33:15)”(정로의 계단, 39).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까지 기꺼이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용서에 대하여 어떤 핵심적인 교훈을 배워야 합니까? 그분이 그렇게 하셨다면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우리는 얼마나 기꺼이 용서해야 할까요?
➋ 그대의 경험에 비춰볼 때, 죄의 자백은 자신에게 얼마나 축복이 되었습니까? 그것은 주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대에게 어떤 면에서 도움이 되었습니까?
➌ 이번 교과에서 우리는 우리가 상처를 준 사람에게 잘못을 고백해야 할 필요성에 대하여 읽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방식에 대하여 항상 조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➍ 참된 회개는 죄에 대한 포기까지 포함합니다. 그런데 어떤 죄에 대하여 씨름하다가 다시 그 죄에 빠지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다면 이전의 회개가 진실하지 않았다는 뜻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죄의 본성을 염두에 두는 동시에 어떻게 성경적인 회개의 특성을 이해해야 합니까?
➎ 왜 회개가 부흥과 개혁의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입니까? 부흥과 개혁이라는 말 속에 우리가 회개해야 할 필요성이 어떻게 담겨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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