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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과 개혁 : 끊어진 관계를 치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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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과 개혁 : 끊어진 관계를 치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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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1일 안식일

일몰:오후 6시 31분

 

연구 범위

딤후 4:11, 몬 1~25, 고후 10:12~15, 롬 5:8~11, 마 18:15~17.

 

기억절 :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도입)

유명한 화가가 되기를 원하는 몇 명의 소년들이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방문했다. 그는 아주 조용한 가운데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한 소년이 화판 더미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작업이 방해를 받아 기분이 상했다. 그는 붓을 집어던지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소년에게 화를 내며 심하게 꾸짖었다. 소년은 울면서 화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다시 붓을 들고 예수님의 얼굴을 완성시켜 보려고 애썼지만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그의 창조성과 영감은 화를 낸 후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울고 있는 소년에게 다가가 말했다. "얘야, 미안하구나. 내 말이 너무 지나쳤다. 나를 용서해다오. 나는 너보다 더 잘못했구나. 너는 그저 화판에 걸려 넘어진 것뿐인데 공연히 화를 내어 나의 생명 안에 흘러드는 하나님의 영감을 막았구나. 나와 함께 다시 화실로 들어가지 않겠니?". 그런 후 그는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수 있었다. 화목하게 하는 삶에서 하나님의 평화와 기쁨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죄는 분열을 만든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파괴한다. 죄인의 마음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문제가 생긴다. 어려움이 임하게 된다. 하나님은 화목을 원하신다.

 

*교과를 구입하지 않으면 매일 공부할 가능성이 적습니다.

 

오순절 이후에도 신자들의 관계가 껄끄러울 때가 있었다. 신약 성경은 교회의 지도자들과 신자들이 그와 같은 문제가 생겼을 때에 대처했던 방식을 전달한다. 그 원칙들은 오늘날의 교회에도 매우 유용하다. 성경의 원칙을 사용하여 갈등을 처리할 때에 우리는 긍정적인 결과를 얻게 된다.

이번 주에 우리는 회복된 관계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과거의 위대한 영적 부흥은 관계 회복을 증진시켰다.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과 그리고 우리끼리 더 가까워지도록 일하신다. 교회는 교인들이 하는 말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복음의 위대한 능력을

증명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이러한 사랑이 없다면, 부흥과 개혁에 대한 우리의 논의는 무익하다.

 

결론 : 용서받지 못할 우리를 용서하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용서받지 못할 자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은혜 안에서 성장함에 따라 사도 바울도 동일한 용서의 정신을 배우고 가르쳤습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오늘 있는 친교 모임을 점검합니다.

❷ 영적 후견인들이 그들의 구도자들을 잘 돌보도록 안내합니다.

❸ 기도 제목을 가지고 함께 기도합니다.

 

첫째날(일) 분열에서 우정으로

9월 15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 4:11).

 

교사강해 1)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의 출발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다. 제1차 전도여행의 파트너는 바나바였다. 출발 당시만 해도 바나바가 주도적 위치에 있었지만, 여행 중에 바울이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제2차 전도여행의 출발은 바울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행 15:36) 바울이 제안한 목표는 제1차 전도여행 때 세운 교회들을 돌아보는 것이었다.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36) 형제들이 어떠한가? see how they are(NASB, RSV) How the new believers getting along(NLT) 말하자면 성도들의 신앙을 점검하고 자라도록 도와주자는 뜻이다. 목회의 양대 축은 전도와 양육이다. 바울은 전도만 해 놓고 방치하지 않고 자라도록 도와주려고 했다. 여기까지는 바울과 바나바가 의기투합 했다. 좋다! 함께 가자! 그런데 뜻하지 않은 돌발사태가 발생했다.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행 15:37-39) 바나바는 요한 마가를 데리고 가자 하고, 바울은 요한 마가는 절대로 데려 갈 수 없다고 맞섰다. 바나바의 입장에서 보면 요한 마가는 생질(누이의 아들)로써 혈육지정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마가는 장래성 있는 유능한 일군임에 틀림이 없었다. 혹시 과거에 잘못이 있었다 해도, 용서 못할 것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복음 사역은 어떤 불가피한 일이 아닌 이상 도중에 중단할 일이 아니었다. 바울은 특히 요한 마가가 불가항력적인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중도에 그만 둔 것에 큰 실망을 했다.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행 15:38) “떠나”라는 단어를 영문 성경은 “departed, withdrew, deserted, abandoned” 등으로 번역했다. 바울은 당시 요한 마가의 행동을 일행을 버려두고 떠난, 일종의 배신으로 생각했다. 한 번 배신한 자는 또 배신할 수 있다 그러니 절대로 두 번째 동반자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 바울의 사고방식이었다. 어찌 되었든지 바울과 바나바는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서로 다투다가 갈라섰다. 바나바는 요한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떠나버렸다. 뒤에 남은 바울은 실라를 파트너로 택하여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향하게 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서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아주 담담하다. 바울이 옳다든지, 혹은 바나바가 옳다든지 하는, 어떤 의견도 나타내지 않았다.

 

바울과 바나바는 예수님을 전하는 일에 서로 협력하였다. 그런데 그들에게 의견 충돌이 일어났다(행 15:36~39). 바울은 마가 요한과 같이 앞길을 두려워하는 자를 신뢰할 수 없었다. 마가 요한은 이전에 복음을 증언하다가 앞으로 닥칠 위험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를 떠나 집으로 돌아갔었다.

“이러한 이탈은 바울로 하여금 한동안 마가를 나쁘게 생각하여 혹독하게 판단하게 하였다. 한편 바나바는 그가 경험이 없는 까닭이라고 그를 변호하였다. 그는 마가가 목회 사업을 포기하지나 않을까 염려하였는데, 이는 그가 마가에게서 그리스도를 위한 유용한 일꾼이 될 자격이 있음을 발견한 까닭이었다”(사도행적, 170).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일꾼이었지만, 그들 사이의 문제는 해소될 필요가 있었다. 은혜를 전하는 사도라면 자신을 실망시킨 젊은 전도자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했다. 용서의 사도는 용서할 줄 알아야 했다. 마가 요한은 바나바의 긍정적인 지도를 받고 성장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변화로 말미암아 바울의 마음도 큰 감동을 받았다.

바울이 디모데와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를 읽어 보라. 바울과 마가 요한의 관계는 어떻게 개선되었는가? 바울은 그 젊은 전도자를 얼마나 신뢰하였는가?(골 4:10~11, 딤후 4:11)

성경은 바울과 마가 요한이 화해한 사실을 간략하지만 분명하게 다뤘다. 마가 요한은 바울이 믿는 동료가 되었다. 바울은 마가 요한을 자신의 동역자로서 골로새 교회에 강력하게 추천하였다. 그리고 순교 전에는 디모데로 하여금 그를 로마로 데리고 오라고 부탁했다. 왜냐하면 그가 바울의 사역에 유익하기 때문이었다. 용서받은 젊은 전도자로 말미암아 바울의 사역은 강화되었다. 그들 사이에 놓여있던 장애가 사라지자 그들은 복음을 위해 협력할 수 있었다.

 

부가적용)

누가는 왜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을 담담하게 전하고 있을까? 바울과 바나바는 교회가 하나 되게 하려고 노력했고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서로 다투고 갈라섰다. 성과가 없어서가 아니다. 몰라서도 아니다. 잘 알고 있고, 업적도 있다. 그런데도 서로 나뉘었다. 이것이 인간의 약점이다. 오늘날도 내 자신 속에 분열의 소지가 들어 있다. 오늘 나와 교인들 사이에, 혹은 가족 관계에서, 아니면 사회생활에서 하나 되지 못하고 나뉘는 일이 있는가?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 보라. 이것은 누구의 탓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 속에 있는 근본적인 약점, 혹은 결함 때문에 나타난 결과임을 먼저 인정하여야 한다. 그리고 항상 외치는 구호대로, 내가 먼저 하나 되기 위해 마음을 열어야 한다. 거창한 목표에는 합의하고 작은 일로 나뉘었다. 바울과 바나바는 제2차 선교 여행에 전혀 이견 없이 합의했다. 그런데 사소한 동행자 문제로 다투었다. 구원 문제가 걸린 교리적 문제도 아니다. 생활 윤리 문제도 아니다. 정의와 불의의 문제도 아니다. 무슨 큰 죄의 문제도 아니다. 단순히 누구와 함께 하느냐 하는 동행자의 문제이다. 그런데도 크게 싸웠다. 끝까지 싸우고 갈라설 때까지 싸웠다. 바울과 바나바가 그렇게 싸웠다는 것이 우습다. 우리 중 누구든지 이런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 중에 바나바만큼 착하고 선량한 사람이 있는가? 오늘 우리 중에 바울처럼 정의감에 넘치고 열정적이고 주님을 위해 충성하는 사람이 있는가? 우리보다 백 배 천 배 훌륭한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다투고 헤어졌다면 오늘 우리는 얼마든지 그럴 소지가 있다. 결국 인간 자신의 근본적 결함이 문제이다. 인간은 연약하여 분열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하나 되어 가는 것은 주님이 주관하시고 하나 되게 하시기 때문이다. 교회는 오직 주님을 신뢰해야만 한다. 주님은 분열 중의 교회를 통합시키신다. 주님은 타락한 교회를 정화시키신다. 주님은 지도자들을 회개케 하시고 각성시키신다. 주님은 부흥하게 하시고, 주님은 징벌을 내리시고 소멸케 하신다. 오직 주님만 위대하시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은 오직 주님 앞에 겸손히 순종할 뿐이다. 후일 바울 기록을 보면 마가는 바울에게 매우 유익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만큼 마가는 이 사건을 계기로 성숙되었다. 바울 역시 마찬가지다. 바울은 보다 관용적인 인물이 된다. 바울은 바나바와 마가와 화해하는 것은 물론, 그들이 얼마나 유익한 일군인지 여러 교회에 알렸다.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고전9:6)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갈2:9)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골 4:10)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몬1:24)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 4:11) 바나바 역시 마찬가지다. 세상에서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 해도 사소한 일로 다투고 양보하지 않고 갈라서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이점에 대해서 바나바 역시 크게 깨달았을 것이다.

 

교훈 : 깨진 관계를 회복하고 분열을 극복하며 화합을 이룰 때에 성령은 우리를 통해 더 큰 일을 이루실 수 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화합의 필요성을 얼마나 절실하게 느낍니까?

각자가 제아무리 유능할지라도 마음이 맞지 않으면 좋은 결과를 낼 수 없습니다. 특히 서로 다른 성향과 기질을 이해하지 못해 오해와 불신이 생기면 그 집단의 성장은 제자리에 머뭅니다. 이것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상대의 잘못을 용서하는 마음뿐 아니라 그 사람의 다른 점을 포용할 수 있는 정신도 필요합니다. 그래야 성령님이 우리 사이에서 더 강력하게 일하실 수 있습니다.

 

| 적용 |

그대는 지금 누구와 화합할 필요성이 있습니까?

 

영감의 교훈 기 도

하늘의 노래 - “손해를 입은 자와 그에게 손해를 입힌 자와의 면담을 온 하늘은 주목하고 있다. 실수한 자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는 책망을 받고 그의 실수를 자복하고 하나님과 그 형제에게 용서를 구할 때, 하늘의 햇빛이 그의 마음에 차게 된다. 분쟁은 끝나고, 우정과 신의는 회복된다. 사랑의 기름은 그 실수로 생긴 아픔을 없앤다. 하나님의 영은 그 마음들을 붙들어 매고 그 화합으로 인하여 하늘에는 음악이 울려 퍼진다”(복음교역자, 500).

 

기도

아버지, 우리가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은혜로 용서를 받고, 또 용납되었으니,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할 뿐 아니라, 우리와 다른 사람을 용납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주시옵소서.

 

둘째날(월) 종에서 아들로

9월 16일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몬 1:16).

 

도입)

바울 곁에 있었던 사람들은 대단히 많았다. 그러나 그 중에 가장 인상 깊은 사람이 있다. 오네시모이다. 오네시모는 노예요 절도범이었다. 빌레몬의 종이었다. 빌레몬은 소아시아 골로새에 살고 있는 부유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에게는 오네시모라는 노예가 있었다. 당시 그 주변에는 6천만명 가량의 노예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재산을 훔쳐 가지고 로마로 달아나 버렸다. 오네시모는 다시 체포되어 감옥에 갔다. 마침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가 붙잡혀 갇힌 감옥이었다. 바울은 그를 복음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찾아다니며 전도하는 바울에게 집어 넣어준 오네시모는 전도의 특별한 대상이었다. 바울은 나이가 많이 들었어도 늘 전도가 그의 사명이었다. “사랑을 위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몬 9) 바울은 감옥이라는 악조건의 자리에서도 언제나 전도였다.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몬 10) 감옥에서 오네시모는 전적으로 딴 사람이 되었다. 세상은 넓고도 좁았다. 오네시모는 바울이 잘 알고 있는 동역자 빌레몬(몬1)의 노예였다. 그래서 빌레몬에게 편지를 쓴 것이 바로 빌레몬서이다. 바울은 너무 좋아서 친필로 썼다(몬19).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가 복음으로 전혀 딴 사람이 되었음을 이렇게 말해주고 있다. 무익하던 사람이 유익한 사람으로 바울은 이렇게 오네시모를 평하고 있다. “나와 네게 유익하니라”(11) 오네시모는 복음적인 사람이 되고 나서는 모든 사람에게 유익한 사람이 되었다. 오네시모라는 뜻은 “유익한 사람”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름 그대로 오네시모는 모든 사람에게 유익한 사람이 되었다.

 

로마에서 수감되어 있을 때 바울은 골로새에서 도망쳐 온 오네시모라는 노예를 만났다. 바울은 오네시모의 주인과 친분이 있었다. 빌레몬서는 도망친 노예와의 관계 회복을 위해 바울이 개인적인 간청을 담아 친구에게 보낸 서신이다.

관계는 바울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그는 관계의 손상이 영적 성장에 해롭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빌레몬은 골로새 교회의 지도자였다. 만약 그가 오네시모에게 반감을 품는다면, 그의 신앙 증거는 퇴색될 것이었다.

몬 1~25을 읽어 보라. 관계를 회복하려면 어떤 원칙들이 중요한가? 핵심은 원칙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우선 바울이 노예 제도를 직접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다소 의외이지만, 그의 전략은 훨씬 효과적이었다. 복음은 이상적으로 모든 계급의 차이를 허문다(갈 3:28). 그래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노예가 아니라 예수 안에서 자신의 아들로 그리고 주 안에서 사랑하는 빌레몬의 형제로 돌려보낸다(몬 16).

바울은 도주한 노예들에게 미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은 언제든지 체포될 수 있었다. 그래서 매우 궁핍하고 극빈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빌레몬의 형제요 동역자가 된 오네시모에게는 밝은 미래가 있었다.

그는 빌레몬의 돌봄 아래서 음식과 숙소와 직업을 보장받았을 것이다. 훼손된 관계의 회복은 그의 삶에 극적인 변화를 일으켰을 것이다. 그는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가 되었고,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동역자가 되었다(골 4:9).

 

부가적용)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종이었다. 종노릇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어서 피해를 주고 도망간 오네시모를 회개시켜서 다시 빌레몬에게 돌려보내게 되었다. “네게 저를 돌려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12) 오네시모가 가겠다고 하니까 돌려보낸다고 한 것이다. 당시 기록을 보니까 그 때에는 그 지역에 6천만명의 노예들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노예에 대한 법이 엄격하였다. 사람들은 노예를 부리기 좋게 하기 위하여 영혼이 없는 동물이라고 불렀다. 살아있는 도구라고 말했다. 두 발 가진 편리한 동물이라고 여겼다. 노예는 주인의 사유재산이기에 마음대로 죽일 수가 있었다. 도망간 노예가 잡히면 잔인하게 죽였다. 사지를 짤라서 죽이는 것이 보통이었다. 운이 좋은 노예는 라틴어 Fugitivus 즉 도망자라는 머릿글자인 F 자를 이마에 찍어 일생 핍박당하였다. 이런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오네시모는 그래도 회개하고 자기 주인에게로 돌아가 다시 섬기겠다고 결심하였다. 보통 결심이 아니라 생명을 건 결단이었다. 복음의 능력이 아니고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었다. 바울이 아니고는 도저히 불가능한 결단이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 돌아가야 원칙이고,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용서하여야 원칙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반대였다. 빌레몬은 오네시모에게 분을 품고 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 응어리를 가지고 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용서하라고 강요할 수 없고, 오네시모에게 돌아가라고 강요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중간에 바울이 역할을 지혜롭게 하였다. 바울의 간절한 호소를 들을 수 있다.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 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이를 인하여 저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 이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진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너는 이 외에 네 자신으로 내게 빚진 것을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를 인하여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나는 네가 순종함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나의 말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14-21) 오네시모는 노예였다. 그러나 바울의 가장 큰 사랑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바울의 편지로 인하여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받아 드렸을 것이다. 빌레몬의 뜻은 <사랑을 간직한 자>라는 의미이다. 사랑을 간직하고 있는 이였기에 어쩌면 바울의 편지를 받고 오네시모를 노예에서 해방시켰을 지도 모른다. 오네시모는 잡혀 죽을가 두려워하던 암흑의 생활에서 깨어나 이제는 떳떳하게 광명 속에서 살게 되었을 것이다. 바울의 사랑과 빌레몬의 용서는 오네시모를 전적으로 다른 사람이 되게 하였을 것이다.

 

교훈: 복음의 이상을 위해서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당시의 신분 제도를 초월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와 자매로서 관계를 재정립해야 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그리스도 안에서 동료 신자들과 함께 가족 같은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강력하게 얽혀 있는 혈연관계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피는 그보다 훨씬 진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를 나눈 형제와 자매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에 속한 가족애보다 훨씬 더 강력한 가족애가 교회 안에 존재하기를 바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하늘 아버지를 모시는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 적용 |

그대가 그리스도 안에서 혈연 이상의 관계로 영접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영감의 교훈

연합하게 하는 그리스도교 - “기독교 신앙은 주인과 노예, 왕과 신하, 복음의 목사와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깨끗하게 하심을 찾은 타락한 죄인 사이에 굳은 연합의 유대를 갖게 한다. 그들은 모두 동일한 피로 씻음을 받았고 동일한 성령의 깨우치심을 받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된다”(사도행적, 460).

 

기도

아버지, 저에게 영적인 가족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육신에 속한 가족도 사랑해야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는 믿음의 형제와 자매끼리 더욱 사랑하고 연합하여 하늘 가족으로 준비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셋째날(화) 차이에서 보완으로

9월 17일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 12:7, 11~12).

 

교사강해 3)

우리 각 개인이 가진 은사는 무엇일까? 우리가 가진 은사를 너무나 간단하게 알 수 있다. 내속에서 생겨나는 불평과 불만 바로 그것이 그 자신의 은사이다. 이를테면 나는 물건이 제자리에 놓여있지 않고 종이 나부랭이가 나뒹구는데도 그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불편한게 없다. 오히려 밟고 돌아다닌다. 하지만 우리 집사람은 금방 불편해진다. 화가 치민다. 이 말은 나보다 내 아내가 탁월한 은사가 있다는 증거다. 하나님은 이 은사를 주신 목적이 상대방의 마음을 박박 긁어놓고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무기로 사용하라는데 있지 않다. 은사는 사랑하는 사람을 섬기라고 주신 선물이다. 바로 그때 내가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나는 뚜껑 여는 은사가 있고 내 아내는 뚜껑 닫는 은사가 있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몇 가지를 아주 잘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한 가지에 탁월할 수 있다.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이 좋은 학생들인데 학교 교육이 그들의 장점을 개발하는데 집중하기보다는 단점을 보완하는데 집중하고 있는 것을 본다. 다시 말해서 학생들이 잘하는 과목이 있는데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 잘하는 과목을 더욱 공부하기보다는 못하는 과목을 열심히 준비하여 평점을 올리는데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장점을 개발하기보다는 단점을 보완하는데 시간과 정력을 쏟게 된다. 우리는 무슨 일이던지 닥치면 다 할 수가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다 잘하는 것이 몇 가지는 있다. 그러나 정말로 탁월한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그것을 더욱 개발하고 그것에 맞는 역할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앞에서 보았듯이 고린도 교회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고전 3:5~11, 12:1~11, 고후 10:12~15을 읽어 보라. 바울이 부흥과 개혁을 위해 제시한 매우 중요한 원칙들은 무엇인가?

이 성경절들에서 사도는 교회의 연합을 위해 대단히 중요한 원칙들을 정리한다. 그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함께 일하고 있지만 여러 사역을 성취하기 위해 예수께서 다양한 일꾼을 사용하신다는 점을 지적한다(고전 3:9).

하나님은 경쟁이 아니라 협력으로 우리를 부르셨다. 각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돌보고 공동체를 섬기는 데 협력하도록 하나님께 은사를 부여받았다(고전 12:11).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은사란 없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필요하다(고전 12:18~23). 하나님이 주신 은사는 자아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성령은 봉사를 위하여 우리에게 은사를 베푸신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정신은 현명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런 비교를 통해 실망감이나 우월 의식을 느끼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그가 나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낙담에 빠질 것이다. 반면 나의 사역이 다른 이의 사역보다 훨씬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면 우월감을 느낄 것이다. 두 가지 태도 모두 우리의 효율성을 약화시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감화력 내에서 일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증언하면서 기쁨과 만족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의 사역이 다른 신자의 노력을 보완하면 교회는 천국을 위해 빠른 성장을 이룰 것이다.

 

부가적용)

은사는 하나님의 선물로, 은혜는 축복임에 반해 은사는 능력으로 주어지는 것으로서 사역과 봉사활동에 많은 유익을 가져올 수 있다. 그러므로 신자 개인 신앙생활에 있어 더욱 깊은 믿음과 주님께 대한 자신감이 생겨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고 싶은 강한 사명감을 갖고 사역을 해나가게 해준다. 은사를 받은 성도와 은사를 받지 않은 성도의 신앙생활의 차이를 말하기를 활과 화살을 가지고 온 시선과 온 힘을 팔에 집중하여 과녁을 겨냥해 쏘아 맞추는 것과 소총을 가지고 겨냥하여 단지 방아쇠만 당김으로 명중시키는 것과의 차이라고 비유하기도 한다. 이만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역하는 것이 쉽고 편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개인이 지닌 재능과 구분되며 영적인 일을 위하여 쓰여지는 능력이다. 은사는 서로 협력 보완할 때 더욱 완전해진다. 은사는 한 사람이 모두 소유하고 있는 능력이기보다는 여러 사람이 나누어 소유하고 있는 능력들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온 몸의 지체가 한데 모여 몸을 이루듯이 각 은사들도 한데 모여 교회를 이루어 나갈 때 사역이 활성화되고 부흥이 일어나 교회성장이 크게 일어남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하심은 먼저 교회를 양적으로 성장시키시며 이어 은사들의 적용으로 질적으로 성숙시키는 경로를 이루어 나가게 하신다. 은사는 은사를 지닌 곳으로 성령님께서는 인도하시기 때문에 먼저 주의 종이 사명과 은사를 확고히 받게 되면 자연히 은사를 지닌 성도들이 모이게 되고 이어서 다양한 은사들의 활성은 교회를 부흥시키는 계기가 되게 된다.

 

교훈 :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른 은사를 주셔서 각자의 차이를 극복하고 서로를 보완하여 교회를 세우고 천국을 확장하도록 계획하셨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동료 신자와 자신을 비교할 때 어떤 마음이 듭니까?

은사는 성숙한 마음으로 서로를 섬기며 돕게 합니다. 나는 나보다 신실하게 신앙생활하며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신자에게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반면 아직도 영적으로 미숙하여 나의 도움이 필요한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면 내가 그를 도움으로 그는 나를 돕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게 도움을 주는 그 사람도 나를 통해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자식은 부모가 있어서 살고, 부모는 자식이 있어서 사는 것처럼 우리는 영적 가족으로서 서로가 있어 삽니다.

 

| 적용 |

교회 안에서 비교 의식을 극복하려면 어떤 생각이 필요합니까?

 

영감의 교훈

그리스도의 나라 - “세상 나라들은 물리적 힘의 우월로 다스리지만, 그리스도의 나라에서는 모든 세상의 무기와 탄압 도구가 제거된다. 이 나라는 인류를 향상시키고 고상하게 한다. 하나님의 교회는 다양한 은사와 성령의 능력을 충만하게 받은 여러 성도가 모인 궁정이다. 그들은 그들이 돕고 축복하는 사람들의 행복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을 것이다”(사도행적, 12).

 

기도

아버지, 여기 있는 믿음의 식구들이 제게 주신 선물임을 믿습니다. 그들을 귀하게 여기고, 그들의 은사를 소중히 여기며, 그들을 돕고 섬김으로 하늘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행복과 기쁨을 맛보게 해 주시옵소서.

 

넷째날(수) 마찰에서 용서로

9월 18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0~21).

 

교사강해 4)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셔서 나를 용서하셨지만 나를 사랑하시지는 않아. 나는 하나님의 눈 밖에 벗어났고 크게 쓰임 받지는 못할거야.'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용서를 받은 후에도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항상 과거에 속박을 당하고 결박당하여 큰 꿈을 꾸거나 이루지 못한다. 분명 이것은 그 개인뿐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도 큰 손해이다. 하나님의 용서는 인간의 용서와 다르다. 하나님의 용서는 완전하다. 하나님은 아무리 악한 죄인이라도 그들을 심판하시는 것을 고통스러워하신다. 그분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무리 극악한 죄인이라도 그들이 죄에서 돌이켜서 사는 것을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랑을 믿고 마귀의 참소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주의 등 뒤로 던지신다(시 103:12), (사 38:17), (미 7:18-19), (히 8:12).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우리의 죄를 보시고 우리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죄와 상관없는 우리를 보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실 때 우리가 회개한 죄들을 보지 못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싫어하지 않으신다. 또,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고 죄를 용서하실 때 완전히 잊어버리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회개한 죄인들에 대하여 악감을 전혀 갖고 계시지 않으시다. 하나님은 그 누구에게도 낙인을 찍지 않으신다. 낙인은 사람이 아니라 짐승에게나 찍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회개할 수 있고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성경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잊어버리는 분으로 계시되어 있다. (사 43:25) "나 곧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그렇다면 어떻게 죄를 사하고 잊어버리는 것이 죄를 지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이 될 수 있을까?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우리를 사랑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죄를 용서한 후에 그 죄를 잊어버리지 않으면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서 우리의 죄를 도말하고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마음으로 어느 누구도 따돌리지 않으신다. (렘 29:1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의 소망을 주려는 생각이라."

 

용서란 무엇인가? 용서는 심각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의 행동을 정당화하는가? 나의 용서는 가해자의 회개에 달려 있는가? 나를 괴롭힌 자가 용서받을 자격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음 말씀들을 통해 우리는 용서의 성경적 본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롬 5:8~11, 눅 23:31~34, 고후 5:20~21, 엡 4:26~30)

그리스도는 주도적으로 우리와 화해하고자 하신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인도하여 회개에 이르게 한다(롬 2:4). 우리가 아직 죄인일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한다. 화해를 만족시키는 것은 우리의 회개와 자백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다. 우리가 할 일은 그분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사실 우리는 죄를 자백할 때까지 용서의 복을 누릴 수 없다. 이는 우리가 자백해야 하나님에게 용서의 마음이 생긴다는 뜻은 아니다. 그분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용서가 있었다. 단지 자백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받아들이게 한다(요일 1:9). 자백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변화시키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변화시키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죄를 회개하고 자백하도록 깨우침을 주는 성령의 능력에 굴복할 때에, 우리는 변화를 입는다.

용서란 우리의 영적 온전함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우리에게 과오를 행한 자들이 비록 용서받을 자격이 없다 하여도 그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그들보다 나에게 훨씬 많은 상처를 준다.

 

부가적용)

2006년 10월 2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아미시초등학교에 로버츠라는 사람이 침입해 총기를 난사했다. 이 사고로 5명의 어린이가 죽고 5명이 크게 다쳤으며 로버츠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전국은 슬픔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 슬픔은 곧 경이로움으로 바뀌게 되었다. 로버츠의 가족 역시 사랑하는 남편, 아버지, 아들을 잃었다는 점을 생각한 아미시 사람들은 사건이 나고 얼마 뒤 그들을 찾아가 위로하고 용서하였기 때문이다. 아미시 사람들은 로버츠의 장례식에도 참석했다. 어떤 기자가 두 손녀를 잃은 할아버지에게 “범인의 가족에게 분노가 치미십니까?”라고 질문을 던졌다. 할아버지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셨기에 그들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고백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시고.”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머리가 아닌 온몸으로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 필요하다. 용서는 우리의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도우심과 성령님의 역사에 의지할 때 가능하다.

 

교훈 : 우리가 전혀 자격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와 화목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에게 그렇게 해야 한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용서의 정신으로 젖어 있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용서란 내가 정죄하는 누군가를 놓아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정죄에서 우리를 놓아 주셨기 때문이다. 용서는 잘못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분께 잘못한 우리와 화목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에게 잘못한 자들과 화목해야 한다. 우리는 용서받았기 때문에 용서해야 하고 사랑받았기 때문에 사랑해야 한다. 용서는 하나의 선택이다. 우리는 상대의 행동과 태도와 관계없이 그를 용서하기로 선택할 수 있다. 이것이 진정한 예수의 정신이다.

 

| 적용 |

그대가 예수의 정신으로 용서하며 화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영감의 교훈 기도

용서의 근거 - “우리가 남을 용서했기 때문에 용서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용서받았기 때문에 용서하는 것이다. 모든 용서는 공로 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태도로써 우리가 과연 그 사랑을 내 것으로 삼았는지의 여부를 증명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2)고 말씀하신다”(실물교훈, 251).

 

기도

아버지, 하늘과 땅을 화목시키신 그 크신 뜻이 이 작은 마음에도 임하기를 바랍니다. 내게 잘못한 형제의 죄를 아버지의 용서에 맡기고 그 아픔에서 자유롭게 되어 형제와 화목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다섯째날(목) 원한에서 회복으로

9월 19일

 

교사강해 5)

원인이 자기 죄이든 실수이든 남 탓이든 간에 어렵고 힘든 문제가 생기면 ‘왜 내가 이런 골치 아픈 문제로 시달려야 하나!’라는 생각 때문에 고민을 할 때가 있다. 특히, 그런 경향은 자부심이나 자만심이 강한 사람들일수록 더욱 심하다. 문제를 만나서 끌탕하며 펄펄뛰는 것은 사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기는 하다. 그러나, 우리가 유의해야만 할 점은 끌탕하며 펄펄뛰는 태도가 문제 해결에 도움은커녕, 가뜩이나 어렵고 힘든 문제를 더욱 어렵고 힘들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죄나 죄로 인한 문제나 그 밖의 어떤 인생 문제를 만나게 될 때에는, 먼저 우리 자신이 살아 있다는 증거인 줄 알아야 한다. 실상, 시체가 모여 있는 공동묘지에는 죄의 문제는 물론, 그 어떤 문제도 생기지 않는다. 살아간다는 것은 문제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 인생 문제를 가능한 한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그 문제만이 주는 복된 결과를 얻어내야 한다. 예수님은 믿는 교인이 죄를 범할 경우에 대해 말씀하셨다. 현대 교회에 많은 문제가 있다고 하면서 초대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역설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초대 교회로 돌아가 보아도 별다를 것이 없다. 어느 시대에나,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은 교인이 된 것은 의와 진리와 사랑만 행하는 자동인형으로 변질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속죄 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의롭다고 일컬어 주신 것이지, 그가 의로워졌기 때문에 의롭다고 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좋은 교인이라도 죄나 실수를 범할 수 있으며, 따라서 교회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발생한 문제를 받아들이고, 주님 안에서 회개하며 해결을 시도하고, 더 나아가 그 문제만이 줄 수 있는 복된 결과를 얻어내는 것이다. 산 사람에게는 문제가 있게 마련이고, 문제에는 해결의 길이 있게 마련이다. 예수님은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 믿음의 형제가 언행으로 피해를 주거나, 명예를 손상시키거나, 재산상의 손해를 끼치는 등등 죄를 범하면, 묵과하거나 뒷전에서 비방하거나 소문내지 말고, 찾아가서 단둘이 만나 권고하라는 것이다. 그래야 범죄한 믿음의 형제가 공표되는 것을 막을 수 있고, 그의 범죄를 명확하게 일깨워 줄 수 있다. 또한, 그가 권고를 들을 경우에는 전보다 더 확고한 믿음의 형제로서의 그를 얻을 수 있다.

마 18:15~17을 읽어 보라.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다른 신자가 나에게 잘못했을 때에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세 단계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 말씀을 오늘날 상황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

마태복음 18장의 권고를 주실 때에 예수님의 바람은 문제를 가급적 확대시키지 않는 것이다. 그분의 의도는 당사자들이 서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마 18:15)고 말씀하셨다. 두 사람 사이의 문제에 여러 사람이 관여하면 그만큼 파장도 커진다. 사람들이 양분되면 전선이 형성된다. 그러나 기독교의 사랑과 이해심을 바탕으로 서로의 차이를 조용히 해결하려고 할 때 화해의 분위기가 조성된다.

우리가 우리의 차이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바로 그런 환경 속에서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일하신다.

그러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개인의 노력이 효과가 없을 때도 있다. 그런 경우에 예수님은 다른 한두 명을 부르라고 권유하신다. 화해를 위한 이 둘째 단계는 반드시 첫째 단계를 거쳐야 한다. 이 단계의 목적은 그들을 더 갈라놓기 위한 것이 아니라 화합시키기 위한 것이다. 초청을 받은 한두 사람은 피해자의 주장을 증명하거나 상대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긍휼 안에서 관계가 소원한 두 사람의 화해 과정에 참여하는 상담자와 기도 친구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든 노력이 소용없을 때가 있다. 예수님은 그럴 경우 문제를 교회에 내놓으라고 지시하신다. 물론 안식일 오전 예배를 중단하고 개인적인 문제를 다루라는 뜻은 아니다. 1차적, 2차적 노력으로 화해가 안 되었을 때에 문제를 다룰 만한 적절한 곳은 직원회이다. 이 단계의 목적 역시 화목이다. 한쪽을 비난하고 다른 쪽을 두둔해서는 안 된다.

 

부가적용)

예수님은 범죄한 믿음의 형제가 개인적 권고를 듣지 않을 경우에도 포기하지 말고, 모세의 율법을 좇아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고 하셨다. 또, 예수님은 이 방법마저 통하지 않을 경우에도 포기하지 말고, 교회에 말하여 공적으로 처리하라고 하셨다. 그래도 범죄한 믿음의 형제가 교회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그 때엔 그를 이방인이나 불의한 세리처럼 여기라고 하셨다. 믿음의 형제로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교인의 사적인 사랑의 권고는 물론, 교회의 공적인 사랑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범죄한 교인에 대한 마지막 사랑은 그 사랑을 끊는 것이다. 사랑이 죄의 심각성이나 병폐를 모르게 만들고, 같은 죄를 반복하게 한다면, 사랑이 아닌 악덕이다.

 

교훈 : 개인 간에 문제가 있을 때, 먼저 당사자들끼리, 2차적으로 한두 사람이 참여하여, 그래도 안 되면 교회에서 해결하라는 것이 성경의 교훈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에게는 해결되지 않은 갈등 관계가 있습니까?

갈등 상황이 있을 때 우리는 문제를 회피하든지, 아니면 상대에게 지든지, 아니면 내 요구를 관철시키든지, 아니면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서로 타협하든지, 아니면 서로의 주장을 최대한 인정하든지 다양한 방식으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성경의 가르침은 문제를 봉인하기보다 적극적으로 대화해서 해소하라는 것입니다. 문제를 진지하게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물을 때 성령님은 우리를 평화와 화목의 자리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 적용 |

갈등을 중재해 달라는 요청을 받을 때 조심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영감의 교훈 기 도

신속한 대화로 해결하라 - “분노를 그대로 두어 악의로 성숙하게 하지 말라. 그 상처가 곪기까지 두어 독한 말이 터져 나와 듣는 자의 마음을 더럽히는 것을 용납지 말라. 원한이 그대와 그의 마음에 계속하여 충만해지는 것을 허락하지 말고, 형제에게 가서 그 사건에 대하여 겸손하고 진실하게 대화하라”(복음 교역자, 499).

 

기도

하나님, 저를 평화의 도구와 화목의 중재자로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십자가에서 하늘과 땅을 연결시켰던 예수님처럼 저의 봉사와 사역을 통해 우리 교회와 가정에 다툼이 그치고 평화가 이르게 하옵소서.

 

여섯째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9월 20일

 

“일꾼들이 저희 영혼 속에 내재하시는 그리스도를 모실 때, 모든 이기심이 죽고 경쟁의식이 사라지며 으뜸이 되기 위하여 다투지 않고 일치단결의 정신을 앞세울 때, 또한 그들 스스로 성결케 하여 서로 사랑하는 정신을 보게 되고 느끼게 될 그때, 하나님의 허락은 추호도 틀림없이 성취되어 성령의 은혜의 소나기가 분명히 내리게 될 것이다”(가려 뽑은 기별 1권, 175).

 

“우리가 여호와의 큰 날에 우리의 피난처시요 높은 망대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서고자 한다면, 모든 시기심과 최고가 되고자 하는 모든 다툼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그것들이 다시 살아나지 못하도록 이 거룩하지 못한 것들을 완전히 뿌리뽑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주님 편에 두어야 한다”(마지막 날 사건들, 190).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골 3:12~17을 읽어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골로새교회에 제시하였던 그리스도인 자질들에 대해여 토의해 보십시오. 이런 자질들이 모든 갈등 해결의 기본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런 자질들은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예수께서 마 18:15~18에 주신 원칙들을 실천할 수 있게 합니까?

 

➋ 골 3:12~17의 가르침들을 다시 보십시오. 이 가르침들이 교회의 절실한 필요인 부흥과 개혁에 필수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➌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를 볼 때, 세계 복음화를 위해 필요한 부흥과 개혁을 가로막는 가장 큰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가르침이나 교리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이것들은 하나님이 세상에 전하라고 우리에게 주신 기별입니다. 문제는 우리 안에, 우리의 관계 속에, 우리의 작은 시기심, 다툼, 이기심, 높은 자리를 탐하는 욕망에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부흥과 개혁을 경험하기 전에 옆 사람 또는 목회자가 아니라 바로 내가 변화를 일으킬 성령의 능력을 간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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