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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과 제사(강해식 과정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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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과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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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9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50분

 

기억절 :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연구 범위 : 창 3:9~21, 출 12:21~27, 레 2:1~3, 창 22:1~19, 레 17:10~11, 빌 4:18.

 

도입)

인간이 죽은 제물과 산제물이 있다는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벧전 2:5에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고 하셨는데 산돌, 신령한 집이라는 모습은 인간은 본래 죽은 집과 같고 죽은 돌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간은 산돌, 즉 신령한 집이 되었다. 롬 12:1절에서 “거룩한 산 제물”이라 한 것은 썩지 아니할 제물을 말한다. 하나님 앞에 죽은 제물을 드린 것은 모든 인간은 이와 같이 죽은 제물과 같은 존재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떨치고 부활하신 산제물이셨다. 우리는 죽은 자가 아니라 산자, 곧 신령한 자이다. 그럼으로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산제사이다.

 

전체 복음의 중심에는 제사 개념이 있다. 성경에서 ‘제사’라는 말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다’ 또는 ‘무엇을 드리다’라는 개념을 묘사한다. ‘제물’ 또는 ‘제사’를 의미하는 히브리어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가까이 나아가거나 무엇을 드리는 행위와 관련이 있다. 같은 뜻의 그리스어는 ‘선물’이란 뜻을 포함하며 제물을 드리는 행위를 의미한다.

제물이라는 뜻의 영어 ‘오퍼링(offering)’도 ‘선물을 바치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오페레(offerre)’에서 유래했다. 제사라는 뜻의 영어 ‘새크리파이스(sacrifice)’는 라틴어 ‘사체르(sacer: 거룩한)’와 ‘파체레(facere: 만들다)’의 합성어로서 어떤 사물을 신성하게 만드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번 주에 우리는 신자들이 하나님께 드렸던 몇 가지 제사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언제나 제사를 요구하셨으며 지금도 그 요구가 계속되고 있음을 볼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한 제물을 제공하셨다.

 

안교 활동반과 교과 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구약 성경에 나오는 제사 제도의 중요성을 이해한다.

➋ 느끼기 : 제사를 통해 죄의 심각성과 구원을 위해 지불한 끔찍한 대가를 이해한다.

➌ 행하기 :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제사 제도의 목적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매일 묵상한다.

 

Part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여러분 가운데 동물의 도축 장면을 목격한 분이 있습니까? 그때 느낌이 어땠습니까?

❷ 에덴동산에서 드려진 첫 번째 희생 제사에서 아담과 하와는 무엇을 느꼈을까요?

❸ 구약의 여러 제사 제도는 어떤 의미와 목적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❹ 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바쳐야 할까요?

 

B. ❶ 우리는 생활 속에서 얼마나 다양한 이유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까?

❷ 구약의 여러 제사 제도의 특징에 대해 정리해서 설명해 주실 분 계십니까?(미리 부탁함)

❸ 아브라함이 경험한 ‘여호와이레’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합니까?

❹ 우리가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기억한다면 어떤 유익이 있을까요?

 

결론 : 구약의 제사 제도는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에서 당한 희생적 죽음의 다각적 의미를 효과적으로 묘사합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한 안식일(11월 중)을 정해서 교과반을 시범적으로 2개로 나눠서 운영할 계획을 세웁니다.

❷ 분반 시 봉사할 교사(리더)와 반장(예비 리더)을 정합니다.

❸ 교과반 시범 운영과 새로운 교사(리더)와 반장(예비 리더)을 위해 기도합니다.

 

첫째 날(일) 10월 13일

첫 번째 제사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1).

 

교사강해 1)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위해 가죽 옷을 지어 입힌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아담과 하와는 범죄한 한 후 저들은 자신의 영광스러운 몸이 썩어져 버릴 낮은 몸, 곧 육신의 몸이 되었음을 알았다. 저들은 자신들의 벌거벗은 몸을 보며 부끄러워하였다. 이는 저들의 몸이 더 이상 신령한 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해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신 것은 저들의 살이 결국 썩어져 없어져 버릴 몸이 된 저들의 몸을 가려주기 위함이었다. 아담과 하와가 지어 입은 무화과 잎의 옷은 썩어질 저들의 몸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저들이 입은 가죽 옷은 썩지 아니할 옷의 상징인데 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지 아니할 몸, 썩지 아니할 몸의 모습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고후 4:4)이신 예수 그리스도, 산돌이시요 신령한 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었다. 저들이 첫 번째 제사를 위해 드린 양은 죽음을 상징하지만 그 원형이신 그리스도는 산제사를 드릴 수 있는 참된 사람, 영원히 죽지 않을 사람 그리스도이셨다.

 

창 3:9~21을 읽어 보라.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의 반응은 무엇이었는가?

아담과 하와는 하나의 완전한 세계 즉 지상 성소였던 동산에서 살면서 창조주와 직접 교제하는 특권을 누렸다. 그러나 그들의 첫 번째 죄는 거의 해결 불가능한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야기했다. 하나님은 그 같은 신뢰의 파기에 대처하실 방법을 이미 계획하셨고 판결을 내리기 전에 먼저 그들에게 구세주에 대한 소망을 제공하셨다(창 3:15).

“아담과 하와는 죄수로서 의로우신 재판장 앞에 서서, 범죄가 초래한 선고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의 운명이 될 수밖에 없는 수고와 슬픔의 생활이나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선고를 듣기 전에 그들은 그들에게 희망을 주지 않을 수 없었던 말씀들을 들었다. 비록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그들은 최후의 승리를 기대할 수 있었다”(부조와 선지자, 66).

하나님은 선고를 마치신 후 즉시 그들의 벌거벗음과 수치를 가리기 위해 가죽옷을 만들어 주심으로 그들에게 승리의 궁극적 기초가 무엇인지 보여 주셨다. 물론 아무런 언급이 없지만, 우리는 무죄한 동물이 이 일을 위해 죽어야 했고, 그것이 일종의 제사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행 3:21).

문제의 장본인에게 의복을 제공했던 하나님의 행위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광야 성막에서 드렸던 제사가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보장했던 것처럼 에덴에서 제공된 의복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변치 않는 선의를 보증했다.

인간 역사의 초기부터 제사는 죄를 범한 인류가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제사 제도가 예표하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부가적용)

인간이 범죄함으로 살에 문제가 생겼다. 저들의 살은 더 이상 저들의 몸을 지켜줄 수 있는 영원한 집이 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창 17장에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을 때에 저들에게 할례를 행하라 하셨는데 저들의 생식기의 포피를 잘라내도록 하셨다. 그리고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창17:13)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이 살에 있다고 말씀하셨다. 인간의 살에 문제가 되어 결국 인간은 죽게 된 것처럼, 하나님께서 가죽 옷을 입히신 것은 인간을 덮고 있는 살 결국 피부의 문제였다. 더 이상 저들을 영원히 지켜줄 수 있는 영원한 옷이 아니었다. 성경의 많은 이야기가 옷의 이야기이다. 하늘에 가서 예복, 곧 우리의 예복이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은 쫓겨났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입혀주실 옷을 말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3:27) 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고후 4:4)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침례를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다는 말은 곧 썩지 아니할 영광의 몸으로 우리가 변화를 받았다는 것이다.

 

교훈 :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제공된 가죽옷은 한 동물의 죽음을 암시하며, 이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하는 최초의 제사가 되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하나님은 왜 죄 지은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실까요?

하나님의 반응은 죄 지은 아담과 하와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죄 지으면 죽는다고 하시더니 힘들더라도 자식을 낳으면서 살라고 하시고 부끄럽고 추울 테니 입으라고 가죽옷을 지어 주셨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뱀과 힘든 투쟁을 하더라도 한 후손의 등장으로 뱀을 이길 수 있다고 하시며 승리에 대한 소망까지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런 반응은 사랑 말고는 달리 이유를 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이미 자신을 희생할 각오를 하셨던 것입니다.

 

| 적용 |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한다면 그대는 그분이 제공하시는 의의 옷으로 어떤 죄의 문제를

가리고 싶습니까? 그 문제를 가지고 마음속으로 기도하십시오.

영감의 교훈

예수께서 준비하신 옷 -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옷을 하나 준비하셨다. 그것은 그분 자신의 의의 두루마기이며 그분께서는 믿음으로 그 옷을 받아들이는 회개하고 믿는 모든 영혼들에게 그것을 입히실 것이다. …무화과 잎으로 된 치마로는 우리의 벌거벗은 모습을 절대 감추지 못할 것이다. 죄는 반드시 제거되어야 하며 그러자면 그리스도의 의의 옷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죄인들을 덮어야 한다”(하늘, 378).

 

기도

처음부터 우리를 사랑하셨고, 처음부터 우리를 위해 죽기를 각오하셨던 주님, 감사합니다. 변치 않는 그 사랑 앞에 오늘도 나의 허물과 과오를 가지고 나아옵니다. 사하여 주시고 의의 옷으로 덮어 주시옵소서.

 

둘째 날(월) 제물의 종류

10월 14일

 

“이는 번제와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와 위임식과 화목제의 규례라”(레 7:37).

 

교사강해 2)

레위기는 여호와께 드려야 할 5대 제사의 규례로서 시작된다. 그런데 이러한 레위기의 시작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왜냐하면 건축된 성막의(출40:17) 주된 목적이 제사였고, 따라서 성막이 완성된 지금 그곳에서 드려질 제사의 규례가 주어지는 것은 당연한 논리요 순서이기 때문이다. 제사의 종류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5대 제사로 분류하기도 하고 6대 제사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러한 차이는 제사장의 위임식 때 거행하는 위임제를 여기에 포함시키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른 차이인데 위임식은 제사장의 위임식 때만 행해진 제사로서 모든 이스라엘에게 관련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구약 시대에 신자들은 여러 경우와 개인 사정에 따라 제물을 가지고 왔다. 그들이 드릴 수 있도록 허용된 제물에는 정결한 동물, 곡류, 음료 등이 포함되었다. 동물 제사는 성전 봉사에서 가장 오래된 요소로서 제사장 봉사와 함께 이스라엘 예배의 중심을 차지했다. 그러니 희생 없는 종교 생활이란 생각할 수 없었다.

다음의 성경절은 어떤 종류의 제사를 설명하고 있는가? 출 1 2:21~27, 레 2:1~3, 출 25:2~7, 레 4:27~31.

하나님은 신자들이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제사 제도를 수립하셨다. 이것이 여러 종류의 상황, 즉 감사, 기쁨과 축하의 표현, 선물, 용서를 구하는 탄원, 회개의 간구, 헌신의 상징과 배상의 의미로 제물을 바치게 했던 이유이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제사는 번제(레 1장), 소제(레 2장), 화목제(레 3장), 속죄제(레 4장), 속건죄(레 5:14~6:7)였다. 처음 세 제사는 자원하여 드리는 제사로서 우리와 우리의 소유가 모두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번제는 제물을 드리는 이의 전적인 헌신을 상징한다. 소제는 음식이나 가축이나 무엇이든 우리의 모든 물질적 소유가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상징한다. 화목제는 참여하는 사람이 제물의 일부를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제사였다.

그리고 나머지 두 제사는 의무적으로 드리는 제사였다. 이 제사들은 비록 잘못의 결과가 따를지라도 그 잘못이 ‘치유’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상기시켰다. 속죄제로 불리는 정결 제사는 의식적 부정이나 죄로 인한 도덕적 부정을 인식한 이후에 드리는 제사였다.

 

부가적용)

5대 제사를 요약해 보면 첫째, 번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구원의 희생을 상징'함과 동시에 그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헌신하고 그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아갈 것을 상징한다. 둘째, 소제의 영적 의미는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영적 양식의 공급자가 되실 뿐만 아니라 자신 스스로 생명의 떡이 됨을 상징하는 동시에(요6:32-35), 이러한 영적 양식과 일용할 육적 양식까지도 공급받는 성도들이 드려야 할 감사의 의무를 상징한다. 한편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는 명령은 '영원한 계약'을 상징하는 '소금'(민18:19,대하13:5)을 통해 제사 드리는 자가 하나님과의 영원한 계약 관계에 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제사 드리는 자를 결코 버리지 않을 것과 제사 드리는 자는 그 계약법을 지켜야 할 영원한 의무가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셋째, 화목제의 영적 의미는 화목제의 성격이 드러내는 바 그대로 하나님과 죄인을 화목케 하는 '화목 제물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과(롬3:25,엡2:13,골1:20),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는 성도들의 친교인 '성만찬에 대한 예표'이다(고전10:16) 넷째, 속죄제의 목적은 '범죄에 대한 용서'를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목적은 속건제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 둘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1) 범죄의 성격적 차이로서 속죄제가 하나님께 범죄한 자, 즉 '율법을 범한 죄'를 위한 제사였던 반면에, 속건제는 인간에게 범죄한 죄, 즉 '도덕적인 범죄의 대속을 위한' 제사였다. 2) 속죄제는 속건제와는 달리 '범죄한 일을 배상할 수 없는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제사였던 반면, 속건제는 '배상이 가능한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제사였다는 점이다. 속죄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신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상징한다. 그리스도는 실로 속죄 희생의 어린 양이 되셔서(벧전1:19) 모든 인류의 대속물이 되셨는데, 그의 죽음의 장소는 속죄제 희생 제물이 진 바깥 정결한 곳에서 불살라진 것처럼 예루살렘 성 바깥의 골고다 산상의 고통스런 십자가였다. 다섯 번째, 속건제는 성도가 신앙생활 가운데서 범하기 쉬운 죄를 범했을 때 드리는 제사로서 그러한 범죄는 진리를 배반하거나 하나님을 배반하는 죄,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거나 성령의 사역을 거스리는 죄가 아닌 '실수와 실족의 범죄'를 뜻한다. 그러므로 속건제는 구원에 관련된 원죄에 대한 회개나 기도가 아닌 날마다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짓게 되는 육적인 죄, 즉 '자범죄에 대한 회개와 기도에 대한 상징'이다.

 

교훈 : 하나님은 백성들이 다양한 이유로 제사를 드림으로써 자신에게 가까이 나아오도록 제사 제도를 수립하셨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만약 그대가 구약의 백성이었다면 여러 제사는 그대에게 어떤 의미였을까요?

내가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여러 제사는 번거롭고 소모적인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 된 자녀를 만나고 싶어 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한다면 삶의 모든 일이 그분께 나아가야 할 이유와 기회임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면 여러 이유로 그분께 예배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의 삶 전체가 그분께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 적용 |

그대가 하나님께 예배해야 할 여러 이유를 아래에 적어 보십시오.

 

영감의 교훈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제도 - “유대의 제사 제도는 그리스도 자신이 친히 제정하신 것이다. 그분은 그들의 희생 제도의 기초가 되시고 모든 종교 예식의 큰 원형이 되신다. 제물을 드릴 때에 흘리는 피는 하나님의 어린양의 희생을 표상한 것이며, 표상적으로 드린 모든 제물은 하나님의 어린 양 자신과 그의 생애 속에서 성취되었다”(실물교훈, 126).

 

기도

감사할 이유와 찬양할 이유와 사죄할 이유 그리고 간청할 이유를 가지고 거절하는 법이 없으신 아버지께 나아가오니 예수님의 공로로 인해 저의 예배를 받아 주시옵소서.

 

셋째 날(화) 모리아에서의 제사

10월 15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창 22:13).

 

교사강해 3)

창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번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보여주는 순종으로 그는 자신의 순종과 믿음의 증명을 위해 자신의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려 하였고, 그러한 믿음과 순종을 인정하신 여호와께서는 그를 위해 미리 준비해 놓으신 양을 제물로 삼아 번제를 드리게 하심으로 아브라함의 헌신과 믿음을 인정하셨다. 번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구원의 희생을 상징'함과 동시에 그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헌신하고 그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아갈 것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번제의 영적 의미는 한마디로 '그리스도의 희생과 성도들의 헌신'이라고 할 수 있다.

 

창 22:1~19을 읽어 보라. 아브라함은 제사에 대하여 무엇을 깨달았는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신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의 삶에는 항상 하나님의 약속이 동반되었다. 하나님은 그에게 땅에 대한 약속, 후손에 대한 약속, 복을 주겠다는 약속, 아들을 주겠다는 약속 그리고 이스마엘을 돌보겠다는 약속을 주셨다. 아브라함의 제사는 언제나 이러한 약속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창세기 22장에서 그는 아무 약속도 받지 못했다. 오히려 살아있는 약속인 그의 아들을 제물로 바쳐야 했다.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함으로써 아브라함은 그 어느 것보다 하나님이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을 죽이라고 명령하신 것은 그의 믿음을 시험하시는 동시에 복음의 실재를 그의 마음에 새겨 주기 위함이었다. 그 무서운 시련의 어두운 날 동안 그가 참은 고통은 그가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무한하신 하나님이 사람을 구속하기 위하여 치르신 희생의 위대함을 깨닫게 하려고 허락되었다. 어떤 다른 시험도 그의 아들을 제물로 드리는 것과 같은 영혼의 고통을 아브라함에게 일으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고통과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하도록 내주셨다”(부조와 선지자, 154).

아브라함은 제사에 관하여 두 가지 본질적인 원칙을 이해하였다. 첫째,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구원의 도구인 참제물을 가져올 수 없다. 제물을 제공하실 분은 하나님이시다. 아브라함은 그곳의 이름을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는 의미의 “여호와이레”로 칭함으로써 이 원칙을 기념하였다. 둘째, 제사는 대속적이라는 사실이다. 제물은 이삭의 생명을 구했다. 숫양은 이삭을 “대신하여”(창 22:13) 희생되었다. 하나님이 준비한 그 동물은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사 53:6~7, 행 8:32).

 

부가적용)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하신 이삭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한 상징으로서 동물 대신 사람이 실제로 제물로 드려져야 했을 인간의 운명을 말해준다. 동물을 잡아 죽이는 행위는 모두가 죽은 제사일 뿐이다. 살아있는 제물, 산 자의 제물만이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는데 오직 산 자로 여겨질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하나님 앞에 산제사를 드릴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그것은 진정한 산제사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제물로 드린다 해도 인간은 다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제물이 아니다. 그는 죽었으나 다시 살아나신 산 제물이었다. 이는 아브라함이 드린 제사가 대속적 죽음의 제물이 되실 예수 그리스도를 표상하고 있지만 하나님 앞에 모든 인간은 죽은 제물이다. 오직 산제물,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신 산자의 하나님이신 하나님께 오직 진정한 제물로 인정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산제사를 드리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려지는 제사일 뿐이다.

 

교훈 : 모리아에서 이삭을 제물로 바쳐야 했던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미리 준비한 숫양으로 제사를 드림으로써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은 그대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갈대아 우르를 떠나면서 시작된 신앙의 여정에서 아브라함에게 최고의 순간은 바로 모리아산에서의 경험이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그에게 이 경험을 안겨주시기 위해 그를 인도하셨습니다. 그를 복의 통로로 삼으시고 열방의 아비로 삼겠다는 모든 약속은 바로 하나님이 준비하신 최고의 선물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이레’는 누구에게나 최고의 신앙 경험이 됩니다.

 

| 적용 |

우리가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기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영감의 교훈

죄인의 대속물 - “이삭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려진 어린양은 우리 대신 희생당하시기로 되어 있던 하나님의 아들을 대표하였다.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여 죽을 운명에 처했을 때 하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쳐다보며 죄인에게 ‘살라. 내가 대속물을 찾았노라’고 말씀하신다”(부조와 선지자, 154).

 

기도

아버지, 저는 아버지께 복받고 성공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서 그분을 믿고 구원 얻은 것보다 더 큰 복과 성공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여기에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이 제게 주시려는 모든 것이 담겨 있음을 믿고 감사드립니다.

 

넷째 날(수) 생명으로 생명을 대신함

10월 16일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

 

교사강해 4)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 피에는 생명이 있다고 선언한 이유는 생명을 구원하는 것은 생명 만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원리를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준 가죽옷의 원리에서 발견 할 수 있으며 애굽 최후의 날인 유월절 날, 이스라엘 백성의 집 문설주에 바른 양의 피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출애굽하기 전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린양을 잡아 저녁식사를 하고 그 양의 피를 그들의 집 문설주에 발랐다(출 12:7-13). 그날 밤 온 애굽 땅에서 장자를 죽이던 죽음의 사자가 문설주에 피가 있는 집만은 건너 뛰어 갔다고 하여 유월절이 되었다. 그래서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은 죽음을 면하였다. 그러면 어찌하여 피가 있는 집은 죽음의 사자가 건너뛰었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죽음의 사자는 그 집에서 받아야 할 죽음의 대가를 양의 피로 대신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유월절에 죽어 피를 제공한 양들은 이스라엘의 장자를 대신하여 죽은 짐승이요, 문설주의 양의 피는 생명을 대신 지불한 표시였다. 죄란 죽음을 요구하며 속죄를 받으려면 죽음으로 죄의 대가는 지불되어야 한다. 피는 반드시 흘려져야 한다. 이 엄숙한 사실 앞에 죄인된 우리 모두 다시 한 번 경건하게 나의 죄의 심각성을 자성하여야 한다. 그리고 나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어설프게 몇 가지 선행을 하였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내가 직접 죽어 죄의 값을 지불하던지 아니면 누가 나를 대신하여 지불해 주어야 속죄를 받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심각하게 받아드려야 한다. 아직도 내가 무엇 선한 일을 행하여야 지난날의 죄를 용서받고 사함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분은 오늘 이 시간부터 나의 죄의 대가는 나의 죽음이요 피 흘림이 있어야만 용서를 받는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 다시 선행으로 구속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추호도 가지지 않기를 바란다.

 

레 17:10~11을 읽어 보라. 하나님은 피에 어떤 역할을 부여하셨는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떤 피도 먹지 말라고 지시하신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이것을 금지하신 흥미로운 이유가 나타난다. 피는 생명을 대표한다. 그래서 희생 제물의 피를 인간의 생명을 위한 대가로 삼으셨다. 생명을 상징하는 피로 다른 생명을 구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대신하여 숫양의 피로 제사를 드렸던 모리아산에서 이러한 대속의 원칙이 분명해졌다. 이것은 고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시했던 하나님의 법적 요구에 확고한 기반을 두고 있다.

창세기 22장처럼 하나님은 속죄의 수단을 준비할 사람은 자신임을 보이셨다. 히브리어로 보면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레 17:11)에서 ‘내’가 강조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속죄물을 준비할 수 없다. 하나님이 주셔야 한다.

이런 개념은 희생 제도가 있는 다른 종교의 개념과 다르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께 나아가서 그분의 진노를 달래는 방법을 아는 자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으로 하여금 그분의 거룩한 임재로 나아올 수 있도록 수단을 제공하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친히 대속에 필요한 피를 제공하신다.

삼상 15:22과 미 6:6~8을 읽어 보라. 제사 제도에는 어떤 위험성이 있는가?

하나님은 제사 제도로 우리의 마음을 대체하려고 의도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우리는 제사를 통해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열어야 한다. 만약 제사가 하나님과 우리의 영적 관계의 표현이며 모든 제사는 더 큰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관점을 놓친다면, 우리는 희생 제사가 마치 속죄를 이루는 자동 장치로 오인하기 쉬울 것이다.

 

부가적용)

피가 속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은 다른 의미로는 깨끗하게 씻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즉 대신 흘리는 피는 그를 깨끗하게 하여 주고 거룩하고 성결하게 하여 준다는 뜻이다. 이 사실을 구약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례로 보여 주고 있다. 대제사장이 임직할 때 수양을 잡아 그 피를 제사장의 오른편 귀뿌리와, 오른편 엄지손가락과, 오른편 엄지발가락에 발랐다(레 8:22). 이것은 모두 성별을 의미한다. 문둥병에 걸렸다 깨끗하게 치유되어 가정으로 돌아 왔을 때도 어린 수양 한 마리를 잡아 속건제를 드렸는데, 이때 속건제의 피를 그 사람의 우편 귀뿌리와 우편 엄지손가락, 그리고 우편 엄지발가락에 바르도록 되어 있다(레 14:14). 이것 역시 성결케 하는 결례를 의미한다. 이상의 행위는 피가 그를 정결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사례들이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운 언약의 피니라"(출 24: 8). 이스라엘은 모세가 피를 뿌리므로 피의 세례를 몸으로 받기도 하였다. 우리도 이런 피를 받아야 한다. 문설주에 바르듯 우리의 마음에도 뿌려져야 한다. 우리의 생활 현장에도 발라야 한다. 그래서 거룩해 져야 한다. 성결해져야 한다.

 

교훈 : 구약 성경은 생명을 상징하는 피가 생명을 속할 수 있다는 개념을 가르친다. 그런데 모든 제물의 피는 우리의 대속주이신 그리스도의 피를 예표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하나님은 우리가 ‘피의 제사’를 통해 무엇을 깨닫고 행하기를 바라실까요?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제사 외에 하나님이 정말 바라는 것은 우리 마음이 그분께로 가는 것이다(시 51:16~17). 이스라엘 선지자들은 거짓 경건으로 위장한 백성들을 일관성 있게 책망하며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라고 요구하였다(미 6:6~8, 사 1:10~17 비교).

 

| 적용 |

고대 이스라엘 백성처럼 제사의 진정한 의미를 놓치는 실수를 범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영감의 교훈

엄숙하고 중대한 사업 - “제사로 하나님을 찾는 일은 매우 엄숙하고 중대한 사업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제물이 당신 앞에 가납되고, 원수를 정복하려는 저들의 노력에 당신의 축복이 같이할 수 있도록, 당신의 백성이 저희 마음을 살피고 죄를 회개하기를 요구하셨다”(부조와 선지자, 617).

 

기도

하나님, 제 작은 마음을 하나님께로 엽니다. 제물을 준비하신 분도, 제사를 만족시키신 분도 모두 하나님이셨습니다. 저는 그저 그 사랑과 은혜를 감사함으로 받아들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마음이 제 삶을 통해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다섯째 날(목) 오늘날의 제사, 산 제물

10월 17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교사강해 5)

예수께서 인간을 치료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인간은 모두가 죽을 병에 걸린 자들이며 죽도록 되어 있는 자들이다. 예수께서 이 죽음으로부터 인간을 살리시기 위해 오셨다.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간은 산자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5],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영생은 시작되었고 산자가 된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제사는 당연히 산제물인 제사이다. 산제사란 우리의 신분의 본질적 변화에 기인한 것이다. 우리가 드리는 제물은 더 이상 죽은 제사가 아니라 산제사를 드리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예베에 있어서도 우리는 죽은 자처럼 드릴 예배가 아니라 살아있는 자, 산자가 된 자들의 감격과 기쁨으로 살아있는 생생한 은혜로 드리는 제사, 곧 예배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음으로 더 이상의 동물 제사는 필요 없지만, 신약 성경은 다른 종류의 제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다음의 성경절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는 어떤 제물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가? 롬 12:1~2, 빌 4:18, 히 13:15~16, 벧전 2:5.

제사 제도에 사용되었던 용어는 하나님께 온전히 성별된 삶을 산다는 의미의 초기 기독교 개념을 설명하는 데 잘 맞았다. 사실 바울은 자신의 순교에 관하여 생각하면서 자신을 ‘전제(奠祭: a drink offering)’로 묘사하였다(빌 2:17, 딤후 4:6).

롬 12:1이 우리에게 주는 기별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이 교훈을 우리 삶에 나타내야 하는가?

“산 제물”이란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뜻이다. 그것은 내적 존재의 변화와 함께 육체의 봉헌을 포함한다(롬 12:1~2).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유일의 목적을 위하여 자신을 거룩하게 구별해야 한다. 롬 12:1~11의 설명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제물이시요 구원의 방편이신 그리스도를 주시는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 때문에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드려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닮도록 호소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바르게 이해하면 하나님께 생애를 구별하고 사랑으로써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을 살게 된다. 하나님의 뜻에 자신과 자아의 욕망을 굴복시키는 것만이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희생에 합당한 반응이다.

 

부가적용)

"사람은 삶이 무서워서 사회를 만들고 죽음이 무서워서 종교를 만들었다"고 어느 철학자가 말한 적이 있다. 그 분의 말대로 사람들은 문명사회를 만들어 냈고 또 수많은 종교를 만들어 숭배하고 있다. 그래서 아무리 과학이 발달되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은 신을 섬기고 종교를 찾게 되어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와 미신들이 있다. 인간은 종교 활동을 함으로써 신이라고 하는 초자연적인 힘을 이용하여 안녕과 평화를 유지하고 건강과 행복을 지키며 자녀의 번성과 물질의 풍요를 누리고 죽은 후에 좋은 곳으로 가려고 한다. 이것을 사람들은 복이라고 한다. 그래서 복 받기 위해 종교 생활을 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모든 종교가 제사를 지내는데, 그 제물은 짐승들을 잡아서 피를 흘리고 죽은 것을 바친다. 구약의 종교도 그랬다. 결국 그 제물들은 죽은 제물이요, 그 죽은 제물을 바치는 제사도 죽은 제사이다. 구약 시대는 죽은 제물이 불타는 것을 보면서 제사를 지냈기에 예배를 본다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 계신 분이시기 때문에 산 제물, 산제사를 원하시지 죽은 제물, 죽은 제사를 원치 않으신다. 왜 우리가 산제사를 드려야 하는가? 우리가 드리는 제물의 원형이신 그리스도는 산제물이시다. 부활하신 제물이시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려지는 예배가 진정한 산제사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려는 예배,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살게 된 우리가 곧 산제물인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제물이 곧 산제물이요, 산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교훈 : 구약의 희생 제도는 종결되었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반응으로써 그분의 뜻에 따라 사는 산 제물이 되어야 한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자신의 삶을 ‘거룩한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결국 영적, 교리적 진리에 대한 이해와 다른 사람을 위한 봉사의 삶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삶의 모든 면이 하나님을 향한 신자의 진정한 헌신을 표현해야 한다. 참예배란 내적, 영적인 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타적인 봉사의 행위도 포함한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해 오셨는지 생각해 보라.

 

| 적용 |

그대는 자신의 삶을 어떻게 하나님께 바치기로 결심합니까?

 

영감의 교훈

 

각 사람의 의무 - “우리는 우리의 몸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제물을 할 수 있는 대로 완전하게 만들고자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육체적, 정신적, 도덕적 복리에 필요한 모든 교훈을 하셨다. 그러므로 모든 면에 있어서 우리의 생활 습관을 하나님의 표준에 일치시키는 것이 우리 각 사람의 의무이다”(증언보감 2권, 214).

 

기도

아버지, 죄 많은 이 인생을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의 감화로 흠이 없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예수님을 통하여 성령의 뜻과 은사를 따라 행하는 모든 착한 일을 향기로운 제물로 받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섯째 날(금)

10월 18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천사들까지라도 구속의 오묘, 곧 하나님의 아들이신 하늘의 사령관께서 범죄한 사람을 위하여 죽으셔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을 제물로 드리라는 명령이 내려졌을 때, 온 하늘 존재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들은 열렬한 관심을 가지고 이 명령이 성취되는 매 단계를 주시하였다.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라는 이삭의 물음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대답하였을 때, 아버지가 그의 아들을 막 죽이려는 찰나 그의 손이 멈추어지고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어린양이 이삭 대신에 드려졌을 때, 바로 그 때 구속의 신비 위에 빛이 비쳤으며, 천사들도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놀라운 준비를 보다 분명하게 이해하였다”(부조와 선지자, 155).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우리의 발은 그분의 길을 걸을 것이고, 우리의 입술은 진리를 말하며 복음을 전할 것이고, 우리의 혀는 치유를 가져오고, 우리의 손은 넘어진 자를 일으키며 요리, 청소, 타이핑, 수리와 같은 일상적인 일을 수행할 것이고, 우리의 팔은 외롭고 사랑받지 못한 자들을 끌어안을 것이며, 우리의 귀는 고통받는 자들의 외침을 들을 것이고, 우리의 눈은 겸손하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것이다.” - John Stott, Romans (Downers Grove, Ill.: InterVarsity, 1994), 322. 이 인용문은 “산 제물”의 의미를 어떻게 보여줍니까? 자아가 죽어야만 이렇게 살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➋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희생 제도를 보는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을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목적 자체로 보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의 목적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구별된 생애를 살므로 다른 이에게 사랑의 봉사를 베푸는 것인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많은 빛을 받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은 어떤 방식으로 우리가 소유한 위대한 진리가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목적 자체로 여기는 위험에 처해 있습니까?

 

➌ 모리아산에서 있었던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를 좀 더 묵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이 이야기가 실망과 고민을 일으키는 논란의 이야기라고 주장합니다. 이 이야기가 독자들로 하여금 이런 감정을 일으킨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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