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과 속죄일(강해식 과정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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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과 속죄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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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9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26분
기억절 :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미 7:18~19).
연구 범위 : 레 16장, 레 23:27~32, 신 19:16~21, 마 18:23~35, 사 6:1~6.
도입)
레위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레위기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세 가지 길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있다. 1. 제사(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감(1-7장)-성막(교회) 중심과 2. 제사장(중보자)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감(8 -10장)-성막(교회) 중심과 3. 정결규례(거룩한 삶)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감(11-15장)-일상 생활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가는지를 보여준다. 레위기는 제사를 통한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화해를 목적으로 기록되어졌다. 따라서 일 년에 한 번 행하는 속죄일에 관한 규례를 다루고 있는 본장은 레위기 전체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대제사장은 속죄일에 성소에 들어가기 위해 자신을 정결케 하고 속죄제를 드려야 하며(1-14절), 백성들을 위해서도 속죄제를 드려야 한다(15-22절). 또한 속죄 의식이 끝난 후에도 다시 한 번 자신과 백성들을 위해 정결 의식을 거행해야 하며(23-28절), 대대로 이 규례를 반드시 준수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29-34절). 7대 절기 가운데 제일 중요한 절기가 바로 레위기 16장이 정하고 있는 속죄일이다. 이것은 ‘대속죄일’ 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레 16장 34절을 보면 “이는 너희의 영원히 지킬 규례라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죄를 위하여 일 년 일차 속죄할 것이니라.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니라.” 다른 절기들은 대부분 축제의 절기이다. 그러나 이 대속죄일 만큼은 백성들이 죄를 회개하며 슬퍼하는 날이요, 죄를 속죄 받는 그런 날인 것이다. 금식의 날이요 회개의 날이요 슬픔의 날이다. 이 대속죄일의 모든 규례는 대단히 복잡하다. 성경을 읽어도 잘 모르겠는 것이 대속죄일의 복잡한 규례인 것이다.
레위기 16장에서 소개하는 속죄일[Yom Kippur(욤 키푸르)] 행사는 구약에서 가장 엄숙한 의식이다. 레위기 16장은 모세오경의 가운데 책인 레위기에서 한가운데 의도적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이는 속죄일 의식의 ‘지극히 거룩한’ 특성을 보여준다. “안식일 중의 안식일”(레 16:31)로 언급되어 있는 그날에는 이스라엘 연례 축제일의 특징으로서 모든 노동이 중단되었다. 이는 그날이 창조주와 구속주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만드신 세계 속에서 쉼을 얻는 시간이라는 안식일 개념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이번 주 우리는 속죄일에 지상 성소에서 무슨 일이 이루어졌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특히 이 의식에 필요한 두 마리 염소에 대하여 연구함으로써 구원과 최종적인 죄의 처결에 관하여 더욱 깊은 진실을 이해하려고 한다.
안교 활동반과 교과 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속죄일 표상의 필수적인 개념을 파악한다.
➋ 느끼기 : 속죄일 기별의 중요성을 인식한다.
➌ 행하기 : 원형적인 속죄일에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는 특권에 참여하기로 결심한다.
Part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일 년 중에 여러분의 집이 가장 깨끗해지는 날은 언제입니까?
❷ 구약의 속죄일이 어떤 날이었는지 누가 설명해 줄 수 있습니까?(미리 부탁함)
❸ 속죄제(정결제)를 드릴 때 이미 용서를 받았는데 다시 속죄일 제사가 필요했던 이유를 여러분은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❹ 속죄일 기별을 복음으로 받아들일 때 각자 어떤 결심이 생기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B. ❶ 일 년 중에 그대의 몸이 가장 깨끗해지는 날은 언제입니까?
❷ 여러분은 구원에 있어서 속죄일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❸ 아사셀을 위한 염소의 의식이 속죄 제사가 아닌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❹ 예언적인 속죄일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정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결론 속죄일 의식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소에서 벌이시는 조사 심판을 가리키며, 이 기간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참여해야 할 특별한 활동들을 보여 줍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지난주 분반의 경험을 함께 토론합니다.
❷ 정식으로 분반을 시작할 날(12월 초)을 정하고, 교사(리더)와 반장(예비리더)을 확정합니다.
❸ 분반 계획과 새로운 교사(리더)와 반장(예비리더)을 위해 기도합니다.
첫째 날(일) 연례 정결 의식
11월 3일
“곧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과 그들이 범한 모든 죄로 말미암아 지성소를 위하여 속죄하고 또 그들의 부정한 중에 있는 회막을 위하여 그같이 할 것이요”(레 16:16).
교사강해 1)
이스라엘 백성들은 1년 간 지내면서 의도적이든 의도적이 아니든 수많은 죄를 짓고 살았다. 죄는 회개하지 않고 그냥 두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만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짓는 죄를 해결하도록 속죄 제사 규례를 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죄를 짓고도 속죄 제사를 드리지 않거나 알지 못해서 그냥 지나갈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일 년에 한 차례씩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은 죄와 부정을 해결할 수 있는 속죄일을 허락해 주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날의 행사를 통해 그들이 1년간 지은 모든 죄를 해결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하나님과의 소원해진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대 속죄일은 구약의 속죄와 정결 예식의 완결편이라고 할 수 있다.
레 16:16, 30을 읽어 보라. 속죄일에는 무엇이 제거되는가?
일 년 내내 각종 죄와 의식적 부정이 성소에 이전되었다. 속죄일은 이런 것들을 제거하는 시간이다. 속죄일 의식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1. 제사장을 위한 정결제(속죄제). 대제사장은 성소에 들어가 성소의 정결 의식을 수행할 수 있도록 자신의 죄를 위해 수송아지를 바친다.
2. “여호와를 위한” 염소로 드리는 정결제(속죄제, 레 16:8). 연중 계속된 정결제(속죄제)는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성소에 옮겼다. 속죄일은 성소로부터 이런 죄를 제거하는 시간이었다. 이 과정은 “여호와를 위한” 염소의 피로 진행된다.
3. 아사셀을 위한 염소로 진행되는 제거 의식. 하나님은 백성들의 죄를 성소와 진으로부터 제거하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살아 있는 염소를 광야로 보냈다.
레 16:15을 읽어 보라. 이 염소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이것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여호와를 위한 염소에는 안수도 죄의 고백도 없었기 때문에 그 피는 죄를 수반하지 않았다. 따라서 오염되지 않고 정결하였다. 그 결과는 16절과 20절에 분명하게 묘사되었다. 대제사장은 여호와를 위한 염소의 피로 성소를 정결케 하며 속죄하였다. 동일한 과정이 백성들의 정결에도 적용되었다. 성소가 백성들의 죄로부터 정결하게 된 다음 백성들도 정결하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속죄일은 특별했다.
왜냐하면 오직 이 날만 성소와 백성이 동시에 정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속죄일은 속죄의 두 국면에서 둘째 단계에 해당한다. 첫째 국면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일 년 동안 죄의 용서를 받는다. 하지만 그들의 죄는 지워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겨진 것이다. 그분은 그것을 처리하겠다고 약속하신다.
부가적용)
대속죄일("욤 하 카페림")- "욤"(날, 시간, 시기) + "하 캎페림"(덮음)의 합성어이다. "하 캎페림": "하"(the)) + "카팔"(to cover) + 임("복수어미") "카팔"은 일반적으로 "죄를 덮는다"(용서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때로는 "보상한다(to expiate)", "속죄한다", "정결하게 한다", "달랜다", "화평케 한다"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카팔'은 "죄를 덮어서 용서한다"는 말과 "죄 값을 대신 보상하고 정결하게 만들어서 불화 했던 사이를 화평하게 만든다"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대 속죄일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용서하시고 정결하게 하여 화목한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날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에서는 가축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 값으로 지불되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피로 인류의 죄 값을 지불하시고 죄인들을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게 해주셨다. 진정한 속죄는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죄의 대가를 지불하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평을 회복하는 일이다. 속죄일은 이스라엘 백성이 1년 간 지은 죄를 청산하고 하나님 앞에 정결한 자로 회복되는 날이다. 이 날은 주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최종적인 속죄를 상징한다. 이 날은 우리의 모든 죄들에 대하여 최종적으로 속죄와 구원이 완성되는 날이다. 주님은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단번에 우리의 속죄를 이루셨다(히9:12). 또한 주님은 지금도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하늘 성소에 들어가심으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히 9:22).
교훈 : 구약 시대에 속죄일 의식은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에 매우 핵심적인 부분이었으며 이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용서 이상의 과정이 필요함을 가리킨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에게 속죄일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둘째 국면은 용서와 큰 관련이 없다. 왜냐하면 백성들은 이미 용서 받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레위기 16장과 레 23:27~32에는 ‘용서하다’라는 의미의 동사가 등장하지 않는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구원의 전체 계획이 단순한 죄의 용서 이상을 포괄하며 대쟁투라는 좀 더 넓은 문맥에서 이해할 때에 더욱 이치에 맞는다는 점을 가리킨다.
| 적용 |
하늘 성소 정결 이전에도 우리가 용서를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성소 정결이 필요함 - “이와 같이 이스라엘의 죄가 성소로 옮겨져 성소가 더럽혀졌으므로 이 죄를 제거할 특별한 일이 필요하게 되었다. …일 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은 성소를 정결케 하기 위하여 지성소에 들어갔다. 지성소에서 거행된 이 봉사로 연중 일체의 봉사가 완결되었다”(부조와 선지자, 355).
기도
아버지, 저를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믿음의 눈으로 하늘의 사랑과 공의가 옹호 받는 일을 주목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과 하늘 봉사를 통해 아버지의 사랑과 공의가 증명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둘째 날(월) 용서 너머의 과정
11월 4일
“이는 너희가 영원히 지킬 규례라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죄를 위하여 일 년에 한 번 속죄할 것이니라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니라”(레 16:34).
교사강해 2)
"칠월 십일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일 것이요 마음을 괴롭게 하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민 29:7). 성경은 대 속죄일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이날은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라고 하였다. 마음을 괴롭게 한다는 것은 죄를 아프게 느낀다는 뜻이며, 회개한다는 뜻이다. 인생이 살아가는 데는 두 가지 근심이 있다. 하나는 먹고사는 문제로써 육신적이며 세상적인 근심이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영적인 근심으로써 첫째는 죄를 애통하는 데서 시작하고, 둘째는 죄를 회개하며, 셋째는 죄를 용서받고도 그 분의 말씀과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아프게 여기는 근심이다. 세상의 근심은 끝없는 근심거리만을 제공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근심은 성도들도 가져야 하는데 대속죄일이 바로 이런 근심을 하는 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런 근심을 가질 것을 요구하셨다.
레 16:32~34을 읽어 보라. 속죄일에 대제사장의 주요 임무는 무엇이었는가?
대제사장의 주요 역할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재하는 것이었다. 그는 성소와 관련한 제도를 관장하고 다양한 희생과 제사를 드렸다(히 8:3). 대속죄일에 그의 임무는 중다하였다. 아사셀을 위한 염소를 광야로 끌고 가는 일을 제외하면 그것을 보내도록 명령하는 일을 포함하여 그는 거의 모든 의식을 집전하였다.
속죄일에 대제사장은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었다. 백성들의 관심이 대제사장에게 집중되었던 것처럼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절대적인 관심의 대상이다.
지상에서 대제사장의 활동이 백성들에게 정결을 가져다 준 것처럼 그리스도의 하늘 성소 사역은 우리에게 동일한 은혜를 준다(롬 8:34, 요일 1:9). 속죄일에 백성들의 유일한 희망이 대제사장에게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소망은 오직 그리스도께 있다.
“그리스도의 피가 회개한 죄인을 율법의 정죄에서 풀어 줄 것이었지만 죄를 완전히 없이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그 죄는 최종적 속죄 때까지 성소의 기록에 남아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모형에 있어서도 속죄 제물의 피는 회개한 사람에게서 죄를 제거하였으나 그것은 속죄일까지 성소에 남아 있었다”(부조와 선지자, 357).
레 16:16~20에 따르면 대제사장은 지성소에 들어가야 했다. 그리고 제의적인 부정과 불의와 죄를 제거해야 했다. 그다음 그는 이스라엘의 모든 죄악과 불의와 죄를 살아 있는 염소에게 옮긴 다음 광야로 멀리 보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의 모든 도덕적 흠이 제거되었다. 대제사장의 봉사는 속죄의 특별한 목적, 즉 용서 이상의 도덕적 정결을 성취하였다. 이날에 새로 용서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이미 용서하셨기 때문이다.
부가적용)
흠 없고 온전하신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는 완벽한 제사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다른 희생 제사는 더 이상 필요 없다. 아론이 회막에서 제사 직분을 감당할 때는 지성소에서 입었던 세마포 옷을 벗고 거룩한 곳에서 물로 몸을 씻었다. 제사장의 옷인 에봇으로 갈아입고 하나님께 번제와 속죄 제사를 드린다. 제사장도 인간이기에 항상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제사 직분을 감당해야 한다. 염소를 아사셀에게 보낸 자와 속죄 제사를 드리고 남은 가죽과 고기와 똥을 밖으로 내다가 불사른 자도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은 후에 진영에 들어가야 한다. 이처럼 죄악과 접해 부정하게 된 자들은 정결함을 받은 후에 진영에 들어갈 수 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이스라엘 진영은 거룩한 곳이기 때문이다.
교훈 : 이스라엘의 죄는 이미 용서되었다. 그러나 일 년에 한 번 대제사장은 성소에 옮겨진 그들의 모든 죄를 제거함으로써 성소와 백성을 정결하게 해야 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지금 하늘 성소에서 봉사하시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주목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개인적 차원의 구원을 넘어 세계적이고 우주적인 차원의 구원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했을 뿐 아니라 세상의 구세주로 모셨습니다. 그래서 하늘 봉사는 우리 각자에게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주께서 하늘 성소 봉사를 마치고 나아오기까지 우리는 그분이 감당하시는 중요한 사역을 주목하면서 구속의 완성을 볼 것입니다.
| 적용 |
그대는 그대의 구원을 위해 봉사하시는 예수님께 어떻게 의지하기로 결심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중보자 대제사장 -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은 회중을 위한 한 제물을 취하여 그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율법이 기록된 돌비 위에 있는 속죄소에 뿌렸다. 이와 같이 하여 죄인의 생명을 요구하는 율법의 요구가 충족되었다. 그리고 대제사장은 중보자의 신분으로 그 죄를 자기가 지고 성소에서 나옴으로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짐을 지게 되었다”(부조와 선지자, 356).
기도
하늘 성소에서 봉사하는 주님, 우리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주목하여 바라봅니다. 우리의 의는 구원의 일부분에도 기여하지 못함을 고백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와 봉사에 전적으로 의지합니다.
셋째 날(화) 아사셀
11월 5일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접근하기 어려운 땅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레 16:22).
교사강해 3)
제비를 뽑아서 "여호와를 위하여" 드려진 염소는 붉은 줄을 그 목에 매어 표시하였다. 이 염소는 백성들의 속죄를 위해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이었다. 그리고 "아사셀을 위해" 드려진 염소는 붉은 줄을 그 염소의 두 뿔에 매어서 표시하였다. 이 염소는 나중에 안수와 죄의 고백을 통해 백성들의 모든 죄를 지고 광야로 가서 죽임을 당했다. 이 두 마리의 염소들은 이스라엘이 1년간 지은 모든 죄들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 드려진 희생 제물이었다. 이 두 염소는 인류의 죄를 지고 영문밖에 나가 나무 위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상징한다. 침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침례를 통해 공적으로 메시야의 사역을 시작하였을 때에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소개하였다. 이스라엘의 죄를 지고 죽으러 가는 염소는 그리스도를 상징한다(마 3:13-17, 요 1:29).
레 16:20~22을 읽어 보라. 살아있는 염소는 어떻게 됐는가?
살아있는 염소의 의식은 제사가 아니었다. 두 마리 염소 가운데 어느 것이 여호와를 위한 것이 되고 어느 것이 아사셀을 위한 것이 될지 제비를 뽑아 결정한 뒤에는 오직 여호와를 위한 염소만 정결 제물로 언급된다(레 16:9, 15). 반면 아사셀을 위한 염소는 ‘살아 있는 염소’로 불린다. 그 염소는 절대 죽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그 의식이 하나의 제사라는 오해를 피하려고 했던 것 같다. 살아 있는 염소는 대제사장이 성소 전체에 대한 속죄를 마친 다음에야 역할을 시작했다(20절). 살아 있는 염소의 의식이 성소와 백성을 위한 실제 정결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왜냐하면 성소와 백성들은 이미 정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사셀은 누구 또는 무엇인가? 초기 유대교 주석가들은 아사셀을 타락한 천사 또는 악한 천사들의 우두머리인 죄의 원흉으로 이해했다. 물론 우리는 그것이 루스벨을 상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살아 있는 염소의 의식은 죄를 최종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제거 의식이었다. 죄는 우선 그 책임자에게 옮겨진 다음 백성들로부터 영원히 격리되었다. 염소가 죄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을 졌을 때, 그것으로 인하여 징벌적 의미에서 속죄가 이루어졌다(레 16:10).
우리의 교리를 부당하게 비난하는 자들의 주장처럼 사탄이 우리의 구원에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가? 절대 아니다. 사탄은 절대 어떤 방식으로든 대속물로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지 않는다. 그 일은 오직 예수님만 하실 수 있다. 사탄이 우리의 구속을 위해 일정 역할을 한다고 보는 것은 불경한 생각이다.
부가적용)
하나님이 간음과 살인을 범한 다윗의 죄를 용서하셨으므로 그는 죽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공의의 하나님이 어쩔 수 없는 부분이 하나 더 있다. 그는 공의 심판주이시므로 그 죄로 인해 발생한 율법의 저주를 응당 치르게 해야 할 의무가 있으므로 사탄이 그 형벌자의 역할을 담당하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자녀에게 그 보응을 율법적인 그대로 적용하시지 않고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에 근거하여 경책 차원에서 은혜로 보응을 받게 하셨다. “시 103:10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11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12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13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14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구약성경을 읽다보면 속죄제(La ofrenda por pecado)와 속건제(La ofrenda por culpa)가 자주 나오는데 이 둘의 구별이 모호하여 그 차이점을 알기가 쉽지 않다. 두 가지 다 죄를 속하는 제사이므로 구별 없이 그냥 속죄제로 쓰이기도 한다. 굳이 그 차이점을 생각해본다면 속죄제는 글자그대로 죄를 속한다, 죄가 없는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죄의 삯인 사망을 당한 공로로 대신 죄를 용서해준다는 뜻이다. 속건제는 속죄제사이지만 빚을 갚는다, 대가나 형벌을 대신 치른다는 의미가 첨가되어 있다. 그리스도가 받은 고난으로 우리가 받아야할 형벌을 면제해준다는 제사이다. 그런데 속죄제물은 제사 드리는 사람의 처지나 형편에 따라 바꿀 수 있었지만 속건 제물만큼은 어린 숫양으로 고정하여 어떤 경우에도 바꾸지 못하게 하셨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 드린 제사는 속죄제와 속건제 이 두 가지였다. 죄만 담당하시어 용서해주시는 것만 아니고 내가 받아야할 저주와 형벌까지 담당하신 것이다. “사 53: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리하여 주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의 종 된 자리에서 영원토록 거룩하고 의롭게 만들기 위해서 속죄제와 속건제의 제사를 담당하신 것이다. 그래서 염소 두 마리이다. 창 27장에 야곱이 아버지 이삭에게 축복기도 받을 때 들고 간 음식도 염소 두 마리였다. “창 27:9 염소 떼에 가서 거기서 좋은 염소 새끼 두 마리를 내게로 가져오면 내가 그것으로 네 아버지를 위하여 그가 즐기시는 별미를 만들리니” 이 두 마리의 염소로 만든 별미 곧 예수그리스도의 공로는 하나님 앞에 참으로 흠향할만한 제사가 되었던 것이다. 이 예수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면 비록 불의하고 죄가 많아 자격 없는 야곱이라 할지라도, 비록 불의하고 추악하여 도무지 하나님의 영광 앞에 이르지 못할 우리 같은 죄인들이라 할지라도, 이 예수그리스도의 공로를 들고 믿는 마음으로 나아가면, 하나님 앞에 떳떳이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속죄제는 죄를 속하는 제사이고 속건제는 그 죄로 인해 발생하는 형벌을 속하는 제사이다.
교훈 : 아사셀을 위한 염소는 죄의 정결을 위한 제물이 아니라 죄의 영원한 처리를 위해 최종적인 책임을 져야 할 죄의 장본인 사탄을 상징한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죄를 최종적으로 처리하는 하나님의 방법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살아 있는 염소의 의식과 거짓 증언에 대한 율법은 유사한 점이 있다(신 19:16~20). 원고와 피고는 제사장과 재판장에게 감으로써 하나님 앞에 선다. 조사가 이루어지고 원고가 거짓 증언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그가 무죄한 자에게 가하려고 했던 형벌을 받아야 한다. (예를 들면 잔인한 하만은 충성스러운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했던 나무에 자신이 달려야 했다.)
| 적용 |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할 때 죄를 처리하는 하나님에게서 배워야 할 정신은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사탄에게 죄를 돌림 - “사람의 구속과 우주를 죄에서 정결하게 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사업은 하늘 성소에서 죄를 제거하고 마지막 형벌을 받게 될 사탄에게 이 모든 죄를 돌리므로 끝나게 될 것이다. 그와 같이 모형적 봉사에 있어서도 연중 봉사는 성소의 정결과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뽑은 염소의 머리 위에 죄를 고백함으로 끝났다”(부조와 선지자, 358).
기도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기억하지 않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우리도 형제의 죄를 용서할 때 기억에 담지 않고 그 사람과 죄를 영원히 분리하여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넷째 날(수) 대속죄일
11월 6일
“이는 너희에게 안식일 중의 안식일인즉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영원히 지킬 규례라”(레 16:31).
교사강해 4)
성도는 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아 죄를 회개함으로 참 자유를 누려야 한다. 이스라엘은 1년에 한 번 대속죄일을 지켜야 하는데, 이날에는 이스라엘 백성이든 그들 가운데 거주하는 이방인이든 금식하며 어떤 노동도 하지 않았다. 이날은 안식일 중의 안식일이며 하나님 앞에서 죄를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정결하게 되는 날이다. 아론의 뒤를 이어 제사장 직분을 행하는 자들은 거룩한 세마포 옷을 입고 직무를 행한다. 왜냐하면 제사장들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성소와 회막과 제단을 위해 속죄하고, 제사장들과 회중을 위해 속죄한다. 아론은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해 명령하신 모든 계명을 신실하게 준행했다. 오늘날 성도 역시 하나님의 종을 통해 주시는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이리하여 성막과 후에 그 대신 세워진 성전의 봉사에서 백성은 날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봉사에 관한 위대한 진리를 배웠고 해마다 한 번씩 그리스도와 사탄 사이의 대쟁투의 종국의 사건들 곧 우주에서 죄와 죄인들을 최종적으로 제거하는 사건에 그들의 마음이 이끌려갔다”(부조와 선지자, 358).
레 16:29~31과 23:27~32을 읽어 보라. 하나님은 속죄일에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하기를 기대하셨는가? 원형적인 속죄일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 원리를 오늘날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
고대에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누구든지 이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에 그는 백성 중에서 끊어져 멸망을 당했다(레 23:29~30). 속죄일은 단연코 삶과 죽음의 문제였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신자들의 완전한 충성을 요구하였다.
어떤 사람이 속죄의 첫째 단계에 해당하는 매일의 제사를 통해 일 년 동안 죄를 고백했는데 속죄일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상상해 보라. 하나님이 이 날에 보이고 이루려고 계획하신 것들을 무시함으로써 그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불충성을 증명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 믿음을 고백한 사람도 여전히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뜻이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는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것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혹을 받을 때에는 승리의 능력을 주장하고 실패할 때는 그분의 용서를 주장하면서 오직 그분에게 굴복하고 믿음 안에서 살 때에만 그리스도 안에서 안전하다.
마 18:23~35을 읽어 보라. 우리는 이 훌륭한 비유에서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하는가?
부가적용)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 다윗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나단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레위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시므이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모든 남은 족속도 각기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리라"(슥 12:12-14). 대 속죄일에 마음을 괴롭게 하며 애통하고 통회하는 것은 개별적으로 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다. 첫째, 이 말씀은 죄의 회개는 집단적으로 회개하고 집단적으로 용서를 받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민족적으로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모여 왔을지라도 회개는 개별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은 개별적인 것이지 민족적이거나 가정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인이 잘 믿어도 남편까지 대동하고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니다. 부모의 신앙이 아무리 좋아도 불신 자녀를 대동하고 천국에 갈 수는 없다. 하나님의 관계도 개인적이다. 집단적으로 만나고 교제하는 것은 아니다.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찜이뇨"(겔 18:2). 이 말씀을 한 에스겔 선지자는 계속하여 예언하기를 한 사람이 하나님이 율례를 지키면 "그는 의인이니 정녕 살리라"(겔 18:5-9)고 한다. 그러나 그 의인이 자녀를 낳았는데 그 아들이 아버지의 길을 가지 않으면 그는 "가증한 일을 행한 죄로 정녕 죽을 것이라"(겔 18:10-13)고 하였다. 그 다음 그 아들이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은 할아버지의 길을 따라 의의 길을 가면 그의 아버지는 불의한 사람이라도 그의 아들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겔 18:15-18)고 하였다. 그런데 결정적인 말씀이 있는데 악인이 돌이켜 의를 행하였을 때에는 지금까지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 행한 의로 인하여 살 것이라"(겔 18:22)고 하였다. 그리고 계속하여 말씀하시기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겔 18:23)고 하신 것이다. 이런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둘째, 이 말씀은 죄의 회개는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것과 같이 막연하고 포괄적이며 외형적으로 하는 회개는 회개로서의 가치가 없는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 오라 하셨나니"(욜 2:12).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약 4:9). 이상의 말씀은 참으로 죄를 회개하라는 것이다. 성전에 올라온 바리새인이 앞자리에서 기도한 것을 하나님은 받지 않으시고 가슴을 치며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고 회개한 세리의 기도를 받으신 것은 그가 진정으로 회개를 하였기 때문이다.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슥 13:1). 진정으로 마음을 괴롭게 하고 회개를 하심으로 사죄와 구원의 은총을 받으시기를 바란다.
교훈 : 우리는 구약의 속죄일을 통해서 하늘 성소와 우리의 정결을 위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을 주목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운다.
나의 삶 속으로
영감의 교훈
대속죄일을 위한 준비 - “그대는 대속죄일을 위해 특별한 준비가 필요한 것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죄가 없어지기를 원하며, 우리는 그것들이 심판 전에 없어지도록 고백하기를 원한다. 낙심 중에 가지 말고 그리스도께서 모든 불의에서 그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으라. 우리는 죄를 그쳐야 한다. 왜냐하면 죄는 율법을 범한 것이기 때문이다. 죄를 버리라. 그리고 죄의 모든 흔적을 씻어버리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을 붙잡아라”(설교와 강연 1권, 50~51).
기도
아버지, 우리가 엄숙한 속죄일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뜻과 계획을 심각하게 여기고 받아들임으로 구원의 무리에서 벗어나지 않고 정결한 백성으로 아버지 앞에 설 수 있도록 은총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 묵상 |
마 18:23~35을 읽어 보십시오. 이 비유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합니까?
비유의 주인공은 임금으로부터 큰 빚을 탕감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임금의 품성에 주목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즉 그는 자신이 받은 용서를 붙잡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훨씬 가벼운 빚을 진 친구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자비를 베풀었던 임금은 결국 그 악한 종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용서와 은혜를 주목하지 않으면 우리에게도 같은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5).
| 적용 |
그대는 예언적인 속죄일을 어떻게 보내기로 결심합니까?
다섯째 날(목) 이사야의 개인적인 속죄일
11월 7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사 6:5).
교사강해 5)
이사야 선지자는 스스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하고 고백했다. 그가 이러한 고백을 한 때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였다. 웃시야 왕은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을 구하였는데, 그가 하나님을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주위의 열국들을 잘 다스릴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으로 나라가 심히 강성해지자, 그 마음이 교만해졌다. 그는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할 수 없는 향단에 분향하는 일을 하려고 했다(대하 26:4~16). “제사장과 수종드는 레위 사람은 거룩한즉 여호와의 전에 들어오려니와 그 외의 다른 사람은 들어오지 못할 것이니, 모든 백성은 여호와의 명하신 바를 지킬지며”(대하 23:6) 하나님께 분향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구별된 아론의 후손들, 즉 제사장들만이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마음이 교만해진 웃시야는 왕이란 권위를 내세워서, 구별되지 않은 죄악된 사람으로서 분향하러 성전에 들어갔다. 결국 거룩한 향로를 부정한 손으로 붙잡았을 때, 그의 이마에 문둥병이 발했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에게 임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저주로 성전에서 쫓겨난 후 별궁에 홀로 거하다가 죽었고, 열왕의 묘실에도 장사되지 못했다. 그가 죽던 해에 거룩하신 하나님이 선지자 이사야 앞에 나타나셨다. 왕족의 한 사람이었던 이사야는 웃시야의 죽음을 예사로 넘길 수 없었다. 문둥이가 된 웃시야의 죽음을 생각하던 그의 눈앞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셨고, 그분의 거룩함을 통해 이사야는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되었다. 죄를 갖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다 저주를 받은 웃시야가 자신과 다름이 없음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하고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참 모습을 깨달은 그의 죄를 제하신 후 그를 당신의 일꾼으로 삼으셨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여러분은 이러한 고백을 한 적이 있는가? 무릎을 꿇고 가슴을 치며, 사람 앞에서가 아닌 하나님 앞에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는 고백을 한 적이 있는가? 만일 그러한 적이 없다면, 아직도 자신의 모습을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또한,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적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발견한 사람은 죄악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이 준비하신 의와 거룩을 얻을 수 있다.
사 6:1에서 이사야는 성전에서 “높이 들린” 보좌에 하늘의 왕께서 앉아 계신 모습을 본다. 그 모습은 심판의 장면으로 하나님을 심판하러 오시는 분으로 제시한다(사 5:16). 이사야가 본 참왕은 요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확인되었다(요 12:41).
비록 이사야가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였지만, 자신 역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절망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 앞에서 이사야는 자신에게 죄가 많고 백성이 부정하다는 사실을 감지하였다. 이사야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하지 못하리라는 결론을 내릴 필요가 있다. 대속의 구주를 모시는 것이 우리에게 유일한 희망이다.
사 6:1~6의 어떤 내용들이 속죄일과 비슷한가?
연기로 가득 찬 성전, 제단, 심판 그리고 죄와 부정에 대한 속죄 등의 복합 요소들은 속죄일을 뚜렷하게 상기시킨다. 이사야는 그와 같이 개인적인 속죄일을 경험하였다.
제사장과 같은 역할을 하는 스랍(문자적으로 ‘불타는 자’)이 선지자의 죄를 제거하기 위해 모종의 제사를 전제하는 제단으로부터 숯불 하나를 가져왔다. 이는 예수님의 희생과 하늘 제사장의 중보의 사역을 통해서 가능한 죄의 정결을 암시하는 적절한 이미지이다. 이사야는 이것을 정결 의식으로 인식하였고 마치 숯불이 자신의 입술에 닿은 것과 같은 느낌을 간직하였다. 그렇게 해서 그의 악이 제하여졌고 그의 죄가 사하여졌다(사 6:7). 7절의 수동태는 용서가 보좌에 앉으신 이로부터 부여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 재판장은 또한 구주이시다.
부가적용)
기독교는 값싼 은혜를 파는 종교가 아니다. 만사형통을 빌어주는 종교도 아니다. 그럴 듯한 선으로 포장해주는 종교도 아니다. 기독교는 자신의 부끄러운 수치와 절망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벌거벗은 모습 그대로 드러내는 종교다. 그리고 자신의 저주스러운 모습을 하나님께 진솔하게 고백하는 종교다. “내 속에 정한 곳이라고는 한 곳도 없습니다”(다윗)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이사야)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사도 바울) “나는 망할 자이옵니다”(아우구스티누스) “나는 작은 벌레입니다”(프란체스코) “나는 버림 받을 죄인입니다”(루터) 지금 우리는 처절한 죄 고백의 탄식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자기 자신을 미워하며 한탄했던 이사야나 욥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지금 모두 너무 의인들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지금 다른 사람들의 잘못만 크게 보는, 너무 밝은 눈을 가지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지금 자신을 미워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고 분노하는 이상한 가슴을 지니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교훈 : 이사야처럼 우리도 개인적으로 속죄일을 경험한다면 죄와 부정을 깨달아 정결을 구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사명을 위해 나아갈 것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심판의 날에 그대에게는 어떤 확신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하나님의 정결 사역 덕분에 우리의 경험은 “화로다 나여”에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로 전환된다. 다시 말해 속죄일에 관한 하늘 사역을 이해하는 사람은 복음을 전할 준비를 한다. 왜냐하면 참된 이해는 우리를 확신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심판의 날에 대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다. 오직 그분의 의가 우리를 정죄의 두려움 없이 그날에 서게 할 것이다(롬 8:1). 감사함은 사명의 동기가 된다. 용서받은 죄인들은 하나님의 가장 훌륭한 대사들이다(고후 5:18~20).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무엇으로부터 구원하셨는지 알기 때문이다.
| 적용 |
그대는 두려움 없는 확신을 가지고 어떠한 사명을 감당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이사야의 경험 - “이처럼 장엄하고 영광스러운 광경을 보게 되자 선지자 이사야는 자신의 불완전성과 그와 같이 거하는 모든 백성들의 죄를 깨닫게 되었다. …아, 책임 있는 사업에 종사하는 얼마나 많은 일꾼들이 이사야가 경험한 것처럼 하나님을 바라볼 필요가 있을까! 오직 당신의 영광과 위엄의 임재 가운데서만이 자신의 무가치함을 절실히 느끼게 될 것이다”(부모와 교사와 학생에게 보내는 권면, 375).
기도
그날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오직 의지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 마음속에 가득 채워주신 용서와 구원의 확신 때문에 주의 일을 행할 수 있는 용기가 생깁니다. 성령을 부어주셔서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여섯째 날(금)
11월 8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이때에 이루어지는 사건은 또한 대속죄일의 마지막 엄숙한 봉사로 예표되었다. 지성소의 봉사가 마쳐지고, 속죄 제물의 피의 공로로 이스라엘의 모든 죄가 성소에서 옮겨지면, 아사셀 염소가 산 채로 여호와 앞에 끌려나왔다. 그때 대제사장은 회중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와 머리에 두’(레 16:21)었다. 그와 똑같은 방법으로 하늘 성소의 속죄 사업이 완성되면 하나님과 천사들과 구속받은 큰 무리들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죄는 사탄에게 놓여질 것이다”(각 시대의 대쟁투, 657~658).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구원의 계획에서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배제하거나 축소시키는 이해방식은 왜 불완전할 수밖에 없을까요? 어떻게 우리는 중보 사역이 우리의 구원의 계획에 있어서 매우 핵심적이라는 사실을 성소를 통해서 배우게 됩니까? 신약의 히브리서 전체는 그리스도의 하늘 성소 사역을 설명하기 위해 할애되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그 사역이 얼마나 중요할까요?
➋ 어떤 이는 죽음에서 하늘 성소 봉사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사역은 그분의 정의와 공평과 사랑과 관련된 모든 의문에 답을 줄 수 있는 방법이자, 죄의 문제를 다루는 하나님의 절차적인 방법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대쟁투의 맥락에서 이런 생각은 무엇을 의미하며 그것이 죄의 추악한 비극이 야기한 문제들에 관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지 묵상해 보십시오.
➌ 많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은 예언적 속죄일에 우리가 구원의 확신 없이 서야 한다는 식으로 배웠습니다. 그와 같은 견해는 속죄일의 목적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속죄라는 말에 대하여 생각해 보십시오.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어떻게 속죄가 이루어집니까? 누가 속죄를 위해 일합니까? 그것은 어떻게 완성됩니까? 이런 질문에 대한 바른 대답은 어떻게 속죄일이 실제로 복음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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