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과 기도와 제자도(교사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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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과 기도와 제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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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8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40분
기억절 :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0~21).
도입)
미국 버지니아에 존 영(John, YOUNG)이라는 흑인 농부가 살았다. 존 영 부부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무식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녀를 열 네 명이나 낳았다. 한번은 집에 화재가 발생해 온 가족이 희생당할 위기를 겪었다. 또 열 네 명의 자녀가 모두 전염병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는 일도 있었다. 이 부부는 무식했으나 신앙생활은 철저했다. 부부는 위기가 닥칠 때마다 "하나님이 지켜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 이 부부는 거실에 가훈이 적힌 커더런 액자를 걸어놓고 자녀들이 그것을 매일 묵상하도록 교육했다. 그 가훈은 '이 집의 뿌리는 하나님이시다'였다. 결국 존 영의 자녀들은 단 한명의 희생자도 없이 모두 대학을 졸업했다. 자녀 중 코넬대학 경제학 박사, 교사, 간호사, 음악가 등이 배출됐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가정은 망하는 법이 없다. 부모의 기도는 자녀를 위한 행복의 자양분이다.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맺히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란다.
연구범위: 단 9:2~19, 마 14:22~23, 마 26:36, 요 17:6~26, 히 2:17, 벧전 4:7.
* 적용 질문에 꼭 자신의 생각이나 결심을 적고 실천하십시오.
영혼 구원 사업을 위해 무슨 일을 하고 어떤 봉사 프로그램을 계획하든지 우리는 우리가 구원하려는 자들을 위해 진지하게 기도해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자에게 핵심적인 사명이며 제자를 만들려는 자에게 더욱 그러하다. 꾸준하고 열렬한 기도가 제자들을 만들고 양육하는 핵심적인 방법이 된다면 얼마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겠는가!
“일꾼들은 ‘주께서 구하라 그러면 받을 것이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꼭 이 영혼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당신이 전도하려는 영혼을 위해 기도해 주도록 요청하라. 그들을 교회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 할 대상자로 제시하라.… 다른 영혼 그리고 또 다른 영혼을 택하여 매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진실한 기도로 그분 앞에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의 지혜 안에서 일하라”(의료봉사, 244~245).
안교활동반과교과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기도가 제자도의 필수적인 요소임을 인식한다.
➋ 느끼기 : 기도가 신비한 행위임을 인정하며 그 중요성과 필요성을 확신한다.
➌ 행하기 : 날마다 시시때때로 기도하도록 노력한다.
Part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그대는 식사하기 전에 주로 뭐라고 기도합니까?
❷ 다니엘서 9장에 나오는 다니엘의 기도가 왜 대표적인 중보기도라 할 수 있을까요?
❸ 그대는 진실한 기도의 조건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❹ 우리가 어떻게 하면 서로를 위한 중보기도를 할 수 있을까요?
B. ❶ 각자 기도하기 가장 좋은 시간과 장소를 이야기해 봅시다.
❷ 예수님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위해 기도하셨을까요?
❸ 개인과 교회의 부흥을 위해 기도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❹ 기도하는 교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에게 어떤 시도와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
결론
기도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해 달라고 요청하면 그분께서 들어주시는 그런 과정이 아닙니다. 기도란 우리가 그분의 생각을 깨닫고 그대로 살아가는 과정입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구도자 명단에 적힌 사람과 기도 제목에 대하여 반원들에게 소개합니다.
❷ 2월에 친교를 위한 활동을 계획합니다(2월 15일 또는 16일 예정).
❸ 구도자를 위해 그리고 안교반(소그룹)의 연합을 위해 기도합니다.
첫째날(일) 1월12일
세월의 시험을 통과한 동정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단 9:19).
교사강해 1)
기도(祈禱)는 교회의 생명줄이다. 기도가 없는 종교는 결코 진정한 종교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벙어리와 같은 장애를 가져 올 것이다. 성경 안에는 기도에 대한 수많은 기사가 적혀 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은혜를 덧입는다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나는 하나님 앞에 기도를 많이 드린다"라고 자랑할 수 있는 분은 아니 계실 것이다. 기도에 대한 말씀을 드리면 저나 여러분이나 마음의 가책을 가지는 것은 같은 마음일 것이다. 갑자기 가정에 위기가 닥친다든지, 사업에 실패를 당한다든지, 화급한 일을 당할 때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를 간절하게 드렸지만 , 항상 나는 기도의 생활 속에 산다 라고 자부할 분은 아니 계실 것이다. 한국교회의 자랑은 새벽 기도하는 교회로 세계에 본이 된다. 우리 조상은 이른 새벽, 하늘에게 빌던 종교심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러나 이 새벽에 비는 기도의 내용은 자신을 위한 비는 일도 있지만 대개는 남을 위해 기도를 드리는 경우가 많았다. 과거를 보러 길 떠난 남편과 아들을 위한 기도라든지, 군에 징병하여 전장에 나간 자식을 위한 기도든지, 하여간 자신의 가정에 국한되는 기도였다. 이웃에 대한 기도가 적었던 것은 사실이다. 구약 믿음의 사람들은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이런 신앙의 위인(偉人)들은 한결같이 기도의 사람이었으며, 아브라함을 비롯 많은 사람이 중보의 기도를 드렸다. 모세, 사무엘, 엘리야, 예례미야 등 남을 위한, 즉 민족을 위한 기도를 드린 분들이셨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중보 기도의 모범이시다. 모든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한 대업을 두고 한 기도, 자신을 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기도이셨다.
기도는 종종 자기중심적인 모습으로 비친다. 신자들은 그들이 요구하는 바를 얻기를 바라며 소원 목록을 하나님께 드린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고 배웠지만, 간혹 우리의 동기가 순수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심령이 사악하고 기만적이며 부패한 것은 아닌가? 우리의 기도는 자주 우리 속에 있는 죄많은 본성을 반영하고 있지는 않나?
그러나 중보기도는 타인의 필요에 초점을 맞춤으로 이기적인 동기의 가능성을 제거한다. 역사적으로 중보기도는 가장 차원 높은 영적 대화의 표현 방식이었다. 자기만족을 위한 열망에 오염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영적 대화는 이타심과 동정 그리고 타인의 구원을 위한 진지한 열망을 나타낸다.
단 9:2~19을 읽어 보라. 다니엘은 어떤 부담을 가지고 기도하였는가? 자백은 그의 기도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이미 연로하였기 때문에 다니엘은 예루살렘의 회복을 통해 개인적으로 얻을 유익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기도의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예레미야의 말한 70년이 지났다. 다니엘은 지금 그 예언을 염두에 두고 있다. 세월이 흘러 예루살렘 출신이었던 그의 친구들이 하나둘씩 고인이 되었을 것이다. 예루살렘이 중건된다 해도 다니엘 개인의 행복이 회복되는 것은 아니었다. 다니엘의 기도에는 개인적인 관심사를 의미하는 내용이 없다. 이 옛날 선지자는 포로로 끌려간 유대 민족의 미래와 여호와 그분의 명성에 관해서 하나님께 분명하게 탄원하였다.
교훈
기도는 때로 인간의 이기적인 동기를 드러낸다. 그러나 중보기도는 그런 가능성을 제거하며 타인과 하나님 나라의 유익을 추구한다.
부가적용)
"When man works, man works, When man prays, God works."(사람이 일하면 사람이 일할 뿐이지만, 사람이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신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서의 모세의 중보를 보게 된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32:32)" 중보기도자는 그 죄악을 자기 것인 양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이 심판하지 아니하시도록 그 결렬된 틈 사이로 들어가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심판 계획을 돌이키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중보기도자의 기도를 통해서 일하신다. 중보기도는 땅을 회복하는 능력이 있다. 우리가 먼저 기도하면 보이지 않지만 영적인 면에서 주님께서 풀어 주시는 것이다.
유명한 설교가인 템플 목사가 한번은 케임브리지 대학 채플에 설교자로 초청을 받았다. 이 좋은 기회에 내일이 촉망되는 젊은이들에게 무슨 인상 깊은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 것인가를 여러 가지로 생각하다가 기도를 배워 하나님 앞에 기도드릴 수 있다면 저들의 장래는 얼마나 복될 것인가라는 데 생각이 미쳐 그는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대학 채플에서는 이런 제목의 설교는 별로 인기가 없었다. 그러나 템플은 이 대학생들의 영혼을 사랑해서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 기도의 교훈을 가르치기 위해서 말씀을 열심히 증거 하였다. 채플이 끝나자 한 학생이 다가와서 말했다. "목사님, 목사님께서는 이 과학시대에 아직까지도 기도의 응답이라는 미신 같은 소리를 믿고 계십니까? 우연의 일치를 가지고 그리스도인은 기도의 응답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이야기를 듣고 난 템플은 말했다. "기도가 우연의 일치라고요? 우연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학생,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내가 기도를 그치면 그 우연도 그쳐버리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기도생활은 예수님의 일과로써 그가 일상생활에서 항상 지나고 계시던 일면이었다. 이 사실에 대한 증거는 모든 복음서들의 거의 매 장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온 세상이 아직 잠든 새벽 오히려 미명에 기도하시기 위해 일어나셨고, 그의 영혼이 지치도록 쉴 새 없는 고된 하루가 끝난 후에 하나님과 함께 온 밤을 지새우셨다(막 6:46). 또한 무리가 그에게 몰려와 그의 조용한 것을 방해하며 그들 자신의 욕망을 위해 예수님의 도움을 받으려고 아우성일 때 예수님께서는 잠시나마 하나님 아버지의 손을 붙잡기 위해 그의 마음과 생각을 하늘로 향하셨다.(막 7:34).이러한 사실이 각 복음서의 매 장마다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기도생활 대부분이 열두 제자는 물론 가장 가까웠던 베드로, 야고보, 요한까지도 모를 정도로 은밀한 것이었고, 따라서 어느 복음서에도 기록되지 않은 사실은 덧붙여 생각해 볼 때 예수님에게 있어서 기도란 단순히 그의 생활에 중요한 일부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생활 자체였으며, 바로 그의 존재의 호흡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나의 삶 속으로
|묵상|
그대는 자신과 가족 이외에 무엇을 위해 또는 누구를 위해 기도합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소원을 아뢰기 전에 긴 자백이 있었다. 자백을 하면서 다니엘은 불순종한 백성 가운데 자신을 포함시켰다. 선지자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싶지 않았다. 다니엘은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면서 동시에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되도록 예루살렘 중건을 추구하였다.
|적용|
그대가 추가해야 할 중보기도 제목을 아래에 적어 보십시오.
영감의 교훈
다니엘의기도- “다니엘의 기도는 얼마나 진지하고 열렬한 것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는가! 믿음의 손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결코 변함이 없는 허락들을 붙잡기 위하여 위로 뻗쳐진다. 그의 영혼은 번민 가운데서 고투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기도가 상달된 증거를 가지며 승리가 그의 것임을 알게 된다”(성화된 생애, 47).
기도
아버지, 기도마저 이기적인 저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자신을 위하기보다 남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세상일보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둘째날(월) 1월13일
기도를 위한 시간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교사강해 2)
예수께서는 다음 날이 아주 바쁜 하루가 될 것을 미리 알고 계셨다. 기도 할 시간이 많이 없을 것을 예감하시고 예수께서는 그 다음 날 아침 평소보다 “더욱 일찍” 일어나셔서 기도를 드렸다.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하루를 시작하기에 참으로 좋은 방법이 아닐 수 없다. 하루의 시작을 새벽에 시작하는 것은 기도가 예수님의 삶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우선순위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 날의 고통과 압박에 대한 생각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대신 하나님께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새벽에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어떨까? 그리하면 하루 동안 하나님의 보살핌과 능력을 느끼고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길 것이다. 그러나 그리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말하는 기도의 중요성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어 내실 수 있는 것들을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다음 날 아침 기도를 하기 위해 일찍 일어날 의지가 생길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저 생각 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신 것이 아니라, 기도를 우선적으로 중요시 여기셨기에 그러한 의지 또한 가능했던 것이다. 기도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중요한 것은 시간의 여부가 아니라 우선순위이다. 예수께서는 그저 생각 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신 것이 아니라, 기도를 우선적으로 중요시 여기셨기에 그러한 의지 또한 가능했던 것이다. 기도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중요한 것은 시간의 여부가 아니라 우선순위이다. 누가복음 5:15-16을 보면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오되 예수는 물러 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15-16절 말씀이 묘사하고 있는 것은 과거에 단 한 번만 일어났던 일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항상 인파에 쫓겨 바쁜 나날을 보내셨으나 이 와중에도 항상 기도를 위한 시간을 마련하셨다. 다시 말해, 예수께 기도란 “습관”과도 같은 것이었다. 기도 생활은 예수의 삶 속에서 높은 우선순위를 차지하는 아주 중요한 부분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를 위한 사역으로 바쁜 와중에도 미루거나 게을리 하지 않으셨을 정도로 치명적인 부분이었다. 또한,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 기도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만큼의 우선순위가 주어지느냐가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 할 시간이 충분했던 이유는, 기도의 중요성을 알고 이에 적당한 우선순위를 두셨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당신의 삶 속에 기도가 우선순위인지 혹은 모든 하루 일과(일, 취침, 학교, TV 시청 등)를 마친 후 남는 시간을 차지하는지 생각해 보라. 예수님의 삶을 통해 볼 수 있듯이 기도는 우리 삶 속에 가장 높은 우선순위를 차지해 마땅한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남는 시간”을 투자하지 말고, 기도를 위한 시간을 가장 먼저 고려하고 이를 위한 시간을 비워둘 수 있어야 하겠다.
기도가 정말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 타락하고 죄 많은, 죽어 마땅한 존재가 우주의 창조주이신 거룩하신 하나님과 즉각적이면서 직접적인 대화를 나누는 방법이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육체를 입으시고 그 한계를 받아들이셨을 때 그분 역시 기도의 필요를 느끼셨다. 물론 우리와 같은 타락한 죄인의 지위에서 하나님 앞에 서신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신 예수님도 기도의 필요성을 아셨다.
마 14:22~23, 26:36, 막 1:35~37, 눅 5:15~16, 6:12~13을 읽어 보라. 예수님의 개인 기도 생활은 어떤 특징이 있었는가? 예수님의 기도 생활을 둘러싼 분위기에 대하여 묘사해 보라. 예수님의 기도 생활에 나타난 특징으로부터 우리는 기도의 빈도, 장소, 시간에 대하여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하는가?
그리스도께서는 분명 기도 생활의 모본을 보이시고 제자들에게 명하셨다. 예수님은 아침과 저녁, 설교 전후 가능하면 언제든지 기도하셨다. 산과 들, 조용한 곳과 방해거리가 없는 곳이면 예수님은 어디서든지 기도하셨다. 공간적으로 아버지의 임재와 분리되어 있었지만,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영적으로 그분과 연합하였다. 그리스도의 영적 생혈(生血)은 기도라는 영적 동맥을 통해 흘러왔다. 그렇다면 죄의 성향으로 연약해지고, 세속적 관심으로 숨 막히며, 실패로 말미암아 절망하는 오늘날의 제자들이 예수님보다 못한 기도 생활에 만족해야 하겠는가?
“기도는 마치 친구에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그 심정을 펴놓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가 어떠하다는 것을 하나님께 알리기 위함이 아니요, 우리로 하여금 그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우리에게로 내려오시게 함이 아니요, 우리로 하여금 그에게로 올라가게 하는 것이다”(정로의 계단, 93).
교훈
예수님이 아침과 저녁 그리고 가능한 장소와 시간이면 언제든지 기도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기도를 통해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연합하며 교제해야 한다.
부가적용)
때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데 왜 굳이 간구해야 하는가?’라고 말한다. 대화가 없다면 그것을 관계라고 하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간구가 하나님과 대화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다른 기도의 형식들도 있다. 찬양, 감사, 경배, 고백, 경청 등이다. 그러나 간구는 중요한 부분이다. 하나님께 간구하고 우리의 기도가 응답 받는 것을 볼 때, 그분과의 관계가 자라난다. 기도는 생명이 걸린 행동이다. 기도하는 데는 많은 이유가 있다. 기도는 기독교의 중심부에 있다. 기독교의 중심부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는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활동인 것이다. 사탄은 우리의 말을 비웃는다. 우리의 수고를 조롱한다. 그러나 기도에는 벌벌 떤다.
나의 삶 속으로
|묵상|
그대는 기도의 필요성을 얼마나 절실하게 느낍니까?
구주께서 기도에 전념하셨던 것은 그 중요성을 잘 아실 뿐 아니라 그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될 절실함이 있습니다. 또한 하늘을 사모하는 우리의 소망과 믿음을 가다듬으면서 세속의 엄청난 도전 앞에서 시달린 하루를 기도로 마무리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일과 중에라도 틈을 내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는다면 한시도 안전할 수 없습니다.
|적용|
매일 어떤 기도생활을 할지 그대의 계획과 결심을 적어 보십시오.
영감의 교훈
기도하시는 예수님- “예수의 생애만큼 활동과 책임으로 꽉 찬 생애는 또다시 없었다. 그러나 기도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얼마나 자주 볼 수 있었던가! 얼마나 끊임없이 그는 하나님과 교통하셨던가!”(시대의 소망, 362).
기 도
아버지, 기도하지 않은 많은 시간 동안 제가 죽어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했던 수많은 일이 헛되었음을 인정합니다. 이제 이렇게 무릎을 꿇습니다. 아버지께 가까이 나아갑니다. 제게 생명의 호흡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셋째날(화) 1월14일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 가르침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교사강해 1)
이 세상에 살아가는 부모 중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사람들이 있다. 좋은 부모도 있고 혹은 나쁜 부모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공통적인 점은 자기 자식에 대한 사랑이다. 자기 자녀들이 잘 되기를 소원하며 좋은 것으로 먹이고 입히고 마시우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고 하셨다. 주님의 이 말씀은 하나님의 좋으심을 나타내시는 비교 강조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이 이 같은 말씀을 하신 목적은 다음에 들려주실 말씀에 있으셨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들로 하나님을 향하여 구하는 생활, 찾는 생활, 두드리는 생활을 계속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으로 늘 우리의 생활에 채워야 한다는 사실을 비유적인 예화로 들려주신 것이다. 부모는 인륜을 넘어 천륜의 관계를 가진 ‘보이는 하나님’이라면 그 천륜이 존재케 하신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보이지 아니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표현하심에 있어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라고 하셨다. 주님은 '나의 아버지'라고 하지 아니하시고 '너희 아버지'라고 하셨다. 주님이 여기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려는 목적은 이 땅에 계시는 우리 육신의 아버지보다 하늘에 계시는 우리의 아버지가 우리와 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무관하신 분이 아니시라 우리의 아버지라고 하신 것이다.
기도는 유한한 영혼을 무한한 창조주께 기적적으로 결합시킨다. 기도는 영적인 접착제이다. 하늘 아버지와 결합됨으로 신자들은 땅의 본성과 죄의 성향을 초월한다. 이런 변화는 그들을 세속과 분리시킨다. 만약 사탄이 기도의 특성을 자기중심적인 틀로 바꾸는 데 성공하여 변화를 일으키는 기도의 능력을 앗아간다면, 우리는 여러모로 세상과 타협할 것이며 우리의 증거 활동에 큰 지장이 있을 것이다. 마 6:7~8, 7:7~11, 18:19~20을 읽어 보라. 이 성경절들은 기도에 대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신실한 신자라면 하나님이 약속을 지킬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 지금까지 기도의 요청으로 하나님을 겁준 사람은 없었다. 그분의 권위는 끝이 없고, 그분의 능력은 비길 데가 없다. 하나님의 백성이 기도하는 당시에는 하나님의 응답을 알지 못할지라도 그분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리라는 믿음으로 하늘문을 두드린다. 믿음이란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믿음이란 우리가 바라고 기대하는 결과를 보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히 11:1~7참고). 주를 섬기고 믿음 안에서 행하는 이상 우리는 소망하고 기도하던 대로 상황이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게 될 것이다. 또한 성경은 그대가 혼자 있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한다.
마 6:9~15, 26:39을 읽어 보라. 이 성경절은 무엇을 가르치는가?
믿음을 오만이나 자만과 혼돈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는 믿음은 특권의식과 관계가 없다. 신자의 행실은 담대함과 겸손의 특징이 있다.
교훈
기도는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과 결합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어떤 기도를 드리든지 하나님이 가장 좋은 방식으로 응답하시리라고 믿어야 한다.
부가적용)
기도는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행동이다. 주로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관계를 키워간다. 기도는 종교적인 의식이 아니고 관계다. 기도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나누는 대화다. 기도는 다른 사람이나 우리에게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에 있어서 관계가 중요하며, 우리가 기도할 때는 성 삼위 하나님 모두가 귀를 기울이신다.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신앙인 마더 테레사도 ‘영혼의 깊은 밤’을 보냈다고 고백하고 있다. 오래 동안 기도도 제대로 힘 있게 나오지 않고, 영혼의 메마른 삶을 겨우 겨우 간신히 이어갔던 시절이 있었다고 테레사는 고백했다. 이방 선지자와 850:1의 싸움을 치룬 후에,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이세벨을 두려워하면서, 로뎀나무 아래서 "주여! 차라리 저를 죽여주시옵소서!" 기도했던 엘리야의 영적인 허탈감을 생각해 보라. 기도할 때 응답이 없는 것처럼 깊은 흑암의 밤이 지날 때에 우리 하늘 아버지의 뜻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면 인간 아버지라도 바라보라. 좋은 것을 달라는 자식에게 나쁘고 해로운 것을 줄 부모가 없다는 인륜적 적용을 통해 말씀하신 우리 주님은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할 때 더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당위성의 근거를 제공해 주셨기 때문이다.
나의 삶 속으로
|묵상|
겸손하고 믿음 있는 기도란 무엇일까요?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바람을 말했지만 그것으로 끝맺지 않고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셨다. 전적인 굴복과 함께 용서의 정신 역시 겸손의 또 다른 표시이다. 우리는 크게 용서 받은 자로서 마땅히 다른 사람을 그와 같이 용서해야 한다.
|적용|
앞으로 그대의 기도에 어떤 믿음과 겸손의 자세가 필요할까요?
영감의 교훈
의심하지 말고 기도하라- “그러나 기도는 언제나 우리가 원하는 꼭 그 방식으로 응답되고 또한 우리가 원하는 꼭 그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망상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지혜로우시므로 잘못하실 리가 없는 것이요, 지극히 선하심으로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다. 그런즉 비록 기도가 즉시 응답되지 않을 지라도 그를 의지하기를 의심하지 말 것이다”(정로의 계단, 95~96).
기 도
아버지, 저는 기도가 아닌 아버지를 믿기 원합니다. 제가 어떤 요청을 드리든지 아버지께서 더 좋은 답을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그래서 제 뜻이 아닌 아버지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드립니다.
넷째날(수) 1월15일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 동정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1~22).
교사강해 4)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교회가 하나가 되는 일치 여부가 전도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교회의 일치는 세상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 믿게 할뿐 아니라, 하나님이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한다는 점이다. 바꿔 말하면, 분열은 전도를 가로막을 뿐 아니라, 분열 그 자체가 큰 죄란 점이다. 예수님께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 23:13)고 하셨는데, 이는 먼저 믿는 자들의 잘못된 행위가 전도의 문을 가로막는다는 사실을 언급하신 것이다.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분열을 일치로 가져오는 것이었다. 분열을 죄로 보고, 죄의 값을 죽음으로 본다. 따라서 죽음이란 분열 또는 단절을 말하는데, 하나님과의 분열 또는 단절을 영혼의 죽음, 육체가 영혼에서 분열 또는 단절되는 것을 육신의 죽음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사람이 죽음에서 생명에로 거듭나는 길은 하나님과 일치 또는 연대, 사람과 일치 또는 연대, 자연과 일치 또는 연대하는 것이다. 성경은 단절을 원수된 관계, 구원을 화목된 관계라고 말한다. 인간문제의 원인을 불교는 욕심과 집착에서 보고, 유교는 칠정(七情) 곧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 수치, 더러움, 그리고 욕심에서 보지만, 기독교는 관계단절에서 본다. 관계단절을 죽음으로 보고, 관계회복을 구원으로 본다. 다음과 같은 성구들을 잠시만 훑어보시면 대번에 알 수 있는 내용이다. (롬 5:10-11)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고후 5:18-20)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우리가 서로를 긍휼히 여기고 동정심을 가지고 연약한 성정을 가진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서로가 하나 되려는 노력으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완전의 표본이셨다. 즉 모든 형태의 하나님의 완전이 그분을 통해 계시되었다. 세상에 그리스도보다 더 자비로운 자가 있었는가? 세상에 예수님보다 인간의 괴로움을 가볍게 하려는 강렬한 소망을 가진 자가 있었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묻는다.
그리스도의 동정과 중보는 제자도와 어떤 관계였는가? 눅 22:31~32, 요17:6~26을 읽고 히 2:17도 참고하라. 예수님의 인간 신분은 그분의 중보 기도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에는 어떤 궁극적인 목적들이 있었는가?
예수님은 제자들의 삶에 적극 동참하셨고, 그들을 철저히 이해하셨으며, 그들의 유익을 간절히 사모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성공적으로 중보하실 수 있었다. 오늘날 효과적인 중보 기도에도 바로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 21세기에 제자를 양육하는 자들은 그들과 잃은 영혼 사이의 관계를 방해하며 시간을 좀먹는 목적들을 포기할 것이다. 돈을 벌고, 명성을 얻고, 높은 학위를 얻는 것은 잃은 자를 구원하는 더 큰 목적에 비하여 부수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이는 간과하기 쉬운 중요한 진리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 자주 일상적인 것에 골몰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삶에 자신을 투자하셨다. 그분은 제자들의 집을 방문하여 그들의 가족과 사귀셨고, 그들과 함께 여가를 보내시며 그들 곁에서 일하셨다. 그들의 삶에서 그분이 주목하지 못한 중요한 일은 없었다.
교훈
예수님은 간절한 마음으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며 사역하는 일에 헌신하셨다. 오늘날의 제자 훈련에도 그런 요소가 필요하다.
부가적용)
1960~70년대에 종교적 율법주의와 형식주의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미국의 거리로 쏟아져 나와 시가행진을 벌인 적이 있다. 그들은 ‘예수는 좋다. 그러나 교회는 싫다!’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했다. 왜 그랬을까? 교회에 갔을 때 위로를 받고 사랑을 받고 치료를 받아야 할 곳인데 교회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받고 무시를 받고 멸시를 받게 된 것이다. 교회에서는 율법주의로 말미암아 매일 교회를 찾아온 사람들을 책망하고 정죄하고 잘못을 지적하고 율법에 맞느니 안맞느니 교회를 찾아온 영혼에게 아픔만 주었다. 그래서 예수는 좋은데 종교적 율법주의와 형식주의에 반발을 했다. 교회가 긍휼을 잃어버리고 동정을 잃어버리고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잃어버린다면 그 교회는 더 이상 존재의 의미가 없다. 교인이라 하면서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은 하늘에 갈 수가 없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멸망 받을 종교인인들 바리새인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때로는 교회가 세상보다 무서울 때가 있다. 세상 사람들은 화가 난 일이라도 막걸리 한 잔하고 술 한 잔하고 푸는데 때때로 교인들끼리도 한 번 마음에 섭섭하고 돌아서서 등지고 나면 서로 인사도 안하고 눈길도 안주고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는 올 수는 있지만 천국에 함께 갈 제자들을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그를 추종하는 사람으로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형제에게 서로에게 너무 냉정하고 서로에게 너무 차가웠던 나의 태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났는지 바로 나의 차갑고 매몰차고 동정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멸망 받은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큰 죄악이겠는가? 서로 화목하여 하나가 되자.
나의 삶 속으로
|묵상|
그대는 사랑과 관심을 진실한 기도로 표현하고 있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오늘날의 제자 훈련에도 전도지 분급과 빈틈없는 성경논증 이상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동정하며 그 고통을 가볍게 하고픈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드리는 기도는 효과적인 제자 훈련에 필요한 중보 기도의 표준이기도 하다. 이 말이 진부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상당한 진실을 담고 있다. “그대가 그들에게 진정으로 관심이 많은지 알기 전까지 그들은 그대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관심이 없다.”
|적용|
그대가 정말 사랑한다면 반드시 기도해야 할 대상은 누구입니까?
영감의 교훈
동정심을 발휘하고 기도에 능력을 더하라- “세상이 동정을 요구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와 도움을 요구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의 생애에서 그리스도를 보고자 요구하고 있는 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은 또한 그들의 동정심을 발휘하고, 그들의 기도에 능력을 더하고,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성품과 같은 성품을 계발시킬 기회를 얻을 필요가 있다”(증언보감 2권, 499).
기 도
아버지, 저도 예수님 같은 마음을 주시옵소서. 진정으로 그 사람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그 사람의 성장을 돕는 사역을 하게 해주시옵소서. 영적 관계를 방해하며 시간을 좀먹는 사물들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시옵소서.
다섯째날(목) 1월16일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 동정심이 복제됨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딤전 2:1).
교사강해 5)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뜻한다. 우리 구주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모든 사람의 구원에 있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웃 사랑을 강조 한다. 계명으로 말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웃들 보다는 나를 더욱 사랑하고만 있다. 우리의 기도는 이웃을 위한 기도,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기도로 확대되지 못하고 있다. 언제쯤이나 되어야 이웃을 사랑 할 수 있고 우리의 이웃까지 위하여 기도를 넓히는 중보의 기도를 할 수 있을까? 사도 바울은 기도하되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하였다.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는 것이다. 심지어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도 빼놓지 말고 그들 모두를 위하여 하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 즉 간청을 하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 하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중재 하며,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감사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만을 위하여 간구하고, 기도하고, 중재하고, 감사하고 살아왔던 나에서 벗어나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가 우리 안에 임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이를 위한 나의 삶이 나에게 고요와 평안한 생활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큰 축복이 아닌가! 그러니 이제 나에서 벗어나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는 사람이 되어 보자! 예수님께서 기도드릴 때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셨다”는 것이다. 누가? 예수 그리스도가 말이다. 이미, 나와 여러분에게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하시기 전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속전으로 주셨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자기를 속전으로 내어 주사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여 주시고, 죄인들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여 주셨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신 한 가지 이유는 바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 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 도고와 감사를 드리는 이유인 것이다.
가장 진심어린 찬사는 모방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구주의 기도 생활을 모방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안위와 매일의 필요 그리고 개인적인 영적 인도를 위해 기도했다. 그러나 중보 기도는 제자 훈련에 중요한 요소가 되어야 했다.
행 1:13~14, 딤전 2:1~4, 약 5:13~16, 요일 5:16, 유 20~22, 벧전 4:7을 읽어 보라. 초기 교회에 기도는 어떤 역할을 했는가? 그들은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 기도하였는가? 이런 예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무엇인가?
줄기찬 기도는 초기 교회의 정신적 힘이었다. 선교 여행을 떠날 때마다 바울은 기도를 통해 파송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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