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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과 어린이들을 제자로 양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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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5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48분

 

기억절 :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마 21:16).

 

도입)

어린이들에게 그 자신의 영혼의 문제와 신앙생활의 문제만큼 일생에 중요한 것은 없다. 예수님을 믿고 섬기는 것이 마음에 확실하면 일생동안 어떤 일을 당해도 감당할 수 있는 마음의 바탕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일생동안 누릴 수 있고 영생토록 누릴 수 있는 제일의 재산이 신앙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시편 127편 3절에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호와의 허락하신 기업인 자녀들을 잘 키워 놓으면 여러분 상급 중에 제일의 상급이 될 수 있다. 월버트 챠프만 박사가 4천 5백 명이 모인 집회에서 얻은 통계에 의하면 400명은 10살 이전에, 600명은 10-14살 사이에, 1천 명은 16-20살 사이에 예수를 영접하고 겨우 24명이 36살 이후에 신앙을 가졌다는 것이다. 흥미를 느낀 챠프만 박사는 더 광범위하게 조사하여 다음과 같은 통계를 얻었다. 25세 이후에는 1천 명에 겨우 한 명, 45세 이후에는 20만 명에 겨우 한 명, 그리고 75세 이후에는 70만 명에 겨우 한 명 꼴로 예수를 영접했다는 것이다. 어린이 또는 젊은이의 영혼은 백지와 같아서 무슨 색깔이든지 잘 받아들인다. 빌리 그래함 목사를 비롯하여 위대한 전도자들의 생애를 조사해 보면, 젊은 시절에 회심을 하고 큰 일꾼이 된 경우가 많다. 사과나 귤나무를 심으면 3년이 지나야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 그리고 10년생 정도 된 나무는 500여 개씩 열매가 열린다고 한다. 또 옥수수씨 한 개를 심으면 줄기가 자라서 둘 또는 세 자루의 열매를 맺는데 한 자루에 적어도 200-300알 정도의 옥수수가 달리게 된다고 한다. 이 경우 씨 하나가 약 600배 정도의 결실을 한 셈이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한 사람도 이와 같은 결실이 그의 생애를 통해 나타난다. 바로 어느 때, 어느 시기에 예수님의 제자로 키워내야 하는지가 자명해 진다. 나이가 어릴수록 예수님을 영접하고 사는 확률이 높아지니 어린아이들에게 정성을 들여야 한다.

 

연구범위: 시 127:3~5, 신 6:6~7, 눅 2:40~52, 마 18:1~6, 마 18:10~14 , 막 10:13 ~16 .

 

*신자들과 반생들이 서로 공부하도록 권합시다.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각 나라마다 제자를 양성하려는 열망 중에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계층이 있으니 곧 어린이들이다. 어린이와 청소년에 대한 기독교 연구는 제각각 다르다. 하지만 교파를 초월하여 일치하는 한 가지가 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비교적 어린 나이에 그리스도께 삶을 바친다는 것이다. 나이가 많은 층에서는 회심자가 적다. 그런데 많은 교회가 이렇게 중요한 사실을 간과한 채 성인층에 집중적으로 자원을 쏟아 붓는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어린이 사역의 가치를 과소평가했던 것 같다. 예수님은 그러한 태도를 거부하셨다. 그분은 아이들을 위한 여지를 마련하셨고 심지어 그들에게 우선순위를 두셨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분처럼 해야 한다.

 

안교활동반과교과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어린이 사역을 하기 위해서 꼭 부모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며 모든 어른

이 어린이의 스승이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➋ 느끼기 : 어린이들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것을 계발하도록 격려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없음을 느낀다.

➌ 행하기 : 매주 교회, 학교 또는 이웃의 어린이들과 긍정적인 방법으로 교제한다.

 

Part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그대는 어렸을 때 교회를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❷ 성경에서는 어린이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습니까?

❸ 우리 교회에서 어린이와 청소년 사업이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❹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이 넘쳐나는 교회를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B. ❶ 교회가 점점 고령화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❷ 성경에 따르면 예수님은 어린이들에 대하여 얼마나 각별한 애정을 쏟으셨습니까?

❸ 우리가 어린이들에게 배워야 하는 특성은 무엇입니까?

❹ 우리 안교반은 교회 어린이와 청소년 사업을 어떻게 돕거나 후원할 수 있을까요?

 

결론

어린 나이에 제자로 훈련시킬수록 더욱 좋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그들이 어렸을 때 재능과 열정을 계발시키는 대신 “더 나이가 들면 다시 오라”는 식으로 대하는 실수를 범합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나의 영적 성장 보고서’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영적 성장’을 강조합니다.

❷ 우리 안교반(소그룹)이 안식일 오후에 어떤 활동을 함께할 수 있을지 의견을 나눕니다.

❸ 기도 제목을 가지고 함께 기도합니다.

 

첫째날(일) 1월19일

히브리 어린이의 특권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시 127:3~5).

 

교사강해 1)

 교육은 인간 공동체의 존속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노력이라는 말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더욱 생생하게 적용된다. 왜냐하면 순례하는 백성으로 시작되어 순례하는 백성으로 끝난 구약 성서시대의 이스라엘 공동체가 역사에서 흔적을 감추지 않고 끈질지게 그 민족과 그 민족의 전통을 이어온 것은 오로지 교육의 결과였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든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교육을 중시한 민족은 드물다. 그들은 성전건축은 중단될 수 있어도 교육은 중단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Barclay). 그들은 나라의 멸망의 원인을 교육의 퇴폐로 돌린다. 또한 그들에게 있어서 교육이 이토록 중시되었던 이유는 교육은 곧 그 민족의 존재의 근원인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가르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고대 히브리인 어린이는 주변 국가의 어린이에 비하면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아이를 바쳐 신을 달래는 행습이 여러 나라에서 유행하였다. 또한 어린이의 가치가 종종 그들의 경제적 기여도에 의해 평가되기도 했다. 그들의 고유의 가치가 아닌 노동 생산성이 어른 세계와 그들과의 관계를 정의하였다. 안타깝게도 경제적 가치에 관한 이런 태도는 오늘날에도 존재한다. 진노의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이스라엘의 배도는 어린이에 대한 백성들의 평가에도 영향을 미쳤다. 주술과 이방 종교에 놀아난 므낫세는 자신의 아들을 제물로 바치기에 이르렀다(대하33:6). 하지만 므낫세의 치세는 예외라 할 수 있다. 영적인 지도하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자손들을 매우 소중히 여겼다.

시 127:3~5, 128:3~6, 렘 7:31, 신 6:6~7을 읽어 보라. 이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은 어린이들을 얼마나 소중하게 보시는가? 성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우리와 어린이들과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교육, 장자권, 그 밖의 문화적 관습을 보면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어린이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알 수 있다. 게다가 예수님은 주변 사회에 비해 높은 히브리 어린이의 지위를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시키셨다. 어린이도 사람이다. 그리스도는 연령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교훈)

이 세상에서는 어린이들이 무시되기 쉬우나 하나님은 어린이들을 소중하고 중요하게 대하도록 가르치셨다.

 

부가적용)

고려대 김세헌 교수는 “자녀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라”고 조언했다. 부모가 세상적 관점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면 게임만 하고 공부 못하는 아이는 좋은 대학에 갈 수 없는 낙오자로 보인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존귀한 인격체이고, 아름다운 사람이며,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아이다. 김 교수는 부모의 관점이 바뀔 때 자녀 역시 부모의 성경적 교육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히브리 교육의 특징 가운데 첫째는 그들의 교육이 하나님 중심의 교육이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쳐야 한다. 교회에 나와야할 아이들은 학원에 가있고, 말씀으로 양육해야할 기독교 가정은 ‘성적’에 연연하며 아이들을 세상적 잣대로 키우고 있다. 교회에 어린이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10년 뒤, 혹은 20년 뒤 예배당은 텅 비고 말 것이라는 불안한 우려는 점점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교회에 오는 아이들을 귀하게 여기고 아이들에게 집중해서 우리의 관심이 쏟아져 나와야 한다.

 

나의 삶 속으로

|묵상|

그대는 어린이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입니까?

우리나라의 부모들은 자녀교육에 아주 열성적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적 복락을 위한 노력은 그에 미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다음과 같은 특별한 당부를 남기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 6:6~7).

 

|적용|

그대는 가정에서 어린이들의 영적 훈육을 위해 그리고 교회에서 어린이 사역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영감의 교훈

아이들을 사랑하신 예수님- “예수께서는 언제나 아이들을 사랑하셨다. 그는 그들의 어린이다운 동정과 편견이 없고 변함이 없는 사랑을 받으셨다. 그들의 순결한 입술에서 나오는 감사의 찬양은 그분의 귀에 음악이 되었고 교활하고 위선적인 사람들과 접촉하심으로 말미암아 억눌렸던 그분의 정신을 상쾌하게 하였다. 어디로 가시든지 구주의 인자하신 용모와 온화하고 친절하신 태도는 어린이들의 사랑과 신뢰를 얻었다”(시대의 소망, 511).

 

기 도

아버지,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자녀들이 우리의 자녀이기 이전에 아버지의 자녀임을 잊지 말게 해 주시옵소서. 가정과 교회에서 이들을 아버지의 뜻대로 양육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옵소서.

둘째날(월) 1월20일

예수님의 어린 시절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 2:52).

 

교사강해 2)

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한 성경의 정보는 눅 2:52절의 기록이 유일한 단서이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고 했다. 사람은 성숙해 갈 때에 사랑받는 인물이 될 수 있다. 어린 아기 때에는 예쁘고 귀엽지만, 언제까지나 귀여운 존재로 머물러 있을 수 없다. 키도 자라고 몸무게도 늘어가야 한다. 근육도 생겨야 하고 힘도 점점 세어져야 한다. 생각하는 것도 점점 넓어져야 하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면에서도 점점 자라가야 한다. 장래를 준비하는 면에서도 적극적이어야 하고, 맡은 일에 대한 책임감 면에서도 더욱 신뢰받을 만 해져야 한다. 부모는 자식 키우는 재미로 산다. 자녀들이 자라가는 모습은 부모에게 둘도 없는 기쁨이요 즐거움이다. 농부에게는 곡식이 자라가는 이상의 기쁨이 없다. 자녀의 키가 정상적으로 자라지 않을 때의 부모의 근심은 대단하다. 자녀의 정신 연령이 다른 아이들에 비해 떨어질 때 받는 부모의 충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하나님께서 가장 섭섭해 하시는 경우는 성도가 성숙해지지 않을 때일 것이다. 우리의 믿음이 작년이나 금년이나 전혀 차도가 없다면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무척이나 마음 아파하실 것이다. 인생은 언제나 성장해야 한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자라가는 사람은 사랑스러운 존재이다.

 

예수께서 어린 시절을 건너뛰고 바로 성숙한 어른으로 지구에 오셨다면, 어린이들을 이해하는 그분의 능력에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모든 아이처럼 발육과 성숙을 포함한 모든 성장 단계를 거치셨다. 그분은 십대가 겪는 유혹을 이해하신다. 그분은 어린 시절의 유약함과 불안정함을 겪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어린이가 그들의 처지에서 경험한 것과 같은 난관에 부딪혔다. 어린 시절의 경험은 구주께서 진실로 인간이셨음을 보여주는 한 방편이었다.

눅 2:40~52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해 무엇을 알려주는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열두 살 되는 해는 유년기와 청소년기의 분기점(分岐點)이었다. 히브리의 남아들은 이 연령이 차면 율법의 아들,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었다. 그 아이는 종교적 교훈을 받을 특별한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또한 거룩한 절기와 예식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께서 어릴 때에 유월절에 참여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가신 것도 이 관습에 따른 것이었다”(시대의 소망, 75).

누가복음 2장의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도 지혜를 얻으셨다. 하나님은 그분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소년 예수께서 유월절에 성전을 방문한 경험에서 미루어볼 때 우리는 그분에게 심오한 영적 지혜가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소년 예수님의 질문과 대답은 랍비들의 머리에 깊이 각인되었다.

하나님은 어린 시절의 다양한 경험을 그와 같이 매력적이고 흠 없는 품성을 빚는 데 사용하신다. 아마도 목수의 기술을 습득하고, 경건한 부모의 관심을 받으며, 규칙적으로 성경을 대하고, 나사렛 마을 사람과 교류하면서 예수님의 성장 기초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아무리 눈에 띄는 아이였을지라도 중요한 것은 그분도 우리와 같이 아이였다는 사실이다.

 

교훈

예수님은 인간으로 오셔서 어린아이의 발육과 성장기를 거치심으로 그들의 필요를 이해하실 뿐 아니라 그 연령의 중요성을 보여주셨다.

 

부가적용)

미국의 유명한 시인 롱펠로우는 지금까지도 세계인으로부터 사랑 받고 있다. 그는 하바드 대학에서 근대어를 가르치며 낭만적인 사랑의 시를 써서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다. 세월이 흘러 롱펠로우의 머리칼도 하얗게 세었지만 안색이나 피부는 젊은이처럼 싱그러웠다. 하루는 친구가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롱펠로우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보게, 친구! 오랜만이군. 그런데 자네는 여전히 젊군 그래. 자네가 이렇게 젊은 비결은 뭔가?”이 말을 들은 롱펠로우는 정원에 있는 커다란 나무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저 나무를 보게나! 이제는 늙은 나무지. 그러나 저렇게 꽃이 피고 열매도 맺는다네. 그것이 가능한 건 그래 봬도 저 나무가 매일 조금이라도 계속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야. 나도 그렇다네. 나이가 들었어도 매일 매일 성장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고 있다네!”그렇다. 인생은 언제나 성장해야 한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자라가는 사람은 사랑스러운 존재이다. 예수님은 키와 지혜가 자라가며 하나님께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셨다.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예수님이 자라가야 한다. 우리 속에 예수님 사랑이 자라가고, 예수님 성품이 자라가고,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열심이 자라갈 때 우리는 하나님께 더욱 사랑스러워 가는 존재가 될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 사무엘도 어린 시절 자라가면서 사랑을 받았다.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 (삼상 2:26) 자라가는 모습, 이것이 사람과 하나님께 사랑스러워가는 모습일 것이다.

 

나의 삶 속으로

|묵상|

우리의 자녀들은 지금 어떤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습니까?

역사 이래 지금처럼 풍요로운 시절은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누구에게나 교육의 기회가 넓게 열려 있으니 우리 자녀들처럼 축복받은 세대도 없습니다. 하지만 천연계나 공동체와는 거리가 먼 현대 사회에서 초등학교 심지어 유치원부터 경쟁에 내던져진 우리 아이들은 어쩌면 가장 저주받은 세대일 수도 있습니다. 천연계 속에서 하늘 아버지와 교제하며, 공동체 속에서 여러 세대와 교제하고, 부모 곁에서 일을 거들며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사회적으로 신체적으로 고르게 성장하셨던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우리 자녀들도 경험했으면 좋겠습니다.

 

|적용|

우리 자녀들이 누리지 못하는 축복은 무엇이며 그대는 그것을 어떻게 보충할 수 있을까요?

 

영감의 교훈

청소년과 어린이의 본이 되시는 예수님- “예수님의 모본은 다 자란 청소년들에게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에게도 빛이 되시는데 그분의 생애는 하나의 대표적인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초년기로부터 완전한 모본을 보이셨다. 주님께서는 어린아이로서 당신의 부모들과 자연계의 법칙에 순종하셨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위에 있’(눅 2:40)었다”(부모와 교사와 학생에게 보내는 권면, 178).

 

기 도

아버지, 이 땅의 어린이들을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어른들의 잘못 때문에 수많은 어린 영혼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들을 위로하고, 우리 교회가 그들의 피난처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날(화) 1월21일

어린이들을 치유하심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사 그 아버지에게 도로 주시니”(눅 9: 42).

 

교사강해 3)

 병들고 귀신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을 다시 온전하고 건강한 상태로 회복시켜 주시는 예수님의 주된 동인(動因)은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는 그 마음 자세에서 비롯된다. 인간을 향한 예수님의 한없는 연민과 애정 그리고 사랑은 성경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그분은 외딴 곳에까지 와서 자신의 말씀을 듣는 무리들을 불쌍히 여겨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셨다 (막 6:34). 두 소경이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친 소리에 응답하여 그들을 고쳐주셨다 (마 9:27). 이러한 마음은 탕자의 비유에서 집 나간 둘째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춘 (눅 15:20) 아버지의 사랑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예수는 이러한 자신의 마음을 사람들이 알기를 원하셨다: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막 5:19)".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과 메시아로서의 그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귀신 들린 자, 병든 자는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치유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는 존재 속에 어린아이 역시 어린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사랑의 대상이며 천국은 이런 자들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마 9:18~26, 막 7:24~30, 눅 9:37~43, 요 4:46~54을 읽어 보라. 이 말씀 속에서 누구의 자녀가 건강을 회복했는가? 이 이야기들의 배경은 얼마나 유사한가? 그대는 어떤 차이점을 발견했는가? 우리는 여기서 어떤 교훈을 배워 이 시대에 적용해야 하는가?

 

모든 기사에 나타난 현저한 공통점은 절망에 빠진 부모가 예수님께 찾아와 자녀를 도와달라고 요청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부모가 있을까? 자녀가 아파서 죽어가고 있을 때에 아픔과 고뇌, 두려움, 끔찍한 공포를 느끼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 경험이 있는 부모라면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없을 것이다.

비록 예수님은 지상에서 부모가 된 적이 없었지만 그분은 부모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시고 그들의 자녀를 치유하셨다. 어떤 경우든지 치유가 이루어졌다. 그분은 아무도 그냥 돌려보내지 않으셨다. 그렇게 해서 그분의 사랑이 단지 부모 뿐 아니라 자녀들을 위한 사랑이었음이 분명하게 밝혀졌다.

물론 부모가 자녀를 위해 기도해도 자녀가 낫지 않은 경우가 있다. 아마도 자녀의 장례식보다 더 슬픈 경험은 없을 것이다. 늙은 사람이 먼저 죽는 것이 순서이다. 그래서 먼저 죽은 자녀를 애도하는 부모의 마음은 찢어진다. 그래서 이런 장례식에 거의 모든 부모가 이렇게 묻는다. “차라리 제가 대신 죽으면 안 됩니까?”

육체적인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나 영적인 부패를 지켜보는 것은 모두 고통스럽다. 술과 담배, 음란에 중독되어 무관심한 청소년기를 보내는 자녀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부모가 고민에 빠져 있는가?

 

교훈

예수님은 자녀를 고쳐달라고 간청하는 부모들의 소원을 들어주셨다. 그분은 자녀들을 위한 우리의 관심과 고민을 이해하신다.

 

부가적용)

누가복음은 귀신들린 아들을 예수님께 데려왔던 한 아비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귀신들린 아들을 가진 그 아비에게 아들을 데려오게 하셨다. 이 어린아이가 예수님께 데려왔을 때 어둠의 왕국으로부터 나와 빛의 왕국으로 옮겨졌다. 마귀는 또 하나의 희생자를 잃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분노를 일으키며 마지막으로 그 아들을 땅바닥에 내던지며 난폭하게 이 아이를 격동했다. 그는 예수님께서 그 아들을 구원하시기 전에 그를 죽이고 그의 영혼을 가져가려 했다. 사탄은 지금도 모든 인간들을 대상으로 하여 그와 같은 일을 하려고 한다. 사단은 얼마나 많은 어린아이들을 자신의 세력 안에 두려 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정상적이지 못한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께 나오는 부모와 어린아이들의 고통을 우리 주님은 외면하시지 않으신다. 우리 주님께 나오는 모든 사람들, 우리의 발자국을 그리스도께로 향하는 순간, 사단은 귀신들린 이 아이에게 행했던 것처럼 마지막으로 맹렬한 공격을 시도할 것이다. 그는 우리 눈앞에 가장 현란한 유혹을 펼쳐놓을 것이다. 사단은 모든 인생들, 또한 하나님께로 나오려는 모든 어린이아이들과 인생들에게 우리들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으며, 언제나 사탄에게 속해있다고 우리들을 설득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말씀이 있다. 인생이 예수님께 다가가는 순간 마귀는 아무 힘도 없게 된다. 그리스도께로 향하는 자는 어떤 누구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고 그 구원을 막을 수 없게 된다! 사단은 그 귀신들린 아들이 예수님한테 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고 예수님께 나온 영혼에게 귀신을 쫓아내시고 그 아이를 건전케 하셨다.

 

나의 삶 속으로

|묵상|

자녀에 대한 그대의 아픔과 고민을 하나님은 얼마나 이해하고 계실까요?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고통의 원인이 무엇이든, 비록 사정이 행복하게 바뀌지 않더라도 우리는 위의 성경 기사에 등장하는 부모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선하심을 의지할 필요가 있다. 엘렌 G. 화잇도 선지자로서 두자녀의 장례를 치렀다. 우리는 거친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어떤 경우라도 우리는 이 진리를 붙들어야 한다.

 

|적용|

그대는 자녀들을 위하여 무엇을 하나님께 간구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치유하시는 은혜의 샘- “예수는 세상을 치유하시는 은혜의 샘이었다. 나사렛에서 그가 은둔 생애를 하신 기간 내내 동정과 친절의 조수가 흘러나왔다. 연로한 자나, 슬퍼하는 자나, 죄 짐을 진 자나, 순진한 기쁨 속에서 즐겨 노는 어린이나, 숲 속의 작은 피조물들이나, 무거운 짐을 실은 참을성 있는 짐승이나를 무론하고 모두 그가 함께 계심으로 더 행복해졌다”(시대의 소망, 73).

 

기 도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를 보시고, 우리의 머리털까지 헤아리시는 하늘 아버지, 저보다 더 깊은 관심과 사랑으로 우리 자녀들을 돌보고 계심을 믿고 감사드립니다. 부디 악을 멀리하고, 바른 길에 서며 온전한 마음으로 건강하게 살도록 지켜 주시옵소서.

 

넷째날(수) 1월22일

두려운 경고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마 18:5).

 

교사강해 4)

누군가 18세기는 남자를 발견했고, 19세기는 여자를 발견했고, 20세기는 어린이를 발견했다고 하였다.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어른들은 예수님께 오는 아이들을 꾸짖고 업신여겼다. 사실상 저들은 성년이 되기 전에는 여자들과 함께 수에 칠 가치도 없다고 여겨졌던 시대였다. 어린이는 아직까지 미숙한 존재로 그 사회의 중심이 아닌 구석이나 밖에 있어야 될 자들로 취급받던 때였다. 이런 시대에 예수께서 어린아이를 제자들과 사람들 가운데 세우셨다. 실로 놀라운 예수님의 행동이셨다. 이는 어린 아이들의 그 존재적 중요성이 얼마나 큰지를 알려주는 일이었다. 더구나 어린아이가 교회의 주변의 인물로 취급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자신을 영접한 것이라는 말씀으로 어린아이들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될 주인공들, 곧 이 교회의 중심에서 그 존재를 중요시 여겨야 할 대상들임을 가르치셨다.

 

마 11:25~26, 18:1~6, 10~14을 분석해 보라. 우리는 여기서 어린이에 관한 교훈 뿐 아니라 일반적인 믿음에 대하여 어떤 진리를 배워야 하는가? 예수님의 경고가 얼마나 엄중하였는지 생각해 보라. 우리는 왜 이 경고 앞에서 떨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실 때 예수님은 종종 어린아이에게 있는 진실성에 대해 언급하셨다. 어린이들의 진실성, 겸손함, 의존성 그리고 순진함은 그리스도인 생활에 나타나야 할 본질을 정확히 가리킨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그러한 단순성과 신뢰심을 갈망해야 한다.

오늘날의 제자 양성자들이 배워야 할 또 다른 교훈이 있다. 어린이들의 순진한 의존성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제대로 교육을 받는다면 어린이들은 신뢰의 순수성을 어른이 될 때까지 간직할 수 있다. 어린이가 자라고 나이가 들면, 사물에 대하여 질문할 테고 모두가 그렇듯이 답이 없는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며 고민할 것이다. 그러나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은 인기가 없다. 우리는 부모 또는 어른으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에 대한 지식을 어린이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활, 친절, 동정과 관심을 통해 그들에게 사랑을 보여주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설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린이들을 훈련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을 그들 앞에 보여주는 것이다.

그와 정반대로 교회가 후원하는 행사에서 어린이를 상대로 하는 범법 행위는 교회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확신을 파괴한다. 그와 같은 범죄를 저지른 자들과 그들을 비호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질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그분의 기별은 확신과 신뢰심을 일깨운다. 감히 어떤 인간 조직이 조심성 없이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교훈

예수님은 우리가 어린이들의 순수한 믿음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어린이들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경고하셨다.

 

부가적용)

예수님의 삶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운동이었고 그것은 바로 교회운동의 중심이었다. 예수님께서 어린이에 대한 교훈을 행하신 그 배경에는 제자들의 다툼이 있었다. 제자들이 서로 누가 높으냐 하는 문제로 다툼이 일어나고 쟁론이 있었기 때문에 어린아이를 저희 가운데 세우게 된 것이다(막 9:33~34). 저들은 또한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마 18:1)라고 주님께 질문하였다. 교회에서는 누가 크냐고 하는 질문과도 같다. 예수님의 대답은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라고 대답하시는 가운데, 한 어린아이를 저희 가운데 세우고 천국에 대한 교훈을 하시게 된 것이다. 하나님나라에서는 우리가 작다고 여기는 사람들, 우리가 무시했던 그 사람들이 큰 자가 된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아무도 작은 자가 없고 모두가 소중한 자들임을 가르치는 말씀이다.

 

나의 삶 속으로

|묵상|

그대는 본인의 자녀 또는 어린이들을 얼마나 존중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을 맞이하듯이 진지하게 영접해야 할 대상 가운데 어린이들을 포함시키셨습니다. 그분은 이 세상에서 소외와 학대를 경험하는 수많은 계층 가운데 어린이들이 포함된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 가정과 교회는 어린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나타내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마 18:10).

 

|적용|

그대가 자녀 또는 어린이들을 영접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영감의 교훈

계명과 모본으로 교육하라- “세상에 출생되는 아이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이니 마땅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도록 계명과 모본으로 교육시켜야 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부모들이 자녀들의 이성이 싹트기 시작할 때부터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도록 교육하고 훈련하는 일에 실패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사업을 게을리하고 있다. 부모들은 … 그들의 자녀들을 주의 품성과 훈계로 훈련하기 위하여 가정 생애와 관련된 모든 일을 둘째로 삼아야 한다”(재림신도의 가정, 183).

 

기 도

아버지, 우리가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과 겸손한 믿음으로 천국 시민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어린이들을 사랑하며, 아끼셨던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들을 존중하고 환영하기를 원합니다.

 

다섯째날(목) 1월23일

어린아이들을 용납하라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막 10:14).

 

교사강해 5)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자기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 마태와 마가복음에 기록된 어린 아이들은 '파이디아'로서 이는 7세 정도의 아이들(0-10세)을 의미한다. 그러나 누가복음에 기록된 어린 아이는 '브레페'이며, 이는 젖먹이 유아를 의미하는 말이다. 누가의 경우 젖먹이 유아를 언급한 것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는 존재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젖먹이 유아는 산모에게 전적으로 의존해 있는 무기력한 존재이다. 이러한 모습은 누가복음에서 이 사건 앞에 기록된 세리의 모습과도 일치한다. 세리 역시 유아처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으며, 하나님은 그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다. 유아들은 아무 힘이 없으며, 그의 생명은 전적으로 산모에게 달려 있다. 아기를 데려온 이유에 대해서도 복음서마다 약간씩 다르게 언급하고 있다. 마태의 경우에는 부모들이 아이를 데리고 온 이유는 안수와 축복기도를 받기 위해서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마가와 누가의 경우에는 자기 아이를 만져주시기를 원해서 그들을 데리고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부모들은 주님께서 자기 아이를 안아주시고, 그 머리에 안수하고 축복해 주시기를 바라고 아이들을 데리고 왔을 것이다. 주님께서 아이들을 품에 안고 축복한 것을 보면, 어린 아이들 중에는 매우 어린 아이들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부모들이 어린 아이를 주님께 데리고 가는 일을 불필요한 일로 생각했다. 그들은 아이를 데리고 주님께 가는 일은 주님을 귀찮게 해드리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아이의 부모들을 책망하고 그들을 주님께 데려가지 못하게 막았다.

 

막 10:13~16을 읽어 보라.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영접하는 태도를 보고 어린들은 얼마나 쉽게 그분을 영접했는가? 제자들에 대한 그분의 책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기사로부터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어린이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대하여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하는가?

예수님의 제자들은 무지했을 뿐 분명 나쁜 의도로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더 중요한 일에 그분의 힘을 집중시키실 수 있도록 다른 일에 시간을 뺏기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께서 그들에게 가르쳐 주기를 바랐던 교훈을 대단히 오해하였다.

어린이들이 거친 어른들에 의해 제지를 당했는데, 사랑 많고 따뜻한 예수님이 그들에게 팔을 벌리시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당연히 아이들은 그분께 달려가 안겼을 것이다. 이 이야기로부터 우리는 제자를 양육하는 자들이 어떻게 어린이들을 대해야 하는지 매우 소중한 실례를 얻는다.

“예수께서는 당신과 접촉한 어린이들 중에서 당신의 은혜의 후사요, 당신의 나라의 시민이 될 남녀들을 보셨으며 그들 중 어떤 이들은 당신을 위하여 순교자들이 될 것이었다. 그는 이 어린이들이 세상적으로 현명하고 마음이 완고한 장성한 사람들보다도 매우 쉽게 당신의 말씀을 듣고 당신을 구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아셨다. 그들을 가르치심에 있어서 그는 그들의 수준으로 내려오셨다. 하늘의 왕이신 그는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동심의 이해력에 맞도록 당신의 중대한 교훈을 단순하게 하셨다. 그는 후년에 돋아나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맺힐 진리의 씨를 그들의 마음속에 심으셨다”(시대의 소망, 512~515).

 

교훈

예수님은 그분께 나아오는 아이들을 막지 못하도록 하셨다. 왜냐하면 어린이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구주를 영접하는 하나님 나라의 후사이기 때문이다.

 

부가적용)

어린아이들을 주님께 오지 못하도록 막는 이러한 제자들의 행동은 전혀 주님의 뜻과는 달랐다. 마가복음을 보면 이때에 주님께서 그 광경을 보시고 분히 여기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어린 아이들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달랐다.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에게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지시하셨다. 주님은 제자들이 어린 아이들을 막는 것을 보시고, 화를 내시면서 아이들을 불러서 가까이 오게 하셨다. 그리고 그 어린 아이들을 안아주시면서 "아이들이 내게로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역시 제자들처럼 어린아이들을 소홀히 여길 때가 많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주님의 뜻과는 먼 일이다. 주님은 아이를 주님께 나오지 못하게 하는 일을 보시고 분노하신다. 주님은 어린 아이들을 귀중하게 생각하셨으며, 그들을 축복해 주셨다. 그 후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이런 자의 것이라!" 주님은 하나님 나라가 자신의 주변에 있던 어린 아이들과 같이 자의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만한 사람은 들어갈 수 없다. 하나님 나라는 어린 아기와 같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다. 예수님 주변에는 언제나 아이들이 많이 모였다. 당시 유대나라는 아이들과 여성들이 천대를 받았던 시대였다고 볼 수 있다. 여성과 어린아이들은 항상 남자들의 세계에서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으나 예수님 주변에는 늘 아이들이 그렇게 많이 몰려들었다. 복음서 이후에 현저히 세계가 달라지는 것이 두 가지인데, 아이들과 여성들에 대한 대우가 달라졌다. 기독교가 들어가는 사회마다 이 두 가지가 확실히 변하였다. 여성들의 지위가 변하고 아이들의 대우가 변하였다. 복음이라는 것은 그 아이들, 여성들에게 주는 커다란 의미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다. 그런데 아이들이 그렇게 몰려오는 것을 어른들은 아주 싫어했다. 여기 아주 노골적으로 제자들이 꾸짖거늘 이라고 했다. 예수님은 꾸짖는 제자들을 향하여 도로 꾸짖으면서 일러주신 말씀이 오늘의 말씀이다. 어린아이들을 용납하라. 어른들이 왜 아이들을 꾸짖는가? 왜 아이들을 싫어하는가? 이유가 있다. 충분히 이유가 있다. 오늘 여러분과 나도 아이들을 용납하지 않을 때가 참 많이 있다. 깊이 생각하고 반성해야 할 일이다.

 

나의 삶 속으로

|묵상|

그대가 속한 교회의 어린이들은 행복합니까?

주위에 어린이들을 보면 안식일에 교회에 오는 것을 매우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주중의 삶에 비하면 안식일이 훨씬 즐겁고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기도하고 찬양하면서 즐겁게 예배를 드립니다. 분교나 개척대 활동을 하면서 교회 선생님과 친구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도 정말 재미있습니다. 아이들이 많다보면 교회가 조금 소란스러워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좋은 감화 아래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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