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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과 부자와 유명인사(교사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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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과 부자와 유명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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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2일 안식일

일몰:오후 6시 18분

 

기억절 :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도입)

지금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은 모두 돈과 관련되어 있다. 돈이 사람을 움직이고, 문화를 움직이고, 사상과 철학 심지어 종교까지 움직인다. 성경은 돈 자체를 나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돈을 사랑함"은 일만 악의 뿌리라고 규정함으로 부를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에 대해서는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다. 디모데전서 6장 5절에서는 마음이 부패하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를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난다고 되어있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한다는 것은 이 세대에 자신의 신앙을 상업화하려는 사람들을 향해 던지는 메시지가 될 수도 있겠다. 많은 사람들은 부자가 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건강한 목표를 세우기 원하신다. 잘못된 목표는 그것이 이루어졌다 할지라도 부작용이 따를 수밖에 없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미래의 은혜에 대한 믿음을 대신하는 것이다. 이는 미래의 인간의 자원에 대한 믿음이다. 그러므로 돈을 사랑하는 것 혹은 돈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불신앙의 또 다른 면이다. 웨슬리는 30파운드면 혼자 1년을 편안하게 살 수 있던 시절 1400파운드를 벌었다. 하지만 그는 최소한의 생활비를 빼고 모두 드리는 삶을 살았다. 웨슬리가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가 남긴 돈은 호주머니와 찬장에 있는 것이 전부였다. 재물과 영혼 사이에는 깊은 관계가 있다. 세상 재물을 사용하는 과정이 영적 성장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 모두는 어떤 나라에 가치를 둘지 날마다 선택의 기로에 놓이곤 한다. 재물 사용에 대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해보면 영적 성숙도 측정에 큰 도움이 된다. 비록 돈이 악은 아니지만, 돈을 모으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면 그것은 우리로 참된 부를 상속받지 못하게 방해할 수가 있다.

 

연구범위: 신 8:17~18, 창 13:5~6, 요 3:1~15, 눅 19:1~10, 막 4:18~19, 마 19:16~26.

*교과는 읽고 밑줄만 쳐도 공부가 됩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러, 그들에게 필요하지 않는 것을 위해, 그들에게 없는 돈을 쓴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얼마나 진실을 담고 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돈이 우리 모두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개인의 지출 경향은 그 사람의 가치관을 대변한다. 그래서 재물은 사실상 영적인 문제이다. 성경이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재물에 대해 말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또한 명예가 있는 곳에 부가 따른다. 영화배우, 유명 운동선수, 정치가들은 대개 둘을 모두 가지고 있다. 유명인은 권력의 한 형태로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자와 권력자들에게 감동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모든 사람을 동일한 동기로 구원하고자 하셨다. 그분은 그들이 돈으로 살 수 없는 종류의 부를 소유하기 바라셨다.

 

안교활동반과교과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세속적 부는 평범한 사람이 고민할 필요가 없는 시험거리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➋ 느끼기 : 하나님은 부자든 보통 사람이든 동일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확신한다.

➌ 행하기 :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사회적 지위가 있든지 없든지 표면적 삶에 가려져 있는 인생의 필요는 모두 동일하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Part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그대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에 최고의 부자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❷ 그대 생각에 예수님은 부자들을 어떻게 보시고,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❸ 젊은 부자 관원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합니까?

❹ 어떻게 하면 돈에 눈이 먼 사람들에게 영적 필요를 인식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까요?

B. ❶ 유명 연예인이나 운동선수가 우리 교회를 다닌다면 그대는 어떤 생각이 들 것 같습니까?

❷ 니고데모나 삭개오의 예를 보면 부자나 유명인들의 영적 필요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❸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부와 재물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합니까?

❹ 주변에 주님께 인도하기를 원하는 부자 또는 유명인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결론

우리가 예수님의 모본을 따른다면 우리는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또는 중요하든지 평범하든지 상관없이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지난 친교 모임에 대하여 좋았던 점과 보완해야 할 점 등을 이야기합니다.

❷ 다음 주에 시작할 안식일 오후 활동 계획(시간, 장소, 책임)을 구체적으로 확정합니다.

❸ 기도 제목을 가지고 함께 기도합니다.

 

첫째날(일) 2월16일

풍요의 복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신 8:18).

 

교사강해 1)

부와 부자의 정의가 우리의 삶에 중요하다. 이것은 객관적인 잣대가 있는 것이 아니고, 논하기 어려운 부분도 없지 않다. 그러나 통상 부란 필요 이상의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부와 부자의 기준에 대한 논쟁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목적이 되지 않고, 삶의 목적이 부 자체가 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부자로 남기를 고집하는 사람을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게 하려면 그 문을 크게 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바늘귀를 그대로 두고 낙타를 변화시키기 원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깨우침을 주시고 눈을 열어 주시고 힘을 주시면 우리는 바늘귀를 통과할 수 있을 만큼 작아질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고 그분의 영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사람은 부자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는 진정한 행복이 육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있지 않음을 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나누고 그분의 진리와 사랑으로 변화되어 이웃을 위한 부르심에 응답하는데 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자신을 비우고 낮추는 것이 참된 행복의 길이다.

 

타락한 인류는 자기보다 돈이 더 많은 자들을 시기하기 마련이다. (자신에게 이미 얼마나 많은 돈이 있는지 상관없다.) 그러나 성경은 부 또는 부자를 무조건적으로 폄하하지 않는다. 많은 경우 문제는 물질 그 자체에 있기보다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있다.

성경은 부에 대하여 어떤 조언을 하는가?(신 8:17~18, 창 13:5~6, 41:41~43, 욥1:1~3, 단 4:28~31) 이스라엘 백성은 어디서 복이 오는지 잊지 말아야 했다. 왜 이것이 그토록 중요한가?

 

물론 아브라함, 요셉, 모르드개, 에스더, 히스기야, 요시아, 여호사밧 같은 인물들은 부자이면서 영적이었다. 반면 느부갓네살 왕의 예는 부를 우상으로 삼을 때 이르러 오는 위험을 보여준다. 오늘날 누구든지 그렇게 되기 쉽다.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 백성은 부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관대함에 감사할 때 영적, 물질적 복을 함께 받았다. 그리고 그러한 복이 어디서 오는지 잊지 말도록 경고를 받았다. 다시 말하자면 부 자체는 영적 가난이나 무관심을 가리키지 않는다. 부자 중에는 매우 경건하고 신실한 자들도 있고 상당히 못되고 악한 자들도 있다. 어떤 경우든 우리는 돈에 집착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부자들을 경멸해서도 안 된다. 그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구원이 필요한 자들이다.

 

교훈

성경의 많은 인물이 부자였으며 예수님도 부자를 멸시하지 않고 구원의 대상으로 여기셨다. 그러나 많은 경우 부를 우상으로 섬길 때 문제가 된다.

 

부가적용)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부자가 죽었다. 그는 세상에 살면서 많은 돈을 벌었고 풍족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남에게 베풀지는 않으며 살았다. 그것이 후회스럽고 죄가 되어 그는 하나님에게 청하였다. “하나님, 저에게 하루 동안만 세상에 내려갔다 올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가서 다 못한 일을 꼭 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간절한 그의 소망을 들어주었다. 그는 세상에 내려오자 우선 집으로 달려갔다. 집에는 그가 벌어놓은 돈과 보물들이 가득히 쌓여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들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그렇게 많던 돈과 재물이 하나도 없었다. 그가 죽자 아내와 아들들, 가족과 친족들이 서로 싸우며 빼앗아 모조리 없어진 것이다. 그는 한탄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께 올라가 말했다. “하나님, 다시는 세상에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저렇게 악한 사람들과 어떻게 함께 살 수 있습니까?”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도 세상에 살 때는 그러했느니라.”

 

나의 삶 속으로

|묵상|

부에 대하여 그대는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이 궁핍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신뢰하고 따를 때, 우리가 하는 일이 잘 되고 풍성한 결실을 맺기를 바라십니다. 또한 우리에게 허락된 물질적 복이 선한 목적에 사용되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물질을 이기적으로 사용하거나 그것을 하나님보다 사랑한다면 부는 결코 복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적용|

그대가 시기하거나 선망의 대상으로 여기기보다 구원의 대상 또는 영적 동료로 바라보아야 할 부자들은 누구이며 앞으로 그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돈 자체는 하나님의 선물임- “성경은 단지 부유하다는 이유 때문에 부자를 정죄하지는 않는다. 성경은 부를 획득하는 것이 죄가 된다고 선고하지도 않고 돈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선포한 것은 돈을 사랑함이다. 돈 그 자체는 주의 사업에 충실히 사용하도록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청지기에게 보내는 권면, 138~139).

 

기 도

하나님, 우리 중 어떤 사람은 부요하고, 어떤 사람은 가난하지만 모두가 구주를 필요로 하는 죄인임을 인정합니다. 나보다 부자라고 시기하거나 부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동료로 여기며 그를 위해 기도하고 사랑하며 섬길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둘째날(월) 2월17일

늦은 밤의 만남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요 3:3~4).

 

교사강해 2)

니고데모는 한 밤중에 예수를 찾았다. 왜 하필 밤중이었을까? 아마도 지체 높으신 분이 이름 없는 시골 예언자를 찾아 나서는 행동이 눈에 띌까봐 그랬을 수도 있다. 또는 세상의 어둠과 예수님의 밝은 빛을 대조하려는 성서 기자의 문학적 수사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밤중에 길을 나섰다는 것은, 진리를 찾는 구도자로서의 면모를 말한다. 시편은 이렇게 전한다. "낮에는 주께서 사랑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양 노래가 나에게 있을 것이니, 나는 다만 살아 계시는 내 하나님께 기도드릴 뿐입니다"(시편 42:8). 유대 랍비들의 격언에는 이런 말이 있다. "밤중에 토라를 연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은혜의 끈을 낮에도 드리워주신다." 남들이 자는 그 밤중에도 니고데모는 하나님의 진리에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니고데모는 뜬소문으로 들은 예수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도대체 그 사람과 하나님 나라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이 밤을 새워서라도 예수와 함께 하나님에 대하여 진리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리라' 하는 마음으로,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은 것이다.

 

돈이 많고 지위가 높은 유명인들은 예수님을 위협하지 않았다. 예수님도 사회적 지도층에게 분개하지도 그들을 동경하지도 않으셨다. 구주는 재정적 풍요가 평화와 만족, 의미 있는 관계와 심오한 목적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셨다. 가장 돈이 많은 거물은 가장 가난한 사람보다 외롭고, 공허하며, 분노하기 쉽다.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분석해 보라(요 3:1~15). 어떤 사건이 니고데모로 하여금 예수님의 기별에 관심을 갖도록 자극했을 가능성이 있는가?(요 2:13~25) 어두운 밤은 어떤 중요한 역할을 했는가? 니고데모에게 주신 예수님의 핵심 기별은 무엇인가?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목격하고 은밀하게 그분을 만나기를 원했다. 예수님은 그와 같은 은밀한 접근을 거부하실 수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멸망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셨기 때문에 니고데모가 하나님의 나라에 한 발 더 가깝게 나아올 수 있도록 기꺼이 기회를 허락하셨다. 니고데모의 가난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었다. 세상의 사물은 풍족했고,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얻었지만 그는 영적으로 굶주려 있었다.

니고데모는 자신과 같은 학식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거듭나야 한다는 제안을 본능적으로 거부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심판과 구원 사이의 영원한 선택을 끈질기게 제시하셨다. 비난과 멸시가 두려워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초청을 거절하였다. 담화는 분명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영적인 씨앗이 뿌려져 그의 마음 밭에 서서히 싹을 틔웠다.

 

교훈

물질적인 부자들은 영적으로 가난하기 쉽다. 예수님은 돈과 명예를 가진 니고데모의 영적 굶주림을 보시고 그에게 거듭남의 길을 제시하셨다.

 

부가적용)

예수를 찾은 니고데모는 정중하게 예를 차렸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같이하지 않으시면, 선생님께서 하시는 그런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단지 의례적인 차원이 아니라, 율법에 대한 학식이 깊은 학자답고 사려 깊은 발언으로 예수님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예수의 행적의 의미를 충분히 알겠다는 신학적 이해의 발언이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인도하였다. "내가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니고데모는 육적인 모습에 있어서는 흠잡을 데 없이 세련된 사람이었다. 육적인 노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얻은 교양인이요, 지성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실존적 관심으로 전환시켜 예수님께서는 그가 거듭나야 할 인생임을 지적하시며, 이것을 '남의 이야기하듯 하지 말아라. 바로 너의 문제다!'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신앙의 본질적 차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신 말씀인 것이다.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이 말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은 육의 자녀와 영적인 자녀가 있음을 의미한다. 바로 '육으로 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람 곧 니고데모가 바로 그 세계를 대변한 사람이다. 이는 니고데모가 누리고 있었던 모든 명예와 지위를 함축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 '육으로 난 것'은 꼭 악마적이거나 사악한 어떤 것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누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모든 것을 말한다. 꼭 종교적인 신앙을, 그리스도교적인 믿음을 갖고 있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은 선한 의지를 갖고 있다. 그래서 저마다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인간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대안을 생각한다. 그래서 사회적 혁명과 개혁을 추구하고 교육을 하고 자아개발 훈련을 하기도 한다. 또한 요새 흔히 많은 기독교인들처럼 프로그램화된 '영성개발 훈련'을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사회에는 버리고 싶은 그 흔적들이 사라지지 않는다. 독재자를 몰아냈는데도 또다시 권위적인 통치자가 등장한다. 새로운 공동체를 일구었는데도 보기 싫은 인간들을 또 만난다. 직장을 바꿔봤는데도 고단하고 짜증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깊은 영성훈련을 했음네 하는데도 일상으로 돌아오면 시정잡배와 다를 바 없이 돌변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하는 것은 바로 그 한계를 말하는 것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고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의 본질적 주인임을 믿는 믿음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어느 누구에게도 소망이 없는 자들임을 의미한 것이었다.

 

나의 삶 속으로

|묵상|

그대 또는 그대가 아는 부자들은 어떤 면에서 영적으로 가난합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이 핍박을 받아 흩어졌을 때에 니고데모는 담대하게 전면에 나섰다. 그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시면 소멸될 것으로 예기하였던 어린 교회를 받들기 위하여 자기의 재물을 사용하였다. 위기에 봉착했을 때에 그렇게도 조심스럽고 의심이 많던 그는 바위처럼 굳세게 서서 제자들의 믿음을 격려하고 복음 사업을 진척시키기 위하여 재물을 공급하였다”(시대의 소망, 177).

 

|적용|

어떻게 하면 부자들의 영적 필요를 채울 수 있을까요?

 

영감의 교훈

전면에 나선 니고데모- “그(니고데모)는 전에 자기에게 경의를 표하던 자들에게 조롱과 박해를 받았다. 그는 이 세상의 재물에는 가난하게 되었으나 예수와 회견하던 날 밤에 시작되었던 그 믿음에 서서 흔들리지 않았다”(시대의 소망, 177).

 

기 도

예수님, 그들의 사치와 화려함 뒤에 가려져 있는 영적 가난과 배고픔, 갈증을 볼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그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지혜를 주시옵소서. 그들에게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보여 줄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셋째날(화) 2월18일

부하지만 유명하지 않은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눅 19:5).

 

교사강해 3)

어떤 방탕한 자식이 있었다. 그 자식 때문에 부모의 마음이 늘 아렸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자식이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방탕한 자식이 옷을 갈아입었다고 자식이 변했다고 좋아할 부모는 없다. 그 자식은 옷만 갈아입은 것이지 새사람이 된 것은 아니다. 성경에서는 사람의 몸은 영혼의 옷이라고 가르쳐준다. 사람들은 육적인 변화가 조금만 있어도 굉장한 변화인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그 변화는 방탕한 자식이 옷을 갈아입은 것에 불과하다. 영적인 변화가 있어야 진짜 변화이다. 진짜 구원을 얻은 사람은 영혼의 변화를 경험한 사람이다. 삭개오는 예수님의 은혜를 받고 나서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자신의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토색한 것이 있으면 4배나 갚겠다는 것이다. 이런 충격적인 결심은 그냥 된 것이 아니다. 가치관의 변화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지금까지 돈만을 추구하며 살던 삭개오가 갑자기 돈을 나누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가짜 보석을 두 손 가득히 들고 있던 사람이 진짜 보석을 두 손에 가득히 채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손에 있는 것을 놔야 한다. 삭개오는 영원한 것을 봤기 때문에 유한한 것에 미련을 버릴 수 있었다. 그는 진짜를 봤다. 그래서 가짜를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가치관이 바뀌어야 행동이 바뀌는 것이다. 내가 진정한 구원을 받은 사람인가를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내가 정말로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라. 버려야 할 것을 붙잡고 있다면 그것을 내려놓아야 진정한 보물을 취할 수가 있다.

 

부자라고 항상 존경이 따르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근면과 성실 그리고 하나님의 복으로 말미암아 부를 얻지만, 노골적인 사기꾼들도 있다. 어떤 사람은 합법적이지만 비도덕적인 방식으로 돈을 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모든 비도덕적인 방법이 불법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 9:10~13과 눅 5:27~32, 19:1~10을 비교해 보라. 무슨 이유로 예수님은 비난을 받으셨는가? 그런 비난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에서 우리는 은혜에 대하여 무엇을 배우는가?

 

삭개오의 거주지였던 여리고는 중요한 상업의 중심지로 헤롯 궁전이 있었다. 지리적 위치 때문에 여리고에는 세관 출장소가 있었다. 삭개오는 지역의 세관장으로서 합법적으로 쉽게 부를 축적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에 따르면 탐심은 그로 하여금 합법적인 울타리를 넘도록 유혹했던 것으로 보인다. 열성적인 애국자들은 정직한 세리조차 경멸하며 로마 압제의 도구로 여겼다. 하물며 삭개오와 같이 정직하지 못한 세리는 극도로 혐오하였다. 마태(레위)도 가버나움에서 헤롯 안디바 휘하의 비슷한 지위에 있었다. 본질적으로 로마 정부의 앞잡이로 치부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배신자, 최악에는 탐욕스런 변절자로 여겨졌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단념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사회적 제약에 저항하면서 그들과 식사하셨다. 제사장과 심지어 일반 백성까지 그분을 맹렬하게 비난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멸시를 받던 자들은 예수님과의 교제를 통해 마침내 복음을 받아들였고, 그 중에서 마태는 열두 제자가 됐을 뿐 아니라 신약 성경의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이 되었다.

 

교훈

예수님 당시 세리는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웠지만 민족적인 지탄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과 교제하며 구원하고자 노력하셨다.

 

부가적용)

유대인들에게 식사자리는 단순히 같이 먹고 마시는 자리가 아니다. 그들의 식사는 가장 친밀한 교제를 확인하는 자리였다. 쉽게 말하면 세리들,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면 자신이 세리들, 죄인들과 똑같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자리는 되도록이면 피하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에 봤을 때 맞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자리에 함께 하셨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만나시고 그에게 친히 말씀하셨다. “삭개오야, 내려오라. 오늘 내가 너의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삭개오의 집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예수님이 죄인인 삭개오와 똑같은 취급을 받을 수 있음에도 개의치 않으셨다.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다 욕해서 만나지 않으려 하는 자들도 만나서 구원하시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아무도 그를 가능성 있게 보지 않았음에도 그런 그가, 가장 큰 죄인이 의로운 분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교회는 똑똑하고 잘난 사람이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돈 많은 사람이 많은 헌금을 해서 운영되는 것도 아니다. 교회는 오직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한 자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들이 주님의 선한 일꾼이 되고자 헌신 할 때 아름답게 성장 발전 하는 것이다. "삭개오처럼 부를 청산하고 구원받은 사람은 있지만, 부를 즐기면서 칭찬받은 부자는 거의 없다. 예수님은 부자를 책망하셨고, 부를 경계하셨다. 끊임없이 부를 축적하고 그것으로 많은 것을 누리며 사는 태도는 성경에 비추어서 옳다고 인정할 수 없다. 성경을 제대로 읽는다면, 부자 되기를 바라거나 자신의 부에 대해 깨끗하다는 생각을 할 수 없다"

 

나의 삶 속으로

|묵상|

사람을 평가할 때 직업은 얼마나 중요한 기준이 됩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하여 영적인 판단을 내리는 일에 조심해야 한다. 비록 모든 죄의 크기가 같은 것은 아니며, 어떤 죄는 다른 죄보다 더 심각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의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동등하다.

 

|적용|

신앙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직종에 있는 사람에게 우리는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까요?

 

영감의 교훈

참된 금식- “참된 금식은 단순한 형식적인 의식이 아니다.… 예수의 전 생애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신 생애였다. 시험의 광야에서 금식하시면서, 혹은 마태가 베푼 잔치에서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면서 예수께서는 잃은 자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바치고 계셨다. 참 헌신의 정신은 쓸데없이 슬퍼하는 일에나 단순히 육체를 괴롭히며 많은 재물을 바치는 일 가운데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자원하는 봉사에 자신을 바치는 가운데 나타난다”(시대의 소망, 278).

 

기 도

모든 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하기를 바라시는 우리 아버지, 우리에게 주신 넘치는 사랑과 은혜를 가지고 사회적으로 손가락질을 받는 이들에게까지 구원의 소식을 전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큰 믿음 허락해 주시옵소서.

 

넷째날(수) 2월19일

금박을 입힌 기별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

 

교사강해 4)

우리는 종종 돈에게 절을 하는 사람들을 본다. 직접 돈다발을 놓고 그 앞에서 절을 하는 사람들은 흔치 않을지 모르지만 돈을 끼워 함께 절을 하는 것은 일반적이라 할 수 있다. 불신자들이 제사를 지낼 때 삶은 돼지 머리를 제상(祭床) 위에 올려두고 그 입에 만원짜리 지폐를 가득 꽂아둔 채 그 앞에서 절을 하는 것을 우리가 자주 보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그런 광경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우리 가운데 아무도 돈 앞에 절을 하며 섬기는 자들은 없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산상보훈 가운데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리라"(You cannot serve both God and Money : NIV)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서 재물이란 곧 돈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돈을 섬김에 대한 경고를 하셨을 때, 제자들이 돈다발 앞에서 절을 하며 섬길 것에 대한 경고를 하신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느냐, 돈을 섬기느냐' 했을 때 '하나님을 경배하느냐, 돈을 경배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느냐, 돈의 위력을 신뢰하느냐'의 문제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위력 보다 돈의 위력을 더 신뢰한다면 그것은 곧 돈을 섬기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돈의 위력을 알고 실감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세상이 물량주의화 되어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 돈의 위력에 서서히 물들어 가기 시작했으며 이제는 그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물론 많은 교인들이, 자신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다고 스스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거의 대다수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관념적인 것으로 믿고 있다. 즉 하나님이 원하시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 하나님이 과연 그것을 원하시는지 모르겠다는 식이다.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하면서도 실제적으로는 돈의 위력을 믿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위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돈의 위력을 분쇄할 수 있어야 한다. 돈의 위력을 인정함은 곧 주님의 능력을 약화시키는 것일 따름이다.

 

막 4:18~19, 눅 1:51~53, 6:22~25, 12:16~21, 16:13을 분석해 보라. 이 말씀들은 어떤 실제적인 조언을 담고 있는가? 그리고 어떤 영적 경고를 보태는가? 부자들을 제자로 삼기 위해 신자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우리가 재물의 주인이 아니라 재물이 우리의 주인이다.’라는 말이 있다. 물질적 소유에 의해 우리가 얼마나 쉽게 소모되는가? 그래서 예수님은 ‘재물의 유혹’에 대하여 경고하셨다.

우리의 영적 우선순위가 얼마나 쉽게 돈을 벌려는 목적에 밀리는지 생각해 보라. 이미 돈에 눈이 먼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우리가 이런 진리를 염두에 두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동시에 우리는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은 심판 날에 다음과 같이 오직 한 질문만을 받을 것처럼 살아간다. “그대는 돈을 얼마나 많이 벌었는가?” 예수님은 잘못된 우리의 우선순위를 바꾸어 놓으신다. 소유가 금지된 것은 아니지만, 바른 위치에 있어야 한다. 물질적인 소유물들은 인간의 유익을 위해 계획된 하나님의 도구이다. 그것들은 나누면 축복이 되고, 쌓이면 저주가 된다.

부하든 가난하든 물질주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일시적인 쾌락을 위해 영원한 행복을 희생할 위험에 처해 있다. 그들은 영원한 만족을 더 나빠지고 낡아버릴 잠깐의 욕망과 바꾸고 있다. 사람은 하나님이든 돈이든 둘 중에 하나를 섬긴다. 부하든 가난하든 모두가 다음의 말씀을 유념해야 한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 8:36).

 

교훈

대부분의 사람은 돈 버는 일을 무엇보다 중시한다. 우리는 그들이 우선순위를 바꿔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고 돈을 바르게 다루도록 도와야 한다.

 

부가적용)

우리가 세상을 섬기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 세상은 우리가 사용해야 될 도구이지 우리의 주인은 아니다. 우리가 세상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종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과 재능과 시간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잠시 맡겨주신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재물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종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과 같다. 우리가 세상에 보물을 쌓으면 세상은 우리를 자기 노예로 삼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대신 재물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들, 즉 음식, 의복, 가족, 친구 재물, 재능 등을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고 그 뜻을 행하면, 우리는 재물을 종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재물을 신으로 섬기면 그는 재물의 노예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땅에 소망을 두고 땅에 보물을 쌓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보물을 영원한 천국에 쌓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맑은 눈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왕으로 삼고 살아가는 천국 백성들은 재물을 다스리면서 왕의 백성답게 당당하게 살아가야 한다.

 

나의 삶 속으로

|묵상|

우리가 돈의 노예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돈은 문명사회의 필수적인 수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칠일에 경제활동을 중지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이 더 필수적인 조건인지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시간에 우리는 경제활동을 중지해야 합니다. 또한 그것은 가족관계와 건강을 약화시킬 때까지 확장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그것은 다른 사람의 생계를 위협하거나 고통을 줄 만큼 욕망지향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우리는 얻은 만큼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돈 때문에 신앙과 관계와 건강을 버리는 사람은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적용|

소위 ‘돈에 눈 먼’ 사람들에게 어떻게 신앙과 구원의 가치를 설명해야 할까요?

 

영감의 교훈

눈에 띄는 그리스도의 가르침- “그리스도의 가르침 가운데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그분이 탐심의 죄를 질책하시고, 세속적인 소득과 이익에 대한 과도한 애착의 위험을 지적하시는 데 있어서 그 빈도가 잦고 강도(强度)가 세다는 것이다. 부유한 자의 저택에서, 성전과 길거리에서, 그분은 구원을 찾는 자들에게 경고하셨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교회증언 4권, 82).

 

기 도

많은 사람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근심에 시달리며 돈의 노예가 되어서 살아갑니다. 그들에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전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다섯째날(목) 2월20일

위험을 각오할 조건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 19:21).

 

교사강해 5)

영원한 생명, 하나님의 나라로 향해 가는 나에게 걸림돌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평소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아끼는 것이다. 도저히 포기하기 힘든 것들이다. 부자에겐 당연히 재산이 목숨보다 소중하다. 배운 사람에게는 머리에 가득 든 지식이 최고이다.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은 명예를 향한 욕망을 도무지 멈출 수 없다. 이런 집착을 놓기가 매우 어렵다. 온전을 향해 가는 우리의 다양한 걸림돌들이 있다. 영원한 생명보다 더 값지고 소중한 것은 없다. 재물도, 지식도, 명예도 다 사라지고 마는 것들이다. 그것은 지극히 세속적인 가치요 영원한 것이 아니다. 영원한 것은 생명이요, 진리요, 하나님의 나라뿐이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 없다. 우리의 보화를 쌓고 지키는 길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우리의 재산을 나누는 구제하는 길이다.

 

마 19:16~26을 연구해 보라. 이 말씀은 어떤 영적 위험성에 대해 언급하는가? 신자들은 어떻게 오늘날의 젊은 부자 관원을 도울 수 있는가?

그는 자격과 권위, 넉넉한 재산, 의문의 여지가 없는 도덕성, 게다가 하늘만큼 높은 자존감까지 갖췄다. 패기 넘치는 제자 후보자는 진지하게 구원을 얻기 위한 공식을 물었다. 그리스도께서 우쭐해지셔야 했는가? ‘마침내 우리가 상류층을 회심시키는 중이야!’ 예수님의 생각은 그와 같은 흥분으로 오염되지 않았다. 그가 만약 칭찬을 기대했다면 완전히 실망하였을 것이다. 예수님은 순종의 최소 표준으로 십계명을 제시하셨다. 아마도 젊은 관원은 스스로 축하했는지 모른다. 자신의 평가에 따르면 그는 첫 번째 장애물을 통과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종교지도자를 능가하는 의를 따로 요구하셨다. 그 표준은 이 후보자의 수준에 맞게 낮춰질 수 있었을까? 유다는 열광할 뻔했다. 공적 사무의 책임자라면 크게 기뻐할 상황이었다. 든든한 후원자의 승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라.

그러나 예수님의 사명은 거룩하다. 영적 결핍은 결코 간과해서도 무시해서도 안된다. 따라서 타협이란 있을 수 없다. 모든 이기적 욕망은 굴복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세 단계의 과정을 제시하셨다. ‘너의 소유를 팔아, 가난에 시달리는 자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 이것이 그의 영적인 고비였다. 그 예비 제자는 비록 어리지만 상당한 재물을 축적했었다. 고급 주택, 아름다운 과원, 비옥한 논밭, 화려한 의복, 보석 수집품, 하인, 가축 그리고 특제 마차까지 모든 것이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을 것이다. 하나님의 조건은 변하지 않는다. 흥정이나 협상으로 가격을 낮출 수는 없다. 예수님을 얻으려면 전부가 필요하다. 세속적 성공을 버리고 하늘의 보화를 얻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

 

교훈

젊은 관원의 일화는 우리가 세상의 보화를 버리고 외형적 신앙 이상의 전적인 굴복과 헌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부가적용)

재물이 많은 한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 19:16) 하고 여쭈었다. 그는 자신의 선한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당당하게 이런 질문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질문이다. 구원은 인간의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재물이 많은 청년에게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 19:17)고 하시며 행위를 요구하셨다. 그러자 청년은 계명들을 다 지키었다고 말했다(참조, 마 19:2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재물이 많은 청년의 마음속에 보이지 않는 우상 즉, 재물에 대한 탐욕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그 탐욕 때문에 청년이 영생에 이르지 못한다는 사실도 잘 아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청년에게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마 19:21)고 하시며 끝까지 행위를 요구하셨다. 그러나 그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버렸다. 그 청년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재물에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구원받고 영생에 이를 수 있는 천금(千金) 같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그 청년이 떠나간 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3-24)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부를 통해서는 결코 하늘에 들어갈 수가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소유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좇지 않으면 결코 구원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부자’는 비단 재물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지식이나 명예 등 세상적인 것을 많이 소유한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세상적인 것을 많이 소유한 사람은 그만큼 예수님을 좇거나 천국에 들어가는 데 장애가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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