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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과 예수님과 낙오자들(교사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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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과 예수님과 낙오자들

 

2월 15일 안식일

일몰:오후 6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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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절 :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요 4:28~30).

 

도입)

옛날 중국 한(漢)나라 때에 전군을 통솔했던 대장군 한신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군사를 통솔하는 데 있어서는 '다다익선(多多益善;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이라 자부했던 훌륭한 장수였지만 한나라 고조 황제의 부름을 입기 전에는 그도 역시 한낱 시중의 무뢰배에 불과했다. 그런 그가 한고조의 부름을 입은 후 화려한 대장군으로 변모되어 금의환향하게 되었다. 한고조로부터 부름을 받지 못했다면 한신은 역사에 남아 오랫동안 기억되는 영웅으로서가 아니라 일개 시중의 무뢰배로서 이름 없는 삶을 마쳤을 것이다. 성경의 여러 인물들 중에는 보잘 것 없는 인생이었던 목동을 부르셔서 하나님께서는 왕이 되게 하시고, 선지자가 되기도 하였으며, 사도가 되기도 하고, 진리의 용사가 되어 성경에 이름이 기록되고 천국에 들어갈 약속을 받게 하셨다. 그와 같이 오늘날 우리들도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지 않으셨다면 얼마나 허무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겠는가?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살면서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처음이 미약한 사람들을 불러 위대한 인생을 만드시는 비결을 가지고 계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의 관심 밖의 소자들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심지어 죽음으로 끝장날 인생에까지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살리시어 하나님의 구속사의 조연을 훌륭하게 담당하도록 하셨다. 주님 곁의 사람들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복음 역사의 주역이요, 가장 위대한 개혁자요 성공자가 되게 하셨다. 예수님은 낙오된 수많은 인생들에게서 오히려 창조적인 기회를 만들어 내셨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난 많은 사람들은 그가 가진 조건이나 환경의 좋고 나쁨에 관계없이 위대한 인생을 수확하게 하셨다. 그 비결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 중심에 모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인생을 경영해 달라고 부탁한 믿음이요, 신뢰로 부터였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런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비전에서 포기되거나 소외된 인간은 결코 없다.

 

연구범위: 마 21:28~32, 요 8:1~11, 막 5:1~20, 요 4:5~32, 마 9:9 ~13.

*안교·선교부 홈페이지에 다양한 교과 토의 자료가 있습니다.

 

한 여인이 감옥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15세의 나이에 이미 혼외 자녀를 출산한 비운의 배경이 있었다. 유일한 살붙이였던 아이를 데려 가려고 방문한 사회복지사를 살해한 죄목으로 그녀는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부모, 남편, 친척 심지어 친구 하나 없이 그녀는 험악한 미래를 혼자 맞이해야 했다. 하지만 한 목사의 방문을 통해 그녀는 자신의 모든 과오와 절망적인 상황 그리고 앞으로 닥칠 운명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자신을 용서하며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 어린 소녀를 보는 세상의 시선과 관계없이 그녀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알게 되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이 영혼은 사회규범이나 선한 사람들의 친절을 능가하는 사랑과 용납의 주 안에서 인생의 참된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였다.

 

안교활동반과교과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때 표준이 높고, 중독의 문제가 덜하다는 사실을 배운다.

➋ 느끼기 : 그러한 특권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깊이 이해한다.

➌ 행하기 : 예수님처럼 지역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그들의 필요를 돌보는 일에 헌신한다.

 

Part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여러분은 노숙자들의 교회 출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❷ 예수님은 사회적 낙오자들을 어떻게 대하셨으며 그들을 위해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❸ 우리 주변에서 사회적 낙오자란 어떤 사람들입니까?

❹ 우리 교회가 그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B. ❶ 여러분은 성매매 종사자나 정신질환자 또는 출소자의 친구가 될 수 있습니까?

❷ 어떻게 예수님은 소위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을까요?

❸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극복하셨던 편견은 무엇입니까?

❹ 사회적 낙오자들을 위하여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사역을 함께 계획해 보십시오.

 

결론

사회적 낙오자들을 돌보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오늘(또는 내일) 있을 특별 활동을 최종 확인하고 참여를 권장합니다.

❷ 3월부터 안식일 오후 활동을 시작하기로 결의합니다.

❸ 친교 모임과 오후 활동을 위해 기도합니다.

 

첫째날(일) 2월9일

밑바닥 인생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마 21:31~32).

 

교사강해 1)

신약에 나타난 세리와 창녀 이 두 부류는 다음과 같은 죄를 지은 죄인들을 대표한다. 세리는 물질적인 죄를 범한 죄인이요, 창녀는 육체적인 죄를 범한 죄인들을 대표한다. 저들은 저들의 사회에서 물질적인 그리고 드러난 육체적인 범죄로 말미암아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저들은 정신적으로 교묘하고 간교하게 저지르는 죄를 범한 이들보다 그 죄를 인정하고 시인하는 것이 훨씬 빠를 수 있었다. 세리와 창녀는 죄인의 대명사요 사회의 쓰레기라고 여겨졌던 사람들이었다. 이스라엘의 천민 계층으로 완전히 소외받는 자들이며 죄인들이었다. 그들은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자들이라고 공식적으로 말해지던 부류였다. 세리라는 낱말은 강도라는 낱말과 동의어로도 사용되었고, 그들은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매국노로 취급되던 자들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제사장들과 서기관 바리새인들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신다. 그 까닭이 침례 요한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의로운 길을 가르쳤을 때 세리와 창녀들은 이를 믿었지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즉, 그가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가 하는 것보다도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굳게 믿고 회개했는가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말씀이다. 먼저 회개한 사람이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은 모두가 죄인이며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때문에 자신을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주님의 대속을 굳게 믿는 사람,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 자신의 공로에 의지하지 않고 주님의 은총에 의지하는 사람, 그가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점을 생각하고 회개하고 주님께 의지하는 신앙인이 되자.

 

사회는 계층을 만든다. 부자와 고등교육을 받은 자들은 일반적으로 높은 지위를 차지한다. 선량하고 평범한 시민들은 대개 사회적으로 중간 계층을 점유한다.

그러면 밑바닥에 매춘부, 약물중독자, 범죄자, 노숙자 등이 남는다. 예수님 시대에는 나병환자와 세리도 하류층에 포함되었다.

마 21:28~32, 눅 15:1~10을 읽어 보라. 이 말씀에 따르면 사회적 낙오자들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태도를 보이셨는가?

 

어떤 일 때문에 사회적 낙오자들이 자기 의를 높이는 자들 앞에 나타났는가? 간혹 사회 지도층은 놓치지만 하류 인생들이 찾아낸 사실은 무엇인가? 예수께서 상류층보다 하층민을 구원하는 데 훨씬 효과적이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때나 지금이나 사회적 낙오자들은 비록 악한 쾌락에 굳어져 있거나 자기만의 벽에 갇혀 있지만 자기 의를 주장하는 지도층보다 구원하기가 쉽다. 사회적 낙오자들의 허세 뒤에는 보통 낮은 자존감에서 비롯된 정서적 공허가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십대에 그들은 공개적으로 반항하며 내적인 불확실성을 보상받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려고 광적으로 노력한다. 그러나 그 정체성이란 다분히 의도적으로 자신을 지도하는 사람(부모)의 바람과 정반대로 수립된다.

예수님은 이미 낮아진 그들의 자존감에 손상을 입히려 하지 않으셨다. 대신 그들의 자존감을 새롭게 하셨다. 그분은 사회적 낙오자들에 대한 일관성 있는 사랑과 용납으로 그러한 기초를 놓으셨다. 그들의 마음은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따뜻한 사랑과 용납에 녹곤 하였다.

 

교훈

예수님은 사회의 하층민들에게도 따뜻한 사랑을 베푸셨다. 그리고 그들은 상류층보다 주님의 은혜에 더 적극적으로 반응하였다.

 

부가적용)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시고 사랑하신다.” 마치 지체 부자유의 장애가 있는 자녀에게 더 큰 사랑이 가는 부모의 심정과 같이 하나님께서도 우리 죄인들을 무조건 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감싸주시며 회개의 길을 열어 주시고 계신다는 것이다. 파스칼은 이런 말을 했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는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들이고, 또 하나는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들이다.”자기 죄를 의식하고 뉘우칠 줄 아는 사람은 그 자체로 벌써 의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죄를 전혀 의식도 못하고 반성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구제 불능의 죄인이라는 것이다. 장 자끄 루소는 “범죄는 부끄러워하되, 죄인이라고 자인하는 것은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말했고, 풀톤 쉰 주교는 “죄인이 되는 것은 절망적이지만,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희망적이다”라고 말했다. 죄는 누구나 지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죄가 없다고 자처하는 사람은 가장 큰 위선자이고 희망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예수님은 자주 “인자는 잃은 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오신 목적은 죄인을 찾아오신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환영하고 반기는 진정한 행위는 ‘믿습니다’라는 말이 아니라 나 자신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서 예수님의 삶을 사는 행위이다. 예수님의 삶을 산다는 것은 나 자신의 욕심이 주관하는 사고방식과 가치관에서 빠져나와 예수님의 생각, 예수님의 마음을 닮는 것이다. 그러니까 진정한 신앙이란 입술이나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행동에서 나타나야 한다. 진정한 신앙인은 하나님 앞에 언제나 부족한 죄인임을 자백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아 더욱 깨끗하고 더욱 아름다운 삶을 찾으려고 애쓴다.

 

나의 삶 속으로

|묵상|

그대는 사회적으로 또는 경제적으로 어느 계층에 속합니까?

오늘날 중산층은 줄고 빈곤층은 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빈곤층의 증가와 더불어 고수입, 고연봉자들도 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양극화가 심화되고 빈곤층이 고착화되면 사회불안 요소가 된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희망을 빼앗기고, 기회를 박탈당하며, 사회의 관심에서 배제된 사람들은 위험한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회는 이런 계층을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어두운 현실보다 영적인 가치를 주목하시고 사랑과 관심을 쏟으셨습니다. 그러자 그것이 그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용기가 되었습니다.

 

|적용|

우리 주변에 사회적으로 또는 경제적으로 낮은 계층에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분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영감의 교훈

한 사람도 지나치지 않으심- “그러나 구주께서는, 아무리 죄에 빠져 있을지라도 하늘의 귀중한 진리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지나쳐 버리지 않으셨다. 세리와 창기에게 있어서 그분의 말씀은 새 생애의 시작이 되었다. 주께서 일곱 사귀를 쫓아낸 막달라 마리아는 구주의 무덤에 맨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사람이었으며, 그분께서 부활하신 아침에 제일 먼저 인사를 건넨 사람이었다”(산상보훈, 129~130).

 

기 도

우리를 불쌍히 여겨 받아주시는 예수님, 세상은 저를 낮은 자로 여기나 하나님 안에서 존귀한 자로 여김을 받고, 세상은 저를 쓸모없는 자로 여기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요긴한 일꾼으로 삼아주시니 감사드립니다.

 

둘째날(월) 2월10일

“현장에서”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요 8:7~8).

 

교사강해 2)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저 사람을 심판하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계명을 말씀하시지도 않으셨고 죄가 뭔지 설명하지도 않으셨다. 단지 그들에게 죄 없는, 깨끗한 사람은 돌을 들어서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심판하라고 하셨을 뿐이다. 난 오늘 여기서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이 아닌 그녀를 잡아온 사람들에 초점을 맞춰본다. 그들은 분명 그 여자를 잡아 데리고 오면서 득의양양했을 것이다. 그들은 마치 양산박의 108영웅들이 '替天行道(체천행도)를 외쳤던 것처럼 자기도 하나님을 대신하여 죄인을 잡았다는 생각에 아주 득의양양 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은 자기들이 최소한 이 여자보다는 깨끗하고, 이 여자보다는 의롭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최소한 그녀보다는..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죄 없는 사람이 돌로 쳐라." 하나님의 의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상대적인 의로움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너 자신'이 의로운지 스스로 생각해보라는 말에 그 어떤 사람도 그녀에게 돌을 던질 수 없었다. 우린 죄의 항목만 다를 뿐 모든 사람이 죄를 짓고 있다. 내 자신이 죄인이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우린 죄의 정의가 무엇인지, 왜 죄인인지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께서 주신 양심만으로도 우리가 죄인인 것을 충분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요 8:9) 없었다.

 

요 8:1~11을 읽어 보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사회적 낙오자들에 대해 어떤 사실을 배우는가?

 

감람산에서 영적으로 재충전하신 뒤에 예수님은 성전으로 돌아오셨다.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는 동안, 바리새인들이 그분 앞에 간음한 여인을 끌고 왔다. 그들은 간음죄에 대하여 사형을 지시한 모세의 법을 가지고 예수께 질문하였다.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이 진실하지 못함을 아셨다. 진리를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함정에 빠뜨리려는 목적이었다. 당시 로마의 통치 아래서 유대 법정은 사형을 구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유대지도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공개적으로 그녀의 사형을 반대하면 율법에 대한 그의 충성을 포기했다고 주장하고 역으로 그분이 사형 집행을 지지하면, 로마법을 어겼다고 고소할 작정이었다.

지도자들의 이러한 정치적 음모의 희생양으로 이 무력하고 죄 많은 여인이 붙잡혀 온 것이다. 예수님의 일에 대하여 낯설었다면 그녀는 그분의 자비하신 품성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분은 마치 그녀에게 사형을 언도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잊을 수 없는 전제를 달았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이 말씀은 공평의 장을 만들었다. 죄 없는 사람은 무자비한 형벌을 집행할 권한을 갖고, 반대로 죄 있는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자비를 베풀어야 할 상황이 되었다. 그 자리에 예수님을 제외하면 죄 없는 사람이 없었다. 종교 지도자들은 조용히 사라졌고, 죄가 있는 이 사회적 낙오자는 은혜를 받았다.

 

교훈

세상은 사회적 낙오자에게 무자비한 법을 적용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정죄하기보다 먼저 구원하기 위해 노력하신다.

 

부가적용)

우리는 어찌할 수 없는 인생이기에 늘 자신의 잘못은 관대하게 생각하고 허물이나 단점이 드러나는 것을 꺼려하지만 이웃의 허물은 비난하고 들춰내서 정죄하고 심판한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이런 행위가 결코 순수하지 못함을 아셨고, 심판하려는 그들의 죄가 더 크다는 사실도 아셨다. 모세의 율법에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히면 물어 볼 것도 없이 돌로 쳐 죽여도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일부러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데리고 왔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의 수치와 공포와 절망감을 아셨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는 그 여인을 불쌍하게 여기셨다. 예수님은 이 땅에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다. 정죄하러 오신 것도 아니다. 죄인을 불러서 회개시키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한다. 그래서 누구든지 주님께로 나오면 사랑의 품에 안아 주셨던 것이다. 우리는"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한다. 우리끼리 서로 헐뜯으면 절대로 안된다. 우리가 정죄하고 심판하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서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심판과 정죄는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다 죄인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나의 삶 속으로

|묵상|

그대라면 비슷한 상황에서 어떤 판결을 내리겠습니까?

구조적으로 그리고 환경적으로 범죄 상황에 노출된 사람에게 엄격한 심판이 아니라 보호와 돌봄이 판결되는 사례들이 있습니다. 음식을 훔친 미혼모에게 집과 음식을 제공하라고 판결한 판사, 폭행에 연루된 가출 소년에게 실형이 아닌 자신과의 정기적 상담을 언도하고 학원비를 대주며 공부에 전념하도록 도운 검사, 남을 폭행하고 지갑을 절도한 청년 실업자를 대신하여 자신의 돈으로 피해자의 합의를 이끌어낸 국선 변호사… 이들은 아마도 간음한 여인을 판결하셨던 예수님을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적용|

또 어떤 경우에 우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죄를 판단해야 할까요?

 

영감의 교훈

정죄보다 구원- “이 여인을 용서하시고 고상한 생활을 하도록 격려하신 이 일 가운데서 예수의 성품은 완전한 의의 아름다움으로 빛났다. 예수께서는 죄를 가볍게 하시거나 죄책감을 경감시키지 않으시는 동시에 정죄하려 하지 않으시고 구원하려고 노력하신다. 세상은 이 곁길로 나아간 여인에게 멸시와 조롱밖에는 주지 않았지만 예수께서는 위안과 희망의 말씀을 하셨다”(시대의 소망, 462).

 

기 도

저에게 다른 사람의 죄를 판결할 자격이 없음을 그리고 저도 간음한 여인과 똑같이 용서 받고 은혜 받아야 할 죄인에 불과함을 고백합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정죄보다는 구원에 힘쓰는 자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셋째날(화) 2월11일

최하위층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막 5: 2).

 

교사강해 3)

병들고 귀신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을 다시 온전하고 건강한 상태로 회복시켜 주시는 예수님의 주된 동인(動因)은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는 그 마음 자세에서 비롯된다. 인간을 향한 예수님의 한없는 연민과 애정 그리고 사랑은 성경 여러 곳에서 확인 된다. 그분은 외딴 곳에까지 와서 자신의 말씀을 듣는 무리들을 불쌍히 여겨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셨다(막 6:34). 두 소경이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친 소리에 응답하여 그들을 고쳐주셨다(마 9:27). 이러한 마음은 탕자의 비유에서 집 나간 둘째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춘(눅 15:20) 아버지의 사랑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예수는 이러한 자신의 마음을 사람들이 알기를 원하셨다: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막 5:19)".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과 메시아로서의 그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귀신 들린 자, 병든 자가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치유되었다. 예수께서 만난 사람들 중의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약자요 최하위층의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예수께서 먼저 복음을 들고 간 사람들은 이 세상의 가장 최하위층에 해당되는 사람들이었다.

 

막 5:1~20을 읽어 보라. 이 사람의 처지와 오늘날 노숙자들의 어려움을 비교해보라. 그에 대한 묘사와 정신질환자들의 상태를 비교해 보라. 비슷한 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 오늘날의 사회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예수님이 다른 이들에게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이 사건에 대해서는 알리라고 하셨던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날 우리의 관점에서는 그 같은 끔찍한 상태로 묘지에서 사는 사람을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어떤 사람은 그가 단지 정신병자였다고 주장하지만, 성경은 달리 말한다. (만약 그가 단지 정신병자라면 돼지 떼에 일어난 일은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이 이야기의 핵심은 귀신 들린 사람이든, 정신질환자이든 또는 약물중독자이든 아무도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에도 가능한 한 도움이 제공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심지어 우리가 제공할 수 있는 도움의 한계 너머에 있는 사람들일지라도 그들에게 최대한의 친절과 존중과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누가 감히 어떤 사람은 희망이 없다거나 하나님의 능력 밖에 있다고 판단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관점에서는 상황이 나쁘게 보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모든 사람이 무한히 소중하다. 십자가가 아니었다면 우리도 희망이 없었을 것이다. 이는 우리가 정신적인 손상과 장애를 가진 자들과 대면할 때에 기억해야 할 점이다.

 

교훈

우리는 정상적인 소통, 일상적인 활동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정신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도 예수님의 봉사와 구원의 대상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부가적용)

무덤에 거하며 귀신들린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찾아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귀신들린 자가 초청한 것도 아니고 친척 중에 누가 원해서 오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귀신들린 자는(막 5:7)“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라고 큰 소리로 부르짖는 자였다. 귀신들린 자가 “때가 이르기 전에 나를 괴롭게 하려고 오셨나이까?”하면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괴롭히는 분으로 여겼을 뿐이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이 귀신들린 자를 찾아오신 것은 저들을 오직 불쌍히 여기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던 존귀한 자였는데, 하나님을 버리고 사단 마귀의 말을 듣고 하나님을 떠나 타락하여 살아가는 모습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불쌍히 여기신 것이다. 누구도 스스로 종노릇하는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저들을 건져주시기 위하여 찾아오신 것이다. 그래서 약속하신대로 때가 이르러 이 세상에 오셨고 그 일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귀신들린 자에게 찾아오신 것이다. 그리고 귀신을 쫓아내시려고“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짐승 같은 거라사 광인도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이 풍성하신 분이시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곤궁을 간과하지 않으신다. 비록 귀신들린 자라도 불쌍히 여기신 예수께서는 그를 고쳐 주셨고 온전한 한 사람으로서 원래 있던 곳으로 가서, 거기서 주님을 증거하며 살기를 명하셨다. 이 세상에 주님의 사랑을 받기에 부족하거나 배제된 대상은 아무도 없다. 장애아를 가진 부모가 그 장애를 가진 아이에게 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 부모의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쏟는 것처럼 우리의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주님께서도 다르지 않다. 이 땅의 최약자 계층들인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나타내셨다. 그래서 구약시대에 고아와 과부에 대한 그분의 돌보심을 항상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의 끝없는 긍휼을 나타내고 있는 중요한 반증이다.

 

나의 삶 속으로

|묵상|

그대는 이러한 분들을 어떻게 접촉하고 있습니까?

정신질환 경험을 가진 사람이 전체 인구의 사분의 일 이상이라는 보고가 있습니다. 그 중에 중증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은 때로 치료와 재활을 위해 보호시설에 격리되기도 합니다. 이는 결코 먼 곳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와 우리 가정의 이야기이고, 우리 교회와 이웃의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들과의 접촉을 꺼려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접촉이 가장 필요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 다가왔던 거라사의 남자처럼 그들은 따뜻한 사랑과 이해를 필요로 합니다.

 

|적용|

주위에 이런 분들이 있다면 그대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관심을 그들에게 나타내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언제나 존경심을 가지라- “우리가 관계하는 사람들은 비록 그 처지가 비천하다 하더라도 언제나 존경심을 가지고 대해야 한다. 왜냐하면 저들은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갈 힘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혼은 너무나 귀한 것이어서 결코 무시될 수 없다. 저들은 하나님께서 사신바 된 소유이다. 아무리 천하게 살아온 사람들일지라도 주님을 믿기만 하면 높임을 받을 것이다”(하늘, 89).

 

기 도

아버지, 저에게도 마음의 병이 있습니다. 제 속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아버지께 나아갑니다. 은혜를 주시옵소서. 마음의 병을 가진 사람들을 주님의 마음으로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넷째날(수) 2월12일

우물가의 여인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요 4:9).

 

교사강해 4)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사실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남이 가지 않던 길을 가셨고 다른 유대인들은 상종하지 않던 사람들을 만나셨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유대인들은(예수님도 유대인이셨음) 사마리아인들이 앗수르의 침공때 민족적 순수 혈통을 잃었다며 무시하고 상종도 않고 이방인처럼 취급을 하였다. 그래서 저들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의 종교와 문화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소외를 당한채로 있었다. 본문의 사마리아 여인은 목이 마른 여인이었다. 그것은 다섯 명이나 남편을 둔 그녀의 죄와 그 죄 문제를 해결하여 줄 종교의 부재로 말미암아 그녀는 그 사회로부터 소외된 여자였다. 사마리아인들은 실로의 성전에서 예배와 제사를 드렸는데 그것은 정죄만을 위한 율법 종교였고 늘 목이 타는 야곱의 우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치유 받고 목마름을 해결 받아야 할 사마리아 땅을 사람들은 저주하며 멸시만 했지 그 누구도 그곳을 가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야 하는 데 말이다. 가서 생수를 주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이 여인에게 주셨다. 생명의 생수를 주시고 가지 않던 길을 가시는 은혜도 허락하여 주셨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이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생명의 생수 되시는 주님을 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생수를 먹고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요 4:5~32을 연구하고 다음의 질문에 답하라.

1. 예수님은 어떤 사회적 통념을 허무셨으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 이야기는 사회적 통념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며 특히 그것이 우리의 전도활동을 저해할 때에 어떻게 간주되어야 한다고 말하는가? 어떤 사회적 통념이 다른 이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대의 활동을 방해하는가?

 

2. 예수님은 어떤 방식으로 여인의 은밀한 삶에 대해 말씀하셨는가? 우리는 예수님의 접근 방식에서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하는가?

 

3. 이 이야기는 제자들의 편견에 대해 어떤 사실을 나타내는가? 어떤 식으로 우리도 그와 동일한 잘못을 범할 수 있는가?

 

4. 사마리아 여인은 성적으로 문란한 자신의 삶을 예수께서 아신다는 사실에 감명을 받고 마을에 들어가 그분에 대해 증언했다. 하지만 예수께서 정말 어떤 분인지 여전히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떤 말을 통해 드러냈는가? 여기서 우리는 제자 양육에 필요한 인내에 대하여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하는가?

 

교훈

예수님은 유대인이 가기를 꺼려 하는 사마리아에 들어가셔서 자신의 은밀한 삶 때문에 이웃을 멀리하는 한 여인에게 다가가 복음을 전하셨다.

 

부가적용)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배를 드린다는 것을 말한다. 다른 말로 그리스도 안에서 예배드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기쁨의 예배, 아들의 예배, 승리자의 예배, 사랑의 예배, 충만의 예배이다. 여기에 행복이 있고 여기에 진리가 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이와 같은 예배를 드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만이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실 수가 있다. 예수님 안에 이 모든 은혜가 있다. 우리들은 이 사실을 확실하게 믿고 예수님만을 증거하고 자랑하여야 한다. 또 하나는 그러기 위해서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들이 가지 않던 길을 가야하고 상종하여 버린 사람들도 만나야만 한다.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만을 사랑하면 우리가 무엇이 세상보다 더 나을까? 우리에게 문안하는 사람만 문안하면 우리가 세리나 이방인보다 나을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더 낮아져야 한다. 기독교는 더 낮아져야 한다. 사마리아로 가야한다. 영적으로 허물어진 땅으로 가야한다. 버림받은 사람들, 버림받은 땅, 버림받은 영혼들을 만나야만 한다. 그들이 그냥 저절로 교회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가야 한다. 우리의 주변에도 영적인 사마리아가 있을 것이고 영적인 사마리아인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그들을 찾아가야 한다. 찾아가서 지금 먹고 마시고 취해 있는 그것을 버리도록 하고 생명의 생수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부어주어야 한다. 그럴 때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한 생수의 능력으로 한 영혼이 그리스도께 돌아오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

 

나의 삶 속으로

|묵상|

그대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사회적 통념을 초월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이중장벽을 허무셔야 했습니다. 사마리아인을 꺼리는 유대인들의 편견을 넘으셨고 사마리아인조차 인정하지 않는 고립된 여인과 접촉하셨습니다. 오해를 사기에 충분했지만 복음을 전하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은 위험을 감수하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접근하기 힘든 계층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도소나 집창촌 선교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우리도 여러 겹으로 가로막혀 있는 장벽을 초월해야 합니다.

 

|적용|

그대가 누구에게든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극복해야 하는 편견은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아직도 추진하고 있는 사업- “구주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명수를 제공하셨을 때와 똑같은 사업을 아직도 추진시키고 계신다. 예수를 따르는 자라고 자칭하는 자들이 혹시 버림받은 자들을 멸시하고 피할 수 있을 것이나 문벌이나 민족의 환경도, 생활 조건도 예수의 사랑을 인류의 자녀들에게서 돌이킬 수 없다. 예수께서는 아무리 죄악적이라 할지라도 각 영혼에게 네가 만일 나에게 구하기만 하였으면 내가 네게 생명수를 주었으리라고 말씀하신다”(시대의 소망, 194).

 

기 도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숨어 있는 비둘기 같은 저를 찾아오신 주님, 여러 장벽과 울타리를 넘어 제게 오신 것처럼 저도 편견과 오해와 불신의 담을 넘을 수 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다섯째날(목) 2월13일

세리와 죄인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

 

교사강해 5)

예수님 시대 당시 창녀와 더불어 하류인생의 대표 인물들이 세리들 이었다. 세리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짓밟는 로마의 하수인으로 동족의 피를 빠는 매국노요, 동족을 배반한 자들이었다고 여겨졌다. 그러므로 로마인들 보다 더 미운 사람들로 여겨졌다. 싸우는 시어머니 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우리나라 속담처럼 로마 사람보다 정작 이 세리들이 더 미웠던 것이다.(눅9:10, 막2:15) 일제시대 때 일본 사람들보다 일본 사람들의 앞잡이가 된 친일파들이 더 미워했던 것과 같다. 그래서 세리가 되면,-- ① 법정에 증인으로 설 자격을 주지 않았다. ② 회당에서 출교 되었다. 심지어 가족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③ 일반 사람들도 세리들을 속이는 것은 죄가 안된다고 하였다. ④ 경건한 바리새인들은 세리들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혐오스러운 일로, 죄악으로 간주 했다. ⑤ 유대인은 세리에게 딸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장가를 못 갔다. ⑥ 그래서 세리는 자타가 공인하는 죄인이다.(눅18:3) 세리는 당시 악명 높은 죄인들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비난하고 욕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으시고 친히 죄인들로 여겨진 저들과 생명의 잔치를 함께 하셨다. 떡을 떼어 주시고, 포도주를 함께 하셨다(마 11:19).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식사를 하시는 장면을 그려놓은 곳으로 가득하다. 주님은 이 땅 가운데 오셔서 항상 영화롭고 화려한 곳이 아니라 주님이 도무지 유하실 수 없는 작고 초라한 곳, 낮은 자리에 먼저 찾아가셨다. 사람들이 멸시하고 멀리하는 죄인들을 찾아오셔서 이들을 따뜻한 사랑으로 위로하시고, 이들의 집에 유하시며 생명과 기쁨의 잔치를 열어주셨다.

 

우리는 죄가 침입하지 않았다면 이 세상이 어떠했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수천년이 지나도 천연계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과 선하심을 증명한다. 그러나 죄로 어두워진 우리의 심령은 타락하지 않은 인간의 삶이 어떠했을지 헤아리지 못한다. 단지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한 가지는 모든 사회와 문화에 영향을 미치는 계급 차별, 편견, 문화적, 인종적 경계가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이러한 경계가 사라지리라는 기대는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다. 오히려 세상이 더 악화되면서 이러한 장벽도 더욱 심화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과 사회로부터 버림 받은 낙오자들에게 큰 심적 고통과 아픔을 야기하는 이러한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마 9:9~13을 읽어 보라. 예수님의 말이 아닌 그분의 행동에서 진정한 기독교의 본질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특히 호 6:6을 인용하면서 “나는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말씀에 주목하라. 우리는 모두 어느 사회의 일부분이며 어느 사회에나 있는 편견과 사회적 장벽에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여기서 예수님이 그토록 강하게 비난하셨던 태도를 취하지 않도록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앉으사 식사하고 계신 것을 보았다. 그는 조용하고 침착하였으며, 친절하고, 예모가 있었으며, 우의에 넘친 모습이었다. 그들은 그들 앞에 펼쳐져 있는 광경을 보고 찬탄을 금할 수가 없었지만 그것은 자기들의 행동 양식과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그 광경을 참고 볼 수가 없었다”(화잇주석, 마 9:11).

 

교훈

타락한 이후 세상에는 줄곧 계급과 인종 차별이 존재해 왔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경계를 극복하고 사회적 낙오자를 구원하기 위해 노력하셨다.

 

부가적용)

예수님 당시 세리들은 백성들에게 합당한 세율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친 과세로 안 그래도 가난한 백성들을 더 힘들게 했다. 당시 세리들이 얼마나 백성들을 괴롭혔으면 침례 요한이 당시 세리들을 향해 “세리들은 세금을 거둘 때 정한 대로만 받고 그 이상은 받아내지 마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리스 세계에서는 세리들을 도둑이라고 칭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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