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과 영적 지도자들을 제자로 양성함(교사들을위한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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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과 영적 지도자들을 제자로 양성함
3월 15일 안식일
일몰:오후 6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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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절 :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눅 6:12~13).
도입)
<앙리 누웬>은 화란 태생으로서 화란에서 대학을 마치고 미국으로 들어가 공부를 한 후 목사와 대학교수가 되었다. 그는 노틀담대학, 예일대학, 하버드대학에서 심리학과 종교학을 가르치는 유능한 교수가 되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성직자가 되고, 교수가 되고, 저술가가 되었으니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명예로나 어떤 면으로 보던지 그는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에게 회의가 찾아 왔다. 모든 사람들이 흠모할 수 있는 성공적인 사람이 되었으나, 그의 영적인 사람으로서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얼마나 성공했는가? 라는 회의가 일어났다. 그가 알고, 가르친 대로 한다면 지금쯤은 ‘작은 예수’가 되었어야 했을 텐데 그렇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아직도 자기를 앞세우고 주님과의 거리가 멀어져 있는 자신을 보았다. 그는 결단했다. 대학 교수직을 그만두고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장애자 수용소에 들어가 그들을 위해 봉사하다가 심장마비로 생을 마치었다. 이 같은 자신의 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In the name fo Jesus)라는 책에서 고백하고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과의 개인적 경험을 통해 이렇게 이루어진다. 사도란 예수님을 대신하여 세상에 나아가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작은 예수가 되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사람들이다. 사도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다. 사도는 전도의 열매를 맺을 뿐 아니라, 그 열매를 보존하기 위해서 양육 사역을 하는 제자이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은 제자 훈련을 하셨다. 제자 훈련이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영적 성숙과 영적 재생산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영적인 일이다. 사도는 예수님의 제자를 만드는 제자들이다.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열두 명이라는 사도들에게 집중하셨다. 사도들을 택하신 기준은 무엇일까? 그들은 영적인 소원이 있는 사람들이다. 배우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이다. 충성스러운 사람들이다. 예수님의 비전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들이다.
연구범위: 눅 6:12~16, 요 16:7~14, 눅 6:20~49, 렘 50:31, 사 57:15, 행 1장.
*교과반이 서로 기도해 주고 돌봐 주는 친밀한 모임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예수님은 언제나 제자를 양성하는 데 적극적이셨다. 그러나 그분의 지상 생애가 짧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자신이 떠난 뒤에도 사업이 지속되도록 제자들을 훈련시키는 데 투자셨다. 그분은 그들의 수석 교사이자, 수석 조련사이셨다. 교육과 훈련은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교육이 주로 지식의 주입을 의미하는 반면 훈련은 연습과 훈육을 통해 자격을 갖추는 과정을 의미한다. 지도력을 위한 제자들의 준비에는 지식의 습득도 포함되지만 영적 성장이 가장 중요하다. 그들은 교리와 신학에 대한 지적 이해와 더불어 하나님, 믿음, 고난, 성화와 같은 분야에서 경험이 필요했다. 지식만으로는 앞에 놓인 험한 도전을 대비하기에 불충분하였다.
안교활동반과교과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그리스도의 영향력은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어느 정도까지 수용하고 구체화시키느냐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음을 이해한다.
➋ 느끼기 : 그리스도인 특성을 계발시킴으로 효과적인 사명 성취를 갈망한다.
➌ 행하기 :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4~5명을 제자로 삼아 가르친다.
Part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재림교회에 다니려면 얼마나 많은 책을 읽어야 하며 얼마나 많은 공부를 해야 합니까?
❷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왜 지적 훈련이 필요합니까?
❸ 영적 지식과 경험이 모두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둘 중에 하나가 부족하면 어떻게 될까요?
❹ 그대는 충성스런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 어떤 제자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
B. ❶ 그대는 학창시절에 또는 교회나 마을, 직장에서 어떤 지도자 경험을 해 보았습니까?
❷ 예수님께서 첫 번째 제자를 열두 명만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❸ 예수님은 어떤 기준으로 열두 제자를 선택하셨다고 생각합니까?
❹ 천국의 확장을 위해 예수님이 제자를 양성하신 원리를 우리는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요?
결론
우리가 언젠가 떠나면 다른 사람이 우리를 대신합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남겨 두시고 떠나셨습니다. 그렇다면 사업을 마치기 위해 우리는 누구를 훈련시켜야 합니까?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안식일 오후 활동에서 보완해야 할 점이 무엇인지 이야기합니다.
❷ 오늘(또는 내일) 있는 3월 친교 모임을 안내하고 모두가 참여하도록 권장합니다.
❸ 기도 제목을 가지고 함께 기도합니다.
첫째날(일) 3월9일
지도력은 여기서 시작됨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눅 6:12~13).
교사강해 1)
우리나라 영화중에 ‘국가대표’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의 내용에 어머니를 찾는 입양아, 나이트클럽 웨이터, 고깃집 아들, 봉제업 알바생이 코치의 부름을 받고 스키 점프 선수들이 된다. 코치는 사제를 털어서 그들을 섬기고 훈련을 시키고 자신감을 심어 마침내 국가대표가 되게 하였다. 그리고 각종 국제 대회에서 메달을 딴다. 현 스키 점프 대표선수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란다. 주목받지 못하던 그들이 코치의 부름을 받아 자랑스러운 국가대표가 되었듯이, 예수께서 제자로 부르신 제자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위대한 천국의 대표자요 사도가 되었다. 열두 제자를 사도로 세우신 예수님은 오늘날도 우리에게 동일한 희망을 갖고 찾아오신다. 이 시간 우리를 택하신 주님의 은혜를 깊이 영접하고 사도로서의 길을 가기를 기도한다.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는 비교적 짧았다. 그래서 제자 양육자들에 대한 훈련이 꼭 필요했다. 누구를 얼마나 많이 선발해야 했는가? 예수님의 제자들은 물론 수백 명을 헤아렸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집단 교육을 받아야 했을까? 예수님은 지도력이 강의에 의하여 집단적으로 계발되는 것이 아니라 소그룹 안에서 효과적으로 형성된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 수업에는 소수만이 선발되었다.
눅 6:12~16을 읽어 보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택하기 전에 무엇을 하셨는가? 왜 그것이 그토록 중요했는가?
성공적인 선택을 위해서는 상당한 지혜가 필요하다. 예수님은 그러한 지혜를 얻기 위해 하늘 아버지께 나아가셨다. 마찬가지로 21세기 제자 양육에 있어서도 지도자를 선출하기에 앞서 기도가 선행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필요한 지혜를 얻기위해 상당한 기도가 필요하다고 믿으셨다면, 오늘날의 신자들은 대사명의 확장을 감독할 책임을 짊어질 자들을 선출할 때에 얼마나 더욱 거룩한 지혜를 위해 탄원해야 하겠는가?
예수님은 열두 명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사도 즉 영적 권위가 위임된 그분의 대표자로 임명하셨다. 다른 제자들은 그들의 임명을 질투나 부정적인 정서로 바라보지 않았다. 후에 예수님은 더 큰 규모의 70인 제자를 임명하셨고,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더 많은 제자를 양성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12사도는 예수님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는 자로서의 신분을 소유함으로 큰 책임을 짊어져야 했고, 그래서 가장 강도 높은 훈련과 충성이 필요했다.
교훈
예수님은 여러 제자를 양성하셨다. 그중에 첫 열두 제자들은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큰 책임을 짊어지도록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부가적용)
사도란 ‘보냄을 받은 자’란 뜻이다. 주인의 보냄을 받아 주인의 이름과 권세로 주인의 일을 하는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주님을 대표하는 전권대사(ambassador)인 것이다. 대사가 국가를 대표하고 대통령의 역할을 위임받아 일을 하듯이 사도는 천국을 대표하는 사람이며 예수님으로부터 그의 권세를 위임받아 예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다.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가? 예수님의 일은 무엇인가? 눅 4장에서 이사야 61장의 말씀을 인용해서 예수님은 자신의 일이 무엇인지 직접 말씀하신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하나님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는 것이다. 곧 앞에 나온 것처럼 불의한 세력과 잘못된 전통으로부터 영혼들을 지키고,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세상에 이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어두운 이 시대를 섬기는 비결도 예수님처럼 소수의 사도를 양성하는 데 있다. 이 시대도 구원을 받아야 하고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오른손 마른 사람처럼 우주만한 인생문제를 끌어안고 남몰래 고통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 갈등 문제, 성격문제, 가정문제, 장래문제를 안고 아웃사이더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로 인해 자살하기도 하고 현실을 도피하여 게임의 세계 속에 빠져 폐인이 되기도 한다. 예수님이 하신 가장 중요한 일 두 가지는, 역사를 계승할 사도를 양성하신 일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일이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자라나 그곳을 벗어난 적이 거의 없었지만 그의 소수 사도 양성이 온 세계를 변화시켰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주님이 보내주시는 소수의 영혼들을 사도로 키우기를 기도한다.
나의 삶 속으로
|묵상|
그대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어떤 훈련을 받았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이런 과정은 초기 그리스도인 사이에 존재했던 조직적인 구조를 암시한다. 예수님은 맡겨진 임무에 적합한 역량과 지식을 갖춘 지도자들을 그러한 조직 내에 투입하셨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맡긴 사명은 단지 교회를 출입하는 신자를 만들라는 것이아니라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그대가 제자로서 훈련받은 경험이 없다면 적극적으로 그런 과정에 참여할 필요가 있습니다.
|적용|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대에게 어떤 훈련이 필요한지 생각해 보십시오.
영감의 교훈
제자들을 위해 밤새 기도하심- “제자들이 산기슭에서 잠자는 동안에 구주께서는 홀로 갈릴리 바다 근방의 산 위에서 온 밤을 새우시면서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 먼동이 트기 시작하자 구주께서는 그들을 부르시어 당신을 만나도록 하셨는데 이는 중요한 어떤 것을 그들에게 전달하셔야 했기 때문이었다”(시대의 소망, 292).
기 도
예수님, 그 동안 제자로서 살지 못했던 부끄러운 제 삶을 회개합니다. 경건의 연습뿐 아니라 섬김과 봉사의 생활 그리고 영혼 구원과 양육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제자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저를 훈련시켜 주시옵소서.
둘째날(월) 3월10일
지식과 경험-1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8, 13).
교사강해 2)
기독교 신앙에서 경험이란 과연 위험한 것으로 취급되어야 하는가? 오늘날 교리적 체계를 중요시 여기는 교회 안에서 영적인 체험(경험)을 했다는 사람들이 나타나면 일종의 긴장을 하는 빛이 역력하다. 우리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는 성령의 특별한 체험을 통해 나타나는 늦은비 성령에 대한 능력에 대해서 부르짖고는 있지만 그런 능력이 실제로 나타나면 그런 개인적 경험들을 가진 사람들을 수용하는데 매우 부정적인 경향이 있을 것이다. 오늘날 소위 깨어 있다고 하는 교회들도 어떤 영적인 경험이 크게 나타나는 것에 대해 일종의 알러지 반응까지 보인다. 그러나 이 시대의 교회가 이런 비정상적인 신앙 태도에 대하여 무조건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이 시대의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하여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하는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아니, 이런 극단적인 종교 경험주의적 태도에 대하여 또 다른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과 아울러 교회사를 볼 때 경험이 무조건 정죄의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이 경계하는 것은 '경험'이 아니라 '경험주의'라는 왜곡된 신앙의 태도이다. 도리어 경험이 교회 안에서 무시되면 기독교 신앙은 지식과 사변으로만 치우치게 되며, 그 결과는 회중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특징은 지식과 교리적인 사변적인 것에는 탁월하나 진리가 체험되거나 경험되는 면에 있어서는 취약한 편이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진리의 경험이 아니라 경험주의이다. 그러면 경험주의란 무엇인가? 경험주의란 경험을 '절대'의 위치에 올려놓는 태도를 말한다. 즉 자신의 경험(체험)을 '진리'의 자리에 올려놓는, 다시 말해서 자신의 경험을 오류가 없는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는 태도를 말한다.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행 18:24). 이 말씀은 아볼로의 학력(學力)을 증거 하는 말이다. ‘지식은 곧 힘이다’라는 말과 같이, 옛부터 기독교 교역자 중에는 평소 많은 학문적 소양을 가진 자가 크게 성공하였다. 물론 복음을 증거함에 유·무식이 큰 관계는 없고, 오직 성령에 충만하여 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신학을 조직하며 그 심오한 진리를 드러내며 또 변증(辨證)함에는 그 사람의 학력을 기대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아볼로로 하여금 그 역사에 힘 있게 한 것은 저의 가진바 성경 지식이었다. 오늘의 한국 교회에는 이와 같은 성서 독학자가 많이 일어나는 동시에, 모든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때 다른 빛을 구하지 말고 첫째 그리스도와 그 구원에 대한 붉은 줄을 먼저 찾아 읽기를 바란다. 성경은 철학 책도 아니요 역사책도 아니요 문학이나 사회사상에 관한 책도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구원에 관한 책이니 이에 착안하여 읽어야 한다. 사람은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졌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온 후에야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의 본질이 금인지, 은인지, 동인지, 진흙인지를 아신다. 또 우리가 어떠한 그릇으로 되어 있는지도 잘 알고 계신다. 그럼으로 나에게 있는 학술이나, 도덕이나, 능력이 진정한 내가 아니고, 진정한 나는 오직 신앙에서만이 발견되는 것이다. 베드로의 베드로 됨도, 바울의 바울 됨도 진정한 신앙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그럼으로 우리는 아볼로의 학문이나 웅변보다 그의 가진 신앙을 칭찬하여야 할 것이다. 저의 신앙은 “열심으로” 하였으니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이러한 열심 있는 독실한 신앙이며, 중심으로 믿는 신앙이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롬 2:28-29) 하신 말씀과 같이 신앙이 그 사람의 중심으로부터 된 것이 아니면 이는 거짓이다. 도금이 벗겨지는 날이 있음과 같이 외식하는 자들의 본색이 반드시 드러나는 날이 있을 것이다.
정보는 예수님의 기별에서 대체 불가능한 요소이다. 정보만으로 변화를 일으킬 수는 없지만 모든 변화는 정보를 포함한다. 확실히 개념들은 변화를 일으킬 만한 내적 힘이 없다. 반면 인간의 마음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은 회심에 필요한 대체 불가능한 요소이다.
요 16:7~14을 읽어 보라. 여기서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그분의 말씀에 따르면 지식은 진정한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고 경험하는 데 얼마나 제한적인가?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함께하는 성경의 지식은 개인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영적조합을 이룬다. 이 둘을 위해서 제자를 양육하는 자는 믿음과 공부에 집중해야한다.
기독교는 지성과 사고, 상상력을 높이 평가한다. 성경 전체를 흐르는 논리 정연한 사상, 유대교 교사들에 대한 엄청난 존경심 그리고 서기관들이 고대의 기록을 보존하기 위해 쏟는 대단한 열정 등 이 모든 것은 지식의 중요성을 증명한다.
기독교는 비합리적인 신앙이 아니다. 물론 기독교의 일부에서는 지식보다 정서나 감정 또는 경험을 더 높이 산다. 이런 사고방식에 따르면 무엇을 믿느냐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 왜냐하면 경험만이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순종과 특정 진리에 대한 고착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고, 정서와 종교적 감흥은 영적 진실성을 평가하는 잣대가 된다.
교훈
기독교 신앙은 상당한 수준의 정보와 지식을 수반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제자는 단지 종교적 감성 이상의 지적 훈련이 필요하다.
부가적용)
아볼로는 뛰어난 성경지식을 소유했지만 그가 알고 있는 한계가 나타난다. 그가 알고 있었던 한계는“요한의 침례만 알 따름이라”(행 18:25 하)고 하였다. 저는 에베소에서 힘써 전도하며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다. 그러나 저의 영적인 경험은 다만 침례 요한의 침례, 즉 회개에 대한 도리만 알고, 성령침례에 대한 더 깊은 경험은 알지 못하였다(행 19:1-6). 대개 교회에서 회개이니 중생이니 성결이니 하는 영적 경험에 대하여 무관심한 전도자도 많이 있다. 예컨대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은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지만 중생의 경험을 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볼로와 같이 중생의 경험을 말하되 성령침례의 경험은 알지 못하는 사람은 더욱 많이 있다. 대개 요한의 침례는 회개하여 죄 사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리스도의 침례는 즉 성령의 침례이다. 요한의 침례는 행위상 변화요 그리스도의 침례는 성질상 곧 본질적 변화를 주는 더 깊은 은혜이다. 즉 인간의 썩어져 없어져 버릴 인간의 존재가 성령의 임재를 통해 육적인 몸에서 영적인 몸으로 그 본질이 바뀌는 이 은혜는 참으로 귀중한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주님의 제자들은 저 오순절날에 다 이 은혜를 받았다(행 2:1-4). 이는 신자 모두가 받아야 할 두 번째 은혜이다. 바울이 아볼로가 목회하는 에베소교회를 방문하였을 때 이곳 신도들은 이 성령의 은혜에 관하여 알지 못하였다(행 19:1-6). 그러나 바울이 기도함으로 모였던 사람들이 성령침례를 받게 되었다. 오늘도 에베소교회의 교인들과 같이 이런 성령침례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교회, 이 경험을 알지 못하는 신자들이 많이 있다. 분명히 중생의 은혜와 성령 충만은 다른 것이다. 우리는 모든 교회들이 성령 충만하도록 인도하여야 한다. 그리하려면 우리 개인부터 먼저 이 은혜를 경험해야 할 것이다.
나의 삶 속으로
|묵상|
그대는 성경을 포함하여 신앙 지식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합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그러나 성경 자체는 이것을 경험에 대한 맹신으로 간주한다. 지식이 배제된 경험은 방향이 불분명한 대형 미사일과 같다. 반대로 경험이 없는 지식은 생명력이 결여되어 있거나 때로 율법주의로 흐른다. 참 기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뿐 아니라 그들이 양육하는 제자들도 두 요소를 함께 길러야 할 필요성을 이해했다.
|적용|
그대는 앞으로 더 풍부한 신앙 지식을 얻기 위해 어떻게 노력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깊은 경험과 많은 지식을 사모하게 됨- “그대들이 만일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제자들이 행하기를 원하신 뜻을 따라 나아가 일하여, 그를 위하여 영혼을 구원하려고 할 것 같으면 그대들은 신령한 사물에 있어서 좀 더 깊은 경험과 좀 더 많은 지식이 필요함을 느끼게 될 것이요 또한 의를 주리고 목마른 것같이 사모하게 될 것이다”(정로의 계단, 80).
기 도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 4: 6)라고 탄식하셨던 아버지, 무지한 백성이 되지 않도록 우리에게 수많은 기별을 주셨으니 진리의 영을 보내셔서 하늘의 지식을 깨달을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셋째날(화) 3월11일
지식과 경험-2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눅 6:49).
교사강해 3)
기독교 신앙의 영역에서 '경험'은 성령 하나님의 사역과 관련을 맺고 있다. 즉 성부 하나님은 구원을 작정하시고 성자 예수님은 구원을 성취해 놓으셨다면, 성령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성자께서 성취해 놓으신 구원을 각 개인으로 하여금 경험케 하시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구원의 적용이라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 신앙의 경험은 도그마(교리)의 실제화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경험'이 '교리의 실제화'라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교리의 실제화는 교리에 대한 이해를 분명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라고 하셨고, 반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라고 하셨다. 왜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해야만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인가? 그 이유는 지식과 실제의 간격 때문이다. 이곳에서 말한 지식과 실제의 간격이 있다고 한 말을 오해하여, 진리의 지식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식으로 이해하지 말았으면 한다. 이 말을 하는 것은 지식과 실제의 한계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받는 사람이 실제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인식의 한계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즉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아무리 정확한 진리의 지식을 들을지라도 그 지식을 인식할 때 해석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진리의 왜곡이 형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왜곡을 이루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는데 그 첫째는 진리에 대한 선입견이고, 두 번째는 기존의 잘못된 지식에 의한 진리의 거부이며, 세 번째는 진리의 지식과 관련된 다른 경험이 그 역할을 한다. 고로 진리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자신에게 구원의 실제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말씀에 대한 올바른 이해(인식)을 필요로 한다.
눅 6:20~49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지식과 경험을 어떻게 동시에 설명했는가? 여기서 두 요소는 어떻게 섞여 있는가? 우리 자신의 신앙뿐 아니라 제자 양육을 위해서도 두 요소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영적 지식은 영적 변화와 불가분의 관계이다. 그리스도는 위대한 교사로 간주되었다. 그분은 해변과 산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천연계를 경계로한 열린 교실에서 삶을 변화시키는 지식의 씨를 뿌리셨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이러한 진리를 수용하도록 무감각해진 양심을 일깨우셨다. 제자 양성은 경험 없이는 불완전하다. 그러나 경험은 반드시 지식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
21세기 제자 양육자는 참된 영성 형성의 원천인 성경을 철저하게 숙지해야 한다. 또한 그들은 인기나 편의성과 상관없이 교리와 교훈을 전파해야 한다. 하나님은 기존의 신자들이 아무것도 감추지 않고 삶을 변화시키는 기독교의 아름다운 진리, 특히 세 천사의 기별에 담긴 현대 진리에 대해 무한히 확장되는 이해와 인식으로 새 신자들을 끈기 있게 인도하기를 바라신다.
제자 양육에 대한 문맥에서 봤을 때 예수님은 제자를 양성하기 원하는 자들이 무엇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가?(눅 6:39)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경고하는 것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결국 이타적인 사랑을 만드는 지식과 경험의 조합은 제자를 양육하는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가장 큰 잠재력이 될 것이다.
교훈
그리스도의 제자는 성령에 의해 일깨움을 받은 영적 지식 위에 신앙의 실질적인 경험을 더함으로 삶을 변화시키는 진리를 전해야 한다.
부가적용)
오직 성령님만이 타락한 인간의 왜곡된 인식의 한계를 극복하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진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도달하게 될 때 비로소 신자에게 성경이 약속하고 있는 실제(구원)에 도달하게 하신다. 그리고 그 실제는 신자에게 '경험'이라는 방식으로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와 행하지 않는 자의 차이는 바로 진리의 지식에 대한 왜곡 여부를 알게 됐느냐, 알지 못하게 됐느냐와 관련을 맺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신자는 이 과정을 통해서 지식과 삶의 통일성을 경험하면서 진리와 삶의 괴리를 해소하게 된다. 그러나 경험주의자들은 진리에 절대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들은 경험 자체에 절대성을 부여함으로 말미암아 진리와 실제 자체를 왜곡하거나 부정한다. 그들은 자신이 진리와 실제에 대한 인식의 왜곡 가운데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진리 안에서 누리는 경험에 무관심한 사람들과 동일한 입장이라는 것이 심각하다.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차이는 단지 경험을 절대시하는냐(신비주의), 아니면 지적 인식 능력을 절대시 하느냐(칸트주의)에 있을 뿐이다. 전자를 추구하게 될 때 신비주의로 나타나고, 후자를 추구하게 될 때 교조주의(바리새주의)로 나타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 양 쪽은 다 위험하다. 그리고 이 두 진영은 작용과 반작용이라는 방식으로 서로를 발생시는 극단적인 원동력이 된다. 또한 이 양 진영은 진리와 실제에 대한 인식의 왜곡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의 작용을 결코 진지하게 의존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 부분을 보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양 쪽의 태도가 바로 성령님을 소멸하는 행위이며, 우리의 신앙을 모래 위에 세우는 행위라는 것이다. "복음은 혀의 교리가 아니라 삶의 교리"이다. 따라서 교회가 만일 복음이 요구하는 경험을 도외시 하고 혀의 교리에만 머무르게 된다면 고난의 때에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인생의 절대 절명의 위기에 도달하게 됐을 때 자신이 이제껏 진리를 왜곡되게 이해했다는 사실은 전혀 깨닫지 못한 채 '진리' 자체에 대한 배신감과 회의에 빠지고 말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진리에 대한 '경험'을 도외시 한 교회가 처한 위기이다.
● 옛 자아와
나의 삶 속으로
|묵상|
그대는 지식과 경험 가운데 어느 부분이 취약하다고 생각합니까?
기독교는 경전이 있는 계시 종교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헤아립니다. 물론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서 이상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의 `예언의 신을 통해 주신 풍성한 영적 선물이 있습니다. 이 기별들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더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도와줍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단지 말씀을 듣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지식은 반드시 실천되어야 하며 경험을 통해 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진리는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적용|
그대는 자신의 취약한 부분을 어떻게 보완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성경 지식을 얻어야 함- “성경을 공부하는 학도는 성경구절을 그 전체적인 입장에서 관찰하는 동시에 그 부분적인 관계도 알아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는 성경의 중요한 중심 문제, 곧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근본 목적, 대쟁투의 시작, 구속사업 등에 대한 지식을 얻어야 한다. 그는 주권을 잡기 위하여 다투고 있는 두 원칙의 성질을 이해하고 역사와 예언의 기록을 통하여 그 큰 종국에 이르기까지 그 원칙들이 전개하는 활동을 궁구해 보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복음전도, 339).
기 도
하나님, 우리에게 예언의 신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신령한 지식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고 실천하여서 우리의 구원과 행복을 위해 주신 진리의 아름다움을 강력하게 증언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넷째날(수) 3월12일
초기의 지도자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습 2:3).
교사강해 4)
예수님의 제자들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일반적으로 회사에서 인재를 뽑을 때 어떤 기준으로 뽑는가? 학벌, 성적, 자격증, 토익성적 등을 본다. 이것을 요즘 말로 '스팩'이라고 한다. 그가 가진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스팩을 보고 제자들을 뽑지 않으셨다. 제자들의 직업을 보면 어부, 세리, 열심당원 등 다양했다. 그런데 이 직업들이 소위 대단한 직업들이 아니다.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다. 세리를 보자면 매국노 직업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직업이 뛰어난 사람을 제자로 부르지 않으셨다. 세상의 인재 선발과는 다른 기준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을 때, '아 내가 능력이 없는데 어떻게 하지?'이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은 능력을 보고 제자를 세우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능력은 좀 부족해도 된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부르셨느냐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제자로 부르시면 합격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평범하고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성실한 사람들이었다. 열심히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었다. 게으른 사람은 제자로서 부족하다. 예수님을 열심히 따라 다니려는 성실한 자세가 있어야 한다. 성실함은 머리 좋은 것보다 100배는 낫다. 우리가 학교생활을 하는 것, 공부를 하는 것, 모든 일에서 성실해야 한다. 성실한 사람은 능력이 부족해도 예수님을 열심히 배우기 때문에 성장하게 된다. 베드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물고기를 잡는 성실한 어부였다. 세리 마태 역시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이 점은 명심해야겠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셨는데 성실하게 잘 배우고 순종해야한다.
예수님이 지도자들을 선택하실 때, 미천하고 교육 수준이 낮은 계층의 사람들을 뽑으셨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고 중요하다. 그분은 산헤드린 출신의 학식이 많거나 언변이 뛰어난 자들을 고르지 않으셨다. 위대한 일꾼께서는 세상을 움직일 진리를 선포할 자로서 스스로 의로운 교사들을 제쳐두고 미천하고 학식이 없는 자들을 선택하셨다. 그분은 이들을 교회의 지도자로 훈련하고 교육할 계획이셨다. 그러면 그들이 또 다른 사람을 교육시켜 복음 전파를 위해 파송해야 했다. “그들이 사업에 성공하려면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하였다. 인간의 능력이나 인간의 지혜로써가 아니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였다”(사도행적, 17).
다음의 성경절에 따르면 교회를 인도할 자로서 자질을 가졌다고 평가를 받는 사람들 대신 예수께서 다른 사람들을 택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습 2:3, 마 11:29, 렘 50:31, 사 57:15)
우리는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선택하신 이유에 대하여 잘못된 가정을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예수님은 고등교육을 받은 식자층을 반대하지 않으신다. 그분도 어려서부터 상당한 지식을 나타내셨다(눅 2:46~47). 단지 최고 학력과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은 종종 지도자로서 하나님이 사용할 수 있는 겸손한 도구로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때로 주님은 그러한 자들을 사용하셨다(니고데모,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행 6:7 참고).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성령의 지도에 마음을 쉽게 열지 않는다.
교훈
예수님은 비록 교육 수준이 낮다 할지라도 겸손하게 자신을 하나님의 도구로 드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셨다.
부가적용)
주께서 평범한 제자들을 주님은 위대한 변화를 통해 주의 일꾼으로 만드셨다. 누구든지 그의 부르심에 응하는 사람마다 놀라운 능력과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고 하였다. 성경과 역사를 보면 사실 이대로 하셨다. 세상에서 당시에 미련하게 보이던 갈릴리 어부들을 택하사 헬라의 철학자들을 부끄럽게 하였다. 세상에서 약한 약소민족이요, 천시를 당한 식민지 백성들을 택하사 마지막에는 강한 로마의 제왕들이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이런 일을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요. 또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하시는 일이시다.
나의 삶 속으로
|묵상|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에게 왜 겸손의 덕목이 중요한지 묵상해 보십시오.
하나님 나라의 일은 세상 일과 많이 다릅니다. 세상에서는 사람의 지혜와 능력이 곧 성공의 척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겸손과 섬김의 정신이 성공으로 가는 정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일은 사람의 힘이나 능력으로 되지 않고 성령의 능력으로 되기 때문입니다. 오직 자기를 낮추는 자에게 성령의 능력은 풍성하게 임합니다.
|적용|
그대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 위하여 어떻게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내려놓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마음이 겸비한 자들을 통하여 일하시고 지도하심- “그와 같이 셋째 천사의 기별은 선포될 것이다. 그 기별이 가장 큰 세력으로 전파되어야 할 때가 오면 주님께서는 마음이 겸비한 자들을 통하여 일하시고 자신들을 주님의 사업에 바치는 사람들의 마음을 지도하실 것이다. 일꾼들은 교육 기관에서의 훈련보다 오히려 성령의 은혜를 받음으로써 자격을 갖추게 될 것이다”(각 시대의 대쟁투, 606).
기 도
잘못 길들여진 제 지혜를 다 내려놓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겸손의 정신과 섬김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종이 되기를 원합니다. 낮아진 제 마음에 성령께서 임하여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다섯째날(목) 3월13일
예수님이 남기신 것들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행 1:22).
교사강해 5)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부터 제자들을 부르셨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양성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 속에서 이루어진 일임을 말해준다. 예수님은 요한이 잡힌 후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셨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15) 이후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제자로 부르셨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1:16) 또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던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부르셨다.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과 요한은 첫 번째로 부름 받은 제자들이다. 이들 중에서 수제자와 수제자 그룹이 나왔다. 그러면 첫 번째 부름 받은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이었다. 당시 갈릴리 지역에서 어부는 보편적인 직업이었다. 갈릴리 해변에 위치한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생계유지를 위해서 어업에 종사했다. 이들은 천민도 아니고, 상류층도 아닌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배경이 없었다. 인생의 분명한 목적과 방향도 없었다. 일생동안 감당할만한 가치 있는 사명이나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었다. 그저 먹고 살기 위해서 매일 갈릴리 해변으로 출근하여 무의미하게 고기를 잡아야 하는 생활인에 불과했다. 오늘날로 말하면 소시민적인 꿈을 안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는 대학생이나 먹고 살기 위해서 직장에 다니는 샐러리맨과 같다. 뿐만 아니라 갈릴리 사람들은 이방의 갈릴리라고 불릴 만큼 멸시 받았다. 인간적인 조건이나 자격을 따진다면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 받을 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들이 영적인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A. B. Bruce는 “The training of the Twelve"라는 책 표지에서 예수님의 제자양성을 진흙으로 도자기를 빚는 그림으로 표현했다. 예수님의 제자양성은 진흙으로 정교하고 우아한 도자기를 빚어내는 것보다 훨씬 더 온갖 정성과 기술을 요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는 생명을 빚어내는 종합예술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제자양성을 통해서 세상적인 사람을 신앙적인 사람으로, 쓸모없는 사람을 예수님을 닮은 작은 예수들로 빚으셨다. 모난 돌이라도 미켈란젤로의 손에 들어가면 위대한 작품으로 탄생된다. 이처럼 진흙처럼 보잘 것 없는 사람도 예수님 손에 들어가면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로 변화된다.
미래 세대는 이전 세대의 노력이 성공했는지 증명한다. 그래서 어떤 노력이 지속적인 결과물을 양산한다면, 그런 성취의 바탕에 있는 원칙을 연구해서 모방해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 양성 방법은 그와 같이 의미 있는 결과를 낳았는가?
당연하다. 그분의 방법은 세상을 바꿨다. 만약 예수님이 초기 교회 지도자들을 훈련시키는 일에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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