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과 그리스도시대의법(교사강해) > 안교교과

사이트 내 전체검색

안교교과

제1과 그리스도시대의법(교사강해)

페이지 정보

글씨크기

첨부파일

본문

제 1과

그리스도 시대의 법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4월 5일 안식일

일몰:오후 6시 58분

 

기억절 :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

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롬 2:14).

 

도입)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선물로 주셨던 율법은 확실히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었다(레 27:34, 민 36:13). 이방인들은 율법 없이 살았다. 그러나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심판에서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죄를 범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율법의 수여여부와 상관없이 임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도 하나님은 죄를 범한 자들을 심판하셨다. 율법은 백성이 죄 짓지 않도록 교훈하고 지도하기 위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일 뿐이다. 또 하나님은 율법을 받기 전의 유대인들이나 율법을 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양심’이라는 자연법을 심어 두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양심에 입각해 나름대로 법을 만들어 냈습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들의 양심으로 그들의 죄를 심판하신다. 율법이 있다고 구원을 받고 율법이 없다고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다. 곧 유대인이 율법을 받았다고 해서 심판 때 특별대우를 받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율법을 수여받은 것 자체가 의(義)가 되지 않는다. 오직 그 율법을 행했을 때 그것이 의가 되는 것이다.

 

연구 범위 : 눅 2:1~5, 히 10:28, 신 17:2~6, 레 1:1~9, 눅 14:1~6, 약 2:8~12.

 

*교사(리더)는 안내에 따라 안교 활동반과 교과 토의를 인도해 주십시오.

*교과에서 제공하는 일몰 시간은 서울 기준입니다. 실제 일몰 시간은 지역마다 다릅니다.

 

모든 사회마다 다양한 법이 존재한다.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는 일반적인 법이 있는가 하면 다른 곳에서는 적용되지 않고 특정 지역에서만 우세한 지역법도 있다.

신약시대에 누군가 법(그리스어로는 ‘노모스’, 라틴어로는 ‘렉스’, 히브리어로는 ‘토라’)이라는 말을 사용했다면 그는 여러 법 가운데 하나를 언급하였을 것이다. 정확히 어떤 법을 말하는지 알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대화의 문맥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이번 기 교과를 연구할 때 어떤 법을 논의하고 있는지 이해하려면 언제나 그 순간의 문맥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번 주 우리는 그리스도와 초기 교회 시대의 공동체에 기능하였던 여러 법에 대해 탐구하되 특히 이번 기의 핵심 주제가 될 율법 즉 도덕적 율법인 십계명에 대한 연구의 기초를 확립하는 방향으로 연구할 것이다.

 

안교 활동반과 교과 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성경이 언급하는 다양한 종류의 법을 이해한다.

➋ 느끼기 : 하나님의 법을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품성의 표현으로 이해한다.

➌ 행하기 : 계명을 지킴으로 하나님께 사랑으로 반응한다.

 

Part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언제 법을 잘 알아야겠다는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습니까?

❷ 예수님 시대에 사람들은 어떤 다양한 법을 염두에 두어야 했습니까?

❸ 당시의 사람들이 특히 종교적인 법들을 잘 알아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❹ 성경에 나오는 여러 율법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라고 생각합니까?

B. ❶ 언제 정부의 법률이 너무 복잡하고 까다롭다고 생각했습니까?

❷ 성경은 얼마나 복잡한 법을 가지고 있습니까?

❸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여러 율법을 잘 알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❹ 우리가 성경의 법을 잘 이해하되 율법주의자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결론 : 그리스도 시대에는 여러 법이 사회를 지배하였습니다. 역사와 문화적 배경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의 도덕적 율법인 십계명의 뼈대를 제공합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제2기 활동반의 목표는 ‘초청’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지 토의합니다.

❷ ‘나의 구도자 명단과 기도 목록’을 함께 작성합니다.

❸ 안교반(소그룹) 친교와 단합을 위해 함께 기도합니다.

 

첫째날(일) 로마법

3월 30일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눅 2:1~5).

 

교사강해 1)

사람이 사는 곳에는 ‘법’이 필요하다. 무법천지가 되어 버리면 큰일이 아닐 수 없다. 힘 있는 자가 사람들을 때리고 죽여도 법이 없으면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법이 있기에 약자도 보호받고 질서도 유지되고, 죄인들을 감옥에다 집어넣을 수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법치사회’에서 살고 있다. 법이 있기에 평안하게 살고, 안전하게 살고 있다. 법은 좋은 것이다. 사회 있는 곳에 법이 있다는 말처럼, 법이 없었던 사회는 생각하기 어렵지만, 그것을 학문으로서의 법학(legal science, Rechtswissenchaft)으로까지 끌어올린 곳은 고대 사회에서는 로마가 유일하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요인들을 말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먼저 로마법이란 무엇을 말하는지 정리해 본 후, 로마법학의 기본적인 성격으로부터 그 해답을 찾아보도록 하자. 로마법이란 로마가 부족연맹체 형태의 소도시국가로 시작하여 대제국으로 발전하여 멸망할 때까지의 장구한 시간 동안 변천, 발전한 모든 법을 말한다. 보다 구체적인 이정표를 찾는다면, 기원전 451-449년에 제정된 12表法, 그리고 기원후 529-533년 동로마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편찬된 로마법대전이 그 시작과 종결이 될 수 있다. 로마법학의 최고 전성기라 할 수 있는 시기는 기원후 1-2세기이며, 이 시기의 법을 고전 로마법(classical roman law)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로마법은 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후 6세기에 이르는 약 1000년간의 장구한 시간동안 발전·유지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로마법 대전을 통하여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은 일부에 불과하지만, 그 일부만 하더라도 엄청난 분량이기 때문에 로마법은 우리를 일단 그 양적인 측면에서도 압도한다. 로마법은 넓은 의미에서 고대 로마에서 시행된 법만이 아니라 18세기 말까지 유럽 전체에서 사용된 사법제도라고 볼 수 있으며, 독일과 같은 국가에서 로마법의 실제 적용은 더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현대 유럽 국가들과 그 국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나라들의 사법제도는 로마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으며, 특히 민법에 있어서의 영향은 더 크다. 영국은 로마법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적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북아메리카의 관습법은 로마법에 의존하는 정도가 크다.

 

눅 2:1~5을 읽어 보라. 하나님을 섬기는 신실한 부부가 당시 정치 상황에 반응했던 방법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무엇인가?

초기 공화정 시대에 로마인들은 사회의 통치를 위한 성문법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실제로 로마인들이 수립한 헌법 체계는 오늘날 여러 민주 국가의 법률적 기초로 남아있다.

로마는 속국들이 대체로 그들의 관습을 유지하도록 허용하는 대신 황제와 원로원 법을 따르도록 요구했다. 물론 요셉과 마리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로마법은 사회 질서와 관계가 있었다. 그것은 국정 현안뿐 아니라 원형 경기장 내의 합법적 행위를 다루었고, 공직자를 선출하는 과정을 규정하고 간통과 주종(主從)관계와 같은 문제도 취급하였다. 그 밖의 여러 사회 규범은 구약이나 다른 나라의 규범과 유사했다.

신약성경이 기록되었던 시대의 문화를 이해하려면 로마 제국이 예수님과 초기 교회가 존재했던 세계의 정치적 배경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그 당시의 상황에 관하여 많이 알수록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이나 바울의 투옥과 같이 신약 성경에서 발생하는 여러 사건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구원에 필요한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로마 역사학자가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배울 수만 있다면 역사는 우리에게 요긴한 지식이 된다.

 

교훈 : 우리가 신약성경의 여러 사건을 더욱 잘 이해하려면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잘 알아야 하고 특히 로마의 역사와 그들의 법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부가적용)

당시 로마의 황제(가이사) 아구스도는 그의 모든 점령지에 호적 명령을 내렸다. 로마의 황제 아구스도의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B.C.27-A.D14)로서, 가이우스는 외증조부 율리우스 시이저의 이름을 따라 가이우스 율리우스 시이저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B.C.27년에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 즉 “위대하고 고귀하며 지극히 숭배 받는”이라는 뜻의 호칭을 수여받았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점령지의 지방자치를 실시하고 그 곳의 풍습과 종교적 신념 등을 로마의 법과 상충하지 않는 범위에서 허락하였다. 가이사 아구스도의 합리적인 통치 방법은 로마의 부흥을 가져왔다. 그럴 지음에 아구스도는 로마의 평화구현과 세금징수와 징집을 위해 14년 마다 정기적으로 인구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때 가이사 아구스도의 명령을 따라 요셉과 마리아는 그의 조상들의 기업이 있는 베들레헴으로 호적을 하기 위해 갔다. 그들뿐만 아니라 가이사의 명령에 따라 모든 사람들이 호적하기 위해 각각 고향으로 돌아갔다. 로마사람들은 현 거주지에서 호적을 했지만, 유대인들은 지파와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을 중시했기 때문에 조상들의 고향에서 호적을 했다. 그것은 그들에게 있는 일말의 자존심과 같은 것이었다. 요셉은 갈릴리 나사렛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윗은 집 족속이기 때문에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으로 갔다. 다윗은 베들레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삼상16:1).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약 7㎞, 나사렛에서는 144㎞ 거리였다.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 또한 베들레헴으로 함께 내려갔는데 마리아도 다윗 족속이었기 때문이며, 여자들도 남자들처럼 동일하게 호적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왜 그리스도인들은 국가의 법을 잘 준수해야 합니까?

마리아는 남편 요셉과 함께 호적을 위해 장거리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녀는 홀몸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여정은 매우 힘들고 번거로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국가의 요구에 성실하게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충돌하는 요구가 아닌 이상 그분의 자녀들은 자신들이 속한 국가와 사회의 법에 순응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 13:1).

 

| 적용 |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모범적인 시민으로 살 수 있을까요?

영감의 교훈

성경 고고학의 역할 - “팔레스타인과 인근 지역에 대한 지난 세기 동안의 고고학적 연구로 성경의 역사적, 문학적 배경에 관한 우리의 지식이 전적으로 변모하였다.… 고대 근동지방의 배경 속에서 파악할 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애매모호하던 점들이 이제 분명해졌으며, 우리는 히브리 사회와 문화의 유기적 발전을 이해하기 시작하였다”(성경주석, 1권 참고논문 고고학과 고대사의 회복:Ⅰ. 성경 고고학의 출현).

 

기 도

아버지, 우리가 어떤 곳에서 살든지 그 사회의 가장 모범적인 시민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이름에 욕이 아닌 찬양을, 저주가 아닌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둘째날(월) 모세의 법 : 사회법

3월 31일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 8:5).

 

교사강해 2)

성경은 모세의 율법을 죄와 사망의 법이라 하고 그리스도의 율법을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 한다. 기록된바『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하신 증거의 말씀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 곧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장 기본적인 법의 체계이며 모법이다. 그 십계명과 하나님께서는 이 율법, 곧 십계명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에 대한 율례를 주셨다. 도둑질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소를 도둑질 하는 것과 양을 도둑질하는 것의 차이가 있었다. 양 도둑 보다 소도둑은 그 양심상 더 큰 것을 도둑질을 함으로 더 큰 배상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십계명을 범한 죄에 대한 크고 작은 형편을 적용한 율례를 기록하여 배상과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 사용하였으니 이 방법들을 율례라 하였는데 이것들이 곧 일명 모세의 율법들이라 할 수 있고 사회법의 일종이다.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 십계명의 모법을 구체적으로 적용한 것들이다. 모세의 율례 즉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간음한 여자를 돌로 치라고 명하였다. 이런 십계명을 범한 자들의 구체적인 형벌의 양이 모세의 율법에 기록되었던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비록 로마의 통치하에 있었지만 그1들의 독특한 종교와 관습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권한을 부여받았다(행 18:15 참고). 유대법을 관할할 책임을 가진 합법적 조직은 산헤드린이었다. 종종 공회로 불렸던 산헤드린은 71명의 제사장, 장로, 랍비들로 구성되었고 의장은 대제사장이었다(요 11:47, 행 5:27). 그것은 유대법, 전통, 관심을 다루는 일종의 대법원 기능을 했다.

유대의 사회법은 모세오경에 나오는 사회 법규에 바탕을 두었다. 모세가 성경의 첫 다섯 책을 기록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법들을 모세의 법이라고 부른다. 처음 모세에게 율법을 주셨을 때에 하나님은 자신이 통치자가 되고 백성들은 그분의 율령을 실행하는 그런 나라를 비전으로 제시하셨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로마법을 따르고 있었지만 로마 정부는 그들이 유대 관습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세의 법을 사용하도록 허용하였다. 그로 인해 산헤드린의 역할이 특별히 중요했다.

신약성경은 사회적인 문제에 대하여 모세의 법을 적용하거나 암시하는 몇 가지 예를 제시한다. 예를 들면 유대인 남자는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납부해야 했고(마 17:24~27, 출 30:13), 이혼은 여전히 모세가 지정한 규정에 의해 승인되었으며(마 19:7, 신 24:1~4), 아직까지 백성들은 죽은 형제의 아내와 결혼하는 법을 여전히 고수하였고(마 22:24, 신 25:5), 남자 아이들은 생후 8일 만에 할례를 받았으며(요 7:23, 레 12:3), 간음을 행한 자들은 돌에 맞아 처형을 당할 수 있었다(요 8:5, 신 22:23~24).

마 26:59~61, 히 10:28, 신 17:2~6을 읽어 보라. 여기에 어떤 중요한 원칙이 있는가? 이는 정의와 공정성에 대한 성경의 개념에 대하여 무엇을 말해 주는가?

 

교훈 : 예수님 시대의 유대 사회는 로마법을 따라야 했지만 종교적으로 그리고 관습적으로 여전히 모세가 제시한 사회법을 지키고 있었다.

 

부가적용)

당시에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자를 율법에 따라 돌로 치라고 하셨다면, 예수님은 로마법을 어긴 죄로 로마 총독에게 잡혀가게 될 판이다. 그러나 만일 예수께서 간음한 여자를 돌로 치지 말라고 하신다면, 예수님은 율법을 어기는 자가 되고 만다. 율법이 뭔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키라고 주신 하나님의 명령이 아닌가. 그런데 그 하나님의 명령인 율법을 어기라고 한다면, 예수님은 분명 하나님에게서 온 자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께서 온 선지자라면, 아니,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라면, 당연히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라고 말할 것이다. 지금까지 모든 선지자들이 다 그렇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라고 외쳤다. 그런데, 예수가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한다면, 예수는 분명 메시아가 아닌 것이다.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라고 하신다면, 예수님은 로마 총독에게 고발을 당해 잡혀가고, 만일 치지 말라고 하신다면, 예수는 백성들이 바라던 메시아가 아니며, 예수를 메시아로 믿었던 백성들이 실망하고 분노하여 예수에게 돌을 던지게 될 것이다. 참으로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입장에 예수님은 빠지고 말았다. 예수님은 아무 말이 없으신 체 몸을 굽히시고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땅에 쓰고 계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보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오냐, 이제 너는 걸려들었구나.”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대답을 재촉했다. 예수님께서 일어나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이 세상에 죄 없는 자가 누군가? 오직 한 분, 예수님만이 죄 없으신 분이다. 이 땅에서 간음한 여자를 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예수님 한 분밖에는 없는 것이다. 돌 = 예수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 (벧전 2:4) 죄인을 돌로 치다 = 죄인이 예수님의 심판을 받다. 모세의 율법에, 간음한 여자는 돌로 치라고 하신 것은, 간음한 여자는 돌이신 예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뜻하고 있는 것이다. 간음한 여자가 누군가? 여자는 교회, 혹은 성도를 뜻한다. 간음한 여자란, 하나님 외의 다른 것을 섬기는 자를 뜻한다. 간음한 여자를 돌로 치라는 율법은, 하나님 외의 다른 것을 섬기는 교회나 성도는 예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간음한 여자 같은 우리들을 구원하러 오셨다. 이제, 재림 예수님은 간음한 여자들을 심판하러 오신다. 그러나 그에 앞서 초림 예수는 간음한 우리들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다. 요한복음 3장 17절의 말씀.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러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만이 이 간음한 여자를 돌로 칠 수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간음한 여자를 돌로 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신 것이다. 간음한 여자는 율법에 의하면 돌에 맞아 죽어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간음한 여자를 구원하러 오셨다. 예수님은 결국 간음한 여자를 돌로 치라고 한 율법을 어겨야 하는 것이다. 율법을 어기면 어떻게 되는가? 죽어야 한다. 율법을 어긴 자는 마땅히 죽어야 한다. 간음한 여자를 돌로 치지 않으면 예수님이 죽어야 한고, 예수님이 살기 위해서는 간음한 여자가 죽어야 한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자를 구원하러 오셨다. 결국, 간음한 여자를 살리기 위해 예수님이 죽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자인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죄가 있는 곳에 사망이 왕노릇 한다. 죄가 없는 곳에는 사망도 없다. 예수님은 죄 없으신 몸으로 죽으셨다. 따라서 음부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음부는 예수님을 다시 토해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율법 = 죽이는 법, 율법 + 사랑 = 복음 = 살리는 법

예수님께서는 간음한 여자인 우리를 사랑하사 십자가에 죽으시고, 죽이는 법이요 정죄하는 법인 율법을 살리는 법이요 생명의 법인 복음으로 완성시키셨다. 간음한 여자요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 생명을 얻은 것이다. 아멘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모세오경의 사회법은 오늘의 ‘나’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우리는 모세오경에서 도덕적 율법의 중요성과 의식법이 가리키는 의미를 헤아립니다. 그러나 간혹 사회법을 마주하고 고민에 빠지곤 합니다. 왜냐하면 그 법들이 오늘날의 사회와 동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현대인들의 관점에서 수긍하기 어려운 부분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법의 바탕에 있는 기본 원칙이 무엇인지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계셨을 때에 자비의 원칙이 없는 문자적인 사회법 적용을 경계하셨습니다.

 

| 적용 |

그대가 모세오경의 사회법에서 배운 가장 소중한 원리는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산헤드린 - “유대 나라가 독립 국가였을 때 산헤드린은 국가의 최고 법정으로서 사회와 교회에 대한 권위를 겸유하고 있었다. 지금은 비록 로마 총독에 예속되어 있었지만 산헤드린은 민사(民事)와 종교적인 문제에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시대의 소망, 133).

 

기 도

아버지, 우리가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해도 아버지를 신뢰할 수 있도록 믿음을 주옵소서. 오늘날 이 사회와 교회 내의 불합리한 요소를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더 높은 차원의 사회를 마음속에 그립니다.

 

셋째날(화) 모세의 법 : 의식법

4월 1일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히 9:9~10).

 

교사강해 3)

[롬7:6]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고후3: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십계명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음성으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언약의 모법이며, 21:-23:의 율례는 그것의 시행령으로서 모세를 통해서 세우셨다. 그런데 종교개혁 이후 통상적으로 모세의 율법을 구분하기를 만고불변한 도덕법인 십계명과, 십계명의 원칙이 이 당시 이스라엘의 국가적 삶에서 임시적으로 집행된 시민사회법과,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임시적인 제사법으로 구분하여 왔다. 십계명이 아닌 모세의 율법은 어느 부분은 항구적이고 어느 부분은 개혁될 임시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히7:12)라고 말하고 있다. 제사 직분, 곧 제사를 드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제사는 하나님의 계명의 모법인 십계명을 범한 자들에게 의를 주기 위함이다. 제사장은 의를 가지지 못한 죄인들에게 양이나 염소를 잡아 죄인들을 의롭게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하는 직분이었다. 그러나 죄인들을 의롭게 하는 이 일이 히 8:7절의 말씀대로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히8:7)라고 했던 것처럼 이것은 무흠하였던 언약이 아니라 죄를 지을 때마다 양을 잡아 드리는 불편함이 따라 다녔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사람을 만드는 새 언약을 준비하셨다. 바로 이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히8:13)고 하였던 것처럼, 사람을 의롭게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의롭게 되되록 하신 것이다. 양을 대신해 잡은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의롭게 하는 영원한 속죄의 제물이 되신 것이다.

 

레 1:1~9, 2:14~16, 5:11~13을 읽어 보라. 이것은 무엇에 관한 율법인가? 이 율법들의 목적은 무엇이며, 어떤 중요한 진리를 가르치는가?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는 사회법 외에 소위 ‘의식법’도 있었다. 의식법은 성소와 성소 예식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구원의 계획을 가르치고 미래에 오실 메시아를 가리키기 위해 제정되었다. 오늘날의 번역 성경은 그런 예식을 통해 ‘속죄’가 이루어졌다고 언급하지만 그들의 이해방식에 따르면 그러한 법들은 자기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와 그분 자신을 예표하는 ‘축소판 예언’이었다.

“의문의 율법 역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졌다. 그것이 더 이상 지켜지지 않게 된 후에도 바울은 그것이 구속의 경륜 가운데서 차지하는 자리와 그리스도의 사업과의 관계를 보이면서 유대 사람들 앞에 그것의 참 위치와 가치를 나타내 보였다. 위대한 사도는 이 율법이 영광스럽고 그것이 거룩하신 창시자에게 중요한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성소의 엄숙한 봉사는 각 세대를 통하여 나타나야 할 장엄한 진리를 예표하였다.… 그리하여 암흑시대와 배교의 시대를 통하여 허락하신 메시아가 초림하시는 때가 이를 때까지 사람들의 마음속에 믿음이 간직되어 살아남아 있었다”(부조와 선지자, 367).

비록 의식법이 예수님에 의해 제정되었다고 해도 그것은 미래에 오실 그분과 그의 대제사장 봉사를 상징하는 표상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교훈 : 의식법은 예수님의 초림과 대제사장 봉사를 예표하기 위한 제도였으며 오늘날 더 이상 필요 없지만 우리는 그것을 연구함으로 교훈을 얻는다.

 

부가적용)

의식법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십계명을 지키는데 있어 범죄한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의롭게 될 수 있는지 인간이 범한 십계명의 구체적인 사항들이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되도록 의식의 법은 보완하고 있다. 제사법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법이다. 제사법도 크게 말해서는 의식 법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제사법을 제외한 의식법들로는 명절에 관한 규례들, 음식에 관한 규례, 제사장들의 성별, 안식일, 할례, 혼인 등 많은 구체적인 규례들이 있다. 명절에 관한 규례들 안에는 제사법이 포함되기도 하는데, 이는 명절들 가운데에 제사를 드리는 날이 있을 때에 그렇다. 하지만 명절 자체가 제사는 아니며, 명절들은 오히려 축제의 의미가 있다. 의식법이야말로 성별을 말하는 구체적인 법들이다. 안식일을 비롯한 의식법의 규례들은 이방인과는 관계없이 오직 유대인들과만 관련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음식에 관한 법도 이방인들과는 관련이 없다.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먹지 못하는 음식은 그 부패성이나 위생의 관점으로 구분지어진 것이 아니다. 물론 당시 상황 속에서 이러한 개념은 어느 정도 적용되었다(레 11:9-12). 하나님께서 정결하다 하신 것은 그렇지 못한 것에 비해 일반적으로 건강에 더 좋다. 하지만 이것이 목적은 아니다. 각 동물들을 하나하나 들어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전반적으로 말해 그 목적은 성별에 있다 할 수 있다. 레위기 11장의 매 규례들마다 정결하다, 불결하다 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을 주목하라(신 14:21 참조). 성경에서 의식법(儀式法, ceremonial law)이란 주로 중요한 종교적인 관습들과 제사 의식 절차에 관한 법을 말한다. 특별히 레위기에서 많이 취급된 제사 및 성결 그리고 절기에 관련된 법들이다. 그 종류를 들여다보면 제사, 제사법, 성막제도, 제사장 제도, 절기, 음식법, 할례, 십일조, 헌금(예물), 찬양 등이 있다. 그런데 구약의 의식법에서 예표되었던 속죄 사역은 예수님의 피흘려 죽으심과 부활로 성취되었다(고전1:23,15:3;히9:12). 따라서 제사법, 성막제도, 제사장 제도, 절기 등은 폐지되었다. 그러나 그 원리(거기 담긴 교훈적인 면, 내적 의미)까지 폐지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의식법에서 완전히 폐지되지 않는 것도 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모세오경에서 제사와 성소에 대한 설명을 읽을 때 그대는 무엇을 생각합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예수님이 지상에서 그분의 임무를 완수하신 뒤에는 제사와 의식, 축일 등을 포함한 이러한 구제도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히 9:9~12). 그러나 오늘날 더 이상 의식법을 준수할 필요가 없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을 연구함으로 구원의 계획에 대한 통찰을 모을 수 있다.

 

| 적용 |

신약의 백성으로 그대는 성만찬 예식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 있습니까?

 

영감의 교훈

기이하고 놀라운 예표 - “과거 모든 희생 제물들과 상징적인 성소의 모든 봉사 의식들이 우리 인류를 위한 구세주의 희생을 예표했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너무나도 기이하고 놀라운 것이다. 바로 이 희생이 요구되었다. 인간의 영원한 복리를 확보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고난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게 될 때에 우리의 심령은 감동된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09).

 

기 도

아버지,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지만 주께서 치르신 희생을 잊지 않기를 원합니다. 제단에 바쳐진 어린양을 주목했던 구약의 백성들처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매일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의 시선과 생각을 인도해 주옵소서.

 

넷째날(수) 랍비의 법

4월 2일

 

“예수께서…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눅 14:3).

 

교수강해 4)

주님은 병자를 고치기 전에 먼저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셨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한가?" 주님은 그들이 비난하지 못하도록 먼저 그들에게 물으셨다. 여기에서 '합당하냐'(여세스틴)는 말은 '그것이 율법적인가?'라는 말이다. 주님은 그들의 악한 의도를 알고 그들 스스로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하셨다. 주님의 갑작스런 질문에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은 당황해하면서 한 마디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합법적이라고 할 수도 없었고, 반대로 고통 받는 병자 앞에서 그를 고치면 안 된다고 할 수도 없었다. 아마도 그들은 다른 때 같았으면 그 병을 고치면 안 된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들은 생명이 위태로운 환자가 아니면 안식일에 병을 고쳐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 왔다. 이 환자는 생명에 지장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주저할 아무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질병을 고치면 안 된다고 말함으로 무자비한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주님은 적절한 질문을 던짐으로 이와 같이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의 입을 닫으셨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그 병자를 데려다가 고치시고 그를 보내셨다. 이렇게 해서 주님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안식일에 병자를 고칠 수가 있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의 형식적인 율법을 뛰어넘어 새 규범을 제시해 주셨다. 주님은 이러한 행동을 통해서 안식일에 고통당하는 자들을 고쳐주는 것이 진정한 안식일을 지키는 길이라는 것을 보여주셨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은 모세의 법 외에 랍비들의 법에도 익숙했다. 랍비들은 바리새인들의 학문적 축을 이루었다. 그들은 모세의 법이 백성들의 삶 속에서 관련성을 유지하도록 할 책임이 있었다. 랍비들은 모세오경에서 613개의(그 중 39개는 안식일에 관한) 법을 헤아렸고 그 법들을 규례의 기초로 삼았다. 이러한 성문법에 그들은 뛰어난 랍비들의 해설로 이루어진 구전(口傳)법을 더하였다.

이 구전법의 이름은 ‘걷다’라는 뜻의 ‘할라카(halakah)’로 알려졌다. 랍비들은 백성들이 ‘할라코트(halakoth: halakah의 복수)’를 고수하면 613개의 율법의 길을 걷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비록 그것들은 처음에 구전의 형태였지만, 나중에는 수집되어 책의 형태로 기록되었다. 예수님 당시의 해설들 가운데 일부는 ‘미드라쉬(Midrash)’로 알려진 해설집에 남아있고, 다른 해설들은 ‘미쉬나(Mishnah)’로 불리는 법률집에 기록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심지어 오늘날에도 수많은 경건한 유대인이 이 법들을 엄격하게 지키려고 노력한다.

눅 14:1~6과 요한복음 9장을 읽어 보라. 예수님은 치유의 이적을 행하심으로 안식일을 범했다는 고소를 받으셨다. 하지만 구약성경 어디에 안식일에 치료하는 것이 죄라는 말이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예수님이 다루셔야 했던 문제들을 이해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우리가 신실하게 행하려고 노력하면서 유사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려면 이런 사건들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하는가?

비록 현재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사용됐던 구전법들은 조롱의 대상이 되기 쉽지만 정작 잘못은 법에 있었다기보다는 지도자들의 태도에 있었다. 물론 때로 너무 율법적으로 준수되기는 했어도 ‘할라코트’는 가장 일상적인 행위에도 영적인 요소를 가미하고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매우 영적인 목적이 있었다.

 

교훈 : 유대인들은 일상의 삶에 영적 목적을 부여하기 위해 모세의 법을 해설한 구

전법을 만들었지만 때로 지나치게 율법적으로 준수되는 문제점이 있었다.

 

부가적용)

주님은 병자를 고쳐서 보내신 후에, 종교 지도자들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일을 금한 것이 얼마나 모순된 것인지 말씀해 주셨다. 주님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지셨다.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안식일에 대한 미쉬나의 규정은 두 가지, 즉 온건한 것과 엄격한 것이 있었다. 온건한 규정은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짐승을 건져내는 일을 허용했지만, 엄격한 규정은 가축이 빠진 구덩이에 꼴을 넣는 일만 허용하고 있다. 주님 당시에는 온건한 규정이 일반적으로 시행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리새인들 보다 더 엄격했던 쿰란 공동체에서는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짐승을 구하는 일을 금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곤경에 처한 짐승을 구하는 일을 허용하면서, 병으로 심각한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치유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지극히 모순된 행위라고 도전하셨다.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은 주님의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짐승에 대한 언급을 듣고 나서 반대 논리를 전개할 수 없었다. 그들은 주님을 고소할 기회를 얻으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주님을 시험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시험할 때마다 자신들의 무능함을 깨닫게 되었다. 어두움이 빛을 이길 수 없고, 피조물이 창조주를 이길 수 없듯이 그들이 주님을 이길 수는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적인 지식과 능력을 가지고 계셨지만, 그들은 좁고 편협된 판단력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에게 도전할 때마다 무기력하게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주님께서 수난을 당할 때가 될 때까지는 주님의 머리카락 하나도 건드리지 못하게 하셨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일상적인 일에 어떤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까?

재림신자들은 다른 그리스도인들보다 스스로 더 많은 제약을 두고 삽니다. 건강 원칙은 표면적으로는 건강이 목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영적인 목적이 더 강합니다. 우리가 귀금속으로 치장하는 일을 금기시하는 것도 단지 경제적인 이유보다는 품성의 향상을 더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스포츠보다 노작을 중요시했던 이유도 같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못할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제약이 자기 의나 율법주의적인 강요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 적용 |

일상생활 중에서 그대가 영적인 의미에 충실하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유전적 요구의 벽을 무너뜨리심 - “구주께서는 안식일에 병을 고치면 범죄자로 여김을 받을 것을 잘 아셨으나 주저 없이 안식일을 가로막은 유전적 요구의 벽을 무너뜨리셨다. 예수께서는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일어나라고 명하신 후에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물으셨다”(시대의 소망, 286).

 

기 도

아버지, 제 삶의 모든 작은 부분도 하나님께 가납되는 산 제물이 되기를 원합니다. 제 마음에 심어 주신 하늘의 가치가 성령의 비를 받아 생활 속에서 꽃피고 열매 맺게 해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다섯째날(목) 도덕법

4월 3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 19:17).

 

교사강해 5)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십계명이 의문의 법인가 하는 문제이다. 십계명이 의문의 법인가?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십계명은 의문의 법이 아니라고 알고 있다. 우리 교회와 꽤 많은 교회가 십계명은 도덕적인 법이고 의문의 법은 제사제도 시민법 이런 것들이 의문의 법이다. 의문의 법은 폐지가 되었으나 도덕적인 법은 폐지가 안 되었다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십계명이 의문의 법인가 의문의 법이 아닌가를 찾아보아야 한다. 고린도후서3:7절을 보면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돌에 써서 새긴 의문의 직분이라고 말씀 한다. 돌에 써서 새긴 것이 무엇인가? 십계명이다. 십계명을 의문의 법이라고 하는 말씀이다. 돌에 써서 새긴 십계명을 의문의 직분이라고 말씀 한다. 의문이라고 하는 말은 문자화 시켰다는 말이다. 문자화 시킨 것은 모든 법이 포함된 것이지 십계명은 빼고 다른 것만 포함된 것이 아니다. 십계명이 의문에 법이냐 의문에 법이 아니냐에 문제가 있다. 십계명도 의문의 법이다. 많은 사람들은 십계명이 의문의 법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여기 분명히 돌에 써서 새긴 의문의 직분도 라고 말씀한다. 돌에 새겨서 주신 계명은 무슨 계명인가? 십계명이다. 영생에 들어가려면 십계명을 지키라고 하셨다. 이 부자법관은 이것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가 가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했으나 이 부자법관은 돈이 많은 고로 근심하며 주님을 떠났다. 이 부자법관은 이 십계명의 돌에 써서 새긴 의문의 직분을 생각하고 그는 율법을 어려서부터 지켰다고 했다. 그러나 이 성경에 담겨진 영의 직분인 더 깊은 의미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썩어져 없어질 이 세상의 물질에 마음이 매여 저 영원한 하늘, 곧 영생을 포기한 것이다. 그가 영생을 얻고자 하면 그리스도의 사람, 곧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데 그는 그리스도를 좇기를 거부하였다. 고린도후서3:4-11절을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 같은 확신이 있으니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민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십계명은 없어질 것이라고 말씀 한다.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 하셨다. 저희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새 언약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옛 언약은 계명이다. 옛 언약은 의문이다. 글로 써서 새긴 것이다 예수는 글로 써서 새긴 것이 아니다. 영으로 하는 것이다 십계명은 글로 써서 새긴 것이고 예수는 글로 써서 새긴 것이 아니라 영으로 하는 것이다. 영으로 살든지 죽든지 하는 것이다.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말씀한다.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돌에 써서 새긴 것이 죽이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의문은 죽이는 것이라 말씀 하고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이라고 말씀 한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사람이 정죄를 받아 죽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새언약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은 사람을 죽이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데 목적이 있다. 성령께서 심비에 새긴 법을 깨우쳐 성령에 순종케 하여 하나님의 법을 이루어지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십계명이 비추어 주는 우리의 마음을 통제하여 주는 성령의 법을 따라 살지 아니하면 결국 죽게 될 것이다.

 

로마법과 모세법 그리고 랍비들의 법이 1세기 이스라엘 나라 안에 살았던 유대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지만 이스라엘의 종교를 따르는 사람들은 팔레스타인과 로마 제국 국경 밖에도 많았다. 그리고 그들의 삶에는 이러한 법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반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따른다고 고백하는 자들은 누구나 십계명을 지켜야 했다. “십계명은 이스라엘 민족을 유지시키기 위한 도덕적 틀을 제공한다. 이런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성경이 사용하는 은유는 언약이다. 그러한 은유는 세계적인 법의 영역에서 비롯되었음에도 계명을 단지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요약된 의무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계명에 대한 이스라엘의 순종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복종보다는 사랑에 대한 반응이라는 의미가 더 컸다.” - Leslie J. Hoppe, “Ten Commandments,” Eerdmans Dictionary of the Bible (Grand Rapids, Mich.: Eerdmans, 2000), 1,285.

십계명은 1세기 유대인들에게 알려진 모든 법체계를 능가했다. 613개의 모세법을 달달 외웠던 바리새인들조차 십계명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미쉬나의 타미드(Tamid)장에는 날마다 십계명을 암송하라는 랍비의 법이 있다. 사실 예수님과 동시대의 유대인 철학자 필로는 모든 성경의 법에서 십계명이 차지하는 핵심 위치에 대하여 한 권의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마 19:16~19, 롬 13:8~10, 약 2:8~12을 읽어 보라. 이 말씀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삶에서 십계명은 어떤 역할을 했는가?

 

교훈 : 예수님 당시에 많은 법이 있었지만 그리스도인뿐 아니라 유대인에게조차 가장 중요한 법은 도덕법으로 불리는 십계명이었다.

 

부가적용)

십계명은 폐할 수 없다. 십계명은 모든 인간이 심판을 받을 도덕법이기 때문이다. 히 9:27절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고 하였다.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게 된다면 어떤 법으로 심판을 받을 것인가? 하나님이 제정하신 십계명에 따라서 이다. 이 십계명은 모든 계명의 기초이며 하나님의 보좌의 기초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 이 십계명의 법을 통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인간이 이 하나님의 법을 통해 두 번째 심판을 받게 된다면 인간은 그 심판을 통과할 수 있을까? 인간은 이 십계명의 법을 통해 심판을 받을 인간의 둘째 사망을 주님께서 대신 당하시고 우리를 대속하셨다. 그렇다면 인간은 그리스도의 이 대속을 통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어지는가? 모든 육적인 인간은 하나님의 십계명, 온 우주의 법인 이 계명을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십계명을 지킨다고 부자법관처럼 말한다 할지라도 그 양심으로 온전케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죽음으로 이 율법의 정죄가 우리에게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할 수 없는 이 모든 일을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이 법의 완전한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셨다. 인간이 죽지 않고는 하나님의 넓고 깊고 높은 이 십계명 곧 하나님의 율법의 이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지 못한다. 인간이 그리스도와 합하여 그리스도 안에 죽음으로 이 십계명의 요구와 양심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할 수 없는 그 일을 이루신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 죽은 그리스도인들은 십계명의 저주에 매이지 않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영적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이 십계명의 글자 곧 외형적인 그 의문에 매이지 않는다. 이젠 성령께서 우리의 하나님의 계명을 심비에 새긴 하나님의 율법, 곧 성령의 법을 이루게 하신다. 하나님의 율법의 두 가지 하나님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법을 이루게 하신다. 십계명에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의 문자적인 의문 이상의 것, 마음의 중심에 가진 탐심을 아예 버리게 하는 것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시며, 간음에 대하여는 마음의 품었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Copyright © KASDA Korean American Seventh-day Adventists All Right Reserved admin@kasd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