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과 그리스도의 율법 그리고 복음(토막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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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과 그리스도의 율법 그리고 복음(토막 이야기)
시; 삶
강위덕
살아가기 위해 사람이 이리로 오고 저리로 간다 그래서 삶이라고 쓴다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오다가 맞 부닥친 사람끼리 서로 사람에게 뚫린다 사람과 사람이 사람 속에 들어갔다 나왔다고 뒤돌아본다 구멍이 뚫렸는데 살점하나 떨어지지 않고 고스란하다 몸의 구석 구석 빗발 들이치는 틈새 사이로 저, 아득한 두근거리는 소리 그래서 삶이라고 쓴다 하늘은 다 헤진 걸레 옷 구름을 입고, 땅 위에 비를 내려 기화요초에 꿈을 키우는데 모르는 누구한테 봄비가 되고자 몸 속속 해 돌아서 불현듯 자해 충동을 심는다 파괴의 본능 탓이다 겁내면서 노리면서 할례를 받던 날 바람이 벗어놓은 피 한 방울, 접시꽃 뿌리를 크릭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라서, 그래서 삶이라고 쓴다
서리 덮인 쭉지로 할례를 쪼은다 그믐밤을 떠돌던 방황, 추사체로 뻗친 길이다 누구의 눈물로도 녹지 않던 얼음장 길, 하늘이 내려준 찬바람, 그 길, 닳고 터진 알몸, 알 발로 뜨겁게 녹여 기다린다 맵고 아린 향기 자오록한, 피 한 방울, 자욱 자욱 붉게 붉게 하라신다 분명치 못한 정확성, 정확한 막연이 수묵화로 펼쳐진다 그래서 삶이라고 쓴다
시 해설
시인들은 이 시를 읽고 어떤 해석을 할까?
여자를 일깨우기 위해 뿌리를 크릭하는 요철(凹凸)의 본성쯤으로 해석할까?
스스로 사라지는 눈사람처럼 여인들의 강인한 정조 정신을 얼음장으로 생각할까?
특히 “붉게 붉게 하라신다 ”의 수동태적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뭇 시인들은 설명 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시는 전위적 현대시에 속한다.
매 구절 시험이고 실험이다.
매 구절 자기 부정과 자기 부인이다.
매 구절 스스로의 파괴이고 파탈이다.
매 구절, 얼마나 아팠을까?
매 구절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이러한 구절들은 절절히 자기 부정의 삶이고 창조이다.
죽어야 산다는 원칙 때문이다.
누가 믿겠는가?
할례와 번제단은 십자가이다.
할례는 신생아를 탄생시키고
번제단은 새 사람을 탄생시킨다.
자궁에서1년,
성소에서 1년,
십자가의 기능은 하루 이틀에 되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이번기의 후반부는 전반부에 이미 다룬 것을 반복하는 것임으로 이런저런 딴소리를 해야겠다.
내가 어렸을 때의 일이다.
나는 목사님께 이런 질문을 하였다.
아담이 죄를 범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참으로 엉뚱한 질문이다.
목사님의 대답도 엉뚱했다.
어차피 영생을 얻은 백성이라면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건 죄가 들어오지 않았건,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을 것이다.
믿음서린 대답 같았다.
그러나 지금생각하면 이 대답은 예정설이다.
나는 현재 예정설을 인정하지 않는 입장에서 보면
분명 당시 목사님의 대답은 잘 못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인물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나도 75년 전 아버지와 어머니의 수고로움으로 태어난 사람임을 인정한다.
믿지 않는 나의 부모로부터 믿지 않는 한 아이로 태어났다.
만일 하나님의 계시가 없었더라면
그대로 믿지 않는 상태로 있을 것이다.
믿지 않았던 내가 인도하심과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알고부터 믿는 자로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선택의 의지를 주셨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신 30:15~16).
이것이 율법이고 복음이다.
새 언약”을 주석하면서,
새롭게 된 것은 틀림없이 형식을 언급하는 것이고,
본질은 여전히 동일하다.
본질에 의하여 나는 그 교리를 이해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복음에서 율법이 포함한 것 외에 아무것도 내어놓지 않기 때문이다.
율법은 성경의 핵심이다.
그는 제사장들, 예언자들, 그리고 시편기자들 뿐만 아니라, 사도들 또한
율법의 해석자 또는 해설자로 이해한다.
그리스도의 역할까지도 단순히 율법의 “충실한 해석자”로 이해한다.
그런가하면, 바울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일어난 큰 변화를 기린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것이 왔도다.”(고후 5:17)
다시, 바울은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우리가 율법의 속박에서 자유하게 되었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자유하게 했기때문이다.”(롬 8:2)
바울은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율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아래 있기 때문이다.”(롬 6:14)이라고 선포한다.
율법과 같이 복음마저도
죽음에 이르는 죽음의 향기”(고후 2:16)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어떤 의미에서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dispensation)의 기능은
율법에 어떤 부족 때문이 아니고,
우리의 죄 때문에 생겨나는 율법에 대한 단지 “우연적(accidental)”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이 아닌 율법을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dispensation)으로 부른다.
이 사실에 대한 원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왜냐하면 복음이 많은 사람에게 죽음의 경우가 된다고 해도,
복음은 여전히 그 복음이 값없이 하나님과 화해를 제공하고
중생의 수단이 되기 때문에 생명의 교리라고 옳게 불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법은 위반자를 영원한 죽음으로 위협하고
의에 대하여 순종하도록 사람의 마음을 고치지 못하고
다만 선한 삶을 위한 법칙으로 묘사하기 때문에,
율법은 다만 정죄밖에 할 수 없다.
또는, 다른 방법으로 설명한다면,
그것은 치료의 어떤 희망도 제공하지 않고
병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이 율법의 기능이다.
그리고 실망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치료를 제공하는 것이 복음의 기능이다.
그런가하면 복음은 인간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고
그 결과 생명의 문을 열어 준다.
그러므로 죽이는 것은 율법의 영구적이며 불가피한 우연 (accidens)이다.
왜냐하면 사도가 다른 곳에서 말한 것처럼,
율법아래 있는 자들은 그 저주 아래 있다.(갈 3:10)
그러나 복음안에는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능력”(롬 1:16-17)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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