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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과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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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2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55분

 

기억절 :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도입)

양화진에 가면 외국인 선교사 묘역이 있다. 그 중에 눈길을 끄는 묘비가 있다. 존 헤론(John Heron:1858-1890) 선교사의 묘이다. 그의 모교인 테네시 의과대학에서 개교 이래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을 하였다. 학교 측에서는 그를 교수로 내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조선이라는 땅에 많은 병자들이 약이 없어서, 의사가 없어서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빨리 선교사로 달려가고자 하였다. 그는 조선 땅에 첫발을 내딛는 의료 선교사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갑신정변 때문에 일본에서 먼저 조선말을 배웠다. 그리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조선 땅에 입국(1885년 4월 5일)한 뒤 두 달 후에 조선에 의료 선교사로 왔다(1885년 6월 21일). 사랑하는 약혼녀 해티 깁슨과 함께 왔다. 해티 깁슨도 병원장 딸이었는데 약혼자를 따라서 한국 땅에 온 것이다. 그들이 교수와 의사로 본국에서 지냈다면 얼마든지 그의 앞길이 든든히 보장된 길이었다. 그들이 모든 좋은 것들을 다 내려놓고 정치적으로 불안하고, 전염병이 득실거리는 낯선 이국땅에 찾아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미개한 조선의 백성들을 사랑하는 뜨거운 심장이 있었다. 마침내 그는 의료선교를 시작하였다. 알렌은 광혜원이라는 병원을 차려서 주로 왕족과 양반계급을 치료하였다. 그러나 존 헤론은 제중원이란 병원을 차려서 주로 천민에게 혜택을 주었다. 또한 대한기독교서회를 창설하여 문서선교를 열심히 감당했다. 그는 그 병원에서 5년간 사역을 하면서 주님의 사랑을 전해주었다. 여름에 선교사들이 모두 피서를 떠난 후에도 최선을 다해 환자들을 돌보았다. 그러다 자신도 이질에 걸려서 조선 땅에 온지 5년 만에 숨을 거두게 되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두 딸을 남기고 40대 초반에 죽은 것이다. 그의 아내 해티도 20년 뒤에 결핵으로 남편의 뒤를 따라갔다. 그의 헌신적인 삶에 고종황제도 감동을 받아서 그가 묻힐 수 있는 땅을 주었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 양화진 선교사 묘지이다. 그는 자신의 조국보다도 한국을 사랑했고 그리고 자신의 가족보다도 더욱 한국인을 사랑했던 주님의 사람이었다. 그의 묘비에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The son of God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셨고 나를 위해 자신을 주셨다) 자신의 신앙철학을 적어놓은 것이다. 그는 조선의 백성들을 정말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낮아져서 섬기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마침내는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목숨조차도 조선의 백성들을 위해서 내어 주었다. 예수께서 바로 먼저 이 땅의 선교사로 오셔서 우리 자신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셨다.

 

연구 범위 : 마 24:30, 단 7:13~14, 마 11:27, 눅 5:17~26, 요 8:58, 마 20:28.

 

*기억절 낭독·노래 MP3를 이용하면 기억절을 더욱 잘 외울 수 있습니다.(안교·선교 홈페이지 안교자료실)

 

공적 사역을 시작하신 지 2년이 훨씬 지난 어느 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3)고 물으셨다.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말을 들은 대로 전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다음 좀 더 까다로운 질문을 하셨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

개인의 입장을 묻는 질문이었다. 예수님은 그분의 외모나 성격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묻지 않으셨다. 그 질문은 예수님의 존재의 본질에 관한 것이었으며 제자들 각자의 개인적인 확신과 믿음을 표현하도록 요구하였다.

모든 사람이 언젠가 이 동일한 질문에 답해야 한다. 각자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개인적으로 결론을 내려야 한다. 다른 사람의 말이나 믿음을 따라 해서는 안 된다. 순수하게 자신의 신념에 따라 대답해야 한다. 그 대답에 각자의 운명이 달려 있다.

이번 주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의 근거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한다. 목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했던 베드로의 대답에 이르는 것이다.

 

안교 활동반과 교과 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그리스도의 자기 인식과 함께 그 정체성이 우리의 구원에 미치는 의미를 이해한다.

➋ 느끼기 : 신성한 특권을 내려놓고 마침내 생명을 포기한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에 나타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낀다.

➌ 행하기 :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개인적으로 수용한다.

 

Part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자신의 경험으로 비춰볼 때 어떤 면에서 ‘부전자전’이라는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까?

❷ 그대는 ‘인자’,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 중에서 어떤 예수님의 호칭이 가장 마음에 와 닿습니까?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❸ 각 호칭에서 미루어볼 때 예수님이 이루시고자 했던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❹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지적으로 알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을까요?

 

B. ❶ 그대는 처음에 인기 있는 지도자와 나중에 인정을 받는 지도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면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❷ 그대는 예수님이 자신의 신성을 어떤 방식으로 증명하셨다고 생각합니까?

❸ 그럼에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❹ 각자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과 경험을 나눠봅시다.

 

결론 : 인류에게 이해심 많은 친구이자 죄인을 위한 거룩한 대속물이 되시는 전능한 창조주가 그리스도의 참모습입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각자의 구도자들에 대하여 서로 소개합니다.

❷ 구도자들을 교회 장막부흥회나 여름 캠프에 참석시킬 계획을 세웁니다.

❸ 장막부흥회나 여름 캠프에서 침례식을 어떻게 준비할지 상의합니다.

 

첫째날(일) 인자

7월 6일

 

“인자가…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마 25:31).

 

교사강해 1)

예수께서는 자신을 인자라고 하셨다. 이것을 단순히 글자의 뜻대로만 이해하려고 한다면 ‘사람의 아들’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그렇게 이해한다면 사람이 먼저고 인자가 그 다음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성경은 우리가 쉽게 지나치기 쉽지만 아주 중요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 침례요한은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는데 그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 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실 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전에 이미 출생했다. 그런데도 그는 예수께서 자기보다 앞선 분이라고 말했다. 얼른 보면 우리 생각에 이해가 되지 않는 이 말이 중요한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보다 요한보다 나중에 이 땅에 오셨지만, 그 분은 그 어떤 사람보다도 먼저 계신 분이시다. 미가서 5장 2절에 보면 그분은 ‘태초에 계신 분, 아주 오래 전부터 계신 분’이라고 했다. 사실 예수님을 인자라고 하고 그분을 모든 사람보다도 먼저 계신 분이라고 말하는 것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속에는 인간이 기준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인자라는 말은 단지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이 아니고 ‘사람 가운데서 나신 참 사람’이라는 뜻이다. ‘사람 가운데서 나신 참 사람’. 즉 사람이 있기 전에 먼저 예수께서 계셨고, 그분을 위해서 자기의 모양대로 사람을 지으셨으며, 때가 차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에게서 나타나신 분, 그분이 바로 인자이신 것이다. 사람이 먼저 이 땅에 왔지만 인자는 그 사람보다 먼저 계신 분이시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서 인간의 근본을 깨달을 수 있어야만 신앙의 기초를 잘 세울 수 있다. 인자이신 예수님에 의해서 자신을 바라볼 수 있고, 그분에 의해서 자신의 가치를 올바로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예수께서 ‘너희는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고백한 것처럼, 그분은 사람보다 먼저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나타나신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것이 우리가 영생을 얻는 길이다.

 

‘인자(사람의 아들)’는 예수님이 즐겨 쓰셨던 호칭이다. 그분은 자신을 일컬어 80회 이상 ‘인자’라고 부르셨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그분을 절대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물론 예수님이 자신에게 이 호칭을 쓰신 데는 목적이 있었다.

이 관용적인 표현은 구약에 흔히 사용되었다. 한 경우를 제외하면 그 말은 언제나 인간을 가리켰다. 물론 예수님도 자신의 인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 호칭을 사용하셨다.

성경은 예수님을 진정한 인간으로 묘사한다. 그분은 아기로 태어나서 지혜와 키가 자라 어린이로 성장하셨고(눅 2:40, 52), 형제자매를 두셨다(마 13:55~56).

그분은 음식을 드셨고(마 9:11), 주무셨으며(눅 8:23), 피곤을 느끼셨고(요 4:6),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힘겨워하셨다(마 4:2, 요 19:28). 그분은 슬픔과 고뇌를 경험하셨다(마 26:37).

언뜻 예수님은 군중 가운데 다니는 평범한 사람으로 보였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그분을 평범한 남자 이상으로 인식하지 못했다(요 7:46). 사람들은 그분을 자신들 가운데 하나처럼 취급했다. 그분을 비웃고(눅 8:53), 비난했으며(마 11:19), 심지어 모욕하고 때렸다(눅 22:63). 그들에게 그분은 또 다른 한 사람에 불과했다. 불행히도 그들은 이 호칭에 또 다른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단 7:13~14에 따르면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는다. 유대인들은 이 ‘인자’를 메시아로 이해했다. 따라서 예수님이 이 호칭을 사용하셨을 때는 자신이 약속된 메시아이며 성육신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밝히셨던 것이다.

마 24:30, 25:31, 26:64을 읽어 보라. 이 성경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단 7:13~14을 상기시키는 어떤 요소들이 있는가?

 

교훈 : 예수님은 자신에 대하여 ‘인자’라는 칭호를 즐겨 쓰셨는데 그것은 그분의 인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그분이 인간으로 오신 메시아라는 뜻이었다.

 

부가적용)

예수께서 인자로서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그분은 언제부터 인자(사람의 아들)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을까? 구약 다니엘서에 보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소개되어 있다.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단7:13)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곳에 나타난 인자의 모습과 계시록에 나타난 인자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계1:13-19)고 하신 말씀에 나타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곧 우리보다 앞서신 처음과 나중이신 인자의 모습이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그리스도라는 의미는 지난 교과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고후 4:4절에 나타난 대로 “하나님의 형상”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하였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의 형상이라 하였다. 인간은 곧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모습대로 창조된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그리스도의 썩지 아니할 신성의 모습을 가지신 모습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곧 사람의 형상 속에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형상이 입혀진 상태를 의미한다고 본다.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다(창 2:25)고 하였는데 이것은 저들이 썩지 아니할 몸의 상태를 가진 모습을 나타낸다. 아담과 하와와 같이 썩지 아니할 인간과 같은 몸을 가지신 모습으로 구약이나 신약의 계시록에 나타나 있다.

 

나의 삶 속으

 

| 묵상 |

예수님이 온전한 인간이셨다는 사실은 그대에게 얼마나 중요한 문제입니까?

군대에서 재림교인 가족을 둔 지휘관을 만나 도움을 받았다는 간증을 들어 보았을 것입니다. 교회가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담당 공무원이 마침 고향 친구여서 문제를 잘 해결했다는 이야기도 들어 보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중요한 위치에 나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큰 힘이 됩니다. 사람이 되신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한 본성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께 우리의 부끄러운 면을 고백하며 도움을 청할 수 있습니다.

 

| 적용 |

‘인자’이신 예수님께 그대는 어떤 믿음과 소망을 갖게 됩니까?

 

영감의 교훈 : 사람의 아들이 되심 - “그분은 자신을 인간의 모든 아들과 동일시하신다. 우리를 하늘 가족의 일원이 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그분은 이 세상 가족의 일원이 되셨다. 그분은 사람의 아들이시며 따라서 아담의 모든 자녀들의 형제가 되신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저희를 둘러싸고 있는 멸망하는 세상으로부터 자기 자신이 분리된 것처럼 느끼지 말아야 한다”(시대의 소망, 638).

 

기 도 : 내 슬픔, 내 고통, 내 눈물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시는 주님, 우리의 모든 아픔을 이해하고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영원히 ‘인자’가 되신 나의 주님을 사모하며 의지합니다. 나의 모든 연약함을 내보이고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의 돕는 손을 붙잡습니다.

 

둘째날(월) 하나님의 아들

7월 7일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요 1:49).

 

교사강해 2)

왜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신성모독으로 여겨지고 사형 선고를 받을 만큼의 일로 여겨졌을까?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정확한 의미를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속성이 같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바로 “하나님으로 부터” 인것이다. 하나님의 속성과 같다고 주장하는 것, 즉 하나님과 같다고 하는 것은 유대 지도자들에게 신성모독이었다. 그러므로 유대 지도자들은 레위기 24:15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예수의 죽음을 요구한 것이다. 히브리서 1:3은 이를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또 다른 예를 요한복음 17:12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 유다는 “멸망의 자식”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요한복음 6:71은 유다는 시몬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그럼, 요한복음 17:12절이 말하는 바는 무엇일까? 단어 “멸망”은 “파괴, 파멸,”을 뜻한다. 유다는 파괴, 파멸의 아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의 삶의 정체가 파멸이라는 것이다. 유다는 파멸이 가시화 된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예수는 가시적으로 볼 수 있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는 뜻이다 (요한복음 1:1, 14). 예수께서 변화산상에서 보여주신 모습을 보라.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마17:2)고 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썩지 아니할 존재의 참된 모습은 빛을 입는 것이다. “주께서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으시며”(시 104:2)라고 하였던 것처럼 신성의 모습은 빛을 입으신 모습이다.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시36:9) 고 하였다. 인간의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다. 이는 주의 광명, 곧 그분의 빛안에서 우리 또한 빛을 입고 그런 광명을 보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 그 자신이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내신 존재인 것이다. 동등하시지만 동등됨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신을 낮추어 이 땅에 사람이 되어 오셨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2:15). 예수님 자신도 죽음을 경험할 수 있는 존재로 그 스스로를 낮추셨다. 그리하여 죽음을 이기고 승리한 자로서 주님을 믿을 때에 얻을 부활의 승리를 보이시어 구원에 이르게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가브리엘뿐 아니라 일부의 사람이 예수님을 일컬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눅 1:35, 마 14:33, 막 15:39, 요 1:49, 11:27). 그분은 그런 칭호를 수용하셨지만, 그 말을 자신에게 직접 적용하지 않기 위해 조심하셨다. 백성들이 던지는 돌에 죽지 않으려면 그렇게 하셔야 했다. 그럼에도 성경은 아버지와 그분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여러 방식으로 계시하고 있다.

아버지는 침례식에서 그리고 변형산에서 예수님이 자신의 아들임을 시인하셨다(마 3:17, 17:5).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독특하다. 그리스도는 우주에서 그 같은 관계를 누리는 유일한 존재이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아버지와 본질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자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언제나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다음의 성경절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완전한 연합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마 11:27, 요 3:35, 5:17, 10:30)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의 완전한 연합은 서로에 대한 완전한 이해 그리고 의지와 목적의 일치를 포함한다. 또한 그것은 본질의 연합까지 내포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두 인격이지만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다. 그런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 중성 대명사 ‘하나’이다(고전 3:8과 비교해 보라).

그러나 우리는 그분이 인간으로 살기 위해 오셔서 여기 계시는 동안 아버지께 자원하여 복종하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빌 2:6~8). 이런 한계는 기능상 필요했을 뿐 그분에게 있는 본질의 일부는 아니었다. 예수님은 특별한 목적과 뜻을 위해 자신을 굴복시키셨다.

 

교훈 :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다. 그분은 원래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등하지만 이 땅에서 특별한 목적을 위해 아버지 하나님께 복종하셨다.

 

부가적용)

이곳에서 나다나엘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에 대한 의미를 더 깊이 생각해 보자.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15:51-53)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과의 중요한 차이점은 썩을 것, 곧 죽을 것의 차이다. 아담과 하와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던 것은 썩지 아니할 몸, 곧 죽지 아니할 몸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부끄러움을 느낀 것은 저들의 영광의 옷이 벗겨진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형상과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의 가장 큰 특징은 썩지 아니할 몸, 곧 죽지 아니할 몸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의 삶 속으

 

| 묵상 |

예수님이 하나님이면서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이런 개념을 염두에 두고 본다면 왜 예수께서 자신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고”(요 5:19)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요 5:30) 한다고 말씀하셨는지 이해하게 된다. 이런 기능적인 관점에서 예수님은 “아버지는 나보다 크”(요 14:28)다고 말씀하셨다.

 

| 적용 |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그대는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 - “성경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명백하게 지적하고 그분들이 각각 소유한 개성과 특성을 명백히 보여 준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아버지시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리스도에게는 높은 지위가 주어졌다. 그는 아버지와 동등한 지위에 계셨다. 하나님은 그분의 모든 계획은 당신의 아들에게 알리셨다”(교회에 보내는 권면, 76).

 

기 도 : 한 손으로는 하늘을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땅을 붙잡으신 주님, 하나님과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 죄인을 하늘의 자녀로 삼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의 경배와 찬양을 받으시옵소서.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셋째날(화) 예수님의 신성-1

7월 8일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 5:18).

 

교사강해 3)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요12:44-45) 고 말씀하셨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정립하시기를 자신을 믿는 것은 곧 자신을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고 자신을 보는 자는 곧 자신을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 말은 곧 자신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선언과 같은 말이다. 매우 충격적인 선언이다. 이 말은 모든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는 매우 불쾌함을 일으키고 적의를 갖게 하는 도발적인 언사와 같았다. 이는 사람이 되어 그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한 선언과 같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요한 10:30-33절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정체와 그 신분에 대하여 대놓고 이렇게 말했다. 요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요10:31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요10:32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요10:3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예수님께서는 선언하시기를 자신을 하나님과 하나라고 하셨다. 그 자신이 자칭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이며 아예 자신이 하나님이시라는 말이다. 이 사실에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에게 커다란 반감을 일으키게 되어 유대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가장 큰 죄목은 바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한 것, 곧 그 스스로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죄목으로 미움을 받아 죽은 것이다. 사람이 되어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속이는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우리에게 있는 믿음의 근거이다. 인간은 아무리 비범한 삶을 산다 할지라도 구세주가 될 수 없다. 신약성경은 전반적으로 예수님의 신성을 증언한다. 오늘 우리는 이 주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예수님이 자신을 누구라고 설명하기란 무엇보다 쉽지 않은 문제였다.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그분은 자신이 육체를 입은 하나님 곧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릴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그분이 공개적으로 ‘나는 하나님이다.’ 또는 ‘나는 메시아이다.’라고 말했던 기록은 없다. 그분은 자신의 신성을 암시하는 방법을 선택하셔서 청중들로 하여금 그분의 신성을 직감할 수 있도록 간접적으로 인도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이 점차 자신의 신성을 드러내시자 대부분의 청중은 그분의 뜻을 알아차렸으면서도 그 주장은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메시아에 대한 그들의 기대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그러한 태도는 다음의 질문에서 확실해진다.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요 10:24). 그러나 이 질문의 배경을 보면 불행히도 그 의도는 순수하지 않았다.

어제 보았듯이 예수님은 아버지와 자신의 특별한 관계를 여러 차례 언급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신성을 계시하기 위해 사용하신 한 가지 방법이었다.

그분이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주장하실 때 많은 사람은 그가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하였다(요 5:18).

눅 5:17~26을 읽어 보라. 여기서 예수님은 공개적인 언급 없이 어떻게 효과적으로 자신의 신성을 드러내셨는가?

 

교훈 : 예수님은 자신의 신성을 직접적으로 주장하지 않았지만 여러 방식으로 그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셨다. 그럼에도 백성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부가적용)

왜 예수님은 그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시고 하나님을 자신의 친아버지라 하셨을까?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은 골 1:15절에 말씀하신 대로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다. 하나님의 속성 자체는 인간이 볼 수 없는 그런 존재이시다. 그런 보이지 아니하시는 존재가 가시적인 상태로 그 자신을 볼 수 있는 존재로 그 자신을 드러내 나타내신 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드러내신 이 존재를 우리는 아들이라 일컫지만 그 본질에 있어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니라(요 10:30)고 말씀하신 대로 보이지 아니하시는 아버지를 보이도록 나타내신 존재를 일컬어 우리는 아들이라 이름 하신 것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 그분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하나가 되신다. 신성과 인성의 결정적인 차이가 무엇일까? 인성은 썩어질 낮은 몸을 말하는 것이고 신성은 썩지 아니할 영광의 몸의 형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 3:21)고 하신 것처럼 고전15:44에는 분명히 말하기를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 하였다. 이곳에서도 육의 몸과 신령한 몸이라 하였듯이 낮은 몸은 육의 몸을 가르키고 있고 영광의 몸은 신령한 몸, 곧 썩지 아니할 신성을 가르치고 있음이 분명한 것이다.

 

나의 삶 속으

 

| 묵상 |

그대는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그대를 위해 무슨 일을 해 주기를 바랍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예수님은 죄를 사할 수 있는 거룩한 특권을 주장하셨다. 그분은 또한 자신이 “영광의 보좌에 앉”(마 25:31)아 만국을 심판하고 각인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일들 즉 오직 하나님의 권위에 속한 일들을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자신이 진정으로 누구인지를 이보다 얼마나 더 구체적으로 공개하실 수 있었겠는가?

 

| 적용 |

그대가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우리를 위해 하시려는 일과 다른 기대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내려놓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 신성의 흔적 - “그 썩어가는 육체에 건강을 회복시키는 것은 창조의 능력 못지않은 능력이 요구되었다. 땅의 티끌로 만든 사람에게 말씀으로 생명을 주신 그 같은 음성이 죽어가는 중풍병자에게 생명을 말씀하신 것이었다”(시대의 소망, 269~270).

 

기 도 : 저는 나의 성공과 번영을 위해 주님이 도와주시기를 바랐습니다. 내 건강을 지켜주고, 내 가정의 평안을 돌봐주시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어떤 희생과 대가를 치르더라도 나를 죄에서 구원하는 것이 주님의 뜻임을 알고 순복합니다.

 

넷째날(수) 예수님의 신성-2

7월 9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요 8:58).

 

교사강해 4)

예수님의 신성의 기원은 언제일까?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골1:15)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기원은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시다. 우리는 이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의 증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조물이 되신다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아버지와 자신을 하나라고 하신 말씀에 부합되지 아니하는 주장이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가시적인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려고 하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속성의 변화를 가져왔다. 인간이 볼 수 없는 분을 볼 수 있는 분으로 자신을 드러내신 것을 의미한다. 이 상태는 피조의 탄생이 아니라 본질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가시적인 세계의 출현을 위해 그 자신의 형상의 변화를 가져왔다. 하나님의 본체이셨던 분께서 형의 변화를 가지고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죽음을 이기신 것처럼 자신도 동일한 능력을 가졌다고 선언하시고 그 사실을 증명하셨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요 5:21). 오직 하나님만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요 11:25)라고 주장할 수 있다.

자신의 선재성(先在性)에 대한 주장은 그분의 신성에 대한 또 다른 명확한 증거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보내셨기 때문에 하늘에서 내려오셨다(요 3:13, 5:23).

예수님은 자신의 선재성을 재확인하셨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

어떻게 요 8:58이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가장 직접적이고 심오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는가?(출 3:13~14 참고)

어느 시점에 존재하게 된 아브라함과 달리(그리스어 어근 ‘기노마이’의 문자적 의미가 여기서는 ‘있었다.’로 번역되었음.),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이전에 계셨을 뿐 아니라 영원히 존재해 오셨다. “내가 있느니라(I AM)”는 표현 자체는 하나님의 칭호 ‘야훼’와 같다(출 3:14).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자신을 일컬어 불붙은 떨기나무에 나타나셨던 야훼(I AM)라고 주장하고 있음을 모를 수 없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그분은 신성모독의 죄를 범했다. 그래서 돌로 그분을 치려고 하였다(요 8:59).

복음서는 예수님이 다른 이들의 경배를 거부하지 않고 받으셨음을 보여준다. 성경에 따르면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의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다는 사실을 그분도 잘 알고 계셨다. 그래서 사탄에게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 4:10)고 말씀하셨다.

 

교훈 : 예수님은 자신의 선재성을 증거하셨으며 자신을 하나님으로 인식한 자들의 경배를 거부하지 않으셨다.

 

부가적용)

* 언젠가 제가 이 주제에 대해 다룬 적이 있는데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다시 조심스럽게 이렇게 하나님의 세계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이 설명 역시 가시적인 인간의 세계에서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제한된 설명임을 이해하기 바랍니다. 우리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상태를 자연수 0이라 생각해 보십시다. 이 0이란 수는 인간이 표현하기를 영(零), 즉 없다(無)고 말하는 것입니다. 영이란 정녕 없는 수를 말하는 것입니까? 0은 있으나 보이지 아니하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증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영이란 한자어를 보십시오. 영(零)이란 ‘떨어질’ 영인데 한문을 가만히 뜯어보면 비(雨)위에서 령(令)을 내리는 모습을 봅니다. 1(하나)은 0을 기초로 해서 나온 수이며 0을 그 근간으로 해서 하나(一), 즉 ONE, 숫자 1이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자연수의 시작이고 수의 기초입니다. 0에서 시작된 1은 그래서 0의 아들과 같습니다. 0이 없이는 1은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이유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요 1:18)라고 말할 때 영이신 하나님을 0에 비유하자면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고 하셨을 때 0의 품속에서 1(하나)가 나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아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에게서 시작된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자신을 아들이라고 표현합니다. 동양철학과 종교는 공교롭게도 基督敎와 더불어 ‘제 1의 시작’이 되는 “하나(one, 一)”에 대한 사유를 매우 중요한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모든 종교와 철학이 그렇듯이 자신들의 기원과 뿌리를 알려는 연구는 자신들의 존재의 정체성을 발견하려는 매우 중요한 기반이 되어왔습니다. “하나(one, 一)”를 모르면 결국 둘을 모르게 되고 결국 인간의 기원을 밝히는 그 “하나(one, 一)”를 모르면 궁극적으로 인간의 모든 것을 모른다는 결론이 되는 것입니다. ‘제 1의 시작’을 찾고 알려는 시도는 철학이나 과학이나 종교, 모두가 관련되어 있는 연구의 주제입니다. 김희정은 말하기를, “영국의 철학자 콘 퍼드는 그의 책 『종교에서 철학으로(From Religion to Philosophy)』에서 서구 철학 전통이 희랍의 종교와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밝혔습니다. 서구에서 철학과 종교를 인간정신의 서로 다른 영역으로 구분하려는 사고에 대해서 그의 연구는 단절되지 않는 연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하물며 종교와 철학, 나아가 과학이 융합되어 있는 고대 중국 도교 전통을 그렇게 구분해 접근하는 것은 많은 왜곡을 범하기 쉽다.” 궁극적으로 ‘제 1의 시작’을 찾으려는 노력은 종교나 철학이나 또한 과학까지 포함한 모든 사상을 어우르는 그 연속선상에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과학은 우주론을 암시한다. 그리고 우주론을 암시하는 것은 무엇이나 종교를 암시한다” 고 화이트헤드(A. N. Whitehead)는 말합니다. “제 1의 시작”에 대한 종교와 철학 그리고 과학이 융합된 연구를 깊이 하면 할수록 지성인들은 ‘지성적인 창조자’의 존재를 어느 정도 수긍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흄(David Hume)은 다신교와 유일신교를 비교하면서 그의 저서 『종교의 자연사』에서 “자연의 전 체계는 지성적인 창조자를 드러내 보이며, 진지한 생각을 하는 합리적인 탐구자라면 한 순간도 참된 유신론과 종교의 일차적 원리에 관한 그의 믿음을 의심해 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사는 자연의 전체를 바라보며 ‘지성적인 창조자’가 있을 것이라는 의식은 과학자나 천문학자나 동양종교나 기독교 모두 인식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동양철학과 기독교에서 바라본 시각에 차이가 있는 것은 전자는 그 ‘지성적 창조자’를 비인격적 존재인 만물의 어머니로서 “宇宙”로 여기는 것이고 후자는 “홀로 하나(one, 一)이신 여호와”(신 6:4), 즉 인격적인 신,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로 보는 것에 차이가 있습니다. 이 세상 만물, 즉 이 모든 가시적 세계를 시작하신 분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O)이 자신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드러내신 예수 그리스도(하나)를 통해서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게 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신 최초의 창조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나의 삶 속으

 

| 묵상 |

그대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경배할 수 있는 어떤 개인적인 증거가 있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다른 사람의 경배를 받음으로 그분은 자신의 신성을 드러내셨다. 바다 위의 제자들(마 14:33), 치유 받은 맹인(요 9:38),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여인들(마 28:9), 갈릴리로 돌아간 제자들(마 28:11) 모두가 그분의 신성을 인정하고 그분께 공개적으로 경배를 드렸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라고 했던 도마의 고백은 자신이 하나님과 대화하고 있다는 분명한 자각 없이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 적용 |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만나려면 그대에게 어떤 간절한 노력이 필요할까요?

 

영감의 교훈 : 영원 전으로 마음을 인도하는 그리스도 -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선재에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우리의 마음을 영원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하신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영원하신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지 않으신 때는 결코 없었음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신다. 유대인들에게 말씀하고 계셨던 그분은 하나님과 함께 존재하게 되신 분으로서 그분과 내내 함께 계셨다”(복음전도, 615).

 

기도 : 저의 눈을 열어 영광의 주를 보게 하옵소서. 저의 귀를 열어 생명의 말씀을 듣게 하옵소서. 제 입을 열어 어린 양에게 마음을 고백하고 그 이름을 찬양하게 하옵소서.

 

다섯째날(목) 그리스도의 사명

7월 10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교사강해 5)

성경에는 여러 곳에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한 표현이 나온다. 왜 그리스도가 “양”으로 표현되어 나오는 걸까? “양” 하면 독자 여러분의 마음에는 어떤 장면이 떠오르는가? 사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구원의 경륜에 있어서 그 근본은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고 용서하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이다. 희생 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보혈을 통해서만이 우리의 죄가 속량될 수 있고, 죄로 인하여 생긴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재 연합 될 수 있게 된다. 인간이 타락한 그날부터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세우신 그분의 놀라운 계획을 보여 주시려고 하셨다. 그것은 바로 희생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어떻게 해결하시는지를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죽 옷을 만들어 입히신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다음 4장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받으신 아벨의 제사 이야기를 미루어 봐서, 우리는 그것이 어린 양의 가죽옷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이 범죄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양을 잡아 제사를 드리는 표상을 통해, 앞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메시야가 되어 이 땅에 와서 그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음으로 그들의 죄가 용서받고, 그들이 구원을 받을 것을 가르치신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성소 제도나 희생 제사에 대해 별로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소에서 드려지던 희생제물은, 유혈 희생이나 무혈 제물이나를 막론하고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표상했다. 그 희생 제물들은 어린양 되신 그리스도의 생애와 고난을 보여주고, 어린양이 어떻게 자기 삶으로 죄인들을 속죄하여 주는지를 설명하여 줄 뿐 아니라, 희생제물되신 그리스도의 품성의 특성과 인격의 본성과 그분의 봉사의 범위를 보여주므로, 그 희생 제물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은 영적으로 우리에게 많은 교훈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러 오셨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된다.

사탄은 하나님을 비난하였다. 예수님은 그런 비난을 반박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품성을 대변하고 여러 사람이 발전시켜온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관념들을 바로잡으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 그분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기를 바라셨다. 왜냐하면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요 17:3).

그러나 구원을 얻기 위해 우리는 지식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에게 구세주가 되시는 하나님이 필요하다. ‘야훼는 구원이시다.’(마 1:21). ‘예수’라는 이름은 그 의미를 정확히 담고 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매우 분명한 언어로 묘사하셨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인류는 에덴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거룩함, 집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잃었다. 반면 예수님은 모든 것을 회복시키기 위해 오셨다. 그분은 아버지와 우리의 관계를 재정립시키시고(요 1:51),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마 26:28), 우리에게 삶의 모본을 보여주시고(벧전 2:21), 물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다(요 3:16).

예수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의 본질을 어떻게 정의하셨는가?(요 10:11, 마 20:28)

예수님은 왜 죽으셔야 했는가? 왜냐하면 그분께서 자원하여 우리 대신 우리의 죄로 인한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영원히 죽어 마땅한 죄인이다(롬 3:10~12, 6:23).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대가는 너무 컸다. 오직 하나님 아들의 생명만이 그 대가를 지불하기에 넉넉했다.

 

교훈 : 예수님의 사명은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을 뿐 아니라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음의 형벌을 당하시고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었다.

부가적용)

구약의 제사는 그림자요 참 형상, 곧 실상은 바로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가르친다. 구약 성도들에게는 앞으로 오실 참 형상 되시는 예수의 대속의 죽음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제사를 드리게 하신 것이다. 왜 예수님만이 유일한 대속자인가? 대속자가 되기 위해서는 합당한 자격이 있어야 한다. 죄 없는 의인이어야 한다. 죄인은 자기 스스로의 죄도 해결 못하는데 다른 사람의 죄를 대속해 줄 수 없다. 그래서 구약에서도 대속의 제물은 언제나 흠 없는 것으로 드려야 했다. 성경은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다 죄인이라고 하신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고 하셨다. 인간은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죄인이다. 우리는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 우리는 존재적으로 죄인으로 태어난다. 아담의 죄를 물러 받았기 때문이다. 죄 중에 가장 근원적인 죄는 인류 조상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다. 이것이 죄의 뿌리요 근원이다. 이 죄 때문에 죽음이 왔고 이 죄 때문에 영원한 멸망을 받게 되었다. 아담 안에서 죄인 된 인간이 스스로 죄를 처리 할 수 없다. 그래서 독생자 예수님이 죄 없는 몸으로 오시기 위해서 성령으로 잉태하여 오신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을 가르쳐 우리와 다 같은데 단 한 가지 죄가 없으신 분이라고 하셨다. [히4:15]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전 인류를 대표하는 분이라야 한다. 첫 사람 아담은 모든 인류의 대표였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께 받은 명령은 모든 인류가 받은 것이며 그의 범죄는 모든 인류의 범죄였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마지막 인류대표자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지막 아담” 이라고 하셨다. 아담보다 더 크신 독생자께서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하게 해 드릴 분이어야 하는데 그런 인간은 아무도 없다. 양이나 염소나 황소를 가지고는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지 못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짐승의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아들을 위하여 몸을 준비해 놓으시고 그 아들을 보내실 때 몸을 입히셔서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성경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히 10:4-5)

 

나의 삶 속으

 

| 묵상 |

그대는 누군가를 위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부모들은 자녀를 위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은 심정으로 살아갑니다. 세속적인 이야기에서조차 사랑에 빠진 남녀가 서로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은 언제나 인기 있는 설정입니다. 남을 구원하다가 목숨을 잃은 분들의 숭고한 희생에 우리는 눈물을 흘립니다. 누군가를 위해 죽을 수 있는 마음만큼 진실한 사랑을 증명하는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 주께서 이 모든 희생의 모본이십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죽을 수는 없습니다. 그 사명은 오직 하나님이자 사람이신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었습니다.

 

| 적용 |

십자가에서 사명을 완수하신 예수님에게서 그대는 무엇을 본받기 원합니까?

 

영감의 교훈 : 유일한 분 - “깨어진 하나님의 율법은 죄인의 생명을 요구하였다. 온 우주에서 사람을 위하여 이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이는 한 분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 자신처럼 거룩하므로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만이 범법을 속죄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밖에는 아무도 타락한 사람을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여 하늘과 조화시킬 수 없었다”(부조와 선지자, 63).

 

기도 : 예수님, 제게도 예수님 같은 숭고한 마음을 주옵소서. 제 살 길 찾기 급한 이 세상에서 예수님처럼 남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버릴 수 있는 진정한 용기를 가진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여섯째날(금)

7월 11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화잇 주석>, 요 1:1~3, 14 “신성과 인성을 아울러 갖고 계신 구주”를 읽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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