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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과 그리스도처럼 생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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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6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24분

 

기억절 :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도입)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서로 사랑하되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시는 이 말씀이 새 계명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사랑에 대하여 우리가 마음대로 상상하고 좋아하며 느끼는 대로 사랑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랑에 대한 개념을 정의해 주신 대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특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주신 계명은 새 계명이 되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라’ 그동안 우리가 해왔던 우리의 취향대로 우리의 생각대로 사랑하는 것은 새 계명이 아니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우리의 스타일대로, 생각대로 사랑하면서 사랑한다고 해서는 안된다. 새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는 사랑이 예수님의 계명인 것이다. 사랑의 기준은 우리가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우리의 도덕성과 윤리성을 만족시키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것처럼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처럼 생활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의 궁극은 우리가 영원히 사는 것에 있다.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라고 했던 것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려 하심이라(요3:16)고 하셨다. 예수님의 궁극적인 사랑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하신 것이다.

 

연구 범위 : 마 9:36, 막 10:21, 눅 10:30~37, 마 25:31~46, 눅 6:32~35, 요 15:4~12.

 

*안교·선교부 홈페이지에 다양한 교과 토의 자료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신약에서 처음 가르친 계명이 아니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이미 백성들에게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고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도 “자기같이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레 19:18, 34).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라고 말씀하셨을까? 예수님의 명령에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사랑하라는 새로운 차원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시기 전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은 이타적인 생애와 죽음을 통해 진정한 사랑의 가장 심오한 의미를 밝히셨다.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움직이시고 걸으시고 일하신 요소였다. 그는 세상을 그분의 사랑의 팔로 품으시려고 오셨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따라야 하며 그를 우리의 모본으로 삼아야 한다”(하나님의 아들과 딸들, 147).

이번 주 우리가 예수님의 자상하며 동정심 많고 사려깊으며 인정 많은 삶을 살펴볼 때 우리의 심령이 참된 기독교 신앙의 표준인 하나님의 거룩하고 능동적인 사랑의 원리에 감동을 받아 꼴지워지기를 바란다.

 

안교 활동반과 교과 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사랑의 성경적 의미를 찾기 위해 예수님의 생활방식과 가르침을 살펴본다.

➋ 느끼기 : 매일 선택의 순간마다 예수님의 사랑의 생활방식을 모방하려고 간절히 염원한다.

➌ 행하기 : 인내의 태도, 용서의 성품, 실질적인 섬김을 통해 사랑을 실천한다.

 

Part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기억에 남는 봉사활동 경험을 나눠 봅시다.

❷ 예수님은 어떤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생애를 사셨다고 생각합니까?

❸ 마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그대는 어떤 교훈이 마음에 와닿습니까?

❹ 우리 안교반(소그룹)이 이웃을 위해 실천해야 할 봉사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B. ❶ 그대가 정말 가까이하기 힘들었던 이웃이나 동료에 대해 말해 보십시오.

❷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을 통해 이웃을 어떻게 정의해야 합니까?

❸ 원수를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 각자의 경험과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해 보십시오.

❹ 우리가 진정한 사랑의 마음으로 봉사하기 위해 어떻게 매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을까요?

 

결론 : 그리스도처럼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처럼 사랑하는 것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다음 주 토요일 저녁에 가벼운 친교 모임을 계획합니다.

❷ 새 신자뿐 아니라 구도자들도 모두 참여할 수 있도록 계획합니다.

❸ 기도 제목을 가지고 함께 기도합니다.

 

첫째날(일) 예수님이 사셨던 방법

8월 10일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 9:36).

 

교사강해 1)

예수님은 눈물과 사랑으로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사셨다.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신 이야기가 성경에 많지만 위의 말씀에 따르면, “먼저 목자 없는 양 같은 사람들을 보고 불쌍히 여기”셨다고 말씀하신다.(마9:36) 예수님이 사람을 불쌍히 여기신 첫 번째는 사람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살기 때문이다. 목자 없는 양은 주인 없이 사는 것이다. 먹고 살기는 그런대로 먹고 사는 데 하나님은 없다. 겉으로 볼 때는 그럴싸한데 하나님이 없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부모 없이 사는 사람이다. 육적인 부모가 없어도 슬픈 데 하나님 없이 산다면 얼마나 슬프겠는가? 문제는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얼마나 슬픈지도 모르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이 가난해서 불쌍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못 배운 사람이 불쌍하다고 한 적도 없다. 로마의 식민지배 때문에 불쌍하다고 말씀한 적도 없다. 하나님이 없어서 불쌍하다고 말씀하고 있다. 목자 없는 양~! 곧 우리의 목자가 되시는 그리스도 없이 사는 삶이 가장 불쌍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긴 가장 궁극적인 이유는 저들이 영원한 구원을 알지 못하여 멸망하여 가는 것이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알지 못하여 죽어가는 것이었다.

 

사탄의 맹렬한 공격을 줄기차게 받으셨지만 예수님은 사랑과 봉사의 이타적인 삶을 사셨다. 그분의 우선순위는 언제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맞춰져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그분은 변함없이 다른 이들을 섬기는 친절한 성품을 보이셨다. 어떤 경우든 고통당하는 모습을 보시면 언제나 도움의 손길을 내밀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분은 어린이, 여성, 외국인, 한센병자, 세리같이 사회에서 무가치하게 간주되는 이들을 애정을 다해 돌보셨다. 그분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마 20:28)기 위해 오셨다. 그래서 그분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행 10:38)다. 그분에게는 먹고 쉬는 육체적 필요를 채우는 것보다 다른 이들의 안녕을 바라는 동정과 자비와 관심이 더 중요했다. 심지어 십자가에서도 그분은 자신의 고통보다 어머니를 더욱 염려하였다(요 19:25~27).

마 9:36, 14:14, 15:32에 따르면 예수님은 사람을 어떤 관점으로 보셨는가?

예수님은 사람들의 필요에 민감하셨고 진심으로 그들에 대해 염려하셨다. 동정심에 가득한 그분의 마음은 지치고 흩어진 군중을 향하였다. 여리고 근처에서 만난 두 소경(마 20:34), 도움을 구했던 한센병자(막 1:40~41), 외아들을 잃었던 과부(눅 7:12~13)같이 의지할 데 없는 개인에 대해서도 연민을 느끼셨다.

여러 사람을 상대하실 때에 예수님은 어떤 행동수칙을 따르셨는가?(막 10:21, 요 11:5) 예수님이 베푸신 모든 자비의 행동과 이적과 말씀의 동기는 그분의 무한한 사랑 곧 변치않는 영원한 사랑이었다.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도 그분은 처음부터 제자들을 사랑셨을 뿐 아니라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셨다(요 13:1).

 

교훈 : 사랑과 봉사의 삶을 사신 예수님은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바라셨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남을 위해 자기를 버리는 위대한 사랑을 보이셨다.

 

부가적용)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신 사람들은 특별히 병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이 환자를 볼 때마다 항상 따라 다니는 말씀이 있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마14: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한센씨 병을 가진 환자가 예수님께 나왔다. 그가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이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할 수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무엇이라 말씀하셨는가? 막1:4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이 말씀을 하자마자 고침을 받았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다양한 병을 치료하셨다. 육체적인 병, 정신적인 병, 영적인 병, 감정적인 병, 관계적인 병, 그러나 예수께서 궁극적으로 치료하시러 오신 병은 우리의 사망의 병이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신 것은 우리가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불쌍하였던 것이다. 영원히 살 수 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 앞에서 예수님은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으셨다. 우리가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저들이 얻을 수 있는 이 하나님의 구원을 모르고 죽어가는 영혼에 대한 불쌍함과 긍휼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치료는 마술적 치료가 아니라 사랑의 치료요 긍휼의 치료이시며 사망을 치료하시러 오신 구주이셨다.

 

나의 삶 속으

 

| 묵상 |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을 의미합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그분은 십자가에서 이타적인 사랑이 이기심을 정복하는 모습을 온 우주에 보여주셨다. 갈보리에 비춰볼 때 자아를 부인하는 사랑의 원칙은 하늘과 땅에서 유일한 생명의 바탕임이 분명하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

 

| 적용 |

오늘 그대가 예수님처럼 말하고 행동해야 했던 순간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영감의 교훈 : 자아 부정과 희생의 정신을 가져야 함 - “각 사람은 자아부정과 자아희생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생애는 이타적이었고, 겸손과 희생으로 특징지어졌다. 예수께서 하늘에서 오셔서 그들에게 주시고자 한 큰 구원에 동참한 사람이 그들의 주님을 따르기 싫어하고 그분의 자아부정과 희생에 동참하기를 거절할 것인가?”(교회증언

3권, 387).

 

기도 :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해 사신 예수님의 모본을 마음에 새깁니다. 매일 매 순간 예수님처럼 살기를 바라며 성령의 도움을 구합니다. 나의 유익을 구하려는 마음이 생길 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게 해 주시옵소서.

 

둘째날(월) 네 이웃을 사랑하라

8월 11일

 

교사강해 2)

마 19:19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다. 바울은 이 가르침이 곧 율법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갈 5:14절에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라 한다. 야고보는 이것을 최고의 법이라고 하였다. 약 2:8절에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라 하였고, 야고보는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바로 이 최고의 법을 범하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여기 최고의 법이란 곧 왕의 법이라는 뜻이다. 그냥 최고로 중요한 법이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으뜸가는 법이라는 뜻이다. 이보다 더 큰 법이 없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법이고 가장 중요할 뿐 아니라 모든 법의 핵심이기도 하다. 이 법 하나를 잘 지키면 다른 법을 다 지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 롬 13:9절에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이 최고의 법은 다른 모든 법을 판단할 수 있는 근본적인 법이다. 예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주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우리 자신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이 최고의 헌신이요 사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처럼 살려면 그분이 보여주셨던 동일한 사랑을 나타내야 한다. 그분은 그 같은 사랑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예증하셨다(눅 10:30~37). 이 비유는 한 율법사와의 대화중에 나왔다. 그 율법사는 하나님과 동료 인간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눅 10:27)는 말로 요약하였다. 신 6:5과 레 19:18을 인용할 만큼 성경을 잘 알았으므로 그는 이웃에게 사랑을 나타내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꼈어야 했다. 그러나 자신을 정당화시키려는 의도로 그는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눅 10:29)라고 예수님께 물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지 어떻게 설명하셨는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눅 10:30~37)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은 어떻게 황금률과 관계가 있는가?(마 7:12)

‘누가 내 이웃인가?’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이 우리의 이웃이라고 대답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내 이웃은 내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가?’라고 묻기보다 ‘나는 내 이웃을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예수님은 ‘네가 싫어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하지 말라’는 당시에 널리 알려진 가르침을 초월하셨다. 그분은 랍비들의 부정적인 표현을 긍정적인 언어로 제시하심으로 우리가 피해야 할 것뿐 아니라 특히 우리가 해야 할 것까지 언급하셨다.

이 원칙은 다른 사람이 우리를 대하는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을 대하면 된다는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친절한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우리에게 못되게 구는 사람에게 못되게 행하기 쉽다. 대부분은 그렇게 한다. 하지만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언제나 그들이 우리를 대하는 방식과 상관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교훈 : 예수님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이 우리의 이웃이며 우리는 그들의 태도와 상관없이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부가적용)

고전 13:1-3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그 어떤 법도 최고의 법, 즉 사랑의 법을 정죄할 수 없다. 사랑은 Royal Law이다.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주신 법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도 결국은 이 사랑을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명령한 것이다. 이 사랑의 법에 생명이 있고 질서가 있고 복이 있고 자유가 있고 평안이 있다. 그래서 최고의 법이다. 가장 높은 법이라기보다는 가장 좋은 법이라는 뜻이다. 종교가 없는 세상 사람들도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 앞에서는 겸허한 자세를 취한다. 그만큼 사랑의 실천이 주는 힘은 결코 작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의 공생애 관심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실천으로 일관되어 있다. 그 사랑의 힘은 지금도 현재의 사람을 비롯해 앞으로의 사람도 하나님께 무릎을 꿇게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새 계명(명령)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를 잘 알고 있다. 그대로 행하는 사람도 있지만 또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는 것이 슬프게 한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이웃을 사랑하는 진정한 마음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웃이란 곧 사랑으로 확장된 ‘나’라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는 율법사의 질문을 받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 끝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되물으셨습니다. 어디까지 내 이웃인지 한계를 정하려는 질문보다 ‘나는 누구에게 어떤 이웃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더 중요합니다. 편견의 장벽으로 가로막힌 사람은 누구의 이웃도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의 심령으로 선입견을 극복한 사람은 누구에게나 손을 내밀 수 있습니다.

 

| 적용 |

그대가 먼저 다가가서 이웃이 돼 주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영감의 교훈 : 이웃을 찾아 가라 - “그대의 이웃을 하나씩 찾아 가라.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그대의 무아적 관심과 사랑으로 뜨거워질 때까지 그들에게 가까이 접근해 가라. 그들을 동정하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고, 그들에게 유익을 끼쳐 줄 기회를 살펴보라. 그리고 할 수 있는 대로 소수의 사람들이라도 모아서 그들의 어두운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펼쳐 주라”(구호봉사, 64).

 

기도 : 나 하나 내 가족 하나 지키기에 급급한 인생을 사는 저를 불쌍히 여기고 용서해 주시옵소서. 세상을 넓게 바라보는 눈과 누구나 품을 수 있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예수님처럼 누구에게나 좋은 이웃으로 다가서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셋째날(화) 사랑의 봉사

8월 12일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교사강해 3)

한 번은 링컨이 급하게 집무실을 나오다가 서류 하나를 미처 챙기지 못하였다. 링컨 대통령이 수위에게 내 집무실에 가서 책상 위에 있는 서류를 좀 가져오라고 하였다. 수위가 대통령 집무실 책상 위에 있는 서류를 가지고 오니까 링컨이 수위의 집무 의자에 앉아서 일을 보고 있었다. 수위가 놀라서 ‘각하! 아니, 각하께서 왜 이러십니까?’라고 하였더니 링컨이 씩 웃으며 ‘자네가 내 일을 하니까 내가 자네의 일을 하는데 뭐가 잘못되는가?’라고 하더란다. 그 수위가 얼마나 감동했겠는가? 모르긴 해도 그 다음부터 수위 일이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높은 자리에 앉은 것은 자리가 높아진 것이지 사람이 높아진 것이 아니다. 대통령이라고 다 존경 받는 것은 아니다. 부자라고 다 존경 받는 것도 아니다. 학자라고 다 존경 받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가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고 하였다. 높은 사람, 배운 사람, 부자들이 지켜야 할 법이 바로 최고의 법, 즉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부자가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은 자기의 가진 것 얼마를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다. 종이 아프면 같이 아픔을 느끼는 것이다. 종이 걱정하는 것을 자기의 일처럼 걱정하는 것이다. 참 어려운 일이다. 자신의 생명만큼이나 다른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기독교 종교의 실천 강령이다.

 

마 25:31~46의 바탕 기별은 무엇인가?

최후의 날에 놀랄 일이 많이 있을 것이다. 인자의 오른편에 있던 자들은 이타적인 사랑의 실천이 그렇게 결정적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전한 유창한 설교, 그들이 행한 가치 있는 일 또는 그들이 희사한 너그러운 기부를 칭찬하지 않으셨다. 대신 그들이 형제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했던 작은 친절로 인해 그들을 하늘로 영접하실 것이다.

왼편에 있는 자들도 왕이 내린 선고로 인하여 깜짝 놀랄 것이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마 7:22). 하지만 이런 일이 필요하더라도 사랑의 태도가 없다면 그 모든 것은 쓸모가 없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섬겼다고 주장했지만 주님은 그들을 전혀 알지 못하셨다(마 7:23). 왜냐하면 그들은 그분과 그분의 형제들을 전혀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진정한 신앙의 원칙을 실천하지 않았다(약 1:27 참고).

“지극히 작은 자”(마 25:40)에 대한 주석가들의 해석은 다양하다. 그리스도인의 책임의 범위를 알려면 그들이 누구인지 확정할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은 ‘지극히 작은 형제’가 사도와 다른 선교사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마 10:40~42에서 이런 견해의 근거를 찾고 모든 인류의 운명은 기독교 선교사들을 대하는 태도에 좌우된다고 결론짓는다. 어떤 학자들은 마 12:48~50을 근거로 예수님의 지극히 작은 형제들은 일반적으로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그분의 형제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 가리키는 범위는 훨씬 넓어 보인다. “그분은 자신을 인간의 모든 아들과 동일시하신다.… 그분은 사람의 아들이시며 따라서 아담의 모든 자녀의 형제가 되신다”(시대의 소망, 638).

 

교훈 : 겉으로 드러나는 외형적인 행위가 아닌 진실한 사랑의 마음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친절하게 돌보고 섬기는 태도가 천국에서는 환영을 받는다.

 

부가적용)

우리가 위에서 말한 교훈의 집약적 친절의 태도를 잘 나타낸 백부장을 보게 된다. 눅 7:1-10절에 어떤 백부장이 자기의 종이 병들어 죽게 되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고쳐달라고 하였다. 거기 보면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라고 한다. 백부장이 종을 사랑했다는 것이 얼마나 인상적인지 모른다. 종은 주인의 재산에 불과했던 시절에 이런 표현은 그 백부장이 종을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말해 준다. 유대의 장로들도 이 백부장을 존경하였다. 유대 장로들이 백부장의 부탁을 받고 예수님께 찾아가서 부탁할 때 이런 이야기를 한다. 눅 7:4-5절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5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점령군 장교가 피 점령지 국민을 사랑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노예 같은 종도 사랑하였다. 종이 병들어 아파할 때 그도 아파하였던 것이 틀림없다. 그 사람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눅 7: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놀라시면서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하셨다. 이 백부장이야 말로 최고의 법을 실천한 사람이다. 왕의 법을 지킨 사람이다. 그의 신앙이 최고이고 그의 인격이 최고이다. 예수님께서 그의 종을 고쳐주시려고 그의 집을 향하여 가고 있는데 백부장은 급히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 이렇게 말했다.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7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8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참으로 존경이 가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백부장의 사랑도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에 비하면 희미한 그림자에 불과한 사랑일 뿐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현재 그대의 삶은 양의 편에 있습니까? 아니면 염소의 편에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아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내가 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며, 나그네를 영접하고,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주며, 병든 사람과 옥에 갇힌 사람을 찾아가는 삶을 살고 있는지 보면 됩니다. 내가 이런 생활과 거리가 멀다면 왼쪽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감동을 받은 사람은 도움을 주어야 할 순간 언제나 팔을 거두지 않을 것입니다.

 

| 적용 |

그대는 마 25장의 교훈에 따라 오늘 누구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봉사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 하늘의 기록책 - “하늘에는 동료들의 필요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에 관하여 기록하는 책이 있으며, 거기에 기록된 행위를 따라 각 사람이 심판을 받게 될 그날에 그 기록이 드러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행한 모든 부당한 행위에 보응하실 것이다. 불우한 사람들에게 무관심하거나 그들을 경시한 자들은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고 말씀하신 주님의 축복을 받을 기대를 하지 말아야한다”(구호봉사, 312).

 

기도 : 예수님이 친히 ‘나의 형제’라고 부르시는 그 사람들을 외면하고 무시했던 잘못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들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시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제 삶의 주변에서 만나는 주님의 형제들을 잘 섬기기를 원합니다.

 

넷째날(수) 네 원수를 사랑하라

8월 13일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 6:27~28).

 

교사강해 4)

원수를 사랑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원수는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고, 그가 사는 지방 이름만 TV 화면에 나와도 가슴이 쿵덕거린다고 한다. 분노와 미움이 일어나는데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가르친 것처럼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하시지 않고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명령하셨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음은,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흐를 때 비로소 가능하다. 형제를 향한 사랑, 나아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증거임을 보여주신다. 여러분과 저의 모습에서 이런 예수님의 형상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부부는 서로 닮는다는 말이 있다. 오래 함께 지나면 서로 닮는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사람은 주님을 닮게 마련이다. 우리의 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높은 수준이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쳤지만, 우리는 구원받아야 할 이웃이 있을 뿐이며 이웃을 사랑하되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함이 높은 수준의 의며, 천국백성 됨의 증거임을 깨닫게 된다. 나를 사랑하는 자에게만 사랑하고, 내 형제에게만 문안하는 사람은 아직도 세상에 속한 사람임을 본문 말씀은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차원을 넘어서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처럼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하나님의 백성임을 깨닫게 된다.

 

진정한 기독교 신앙의 탁월한 증거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당시에 지배적인 사상과는 대조되는 표준으로 높이 세우셨다. 많은 사람이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레 19:18)는 계명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지도 의도하지도 않은 ‘너의 원수를 미워하라’는 개념을 추론한다. 물론 말씀 속에는 그러한 암시가 없다.

그리스도에 따르면 원수에 대한 사랑은 어떤 실질적인 방법으로 나타나는가?(눅 6:27~28)

원수는 우리에게 3가지 다른 방법 즉 적대적인 태도(미워함), 나쁜 말(저주함), 못된 행동(남용과 핍박)(마 5:44)으로 우리에게 적개심을 보일 수 있다. 이런 3가지 적대적인 표현에 대해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의 3가지 표현 즉 착한 행동(선행), 좋은 말(축복),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함(기도)으로 반응하도록 지시하셨다.

증오와 적대적 감정에 대한 그리스도의 반응은 “선으로 악을 이기”(롬 12:21)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먼저 원수를 사랑하도록 요구하셨다는 사실을 주의해야 한다. 그다음 그 결과로 선행과 좋은 말 그리고 중보의 기도로 사랑을 나타내라고 하셨다. 하늘로부터 영감을 받은 사랑 없이는 그러한 말과 행동, 기도는 오히려 진실한 신앙에 대한 공격과 위선적인 속임수가 될 것이다.

왜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지 설명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어떤 이유들을 언급하셨는가?(눅 6:32~35)

이 같은 차원 높은 명령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은 3가지의 논증을 사용하셨다. 첫째, 우리는 세상의 낮은 표준보다 차원 높은 삶을 살아야 한다. 죄인들도 서로 사랑하고 범죄자들도 서로를 돕는다.

 

교훈 : 기독교의 차원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에서 증명된다. 우리는 원수에게 선을 행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부가적용)

마틴 루터킹 목사는 몽고메리에서 인종 차별을 하는 버스의 승차 거부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혔다. 그는 그 때 28세의 청년 목사였다. 옥중에서 그는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제목의 설교를 썼다. 이 설교는 1957년 성탄 때 덱스터 침례교회에서 선포한 역사에 남는 유명한 설교였다. 킹 목사는 이 설교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우리를 투옥해도 그대를 사랑하리라. 우리 집에 폭탄을 던지고 우리 아이들을 위협해도 그대를 사랑하리라. 한밤중에 우리 마음을 습격하여 우리를 때리고 반쯤 죽여 놓아도 그대를 사랑하리라. 그러나 우리의 대장은 예수시오, 우리의 깃발은 하나님이시니 결국 어느 날인가 사랑이 승리할 것이다. 우리의 승리는 우리 흑인만은 승리가 아니라 전 세계에서 차별 받고 사는 모든 민중의 승리이므로 우리는 이중의 승리를 거두리라.>고 했다. 킹 목사의 인내와 투지, 사랑과 용기는 예수님을 자신의 깃발로 앞세우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킹 목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는 일없이 원수사랑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 앞에 내세우면 참을 수 있고, 극복할 수 있고, 견딜 수 있고,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어떤 관점에서 원수를 불쌍히 여기며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만약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이 세상의 자녀들의 덕보다 더 우월한 방식으로 살고 사랑하도록 우리를 고양시키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것이 가치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둘째, 하나님은 원수를 사랑하는 우리에게 보상해 주실 것이다. 우리가 보상을 바라지 않을지라도 그분은 우리에게 풍성하게 보상하실 것이다. 셋째, 이런 종류의 사랑은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눅 6:35)신 하늘 아버지와 친밀한 교제를 나눈다는 증거이다.

 

| 적용 |

현재 그대가 선으로 극복해야 할 악한 문제는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 그리스도의 분부 -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분부하신다(마 5:44). 그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억압하고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자들을 사랑하게 하신다. 우리는 말과 행동에서 저들과 같은 정신을 나타내지 말아야 한다. 대신 기회 있을 때마다 저들에게 선을 베풀어야 한다”(하늘, 220).

 

기도 : 아버지, 저는 어리석어서 받은 대로 갚으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나를 해하는 자들마저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며 그들을 선대하고 축복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해 줄 수 있는 예수님의 심령을 갖도록 도와주옵소서.

 

다섯째날(목) 예수님처럼 사는 법

8월 14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 15:9).

 

교사강해 5)

보통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돈이나 시간 등을 쓸 수는 있지만,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줄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를 향한 부모님의 사랑은 생명까지도 줄 수 있는 크고 넓고 깊은 사랑이다. 그러나 우리 부모님의 사랑보다 더 완전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 사랑은 변하지 않으며, 막힘이 없다. 믿을 수 있으며 영원하다. 거짓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확실하다. 현대 사회에는 많은 종류의 보험이 있다. '생명보험, 건강보험, 교육보험, 노후보장보험' 등 많은 종류의 보험이 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이 보험을 들까? 그것이 어려움을 당할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보증서이기 때문이다. 또한 보증수표라는 것도 있다. 그것은 현금이나 다름없는 가치를 가진다. 보험에 들어 있거나 보증수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든든하다.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보험보다 은행의 보증수표 보다 더 믿을 수 있는 확실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아버지의 사랑이다. 그분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보증을 위해 오신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를 압도하고 절망시킬 만큼 이타적인 사랑의 삶에 대하여 높은 이상을 제시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본성이 이기적인 우리가 이타적인 방법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 게다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그러한 사랑을 성취할 수 있도록 도구를 제공하지 않았다면 가증스럽고 사랑할 수 없는 자들을 사랑하며 섬기라고 결코 요구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이 표준은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명령이나 권고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약속 곧 매우 적극적인 약속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과 같이 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갖추어 놓으셨으며, 또 사악한 의지를 개입시키지 않고 그분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는 모든 자를 위하여 이 일을 이루실 것이다”(산상보훈, 76).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을 뒷받침하는 약속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고 자비하시다는 보증이다(눅 6:35~36).

우리도 그들 가운데 포함된다. 우리가 우리의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였을 때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롬 5:10). 우리를 위한 그분의 사랑과 희생을 우리가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날마다 재확인할 때, 자기를 부인하는 그분의 사랑이 우리의 삶에 스며든다.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경험할수록 그분의 사랑이 우리로부터 다른 이에게 심지어 우리의 원수에게 흘러 넘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어떤 관계인가?(요 15:4~12)

 

교훈 : 우리가 예수님처럼 사랑하고 심지어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날마다 우리에게 무조건적으로 베푸시는 그분의 사랑 가운데 거하는 것이다.

 

부가적용)

모든 신자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영상을 가지고 있다. 이 땅의 부모님에게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은 인자하신 하나님 아버지상(像)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많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면 냉혹한 하나님 아버지상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내면이 어떠하든지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새로운 아버지의 형상을 가지도록 배려하시고 가르치신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으로 가득 찬 분이라고 단언한다. 예수님에게 하나님 아버지는“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신 분”(요 17:24)일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요 17:26)을 새로운 성도에게 전할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신다. 사랑은 아버지에게서 시작하여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흐르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시작되어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이 사랑이 우리를 변화시킨다. 먼저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가 알게 된 것은 놀랍도록 크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우리를 창조하셨다. 우리가 타락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떠났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다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 하나님은 우리 탕자와 같은 인생을 위하여 아들을 주심으로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롬 5:8).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매일 그리스도의 풍성한 사랑 안에 머물고 있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우리에게 매일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다시 받아들이는 것뿐 아니라 우리의 의지를 그분께 굴복시키고 그분 안에 거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구했던 방법으로 우리도 예수님과 그분의 뜻에 의지해야 한다(요 5:30).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매일 예수님께 굴복하기로 선택할 때, 그분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사신다. 그렇게 되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갈 2:20)다. 그리고 자기중심적인 태도가 이타적인 사랑의 생애로 변화된다.

 

| 적용 |

매일 예수님께 굴복하고 그분의 뜻에 의지할 때에 그대는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대합니까?

 

영감의 교훈 :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면 -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속에 거한다면 우리의 감정, 우리의 생각, 우리의 행동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할 것이다. 성화된 마음은 하나님의 율법의 교훈과 일치한다”(사도행적, 563).

 

기도 : 예수님, 저와 함께해 주시지 않으면 저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의지합니다. 저를 붙잡아 주시고 저와 동행해 주옵소서. 그래서 주께서 저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제가 주님의 길을 걸을 수 있게 해 주옵소서.

여섯째날(금)

8월 15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시대의 소망>, 497~505 “선한 사마리아 사람”, 637~641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를 읽어 보라.

 

“우리의 주위에는 동정의 말과 도움의 손길이 요구되는 가련한 자들과 고통당하는 자들이 있다. 동정과 도움이 요구되는 과부들이 있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위탁하신 자로 받아들이라고 명하신 고아들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대가족의 일원(一員)임으로 그분의 청지기가 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에 대한 책임이 있다. ‘그들의 영혼을’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실물교훈, 386~387).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언뜻 보기에 양과 염소의 비유는 행위로 얻는 구원을 가르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시 말해 선행을 많이 할수록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확률이 높아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구원받는 사람들이 놀라는 것을 보면 그들이 공로를 얻기 위해 사랑을 실천했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생이 그분을 믿은 결과라고 가르치셨습니다(요 3:15, 6:40, 47, 11:25~26). 진정한 사랑의 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에서 나옵니다. 이런 행위는 구원의 증거이지 근거가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의 태도로 행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시에 하늘에 들어갈 권리를 얻기 위해 일한다는 사고의 함정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항상 구원의 결과와 수단을 구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➋ 까다로운 직장 동료, 무례한 지인, 은혜를 모르는 이웃 등 단지 신경질적이고 불친절한 ‘원수’를 사랑하는 것도 정말 힘든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해를 끼쳤거나 나와 우리 가족에게 해를 끼치려고 했던 진짜 원수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그런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까?

 

➌ 사람들은 우리의 신학, 교리, 생활방식 등 여러 문제를 두고 논쟁합니다. 그러나 이타적이고 사심이 없는 사랑에 대해서는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타적인 사랑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논증을 초월하는 힘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가 이 사랑을 표현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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