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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과 ‘됨’과 ‘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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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5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42분

 

기억절 :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

 

도입)

믿는 사람 거의 전부는 행함이 얼마나 필요한지 조차도 모르고 행함은 아예 없는데도 그냥 마음이 편하고 좋아서 자기는 하나님을 잘 믿는 줄 알고 살 때가 있다. 심오하고 깊은 과정공부를 많이 하면 할수록 느끼는 것은 제가 기록하고 크고 높은 말씀을 연구하고 배우면 배울수록 제 자신의 지식과 행함의 차이는 점점 벌어지게 되는데 이런 현상을 두고 저는 제 자신의 지식을 줄여서 지식과 행함의 차이를 줄여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나타날 때 지식은 지식대로 더 높고 더 깊은 것을 배워야 행함에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그러나 후자가 옳은 것 같다. 아무리 거부하고 발버둥을 쳐도 결국 많이 듣고 많이 배우고 세월이 지나가게 되면 그 사람 속에 들어가 있는 지식대로의 사람이 되고 조금이라도 자기 속에 있는 지식에 가까워지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모에게 공부하라는 소리, 돈 아끼라는 소리, 조심하라는 소리 .....자라면서 수도 없이 많이 들으면서 때로는 반발도 하며 때로는 더 멀리 도망가는 젊은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는 이구동성으로 부모가 저렇게 잔소리를 해서 나는 더 탈선했다고도 말하는데 세월이 좀 더 지나고 보면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옛날에 들어둔 그 지식대로 자기도 그런 사람이 되어 이제는 자기 자식에게 자기도 그렇게 하고 있으며 습관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고 점점 갈수록 자기 속에 진심을 담아서 그렇게 말하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믿음은 들음에서 생기고 행함도 결국 들음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더 자주 듣고 배우고 행해야 되겠다.

 

연구 범위 : 약 1:23~24, 마 19:16~22, 눅 6:27~38, 롬 8:2~4, 롬 12:9~18, 벧후 1:4.

 

“위대한 블롱댕(Blondin)”으로 더 많이 알려진 장 프랑수아 그라벨(Jean Francois Gravelet)은 밧줄을 타고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넌 것으로 유명하다. 1860년 9월 웨일즈의 왕자는 블롱댕이 뒤에 보조를 받으며 폭포를 건너는 것을 목격했다. 폭포를 건너간 뒤에 블롱댕은 영국 왕자에게 돌아와서 그도 폭포를 건너도록 돕겠다고 제안했다.

왕자는 비록 그 사람의 재주에 대해 익히 들은 바가 있고 방금 그것을 눈으로 목격했지만 블롱댕의 손에 자신의 생명을 맡길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다.

요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보고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적으로 하나님의 존재와 복음의 진리, 재림에 대해 확신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모든 확신에도 우리는 우리를 그분의 손에 온전하게 맡길 준비가 부족할지도 모른다. 진정한 확신은 우리의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이는 야고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행하는 자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정확한 이유이다.

이번 주에 우리는 은혜로 구원 받은 자들에게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지 살펴보려고 한다.

 

*신자들과 반생들이 서로 공부하도록 권합시다.

 

안교 활동반과 교과 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진정한 경건은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사람이 ‘되는’ 것임을 깨닫는다.

➋ 느끼기 :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 온전한 율법을 행하는 자유를 누린다.

➌ 행하기 : 주님을 의지하여 말씀을 ‘행하고’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Part 1.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2.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3.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내가 나에 대해서 너무나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다면 이야기해 보십시오.

❷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자신을 속이는 잘못이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❸ 우리의 교회와 개인의 신앙에 실천이 부족하다면 그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❹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대가 실천하기로 결심하는 행동은 무엇입니까?

 

B. ❶ 교회가 학교라면 이론과 실기의 비율을 몇 대 몇으로 하는 것이 좋을까요?

❷ ‘행위’를 강조하는 신앙과 ‘됨’을 강조하는 신앙은 각각 어떤 단점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❸ 영적인 생활에서 ‘행하는 것’과 ‘되는 것’은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까?

❹ 이 점에 대하여 우리에게 문제점이 있다면 해결 방법은 무엇일까요?

 

결론 :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유혹의 뿌리는 우리 자신의 욕망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죄를 이길 효과적인 무기입니다. 사탄은 죄가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애쓰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할 때, 우리는 그분의 방법이 최상임을 받아들이고 그분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다음 주에 있을 분반에 대하여 다시 안내합니다.

❷ 영적 후견인 관계가 잘 유지되는지 확인합니다.

❸ 분반 계획과 영적 후견인 관계를 위해 기도합니다.

 

첫째 날(일) 너의 원수를 알라

10월 19일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약 1:23~24).

 

교사강해 1)

성경은 세 가지 원수에 대하여 말한다. 그 원수는 세상과 사탄과 육신이다. 그 중에 제일 큰 원수는 내 자신, 곧 육신. 곧, 내 속에 있는 옛사람이다. 베드로는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들은 육신을 죽이라고 말한다. 이 세상은 나그네가 있을 곳이 아니기에 이 세상을 영원한 고향으로 착각하지 말고 이 세상에 속하길 원하는 우리 속에 있는 육체의 정욕을 버리라고 한다. 우리 속의 육체의 정욕은 세상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우리 속의 육체의 정욕은 끊임없이 세상을 그리워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어느 날부터인가 노예였던 애굽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우리의 옛사람(또는 육체의 정욕)은 언제나 세상을 그리워한다. 세상의 쾌락, 안목의 정욕, 육체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한없이 원한다.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이란 표현에서 영혼은 속사람을 말한다. 바울은 거듭난 후의 자신의 정체를 거듭난 자아로 정의하고 있다. 그래서 로마서 7장을 보면 옛사람을 죄로 칭하는 반면 율법을 즐거워하는 속사람을 ‘나’라고 표현한다. 베드로는 속사람을 거스려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욕망을 육체의 정욕이라 부른다. 헬라어로는 “에피쑤미아”이다. 영어로는 Sinful Nature(죄성)라고 한다. 이 정욕은 영원토록 성령의 소욕과 원수이다. 구약의 아말렉 족속과 같이 하나님의 영원한 원수이다. 이 원수가 바로 육체의 정욕, "에피쑤미아"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 원수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매일 면도할 때 그를 본다.” 야고보서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사실이 바로 이것이다. 가장 큰 원수는 우리 자신이다. 구원은 우리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지 상상하기 전에 현재 우리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 알 때 시작된다.

약 1:23~24을 읽어 보라. 여기서 묘사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인가?

자신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이 외모를 개선하기 위해 너무 많은 시간과 돈을 낭비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야고보는 우리가 보고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자신에 대해 더 자세히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마 19:16~22, 26:33~35, 69~75을 읽어 보라. 여기 등장하는 두 인물의 실제 모습과 스스로 생각하는 자기의 모습은 얼마나 비교가 되는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그들에 대해 어떤 사실을 말해 주는가?

젊은 부자는 자신이 계명들을 지키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이전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단순히 법과 규례에 대한 외형적인 동의 이상의 더 심오한 영역으로 나아가라는 다른 종류의 순종을 고수하도록 요구받았다.

베드로 역시 이 젊은이처럼 왜곡된 자아상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확신에 찬 나머지 그는 다른 사람이 넘어져 떠날지라도 자신은 차라리 죽을지언정 끝까지 충성하겠다고 장담했다. 사람이 얼마나 단단히 죄의 손아귀에 붙들려 있는지 모른 채 말이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진정한 영적 상태에 대해 스스로 속고 있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마침내 회심하였다. 그러나 젊은 법관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교훈 : 우리는 자신의 진정한 영적 상태에 대해 철저하게 깨닫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왜곡된 자아상으로 자신을 속일 수 있다.

 

부가적용)

실로 그리스도는 종교의 사슬에 매인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말씀으로 임하셨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언제나 인간영혼의 중심인 마음을 겨냥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여러 방면에서 옳다고 할지라도 영혼이라는 우리의 마음의 중심이 문제가 있어 잘못된 지점에 서있다면 타인에게는 빛처럼 보일지라도 실상 하나님 앞에서는 끔찍한 어두움일 뿐이다. 자신의 겉모습으로 타인을 속일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속임으로써 스스로 속아 살면서도 자신은 아니라는 무지함과 동거하는 것이다. 원수는 바로 나 자신이 되는 것이다. 결국 온갖 종교적 외양을 갖추고 있었던 예루살렘 성의 종교지도자들은 지극히 높은 자에 대한 유일한 참예배자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고 과신한 나머지, 그 교만은 시기증오로 변해 하나님의 아들까지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우리는 내 자신의 욕심으로 인해 그리스도를 매일 같이 우리의 마음에서 내 쫓아내는 자, 곧 내 자신이 그리스도와 원수는 아닌가?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진정한 그대의 모습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심리학에서는 긍정적인 자아상과 높은 자존감의 가치를 강조합니다. 자신을 부정적으로 보는 관점은 대인관계와 학업이나 업무의 성취에 나쁜 영향을 미칩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버림받고 저주받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사랑받고 축복받는 자라는 사실을 깨닫기 바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바라시는 긍정적인 자아상은 죄로 물든 옛 본성을 시인하고 그리스도의 대속과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형성되는 거듭난 자아상입니다. 실체를 모르는 자기 확신으로는 영적 실패만 경험할 뿐입니다.

 

| 적용 |

조용히 자신의 정체를 바라보고 하나님께 그 모습을 정직하게 고백하십시오.

 

영감의 교훈

 

기도

아버지, 거울 앞에 못난 제가 서 있습니다. 저는 불순함과 탐욕과 쾌락과 자기 사랑을 즐기는 죄인입니다. 그런 저를 사랑하시고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구원과 사랑 안에서 저 못난 죄인의 모습을 버리고 오직 예수님만을 닮기 원합니다.

 

둘째 날(월) 행하는 자가 됨

10월 20일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

 

교사강해 2)

사람이 짓는 집이 겉으로 드러난 집의 모양은 비슷하다. 오히려 모래 위에 지은 집이 전망도 좋고 화려할 수 있다. 빨리 짓기 때문에 효율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다. 최소한의 투자로 최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에 지혜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문제는 인생의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 때이다.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이 불어 닥칠 때 인생의 기초를 모래 위에 둔 사람은 여지없이 무너져 버린다. 말씀을 이론적으로 알기는 하지만 그때그때 행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영적인 기초가 약하다. 기초가 약하기 때문에 시련을 견뎌내지 못하고 쓰러져 버린다. 온갖 불신과 두려움, 손해의식과 절망감을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져 버린다. 반면에 말씀을 듣고 한 말씀 한 말씀에 순종하고자 몸부림치며 투쟁한 사람은 그 인생의 집을 반석 위에 세우는 사람과 같다. 반석이 나오기까지 땅을 파려면 얼마나 시간이 많이 걸리는가? 반석에서부터 벽돌 한 장 한 장을 쌓아 집을 짓느라고 고생을 많이 한다. 한 말씀 한 말씀 들을 때마다 내게 걸리는 문제가 없는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회개하고 결단하고 투쟁하느라 시간이 많이 걸린다. 다른 사람은 빨리 외적인 활동을 해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광도 내고 하는데, 이런 사람은 말씀에 순종해서 기초 쌓느라 별로 티가 나지도 않다. 개인적으로 양식 먹고, 소감 쓰고, 기도하고, 내적 투쟁하는 것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다. 당장 큰 역사가 일어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도 못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기초가 튼튼하기 때문에 인생에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끄떡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변의 사람들이 다 무너져 내릴 때 우뚝 서서 믿음의 진가를 발휘한다. 야고보는 또한 사람이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는 자가 되지 않으면 그는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 세상에는 스스로 속는 사람이 많이 있다. 마귀가 그들을 속이거나 미혹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속고 미혹되어 있는 것이다. 야고보가 우리가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라는 말이며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그렇게 살아간다는 말이다.

 

약 1:22을 다시 읽어 보라. 원어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야고보가 단순히 ‘말씀을 행하라’고 말했다면 기별이 어떻게 달라졌겠는가?

야고보는 ‘됨’과 ‘행함’을 결합한다. 그는 그것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를 다른 것보다 더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분리할 수 없다.

우리는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더욱이 ‘되어야 한다’는 뜻의 그리스어 시제는 먼 미래의 어느 시점이라기보다는 현재 우리에게 기대되는 지속적인 순종의 삶을 언급한다.

요점은 우리가 주 안에서 새로운 백성이 되어야 하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것들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규율을 따르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어제 보았던 젊은 부자 법관의 문제점으로 보인다.)

눅 6:27~38을 읽어 보라. 우리가 취해야 하는 행동은 무엇인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 6:27, 30, 36). 불가능한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우리 스스로 하려면 그렇다. 이와 같은 사랑은 죄 많은 인간 본성에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이는 예수님이 서로 다른 종류의 나무마다 다른 열매를 맺는다고 줄곧 말씀하신 이유이다(눅 6:43~45).

갈라디아서 5장에서 바울이 육체의 행위와 성령의 열매를 대조한 것도 비슷한 이치이다(갈 5:19~21, 5:22~23). 우리는 행위에 초점을 맞출수록 더 나빠질 가능성이 높다. 반면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은 사람이 ‘될’ 때 사랑과 순종의 열매라는 완전히 다른 결실을 맺는다.

 

교훈 : ‘됨’과 ‘행함’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의 힘이 아닌 성령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부가적용)

어느 날 스승이 제자에게 질문을 했다. “언제 새날이 오느냐?” 한 제자가 대답을 했다. “동창이 밝아오면 새날이 옵니다” 스승이 “아니다”라고 바로 얘기를 했다. 다른 제자가 대답을 한다. “노고지리가 우지지면 새날이 옵니다” “아니다” 이쯤 되니 이제 아무도 대답을 못한다. 스승이 대답을 한다. “너희들이 창문을 열고 길에 지나가는 사람이 너희 형제로 보이면 그 날이 새날이다” 그렇다. 보는 것은 사실 눈이 아니라 마음이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 하지 않던가. 지난해가 가고 새해가 오는 시간적인 새날이 왔다고 해서 새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졌을 때 비로소 새해가 오는 것이다. 마음의 묵은 땅을 성령의 도움으로 기경해야 새로움으로 볼 수 있다. 성경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다.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펼칠 수 있는 기회요,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과 시간, 건강과 물질, 재능을 우리에게 주셨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지니고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펼치는 선물이요, 사명이다. 우리가 성령의 도움을 받아 살게 되면 우리의 삶에 행함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행하는 것’과 ‘되는 것’ 중에 그대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그대의 의무이거나 따라야 할 규칙이기 때문에 했던 때와 그대가 자신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행동했던 때를 비교해 보십시오. 우리는 마음의 변화 없이 행동을 바꾸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반면 마음의 변화를 고백하면서 행동의 변화는 증명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두 경우 모두 성경이 추구하는 바가 아닙니다. 바람직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성령의 도움으로 마음이 변화되고, 그 마음을 행동으로 나타내는 삶입니다.

 

| 적용 |

‘행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그대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다음 그대는 어떤 행동을 선택하기 원합니까?

 

영감의 교훈

 

기도

아버지, 저는 아직 덜 여문 열매 같습니다. 성령의 감화로 저를 변화시켜 주옵소서.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거하게 해 주옵소서. 오늘 한 가지 작은 일이라도 진실로 제 안에 계신 주로 말미암아 자원하여 행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셋째 날(화) 자유의 율법

10월 21일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5).

 

교사강해 3)

야고보서는 ‘율법을 행하라’고 말씀한다.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약2:12) 여기서 ‘자유의 율법’이 무슨 뜻인가? 율법은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속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의 율법’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우리 인간이, 율법을 행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인간의 죗된 속성은 율법을 절대 행할 수 없다. 그런데 왜 야고보는, 율법을 행하라고 독촉하는가? 그것은 로마서와 배치되지 않는가? 야고보 사도는,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이렇게 설명한다. =자유의 율법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1:25) 우리가 야고보서를 표면적으로만 읽으면, ‘그래, 도를 행하는 자가 되어야지, 듣기만 하면 안 돼. 율법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해. 행하는 믿음을 가진 자가 진짜 신자야!’ (우리 대부분은 이렇게 야고보서를 이해하고 있는데, 즉 야고보서는 ‘행하는 믿음’을 가르친다고 알고 있다.) 이렇게만 느끼시면.. 야고보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야고보서는, 로마서와 똑같은 내용이다. 로마서는 믿음을, 야고보서는 행함을.. 이게 아니다. 둘 다 ‘믿음’이다. 여기서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란 ‘완전하게 된 율법’이란 뜻이다. 그 말은, ‘누군가(예수)가 율법을 완전히 지켜서, 이제 더 이상 마귀의 참소의 근거로 쓰여 질 수 없는 율법’을 뜻한다. 그런데 누가 그 율법을 완전하게 했는가? 완전히 지켰는가? 예수님이시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5:17) 율법을 하나만 어겨도, 다 어기는 것이 되기 때문에, 누군가가 이 율법을 완벽하게 다 지켜야 되는데, ‘내(예수)가 그것을 완전히 지키러 왔다’는 뜻이다. 개역에 번역이 모호하나(완전하게 하려함), 영어 성경에 fulfill (완전히 성취함)을 쓰고 있다. Think not that I am come to destroy the law, or the prophets: I am not come to destroy, but to fulfil. 정리하면,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란, 예수께서 그것을 완전히 지키셨다. 성취하셨다. 일점일획도 다 지키셨다는 것을 말한다. 즉,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신약의 복음을 뜻한다. 그게 야고보서에 나오는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다. 즉, 복음이다. 진짜 율법이 아니다. 약 1:25을 읽어 보라. 그는 율법의 역할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가?

 

야고보는 하나님의 율법은 “완전”하며(시 19:7) 자유의 길(시 119:45)이라고 말하는 시편의 음성을 되새긴다. 그러나 야고보에서 말하는 율법조차 우리를 구원하거나 정결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세계적인 선수의 놀라운 경기를 본다고 해서 그와 똑같이 뛸 수 없는 것처럼 율법은 하나님의 이상을 보여줄 뿐 그 이상을 따르게 하지는 못한다. 그런 이상을 따르려면 우리의 삶 속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필요하다.

롬 8:2, 고후 3:17~18을 읽어 보라. 사망의 도구로서의 율법과 자유와 생명의 길을 보여주는 율법은 무엇이 다른가?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롬 2:13)는다고 확언했다. 그의 말처럼 우리는 우리의 마음속에 율법을 기록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만 율법을 행하는 자가 될 수 있다. 우리가 마음에 기록된 율법에 순종할 때라야 율법은 비로소 자유의 율법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문제는 율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다. 우리는 우리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 잊고 산다. 우리는 계속 구주를 필요로 하는 죄인이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한 우리는 율법의 저주를 들을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는 그분 안에서 자유롭게 된 새로운 사람이 된다(요 8:36, 고후 5:17). 우리는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5:12)는 율법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다.

 

교훈 :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유함을 받고 믿음과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정죄가 아닌 자유를 기초로 율법에 순종할 수 있다.

 

부가적용)

약1:23 누구든지 도(말씀)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여기서 ‘도道’는 로고스, ‘말씀’이다. 그런데 복음을 듣고 행하지 않으면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이, 보고난 즉시 돌아서서 자기 얼굴을 잊어버리는’ 것과 같다고 말씀한다. 이게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행함’이다.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것 로고스를 듣고, 행하지 않는다는 것, 복음이 말씀하는 것은, ‘너희들은 다 죽은 흙이기 때문에, 내가 내려가서 너희들을 살리는 수밖에 없어. 내가 십자가를 지고서 너희들을 살리는 수밖에 없어!’ -이것이 말씀(로고스)의 요약이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듣고서, 우리가 ‘아 그렇군요.’ 라고 인정한다는 것은 ‘예, 저는 죄인 중에 괴수이고, 죽은 자입니다.’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말씀을 듣고서, 그때 당시에는 즉시로 인정을 하는데, 금방 돌아서서, '내가 뭐 그렇게 대단한 죄인이야?' 하면서 복음의 말씀을 잊어버리는 것 이것이 바로,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율법을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약1:23~24절 문맥에 의하면 그렇다. 중요하니까 다시 상기시켜 드린다. 도(말씀)를 듣고 행하지 않는 것은, 말씀에서 ‘하라’ 라고 한 것을, 듣고도 (율법을)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서 ‘너는 죄인이다’라고 지적하는 것을, 말씀을 듣고 난 즉시 돌아서서 ‘왜 내가 죄인이야?’ 하면서 그 들을 말씀을 청동거울에서 본 자기 모습을 잊어버리듯이 즉시로 잊어버리는 것이다. 약1:23~24절 문맥을 자세히 보면 그렇다. (그러므로 야고보서는 로마서와 배치되지 않는다.) ‘도를 듣고 행하지 않는 것’은=‘거울로 자기 얼굴을 보고, 금방 자기 모습을 잊어버리는 것’과 같으며, 반대로 ‘도를 듣고 행한다’는 것은 ‘자기 모습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뭘 실천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즉 자기가 죄인 됨을 인정하고 ‘그래서 저는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죄인 중의 괴수인 것을 자기 스스로 인정하는 것을 뜻한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사는 것.’.. 이것이 도를 행하는 것이다. 죄를 막 지으라는 뜻이 아니라, ‘저는 하나님의 긍휼이 없으면, 존재 할 수도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처지에서 영생은 무슨 영생입니까. 지금 하나님이 저를 멸망을 시키신다 할지라도 아무 할 말 없는, 그런 존재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고 사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한다’ 라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에 듣던 말씀 또 들려주시오~!라고 찬송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돌아서면 금방 우리 자신이 죄인이라는 이 사실을 또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종합하면,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실행하는 자’란? 약 1: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은, 예수님이 다 지켜서 성취하신 율법인데,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 그 하나님의 말씀(복음)을 실행하는 자는, 즉 행하는 자는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라, 자기가 어떤 존재임을 아는 자’ 그가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자다... 라는 뜻이다. 말씀 속에서 계시된 대로, ‘아, 나는 십자가 은혜가 아니면, 도저히 살아날 수 없는 것이구나’ 이것을 깨달은 자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또 은혜로 구원을 얻고 자유하게 하는 율법에 또 얽매여 우리 자신이 의롭게 되었고 또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의롭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하게 하신 율법을 이루신 분은 오직 예수님이시다. 우리는 다만 죄인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를 자유하게 해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사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지키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의 자유를 누린다. 우리는 범죄자가 받는 저주와 억눌림에 다시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죄를 용서 받을 뿐 아니라 새로운 삶을 얻는다. 그 삶 속에서 우리는 율법에 대한 순종을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이미 구원을 얻었고 더 이상 율법의 정죄를 받지 않는다는 깨달음에서 오는 자유로 말미암아 그렇게 한다.

 

| 적용 |

그대가 지금까지 ‘짐’으로 생각했지만 ‘자유’ 안에서 순종하기를 원하는 명령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기도

아버지, 제 힘으로는 바라는 의를 이룰 수 없었습니다. 성령께서 제 마음에 기록하신 자유의 법에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해 주시옵소서.

 

넷째 날(수) 유익한가? 아니면 무익한가?

10월 22일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6~27).

 

교사강해 4)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조사 결과를 보면 한 결 같이 등장하는 기독교인에 대한 태도가 있다. ‘이기적이다’ ‘배타적이다’는 등의 표현이다. 어떤 분들은 이러한 결과가 일부 미성숙한 성도들의 모습 때문이라고 치부하기도 한다. 하지만 비록 일부 성도의 미성숙함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가슴 아프게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 일부에 우리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의 표지(標識), 즉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특징이나 표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에서 은사에 대해 가르친다. 그런데 중간 장인 13장에서 갑자기 사랑에 대해 논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 때문에 일부 학자는 나중에 편집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바울은 아주 논리적이다. 분명 13장은 사랑에 대한 가르침으로 가득 차 있지만 이것은 은사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보여주고자 함이다. 13장에서 바울은 각종 은사를 받은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가장 좋은 길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 운동선수가 아무리 경기를 잘해도 반칙을 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것은 선수만이 아니라 교회와 모든 그리스도인이 새겨야 할 말씀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좋은 은사를 가지고 있어도 좋은 길을 가지 않으면 세상에 유익을 끼칠 수 없다. 그리스도인에게 화려한 언변과 지식, 권력이 있어도 좋은 길이 아니면 선한 영향을 줄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향기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약 1:26~27을 읽어 보라. 그리고 마 25:35~36, 40, 롬 12:9~18과 비교해 보라. 이 말씀들에 비춰볼 때, 그대는 진정한 기독교 신앙을 어떻게 정의하겠는가?

예수님과 야고보 그리고 바울도 이것을 강조하고 있듯이 유익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는 지극히 작은 자를 사랑하고, 시간을 들여 가장 쉽게 소외되는 이들을 찾아보고, 친절을 보여줌으로써 이런 실제적인 방식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예수님의 사랑의 통로가 된다.

“복음을 위한 가장 강력한 논증은 상냥하고 친절한 그리스도인이다”(치료봉사, 470). 엘렌 G. 화잇은 “그와 같은 생애를 하고, 그러한 감화를 끼치는 데는 매 발걸음마다 노력과 자아희생과 수양을 요한다”(상동)고 덧붙인다. 그것은 저절로 되지 않는다. 만약 신앙이 교리에 대한 확신과 설교 청취로만 이루어진다면 그런 신앙은 거의 쓸모가 없을 것이다.

야고보가 26절과 27절에서 사용한 ‘경건’과 ‘경건한’이라는 단어는 ‘현저하게 경건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그와 같은 경건은 즉각적이고 가시적인 결과를 나타낸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차이점을 쉽게 알아차린다.

하나의 확연한 변화는 우리의 언어 선택이다. 공허한 언사, 격한 어조와 몸짓을 사용하는 대신 우리는 우리의 대화가 다른 사람에게 미칠 영향에 더욱 민감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혀에 굴레를 씌워야 한다. 그래야 혀가 길들여지지 않는 말처럼 우리보다 앞서 맹렬하고 거세게 날뛰지 않는다.

 

교훈 : 진정한 신앙과 쓸모 있는 경건은 말이나 지적 확신뿐 아니라 실제적인 사랑과 친절, 봉사의 행위와 태도로 구별된다.

 

부가적용)

조너선 에드워즈 목사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그 원리가 하나라고 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한 성령으로부터 나왔으며, 한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다. 또한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받은 이들이다. 이렇듯 사랑을 행하는 것은 그리스도인 됨을 증명하는 일, 즉 표지이다. 사랑이 곧 그리스도인이 행하는 일이어야 한다. 사랑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은 짠맛을 잃은 소금과 같다. 그 증거가 바로 고전 13:1∼3절에 나온다. 능력 있는 말을 많이 해도 사랑이 없으면 잡음에 불과하다. 놀라운 지식과 이적의 능력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아무것도 아니다. 모든 것으로 구제한다고 해도 유익이 되지 않을 수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순교의 자리에 있다고 할지라도 아무 의미가 없을 수 있다. 이 모습들은 오늘날 우리 가운데 나타나는 모습이다. 교회에서 은사와 이적과 신비한 일들이 벌어진다고 떠들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회의 각 영역 가운데 지식과 권력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많다. 그런데 사람들이 존경하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 행해지는 사회봉사 활동의 약 70%를 교회가 감당하고 있다고 하는데 세상은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 교회를 통해 거룩함을 배우지 못한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간절한 부탁의 말씀이 있다. 마태복음 11:29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겸손히 주님을 배우면 마음에 평안을 얻는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마음을 낮추어 누구에게서든지, 무엇을 통해서든지 배우려는 사람은 그 공동체와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한 사람이 된다. 가르치려는 사람이 유익한 사람이 아니라 겸손히 배우려는 사람이 유익한 사람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의 신앙은 얼마나 쓸모가 있을까요?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또한 야고보는 우리의 사랑과 관심이 가장 필요한 대상으로 고아와 과부를 지목한다. 세속적인 관점으로 보면, 사회에 되돌려줄 것이 없는 자들에게 우리의 자원을 집중시킨다는 것은 이치에 합당치 않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정확히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소외되거나 거부당한 이들을 대해야 하는 방식이다. 우리에게 갚을 수 없는 자에게 돈을 빌려주고, 답례하지 못할 자에게 식사를 대접하며, 우리에게 못되게 구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축복하는 태도는 우리 중에 누가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인지 드러낸다(눅 6:35, 14:12~14, 마 5:44). 바울이 지적하듯이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 재창조된다(엡 2:10).

 

| 적용 |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얼마나 봉사와 섬김의 삶을 실천하는지 돌아보십시오.

 

영감의 교훈

 

기도

아버지, 분명하게 제시된 표준 앞에 부끄러워 고개를 숙입니다. 더 이상 헛된 경건을 가지고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말씨부터 봉사의 생활까지 확연한 변화를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다섯째 날(목) 세상과 다른

10월 23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7).

 

교사강해 5)

경건한 삶을 말할 때 여러분이 쉽게 떠올리는 것은 무엇인가? 외형적인 모습과 종교적인 삶의 실천이 아닌가? 하지만 그러한 것은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들이다.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모습이라면, 기독교 신앙을 초월해서 어디에서든 경건으로 여기는 모습을 만날 수 있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참된 경건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참된 경건은 신앙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26절을 보면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말한다. 바리새인과 제사장과 같은 사람들은 자신들을 경건하다고 여겼다. 율법을 실천하기 위해 애를 썼던 사람들이고, 그 생활 역시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 하고 시간을 정해 기도하는 누가 봐도 신앙인다움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혀를 재갈 먹이지 못했다. 여기서 말하는 재갈이라는 것은 말을 못하게 입을 막는 용도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통제하기 위해서 입에 물리는 재갈을 말한다. 즉 혀를 재갈 먹인다는 것은 그 혀가 주인의 통제를 받음을 뜻한다. 그런데 그 혀를 재갈 먹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자기 본성에 따라서 말을 하지 않겠는가? 가령 눅 18:9절부터 보면 자신을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가 나오는데, 그 내용을 보면 바리새인이 기도할 때 자신의 실천을 자랑하고 높이면서 자신들이 세리나 창녀들과 같지 않음을 감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혀를 재갈 먹이지 않았을 때 나오는 인간의 말한다. 사람이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기준을 분명 갖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준은 거의가 종교적 삶과 말씀의 실천일 것이다. 즉 열심 있는 교회 생활과 착한 일을 앞세워서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타인의 의를 판단하게 한다. 의의 기준이 자기에게 있기 때문에 그 기준으로 타인을 판단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신앙은 저 사람과는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이 타인의 신앙을 무시하고 판단하는 말을 내뱉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혀를 재갈 먹이지 않는 것이다. 주인에 의해 통제되는 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현대 교회는 바리새인을 양산하고 있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항상 강조하는 것이 종교적인 실천과 행함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오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외치는 세리는 사라지고 바리새인만 가득한 것이 현대 교회의 실상인 것이다.

 

약 1:27에서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한가?(요일 2:15~16, 벧후 1:4 참고)

어떤 이들은 세상과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 대부분의 유혹을 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 같다. 물론 그런 생각은 어느 정도 맞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한 한 유혹(특히 저항하기 가장 어려운 유혹들)을 피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우리의 문제와 약점들은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따라다니게 마련이다. 죄의 문제는 외부 요인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물론 외부 요인도 일부 작용하지만 우리 내부, 즉 우리 마음의 요인만큼 크지는 않다. 우리 마음이 바로 실제 전투가 벌어지는 곳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에서 살든지 그러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

또한 어떤 문제를 해결하면 다른 영역에서 문제가 더 심해지는 재미있는 현상도 있다. 예를 들면, 방 한쪽을 치우면 그 옆에 먼지가 더 많아 보인다. 영적인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그대가 예수께로 더 가까이 갈수록 그대의 허물이 그대의 눈에 더 많이 드러나 보일 것이니 대개 이는 그대의 시력(視力)이 더욱 밝아져서 그대의 불완전한 것이 예수의 완전하신 품성에 대조되어 더욱 뚜렷이 나타나 보이게 되는 까닭이다”(정로의 계단, 64).

우리는 여기서 엘렌 G. 화잇이 실제 말하지 않은 것을 말한 것처럼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는 우리가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갈수록 우리가 더 많이 실수하게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른쪽에 있는 영감의 교훈을 읽어 보라.)

진정한 경건은 더 깊은 경험을 얻고 싶은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그 사람을 이끈다(마 5:6). 예수님은 천부의 뜻을 알기 위해 그분과 단둘이 충분한 시간을 보내셨다. 그러면서도 사람들과의 관계를 절대 단절하지 않으셨다.

 

교훈 : 경건을 얻는 길은 세상을 등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을 알고 주님께 나아가면서 더 열심히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부가적용)

아무리 자신을 경건하다고 여겨도 그 혀가 재갈 먹이지 않은 상태의 사람이라면 모두 헛된 경건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경건은 외형적 실천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건을 특별한 행동과 실천으로 생각하지 말라. 경건은 외형적인 것으로 증거되는 것이 아니다. 그럼 경건은 무엇일까? 27절을 보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말한다. 이 말대로 하면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고 도와주면 그것이 참된 경건이라는 것인가? 결국 구제하는 것이 경건이라는 것인가? 당시는 농경사회이기 때문에 땅이 있어야 살 수가 있다. 그런데 고아와 과부는 땅이 없는 자이다. 그러므로 도움을 받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농경사회가 아니다. 땅이 없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 과부라고 해도 돈 많은 사람이 얼마든지 있고, 고아라고 해도 부모로부터 유산을 받아서 어려움 없이 생활할 수도 있다. 그래서 27절의 내용은 단순히 고아 과부와 같은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경건이라는 뜻이 아니다. 신 16장:9절부터 보면 절기에 대한 규례를 말씀하시면서, 성중에 거하는 노비, 레위인, 나그네, 고와, 과부와 함께 즐거워하라고 한다. 이스라엘이 맥추절이나 추수절을 지킬 때는 첫 열매를 하나님께 바치도록 되어 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이 땅을 얻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열매는 땅이 없이는 얻을 수 없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열매를 얻었다는 것은, 그들의 땅이 있다는 것이고 그 땅은 그들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공짜로 얻은 것임을 잊지 않아야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땅이 없이 애굽의 종으로 살았던 것이 이스라엘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곧 종이며 고아고 과부였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나는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신 은혜로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않는 것이 이스라엘다운 모습인 것이다. 이것이 곧 경건이다. 돈 없고 힘없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경건이 아니라 내가 그들과 다를 바 없는 불쌍한 존재임을 아는 것이 경건이라는 것이다. 그럴 때 힘없는 약자들을 불쌍한 마음으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불쌍한 존재로서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을 나누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리새인처럼 외형적인 것을 기준으로 해서 타인을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면서 비교하고 차별하는 말은 나오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참된 경건의 도를 행하는 것이다. 경건을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은 것으로 말씀하는 것도 같은 의미이다. 세속에 물들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이 즐기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본성과 가치관을 따라 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즉 세상이 살아가는 방식을 따라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래방 안 가는 것이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경건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처럼 돈을 힘으로 여기지 않고, 돈이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에 물들지 않는 것이 자기를 지키는 것이다. 세상처럼 살려고 하지 말고 세상에 지지 않으려고 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세상에 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곧 세속에 물들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세상의 경쟁에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은 이기기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것이 아닌가? 이것이 곧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불쌍한 존재임을 잊고 살아가는 것이다. 불쌍한 존재가 아니라 가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이야 말로 세속이고, 이 세속에 물들어 사는 것이 헛된 경건이라는 것이다. 신자의 경건은 자신의 불쌍함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에 감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감사의 마음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증거 되게 되어 있다. 내가 깨달은 은혜와 자비하심이 이웃에게 베풀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참된 경건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의 삶은 세상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습니까? 동시에 어떻게 구별되어 있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그분은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셨다. 그분의 양식은 가난한 자들에게 손을 내밀고, 편견의 장벽을 헐며, 영생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요 4:28~35). 예수님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식사와 생활방식은 주변의 이방 세계와 큰 차이가 있었지만 그들의 습관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혀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그들은 어느 곳이든지 갔기 때문에 복음의 씨가 제국 전체에, 심지어 로마와 같이 타락과 죄악의 중심지에도 뿌려져서 튼튼하게 파종되었다.

 

| 적용 |

그대에게 삶을 세상으로부터 고립시키거나 또는 너무 세상을 따르는 문제가 있다면 어떤 해결책이 필요할까요?

 

영감의 교훈

부족을 느낌 - “부족감이 우리로 하여금 더욱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게로 이끌게 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더욱 고상한 관찰을 하게 될 것이고 그의 형상을 더욱 완전히 반사하게 될 것이다”(정로의 계단, 65).

 

기도

폭풍 가운데 있지만 침몰하지 않는 배처럼, 어둠 가운데 있지만 빛을 잃지 않는 등불처럼, 사막 가운데서도 마르지 않는 오아시스처럼 세상이 아무리 타락해도 세속의 유혹에 물들지 않고 오히려 세상에 희망을 주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여섯째 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10월 24일

 

<정로의 계단>, 59~63 “제자가 되는 증거”를 읽어 보라.

 

“이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위대한 도덕경이다. 인간은 자신의 말과 정신과 행동을 하나님의 말씀과 비교해 보아야 한다”(화잇주석, 약 1:23~27).

 

“사람을 순종의 책임에서 벗어나게 하기보다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순종을 표현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은혜의 참여자가 되게 하는 것은 믿음, 오직 믿음뿐이다”(정로의 계단, 60).

 

“하나님은 예수께서 인성을 취하고 하셨던 일을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도 할 수 있기를 바라신다. 그분의 능력을 통하여 우리는 구주께서 사셨던 순결하고 거룩한 생애를 살아야 한다”(치료봉사, 425).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가급적 세속적인 공간을 떠나는 게 좋다는 말이 있지만, 왜 그것이 죄와 유혹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까? 모든 종류의 유혹에서 벗어나려면 얼마나 멀리 가야할까요? 우리가 어디에 살든지 죄와 유혹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➋ 과거에 경찰이 범죄 혐의가 있는 자들의 사무실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건물 주변에 깔린 맹견들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경찰은 밤마다 그 맹견들에게 햄버거를 먹였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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