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총론(보스턴교회), 제1과 주의 형제 야고보(라스베이거스- 안미정,최수민,최종오)
페이지 정보
본문
교과해설이 빗나갔다.
교재 없이 설교를 한 결과다.
순수하게 한글로 된 성경을 보면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이다.
“한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 마 12:47
그런데 교과의 저자는 요셉의 전처의 자녀라 했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요셉이 마리아가 아닌 이전의 혼인관계에서 낳은 아들들이었을 것이다.”
p10(1과 첫째 날(일)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
However, the fact that Jesus entrusted the care of His mother to John, the beloved disciple (John 19:26-27), suggests that His brothers were not Mary's own children but the sons of Joseph by a previous marriage.
예언의 신은 교과의 저자를 지지한다.
“이런 모든 것이 그분의 형들을 불쾌하게 하였다. 예수님보다 손위인 그들은 예수께서 그들의 지도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시대의 소망, 87
방송을 내보내기 전에 이 사실을 발견했다.
예언의 신을 신봉하는 나로서는 당연히 평소에 하던 대로 해설의 내용을 예언의 신에 맞도록 다시 제작하여 내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이 문제에 대한 가톨릭의 주장 때문이었다.
[예수께 형제와 자매가 있었느냐 하는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매우 실제적인 문제다. 신앙 안에서 양육되는 가톨릭 신자는 누구나 부정적인 의미로 대답할 것이고, 반대로 프로테스탄트 신자는 성서에서 출발하여 긍정적인 답변을 할 것이다. 가톨릭 신자는 마리아를 “평생 동정이신” 분으로 공경하는 전승에 호소할 것이고, 프로테스탄트 신자는 빈번하게 예수의 형제들과 자매들에 대해 말하는 복음서들을 신뢰할 것이다. 그 결과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반성서적인” 가톨릭 전승을 거부하고 있으며, 우리가 살아가는 교회 일치시기에 이러한 대조는 고통스럽고도 불유쾌한 일이다.][경향잡지, 1993년 5월호]
별거 아니게 보이는 이런 문제가지고 가톨릭교회에서 불유쾌하게까지 여길 필요가 있을까?
위의 인용문이 문제를 파헤치고 싶은 동기를 부여했다.
‘예수님의 형제’ 설이 아닌 ‘마리아의 평생 동정녀’ 설에 초점을 맞추어서..
‘예수님의 형제설’은 몰라도 ‘마리아의 평생 동정녀설’은 ‘삼위일체론’과 맞먹을 만큼 중요한 교리문제이다.
가톨릭이 기독교냐 아니냐를 구분 짓는 기준이 될 정도로.
교과의 저자가 언급한 ‘예수님이 마리아를 형제들에게 맡기지 않고 요한에게 맡겼기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형제들은 그분의 친형제들이 아니었다’라는 이야기는 사실 가톨릭 신자들이 ‘마리아의 동정녀’ 설을 지지하기 위해 만들어낸 여러 가지 추정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이쯤에서 궁금한 것이 하나 생겼다.
신학자인 저자는 이 부분에 대한 예언의 신의 언급을 정말로 믿은 것일까?
아니면 재림교인이기에 자신의 의견과 상관없이 예언의 신을 무조건 따라야만 했을까?
“일 것이다(suggests)”라는 확신이 아닌 추측으로 얼버무려 마치는 말에 이 문제에 대한 저자의 진의에 대해 궁금증이 유발되었다.
짐작되는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논란의 여지가 있는 방송을 그대로 내보냈다.
옳고 그름을 가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예수님과 성경의 인물들, 종교개혁가들과 원조 재림교인들이었다면 반드시 그렇게 했을 행동,
즉 의문이 가는 중요한 진리에 대하여 고민하며 탐구해보려는 의도로 그렇게 한 것이다.
JLBABC는 단순히 지식만을 전달하기 위한 방송이 아니다.
초대교회와 종교개혁 시대의 정신을 근본으로 삼아 깊이 있고 영감적인 명상과 사고를 통해 석고화 된 기독교인의 지력을 역동적으로 전환시키려는 것이 JLBABC의 진정한 존재목적이다.
평범한 신자들보다는 이 문제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훨씬 많이 보유하고 있을 2014년 4기 교과 ‘야고보서’의 저자.
수많은 시간과 정성을 투자하며 일궈냈을 그의 정서와 지식의 밭에 잠시나마 입장할 수 있음이 기쁘고 행복할 따름이다.
분명 오래 전, 이 문제의 종착역에 이미 도착해 이제 막 기차를 탄 학도들을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며 팔짱끼고 서있을 그의 자상하고 인자로운 모습이 눈에 선하다.
<총론 방송듣기>
야고보서(미국 보스턴 교회)
http://www.podbbang.com/ch/6532?e=21499141
<제1과 주의 형제 야고보>
안미정, 최수민, 최종오(라스베이거스)
http://www.podbbang.com/ch/6532?e=21499142
<제1과 주의 형제 야고보 PDF 파일>
http://www.podbbang.com/ch/6532
- 이전글야고보서 그리고. 믿음 14.10.02
- 다음글제2과 완전하게하는 믿음 (파워포인트 용) 14.09.3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