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과 행동하는 믿음(교사 참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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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과 행동하는 믿음
11월 8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27분
기억절 :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도입)
야고보서에는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온전케 함이라. 영혼 없는 믿음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 너희가 선을 행할 줄 알고도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불교와 같이 산 속에서 명상하고 앉아 있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종교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내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셔서 내 감정의 의식구조, 행동 등 내 전체가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생활하는 것입니다. '프랭클린'이라는 사람이 말하기를 "일하는 농부는 앉아있는 신사보다 존귀하다"고 하였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이 말하기를 "최대의 행운은 자신의 전 능력을 들여서 일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가나안 농군 학교에서 불교의 승려가 보름동안 훈련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교육을 받은 후 이 승려는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그는 앉아만 있는 부처를 부수고 호미를 들고 서있는 부처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서 행위의 종교입니다. 서양 격언에 "나태는 신자의 무덤이다"고 하였습니다. 즉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죄를 행하는 것입니다.
연구 범위 : 약 2:14~26, 롬 3:27~28, 딛 2:14, 고후 4:2, 롬 4:1~5, 수 2:1~21.
그는 성공적인 의사이자 출석 신도 수백 명의 잘나가는 교회의 장로였다. 그는 교회의 큰 사업에 필요한 중요한 기부자였으며 그의 관대함은 다른 이들의 헌신을 이끌었다. 그 의사는 훌륭한 설교자이기도 했다. 목회자가 부재중일 때 그가 설교를 맡으면 모든 사람이 신학적으로 심오하고 감동적이며 영적인 기별을 기대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모든 것이 드러났다. 어느 안식일에 그가 교회를 결석한 것은 많은 사람의 생각처럼 휴가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해변이 내려다보이는 콘도에서 기분 전환용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그의 침실에 수십 개의 음란 비디오 영상과 잡지가 있었다는 것이다. 교회는 충격에 휩싸였고, 특히 그를 본받고 싶은 인물로 존경했던 젊은이들은 크게 실망했다. 물론 우리는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맡겨야 하지만 이 의사의 행위는 믿음의 진정성에 대해 의문을 불러일으킬 만했다.
요지는 무엇인가?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지만, 믿음과 신앙생활 속에 나타나야 할 행위를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 이것은 야고보가 상술하고 있지만 많은 사람이 오해하고 있는 핵심 진리이다.
*교과 토의 시간은 믿음과 생각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안교 활동반과 교과 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선행은 진정한 믿음의 자연스러운 결과임을 깨닫는다.
➋ 느끼기 :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약속을 간직하고 구원의 믿음 안에서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분의 말씀을 의지함에서 비롯되는 확신을 경험한다.
➌ 행하기 : 우리에게 그분의 뜻을 행하도록 믿음과 성령에 이끌리는 순종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재창조의 능력과 기적을 받아들인다.
Part 1.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2.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3.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운동이 효과적인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해 봅시다.
❷ 왜 우리의 믿음은 반드시 행위(실천)와 연결되어야 합니까?
❸ ‘아브라함’과 ‘라합’은 행동하는 믿음에 대해서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준다고 생각합니까?
❹ 행동하는 믿음의 예로 우리가 실천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B. ❶ 확신이 있어서 행동으로 옮겼기 때문에 좋은 결과를 얻었던 경험이 있습니까?
❷ 약 2:19에서 말하는 ‘마귀의 믿음’이란 어떤 믿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까?
❸ ‘율법의 행위’와 ‘순종’과는 어떤 차이점이 있습니까?
❹ 믿음이 더욱 온전해지려면 우리에게 어떤 순종이 필요한지 이야기해 봅시다.
결론 : 우리는 우리의 행위로 절대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말과 행실이 병행되어야 하는 것처럼 믿음은 행실로 증명됩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지난주 분반의 경험을 함께 토론합니다.
❷ 정식으로 분반을 시작할 날(12월 초)을 정하고, 교사(리더)와 반장(예비리더)을 확정합니다.
❸ 분반 계획과 새로운 교사(리더)와 반장(예비리더)을 위해 기도합니다.
첫째 날(일) 죽은 믿음
11월 2일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
교사강해 1)
설원이라는 중국책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여우는 맹수지만 의심이 많아서 머뭇머뭇하여 실천하는 일이 적은데, 그렇다면 벌이나 반딧불이 독을 쏘는 것만 못하다" 이 말은 헛된 이론만 숭상하고 실상이 없는 것은 시원치 않은 사상과 말로 실행한 것만 못하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줄줄 외우고 형편에 따라 잘도 인용하면서 실제 행동을 보면 한심한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여우는 조그마한 벌 한 마리 만큼도 대접을 받지 못 한다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그에게는 반드시 행함이 뒤따른다(약 2:14). 그렇지 않다면 그의 믿음은 뭔가 잘못되었고, 결국 헛것이다(약 2:20). 야고보가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듯이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생명 없는 죽은 신앙이라고 말합니다(약 2:15-17). 단순히 지식적 동의는 귀신들도 가지고 있습니다(19, 눅4:34). 진짜 믿음이라면 사탄이 쪼아대는 소리와는 달라야 합니다. 행함으로 믿음을 나타내야 합니다(18). 야고보는 여기서 구원을 받기 위한 행위를 말하고 있지 않다. 이미 믿음 안에 들어온 자가 그 구원을 어떻게 증거하며, 성취하며, 자신 안에 이루어진 구원을 드러내며 살 것인가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구원 이후의 행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마7:16) 그 사람의 열매(행위)로 그를 안다. 정말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은 진리요, 성경이 일관하게 선포하는 구원의 복음입니다.
우리는 위의 말씀을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맥락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약 2:15~17을 읽고 롬 3:27~28, 엡 2:8~9과 비교해 보라.
행함이 없는 믿음. 약 2:15~16은 이런 종류의 유사 믿음에 대한 생생한 실례를 제시한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야고보서의 순종은 관계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교회 안에서 도움이 필요한 형제자매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까?
하나님은 형제와 자매를 돕도록 우리에게 수단을 제공하시는데 우리가 그냥 “평안히 가라 하나님이 주시리라”고 말할 수는 없다.
물론 필요는 끝이 없고 우리가 그 모든 것을 다 충족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소위 ‘한 사람의 힘’이라는 원칙이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손과 발이다.
그래서 한 번에 한 사람을 도울 수 있다. 사실 그것은 대체로 예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었다. 막 5:22~34에서 죽어가는 딸을 둔 아비가 예수님께 도움을 호소하였다. 그때 한 여인이 그분께 다가와 옷자락을 만졌다. 치유가 이루어져야 예수님도 계속 길을 가고 그 여인도 행복하게 그곳을 떠날 수 있었다. 물론 예수님은 그녀에게 육체적인 치유 이상의 것이 필요함을 아셨다. 그래서 주님은 그녀가 자신이 받은 것처럼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함을 깨닫게 하시려고 멈춰서 그녀에게 시간을 할애하셨다. 그런 다음에야 그분은 우리가 약 2:16에서 볼 수 있는 말씀을 하셨다. “평안히 가라”(막 5:34). 야고보서의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은 실질적인 의미가 있는 인사였다.
도움이 필요함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믿음을 행사할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믿음은 점차 약해지고 서서히 죽어간다.
교훈 : 행함으로 믿음을 실천할 기회를 놓치면 믿음은 약화되고 사라진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으로서 구원과 거리가 멀다.
부가적용)
어느 힌두교도가 기독교로 개종하여 남편으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안 선교사는 그 여인에게 남편이 화를 낼 때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글쎄요, 저는 남편을 위해 더 좋은 음식을 만들고, 남편이 불평할 때 면 마루를 더 깨끗이 닦고, 남편이 퉁명스럽게 말하면 더욱더 부드럽게 대답하지요. 선교사님, 저는 제가 크리스천이 된 후로 더 훌륭한 아내와 어머니가 되었다는 것을 남편에게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진실하게 믿는 여종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여종의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여종의 어떤 행실을 보고 진실된 신앙인임을 아십니까?" 이 말을 듣고 주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아이가 방을 깨끗이 청소하는 것만 보아도 그녀가 진실한 신앙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딤전4:2, 벧전1:15, 2:12)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의 믿음은 점점 강해집니까? 아니면 점점 약해집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왜냐하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그런 믿음은 이미 죽은 믿음이라고 더욱 적나라하게 설명한다. 믿음이 살아있다면 행함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죽어있는데 어떤 좋은 결과가 있겠는가? 14절 끝에서 야고보는 행함이 없고 쓸모없는 이런 종류의 믿음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한다. 원문의 표현은 번역보다 훨씬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야고보는 우리가 분명하게 ‘아니요’라고 대답하기를 기대한다.
| 적용 |
그대가 믿음을 가지고 지금 도와야 할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를 어떻게 돕기로 결심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기도
아버지, 제 앞에 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비록 제게 큰 힘은 없으나 제게 주신 믿음을 활용하여 작은 일이라도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이 순간 제 손이 주님의 손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둘째 날(월) 구원하는 믿음
11월 3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약 2:18).
교사강해 2)
국민일보의 "역경의 열매"에 나오는 보드만여사의 이야기는 깊은 감동을 줍니다. 35년간 다섯 명의 한국인 자녀를 입양하여 성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중의 하나는 심장병을 앓는 아이였고 또 하나는 뇌성마비에 간질의 장애를 가진 소녀여서 25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밥 먹는 것과 화장실 가는 것을 돌보아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입버릇처럼 한국교회의 기적적인 성장과 세계선교를 위한 한국의 사명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나라를 마지막 제사장 나라라고 자랑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고 있습니까? 지금 한국의 크리스천가정에 뇌성마비소녀를 입양해 달라고 공문을 보낸다면 과연 몇 가정에서 그것에 동의할 것입니까? 가수가 무대 위에서 테이프를 틀어놓고 입만 벙긋벙긋 하는 것을 립싱크라고 합니다. 주로 격렬한 춤을 추는 댄스그룹가수들이 립싱크를 사용하는데 외국에서 립싱크는 관객을 우롱하는 용서받지 못할 사기행위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요즈음 컴퓨터 녹음기술로 잘된 부분만 짜집기를 하고 음색과 음정까지도 다듬어서 완성해 낸 한 개의 테이프를 공연 때마다 틀어놓고 입만 벙긋거리는 불공정행위를 서슴지 않습니다.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강대국의 압제와 전쟁의 고난을 기도로 극복해 가면서 성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어느 나라에 가보아도 한국이 잘 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 지금에 와서 한국교회는 말로만 사랑하는 립싱크의 자기기만에 빠져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운 생각이 듭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마지막시대의 제사장 나라보다는 오히려 선한 사마리아인의 나라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실 것임에 틀림없습니 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3:18)
약 2:18을 읽어 보라. 야고보의 요점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행함으로 믿음을 나타내는가?
여기서 야고보는 가상의 반대자를 등장시키는 평범한 수사적 기교를 사용한다. 이 경우에 반대자는 우리가 믿음이든 행함이든 하나만 있으면 상관없다는 식으로 그 둘을 분리시키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야고보가 밝히려는 핵심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상응하는 행함이 없다면 믿음으로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18절).
아무런 믿음이든지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믿음, 즉 구원하는 믿음의 특징적인 요소는 선한 행위이다. 역으로 행함도 믿음에서 비롯돼야 선한 행위이다. 믿음과 행함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동전의 양면처럼 한쪽은 다른 한쪽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동전처럼 한쪽은 앞면이고 다른 한쪽은 뒷면이다. 믿음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그에 상응하는 행함이 따른다.
엡 2:10, 살전 1:3, 딤전 5:25, 딛 2:14에서 행함에 대한 바울의 태도를 살펴보라. 선한 행위가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바울이 선행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반대했던 것은 구원의 수단으로서의 선행이었다(갈 2:16 참고). 실제로 바울은 율법의 행위에 의지하여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들은 저주 아래 있으니 율법을 준수함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노력했으나 정말 율법을 준수하는 데 성공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갈 3:10). 순종은 오직 성령의 선물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교훈 : 믿음 없는 행함으로 구원 받을 수 없는 것처럼 행함 없는 믿음도 존재할 수 없다. 진실한 의미에서 둘은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부가적용)
18세기 말고 19세기 초에 교회에 큰 피해를 입혔던 “샌드만“이라고 불리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를 추종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는 믿음이란 단지 사람의 지식을 발겨주는 것일 뿐 다른 것이 아니라고 가르쳤고, 로마서 10:9절의 말씀을 잘못 사용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난 이 모든 것을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며, 그렇게만 한다면 만사가 형통하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다음과 같이 진술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이것이 바로 그의 가르침이었는데, 그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옳은 것으로 믿도록 설득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사람들은 자신들의 감정이나 마음 그리고 의지의 문제에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단순히 지적인 문제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의 굴레를 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이와 유사한 가르침들이 있음을 유의해서 구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이 만약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분에 대한 전제 혹은 지적인 동의 이외에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낮을 따라 밤이 오는 것처럼 그것도 따릅니다. 당신이 진정 주님을 믿는다면 당신에게 그분은 보배이며 당신은 그분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주님을 향한 애정이 포함되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믿음에는 감정이 포함됩니다. 단순히 감정만 있어서는 안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감정이 아예 없다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이 움직여야 하며 당신은 회개와 기쁨의 눈물이 없이는 오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에 당신의 확신에 의해서 당신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감정주의(emotionalism)는 항상 피해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금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의지역시 포함되어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당신이 만약 세상적인 삶을 여전히 살고 있으면서도 당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쓸모가 없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경험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여전히 세상적인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외치는 자들이 있다는 점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것이니라”(약2:26). 시편기자는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시97:10)고 말합니다. 당신이 악을 미워함이 없이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함께 발생합니다. 당신은 악을 떠나 그것으로부터 돌아서야 합니다. 제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에 따라 살았습니다. 그 믿음은 그들의 견해와 성품을 바꾸어 놓았으며, 그들의 생활을 하나님의 뜻과 일치시키게 하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추방과 돌로 침과 매 맞는 일과 투옥을 당하였으며, 믿음을 저버리기보다는 죽임을 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사도 7:58-60; 8:1; 14:19; 16:22; 고린도 전 6:9-11; 에베소 4:22-24; 골로새 4:3; 빌레몬 9, 10) 기원 56년경에 태어난 유명한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는 그리스도인들이 “날이 저문 뒤 밤을 밝히기 위한 수단으로 불길에 싸여 화형을 당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연대기」(The Annals) 15권 44항.
로마의 속주인 비티니아 폰투스의 총독이었던 소(小)플리니우스와 트라야누스 황제가 주고받은 서신에는 폰투스의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시험을 더 겪었는지를 알려 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플리니우스는 기원 112년경에 폰투스에서 쓴 편지를 통해 그리스도교가 “전염병”처럼 퍼져 나가면서 성별이나 나이, 계층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을 위협하고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플리니우스는 그리스도인으로 고발된 사람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부인할 기회를 주었으며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은 처형시켰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저주하거나 신들 또는 트라야누스의 형상에게 하는 기도를 암송하는 사람들은 모두 풀어 주었습니다. 플리니우스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그러한 일들을] 하지 않는다”고 인정했습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혹시 행함 없는 믿음 또는 믿음 없는 행함 중에 어떤 문제점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길가의 한 무화과나무를 꾸짖으신 적이 있었습니다. 이유는 잎이 무성한 데 반하여 열매는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나무는 결국 말라 죽었습니다. 이는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그것의 능력은 부인했던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실물교훈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행함으로 나타나지 않거나 행함이 믿음과 결부되지 못한다면 그 믿음과 행함은 열매 없이 말라 죽는 나무와 같습니다.
| 적용 |
위의 문제점이 있다면 그대는 주님께 어떤 도움을 구해야 할까요?
영감의 교훈
논쟁할 수 없는 주제 - “만일 자신의 선한 행위 중 어떤 것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면, 구원은 오로지 한 사람의 죄인으로서 그가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믿기 때문에 받은 은혜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완전히 값없는 선물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는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자신의 선한 행실 안에 있는 타락한 인간의 공로로는 자신을 영생으로 이끌 수 없다는 문제가 해결되는 순간 이 모든 논쟁은 끝이 난다”(믿음과 행함, 20).
기도
결실 없는 나무 같은 저를 오래 참으시고 거름을 주며 열매 맺기를 기다리시는 주님께 저의 연약한 믿음의 팔을 내밉니다. 제 믿음에 생명력을 부어주옵소서. 그래서 아름다운 열매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자녀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셋째 날(화) 마귀의 믿음
11월 4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
교사강해 3)
신자라면 누구나 하나님은 한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두고 믿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귀신도 하나님은 한분인줄을 알고 심지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떨기까지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귀신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떤다면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자신을 능히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 정도라면 귀신의 믿음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하나님은 한분이라는 말은 하지만 하나님이 두려워서 떠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지 않습니까? 즉 어찌 보면 오히려 귀신의 믿음보다 더 못한 것이 오늘 우리들의 믿음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이 한분인 것을 알고, 두려워서 떤다고 해도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그러한 수준을 믿음으로 간주한다면 결국 귀신들도 천국갈 수 있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에 분명 하나님이 한분이라는 것을 알고 두려워하는 것으로는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귀신이 하나님을 알고 두려워한다고 해도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귀신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멸망 받아야 할 더러운 존재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아무리 말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죄인이라는 고백을 한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과연 하나님의 긍휼이 있는가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또 그렇게 고백하니까 신자라고 쉽게 판단하지 마시고, 죄인으로서 죄인의 모습이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죄인의 모습이 없이 죄인이라고 해봐야 그것은 하나님을 알고 두려워하는 귀신의 믿음과 다를 바 없는 수준입니다. 즉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죄인으로서 죄인의 모습이 있다면, 나타나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야고보가 말한 사람에 대한 구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외적인 조건은 절대로 구별의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외적인 기준을 적용해서 괜찮은 사람을 세웠다고 해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이라는 선언을 받기 때문입니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모두가 동일한 죄인입니다. 그래서 외적인 기준을 본다는 것은 죄인이라는 인간의 본질을 생각지 않는다는 것이고, 죄인이라는 인간의 본질을 생각하지 않으면서 아무리 죄인이라고 고백해봐야 그것은 그냥 말이지 신앙은 아닌 것입니다.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생각해 보면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은 실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당연한 결과며 열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신자가 실천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외적인 조건으로 사람을 구별하지 말라는 것은, 인간의 의지와 열심만 있으면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행함은 의지와 열심에 의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내 속에 세상의 것들이 가치 있게 보이지 않는 눈이 있을 때, 아무리 돈 많고 권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생명의 믿음이 없다면 죽은 자에 불과할 뿐으로 여기는 눈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 사람을 구별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알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죽음을 경험했을 때 맺어지는 행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 따로 행함 따로가 아니라 믿음이 곧 행함이고 행함이 곧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행함의 유혹을 많이 받습니다. 착한 일을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복을 주실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행함을 만들어서 하나님의 복을 받고자 하는 것이 곧 사단의 유혹인 것입니다. 약 1:10-11절에서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라고 합니다. 이는 세상의 영광이라는 것이 풀의 꽃처럼 잠시 후면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는 교회라면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차별이 없는 것이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인 것입니다.
행함이 없다면 믿음의 진정성을 증명할 남은 방법은 정통성에 호소하는 것이다. 우리가 옳은 것을 믿고 있다면 믿음이 있다는 뜻이지 않는가?
고후 4:2, 딤전 2:4, 약 5:19~20, 벧전 1:22, 요일 3:18~19을 읽어 보라. 이 성경절들은 진리를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다고 말하는가?
물론 진리에 대한 지적 정보도 나름의 중대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런 지식만으로는 한 사람이 구원의 믿음을 가졌는지를 증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약 2:19은 진실한 믿음에 대한 거짓 개념을 어떻게 경고하는가?
신 6:4은 구약에서 믿음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진실을 표현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신 6:4). ‘쉐마’로 알려진 이 성경절은 유일신에 대한 믿음을 간명하게 요약한다. 성경의 모든 가르침이 이 근원적인 진리에서 흘러나온다.
하지만 마귀들도 이 진리를 믿는다. 그들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들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 두려워 떤다. 예수님과 대면하여 그들의 포로에게서 나오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도 그랬다(막 3:11, 5:7).
우리의 행동 방식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지적 믿음은 쓸모가 없다. 실제로 그것은 거짓 교리와 거짓말로 우리를 기만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마귀들이 가진 믿음과 동일한 믿음이다.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했던 것처럼 마귀들은 그들의 포로가 부정하고 의롭지 못한 행동을 버리지 않으려는 욕망을 발판으로 기만을 믿도록 선동할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딤전 4:1).
교훈 : 마귀도 하나님에 대한 지적 믿음은 있다. 삶과 행위로 표현되지 않는 믿음은 마귀의 믿음과 같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는 믿음이다.
부가적용)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약 2:18)고 말합니다. 행함으로 믿음을 보인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해서 자신의 믿음을 보여주겠다는 뜻이 아니라 믿음으로 인해 맺어지는 열매를 보고 믿음이 무엇인가를 알아라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살아있습니다. 생명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믿음이란 많은 활동을 말하지 않습니다. 흔히 교회가 활동하는 것이 없을 때, 즉 조용하고 잠잠하다고 여겨지면 교회가 힘이 없다고 하기도 하고, 죽었다고 하기도 합니다. 즉 교회가 힘이 있고 살아있는 증표를 여러 가지 일에 활동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교회는 자신들이 게으르지 않고 살아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항상 부지런히 활동해야 하는 짐을 갖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몸의 활동의 여부로 살아있음을 느낀다면 그 믿음은 몸이 약해지거나 병이 들거나 노쇠해지면 큰 낙심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아무것도 못하면 믿음이 약해진 것으로 여기지 않겠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믿음은 그 열매가 실천으로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긍휼로 맺어집니다. 긍휼이라는 열매가 믿음을 증거하는 것이고, 긍휼의 열매는 사람을 구별하지 않는 것으로 그 실체를 드러내고 보여주게 됩니다. 신자는 늘 교회에서 이것을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에 함께 모이는 사람을 무엇을 기준으로 대합니까? 친한 사람이 있고 덜 친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미워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무엇이 신자의 관계를 그렇게 만듭니까? 믿음이 없는 육의 생각이 신자의 관계를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믿음의 길로 가도록 만듭니다. 그것이 믿음의 능력입니다. 천국을 소망한다고 하면서 위엣 것이 아니라 여전히 세상의 것을 소망하는 길에 서 있다면 과연 천국을 소망하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가신 고난의 길은 어떻게든 피하려고 한다면 과연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보면 행함은 없이 다만 나의 생각과 느낌만으로 예수를 말하고 믿는 것으로 여겼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열매는 없는 잎만 무성한 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무화과나무가 열매 없음으로 인해서 저주를 받아 말라 죽은 것처럼 저주에서 나를 구출할 수 없는 죽은 믿음을 믿음으로 여기고 살아온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길이 그러한 길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약 2:20절을 보면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라고 말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왜 헛것입니까? 성경은 세상에서 하는 모든 것을 헛된 것으로 말합니다(전 1:14). 이유는 세상에서의 어떤 일도 죄인을 생명으로 구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은 해 아래서 오직 하나님의 긍휼뿐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세상에 남겨 놓은 십자가의 의로움만이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 버리고 생명에 있게 합니다. 그래서 헛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긍휼이고 십자가입니다. 그러면 신자에게 있어야 할 믿음은 무엇입니까? 결론은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긍휼이 있는 믿음입니다. 긍휼을 행하라는 것이 아니라 긍휼이 내게 있는가를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구별하는가의 여부로 드러납니다. 혹 여러분에게서 사람의 외모로 구별하는 것이 있다면 긍휼이 없이 하나님을 말하고 죄인임을 말했다는 증거입니다. 그것이 헛된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 필요할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알고 긍휼을 안다고 여기고 지나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깊이 들여다보고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를 다시 묵상하십시오. 십자가를 안다고 여기는 것이 문제입니다. 머리가 아니라 내 심령에 살아있는 십자가인지 생각하시고 진심으로 심령에 살아있는 십자가로 남기를 구하십시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우리의 믿음이 옳다.’는 주장에는 어떤 한계가 있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믿음은 삶 속에서 증명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하는 믿음이 아니라 마귀의 믿음이다. 그러한 믿음이 마귀를 구원하지 않을 것처럼 우리도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
| 적용 |
우리가 믿고 있는 진리 중 그대가 생활 속에서 증명하기로 결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기도
그 아버지, 우리가 옳은 것을 믿을 뿐 아니라 옳은 일을 행하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원수가 증오하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 믿음을 가진 자가 되게 해 주옵소서.
넷째 날(수) 아브라함의 믿음
11월 5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 2:21).
교사강해 4)
믿음은 우리의 행함을 더함으로써 완벽해지고 믿음다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행함은 믿음의 증거물도 열매도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항상 얘기하지만 믿음의 증거물, 열매라면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맺어지는 것이기에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성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대개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믿음의 행위, 증거물들이라는 것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믿음에 의한 열매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설사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고 권능을 행한다고 해도 역시 믿음의 증거물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마 7:21-23절에서 그러한 권능 행하는 사람들도 마지막 때 주께로부터 ‘모른다’는 주님의 부인을 받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부인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행함을 믿음의 증거물로 내어 놓는다면 그것이 곧 믿음에서 떠나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믿음은 행함으로 말미암아 증명되고 증거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행함 자체를 거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다만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고, 그 행함으로 우리의 행함을 부인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즉 믿음에 의한 참된 행함을 앎으로써 우리의 행함 자체가 거짓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야고보는 아브라함과 라합의 예를 들어서 그들의 믿음도 행함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여김 받은 행함은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믿음을 인정받기 위해서 아들을 죽여야 합니까? 아무도 믿음 때문에 아들을 죽이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가 아들을 바치는 것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내세워서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시는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은 아브라함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삭을 다시 살려주실 것이라는 부활의 믿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는 믿음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게 함으로써 이삭을 바치도록 했던 것입니다. 이삭이 죽으면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하는가? 라는 걱정은 아브라함의 소관이 아니었습니다. 약속하시고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은 어떤 일이 있어도 약속을 성취하실 것임을 믿은 것입니다. 즉 이삭이 죽는다고 해도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것을 믿은 것입니다. 이 믿음이 이삭을 바치는 행위로 나아가게 한 것입니다.
약 2:21~24을 읽고 롬 4:1~5, 22~24과 비교해 보라. 이 말씀들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칭의는 무엇에 기초해 있는가?
흥미롭게도 야고보와 바울 모두 창 15:6을 인용하지만 각자 다른 결론에 도달한 듯이 보인다. 야고보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반면 롬 4:2에서 바울은 아마도 그럴 가능성을 명백하게 부인한 것 같다(24절과 비교).
그러나 로마서 4장 전후의 문맥은 의롭게 되기 위한 할례의 필요성 여부와 관련이 있다. 즉 이방인이 구원을 받으려면 유대인이 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다(롬 3:28~30). 바울은 할례를 받은 아브라함의 행위가 아니라 그의 믿음을 칭의의 기초로 보았다. 왜냐하면 그가 할례를 받기 전에 먼저 믿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후에 내적 믿음의 외적 징표로 할례를 받았다(롬 4:9~11). 그러나 할례를 받았다 할지라도 행위만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기에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롬 4:12)만이 의롭다 여김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강조하는 것과 야고보가 강조하는 것이 정말 많이 다른가? 바울은 더 나아가 야고보가 사용했던 아브라함의 믿음의 “증거”라는 동일한 단어를 사용한다(롬 4:17~21).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이삭을 부활시키시리라 믿었다. 왜냐하면 그분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롬 4:17)시기 때문이다(히 11:17~19과 비교). 바울은 또한 구원하는 믿음을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롬 4:21)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요컨대,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을 지키실 것을 확신하며 그분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믿음이 구원하는 믿음이다. 이런 순종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의 행위’이다.
교훈 : 야고보가 강조한 아브라함의 행위는 바울이 거부한 율법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믿음의 순종이었다.
부가적용)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우리가 생각하는 이런 믿음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으면서도 여전히 육신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 아브라함입니다. 그래서 약속을 받은 상태에서 바로가 두려워서 사래를 누이라고 속이기까지 한 것입니다. 자신이 죽으면 후손이 있게 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도 무너지고 만다는 생각 아래 사래를 누이라고 하면서까지 살고자 한 것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오랫동안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자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후손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가 바로 이스마엘이지 않습니까? 약속을 믿었다면 바로가 두려울리 없고 이스마엘을 낳을리도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인도를 받으면서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심으로 모든 약속을 이루신다는 것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100세에 낳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놀라운 명령에도 그대로 순종하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아내가 아들을 낳을 수 없는 중에 아들을 낳은 것을 볼 때 하나님은 생명의 주님이심을 믿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즉 아들을 바치는 아브라함의 행위는 아브라함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동안 하나님에 의해서 믿음이 무엇인가를 배우고 깨달았던 그 믿음에 의해서 나오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행위를 겨우 예배당 다니고 안식일 지키고 기도하고 성경 보는 것으로 여길 수 있겠습니까? 믿음의 행위를 그런 것으로 전락시켜서는 안 됩니다. 믿음의 행위란 믿음에서 나오는 행위라는 뜻이지 사람이 믿음을 가지고 실천한다는 의미로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기독교에서 소위 믿음의 행위로 말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 중에서 진심으로 믿음이 없이는 나올 수 없는 행위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구제라는 것이 믿음이 없이는 안 되는 일인지, 기도하고 성경 보는 것이 믿음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것인지, 헌금하는 것이 믿음이 없이는 안 되는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생각하면 그동안 교회가 믿음의 행위로 여겼던 것들이 실상은 참된 믿음의 행위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헌금을 하는데 ‘하나님 제가 헌금을 하면서 내 것을 아끼는 욕심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헌금을 하면서 내가 믿음으로 살지 못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고백과 함께 하는 헌금이라면 어떻습니까? 헌금을 하면서 자신의 욕심을 보게 되고 따라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되는 이러한 헌금을 믿음이 없는 사람이 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 없이 하는 헌금은 헌금하는 행위에서 자신의 의를 보게 될 뿐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자신의 헌금에서 자기 죄를 보게 하고 결국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다시금 실감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행위입니다. 연보하는 행위는 같다 할지라도 그 마음이 같지 않고 소망하는 것이 같지 않습니다. 이것이 믿음이 있고 없고의 차이인 것입니다. 믿음의 행함을 이런 차원에서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아브라함의 행함은 믿음에서 나온 것임을 알고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배우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해진다.’는 말은 무슨 뜻이라고 생각합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야고보 또한 그런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 2:22). 많은 사람이 믿음과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어느 정도까지는 그 둘을 분리시킨다. 진정한 믿음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이다. 선한 행위는 단지 믿음의 외적 징표일 뿐 아니라 믿음의 발산이다. 아브라함이 그의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그에게 동기를 부여했던 것은 모든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있었던 그의 믿음이었다. 야고보에 따르면 믿음은 순종에 의해 완전해진다.
| 적용 |
경험에 따르면 어떤 행함과 순종이 있을 때 믿음이 온전해집니까?
영감의 교훈
기도
아버지, 우리에게 셀 수 없는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저를 의롭게 여겨 주셨사오니 그 의로움에 의지하여 바치는 순종의 제사를 받아주시고 제 믿음을 온전하게 해 주시옵소서.
다섯째 날(목) 라합의 믿음
11월 6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 2:25).
교사강해 5)
라합의 믿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녀가 지금껏 이루어진 일을 바라볼 때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고 이 믿음으로 인해 라합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자신의 생존까지 염두에 두지 않게 되었습니다. 라합이 이스라엘 정탐꾼을 살려준다고 해서 기생이라는 직업에서 벗어나고 부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위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라합은 하나님이 자신이 거하는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다는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의 나라는 의지할 것이 못되고 이스라엘에게 속한 자 되는 것이 자신이 살 길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목숨의 위험까지 도외시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것을 믿는다고 하면서 내가 몸담고 있는 세상을 의지하고 세상에 소망을 둔다면 그것은 믿음의 행함이 아닙니다.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그의 나라와 그의 의만 소망하고 믿게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그 믿는 자대로 살아가게 합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죽은 믿음은 생명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말은 있되 삶은 없는 것입니다. 천국을 말하되 세상에 소망을 두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제아무리 기도하고 성경을 많이 본들 그러한 것은 다 믿음과 상관없는 것들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천국을 말하면서 왜 교회가 커지는 것에 사람들이 마음에 관심을 둡니까? 왜 교회가 커지고 성장하는 것에 목매달고 삽니까? 이는 죽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하는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만족을 얻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자신의 믿음을 보고 싶을 때는 내가 한 말을 보지 말고 자신의 삶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과연 진심으로 하늘을 소망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 땅의 것을 포기하지 못하고 여전히 땅의 것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간다면 그것은 사람을 부자와 가난한 사람으로 구분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믿음이 없음으로 차별과 구별이 나오는 것입니다.
수 2:1~21을 읽어 보라. 우리는 이 사례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문맥 안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히 11:31에 따르면 여리고 백성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 대부분의 번역 성경은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했다고 설명한다. 여리고 백성은 이스라엘 백성이 미디안과 아모리 족속에게서 거둔 승리를 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알고 있었다. 바알브올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은 그분이 우상숭배와 비도덕적 행위들을 혐오하신다는 사실을 여리고 백성에게 가르쳤다. “이 모든 사건을 여리고 거민들이 잘 알고 있었고 라합의 확신에 동참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것에 순종하기를 거절했다”(부조와 선지자, 492).
라합은 그녀의 부정직함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았다. 그는 참 하나님을 믿었으며 여호수아가 파송한 정탐꾼들을 숨겨줌으로써 그러한 믿음을 행사했다. 또 다른 조건이 있었다. 그녀는 정탐꾼들의 지시에 순종하여 붉은 줄을 창문 밖에 걸어 두어야 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 구원의 날에 집 문기둥에 뿌린 피를 연상케 한다(출 12:21~24). 비록 라합의 삶은 완전과 거리가 멀었지만 믿음으로 즐거이 나아와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 결과로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를 받게 된다는 진실을 보여준다.
약 2:26을 읽어 보라. 이 성경절은 믿음과 행위의 관계를 어떻게 요약하는가?
호흡하지 않는 몸이 시체에 불과한 것처럼 행위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더불어 진정한 믿음이 없이 행하려는 순종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죽은 행실”(히 6:1)만 더할 뿐이다.
교훈 : 여리고의 백성은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도 멸망했지만 그 믿음을 행위로 나타내고 순종으로 표현한 라합은 불완전한 삶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았다.
부가적용)
라합을 통해서나 아브라함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은 신자는 그러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면서 뭔가 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라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하게 하시는 믿음을 구하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행하라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에게 행함이 있게 하신 그 믿음을 구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행함이 무엇인가를 알고, 나의 행함이 아닌 믿음에 의한 행함으로 믿음을 증거하는 신자의 길을 소망하는 것이 신자입니다. 신자가 믿음에 서서 죄인된 우리에게 부어진 하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깨닫는다면 그 은혜와 사랑의 분량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길도 두려움이 없이 가게 할 것입니다. 설사 내가 죽는 길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이런 믿음을 구하면서 그리스도의 은혜에 더욱 깊이 빠져 들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이것이 불완전한 라합의 삶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은 이유였습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라합은 행함으로 구원 받았습니까? 아니면 믿음으로 구원 받았습니까?
약 2:25은 그가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문자 그대로라면 직업적인 창녀가 거짓말을 동원하여 정탐꾼을 숨겨 준 행위의 대가로 의로워졌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율법에 비춰 봤을 때 그녀를 과연 의롭다고 평가할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녀가 얻은 의는 행위로 말미암아 얻은 의가 아니라 그녀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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