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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과 추수할 준비를 함(교사들을 위한 강해와 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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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과 추수할 준비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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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3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14분

 

기억절 :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 5:8).

 

도입)

어떤 배가 폭풍을 만나 항로를 이탈하여 높은 파도와 싸우다가 겨우 어떤 무인도에 도착하였습니다. 배는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된 뒤여서 할 수 없이 승객들은 이 섬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무인도에서 몇 달 동안 살 수 있는 식량이 남아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 땅은 비옥해서 씨앗을 심기만 하면 몇 달 후에는 풍성한 식량을 추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씨앗을 심기 위해 땅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그 땅에 황금 덩어리가 묻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에 사람들은 흥분하기 시작했고, 다른 곳에도 황금이 있는가 해서 동분서주했습니다. 몇 달 후에 황금은 산더미처럼 쌓였습니다. 그런데 그 즈음 그들의 식량은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그때서야 사람들은 밭에 나가 땅을 일구어 씨를 뿌렸지만 이미 때가 늦었습니다. 파종할 시기를 놓쳐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산더미처럼 쌓인 황금을 바라보며 굶어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천국에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좋은 집을 사서 이사 갈 준비는 잘 하면서도 인생의 마지막 이사지인 천국에 대한 준비는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이생의 즐거움만을 위해 삽니다. 천국,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존재하며 그 날이 올 것입니다. 또한 우리 주님은 우리가 믿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당신의 백성을 데리러 올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나라를 위해 항상 준비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연구 범위 : 약 5:7~12, 롬 13:11, 고전 3:13, 눅 7:39~50, 골 4:6.

 

그리스·로마 시대에 고위 관리가 한 지역을 방문하면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거리를 청소하고, 상점 창을 닦고, 꽃을 심고, 범죄 예방 활동을 활발히 전개한다. 이 모든 노력은 그 관리가 왔을 때 그 지역이 완벽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약 5:7~8뿐 아니라 신약 전반에서 그리스도의 ‘오심’을 뜻하는 말로 사용된 그리스어 ‘파루시아’는 왕 또는 고위 관리의 방문을 의미하는 기술적인 표현이다. 지상의 통치자들의 방문에 앞서 그러한 준비가 필요했다면 우리 구주의 오심에 앞서 우리는 모든 노력을 다해 마음을

준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 날과 때를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러한 준비를 할 수 있을까?(마 24:36)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약 5:8)게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이른 비, 늦은 비와 어떤 관계인가?(약 5:7)

비록 이런 말씀들은 종말을 염두에 두고 있지만 그 바탕 기별은 모든 시대의 신자들에게 해당한다. 모든 역사에 걸쳐 그리고 오늘날의 삶에서도 우리는 시험과 고난을 맞이한다. 그리고 그런 고난을 통해 옛날 선지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믿음 안에 굳게 서도록 격려를 받는다.

 

*교과반이 서로 기도해 주고 돌봐 주는 친밀한 모임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안교 활동반과 교과 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깨어서 주님을 기다리라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한다.

➋ 느끼기 : 불의와 고통 가운데서도 인내심을 기른다.

➌ 행하기 : 주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악을 대면할 때 낙담하지 않도록 노력한다.

 

Part 1.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2.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3.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그대가 기억하고 있는 최악의 가뭄은 언제였습니까?

❷ 우리는 지금 어떤 필요를 가지고 늦은 비 성령을 기다려야 합니까?

❸ 재림을 기다리며 ‘마음을 굳건하게’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까?

❹ 아직 때를 기다려야 한다면 그 동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B. ❶ 내홍으로 조직이 무너진 대표적인 예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❷ 교회가 겪는 내적인 위기는 보통 어떤 문제 때문에 발생합니까?

❸ 그런 위기를 겪을 때 우리는 욥이나 선지자들에게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합니까?

❹ 마지막 때에 교회에 심각한 위기가 닥칠지라도 그것을 믿음으로 극복하기 위한 각자의 결심을 나눠봅시다.

 

결론 : 야고보는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가 악과 불의를 겪어도 인내하고 낙심하지 말도록 당부했습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새로운 소그룹 또는 안교반의 선교 및 활동 방향에 대하여 토론합니다.

❷ 단합 모임에 관하여 구체적인 사항들을 결정합니다.

❸ 단합 모임과 새로운 안교반의 질적, 양적 성장을 위해 기도합니다.

 

첫째 날(일) “비”를 기다림

12월 7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약 5:7).

 

교사강해 1)

우리는 이른 비와 늦은 비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는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말하는 이른 비와 늦은 비, 곧 비(雨)는 고대인에게 생명을 뜻하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옛날 사람들에게는 비가 단순한 비가 아니었습니다. 우(雨), 곧 비가 땅에 떨어지면 그 땅에 새싹이 돋아나는 것을 볼 때 고대인들에게 물은 곧 생명 그 자체로 생각했습니다. 땅이 말라 비틀어져 있어도 하늘에서 물이 떨어지면 생명이 출현하는 것을 볼 때, 이 비는 곧 생명을 주는 것, 생명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고대인들에게는 모든 것을 음양의 이치로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천지의 음양의 교접 즉 하늘에서 비가 땅에 떨어져 생명이 출현하는 것과 같이 이런 천지의 조화를 통해 생명이 나타나는 모습은 남자인 양(陽)과 여자인 음(陰)이 성교를 할 때, 정액 곧 정액의 비가 자궁에 떨어져 생명이 자라는 것과 같은 이치로서 비는 곧 새로운 생명을 탄생케 하는 생명과 직결된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약 5:7절에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라고 했는데, 열매를 바라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는 것은 곧 하늘의 열매 곧 하늘의 생명을 기다리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말하지도 아니하니”(렘5:24) 하나님께서도 추수를 위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셔서 열매를 기다리는데, 이 추수의 열매는 누구를 말합니까? 알곡과 가라지는 바로 구원 받을 하나님의 자녀들과 그렇지 못할 사람들의 출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고전 15:45절에 “기록된 바 첫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라고 하셨는데, 이른 비와 늦은 비는 곧 살려주는 영, 곧 죽어 있는 인간을 다시 거듭나게 하는 살려주시는 성령을 뜻합니다. 이 성령이 곧 물로 표상되었다는 것은 곧 성령이 임할 때 새로운 생명이 나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믿고 침례를 받는 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여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살아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은 생명을 주시는 이른 비와 늦은 비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태어나게 하는 추수할 백성들, 하나님의 백성의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해 임하는 축복인 것입니다.

 

농부의 생계는 직접적으로 날씨에 좌우된다. 너무 가물거나 비가 너무 많이 오든지 아니면 너무 춥거나 너무 덥든지 하면 농작물의 수확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이스라엘과 같이 건조한 나라에서는 농사에 필요한 최소 강수량은 적지만, 대신 적기에 충분한 비가 내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작은 밭이든 대규모 밭이든 곡물의 성장과 그 가치는 직접적으로 비에 좌우된다.

주로 10~11월에 내리는 이른 비는 땅에 습기를 공급하고 파종과 발아를 위해 밭을 준비시킨다. 3~4월경에 내리는 늦은 비는 추수할 수 있도록 곡식을 무르익게 한다.

약 5:7을 신 11:14, 렘 5:24, 14:22, 욜 2:23과 비교하여 읽어 보라. 비에 대한 구약 성경절들의 요점은 무엇인가? 그대는 왜 야고보가 이러한 은유적 표현들을 주님의 재림과 연관시켜 사용했다고 생각하는가?(호 6:1~3, 욜 2:28~29 참고)

“동방나라들에서 파종기와 추수기에 내리는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상징을 통하여 히브리 선지자들은 특별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교회 위에 부어질 영적인 은혜를 예언하였다. 사도 시대에 성령을 부어주심은 이른 혹은 앞선 비의 시작이었고 그 결과는 영광스러웠다.… 그러나 세상의 추수의 끝이 가까울 때에, 인자의 오심을 맞기 위해 교회를 준비시키고자 하시는 영적인 은혜의 특별한 부어주심이 약속되어 있다. 이러한 성령의 부어주심은 늦은 비가 내리는 것으로 비유되었다. 그리고 이 더해진 능력을 받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봄비 때에’ 추수하는 주인에게 탄원을 올려야 한다”(사도행적, 54).

 

교훈 : 농부가 농작물을 심고 거두기 위해 제때 알맞은 비가 오기를 바라는 것처럼 영적인 성장과 추수를 원하는 사람은 성령의 특별한 은혜를 간구해야 한다.

 

부가적용)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단지 영적인 체험으로만 돌려버리는데, 사실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이른 비나 혹은 늦은 비), 곧 살려주시는 영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치신 것입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엡1:13-14).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믿을 때 약속의 성령을 받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로 인치심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구하는 것은 성장과 추수를 위해서라면 우리는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이른 비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태어나는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생명이 곧 성령, 이른 비였고, 이것은 사도시대에 그리스도의 승천 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임하였습니다. 이제 이 마지막 시대의 추수와 열매를 위해 다시 한 번 영광스러운 생명의 비, 곧 늦은 비를 구하고 우리는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겔47:9)라 하신 이 강물은 살려주시는 영(고전 15:45) 그리스도와 성령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 날마다 성숙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라가야 할 우리들에게 필요한 개인적 경험으로 날마다 그분과의 교제를 통해 경험되어져야 할 축복입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11:13)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얼마나 충실한 알곡으로 익어가고 있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예수님은 세상의 마지막 때에 있을 추수에 대해 말씀하셨다(마 13:39). 막 4:26~29은 약 5:7과 매우 유사한 장면을 묘사한다. 농부는 곡식이 익기를 기다린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막 4:28~29). 오직 추수 때에 이르러서 곡식과 잡초를 가릴 수 있다(마 13:28~30, 말 3:17~18과 비교).

 

| 적용 |

추수에 앞서 그대는 어떤 마음으로 성령의 부어주심을 간구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기도

아버지, 제게 성령을 부어주시옵소서. 제 마음을 채우셔서 모양만 있고 속은 비어있는 쭉정이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로 가득한 충실한 알곡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둘째 날(월) 도대체 얼마나 가까운 것인가?

12월 8일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 5:8).

 

교사강해 2)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히 하는 일을 해야 할까요? 우리는 야고보서 5장의 초반에 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을 살펴보았습니다. 자신의 부를 위해 품꾼의 삯을 빼앗고, 의인을 정죄하여 죽이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또한 그렇게 얻은 부를 가지고 사치하고 방종하며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을 손가락질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우리는 ‘저렇게 하고 싶어도 어찌해볼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현실이 다행이 아니라 아쉬움으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좀 잘못하고 부당하더라고 부자로 살아보았으면 좋겠다는 것에 대한 마음을 가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부자가 되고 재력을 가지면 그깟 잘못쯤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될 것 같기도 합니다. 이미 이 세상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아 보입니다. 그래서 “유전무죄 무전 유죄”라는 말이 정말 사실인 것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것을 부러워하면 이 세상에 지는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안 하시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시며,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에 만족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향하는 나그네이기 때문에 이 땅, 곧 지상에서의 삶에 대한 강한 소유와 애착은 불 신앙적인 것입니다. 세속적인 이 땅의 것에 대한 사랑은 우리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스스로를 멀리하는 것입니다. 공의로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갚아주십니다. 야고보는 5장 1절부터 이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너희 것’(2절)은 모두 이슬처럼 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정직하고 성실하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자신의 삶을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을 원망하거나 부러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그 날이 오기까지 인내하며 힘을 내어 살아가야 합니다.(7절). 우리는 이 땅의 죄를 통해 얻어지는 비정상적인 부를 부러워하거나 세상의 쾌락을 부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약 5:8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깝다고 확언한다. 그러나 이천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이 약속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예수님은 낯선 하늘의 사물을 납득할 만한 말로 가르치기 위해서 비유를 사용하여 메시아 왕국을 설명하셨다(마 4:17, 10:7, 24:33). 이 비유들을 자세히 연구한 결과 메시아 왕국은 두 가지 측면 즉 현재의 ‘영적인 나라’와 아직 이르지 않은 ‘영광의 나라’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모든 사도는 그들의 소망을 곧 오실 예수님의 재림에 두었다(롬 13:11, 히 10:25, 약 5:9). 그러나 그들은 그 일이 언제 있을지 알지 못했다.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 때를 알기 원했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아는 것이 그들에게 최상이 아니라고 설명하셨다(행 1:6~7). 복음 사업이 거의 이천 년이 지난 지금도 끝나지 않고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들이 과연 열심히 복음을 전했겠는가?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약 5:8)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기다리는 열매를 ‘귀하다(티미오스, 7절)’고 일컬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살전 3:13, 살후 3:3, 벧전 1:19, 고전 3:12 참고)

‘굳건하게 하다(스테리조)’라는 말에는 ‘단단하게 고정시키다’ 또는 ‘강화시키다’라는 뜻이 있다. 우리 마음은 어떤 압박이 있어도 움직이지 않도록 주께 단단하게 결합되어야 한다. 진리에 서고(벧후 1:12), 유혹을 이기며, 믿음을 위해 시험과 고난을 견디는 것이 모두 이런 일에 해당한다.

영적 성장은 항상 쉽지는 않으나 ‘보배로운 열매’를 맺는 과정이다. “그리스도의 보배로운(티미오스) 피로”(벧전 1:19) 속죄함을 받은 신자들은 하늘의 농부께 무한한 가치를 지닌다.

 

교훈 : 우리는 재림을 기다리면서 모든 것이 귀한 열매를 맺는 과정임을 알고 자신을 하늘 성전의 보석으로 드리기 위해 마음을 굳건하게 해야 한다.

 

부가적용)

이 세상의 종교는 항상 하나님의 계명보다는 종교특권자들의 이권의 배를 불리기 위해 나름대로의 교훈들을 만들어 합리화하곤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그대로 지켜서는 특권층들의 탐욕을 채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후진국일수록 법은 엄하고 특권층은 요리조리 빠져나갑니다. 자기들은 지키지 않아도 되는 합리화와 교훈들이 전통으로 자리 잡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법과 원칙을 지키는 사람들을 바보 취급하고 무시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태는 사람을 속일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겉만 포장하고 속은 탐욕과 위선으로 가득 차 있는 악인들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너는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잠24:19-20)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걸려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잠4:18-19).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우리에게 기다림의 과정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그리스어 ‘티미오스’는 하나님의 영적 성전 즉 교회의 반석이신 그리스도 위에 자신을 세우는 신자들을 “보석”으로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다(고전 3:11~12). 반면 바울은 미덥지 못한 신자들을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불로 소멸될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비유하였다(고전 3:12~15).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힘을 우리가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것과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분께 쏟고 있는지 매일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 적용 |

그대는 어떤 면에서 자신을 ‘보배로운 열매’로 주님께 바치기를 원합니까?

 

영감의 교훈

 

기도

아버지, 세상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십자가와 재림의 소망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교회마저 비전과 목적을 잃은 채 표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험의 때를 지나는 우리의 믿음이 오히려 보석과 같이 단단해지고 아름답게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셋째 날(화) 불평, 신음 그리고 성장

12월 9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약 5:9).

 

교사강해 3)

야고보는 서로 원망하면 심판을 받게 되고 영원히 멸망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는 원망해서는 안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사람이 원망하는 것은 육신의 생명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마다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육신에 속한 것은 믿지 않기 때문이며, 따라서 악한 환경을 만나면 자연히 원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과 기도에 열심 있는 어떤 사람들은 어지간한 환경 속에서도 원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그가 십자가에서 죽어본 적이 없었다면 하나님이 시험하시는 악한 환경을 만날 때 결국 원망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생명을 가진 자입니다. 왜, 믿는 자는 육신에 속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은 사실을 믿기 때문에 자기 육신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육신대로 살지 않는 자가 어찌 육신에 속한 '원망'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이 세상에 대하여 죽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속하여 원망 없는 그리스도의 삶을 살게 될 것이며, 믿지 않는 자는 여전히 자기 육신의 삶을 살 것이므로 육신의 속한 '원망'을 뱉어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누군가를 '원망'하고 있다면 바로 그 점이 자신이 육신에 속한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요, 육신에 속한 자에게 임하는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가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고 있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원망'한다는 것 자체가 육신에 속한 일이기 때문에 믿지 않는 것이요 따라서 믿지 않는 자에게 임하는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나무는 그 열매로써 알게 됩니다.

 

재림은 언제 있을 예정인가? 우리는 왜 아직도 이곳에 있는가? 21세기를 지나는 지금 기독교 신앙을 의심하거나 조롱하는 것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이는 새로운 일이 아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큰 위협은 외부의 적으로부터가 아닌 내부의 구성원과 그들의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우리는 밖에서 침투해 오는 세력보다도 안에서 공격해 오는 세력을 더욱 두려워해야 한다.… 불신을 품고 의심을 나타내며 흑암을 간직하는 것은 악한 천사들이 나타나도록 장려하며 사탄의 계교를 성취시킬 길을 열어 준다”(마지막 날 사건들, 156).

그래서 야고보는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약 5:9)고 경고한다. 그대는 (설령 좋은 의도였을지라도) 다른 사람에 대해 또는 교회에 대해 어떤 원망과 불평을 한 적이 있는가? 그대는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가? 온유와 겸손으로 또는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용서로 했는가? 아니면 세상의 기준으로 했는가? 정직하게 답해 보라.

앞서 살펴본 야고보의 말씀에 따르면 신자들 가운데는 편애(약 2:1, 9), 악한 추측(4절), 험담(3:10, 4:11), 질투(3:14), 다툼(4:1), 세속주의(4, 13~14절) 등의 심각한 문제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야고보는 이런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으로 믿음(약 1:3, 6), “마음에 심어진 말씀”(21절), “자유롭게 하는” 율법을 바라봄(약 1:25, 2:12), 정한 마음과 신령한 지혜(약 3:13, 17), 은혜(약 4:6) 그리고 깨끗한 손과 순결한 마음(8절)을 일관성 있게 제시한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내적 사역은 외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약 2:14~26).

 

교훈 : 내적인 의심과 불평은 외부의 조롱보다 훨씬 위협적이다.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문제를 믿음으로 극복한 자들은 심판의 날에 은혜를 얻을 것이다.

 

부가적용)

우리 자신을 하나님을 믿는 자로 여긴다면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원망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원망하지 않아야 심판을 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생명을 십자가의 무덤에 버린 자가 아니라면 불가능합니다. 원망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했을 때에 원망하지 않아야 그가 육신에 속한 자가 아닌 것입니다. 또한 원망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하게 하시고 원망하는 자신을 보고 믿음 없음을 알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크나 큰 은혜입니다. 사람들은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육신에 속하여 하나님과 자신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많은 고난과 시련 속에서 이 단계에 이른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그는 비로소 자신의 실체를 본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보고 비로소 겸손 할 수 있고, 주님만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주님만을 바라보는 자는 결국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심판을 면하게 됩니다. 야고보는 '원망하지 말아야 심판을 면하리라'고 그의 형제들에게 전했습니다. 그의 형제들은 당연히 자신처럼 십자가에 대한 믿음으로 육신에 속한 생명을 버리고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맡기는 삶을 사는 자들을 말합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그리스도께 속해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직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때로는 영에 속해 있지만, 육신의 삶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원망하지 말라'는 권면의 말씀은 곧 영과 육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자들에게 준 권면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대한 믿음이 없이 여전히 자기 생명, 즉 육신에 속한 사람은 '원망하지 말라'는 말씀을 절대로 받을 수 없습니다. 믿는다는 많은 사람들이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은 육신의 속한 상태에서 영에 속한 말씀을 지키려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벗어나서 영에 속한 사람은 자신에게 어떤 악한 환경이 찾아올지라도 주인 되신 그리스도께서 허락한 환경으로 믿기 때문에 결코 원망할 수 없습니다. 또한 그는 원망할 수 없는 새생명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물질 때문에, 불공평 때문에, 불의함 때문에, 오해 때문에, 미움과 멸시 때문에, 불합리 때문에 원망하지 않는 그가 믿는 자이며 심판을 면할 수 있으나, 만일 원망한다면 그는 심판을 면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 기회는 남아 있습니다. 원망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통해 자신이 육신에 속한 믿음 없는 자임을 깨닫는 자는 복됩니다. 그는 참 믿음을 가질 가능성을 가진 자입니다. 그는 십자가에 자신의 생명을 버리고 새 생명을 취할 기회를 가진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자입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교회 내의 불화와 갈등은 주님 보시기에 얼마나 심각한 것일까요?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거기에는 고난당하고 잊힌 자들을 찾아가고(약 1:27), 자비를 보이고(약 2:13), 불협화음보다는 평화를 심는 일(약 3:18)이 포함된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우리를 신문할 재판장은 주님이시며 그분은 모든 사람의 행위에 따라 갚아 주실 것이다.

 

| 적용 |

그대는 교회 내의 불협화음을 극복하고 서로의 믿음을 고취시키기 위해 무엇을 하기 원합니까?

 

영감의 교훈

 

기도

예수님, 주께서 세우신 이 교회에서 사랑과 화평을 이루지 못한 어리석은 저희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각자 자아를 내려놓고 오직 주님의 뜻에 굴복하며 믿음으로 한 마음이 되어 이곳에 우리를 부르신 목적을 이루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넷째 날(수) 인내의 모본

12월 10일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 5:10~11).

 

교사강해 4)

어떻게 우리는 이 악한 세상에 살아가면서 오래참고 고난을 견딜 수 있을까요?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이는 이런 악한 환경에서 인내하기 힘듭니다. 또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지 않고는 인내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의 실제는 인내로 귀결이 됩니다.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근본이요, 그 믿음이 열매로 나타날 때에는 처음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 “인내”입니다. 즉 믿음의 실천 덕목 제 1호가 인내인 것입니다. 참을성이 없으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인내가 따르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사랑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봉사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사랑과 봉사는 어떤 대상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내는 스스로의 인격에 속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품 중에 큰 특징은 인내였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다고 했는데, 사랑의 화신인 예수님의 생애는 한 마디로 인내의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부터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온갖 육신의 빈곤과 곤욕을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래 참으셨습니다. 사람들의 온갖 오해, 중상모략, 비난과 모욕,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참고 견디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인내의 주님이십니다. 인내는 우리 믿음의 뿌리를 한층 깊게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피해가고 싶은 힘든 순간이 닥칠 때, 그것을 고통으로만 여기지 않고 나아가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을 향한 “소망”은 우리가 인내할 수 있는 원천입니다. 인내하기 위해선 치열한 노력이 필요하지만, 인내가 인간의 노력으로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덕목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가능한 것이며 또한 하늘의 소망을 확신하게 될 때,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날 이 모든 것을 다 갚아주실 것이라는 믿음의 확신이 든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것이 인내입니다. 이것은 매일의 생애에서 그리스도와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는 특징입니다.

 

욥과 선지자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이런 모본이 강조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곤경 중에 있을 때 이러한 이야기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하는가?

 

이스라엘 선지자들은 변경과 타협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하게 전했다. 히브리서는 선지자들의 신앙에 찬사를 아끼지 않고 그 모습을 생생하게 그렸다.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다니엘]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하나냐, 미사엘, 아사랴]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엘리야와 엘리사]…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예레미야, 미가야] 돌로 치는 것과[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 톱으로 켜는 것과[이사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왕상 19:10 참고]”(히 11:33~37). 물론 욥의 고난도 유명하다. 그는 아내의 조롱과 자신을 위로하러 온 자들에게 받은 견책에도 불구하고 인내의 모본을 보였다. 이런 신앙의 영웅들과 보통의 신자들을 구별하는 특징은 무엇인가? 야고보는 몇 가지 특성들을 열거한다. 인내, 견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에 대한 소망과 믿음이다.

그 중에 ‘견딤’ 또는 ‘참을성’ 등으로 번역되는 “참음(마크로티미아스)”은 어려운 여건이나 시험 가운데서도 또는 삶(아니면 사탄)이 그에게 무엇을 던지든지 견디는 능력을 의미한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겪는 모든 고난을 참을성 있게 견뎠다(약 5:10). 이 단어는 신약에서 종종 사용된다. 그 가운데는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오랜 세월 동안 순례하며 기다린 아브라함에 대한 언급도 포함된다(히 6:12, 15).

 

교훈 : 욥과 구약의 선지자들이 모든 고난을 참고 견뎠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베푸실 최후의 구원과 승리를 내다보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한다.

 

부가적용)

세상에서도 인내는 강조됩니다.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도 인내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인내의 원리는 세상에서의 성공에 적용되지만 영적인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나무도 4년이 차야 5년부터 자랍니다. 가을이 깊어져야 도토리가 떨어집니다. 사람도 오랜 시간을 들여야 인물이 됩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이스라엘의 참 지도자로 만들어 가시는데 무려 80년을 쓰셨습니다. 애굽의 왕궁에서 40년 동안 최고의 공부를 하게 하셨고, 광야에서의 40년은 모든 것을 비우고 하나님께 집중하는 사람으로 기르는데 쓰셨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17년 동안 목동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으로 기르셨고 이후 13년 동안 사울이라는 몽학선생을 통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얻고 왕의 재목으로 기르셨습니다. 그렇다면 인내가 무엇입니까? 인내는 일을 느리게 하는 것이 아니고 인내는 시간을 기다리는 것도 아닙니다. 인내는 당신의 일 안에서 좌절을 견디는 힘입니다. 당신이 계속 고통을 받아도 손을 놓지 않는 것을 인내라고 합니다. 불신자들은 자신의 욕망 때문에 인내합니다. 욕망이 이루어지거나 욕망이 허망한 것이 되면 그의 모든 인내라는 것도 수포가 됩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우리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인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각종 어려움이 있어도 오늘 나에게 부여된 일, 사명, 생활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가 인내함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결말은 무엇입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그 말은 또한 모든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참고 견디신 예수님을 묘사한다(벧후 3:15). 반면 “인내(휘포모네)”는 결승점을 바라보며 이러한 과정의 목적에 초점을 맞춘다. 욥은 모든 고난에도 불구하고 흐트러짐 없이 자신이 받게 될 최후의 옹호를 내다보았다(욥 14:13~15, 19:23~27).

 

| 적용 |

그대가 지금 인내하는 믿음으로 견뎌야 할 문제는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기도

주님, 이 경주의 목적이 무엇인지 잊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고지를 시선에서 놓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유혹이 거세고 시험이 맹렬하여 더 이상 버틸 힘조차 없을 때라도 위로부터 오는 새 힘으로 독수리처럼 날아오르게 해 주시옵소서.

 

다섯째 날(목) 햇빛처럼 투명한

12월 11일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약 5:12).

 

교사강해 5)

한마디의 진실을 위해서도 목숨을 바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 된 성실입니다. 그런 우리가 어디에다 함부로 맹세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내가 말을 했으면 말한 대로 해야 하고 지켜야 될 것입니다. 내 말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 앞에서 꼭 지켜야 한다는 것을 명심할 것입니다.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라고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쓸데없는 말과 아무 의미가 없는 말도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맹세를 적게 하고 쓸데없는 소리를 덜하면 죄는 그만큼 덜 범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진실을 수단화해서는 안됩니다. 그 무슨 이권보다도 심지어는 생명보다도 중요한 것이 진실입니다. 모름지기 우리의 말에는 진실성이 있어야 합니다. 행동에 진실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약속한 것이면 천하없어도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서 거룩한 인격을 쌓아 올려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평안과 용기와 생명이 이것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핍박과 환난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의 재림까지 인내할 것을 가르친 야고보는 이제 맹세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라"(12절 상반). '무엇보다도'란 말은 저자가 말하려고 하는 의도의 중요성을 나타냅니다(흑기,웨슬레). 이에 대해 헨리는 [맹세란 가장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명예를 더럽히며 가장 현저하게 그의 이름과 권위를 경멸한다]고 말합니다. 진실을 담보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일은 해서는 안될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주석가들은 왜 야고보가 맹세하는 것을 크게 쟁점화시키는지 당혹스러워한다. 비록 그 의도가 이런 종류의 언사를 금지하기 위한 것일지라도 이 장과 서신 전체에서 마치 “무엇보다” 중요한 것처럼 강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이 정말 그처럼 중요한 문제인가? 때로 우리는 야고보에 대한 부당한 평가를 듣지만 야고보서 연구를 통해 그가 표면적이거나 형식적인 신앙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야고보는 하나님의 용서와 용기를 주는 은혜 없이는 결코 이를 수 없는 높은 표준을 제시할 만큼 철저하게 복음 중심적이다. 우리의 말은 우리의 마음속에 담고 있는 것을 드러낸다.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 12:34). 야고보의 신학에는 우리에게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마 5:34~35)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생각이 스며 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자기 머리에 자라는 머리카락을 두고 맹세한다(36절). 그러나 예수님은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 5:37)고 하셨다.

우리의 머리카락(많지 않은 이들도 있지만)을 포함하여 만물은 하나님의 것이다. 물론 예수님이 법정 선서까지 금지하셨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자신도 대제사장의 선서에 따라 심문을 받으셨을 때 비록 건전한 법과 상당히 거리가 멀었지만 그렇다고 답변을 거부하거나 절차를 비판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마 26:63~64).

 

교훈 : 우리는 우리가 말할 수 있는 한계를 이해하고 함부로 맹세하지 말아야 하며 오히려 겸손하게 사랑과 믿음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말해야 한다.

 

부가적용)

한 때 외국인이 선정한‘서울의 가장 매력적인 장소는 남산 N 서울타워의 야외 전망대 난간에 속칭 채워진‘사랑의 자물쇠'(속칭)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곳이 골칫거리로 변모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 녹슬어 버린 자물쇠와 연인들이 산에 버린 열쇠들로 인해 남산의 자연환경이 오염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자물쇠'는 프랑스의 세르비아의 한 온천 마을에서 유래되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참전한 약혼자를 기다리던 마을 여교사 '나다'는 어느 날 약혼자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습니다. '새로운 사랑을 찾았다'며 보낸 이별 통보였습니다. 상심한 나다는 사랑을 앓다가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지역 소녀들이 '나는 영원한 사랑을 지키겠다'며 나다가 데이트를 즐겼던 다리에 자물쇠를 잠궈 매달기 시작했습니다. 이 스토리는 20세기 후반 세르비아 여류 시인 데산카 막시모비치가 '사랑의 기도'라는 시로 옮겨지면서 널리 알려졌고 이후 소설과 영화를 통해 세계로 퍼졌습니다. '사랑의 자물쇠'는 프랑스뿐 아니라 전 세계 40여 개국 관광 명소에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 파리의 센 강의 다리 퐁데자르에는 2008년부터 연인들이 영원을 맹세하며 둘의 이름을 적은 자물쇠를 다리 난간에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도 다양한 자물쇠로 잠궈 본 후에야 알게 된 것은 영원한 맹세를 하며 함께 하자던 이 맹세도 세월이 지나면서 변색해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녹슬어 못쓰게 될 자물쇠로 마음을 잠그려하는 것 같습니다. 함부로 지키지 못할 약속을 맹세로 남발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남발한 그 맹세와 그 약속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성경은 왜 ‘맹세’를 금하고 있을까요?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우리가 진리를 말할 때에 가장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은 우리가 모든 진리를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둘째, 우리가 진리를 말할 때, 언제나 사랑 가운데서 듣는 자들의 믿음을 세우기 위해 말해야 한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 4:6).

 

| 적용 |

우리가 맹세하지는 않을지라도 확신의 부족 없이 진리를 표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영감의 교훈

투명한 말 - “우리는 우리의 말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마치 무슨 권리를 가진 것처럼 맹세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하는 모든 것은 햇빛과 같이 투명해야 한다. 진리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나 무수한 형태를 가진 악은 모두 사탄에게 속한 것이다”(산상보훈, 66, 68).

 

기도

아버지, 우리가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였습니다. 부족을 모르고 맹세와 장담을 남발했던 잘못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제 입술이 은혜를 끼치며 구원의 진리를 확신 있게 전하는 도구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여섯째 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12월 12일

 

<선지자와 왕>, 155~166 “이스르엘에서 호렙까지”, 167~176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77~189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를 읽어 보라.

 

“어둡게 보일 때에 끈기 있게 기다리고 의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업을 지도하는 자들이 배워야 할 교훈이다. 하늘은 역경의 날에 그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표면상으로는 무력한 것 같으나 자신의 무가치함을 느끼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영혼만큼 참으로 강한 것은 없다.… 시련은 올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전진하라. 이것이 그대의 신앙을 굳게 하고 그대로 봉사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되게 할 것이다. 거룩한 역사를 기록한 것은 단순히 우리들이 읽고 경탄하라는 것이 아니요, 옛날 하나님의 종들이 행사한 동일한 믿음을 우리들도 행사하게 하려 함이다”(선지자와 왕, 174~175).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우리는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는 알곡과 쭉정이 비유를 잘 압니다(마 13장). 그렇다면 그것은 교회의 징계와 관련하여 어떤 의미입니까? 그것은 우리 구성원 가운데 노골적인 반역과 배도가 일어날 때 어떻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말하며 우리가 아무 조치 없이 앉아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까?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에서 비춰볼 때 그리고 고린도 교회와 갈라디아 교회와 같은 초기 교회 시대에 징계가 필요했던 사례에 비춰볼 때 우리는 알곡의 성장을 저해하는 가라지 같은 이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합니까?

 

➋ 유혹과 시험은 우리 모두에게 찾아옵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성경과 예언의 신의 어떤 약속으로부터 믿음 안에서 견딜 수 있는 위로와 도움을 받았습니까? 그대가 과거에 곤경에 처했을 때뿐 아니라 장래에 있을 곤경에도 가장 도움이 되는 성경의 인물은 누구입니까?

 

➌ 야고보는 “서로 원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심지어 동료 그리스도인조차 우리를 성가시게 하고 짜증나게 합니다. 우리를 울적하고 예민하게 만드는 사소한 일들에 대해 사랑과 관용과 인내로 대하는 법을 배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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