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과 혀를 길들임(교사를 위한 강해와 예화)
페이지 정보
첨부파일
- 07제7과 혀를 길들임.hwp (96.0K) 28회 다운로드
본문
제7과 혀를 길들임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11월 15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22분
기억절 :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 12:37).
도입)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우리의 사상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앙의 정도 그리고 우리의 인격의 깊이를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말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귀한 선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말의 긍정적인 결과와 그 부정적인 결과는 그 결과에 있어 참으로 영향이 크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으로 우리의 말을 조심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쓰는 말은 심판의 척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애의 결과가 우리의 말에 의하여 심판되겠다고 했다는 것은 우리가 쓰는 말이 결국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된다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의 말이 그들의 운명을 결정하게 된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한 것을 들으시고 또한 그대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14:28) 우리가 한 말을 하나님이 다 들으십니다. 사람에게 한 말도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혼자 속으로 한 말도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그래서 그 말은 그대로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과 미래는 바로 나의 사용하는 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떤 말은 들을 때 그 말은 각인력이 있습니다. 또한 듣게 된 그 말은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는 견인력이 있습니다. 또한 그 말은 결국 그것이 성취되도록 하는 성취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의 말도 우리의 내면의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사상을 나타내는 심층적인 생각의 표출입니다. 우리의 생각, 곧 사상의 집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말이 우리의 삶에 각인이 되고 그 말은 우리의 삶을 견인해 가게 되며 결국 그 말에 의해 우리의 삶은 꼴지어 지고 이루어지고 성취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연구 범위 : 약 3:1~12, 신 6:6~7, 눅 9:51~56, 잠 16:27, 마 7:16~18.
언어의 위력은 대단하다. 칭찬이든, 시든, 이야기든 “경우에 합당한 말”은 심오한 방식으로 인생을 빚는다. 우리가 하는 말은 며칠 또는 몇 년 동안 기억에 남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어린이들은 단어를 스펀지처럼 흡수한다. 어린이들은 그들이 듣고 자란 언어를 유창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신에 대하여 듣는 말이 미래에 그들의 성공과 실패를 암시할 수 있다. 좋든지 나쁘든지 부모의 대화 방식은 자녀들에 의해 복제되고 증폭된다.
기록된 언어의 위력 역시 오래간다. 가장 영향력 있는 기록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을 보라.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 119:11). 예수님도 제자들의 관심을 일시적인 복락에서 훨씬 중대한 주제로 이끄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언어는 마음을 진정시키거나 안심시킬 수도 있고 해를 끼치거나 오염시킬 수도 있다. 그대는 종종 되돌려 받기를 기대하면서 어떤 말을 건넨 적이 있는가? 우리는 이번 주에 야고보서에서 말에 대하여 몇 가지 중요한 말을 살펴볼 것이다.
*안교·선교부 홈페이지에 다양한 교과 토의 자료가 있습니다.
안교 활동반과 교과 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부정적인 화법의 파괴적인 특성과 길들여지지 않는 혀를 통제하는 비법을 배운다.
➋ 느끼기 : 희망을 주는 말만 하리라는 생각을 계속 마음에 품는다.
➌ 행하기 : 부정적인 화법이 일으킨 불을 끈다.
Part 1.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2.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3.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내 인생을 바꾼 말 한마디는 무엇일까요?
❷ 그대는 언제 부모로서 또는 가르치는 입장에서 말의 감화력에 대해 실감하게 됩니까?
❸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언어 사용의 원칙은 무엇일지 각자의 의견을 나눠봅시다.
❹ 각자 자신의 언어 습관에서 어떤 면이 변화되기를 원하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B. ❶ 예를 든다면 잘못된 말 때문에 어떤 종류의 비극이 발생할 수 있을까요?
❷ 대화가 부정적으로 흐를 때 우리는 그 순간을 어떻게 바르게 대처해야 할까요?
❸ 우리가 상대에게 말실수를 했다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요?
❹ 우리의 말이 흘러나오는 샘 근원을 정화시키기 위해 어떤 결심이 필요할까요?
결론 : 언어는 치유 또는 파괴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혜롭게 단어를 선택해야 합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번식 이전에 멤버를 최대한 확대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의논합니다.
❷ 소그룹 또는 안교반의 번식을 어떻게 축하할지 이야기합니다.
❸ 기도 제목을 가지고 함께 기도합니다.
첫째 날(일) 책임
11월 9일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약 3:1).
교사강해 1)
야고보 당시에 교회에서 '선생'이라는 직임은 권위와 존경과 명성을 얻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권위와 존경과 인기를 탐내던 사람들은 선생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교회 공동체 내에는 어떻게든 선생이 되려는 욕구들이 편만해 있었습니다. 이때 엉터리 선생들, 또는 스스로 선생이라 칭하는 자들이 많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들로 인하여 교회의 권위가 무너지고 교회 지도자들의 자질이 교회 내에서 심하게 의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교회 내에서의 이러한 교사직의 부작용을 배경으로 하여 야고보는 이 명령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원어로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는 말은 권고형이 아니라 금지를 요구하는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너희는 함부로 선생이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만일 함부로 선생이 되면 큰 심판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매우 중대한 책임'을 수반하는 '선생'의 사역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경우, 그에게는 심하고 무거운 심판의 대가가 치러질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런 경고를 통해서 교회에서 선생들의 가르치는 사역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왜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했을까요? 가르치는 자의 영향이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잘 가르치면 영예와 영광을 받겠지만 혹이라도 잘못 가르친다면 그 선생에게 배운자들은 잘못된 것을 배워 살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만약 영혼을 인도하는 자라면 어떻게 될까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구덩이에 빠지는 것 같이 영혼을 잘못 인도하면 함께 영원히 다시 깨어날 수 없는 둘째 사망에 처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들 중의 하나는 말을 조심하는 것입니다. 말의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남의 잘못을 지적하거나 조소하거나 정죄하는 말이든지 자기의 잘 한 것을 지적하거나 자랑하거나 예찬하는 말은 실수하는 말입니다. 말은 한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는 배의 키와 같고, 한 사람의 생을 태워버릴 수 있는 불과 같습니다. 실수의 말은 자기의 생을 망칠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의 생을 망칠 수도 있습니다. 여기 ‘생의 바퀴’는 한 사람의 일생을 가리킵다. 그런데 말을 조심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다.” 남의 흉을 보고 싶어서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자기 자랑을 하고 싶어서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입에 재갈을 먹이기도 하고 굴레를 씌우기도 합니다.
약 3:1을 읽어 보라. 야고보가 책임에 대하여 말하려는 요점은 무엇인가?
교회와 학교의 교사들은 매우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랫동안 남게 될 방식으로 생각과 마음을 빚기 때문이다. 그 감화의 여파는 그들의 영향력 밖의 사람들에게도 미친다. 더 많이 알면 알수록 그 지식을 사용하고 주입하는 사람에게는 더 많은 책임이 따른다.
영국 캠브리지 대학의 틴데일 하우스 도서관 입구에는 출입하는 모든 학생의 이목을 끄는 명판이 걸려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잠 9:10). 만물의 척도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모든 참 교육은 그분에게서 시작되고 그분에게서 마친다. 그러나 불행히도 지식이 증가하면 하나님을 덜 의지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은 너무도 자주 과학을 하나님과 별개인 것처럼 취급하거나 가르친다. 어떤 신학과 교수들은 신뢰를 얻으려는 열망으로 믿음의 여지가 거의 없는 방법을 활용하기도 한다. 그 결과, 신앙은 교사와 학생들의 마음과 생각 속에서 점차 밀려난다. 하지만 이 세상뿐 아니라 영원을 위한 교육이 교사와 학생 모두에게 최우선 과제가 되어야 배움은 소중하고 영감적인 노력이 될 것이다.
바울은 그가 성장한 교회에서 지도자들을 양성하고 임명한 경험이 있어서 이러한 책임을 잘 알고 있었다(행 14:23을 딛 1:5과 비교). 심지어 그는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딤후 3:7)는 이들도 있음을 경고하며 디모데로 하여금 하나님의 양떼를 미숙하고 지혜롭지 못한 목자들로부터 보호하도록 지시하였다(딤전 1:3~7 3:2~6, 6:2~5, 딤후 2:14~15).
교훈 :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와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들에게는 막중한 책임이 따르며 그들의 감화력은 생각하는 범위보다 훨씬 넓다.
부가적용)
교사로 부르심을 받는 종은 그 부르심에 두려움으로 임해야 할 것입니다. 가르친다는 것..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그 진리를 올바르게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증거하는 것은 삼가 조심스런 것입니다. 제자는 스승의 입의 말로 지식을 얻을 수 있지만 정작 제자는 스승의 뒷모습에서 가르침을 받고 스승의 삶에서 참 지식을 얻습니다. 참된 지식과 가르침은 능력을 가져옵니다. 선생된 자는, 교사된 자는, 목자된 자는 자신이 가르치기에 합당한 모습인지를 먼저 살펴야 할 것입니다. 성경지식의 유무가 아닌 그 삶에서 진정한 목자요 교사요 선생 되었는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선생의 자리는 두려운 자리입니다. 많이 맡은 자리입니다. 잘 감당하면 그 축복은 상상하지 못할 놀라운 것이지만, 반대로 잘 감당치 못하면 그 받을 책망은 너무너무 클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나 선생 되어선 안되는 것입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긍정적인 방법으로 그대에게 선한 감화를 끼친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다른 이에게도 영향을 주는 자녀 교육은 부모들에게 엄청난 책임이 따른다. 실제로 우리 모두는 우리가 보여주는 모본 때문에 주변의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방식을 모방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거룩한 감화를 끼치기 위해 그분이 약속하신 지혜(약 1:5)를 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겠는가!
| 적용 |
그대는 어떤 방식으로 다른 사람에게 선한 감화를 끼칠 수 있을까요?
영감의 교훈
기도
아버지, 우리가 부모로서 그리고 교사로서 지고 있는 책임에 소홀했습니다.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리스도의 선한 빛을 담아낸 언행으로 우리의 자녀와 신앙의 후배들에게 아름다운 모본을 보일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둘째 날(월) 말의 힘
11월 10일
교사강해 2)
미국 하버드 의대의 심장내과 전문의, ‘닥터 레빈’이라는 의사는, 어느 날 심장병을 갖고 있는 한 여인이 들어왔는데, 이 여인은 뜻밖에도 오른쪽 심방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닥터 레빈이 이 여인을 진찰하던 중, 응급환자가 들어왔다는 급한 연락이 왔습니다. 레빈 박사는 급히 학생들에게 “여기 TS 환자가 있으니 들어가 봐”하고 응급실로 달려갔습니다. 학생들은 몰려 들어가, 여인의 가슴에 저마다 청진기를 대어보면서 신기한 표정으로 “TS래, TS”하며, 수근거렸습니다. TS란 Tricuspid Stenosis의 약자로, 오른쪽 심방에 문제가 있다는 의학용어입니다. 응급실에서 돌아온 ‘레빈 박사’는, 특별히 심각하지 않은 증상이었으므로, 다음 날 다시 오라며, 그 여인을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저녁, 낮에 진료했던 그 여인이, 응급실에 한 여인이 실려 왔습니다. 레빈 박사는 급히 응급처치를 한 뒤, 이튿날 이 여인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어제는 심장에 특별한 문제가 없었는데요?” 그러나 여인은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레빈 박사가 계속 묻자, 이 여인은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건 선생님이 더 잘 아실 거 아니예요?” 이 여인은 학생들이 “TS”라고 수군거리는 말을 듣고서, “TS가 도대체 뭘까? 왜 저 학생들이 놀란 눈으로 수근대나?” 생각했습니다. 의학용어를 모르는 여인은, TS가 무슨 약자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T=terminate끝, S=Situation상태, 끝장난 상태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TS라는 단어를 잘못 이해한 여인은 큰 충격을 받고, 심장에 급속한 이상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레빈 박사가 아무리 TS가 우측 심방에 문제가 있는 의학용어라고 설명해줘도, 여인은 자신을 안심시키려고 하는 말로 생각하고, 끝내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여인의 심장기능은 급속히 악화되어, 그녀의 생각과 말대로, 그녀의 생명을 끝장나고 말았습니다. 말의 위력은 무섭습니다. 위로와 격려의 말은‘명약’이 되지만 부정적인 저주의 말은 ‘독약’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각색 병자들을 고치실 때마다, 말을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예수님께서는 베데스다 못 가에 있던 38년 된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낫기를 원하나이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라고 말씀하시자, 병자는 일어나 걸어갔습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약 3:2). 행위를 강조하는 야고보를 고려한다면 정말 신선한 인정이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적인 부족을 시인했다고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대표자가 되어야 한다는 그분의 이상과 우리의 신념까지 희미해져서는 안 된다.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 3:2). 원어가 암시하는 바에 따르면 말에 실수가 없는 것은 정말 가능한 일이다. 언어의 중요성은 과장될 수 없다. 생각은 말로, 말은 행위로 이어진다. 말은 다시 우리의 생각을 강화시킨다. 또한 말은 우리의 행위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행위에까지 영향을 끼친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번 주에 살펴볼 성경 본문은 혀의 영향력에 대한 몇 가지 실례를 포함한다. 앞의 세 가지 예는 작은 사물이 얼마나 큰 결과를 초래하는지 강조한다. 자갈과 굴레가 말의 방향을 바꾸고 키가 배를 조종하며 작은 불꽃 하나가 숲을 삼킨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의 힘’에 대하여 어떤 긍정적인 예를 찾을 수 있는가?(신 6:6~7, 23:23, 시 40:3, 잠 10:20, 12:25, 말 2:6~7, 눅 4:22, 롬 10:6~8 참고)
어린 아이들은 감수성이 예민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점점 단단해지는 나무처럼 그들도 나이가 들면 변화를 거부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가정에서나 교회에서 모두 교사이다. 우리의 말은 영향력이 엄청나기 때문에 우리가 아침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생각을 적시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의 영 또는 다른 원천 가운데 무엇이 우리의 생각과 언어의 양식이 되겠는가? 우리는 다른 기원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일어날 수 있는 수많은 변화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시 33:6을 고후 4:6과 비교).
말의 위력은 막강하여 우리는 단 몇 문장만으로 한 사람의 남은 인생을 파괴할 수 있다. 반면 긍정적인 말은 누구에게든지 오랫동안 희망을 준다.
교훈 : 우리의 혀는 신체의 작은 부분이지만 그것을 통해 흘러나오는 말은 엄청난 힘이 있어서 사람에게 희망을 줄 수도 있고 절망을 줄 수도 있다.
부가적용)
사탄은 우리의 입술을 노립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순간부터라도, 입술로 짓는 죄를 막아야 합니다. 자석이 철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듯이, 우리의 말은 축복과 행복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습니다. 말은 보이지 않지만 무한한 창조력과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잠18:21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를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하는 대로 열매를 맺게 하시고 이루어 주시는 분입니다. 말속에 이처럼 크고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특별히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의 말이 우리의 인생을 만들어갑니다. 우리나라 말에 '말에 씨가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심은대로 거둔다는 삶의 법칙이 우리의 행동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말에도 적용됩니다. 그렇다면 말은 무엇을 변화시킵니까? 언어는 육체를 변화시킵니다. 잠18:21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라고 하였습니다. 말은 우리 신체의 조직, 세포를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칭찬하면 칭찬할수록 더욱 더 잘 하고자 하는 동기를 제공한다'는 사실을 심리학에서는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Effect)라고 합니다. 교육학에서는 칭찬, 격려, 신뢰, 인정, 애정, 사랑, 긍정, 확신, 믿음....이런 것들이 훨씬 더 큰 교육적 효과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부정적인 말로 꾸지람을 계속하면 그 아이는 그런 부정적인 인간으로 자랍니다. 자아개념과 관련된 「피그마리온 효과」란 사람들은 남들이 기대하는대로 행동한다는 사실을 말합니다(Rosenthal,1973). 그래서 자식을 칭찬으로 키우라고 합니다. 긍정적으로 키우면 긍정적인 인간성으로 자라고 부정적인 말을 많이 하면서 키우면 부정적인 인성(人性)으로 자랍니다. 한 조사연구에서 대학원 심리학 전공 5명의 남자 학생들은 '사람들은 남들이 기대하는 대로 행동한다'라는 명제가 진실인가를 학인해 보고자 했습니다. 이를 위해 그들의 사회심리학 세미나에 한 평범한 여자 대학원생을 끌어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만약, 우리가 주말마다 5회에 걸쳐 그녀에게 애교있고 매력적이라고 말한다면, 그녀는 결국 그렇게 될 것이라는게 사실인가?'라는 주제를 정했습니다. 네 차례의 주말마다 남학생 각각은 교대로 Melinda를 데려오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매 저녁마다 그녀는 (이 계획을 눈치채지 못했다) 함께 있는 사람들로부터 매우 애교있고 매력적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다섯 번째 주말에는 마침내 나머지 남학생은 그녀와 데이트를 하지 못했습니다. Melinda는 '실제로' 데이트를 한 것이다.(Melinda는 대학을 다니는 동안 한번도 데이트를 해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실, 그녀의 자아개념은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 '볼품없고(ugly) 매력없는' 여자에서 '애교있고 매력적인' 여자로 바뀌었습니다. 그녀는 남들이 그녀에 대해 갖는 기대에 어울리게 옷을 입었고 행동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다섯명이 계속해서 그녀를 매력있는 여성이라고 말할 때 그녀는 정말 그렇게 변화를 시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에게 가능성을 주는 말들을 해야 합니다. 언어는 마음과 생각을 변화시킵니다. 말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합니다. 마음과 생각을 변화시킵니다. 정말로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말을 하느냐하는 것이 그의 마음과 생각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잠6:2)'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네가 잡히게 되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말이 우리의 행동을 변화시킨다는 뜻입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자신의 언어생활에 대하여 어떤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전에는 사용하지 않았던 표현방식을 어느 순간부터 여러 사람이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듣고, 들은 것을 기억해 두었다가, 비슷한 상황에서 말합니다. 다시 말해 말하는 법을 서로에게 가르치고 배웁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긍정적인 표현보다는 욕이나 상대를 조롱하는 말, 경박스럽게 과장하는 표현 등이 파급효과가 더 강합니다. 언어생활에 대한 분명한 영적 원칙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일지라도 저급한 영향력의 노예가 됩니다. “의인의 혀는 순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어 죽느니라”(잠 10:20~21).
| 적용 |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대의 입술에서 걸러내야 하는 표현들은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기도
그 아버지, 저의 입술에 저속한 세상의 언어를 제하시고 하늘을 닮은 맑고 순수한 언어를 담아 주옵소서.
셋째 날(화) ‘작은 것’이 크다
11월 11일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약 3:3~5).
교사강해 3)
야고보는 교회의 지도자 또는 선생이 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를 꼬집어 줍니다. 그것은 “말”입니다. 선생은 현대에는 주로 목사나 장로나 안교교사나 구역장들과 같은 교회 지도자들이 해당합니다. 그런데 “말에”(엔 로고)라는 헬라어는 헬라 숙어로서 공적인 말에 실수가 없는 자란 뜻입니다. 같은 표현으로는 디모데전서 5장 17절이 있습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여기서 “말씀과 가르침”에라는 (엔 로고 카이 디다스칼리아)는 설교와 교육을 말합니다. 즉, Preaching and Teaching 에 수고하는 이들로서 지금 시대로 보면 목사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2절을 1절과 연결하면 공적으로 가르치는 내용에 실수가 없는 자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에게 적용될 수 있는 말씀이 됩니다, 즉, ‘말에 실수가 없는 자’가 되는 것이 성숙한 신자가 되는 것이며 그러한 성도는 삶을 다스린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므로 1절에서 3절까지의 의미는 목사나 교사나 성도들은 온전한 교훈에 서서 바른 진리를 전하며 실수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바른 진리로 온전하게 말하며 살 때에 그의 삶에는 절제의 역사가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곧 온전한 사람이 되어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약 3:3~5을 읽어 보라. 두 가지 예의 공통점은 무엇이며 그것은 혀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말의 입에 물리는 재갈과 배의 키는 그것이 조종하는 것에 비하면 매우 작다. 그러나 손의 작은 움직임만으로 말 또는 배의 방향이 완전히 바뀐다.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약 3:5). 다시 말해서 말 한마디, 한 번의 눈길, 몸짓 하나가 친구를 원수로 만들 수도, 나쁜 상황을 좋게 바꿀 수도 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 15:1). 전력으로 질주하는 말과 물을 가르며 전속력으로 항해하는 배가 모두 엉뚱한 방향으로 간다고 상상해 보라. 그러면 빨리 갈수록 목적지와 더욱 멀어진다. 그럴 때 최선의 방법은 일단 멈춰서 가급적 신속하게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우리의 언어도 마찬가지이다. 대화가 나쁜 방향으로 흐르면 일단 중단하는 것이 상책이다.
눅 9:51~56을 읽어 보라. 제자들의 제안에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는가? 그 결과는 무엇이며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하는가?
비록 제자들은 성경에 선례가 있는 제안을 제시했지만(왕하 1:10, 12) 예수님은 그들의 제안을 거절하셨다. 이 기사는 그들이 “함께 다른 마을로”(눅 9:56) 갔다는 사실을 밝히며 끝난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마을의 거절을 제자들을 위한 배움의 기회로 삼으셨다. 감정이 들끓고 자신을 방어하라는 마음의 요구가 빗발치는 순간에 우리는 비유적으로 “다른 마을로” 가자고 하셨던 예수님의 모본을 기억해야 한다.
교훈 : 만약 대화가 나쁜 방향으로 흐른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다른 마을”로 가자고 하셨던 모본을 따라 대화를 중단하고 방향을 바꿔야 한다.
부가적용)
[애틀란타저널]이란 잡지에 매우 인상 깊은 기사가 실렸습니다.
「나는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힘과 기술을 가지고 있다.
나는 가정과 교회와 국가를 파괴시킨다.
나는 수많은 사람의 인생을 파괴하였다.
아무리 순결한 사랑도 내 앞에는 무력하다.
나는 나의 희생자를 전 역사와 전 세계에 갖고 있다.
내 이름은 중상모략이다.」
공기의 오염보다도 물의 오염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말의 오염입니다. 공기나 물의 오염은 육체의 생명만 죽이지만 말의 오염은 육체의 생명과 함께 영혼의 생명까지 죽이기 때문입니다. 실물교훈 337p 한마디의 말이라도 경솔히 하지 말라. 험담과 경솔한 이야기와 참을성 없는 원망과 불순한 암시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의 입술에서 흘러나와서는 안 된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엡 4:29)라고 기록 하였다. 여기에 더러운 말이라는 것은 더러운 말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신성한 원칙과 배치되고 순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신앙과 배치되는 모든 말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더러운 말은 암시적으로 말하는 불순한 말과 은근한 비평을 암시하는 말들을 포함한다. 이러한 불순한 말이 즉시로 배격되지 않으면 그것이 큰 죄를 범하도록 이끈다. 더러운 말을 억제해야 할 의무가 모든 가정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지워져 있다. 어리석은 말을 함부로 하는 무리들과 함께 있을 때에 할 수 있는 대로 화제를 바꾸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좋지 않은 말은 슬쩍 흘려버리고 유익을 주는 방면으로 화제를 전환시키도록 해야 한다. 자녀들에게 올바른 언어 습관을 가르쳐 주는 것이 부모들이 해야 할 일이다. 이러한 수양에 가장 좋은 학교는 가정생활이다. 자녀들은 매우 어릴 때부터 저희 부모와 서로 간에 존경하고 사랑하는 말을 하도록 배워야 한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온순하고, 참되고, 순결한 말만이 저희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도록 가르쳐 주어야 한다. “예루살렘이 멸망하였고 유다가 엎드러졌음은 그들의 언어와 행위가 여호와를 거스림”(사 3:1-4, 8)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루살렘이 멸망한 이유가 그들의 언어와 행위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경험상 말 한마디가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초래합니까?
말 한마디로 시작된 언쟁이 이혼, 가정파탄뿐 아니라 폭행과 살인을 부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순간의 잘못된 언어 선택 때문에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삶이 파괴되고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됩니다. 화재를 초기에 진압하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말로 시작된 긴장 역시 초기에 가라앉혀야 합니다. 누구나 그런 순간을 맞이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가족과 동료 신자의 즉각적인 개입을 받아들여야 하며 특히 성령의 개입을 위해 스스로 기도해야 합니다.
| 적용 |
대화가 잘못된 방향으로 간다고 느낄 때 가장 좋은 대처 방안은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강물 같은 삶 - “물방울이 모여 강을 이루듯 작은 것들이 모여 삶을 이룬다. 삶은 평화롭고 잔잔하게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아니면 항상 흙탕물을 일으키는 험한 강물과 같다”(That I May Know Him, 209).
기도
성령님, 우리가 어리석은 말로 위험을 자초하려는 순간에 우리의 생각 속에 강하게 개입하셔서 그 때를 지나게 하시고 지혜롭고 현명한 판단력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넷째 날(수) 피해 수습
11월 12일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약 3:6).
교사강해 4)
어떤 왕이 지혜로운 두 신하를 불러서 그중 한 명에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것을 가지고 오라>고 명령하면서 또 다른 신하에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악한 것을 가지고 오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많은 시일이 지난 후 두 신하가 각각 상자 하나씩 안고 돌아왔습니다. "폐하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것을 구해 왔사오니 보시옵소서" 하고 상자를 열자 그 속에 혀가 들어 있었습니다. 다른 신하가 "폐하 이 세상에서 가장 악한 것을 보시옵소서" 하고 상자를 열자 그 속에도 혀가 들어 있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 고 왕이 묻자 두 신하가 대답했습니다. "페하 비록 혀는 작은 것이오나 사용하기에 따라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것이 되기도 하고 또 가장 악한 것이 되기도 하옵니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혀는 가장 선한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가장 악한 평가를 한 몸에 받는 것이 우리의 혀입니다. 성경은 사람들의 언어에 관한 진지한 훈계를 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약 2: 12). 언어는 강력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혀는 작은 것이지만 그 위력은 대단합니다. 높은 산을 올라가는 등산가들은 가끔 작은 숨소리까지 죽여야 할 때가 있다고 합니다. 언젠가 흰 눈이 두껍게 덮인 알프스산 아래로 지나가면서 등산가들이 말하는 말의 파장으로 인해서 눈사태가 일어나 그 아래 있는 마을의 여러 가구를 파묻어 버린 일이 있다고 합니다. 때로는 한 마디의 말이 가끔 이웃의 평화를 깨어버리고, 서로 원망하며 시기하며 분쟁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말 한 마디의 말 때문에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다정한 벗이 원수가 되기도 하며,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도 합니다. 우리의 혀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여 영혼을 살리고 칭찬고 격려로 사람들을 세워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불평과, 원망, 비난, 중상모략으로 상대방을 괴롭히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의 혀의 양면성 중 어느 면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까? 혀의 결함을 고치기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는 믿음의 생활을 오래하시고 종종 믿음으로 충성하고, 봉사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우리의 혀를 제어하지 못해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에도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말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온몸을 잘 다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말이란 눈송이와 같다"고 했습니다. 주먹만한 눈송이도 눈 위를 굴리면 굴릴수록 점점 더 커져서 마침내 큰 집도 무너뜨리고 사람도 깔아 뭉게 버리듯, 말이란 입에서 귀로, 귀에서 입으로 굴러다니는 동안에 불어나서 마침내 얼토당토 않는 괴물을 만들어 내는 데 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한 말이 확대되고 심지어 더 이상 수습하지 못할 정도로 과장되었던 경험이 우리 모두에게 있을 것이다. 야고보는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약 3:5) 라고 하였다.
약 3:6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자세히 읽어 보라. 야고보가 “온 몸”을 더럽히는 혀와 언어의 힘에 대해서 하려는 말은 무엇인가? 우리가 이 성경절을 생각한다면 말하기 전에 긴장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불은 정결을 상징하기도 한다(사 4:4, 슥 13:9). 그러나 많은 경우 그것은 파괴를 뜻한다(수 6:24, 11:9, 11, 삼상 30:3, 마 7:19 참고). 여기에는 무분별한 말의 파괴력도 포함된다(잠 16:27, 26:21).
작은 불은 큰 불로 번질 뿐 아니라 놀라운 속도로 모든 것을 황폐화시킨다. 마찬가지로 말 또한 우정, 결혼관계, 명예 등을 파괴시킬 수 있다. 파괴적인 말은 어린 아이의 마음에 착상되어 그들의 자아상과 미래의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
이 세상의 죄는 외견상 순수한 질문에서 비롯되었다(창 3:1). 하늘에서도 죄는 비슷한 방법으로 시작되었다. 루스벨은 “하늘의 존재자들을 다스리는 율법에 관하여 의심을 심어 주기 시작하였다”(부조와 선지자, 37). 그래서 혀의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약 3:6) 난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한번 내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는 피해를 최소화하고 바로잡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일을 바로잡기 위한 과정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도움을 준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추가적인 계시를 주시자, 선지자 나단은 다윗에게 돌아가 즉시 그가 전한 말을 수정하였다(삼하 7:1~17).
교훈 : 말의 부정적인 영향을 줄이려면 우리는 항상 성령의 도움을 구하며 말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부가적용)
* 내가 한 말을 우리 하나님께서 다 들으시고 응답해주시기 때문에 조심해야 됩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우리는 듣는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하는 말을 하나님도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인격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우리는 듣습니다.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 12:36-37)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무익한 말까지도 다 하나님께서 심문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말은 씨가 되어 열매를 맺습니다. 말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모든 말은 기도적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한 자매가 유능하고 인물 좋은 남자와 교제하다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워낙 인물이 좋았기 때문에 주위에 여자들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애정관계가 복잡했습니다. 너무 속상해서 부인이 속으로 이렇게 불평했습니다. '차라리 혼자 사는 것이 좋겠다. 교통사고라도 나서 확 죽어버려라'고 막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남편이 한강변 조용한 숲 속에서 술을 마시고 돌아오다가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었습니다. 자기가 말한 대로 응답된 것입니다. 모세같이 위대한 사람도 말 한마디 잘못해서 그의 사역이 끝이 났습니다. 모세가 자기 백성들이 원망할 때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민 20:10) 하고 지팡이를 들어 반석을 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반석에 명하여 물을 내라'고 말씀하셨는데 백성들을 향해서 분노해서 반석을 쳤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민 20: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 한마디의 실수로 모세 같이 위대한 사람도 그의 사역이 끝이 나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한 그들의 말실수 하나가 결국 모세라도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모세 같이 위대한 사람을 말 한마디의 실수로 그를 역사의 무대에서 뒤로 물러나게 하였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말에 있어 실수하지 않도록 역사의 귀감이 되고 지도자의 귀감이 되도록 기록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불신의 말이나 우리가 믿음이 없는 말을 한 번이라도 경솔히 내 뱉지 않도록 오직 믿음의 말을 하고 오직 믿음으로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에게 심은 대로 나에게 돌아옵니다. 여러분들이 남에게 좋은 말을 하면 좋은 말이 여러분에게 올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남에게 나쁜 말을 하면 여러분에게도 나쁜 말이 되돌아 옵니다. 우리는 오늘서부터 좋은 말만 가려 쓰도록 우리의 입술에 파수군을 세우시기를 바랍니다. 왜 말을 조심해야 되느냐? 심은 대로 거두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심어서 내가 거두는 것입니다. 좋은 말 심어주면 좋은 것이 나에게 거두어지는데 친절한 말은 친절한 것으로, 선한 말은 선한 것으로 거두어집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공적인 또는 사적인 대화에 앞서 얼마나 자주 성령께 도움을 요청합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부인한 잘못을 비통히 여겨 울었고 후에 참회의 진정성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요 21:15~17). 물론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약 3:8)을지라도 성경은 우리에게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할지어다”(시 34:13)라고 권고한다. 오직 하나님의 영만이 우리가 말을 자제하도록 도우실 수 있다(엡 4:29~32 참고).
| 적용 |
늦은 감이 있겠지만 그대가 최근 내뱉은 부정적인 말에 대한 수습책은 무엇일까요?
영감의 교훈
기도
아버지, 순수하지 못한 동기와 나쁜 감정을 실어 내뱉은 말 때문에 가족과 이웃에게 상처를 주고 부정적인 감화를 끼쳤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저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성령을 통하여 제 입술을 다스려 주옵소서.
다섯째 날(목) 축복과 저주
11월 13일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약 3:10).
교사강해 5)
미국 존 홉킨스 대학병원에는 ‘신의 손’이란 별명을 가진 소아신경외과 과장 ‘벤 카슨’ 박사가 있습니다. 그가 세계 최고의 ‘신의 손’이라는 별명을 갖게된 데는, 특별한 이력이 있습니다. 많은 의사들이 수술을 포기했던, 하루 120번씩 발작을 일으키던 4살짜리 악성뇌암 환자를 수술로 완치시켰고, 머리와 몸이 붙어서 태어난 ‘샴 쌍둥이’를, 세계에서 처음으로 분리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러한 수술을 통해 ‘벤 카슨’은, ‘신의 손’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의 손을 가진 벤 카슨 박사도, 성장기를 아주 어두웠기에, 지금과 같은 세계적인 의사가 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는 디트로이트 빈민가에서 태어나, 8살 때 부모의 이혼으로 편모슬하에서 자라면서, 불량소년과 어울려 싸움질만 하는 불량소년에 불과했습니다. 피부가 검다는 이유로, 백인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했고,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구구단을 외우지 못했고, 산수시험을 한 문제도 맞추지 못하는, 항상 꼴찌만 하는 지진아였습니다. 이런 불량소년이 오늘날 어떻게, 세계 의학계에서 신의 손이라는 칭송을 듣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한 기자가 “무엇이 오늘의 당신을 만들었느냐?”고 묻자, 그는 “나의 어머니, 쇼나 카슨 덕분입니다” 어머니는 내가 늘 꼴찌를 하고, 흑인이라고 따돌림을 당할 때, ‘벤 너는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노력만 하면 뭐든지 할 수 있어!’하며, 끊임없이 용기와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어머니가 끊임없이 불어 넣어준 “노력만 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말에 사로잡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공부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결국 의대에 들어가 ‘신의 손’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성공한 사람 뒤에는, 반드시 성공하게 만들어주는 말이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 뒤에는, 반드시 행복을 만들어주는 말이 있다. 말은 현실을 창조하는 힘이 있습니다. 말은 보이지 않지만, 무한한 창조력과 힘을 가진 인생 최대의 자산입니다. 그래서 잠18:21은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를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고 하였다. 사람은 말의 열매를 먹고산다. 독이 든 말을 먹으면 죽고, 생명이 들은 말을 먹으면 산다. 이렇게 우리가 하는 말은,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우리가 “죽겠다”고 말할 때, 어깨가 축 늘어짐을 느낍니다. “죽겠다”고 하는 순간부터, 우리 몸의 모든 조직과 세포와 신경이 죽을 준비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살 수 있다. 나는 산다”고 말하면, 몸의 모든 조직과 세포와 신경이 살 준비를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약 3:9~12을 읽어 보라. 야고보는 샘, 무화과나무, 포도나무를 들어 어떤 진리를 예증하는가?
그리스도인의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함께 나온다니 한마디로 혼란스럽다. 주중에 온통 불경한 TV 프로그램과 영화를 보고 안식일에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어떤가? 예수님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와 진리를 말한 사람이 잠시 후 저속한 농담을 말한다면 어떻겠는가? 이런 상황은 영적으로 혼란을 초래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가 옳다고 여기는 것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동일한 입으로 추잡스런 농담을 던진다면 그러한 모순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야고보는 ‘샘’을 비유로 든다. 물의 등급은 수원의 질에 좌우되며 뿌리는 열매의 가치를 결정한다(마 7:16~18과 비교).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파종되면 그 작용이 우리의 삶에 드러나기 마련이다. 우리는 이런 진리를 이해할 때 자신의 믿음을 증명해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난다. 깨끗한 물 근원이 그것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물 외에 다른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순수한 신앙은 자기 확증적인 믿음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어떤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이 인생의 밑바닥으로 추락하는 순간(예를 들면 모세가 이집트인을 살해하고, 다윗이 밧세바와 간통했던)을 엿볼 수 있다면, 과연 그들의 신앙 고백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까?
물론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죄 짓지 않는 것이다(요일 2:1).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부터 약속의 희생 제물에 대한 믿음을 근거로 우리가 죄를 짓더라도 용서받을 수 있도록 대책을 마련하셨다(시 32:1~2 비교).
교훈 : 우리의 입술로 축복과 저주를 담는 것은 분명 모순이다. 물론 우리는 죄를 용서받을 수 있지만 더욱 죄를 이길 능력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부가적용)
큰 여성의 회합 장소에 한 여성 강사가 초대되어 "행복한 생활의 비결"이라는 제목으로 이야기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사회자는 이 여자 강사를 소개하면서, 그분은 밝은 성품과 행복한 생활 태도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는 사람이라고 소개를 했습니다. 이제 행복한 생활의 비결이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시작하는 그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서두에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뜨내기 부랑자가 저의 성품을 완전히 변화 시켰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아주 조용해 졌습니다. 뜨내기 부랑자가 이 여자를 변화시켰다니....그 강사는 다시 말을 이어 갔습니다. "하루는 아침 식사를 하고 그릇을 닦느라고 부엌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누가 뒷문을 노크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문을 열고 보니, 한 뜨내기 부랑자가 모자를 손에 벗어 들고 공손히 절을 하고 서 있었습니다. 그는 저에게 말하기를, '부인, 저는 구걸하는 일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일을 많이 찾아보았으나 찾지를 못했습니다. 저에게 아침밥을 좀 주시면 제가 무슨 일이라도 해 드릴 수 있는데, 제가 할 수 있는 어떤 일이 없으신지요?' 저는 뜨내기 부랑자에 대하여는 한 치의 동정도 갖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손을 뒷짐 지고 서서 그 사람을 내려다보며 냉정한 말로 말했습니다. '나는 내 생활을 위해서 일해 온 사람이고, 당신 같은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줄 것이 없어요! 당신 동료 뜨내기들에게 가서 말해요! 우리 집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구요!' 그래도 그 부랑자는 모자를 만지작거리며 그냥 거기에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난 소리를 쳤습니다. '당신이 가지 않고 거기 서 있으면 내 남편을 부를 거에요!' 그러자 그는 고개를 천천히 들더니 나를 바라보며 '부인의 남편은 지금 집에 안 계실 겁니다.' 그래서 나는 놀라며 그 사람에게 어떻게 내 남편이 집에 없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무시하는 음성으로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댁의 남편이 집에 있다면 그것은 몸이 아프기 때문일
- 이전글ABN 교과해설-야고보서 7. 혀를 길들임[홍순명] 14.11.09
- 다음글cbn라디오교과 2014년 4기 제 7과 혀를 길들임 14.11.07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