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과 영원한 복음(교사들을 위한 강해와 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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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13과 영원한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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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7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20분
기억절 :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렘 31:3, 개역).
도입)
우리는 오늘 야고보서의 마지막과의 결론을 배우게 됩니다. 제목이 영원한 복음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복음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살리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가장 중요한 것은 죄인 되어 죽을 모든 인생들을 살리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인이 의인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는데 하나님의 의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는 이것이 우리를 영원으로 인도하는 영원한 복음입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큰 믿음이 요구됩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로마서 3:21-22)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로마서 10:11-13)
연구 범위 : 히 4:2, 시 130:3~4, 눅 15:11~32, 롬 3:24~26, 히 10:1~4, 계 14:12
우리는 야고보서를 연구하면서 많은 주제를 복음과 연관시켜 살펴보았고 다른 성경의 저자들과도 비교하였다. 야고보서의 말씀이 특히 복음과 같은 핵심 주제와 관련해서 성경의 다른 부분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명확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확인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이유는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계 14:6) 영원한 기별을 전할 남은 교회의 사명의 기초가 바로 복음이기 때문이다.
이번 기 마지막 주에 우리는 “영원한 복음”에 관한 기본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복음은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관한 소식이며 야고보서를 포함하여 성경 전체가 가르치는 교리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핵심적인 요지를 기억해야 한다. 즉 성경은 특히 구원과 같은 기본 교리에 있어서 자체적으로 모순되지 않는다. 성경에서 복음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한 기 동안의 연구를 마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큰 구속의 계획의 그림 속에 야고보서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더욱 잘 이해하게 되었다.
*교사는 13째 안식일학교 헌금을 강조해 주십시오.
*나의 영적 성장 보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하십시오.
안교 활동반과 교과 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탕자의 비유에서 불순종한 자녀마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다.
➋ 느끼기 :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의 선물을 진심으로 받아들인다.
➌ 행하기 : 하나님을 자녀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항상 기다리는 사랑의 아버지로 설명한다.
Part 1.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2.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3.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세월이 흘러도 바꾸고 싶지 않은 것은 무엇입니까?
❷ 각자 구약에서 발견한 십자가 또는 복음이 있다면 나눠봅시다(미리 요청).
❸ 우리가 야고보서에서 배운 교훈과 더불어 결코 잊지 말아야 할 복음의 핵심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❹ 우리는 남은 교회로서 어떤 마음과 접근 방식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B. ❶ 그대의 배우자 또는 가족이나 친구에게서 볼 수 있는 한결같은 장점은 무엇입니까?
❷ 그대는 복음이 구약에서 신약까지 항상 동일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❸ 계시록은 어떤 의미에서 세 천사의 기별을 ‘영원한 복음’으로 제시하고 있을까요?
❹ 우리에게 위임된 ‘영원한 복음’을 전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바람직한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결론 :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생애의 모든 순간마다 그분의 크신 사랑의 마음을 깨달아 그분과 화목하도록 모든 힘과 은혜와 자비를 다해 노력하십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나의 영적 성장 보고서’를 함께 작성하고 제출합니다.
❷ 2015년 1기 교과책을 나눠 주고 열심히 공부하기로 함께 다짐합니다.
❸ 안교반과 소그룹의 질적, 양적 성장을 위해 함께 기도합니다.
첫째 날(일) 구약에 나타난 복음
12월 21일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히 4:2).
교사강해 1)
히 4:2절의 배경을 이해하려면 히 4:1절을 알아야 합니다. 히 4: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히 4:1절의 하나님의 안식이란 궁극적으로 천국에서 누리는 영원한 안식을 말합니다. 하나님 아들을 통해 전해진 구원의 복음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복음을 들었어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한 사람들에게만 성취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길은 복음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뿐입니다. 믿음의 반응이란 복음의 말씀을 마음으로 믿을 뿐 아니라 삶 속에서 실천하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진정한 안식을 누리는 복을 얻게 됩니다. 죄인들에게는 안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안식이 없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구원 받은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참 평안과 구원의 날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통해 얻어지는 구원을 체험한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안식이며, 안식일은 구원받고 복을 받고 거룩하게 된 자들만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사뭇 놀랍다. 먼저 단순히 좋은 소식이 아닌 “그 복음”이 구약시대에도 전해졌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 복음이 신약시대에 전해진 내용으로 그 당시에도 전해졌기 때문이다. 기별 자체에 어떤 차이점이 있었다는 암시는 없다. 따라서 문제는 기별이 아니라 그것을 듣는 귀에 있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같은 기별을 다르게 듣는다. 그러므로 복음이 전파될 때 우리가 그것을 바르게 들을 수 있도록 말씀과 가르침에 대한 믿음에 확고히 서는 것이 중요하다.
아래 성경절을 찾아 읽고 각각 복음의 기별을 요약해 보라.
창 3:15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출 19:4~6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시 130:3~4, 32:1~5 “허물의 사함을 받고…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사 53:4~11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렘 31:31~34 “내가…새 언약을 맺으리라…나의 법을…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공통적으로 반복되는 주제를 보았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개입하신다. 그분은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와 죄 사이에 ‘적의’를 두셔서 우리가 “즐겨 순종”(사 1:19)하게 하신다. 한 사람이 많은 사람의 죄과를 지고 그들을 대신하여 죽고, 합당치 않은 사람이 의롭게 된다. 옛 언약과는 달리 새 언약에서는 법이 마음에 기록되고 죄가 다시 기억되지 않는다(히 8:12). 요컨대 용서와 ‘새로 남’은 한 꾸러미이다. 칭의와 성화는 죄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을 대표한다. 위의 성경절들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기별은 성경 전체에 걸쳐 동일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것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다 하신다.
교훈 :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 속에 개입하셨고 아들을 보내시며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복음을 전하셨다.
부가적용)
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시는 죄사함이 필요하였을까요? 성경의 가르침 중에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죄사함입니다. 구약의 속죄제사의 모든 것이 모두 다 속죄함과 죄사함에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하늘에서 사망이라는 판결을 받을 만큼 중대한 죄를 지은 대역죄인들입니다. 이 땅에서도 죄를 지으면 사형 선고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이 땅에 있는 모든 죄인들이 한 번 죽는 것이 정해진 사형수가 되었습니다(히 9:27). 그러나 죄인의 목숨을 대신할 누군가의 희생이 있다면 멸하기로 작정된 죄인이라 할지라도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왕상 20장 42절, 히 9장 22절).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로 이 땅에 임하신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 대신 속죄 제물로 희생당하셨습니다(마 1장 21절, 마 20장 28절). 십자가에서 흘리신 희생의 보혈로 우리의 무거운 죗값을 다 치러주시고, 우리가 죄에서 해방 받아 그토록 바라던 구원 곧 죄 사함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사 53장 5~6절, 계 1장 5절). 딤전 1장 15절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 엡 1장 7절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구약의 대속의 복음은 우리 죄인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원형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얻게 되는 구원의 복음, 곧 그 원형이었습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믿음의 눈으로 보는 구약은 그대에게 어떤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구약과 신약 사이에 중대한 수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표적으로 구약이 율법과 행위에 기초한 구원을 가르치고 신약은 믿음과 은혜에 기초한 구원을 가르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구약 전체를 뒷받침하는 성소와 제사 제도는 죄인을 용서하는 하나님의 대속적인 사랑과 은혜를 노래합니다. 그것들이 예표했던 것처럼 메시아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먼저 구원하신 다음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안내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칭의와 성화는 죄 문제를 위한 하나님의 해결책입니다.
| 적용 |
그대는 현재 어떤 말씀 또는 어떤 성경의 명령을 믿음과 결부시킬 필요가 있습니까?
영감의 교훈
기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일찍 죽음을 당하신 주님, 주는 처음부터 우리를 용서하셨으며, 우리를 은혜의 나라로 초청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의 눈을 주셔서 우리의 삶과 역사에 개입하셔서 일하시는 변함없으신 사랑의 구주를 보게 해 주시옵소서.
둘째 날(월) 구현된 복음
12월 22일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눅 15:21, 24).
교사강해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롬1:2) 구약은 복음을 약속한 책이며 복음이신 그리스도 예수에 관한 선지자들의 기록입니다. 구약을 복음과 무관한 율법으로 간주하는 것은 바울의 관점과 대립이 됩니다. 구약과 신약은 모두 복음에 관한 책입니다. 약속된 복음과 구현된 복음을 각각 기록한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도 같은 복음을 전해 들었으며 그것에 대한 반응으로 동일한 믿음의 요구를 받았기에 신약의 성도들과 다르지가 않습니다. 여기에 신구약의 통일성이 발견됩니다. 즉 동일한 복음, 동일하신 그리스도, 동일한 믿음의 원리가 신구약에 적용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복음의 본질을 명료하게 설명합니다. 즉 복음은 선지자를 통하여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것인데 그 아들은 인성과 신성으로 구분되며 육신을 따라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거룩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선포되신 분이십니다. 바울이 생각한 복음의 본질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관계된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과 그의 행하신 사역으로 이해해도 무방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서에서 복음을 찾기 매우 어려워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전체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면 율법주의적으로 보일 수 있다.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대부분 그들이 하나님 앞에 유리한 입장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의무적인 성전세를 납부함으로 성전을 후원했고, 때마다 제물을 바쳤다. 그들은 부정한 음식을 삼가고, 남자 후손에게 할례를 행했으며, 절기와 안식일을 지키고, 대부분 종교지도자들이 가르치는 대로 율법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요한이 나타나 회개하고 침례를 받으라고 했다. 더욱이 예수님은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요 3:3, 5)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고 하셨다. 즉 예수님은 ‘너희에게 없는 것이 필요하며, 너희의 행위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눅 15:11~32과 18:9~17을 읽어 보라. 이 비유들은 어떻게 복음을 예증하는가?
탕자의 비유에서 아들은 잃은 바 되었지만 그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마침내 그는 새로운 방식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기 시작하고 돌이키기를 갈망한다. 그의 자부심은 사라졌다. 그는 품꾼 중에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으나 아버지의 극진한 환대에 놀란다. 부자의 관계는 회복되었을 뿐 아니라 변화되었다.
예상을 뒤엎는 반전은 두 번째 비유에서도 나타난다. 하나님은 ‘의로운’ 바리새인은 제쳐두고 ‘죄 많은’ 세리를 영접하실 뿐 아니라 그를 의롭게 하고, 용서하며,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신다.
교훈 : 인간의 노력으로 이룬 의는 구원받기에 쓸모가 없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와 자비가 필요하다.
부가적용)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아들이야기 곧 탕자의 이야기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어떻게 집나간 자식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아들입니까? 하나님의 집을 떠난 인간은 죄로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떠난 자들은 모두가 생명이 없는 무정란이나 진배가 없습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썩어 없어질 인간의 몸, 그 썩어질 가죽 옷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걸치고 있는 옷은 앞으로 썩어 없어질 가죽 옷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떠나게 된 모든 인간은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고, 결국 죽은 것으로 여겨진 것입니다. 그런 인생이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오고 하나님의 나라를 믿고 돌아와 회개할 때, 하늘 아버지께서 탕자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신 것은 바로 구원의 옷, 생명의 옷이었는데 이것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생명의 옷, 그리스도로 옷입은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침례를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로 옷입었다(갈 3:27)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란 하나님의 형상(고후 4:4)입니다. 인간은 썩어 없어질 더러운 거지처럼 썩어 없어질 육체에 속하여 살며 소망 없이 죽게 된 것을 침례를 통해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거듭난 사람들, 새로 태어난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아들이라 부른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간은 모두 죽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멀어져 죽은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살려주시는 우리의 하나님 그리스도께로 돌아와 믿고 구원을 얻어 새생명을 얻게 된 자들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야기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구현된 복음인 것입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대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두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버지로 그리고 경건치 않은 자들을 의롭게 여기시는 분으로 분명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예수님은 포도즙 잔을 드시며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고 설명하셨다. 그분은 진정 유월절 어린양으로 고난을 받으셨으며, 우리가 당해야 할 죽음을 죽으셨다. 우리는 거저 구원을 받는다. 왜냐하면 그분이 그것의 온전한 값을 치르셨기 때문이다.
| 적용 |
그대는 어떤 경험을 통해 우리가 인간적인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해야 한다는 깨달음에 이르렀습니까?
영감의 교훈
기도
우리의 노력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서지 못함을 고백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에 의지합니다. 우리가 이것저것을 행하나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는 작은 몸짓이 되기를 원합니다.
셋째 날(화) 바울 서신에 나타난 복음
12월 23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고후 3:15~16).
교사강해 3)
유대인들은 엄격한 계율과 금령, 그리고 거기에다 사람의 계명(마 15:9)까지 더하여 인간의 행위로 구원 받는 것을 고집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영의 눈이 뜨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구약에 기록된 수많은 예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상징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인줄 알지 못했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 1:11)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공생애 중에 여러 차례에 걸쳐 교훈과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구주 되신 것을 나타내었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도외시 하였습니다. 오히려 그 당시 가장 처참한 형벌인 십자가 형틀에 예수님을 못 박는 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모세가 얼굴을 수건으로 가린 것처럼 유대인들은 그 마음속에 수건 같은 무지함이 덮여서 구약을 읽어도 예수님에 대해서 전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사 6:9), 오직 구습에 매여 완악해졌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습니다(고전 1:30). 이러므로 우리의 모든 어리석음은 예수님을 믿고 바라보면 깨끗이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구원의 지식을 얻게 되고, 생명의 지식을 얻게 되며, 영원한 소망의 지식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영안이 열리고 성령님께서 조명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구약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이요, 그림자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건을 벗고 보는 것같이 구약의 참된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마음을 가리는 수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안에 거할 때 사라지게 됩니다.
대다수의 이스라엘 백성과 마찬가지로 바울도 자신이 영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갈 2:20)이심을 알게 되자마자 자신이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바 되었으며,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그분의 원수이고, 의인이 아니라 죄인 중에 괴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졌다. 즉 구약에 대한 이해가 바뀌었다. 성경에 나타난 그리고 바울 개인에게 임한 하나님의 계시는 그의 심령을 변화시켰고 그의 생애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런 기본적인 사실을 알아야 우리는 그의 서신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을 배경으로 고후 3:14~16을 읽고, 그다음에 2~6절을 읽어 보라. 바울은 여기서 어떤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는가?
구약의 의미는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야’(16절) 분명해 진다. 예수님은 구원의 길이다. 예수님은 구원의 시작이자 마지막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울이 회심하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순종을 신뢰함으로써 죽음의 기별자로서의 구약을 경험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을 포함하여 모두가 죄를 지었고 그래서 계명이 그들을 정죄했기 때문이다(롬 3:23, 고후 3:7). 반대로 고린도의 신자들은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고후 3:3) 그리스도의 편지였다.
롬 1:16~17, 3:24~26을 읽어 보라. 바울은 복음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무엇을 얻는가?
교훈 : 예수님을 만나 그분을 믿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성경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의 용서와 속량함 그리고 의롭다 하심을 경험할 수 있다.
부가적용)
예수님께서 구약의 모든 예언을 다 이루시고 부활 승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성경의 참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율법으로 인하여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려고 애쓰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도외시 하게 된다면 율법의 의의와 효력은 아무런 의미 없이 사라지게 됩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삶은 제아무리 거룩하고 경건해 보여도 그것은 하나의 외식에 불과하며 인간의 공허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형식과 외식에 얽매여 율법의 수건을 벗어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수건을 벗기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수건으로 마음을 가리고 성경을 찬란하게 빛나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바울이 편지를 쓸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복음은 그대의 삶에 얼마나 큰 능력을 발휘합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복음은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의란 우리가 행한 것이 아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에 기초해 있고 우리는 믿음으로 그것을 주장한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성장하는 것이 믿음이다(롬 1:17). 바울은 이 말씀의 의미를 로마서에서 밝혔는데 그 핵심적인 의미는 로마서 3장 말미에 있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속량함’(하나님이 우리 죄 값을 대신 치르시고 우리를 회복시키심)과 ‘의롭다 함’(우리의 죄책이 사라지고 은혜로 말미암아 정결케 됨)과 ‘용서’(하나님이 우리를 용납하시고 과거의 죄를 잊으심)를 받는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예수를 믿는 경건하지 않은 자들을 의롭게 여기시고 그리하여 자신의 의로움도 증명하신다.
| 적용 |
그대가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고 싶은 복음의 진가는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기도
아무리 노력해도 절망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 조건 없이 저를 사랑하시는 주님으로부터 진정한 구원을 찾았습니다.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신 주님의 의로우심을 인하여 감사와 기쁨의 찬양을 드립니다.
넷째 날(수) 새 언약
12월 24일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히 12:2~3).
교사강해 4)
옛 언약과 새 언약이라는 용어는 그 언약이 생겨난 때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그 언약이 발효된 때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언약이 발표된 때를 기준으로 하면 새언약이 먼저고 옛 언약이 나중입니다. 새 언약은 창세기 3장 15절에서 발표되었습니다. 이 언약은 “은혜의 언약”이라고 불리워집니다(부조와 선지자 370). 창세기 2장 17절을 가리켜 “생명의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지 않는다면 영생할 수 있다는 언약이 그 말씀 속에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을 어긴 것을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호 6:7)고 하였습니다. 창세기 3:15절은 생명의 언약을 어기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구세주를 보내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이 언약을 “은혜의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이 언약은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창 22:18)라는 약속 가운데 아브라함에게 되풀이 되었는데 아브라함은 이 언약이 곧 그리스도에 대한 언약임을 이해하였고 믿음으로 그를 영접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갈 3:8, 16참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7)고 선언하셨습니다. “비록 이 언약은 아담과 맺어지고 아브라함에게 되풀이되었으나 그리스도의 죽으심까지는 비준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구속에 대한 첫 통고가 주어졌던 때로부터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존재했고 믿음으로 받아들여졌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비준하신 때로부터 그것은 새 언약으로 불리워졌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이 언약의 기초이었으며, 그것은 단순히 그들을 다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게 만들고 그들을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할 수 있는 위치에 처하게 하는 계획이었습니다. 성경에 ‘옛’ 언약이라 불리는 다른 약속이 시내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체결되었고 그것은 희생 제물의 피로 그 때에 비준되었다. 아브라함과의 언약은 그리스도의 피로 비준되었고 그것을 비준시킨 피가 처음 언약의 피보다 후에 흘려진 까닭에 그것은 ‘둘째’ 또는 ‘새’ 언약이라고 불린다”(부조와 선지자 370, 371).
히브리서는 새 언약을 옛 언약보다 더 낫다고 설명한다(히 8:1~2, 6).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결함이 있는 옛 언약을 세우셨을까? 하지만 문제는 언약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에 있었다. 히 7:19, 8:9. 10:1~4을 읽어 보라. 옛 언약에 대해 어떤 문제점들이 언급되었는가?
이스라엘 백성은 신실하게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히 8:9) 않고 불순종하며 반역적이었다. 이것은 동물 제사가 죄를 없애지 못했다는 사실과 함께 죄 문제가 그대로 남아있음을 의미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히 10:10) 옛 언약 아래 행해진 죄를 포함하여 모든 죄가 속량될 수 있었다(9:15 참고).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더 좋은 소망”이 생긴다. 우리는 새 언약의 소망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간다(히 7:19).
어떤 의미에서 새 언약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에덴에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후손에 관한 약속이 주어진 이후로 구원의 계획은 언제나 “죽음을 당한 어린 양”(계 13:8)이신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예언해 왔기 때문이다(렘 32:40, 히 13:20~21, 요 13:34 참고).
“은혜의 언약은 새로운 진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생각 속에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영원한 언약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The Faith I Live By, 77).
한편 우리가 바울의 서신에서 보았던 것처럼 우리가 주께로 돌아갈 때 특별한 일들이 생긴다. 하나님은 영원한 언약과 관련하여 “내가…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렘 32:40)리라고 약속하셨다.
교훈 : 성경의 모든 언약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이다. 우리의 관점이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변화될 때 비로소 옛 언약은 새 언약이 될 수 있다.
부가언약)
“아브라함과의 언약에 구원의 약속이 포함되었다면 왜 시내에서 다른 언약을 세우셨을까? 백성들은 노예 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아브라함과 세운 언약의 원칙을 대부분 잊어버렸다. …그들은 우상숭배와 부패 가운데서 살았으므로 하나님의 거룩하심, 그들의 마음속에 가득 찬 죄악, 그들 스스로는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기에 전혀 무능함, 구세주의 필요 등에 대하여 바른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을 그들은 배워야 하였다”(부조와 선지자 37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후 순종을 조건으로 큰 축복을 약속하시면서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5, 6)고 하셨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악과 그리스도 없이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선뜻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를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출 24:7)라고 선언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언약이 맺어졌습니다. 십계명은 돌에 새겨져 언약궤 안에 보관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언약을 지키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새 언약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렘 31:33, 34). “돌판에 새겨진 같은 율법이 성령에 의하여 마음 판에 기록된다. 자신의 의로움을 세우려 하는 대신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우리 마음에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생애를 살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의 임재로서 우리는 그분께서 행하신 대로 행할 수 있다”(부조와 선지자 372). 하나님의 율법을 마음에 새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우리는 본능이라고 부릅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은 배우는 것이 아니고 타고난 것입니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창 1:26, 27).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의 품성의 사본”(실물교훈 305)이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 안에 하나님의 율법이 새겨져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 율법이 훼손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훼손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자식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연습하지 않아도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새 언약 가운데서 이제는 그분의 율법을 돌비에 기록하지 않고 우리 마음에 기록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 마음에 새겨지면 마치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일이 저절로 되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저절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승리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거져 주시는 선물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계명은 너희에게 무거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너희가 나를 믿으면 내가 그 계명을 너희 마음에 기록하여 저절로 지켜지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새 언약의 관점에서 그대가 발견한 소망은 무엇입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믿음이 없다면 동물 희생을 바치는 것은 죗값을 지불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 대신 우리가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히 12:2~3) 예수님을 바라본다면 측량할 수 없는 죄의 값이 “영원한 언약의 피로”(13:20) 그분에 의해 지불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깨닫게 된다. 새 언약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과 같이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을 변화시킨다.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요 13:34) 우리가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새로운 언약이라고 할 수 없다(레 19:18).
| 적용 |
새 언약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에 순종할 수 있을까요?
영감의 교훈
기도
저 같이 몹쓸 죄인을 위해 죽으실 만큼 저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직 주님께 구원의 소망이 있음을 믿습니다. 주만 바라봅니다. 주를 닮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 하늘같이 푸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게 해 주시옵소서.
다섯째 날(목) 복음의 절정
12월 25일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의 나팔을 불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하나님의 그 비밀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계 10:7).
교사강해 5)
어떤 유머에 보니까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각국을 대표하는 열 사람이 소형 배를 탔습니다. 그런데 그 배의 수용 인원은 7명밖에 안돼서 3명은 바다로 뛰어내려야 했습니다. 먼저 영국 사람이 “여러분, 제가 대영제국의 신사도를 발휘 하겠습니다”며 뛰어내렸습니다. 그 다음 미국 사람이 “세계 최강국 사람으로서 여러분을 위해 희생 하겠습니다”며 뛰어내렸습니다. 그 다음 한국 사람이 벌떡 일어나 “대한 독립 만세!”를 세 번 외친 후 일본 사람을 뒤에서 밀어버렸답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아직도 일본에 대한 콤플렉스가 많습니다. 유머를 만들어도 일본에 대하여는 별로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2002년 월드컵 축구에서 한국은 일승을 챙기고 일본은 명예 한국시민인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호주한테 후반 막판 3골을 먹으니까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우리 집 앞집에서도 소리를 지르고 좋아했습니다. 우리는 일본을 왜 그렇게 싫어하고 미워합니까? 과거 35년간 일본으로부터 자유를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일본이 우리나라의 자유를 빼앗아간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유를 잃었던 민족일수록 자유가 얼마나 고귀한 줄 잘 압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일본으로부터 자유 독립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적 자유보다 더 중요한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죄와 사단으로부터의 자유가 더 소중한 것입니다. 곧 예수님 안에서 얻은 진리로 말미암은 자유입니다. 예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얻을 수 있는 자유가 무엇인지 참된 복음이 무엇인지 참으로 중요한 월드컵 승리보다 더 중요한 승리는 무엇입니까? 신약 성경을 펼치면 시작되는 책이 바로 복음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그 수많은 행적 가운데 거의 비슷한 내용들을 반복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복음서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쉽게 미루어 짐작하게 됩니다. 거기에다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처음 외치시기로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너희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고 하시면서 복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런데 막상 복음이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 물음에 자신 있게 나서서 대답하는 교인들이 많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그들 가운데에서도 오죽하면 그냥 한자 뜻을 풀어서 복음(福音)이란 곧 복된 소식이라고 대답하는 교인들도 상당수인 것을 보면 복음이 그 가치에 비해서 매우 소홀히 다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도 듭니다. 그렇다면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라는 물음에 성경은 무엇이라고 대답하고 있을까요? 미국의 한 코미디언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결코 피할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세금 내는 일이고 또 하나는 죽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죽음보다 정확한 통계치를 가진 사건은 또 없을 것입니다. 한 명 중 한 명은 반드시 죽습니다. 죽음이 너무나 분명한 인간의 명제이기에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철학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헬라에서 복음을 전하던 사도 바울 당시에도 바로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구하던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행17:18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혹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지금 행 17:18절의 에비구레오(Epicurean)라는 말은-에피큐러스학파이고, 스도이고 철학자란 스토아 철학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두 학자들과 바울과 부딪치는 중요한 두 가지 관점이 있었습니다. 죽음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바울이 헬라에 전한 주요한 내용은 “예수와 또 몸의 부활”을 전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가장 중요한 복음의 이슈는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과 예수님의 몸의 부활이었습니다. 당시 스토아 철학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죽음에 대한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당시의 스토아 철학자들은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 똑똑한 사람들의 전형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땅의 지식인들의 대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계 10:7은 14:6과 더불어 요한계시록에서 구체적으로 복음 전파(유앙겔리조 : 복음을 전하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예외적인 성경절이다. 계시록 10장과 14장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부르심과 사명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다른 집단에게 하지 않은 특별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복음”을 전하도록 사명을 맡기셨다.
알다시피 복음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두 동일하다. 율법도 같고 언약도 한가지이다. 예수님과 바울, 야고보 모두가 복음은 아브라함이 믿었던 것과 동일함을 확증했다(요 8:56, 롬 4:13, 약 2:21~23). 어떤 사람은 이 같은 확신을 갖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복음을 성경보다 더 좁은 의미로 정의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순종적인 믿음은 예수님의 희생을 내다봄에서 비롯되었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믿음과 행위를 조화시킬 필요가 없다. 믿음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그것은 마귀가 가지고 있는 지식적인 믿음이어서도, 구원의 조건에 응하지 않은 채 하나님의 약속만을 주장하는 뻔뻔한 믿음이어서도 안 된다. 그 믿음은 반드시 작동하는 믿음이어야 한다.
계 12:17과 14:12에서 계명의 준수와 예수 믿음과 증거에 대한 언급이 영원한 복음의 맥락에서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마지막 시대에서 결정적인 문제는 ‘우리가 누구를 경배하며 누구에게 순종할 것인가?’이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계 14:7) 하나님인가? 아니면 짐승과 그의 우상인가?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키는 이들의 특징은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안식일을 포함하여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다. 진실한 신앙에는 믿음과 순종이 모두 필요하다.
교훈 : 하나님은 마지막 시대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증거 그리고 계명에 대하여 순종하는 신앙으로 전파하는 “영원한 복음”을 우리에게 위임하셨다.
부가적용)
* 존 드라이라는 사람의 시인이 쓴 싯귀인데 이 시는 바로 스토아 철학을 완벽히 표현한 시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누구라도 태어났다 죽으니
아무도 정말 놀라운 행복이란 알 수 없어라
어떤 일에도 한결 같은 마음을 가지고 참고 나가세
우리가 염려해도 되지 않는 일 가지고
지나치게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말라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나가는
순례자처럼 나갈 뿐일세
세상은 여인숙
죽음은 그 여정의 끝이어라”
여러분은 이 시를 이해하시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스토아 철학입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그 싯귀를 잠간 분석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누구라도 태어났다 죽으니” 스토아 철학자들은 생각을 많이 하며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인생을 회피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인생을 정면으로 대면하며 깊이 생각하며 살며, 그들의 깊은 생각의 요점 있는 전제가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누구라도 태어났다 죽으니”라고 부터 출발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누구라도 태어난다” 그런데 무엇을 위해 태어난다고 합니까? 죽기 위해서, 죽기 위해서! 이 세상에는 죽기 위해서 태어난다는 것, 이 명제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들이 죽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사실부터 생각지 않는 경솔한 사람들입니다. 스토아 철학은 죽기 위해 났다는 사실을 알 만큼을 지혜롭습니다. 스토아 철학의 신봉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삶을 출발하는 순간 죽기 시작한다. 1초 전에 태어난 아이라도 “삶을 출발하는 순간 죽기 시작한다” 라고 말해야 합니다. 영어로 How old are you? 직접적으로 번역을 한다면 얼마나 늙었냐? 는 말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은 죽기 위해 늙는 것입니다. 두 번째 그들은 “아무도 정말 놀라운 행복이란 알 수 없어라” 스토아 철학자들은 두 번째 매우 지혜로운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놀라운 행복이란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아무도 놀라운 행복을 발견한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라고 물을 때 어떤 일에도 한결 같은 마음을 가지고 참고 나가세 아침에 삶을 시작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인생은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한결 같은 마음을 가지고 참고 나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가 염려해도 되지 않는 일 가지고 지나치게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말라” 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슬픔을 만날지 알지 못하니 말이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나타낼 수 없는 미래가 불확실한 사람들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정해진 목적지가 있는데 그 목적지가 무엇입니까?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나가는 순례자처럼 나갈 뿐일세 세상은 여인숙 죽음은 그 여정의 끝이어라 스토아 철학자들의 삶의 여정은 죽음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으면 인생의 끝이라고 말입니다. 이 세상은 여인숙, 하룻밤 기숙하는 여관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스토아 철학의 관념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의 신조와 신념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기독교를 거부하고, 이런 방식으로 삶을 살고 있고 이런 삶을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주의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반하여 사도 바울이 증거한 예수와 몸의 부활을 증거한 기독교인의 삶을 살아간 스패포드는 어떤 삶의 반응을 나타냈을까요?
내 평생에 가는 길
미국 시카고에 아주 행복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름은 스패포드입니다. 그는 유명한 변호사이며 대학 교수였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아내와 사랑스런 네 딸을 큰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한번은 아내와 네 딸이 프랑스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여객선 하브호가 영국 배와 충돌해 승객 2백 26명이 익사하는 대 참사가 발생 했습니다. 네 딸은 모두 익사하고 아내만 겨우 생명을 구했습니다. 스패포드는 사고현장에 도착해 딸들의 이름을 부르며 절규했습니다. 아내는 절망적인 슬픔 속에서도 남편의 손을 잡으며 말했습니다. "여보. 딸들은 지금 천국에 있어요" 우리와 잠시 헤어져 있을 뿐이랍니다." 스패포드는 이 말에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비극의 바다에서 시 한편을 지었습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던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이것이 바로 우리가 부르고 있는 찬미가 395장입니다. 딸들을 잃은 아버지의 노래가 오늘 우리에게 큰 위안을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살아가는 세상은 결코 안전하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영혼을 맡긴 자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평안합니다.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평안도 없이 잠시 머물다가 떠날 여인숙처럼,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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