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과 기도와 치유, 회복(교사들을 위한 강해와 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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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과 기도와 치유,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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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0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16분
기억절 :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
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6, 개역).
도입)
어린 꼬마의 아름다운 기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덟 살짜리 아이가 며칠 전부터 밤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침대 밑에다 실내화 한 짝을 던져놓곤 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엄마가 넌지시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실내화 한 짝을 침대 밑에 놓는 거니?" 그때 아이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교회 선생님이 말씀하셨어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실내화 한 짝을 침대 밑에 놓으면 아침에 일어나 그 실내화를 찾으려고 침대 옆에 무릎을 꿇게 되는데 바로 그때 잊지 말고 기도해야 하거든요. 그러니까 무릎 꿇고 기도하기 위해 그런 거예요." 한 번 시도해 볼만한 좋은 가르침입니다. 기도에는 치유와 회복이 역사할 수 있는 통로입니다. 기도는 누구라도 다 할 수가 있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나 누가 기도하느냐에 따라서 그 역사하는 힘에 강도가 다를 뿐입니다. C.S. 루이스가 기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기쁨 속에서 속삭이시고 우리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며 우리 고통 속에서 소리치신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깨우는 그분의 확성기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 마디 "그 분이 여러분을 기다리신다"라고 했습니다. Tomas Tenney는 그의 기도에서 "주님 주님의 이름만 불러도 제 영혼이 아려옵니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께 대한 그런 깊은 영혼의 울림이 있습니까?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라 했는데 실상 기도가 없는 사람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입니다. 기도가 없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호흡이 끊겼다는 것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연구 범위 : 약 5:13~20, 요일 5:14, 고전 15:54, 히 12:12~13, 요 8:43~45, 잠 10:12
사람들은 기적과 마술에 매료된다. 그들은 때로 호기심을 유발할 뿐 아무것도 아닌 볼거리와 문제에 끌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단지 구경거리로(눅 23:8~9) 또는 메시아의 표적을 보기 위해(마 12:38~41) 아니면 일상적인 필요를 채우는 용도로(마 4:2~4) 예수님께 기적을 행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그분은 그러한 요구를 거부하셨다.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과 기적적인 치유는 성령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성령은 단순히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힘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성령의 손에 들린 도구가 되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은 병든 모든 사람을 치유하기를 기뻐하신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것 즉 영원한 치유에 관심을 두신다.
이런 맥락에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문제를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는 병자의 치료에 대한 야고보서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서 치유와 용서 사이에는 관련성이 존재하는가? 엘리야는 배도가 만연한 시대에 중요한 기도의 모본으로 제시되었다. 우리는 이스라엘을 참된 예배와 하나님께 돌아오게 했던 그의 사명과 그의 기도생활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교과를 구입하지 않으면 매일 공부할 가능성이 적습니다.
안교 활동반과 교과 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하나님의 치유와 용서를 구할 때 기도와 고백의 중요성을 인식한다.
➋ 느끼기 : 하나님은 영적이든 육적이든 어떤 질병도 치유할 수 있음을 믿는다.
➌ 행하기 : 위대한 의원이신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한다.
Part 1.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2.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3.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그대가 가장 심하게 병을 앓았던 때는 언제입니까?
❷ 우리가 병들었을 때 동료 신자들의 기도는 얼마나 큰 힘이 되었습니까?
❸ 우리가 환자를 위해 기도할 때 서로 죄를 고백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약 5:16)
❹ 지금 야고보서의 가르침대로 우리 중에 아픈 사람을 위해 기도합시다.
B. ❶ 그대가 곁길로 빠졌던 경험이 있다면 그때 그대의 마음을 붙잡아 준 사람은 누구입니까?
❷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엘리야의 사역으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하는 교훈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약 5:17~18)
❸ 진리를 떠난 자들을 돌이키려면 우리는 어떤 마음과 각오를 가져야 합니까?
❹ 교회를 떠난 옛 믿음의 동료들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지 이야기한 다음 그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결론 : 하나님께 치료하지 못하고, 변화시킬 수 없으며, 되돌리지 못하고, 싸맬 수 없으며, 회복시키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단합 모임을 최종 점검합니다.
❷ 연말에 소그룹 또는 안교반이 도움을 주어야 할 대상과 방법을 구체적으로 계획합니다.
❸ 기도 제목을 가지고 함께 기도합니다.
첫째 날(일) 필수적인 신앙 도구
12월 14일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교사강해 1)
우리가 왜 기도해야 합니까? 기도하는 일은 우리의 몫이고 기도에 응답하는 일은 하나님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응답받지 못하면 하나님이 내게 등을 돌리셨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너는 모든 걸 네 힘으로만 하려고 애쓰는구나. 네가 할 일은 친구를 위해 기도하는 하는 것이다. 기도했으면 기다려라. 그럼 내가 나머지를 하마.” 언제나 그분의 이루시는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멋대로 서두르며 하나님의 계획을 강요하게 됩니다. 주님의 때에 주님의 방법대로 구한 것을 주실 때까지 우리는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리는 시간은 영혼의 어두운 밤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기다림은 좀 더 많은 인내와, 주님과 주위 사람들에 대한 더 큰 사랑과 주님의 음성을 잘 들을 수 있는 능력과, 더욱 더 순종하려는 기꺼운 마음으로 자라게 합니다. 이제 머지않아 이런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보채지 않았더니 하나님은 몇 가지 더 좋은 추가배당금을 넣어 주셨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약 5:13을 읽어 보라. 여기 어떤 흥미로운 대조가 있는가? 우리는 이 훈계를 어떻게 우리의 경험에 적용해야 하는가?
야고보는 고난과 기쁨을 각각 기도와 찬송에 결부시켰다. 고난당할 때 기도하고, 즐거울 때 찬송하라. 기도와 찬송은 서로 무관한 행위가 아니다. 성경의 많은 찬송시가 곧 기도이다. 야고보도 서두에서 독자들에게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 1:2~3)고 권면하였다. 기도 시간과 찬양 시간은 생각보다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약 5:13에 등장하는 “고난”이란 단어는 앞서 선지자들의 고난을 언급할 때 사용된 단어와 어근(語根)이 같다(10절 참고). 무엇보다 두 단어는 전쟁의 위험과 고생에서 오는 육체적·정신적 고통 그리고 고단한 육체적 노동과 값진 수고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이 올 때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찾는다. 곤경이 닥칠 때에 기도는 필수적이며 노래와 신령한 연주도 유익하다.
“예배의 일부로 노래를 부르는 것은 기도를 드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배의 행위이다. 사실, 많은 노래는 기도이다”(교육, 168). 우리 중에는 고통을 당하여 격려의 말이 필요한 자들이 많다. 그들은 기도와 찬양으로 충만한 대화를 통해 힘을 얻을 것이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그러면 다른 것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의 심령을 북돋울 것이다. 시편은 어디서 도움을 구해야 할지 모를 때 영감, 용기, 지도를 받을 수 있는 기도와 찬양의 보고(寶庫)이다.
교훈 : 기도와 찬양은 힘든 일이 있든지 즐거운 일이 있든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용기와 힘을 얻게 하는 필수적인 예배 행위이다.
부가적용)
시 37:5절을 보면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종종 ‘짐’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그러나 그 ‘짐’을 다시 싸들고 돌아올 때가 많이 있습니다. 기도할 때는 맡겼다가 기도 후에는 염려가 앞섭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맡기는 것은 어떤 자세일까요? 맡긴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던지다’입니다. 문제를 하나님께 던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성품으로 인해 그분이 이루어주십니다. 문제를 맡으시는 하나님은 이런 성품을 지닌 분이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우리 모든 인생의 어떠한 짐도 다 짊어지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믿을 때 고난 중에서도 찬송을 할 수가 있을 것이고 즐거움 중에서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기도와 말씀은 물론이거니와 찬양이 신앙생활에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고난이 닥치면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분께 더욱 절실하게 기도하게 됩니다. 즉 고난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도록 도움을 줍니다. 그렇다면 모든 일이 형통할 때는 어떻습니까? 사실 더 많은 기도가 필요한 시기는 생활이 평온할 때입니다. 이럴 때 하나님께 올리는 찬양의 예배는 기도만큼이나 우리를 하나님께 가까이 이끌 뿐 아니라 절망의 때에도 그분의 구원과 사랑을 잊지 않도록 돕습니다. 그래서 기도와 말씀과 찬양은 언제나 함께 있어야 합니다.
| 적용 |
매일의 생활에서 어떻게 하면 찬양의 기회를 늘릴 수 있을까요?
영감의 교훈
기도
우리의 찬양 속에 임하시는 하나님, 베푸신 구원과 은혜에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자랑이시며 노래이십니다. 저로 날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해 주시옵소서. 제 입술로 그 이름을 영원히 송축하게 하옵소서.
둘째 날(월) 환자를 위한 기도
12월 15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약 5:14~15).
교사강해 2)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기도를 열심히 한 분으로 유명합니다. 그가 얼마나 무릎을 많이 꿇었으면 그의 무릎이 낙타처럼 되었다고 해서 낙타 무릎이라는 말이 생겨났을 정도입니다. 야고보서는 병들었을 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세밀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기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교회의 어른인 장로(목사님과 장로님들)님들을 청하여 그분들이 기름을 바르고 병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교회의 직분은 교인들을 든든히 세우기 위하여 만든 것입니다. 특히나 목사님들이나 장로님들은 병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할 책임과 사명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고, 성령으로 거듭나서 병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를 하여 그들을 일으켜야 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병든 사람을 고쳐주실 것을 확실히 믿고, 그 사람의 심정으로 기도를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병자를 대신해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서 병든 사람이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는 중요한 사명이고, 병든 영혼을 살리는 고귀한 일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죄인된 심정, 병자된 심정으로 강하게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병든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다만 믿음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기 때문에 능력이 나타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약 5:14~15을 읽어 보라. 환자에게 기름을 바르도록 한 야고보의 처방에는 어떤 필수적인 부분이 포함되어 있는가? 이 성경절에는 어떤 중요한 영적 요소가 언급되어 있는가?
환자가 교회의 장로를 불러 자신에게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고 기도해 주도록 요청한다는 사실은 치유에 하나님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집단적인 확신과 더불어 자기 개인의 영적 소망을 표현한다(막 6:13 참고). 하나님은 영적 치유를 원하지 않는 자를 어떤 의식 때문에 육체적으로 회복시켜 주시지는 않는다. 용서에 대한 언급이 그런 사실을 보여준다. “건강의 회복을 위하여 기도해 주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연법칙과 영적 법칙은 물론이요 하나님의 법칙을 범하는 것이 죄라는 사실과, 그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죄를 자복하고 버려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 주어야 한다”(치료봉사, 228).
하나님의 개입과 교회 장로들의 권면을 요청하는 이유는 그 질병이 정규 예배와 관련해서 취급하기에는 너무 위급하거나 아니면 환자가 거동이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환자를 일컫는 두 가지 그리스어가 있다. 첫째는 ‘아스테네오’이다(14절). 도르가가 “병들어 죽”(행 9:37)었을 때에도 사용되었다. 둘째는 ‘캄노’이다(15절). 이 말은 일반적으로 환자를 일컫지만, 이 문맥에서는 죽어가는 자 또는 육체적으로 생명력을 소진한 자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치유의 기적은 “믿음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일어날 수 있다. 치유를 얻으려면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굴복해야 한다(요일 5:14).
교훈 : 우리가 질병을 앓을 때 교회 지도자에게 기도를 요청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개입을 통해서 육체뿐 아니라 영적인 치유가 임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부가적용)
우리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없으면 기도는 근거를 잃고 괴상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반대로 기도가 없으면 하나님의 약속은 흐릿해지고 울리지 않는 소리가 되며 아련해지고 우리와 무관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기도를 담대하고 억누를 수 없는 것으로 만들게 합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벧후 1:4)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환자를 위해 기도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확신은 무엇입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그러나 하나님이 그 환자를 “구원”하고 “일으키시리라”는 표현은 틀림없이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고전 15:54) 있을 완전한 치유로서의 부활을 가르친다(약 5:20에 “사망에서 구원”한다는 표현과 비교해 보라).
| 적용 |
그대가 최근에 환자를 위한 기도 요청을 받았다면 그를 위해 어떻게 기도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기도
인간의 질고를 짊어지신 주님,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아픔을 잘 아시기에 우리를 고쳐 주시려는 주님의 계획에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속사람을 고쳐주옵소서. 일시적인 치유뿐 아니라 더욱 영원한 회복을 간절히 바라나이다.
셋째 날(화) 영의 치유
12월 16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6).
교사강해 3)
이 대목을 깊이 한 번 똑똑히 눈여겨보십시오. 야고보 사도가 ‘서로 기도하라’는 권면을 하기 전에 먼저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그리고 나서 병이 낫기를 위해 서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라 할 때 고백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라는 점이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 점을 흘려 보시면 안 됩니다. 그 동안 우리는 야고보서를 수도 없이 읽어왔지만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는 부분만 중요하게 보았지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라는 부분은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겼습니다.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할 때는 최소한‘사람 앞에 자기의 죄(허물)을 솔직히 털어놓고’ 그러고 나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순서라는 뜻입니다. 그럴 때 그 기도는 나중에 효과를 매우 크게 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기도하기 전에, 여러분 자신이 저지른 허물이나 죄에 대해서 상대방을 찾아가서 자기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고백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제가 이런 질문을 하면, 혹시 여러분 가운데는 "아니 죄를 사람에게 고백하다니, 죄는 하나님께 고백해야지 어찌 사람에게 고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람이 죄를 사해주는 권세가 있다는 말인가”하고 반문하고 싶은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동안 우리는 (설교이든 성경공부이든), 죄는 당연히 하나님께만 고백하는 것으로 배웠지 자신의 잘못이나 허물을 사람 앞에서 고백하도록 가르치고 배우는 일은 아주 드물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은 죄를 하나님께 고백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하지만 죄 문제를 오로지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대일의 문제로만 취급하고, 피해를 입은 당사자에게는 입을 다물고 하나님께만 잘못을 고백한다면 이것은 성경을 일방통행식으로 아주 잘못 읽은 것입니다. 자신의 허물을 사람에게 고백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예수님께서 예배와 관련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마5:32)“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분은 없겠지요? 예배자가 일상에서 이웃과 화목하지 않고는, 다른 사람의 가슴에 못을 박아놓고는 하나님께 아무리 좋은 예물을 드린다한들 하나님은 그 예물을 받으실 수 없다는 교훈입니다. 그 뿐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죄의 문제에 대해서도 중요한 말씀을 하신 적도 있습니다. 이 땅에서 발붙이며 사는 동안 인간관계에서 벌어지는 온갖 얽히고설킨 원한이나 노여움, 대인관계에서 생겨나는 꼬인 매듭, 답답하고 억눌린 마음들을 푸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사람과 사람 사이가 매끈하게 서로 소통이 잘 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누가 먼저 풀어야 할까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 나아가서 잘못을 범한 당사자인 바로 나 자신이 먼저 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오늘 우리는 자신의 기도생활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람에게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지금까지 피해자를 찾아가서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상처받은 사람의 마음을 풀기보다는 오로지 하나님께만 은밀하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다 덮어버리려는 삶을 살아오지는 않았는지요? 우리는 죄와 허물을 회개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늘 넘어지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늘 회개함으로써 예수의 피로 씻음 받고 심령이 성령께 사로잡힐 때 병 치유의 은총을 받게 됩니다. 이는 행위 완전해야 된다는 말이 아니라 죄와 허물을 늘 회개하는 심령으로 살라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도의 응답은 물론 아무리 기도해도 주님께서 듣지 않으실 것입니다.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 66:18).
몸의 치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의 치유이다. 우리의 목적은 사람들을 좀 더 건강한 죄인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 예수님 안에 있는 영생을 제시하는 것이다. 약 5:13~15에서 언급했던 가정적인 상황으로부터 이제 약 5:16에서 직접적으로 (금주의 본문 가운데 유일하게) 치유를 언급하고 있는 이유가 있다. 16절에서 치유의 의미로 사용된 ‘이아오마이’는 신체적 질병의 치료를 초월하는 치료를 의미할 수 있다(마 13:15 참고). 15절에서 이미 부활을 치유의 더 포괄적인 의미로 암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야고보는 질병과 죄를 결부시킨다. 그 이유는 죄가 모든 문제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물론 각각의 질병이 특정 죄로부터 귀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질병과 죽음은 결국 우리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이다.
막 2:1~12을 읽어 보라(히 12:12~13, 벧전 2:24~25과 비교). 이 말씀은 어떤 종류의 치유를 묘사하고 있는가? 그러한 치유의 기초는 무엇인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영적인 연약함과 죄로부터 치유를 가져온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각각의 치유는 사람들의 관심을 구원에 대한 더 깊은 필요로 이끌기 위한 하나의 비유였다. 마가복음 2장에 등장하는 중풍병자의 경우 영적인 치유가 그 사람의 최우선 관심사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즉시 그에게 죄 사함을 받았다고 보증해 주셨다. “그가 바란 것은 육체적 회복이라기보다는 죄 짐에서 해방되는 것이었다. 그가 만일 예수를 보고 용서와 하늘의 평강의 보증을 받을 수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든지 죽든지 만족할 수 있었다”(시대의 소망, 267). 오늘날 하나님의 치료자들이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의료 수단을 동원해야겠지만, 단지 이생이 아닌 영적인 관점에서 전인을 치유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교훈 : 우리에게 있어서 육체의 치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의 치유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죄를 고백하고 자아에 대하여 죽는 과정이 필요하다.
부가적용)
(약5: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5:18)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의인의 기도에 얼마나 많은 힘이 있을까요? 병 낫기를 위하여 기도할 때 그 병마가 물러가게 됩니다. 하늘이 비를 주기를 위하여 기도할 때 하늘을 열고 비를 내려 주셨습니다. 의인의 기도는 자연법칙까지도 움직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자연법칙가지도 움직인다는 말은 기도의 능력 앞에서 자연도 순응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엘리야가 비 오지 않기를 위하여 기도하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3년 6개월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왕상18:1에는 '제 삼 년'으로) 다시 비가 오기를 위하여 기도하니 그 매 말랐던 땅에 비가 내렸습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는 진술은 “강력한 힘”인 기도에 관한 진술입니다. 이 힘은 두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는 행사되고 있는 힘, 역사하는 힘을 나타내며, 다른 하나는 앞으로 받게 될 힘을 나타냅니다. 기도는 능력과 힘입니다. 그런데 실상 엘리야가 우리와 성정이 같다는 것은 또한 메마른 대지에 비를 내리게 한 것이 엘리야만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능력이 아니라 엘리야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의인 즉 엘리야의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열납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의인하면 무결점을 가진 자라 생각합니다. 엘리야는 초능력자가 아닙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조금도 다른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의인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엘리야가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은 우리들의 기도도 믿음으로 기도할 때 역사하는 힘이 동일하게 많다는 것입니다. 의인이라 함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백성들을 통 털어 말씀하신 것이기에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실 것입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우리는 왜 ‘환자’가 아니라 ‘서로’ 죄를 고백해야 합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치유에는 관계의 치유도 포함된다. 그래서 야고보는 우리가 서로 죄를 고백하도록 권면하고 있다(약 5:16, 마 18:15, 21~22 참고). 즉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범했다면 그들에게 고백해야 한다. 그 다음에야 하나님의 복이 우리에게 임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고백의 과정은 자아에 대한 죽음을 포함하고 그런 죽음을 통해서만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사실 수 있기 때문이다.
| 적용 |
우리는 어떻게 어색함을 극복하고 서로 죄를 고백하는 기회를 마련할 수 있을까요?
영감의 교훈
기도
아버지, 우리가 겸손하게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죄를 고백합니다. 우리 사이에 막힘이 없이 하늘의 은혜와 복이 그리고 치유의 능력과 성령의 권능이 임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넷째 날(수) 기도의 모본
12월 17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약 5:17~18).
교사강해 4)
고난과 질병은 기도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는 영적 기회입니다. 어려움은 기도를 배우는 시간이고, 문제는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는 기회입니다. 장애물이 있을 때 기도하지 않으면 낙심과 침체에 빠집니다. 그러나 담대하게 기도로 나아가면 극복하지 못할 난관이 없으며, 회복과 치유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병든 자는 공적으로 교회의 지도자들을 청해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일으키고 죄를 용서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큽니다. 평범한 사람이었던 엘리야는 기도를 통해 언약의 저주 가운데 있던 이스라엘에 회복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엘리야의 능력이 아니라 바로 기도의 능력이었습니다. 기도는 모든 사역의 기초인 동시에 참된 응답을 가져오는 통로입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위대한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놀랍게 사용되었던 사람들을 보면 우리와 별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들도 무섭게 침체 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믿음의 용사들을 보십시오. 저들은 우울증 환자들처럼 예민하고 상황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도대체 저런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었을지 의심될 정도로 연약한 체질을 가진 자들입니다. 엘리야는 이세벨이 엘리야를 잡으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말만 듣고서도 그는 너무나도 겁이 나고 두려워서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이 엘리야의 본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를 강하게 한 것은 기도였습니다.
약 5:17~18을 읽어 보라. 우리는 엘리야의 모본으로부터 기도에 대하여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기도는 치유, 용서, 회복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이 말씀은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는 약 5:16의 보증을 실례로 보여 준다. 엘리야는 의로운 사람이었으며 하늘로 올라갔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도 우리와 같은 성정이 있었다.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도 들어주시리라는 용기를 얻는다. 야고보는 엘리야가 비가 내리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했다고 말한다. 분명 그는 신 11:13~17의 약속이 성취되도록 탄원했을 것이다. 약 5:18이 이를 암시한다.
신명기의 이 예언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의 바알(폭풍과 번개의 신) 숭배는 그냥 넘어갈 사안이 아니었다. 엘리야가 응답받기 전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기도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탄원은 하나님의 말씀을 당시의 현실에 비추어 면밀히 연구하고 반영한 결과에 기초했을 것이다. 예루살렘을 위한 다니엘의 기도가 예레미야의 예언에 대한 연구에 기초해 있었던 것처럼(단 9:2~3 참고) 그도 자신의 기도에 신명기의 예언을 인용했을 것이다. 우리의 기도도 현 상황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는 진지한 고민에서 비롯된다면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삼 년 반 동안 지속된 가뭄의 시기(눅 4:25 참고)는 성경에서 의미 있는 근신의 기간(단 9:27에서 말하는 “이레의 절반” 즉 삼 년 반 동안의 예수님의 사역 기간, 단 7:25, 계 12:14에서 말하는 삼 년 반 동안의 기독교 배도의 시기)이다. 이 시기의 끝에 하나님은 엘리야를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깨우는 부흥과 개혁의 사역을 시작하게 하셨다. 그 결과 백성들은 그들의 배도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교훈 : 현실을 말씀에 비춰보고 예언에 근거하여 탄원하였던 선지자들의 모본을 따라 우리도 재림을 준비하도록 백성들을 깨우고 부흥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부가적용)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장례를 치르신 일이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장례식에 참석하셔서는 죽은 사람을 살려 내셨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장례 행렬을 만나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으며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그분이 가시는 곳에는 장례식이 부활의 경험을 이룬 축복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병든 자를 일으키고 회복시키는 것, 병으로부터 구원받게 하는 것, 이것이 교회의 임무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에 동참하시고 예수님께서는 눌린 자를 해방시키시고 가난한 자를 돌보셨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해야 할 일은 죄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리고 병 낫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 모든 일들이 기도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기독교에서는 한 사람의 문제를 공동체적 관념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아플 때에 이것을 전체의 아픔으로 느끼고 소화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한 사람만이 특별히 죄가 많은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교인 중의 누구 하나가 아프다고 할 때에는 우리 모두가 똑같이 아픈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전공동체 이스라엘의 죄가 가뭄을 가져오게 된 것처럼 전공동체적인 징벌에 처함을 받았습니다. 교회의 죄는 공동체의 죄가 됩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엘리야의 사명과 침례 요한의 사역은 오늘날의 재림교회에 어떤 의미입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엘리야의 사명은 침례요한이 1세기의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초림하는 길을 예비하도록 준비시켰던 일과 같고 또 사람들로 하여금 재림을 준비하도록 하나님이 오늘날 남은 교회에 위임하신 사역과도 같다(말 4:5~6, 마 11:13~14 참고).
| 적용 |
이 시대를 성경 예언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영감의 교훈
기도
주님, 악한 짐승들이 인류를 지배하고 의인들을 삼키려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믿음과 증거를 가진 남은 교회를 보호하시고 멸망해 가는 이 세상에 세 천사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도록 늦은 비의 능력을 주시옵소서.
다섯째 날(목) 회복과 용서
12월 18일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약 5:19~20).
교사강해 5)
믿음으로부터의 탈선은 구원의 문제뿐 아니라 심각한 삶의 타락으로 이어집니다. 진리에서 떠난 신자는 영적 감각뿐 아니라 상식적인 분별력마저 잃어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이 사망에 이를 뿐 아니라 허다한 죄에 빠집니다. 교회는 미혹을 받아 신앙에서 떠난 사람을 포기하거나 단념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든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과 같아지고자 하는 교만을 품었을 때, 범죄해 에덴동산에서 추방됐습니다. 누구도 안심할 수 없습니다. 자기 의에 빠져 자만할 때 시험에 들게 됩니다. 교회는 신실하게 말씀을 전파함으로써 미리 예방 조치를 취하고, 유혹에 넘어갔을 때는 적극적으로 권면하고 훈계해 진리의 길로 돌아올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큰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것이 큰일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을 흑암에서 빛으로 나아오게 하는 것이고 그로 인해 슬퍼하는 가족들과 여러 사람을 근심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입니다. 둘째는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는 것이 큰일입니다. 영혼이 사망한다는 것은 둘째 사망에 처하게 된다는 일입니다. 그러나 지옥, 곧 둘째 사망에 처하여 질 영혼을 구원하여 천국으로 보내는 것이니 그것이 얼마나 큰일이겠습니까? 셋째는 허다한 죄를 덮는 일이 큰일입니다. 죄 때문에 상처받고 죄 때문에 은혜의 길에서 떨어질 사람에게 죄를 덮어주는 것은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이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도록 격려하는 것이므로 큰일입니다. 사람을 옳은 데로 인도하는 것은 인생이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큰 일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 큰일을 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엘리야를 통해서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회복되도록 일하셨다. 하지만 엘리야의 사역이 갈멜산에서 다 이뤄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는 그 일을 작은 마을과 가정으로 그리고 부흥과 개혁 사업을 확장시킬 미래의 영적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선지자 학교로 옮겨갔다.
약 5:19~20을 읽어 보라. 여기서 묘사하고 있는 사역은 엘리야, 침례요한, 그 밖의 다른 이들의 사역과 어떻게 비교가 되는가?(눅 1:16~17, 행 3:19 참고)
우리는 종종 수년 동안 지속되었던 엘리야의 자상하고 인내심 있는 사역을 간과한다. 침례요한의 사역도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로 돌아오게 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각자 회개하는 동시에 침례를 받도록 독려하였다. 예수님도 매우 유사한 언어로 자신의 사역이 백성들을 거짓에서 진리로 돌이키는 것이라고 설명하셨다(요 8:43~45 참고).
약 5:19~20은 이러한 가상적인 상황을 원어상 조건문 구조로 설명하고 있다. 즉 그런 배도가 반드시 존재한다기보다는 개연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진리에서의 이탈은 단지 교리적인 배도뿐 아니라 생활방식의 배도까지 포함하며 대부분 전자가 후자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교리에 대하여 의심이 시작되면, 우유부단한 행동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노골적인 배도로 드러난다. 죄인을 방황에서 돌이키게 하면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다(약 5:20). 간추리면, 야고보는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했던 엘리야와 같은 사역을 하도록 교회의 형제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이런 사역은 상당한 인내와 동정, 자상함과 겸손이 필요하다.
교훈 : 진리로 돌아오게 하는 사역은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며 복음의 정신과 인내의 마음으로 방황하는 자들을 사망에서 건지는 것이다.
부가적용)
우리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에 홀로 있지 아니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뿐만 아니라 둘 이상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회라는 공동체를 이루어 생활합니다. 특히 둘 이상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회라는 공동체를 이루어 생활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전4:9-12에 밝혀져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넘어질 때 붙들어 일으켜주고, 서로 힘을 합하여 일을 성취하며, 대적의 공격을 능히 막아낼 수 있게 하시려고 둘 이상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회라는 공동체를 이루어 생활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약5:19-20에서는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고귀한 사명을 강조하며 그 사명 완수에 힘쓸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진리를 떠난 자를 돌아서게 하는 고귀한 사명을 받았으며, 그 사명 완수에 힘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먼저, 이 말씀을 통해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함께 생활하는 형제자매들이라도 미혹을 받아 진리를 떠날 수 있는 위험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아직 죄악의 본성을 지닌 옛 자아가 남아있고, 사단의 미혹이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누구라도 미혹을 받아 잘못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 등등 우리의 눈에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로 보이는 사람들도 모두 미혹을 받아 잘못했던 것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말씀드리지만 약5:19-20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비록 서로가 동일하게 연약함을 지닌 처지이지만 형제자매의 잘못을 발견하였을 때는 지혜롭게 권면함으로 형제자매가 잘못된 미혹의 길에서 올바른 진리의 길로 되돌아올 수 있도록 힘써야 할 의무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동일하게 연약함을 지녔음에도 하나님께서 우리가 서로 권면하도록 하신 것은 마치 나는 연약하지 않은 자인 것처럼 교만하여 잘못을 저지른 형제자매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며 비난하지 않게 하시려는 귀한 뜻이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잘못을 저지를 때가 너무나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서로 동일하게 연약함을 지난 자들로서 서로를 체휼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서로의 잘못을 권면해야 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명심할 것은, 비록 우리가 형제자매들이 돌이킬 수 있게 권면하지만 형제자매들이 돌이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역사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입이 되어 드리는 것뿐입니다. 롬14:4을 명심해야 합니다.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따라서 형제자매들을 돌이킬 때에는 철저히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행해야 합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한 사람을 진리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큰 동정심과 끈질긴 노력이 필요합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엘리야의 사역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마음을 가깝게 하는 것이었지 그들을 멀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잘 알지만 그것이 제거되어야 할 필요성은 못 느낀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예수님이 모본으로 보여주시고 십자가에서 제공하신 용서이다. 사망에서 구원하는 일은 복음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고 스스로 자비의 도구가 되어 죄를 덮어줘야만 가능하다(잠 10:12).
| 적용 |
이미 포기했을지라도 다시 접촉할 사람이 있다면 그를 위해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영감의 교훈
기도
마지막까지 절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진리를 등지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어떻게 다가서야 할지 모르겠지만 자비와 동정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일할 수 있도록 제게 그리스도의 영을 부어 주시옵소서.
여섯째 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12월 19일
<치료봉사>, 225~233 “병자를 위한 기도”, <각 시대의 대쟁투>, 518~523 “사탄의 함정”을 읽어 보라.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관심을 인간의 관심과 연결시키시고 우리에게 인간을 구원하는 사업에 그와 하나가 되라고 요청하신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 10:8)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모든 악한 것들 중에 가장 큰 것이 죄이지만, 죄인을 동정하고 도와주는 일이 우리의 할 일이다. 과오를 범하고 수치심과 자신의 어리석음을 느끼는 많은 사람이 있다. 그들은 격려의 말에 굶주리고 있다. 그들은 잘못과 과오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거의 절망 직전까지 내몰린다. 우리는 이런 영혼들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상처 받은 사람에게 치료하는 향유가 될 수 있는 믿음과 용기의 말을 하라”(시대의 소망, 504).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그대가 자신뿐 아니라 주님과 다른 이들을 아프게 했던 시절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대의 행위 때문에 적잖이 놀랐을 텐데 그래도 그것을 밝히지 않고 오히려 그대를 격려하고 용기를 주려고 했던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그대에게 얼마나 중요했습니까? 이런 경험에 관하여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이며 그런 기억은 중대한 과오를 저지른 이들을 대할 때 얼마나 도움이 될까요?
➋ 기도하는 마음으로 약 5:16을 자세히 읽어 보십시오. 여기서 우리에게 필요한 영적 교훈은 무엇입니까? 이 말씀은 기도의 능력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으며 기도는 우리의 영적 삶에 얼마나 중요합니까? 기도는 매우 사적인 문제이지만 그대가 어떤 문제로 기도했을 때, 그 기도가 어떻게 응답되었는지 또는 기도가 바라는 대로 응답되지 않았을 때도 어떻게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었는지 이야기해 보십시오. 결론적으로 그대는 “응답을 받는 열렬한 기도”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실질적인 유익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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