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과 울며 곡하라(교사를 위한 강해와 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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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10과 울며 곡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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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6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13분
기억절 :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
도입)
일찍이 웨슬리(John Wesley)는 사람이란 그의 돈 씀씀이를 보면 그 사람의 신앙 성숙도를 가늠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여러분은 돈을 어떻게 사용하십니까? 얼마나 쓰고 있습니까? 이것이 여러분의 신앙 성숙도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미터가 되는 것입니다. 돈 자체의 문제가 아닙니다. 돈과 사람과의 관계로써 신앙의 문제에 까지 도전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두 주인이란 곧 하나님과 만물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과 돈이 두 주인입니다. 돈이 여기까지 올라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엄청나게 위험한 일입니다. 돈이 하나님이냐? ....여기까지 다다라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돈의 위치가 높아 보입니다. 소위 자본주의 체제에 삶으로 해서 더욱 돈에 미친 사람이 많습니다. 돈에 미치고 보면 눈이 뒤집힙니다. 나라도 보이지 않습니다. 애국심이 다 뭡니까? 체면도 보이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미래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까지도 뵙기지 않아요. 어찌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돈을 상전으로 삼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짐작조차 못합니다. 아니, 아예 생각조차 하기가 싫은 것입니다. 돈의 매력이 그토록 가당치 않습니다. 인사불성이 되도록 취해버립니다. 배알도 없이 빠져 버립니다. 예수님께서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물질을 대표하는 이 돈이 하나님 보좌의 위치로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위험성을 지적하십니다. 돈을 섬기고보면 하나님이 안중에 없어지고 마니까요. 예수님께서는 보물과 마음을 따로 생각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음과 물질을 별도로 생각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령, 사랑은 하지만 그에게 물질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무슨 사랑이 있습니까? 기독교에서는 마음과 물질을 이원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배제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있는 곳에 물질이 있습니다. 마음이 있는 그 곳에는 반드시 물질이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즉, 사랑하면 자연히 물질도 함께 가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를 위해 무엇인가 아까운 마음이 있다면 아까운 것만큼 사랑이 약한 것입니다.
연구 범위 : 약 5:1~6, 시 73:3~19, 삼상 25:2~11, 레 19:13, 눅 16:19~31, 마 5:39.
*토의식으로 교과를 진행하려면 반드시 활동반을 통해 친교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마음이 열려야 입이 열리는 법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TV 쇼 ‘누가 백만장자가 되고 싶은가?’는 수많은 사람이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식의 벼락부자가 되는 환상을 즐기며 언젠가는 그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부’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꼭 그런 것이 아니다. 연구에 따르면 수입의 증가는 ‘수확체감의 법칙’을 따른다. 즉 그들이 편하게 살지는 모르지만 소유가 많아진다고 행복이 증가하는 것은 아니다. 의미 있는 관계, 직업 만족도, 목적이 있는 삶이 ‘부’보다 우리의 행복에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다정한 말, 미소, 경청, 사소한 친절, 용납, 존중, 동정어린 손길, 진정한 우정과 같이 가장 좋은 것들은 거저 주어진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소중한 믿음, 소망, 지혜, 인내, 사랑, 만족 등 성령이 우리 삶에 임재해 있으므로 오는 수많은 복은 하나님이 주신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런 정서에 동의하면서도 매일의 삶에서는 이기심이 언제나 앞선다. 이번 주에 우리는 탐욕이 참혹한 결과로 가득한 중대한 과오라는 사실을 보려고 한다.
안교 활동반과 교과 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변화된 삶은 죄로부터 돌이킨 결과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➋ 느끼기 : 깊이 회개하는 심정으로 자신의 죄에 대해 슬퍼한다.
➌ 행하기 : 이타적인 마음으로 자신의 소유를 나누며, 모든 부는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신념을 드러낸다.
Part 1.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2.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3.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일억 원을 하루 안에 써야 한다면 어떻게 쓰겠습니까?
❷ 야고보서를 통해 우리가 ‘부(富)’에 대하여 알아야 하는 사실들은 무엇입니까?
❸ 왜 우리는 이 사회의 경제적 불평등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까?
❹ 우리가 세상의 부자가 되기보다 하늘의 부자가 되기 위해 집중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B. ❶ 각자 억만장자가 된다면 꼭 이루고 싶은 일 세 가지는 무엇입니까?
❷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우리가 실질적으로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입니까?
❸ 재물을 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나눠봅시다.
❹ 우리가 마지막 시대에 재물이 아니라 믿음에 더 부요한 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결론 : 진정한 회개 없이는 참된 개혁이 있을 수 없습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새로운 소그룹 또는 안교반 단합 모임(20일 또는 24일 권장)을 다시 점검합니다.
❷ 멤버를 확대할 방법에 대하여 의견을 모읍니다.
❸ 새로운 소그룹과 안교반을 위해 기도합니다.
첫째 날(일) 공의가 이루어지리라!
11월 30일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약 5:1).
교사강해 1)
여기서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부(富)가 어떻게 사용되어져야 함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특히 잘못 사용된 부(富) 즉, 부(富)의 남용과 착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본문은 먼저 시사함으로써 새로운 단락을 시작합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5:1). "울고 통곡하라"에서 "통곡"은 일반적인 울음보다 더 극한 비애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공포로 종종 표현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울음"은 회개의 눈물을, "통곡"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이 받을 심판의 극한 고통으로 울부짖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부를 세상의 정욕으로 사용하지 말라는 부한 그리스도인을 향한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부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한 자는 자신이 받은 부를 하나님의 뜻에 바르게 사용하여야 합니다.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 먹었도다 너희 옷은 좀 먹었으며(2절) 여기에서 완료형 동사들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는 부한 자들이 자랑하는 재물들이 이미 가치를 잃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부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바르게 사용될 때 비로소 그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아무리 정당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바르게 사용되지 않는 재물은 악의 도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재물을 모았다고 그 것이 복이 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재물을 바르게 사용하면 복이 되지만, 세상의 정욕을 위하여 잘못 사용하는 물질은 화의 근원이 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재능에 따라 주신 물질을 바르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재물을 하나님의 선한 뜻을 위하여 바르게 사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때 복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복음이 증거 되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야고보 5장은 시작부터 충격적이다. 당연히 독자들의 관심을 끌었을 것이다. 야고보는 부자들에게 그들의 부가 영속적이지 못할 것임을 상기시켰다(약 1:10~11). 5장에서 그는 고집스럽게 재물을 붙들고 있는 자들에게 “울고 통곡하라”고 호소한다. 마치 당장이라도 심판이 불어닥칠 듯하다. 5장에 걸쳐 이어지는 생생한 묘사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직전에 악인에게 임할 하나님의 보응을 상기시킨다(눅 17:27~29, 딤후 3:1~2, 계 18:3, 7). 비슷한 태도가 하나님의 마지막 교회에도 스며들고 있다(계 3:17). 흥미롭게도 “고생”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계 3:17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가련하다’라고 묘사할 때 사용했던 단어와 같은 어원에서 유래했다.
세상에는 불평등, 특히 경제적 불평등이 심하다.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여 부를 획득한 사람들이 책임을 면할 수 있다니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시 73:3~19을 읽어 보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시대마다 반복되는 이런 문제에 관하여 어떤 희망을 발견하는가?
구약의 선지서를 보면 정의의 문제와 하나님이 모든 것을 바로잡으시기 위해 조치를 취하시리라는 약속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일관적이고 확정적인 희망도 하나님의 개입을 기다리는 불안과 혼돈의 시기에는 쉽지 않아 보였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배도가 만연했던 시절, 곧 바벨론이 힘과 번영을 자랑하며 팽창했던 때에 선지자 하박국은 하나님께 송곳 같은 질문을 퍼부었다(합 1:2~4, 13, 14 참고). 하나님의 대답은 그분을 믿고 조금만 더 기다리라는 것이었다(합 2:2~4). 그래서 선지자는 그렇게 했다(합 3:17~18).
교훈 : 불의한 세상의 부는 결코 영원하지 않다. 하나님은 정의롭지 못한 모든 것을 심판하시고 마침내 정의를 이루실 것이다.
부가적용)
부자를 비롯하여 힘을 가진 관리나 통치자들은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그 같은 권력과 힘을 소유하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은 옛날의 상황만이 아닙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뇌물을 주고 권력을 얻고, 얻은 권력으로 약한 자의 재물을 빼앗습니다.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 정치인들이 과연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증인입니다. 성도는 각자의 사명에 따라 하나님으로부터 재능을 받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부한 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재물도 이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한 자들은 자신이 가진 재물을 나누어야 합니다. 가난한 지체와 함께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연합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애통에 대한 권면(경고)은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기뻐하라는 서신의 서두에서의 권면과는 아주 대조적입니다. 크리스천은 재물 혹은 부(富)의 청지기입니다. 주신 재물 혹은 부(富)에 대한 관리자로서 성실한 삶이 요구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립니다. 특별히 잘못 사용되거나 축적된 부(富)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잘못된 부의 축적이나 사용 그리고 부에 대한 잘못된 애정과 신뢰를 강하게 비판합니다(암 5:11[부당한 축적]; 잠 11:28[부에 대한 의지]; 사 5:8[부동산 투기]; 딤전 6:9-10[부 하려는 욕구의 결과와 돈을 사랑함의 악]; 말세의 징조[딤후 3;2]; 돈을 사랑치 말라[히 13:5]). 이처럼 부(富)의 불용(축적)과 오용과 남용(사치와 방탕)과 불의한 취득(착취)은 모두 우리의 헛된 경건(영성)을 보여주는 표와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재물의 취득과 사용은 우리의 경건(영성)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결국 정의가 이기리라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시 73:3~5, 17~19).
| 적용 |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과 하나님의 심판에 맡겨야 할 일은 어떤 것입니까?
영감의 교훈
기도
하나님, 정의롭지 못한 이 세상을 속히 심판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을 사모하는 마음을 버리고 불의에 굴복하지 않으며 오직 사랑과 정의의 나라에 소망을 두며 살게 해 주시옵소서.
둘째 날(월) 부가 소용없게 될 날
12월 1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약 5:2~3).
교사강해 2)
위의 말씀은 세상적으로 추구하여 소유한 것들의 무의미함을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아웅다웅 거리며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끌어 모았던 재물은 다 썩은 것에 불과한 것이며, 그들이 아름다운 것으로 여겨 치장한 옷들은 좀먹은 것으로 순식간에 썩어서 스러질 것에 불과한 덧없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욥기 13:28 “나는 썩은 물건의 후패함 같으며 좀먹은 의복 같으니이다”라는 말을 인용하는 것을 통하여 재물과 인생이 썩고 좀먹는 것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썩은 재물, 좀먹은 옷, 녹슨 금과 은의 표현은 사용되지 않고 축적된 부(富)를 가리킵니다. 특별히 말세 즉 주의 재림이 가까워진 때에 우리는 우리의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여야 하는가를 유의해야 합니다. 쌓아 둔 재물은 우리가 믿음을 어디에 두었는지를 보여주는 측량계와 같습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과 축적은 곧 이 세상이 전부라고 여기는 삶의 결과입니다. 결국 주의 재림 때 남겨진 부(富)는 우리가 어떻게 청지기 노릇을 잘 하였는지를 입증해 줍니다. 주의 재림 때에 우리와 함께 부(富)가 들림을 받는다든가 또는 우리가 죽을 때에 부(富)를 짊어지고 간다는 말을 성경에서 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감을 주지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축적한 부(富)에 대한 경고는 산상수훈에서도 잘 나타난다(마 6:19-21).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銅綠)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축적된 부(富)에 대한 전형적인 책망은 어리석은 부자의 경우(눅12;15-21)에 잘 나타납니다. 물질이 전부인 사람. 내세와 하나님이 없고 이 세상과 재물만이 전부라고 여기고 재물이 자신의 미래(여러 해)와 영혼까지 보장할 줄로 착각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바로 이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성경은 이 사람을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21절)로서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찰스 디킨즈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에 나오는 욕심쟁이 구두쇠 영감 스크루지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약 5:2~3을 읽어 보라. 야고보는 무엇을 경고하는가? 그의 표현이 상당히 강경하다. 그가 말하는 부는 어떤 종류인가? 이 말씀의 기본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재물은 썩고, 옷은 좀먹고, 금과 은도 녹슨다. 이것들은 비유적으로 지구가 마냥 행복하게 돌고 있는 동안 종말에 더 빨리 다가서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진지하게 생각하게 한다.
세상 경제는 언제나 위기 후에 또 다른 위기가 계속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좋은 시절이 온다 해도 오래가지 않고 항상 침체로 이어진다. 세계 시장이 제공할 수 있는 경제적 안정과 평온의 허울은 일시적이거나 대개 공상에 가깝다.
빈부격차가 확대될수록 불만과 불안은 커진다. 야고보가 빈곤층의 절망이 깊어가고 부유층은 그들의 곤경을 더욱 못본 체 한다고 탄식했던 당시의 상황이 그랬다.
아래의 인물들을 살펴보고 부가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설명해 보라.
1. 나발(삼상 25:2~11) :
2. 히스기야(왕하 20:12~19) :
3. 베드로(행 3:1~10) :
세상의 재물은 금방 그 빛을 잃는다. 그러면 우리는 그것의 한계와 어두운 면을 깨닫는다. 돈은 제 위치가 따로 있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것을 다른 위치에 둘 때에 발생한다.
야고보는 돈이 그것을 남용하는 자들에 대해 증언할 것이라고 말한다(약 5:3). 그는 이 경고를 종말론적인 배경에서 말하고 있지만 요점은 분명하다. 우리가 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중요한 문제이다.
교훈 : 재물의 가치는 일시적이며 그것을 오용할 때는 심각한 불행을 초래한다. 우리는 돈을 바르게 사용하며 영원한 것을 위해 투자해야 한다.
부가적용)
소비지상주의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들이다. 후기-현대주의(post-modernism)의 특징 중 하나를 초-소비주의(ultra-consumerism)라고 부릅니다. 최근 전우익 선생의 “요즘 사람들이 죽어라 돈 벌어서..죽어라 사고..죽어라 버린다”는 말은 초-소비주의를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경종입니다. 우리의 옷장을 한 번 열어 보십시오. 우리의 신발장을 한 번 열어 보십시오. 그리고 우리 자녀들의 필통을 한 번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장난감 통을 한 번 살펴보십시오. 남자들은 넥타이 넣어 둔 장(통)을 한 번 열어 보십시오. 그리고 여자들은 냉장고의 냉동실을 한 번 살펴보십시오. 위의 성경구절(2-3절)에 비추어 보면서 우린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재물의 축적은 그것의 적절한 사용(눅 12:33)과 하나님께 대한 참된 소망(딤전 6:17)과 경건한 기대(딤전 6:18-19)를 전적으로 부인하는 행동입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자신이 재물을 얼마나 사랑한다고 생각합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육체를 소멸하는 불에 비유한 목적은 우리가 돈에 대해 내리는 결정의 심각성을 환기시키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결국 소각될 재물을 쌓고 있는가? 아니면 영원을 위해 저축하고 있는가?(눅 12:33~34 참고)
| 적용 |
그대는 영원한 것을 위해 어떻게 재물을 사용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기도
아버지, 말세에 재물의 노예가 되어서 멸망의 잿더미 아래 묻힐 가련한 운명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옵소서. 금과 은이 없어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며, 심판의 불도 능히 견디는 굳건한 믿음으로 살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셋째 날(화) 가난한 자들의 절규
12월 2일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약 5:4).
교사강해 3)
재물을 사랑하기를 하나님보다 더하며, 쌓은 재물을 쾌락의 밑천으로 삼고 허탄한 자랑을 일삼는 “부한 자들”을 돌이켜 추수한 품꾼의 우는 소리를 듣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부한 자들이 치부한 것은 노동 임금의 착취로 이뤄졌음을 지적하는 음성입니다. 지주 계층이었던 부한 자들은 소작농들에게 추수의 노동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추수가 끝난 다음에 마땅히 지불해야 할 노동 임금을 지불하지 않았습니다. 노동자들의 어렵고 억울한 형편을 부한 자들은 외면했습니다. 이런 일 때문에 율법에서도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라”(레 19:13)고 했습니다. 그러나 부한 자들은 이 율법을 무시했습니다. 품군의 삯을 주지 아니하는 일은 유대문헌에서도 대단히 비판적입니다. 왜냐하면 품꾼의 삯이란 그의 가족의 일용할 양식을 살 수 있는 최저치의 생활비로 이것은 생계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착취하는 사람은 ‘피의 사람’으로 살해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특별히 구약에서 말 3:5, 레 19:13, 그리고 신 24:14-15과 렘 22:13은 이러한 임금 착취자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과 화(禍)가 있음을 신랄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압제받는 가난한 자에게는 ‘만군의 주’이신 하나님께서 그들 편이 되고 있음을 말합니다(이점에 대해서는 말라기와 이사야 5 장과 눅 16:19-31[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을 보라). 이러한 사람은 도살할 날을 기다리는 살찐 짐승(돼지)과 같은 운명입니다(5절). 이렇게 착취를 통해서 땅에서 사치와 연락을 일삼는 사람들은 그들을 대항하지 아니한 옳은 자를 정죄하고 죽이는 일(6절)을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음행(淫行)과 사치(奢侈)와 치부(致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는 계 18 장을 자세히 읽어 보십시오. 특별히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옷)들을 헐벗고 굶주린 자들을 위해 사용해야 함을 주지해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의 삶이 재물을 통해서 하나님(예수님)을 섬기며 살았다면? 그 날에 인자가 왔을 때 하나님 보좌 앞에서 복 받는 의인의 모습은 주님을 공궤한 자들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마 25:31-46을 읽어 보십시오.
야고보서를 읽어 보면, 부자도 종류가 있다. 돈을 벌다가 쇠하게 될 상인들(약 1:11), 투자금을 보호하기 위해 소송을 거는 사업가들(약 2:6),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주지 않는 지주들(약 5:4). 이 성경절들은 부자들의 과거 행위와 현재의 태도 그리고 미래에 받을 심판을 바탕으로 그들을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이들은 본질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여 재물을 쌓았다.
약 5:4을 레 19:13, 신 24:14~15, 렘 22:13과 비교하여 읽어 보라. 여기서 당시의 상황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하여 어떤 중요한 원칙이 제시되는가?
성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대부분은 아닐지라도 많은 노동자가 일당을 받으면 그날 가족이 먹을 양식을 사는데 그날의 수입을 사용했다. 임금체불은 곧 그 가족이 굶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야고보가 여기서 제기하는 내용은 심각한 문제였다.
결국 자신을 위해 일하는 자들의 임금을 체불하는 자들에 대하여 야고보가 이처럼 강하게 반발하는 것도 당연하다. 다른 사람을 속여서 빼앗는 것도 나쁜데, 이미 부한 자가 가난한 자들의 몫을 강탈해서 부를 축적하는 것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죄일뿐 아니라 하늘에 대한 죄이다. 야고보의 말처럼 그런 죄는 때가 되면 반드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재물은 사람들에게 큰 책임을 준다. 불공정한 거래나, 속임수나, 과부나 고아를 압제하고, 돈을 모으느라고 어려운 자들을 무시하면서 돈을 모으는 것은 영감의 사도가 기록한 대로 결국 공의로운 응징을 받게 된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교회증언 2권, 682).
교훈 :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여 부를 축적하는 것은 하나님께 매우 심각한 죄가 되며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된다.
부가적용)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가난은 죄가 아닙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못나서 가난하건, 잘 나가지 못해 가난해졌건, 내가 가난하건 남이 가난하건, 결코 가난은 죄라고 정죄해서는 안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물질에 대한 이해입니다. 가난 자체가 죄는 아니듯이 부도 반드시 의는 아닙니다. 오늘의 우리네 교회들이 안고 있는 가장 크고도 중요한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 안에 기복 사상이 전염병처럼 만연하고 있습니다. 복을 비는데, 돈이 곧 복입니다. 돈 많은 사람이 복 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입니다. 돈이 많으면 축복 받았다고들 인식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보면, 쯧쯧, 얼마나 저주를 받았으면 저 모양일꼬? 라고 생각합니다. 남을 보나 나를 보나 물질을 보고 복 받았다 못 받았다 하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잘못된 일입니다. 물질은 절대로 축복과 저주의 가늠자가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질을 경시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부하면 복 받은 의인인 양 생각하려는 것이 시험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가난이 죄가 아니듯 부도 죄가 아닙니다. 부하다고 해서 그것이 큰 죄가 되는 것으로 생각할 것은 없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버십시오. 그리고 선한 사업에 쓰십시오. 그러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부 자체가 죄라고, 부자면 다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기독교의 정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질을 주신 것은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복으로 주신 것입니다. 물질을 많이 가진 것.....부끄럽지 않게 벌어서 남보다 많이 가진 것이라면 조금도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돈은 말하자면 중립적인 것입니다. 어떻게 쓰느냐가 문제입니다. 비유컨대, 여기 칼이 있습니다. 칼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좋은 것도 아닙니다. 나쁠 것도 좋을 것도 없는 물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좋은 사람의 손에 들어가면 좋게 쓰이고 나쁜 사람의 손에 들어가면 강도질하는 데 쓰입니다. 문제는 돈과 내 인격과의 관계입니다. 돈을 대하는 자세가 문제입니다. 우리는 물질에 대한 청지기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취할 자세입니다. 청지기가 무엇입니까? 청지기는 내 것이 아닌 물질을 지키는 자입니다. 물질은 주인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임시로 맡아 가지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임시로 맡아 관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하나님이 주인이신 물질의 청지기가 곧 관리자라고 하는 것을 한 시도 잊지 않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주인이 맡겼다면 주인에게 뜻이 있어서입니다. 그렇다면 주인이 목적하는 바대로 쓰이어야 합니다. 결코 내 것인 양 내 기분대로 써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주인이 원하시는 대로, 주인의 뜻에 따라서 사용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어떻게 돈을 벌어야 정당한 것입니까?
노동의 대가로 버는 돈은 정당합니다. 물론 노동은 도덕적이고 합법적인 범주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때로 사람들은 합법적이지만 도덕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소득을 올립니다. 또한 표면적으로는 도덕성에 문제가 없지만 자본 사회의 불합리성으로부터 혜택을 받아 부를 축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대다수가 나누어야 할 부의 양은 축소되고 경쟁력이 부족한 가난한 이들의 삶은 더욱 빈곤하게 됩니다. 성경이 비양심적인 부자들을 엄하게 책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 적용 |
그대에게 허락된 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영감의 교훈
기도
아버지, 제가 땀 흘려 얻은 재물로 교회와 가정을 섬기기 원합니다. 혹 재물 자체가 불의하더라도 그러한 재물로 제 이웃과 하늘의 천사들을 친구로 삼아 세상의 주인이신 아버지께 칭찬 듣는 청지기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넷째 날(수) 지금은 살찌고 즐겁지만
12월 3일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육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약 5:5).
교사강해 4)
현대어성경은 이 말을 “잡혀 죽을 날을 눈앞에 두고도 욕심만을 채워 왔습니다”로 번역했습니다. “도살의 날”이나 “살육의 날”은 곧 “심판의 날”을 말합니다. 본 절은 가축들이 도살당할 것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당일까지도 계속해서 자신들을 살찌우듯이, 부자들도 그렇게 행동한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부자들은 자신만을 위하여 그 부를 함부로 사용하는 죄를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재물을 바르게 사용하지 못하고 세상의 정욕으로 잘못 사용하는 부한 자들의 죄를 지적한 것입니다. 이는 불의하게 모은 재물을 불의하게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정당하게 모은 재물이라 할지라도 주위를 돌아보지 못하고 자신의 향락만을 생각하는 삶은 성도의 삶이 아닙니다.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하게 재물을 받아 하나님의 뜻에 바르게 사용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하여 부당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아서는 안됩니다.
약 5:5을 겔 16:49과 암 4:1과 비교하여 읽어 보라. 이 말씀들은 사치를 무엇과 관련시키는가?
고대세계에서는 부의 총량이 고정되었기 때문에 일부의 부가 증가하면 다른 이의 부가 감소한다는 개념이 지배적이었다. 다시 말해 부자는 오직 가난한 사람을 더 가난하게 만들어야 더 부자가 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부에 영향을 주지 않는 부의 창출은 상대적으로 근대적인 개념이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부자가 더 부자가 되면 가난한 자들을 부자가 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희소 자원에 대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의 경쟁을 고려해 보면 부의 창출에 한계가 있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게 보인다. 그래서 부의 불평등 문제는 오늘날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불평등 문제에 대하여 예수님의 가장 유명한 이야기 중에 하나는 ‘부자와 나사로 비유’이다(눅 16:19~31). 예수님 시대에 대부분의 사람은 옷이 두 벌만 있어도 다행이고, 일년에 한 번만 잔치를 할 수 있어도 행복했다. 반면 이야기 속의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가장 비싼 옷감)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잔치를 즐겼다(눅 16:19). 하지만 가난한 나사로는 그 부자의 집 문 앞에서 음식물 부스러기를 얻기 위해 구걸해야 했다.
대중적인 이해와 반대로 이 비유의 초점은 사후생애가 아니라 이생이다. 사실 원어에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다. 부자와 나사로가 모두 같은 장소, 곧 ‘음부(하데스, 무덤)’에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23절). 그들을 갈라놓은 구렁텅이는 사람이 죽으면 그들의 운명이 고정된다는 사실을 상징한다. 따라서 이생에서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대단히 중요하다(29, 31절). 이생에서 실패한 것을 만회할 수 있는 미래의 삶은 없다.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교훈 : 우리는 세상의 부가 제한적이기 때문에 부자가 더 부자가 되면 필연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더 가난하게 되는 심각한 문제점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부가적용)
우리가 부에 대하여 우리의 삶의 균형을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재물을 바르게 사용하여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어 가는 청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너희는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6절) 야고보 장로는 부한 자들의 죄로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고 박해하는 죄를 말합니다. 이는 힘없는 약자인 가난한 자를 자신이 가진 부의 힘을 이용하여 이유 없이 억울하게 정죄하고 압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오늘 날의 부한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는 배금주의를 경계하여야 합니다. 더 많은 재물을 구하며 하나님 앞에 나오는 탐욕으로 가득한 부한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가난한 자들을 돌보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하여 가난한 자들을 약탈하려 합니다. 이는 선생된 목회자도 일반입니다. 목회자는 성도에게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가르쳐야 됩니다. 이는 선생된 자들의 책임이며 의무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바른 경제생활을 가르치려하지 않습니다. 이제 교회는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재물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바르게 사용하면 성도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복이 됩니다. 그러나, 세상의 정욕으로 잘못 사용하면 사람을 멸망에 이르게 하는 화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부자에 대해 엄격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떤 이들이 이 비유가 부자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엄격하고 가난한 자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관대하다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무조건 부자는 부정적으로 가난한 자는 긍정적으로 평가하실 리가 없습니다. 이 비유에서 부자는 스스로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능력의 범위 내에서 가난한 자를 도울 수 있는 기회를 거부한 자들을 대표하며, 나사로는 가난하지만 믿음과 소망을 끝까지 붙든 자들을 대표합니다.
| 적용 |
현세의 과오를 만회할 내세가 없다면 오늘 그대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영감의 교훈
기도
아버지, 마음에 거리끼고 내키지 않는 이 문제 앞에 섭니다. 제가 부유해진 사이에 가난에 허덕이는 이들이 늘었다면 제게도 허물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재물을 이웃을 위해 가치 있게 사용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시옵소서.
다섯째 날(목) 피해자를 비난함
12월 4일
교사강해 5)
현대세계의 모든 비극과 고통의 뿌리엔 착취에 있습니다.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의 열매를 착취하는 사람들의 악이 누룩이 되어 세상을 부패하게 합니다. 서방제국주의 국가들이 일으킨 침략전쟁들의 동기는 착취에 있었습니다. 그 못된 짓을 아시아에서 먼저 배운 나라가 일본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혹독하게 착취한 적이 있습니다. 수탈이 동반된 독한 착취였습니다. 소위 신자유주의 시대인 오늘날 비정규직 문제의 근거에도 착취가 숨어 있습니다. 같은 부서에서 똑 같은 일을 해도 임금이 절반이라면 그게 착취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런 비정규직이 전체 노동 인구의 절반이 넘는다면 그 사회가 정상입니까? 오늘날 우리 사회의 착취는 구조적이고 일반화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사회는 더욱 험악해지고 삶의 고통은 갈수록 심화된 것입니다. 열심히 땀 흘려 일하고 정직하게 살아도 가난해 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는 착취가 만연된 사회입니다. 착취의 사회구조를 외면한 채 말하는 사랑은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구조적인 착취에 눈 감은 채 행하는 자선사업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잘못을 저지르면 책임을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종종 다른 사람에게, 심지어 피해를 입은 자에게 책임을 떠넘기려 한다. 살인범들은 자기 방어의 정당성을 주장하거나 또는 잘못된 가정교육을 탓한다. 성범죄자들은 자신을 유혹했다며 피해자를 비난한다. 이혼하는 남편과 아내는 특히 실패한 결혼 생활에 대해 상대를 비난한다. 기독교 신앙으로 순교한 이들의 가해자들은 이단의 죄목을 들어 순교자들을 비난한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경고하셨다.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요 16:2). 우리는 야고보 역시 신앙을 이유로 순교하였다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약 5:6의 말씀은 훨씬 무게감이 있다.
“너희는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약 5:6). 그대가 다른 사람을 정죄했지만 나중에야 정말 잘못한 사람은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적이 얼마나 많았는가? 특히 이 말씀의 뒷 구절을 생각해 보라. 이 말씀은 사람들이 우리를 함부로 하도록 내버려 두라는 뜻인가? 우리가 반대를 표명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다툼이 얼마나 많았는가? 다른 뺨도 돌려 대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뜻인가?(마 5:39) 실질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어떻게 이렇게 해야 하는가? (아니면 꼭 실질적일 필요가 없는 것에 대해 실질적이기를 바라는 것이 문제인가?)
앞서 봤듯이 야고보는 부자와 가난한 자들에 대해 할 이야기가 많다. 하지만 야고보가 부자들을 단지 부자라는 이유로 정죄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들의 태도와 행위가 하나님께 문제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경제적으로 가난하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더 은총을 받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후사가 될 자들은 심령은 가난하지만 믿음에는 부요한 자들이다(마 5:3, 약 2:5 참고).
교훈 :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의인을 정죄하고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부자가 되기보다 오직 믿음에 부요한 자들이 되어야 한다.
부가적용)
착취는 가정에서도 일어납니다. 성실하게 살림하는 아내(전업주부)를 집에서 노는 사람으로 취급하며 집에서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남편은 아내를 착취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을 낳아 키우며 살림하고 내조하는 일은 밖에 나가 일하는 남편의 일 못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맞벌이 하는 부부인 경우, 퇴근 후 여자만 가사 일을 한다면 그 집의 착취는 더 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착취를 말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낄 사람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가정의 진정한 평화를 도모하기 위해서 이런 점은 간과할 수 없습니다. 결론이라는 미명아래, 희생정신이라는 미명 아래 여성들이 착취를 당하고 그로 인해 한이 맺힐 경우를 흔히 봅니다. 이런 역사는 또한 오래 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악명 높은 세리였던 삭개오가 좋은 사례입니다. 인간은 학식이나 지위(권력) 또는 꾀를 이용하여 이 짓을 하기 쉽습니다. 강제로 빼앗는 경우(수탈)도 흔합니다. 몰래 훔치는 도둑도 흔합니다. 아합 왕은 가난한 농부, 나봇을 권력을 이용하여 죽이고 강제로 그의 농토를 빼앗아 별장을 지었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씌워 죽이고 재산을 수탈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합 왕을 친히 죽이셨습니다(왕상 21장). 반면에 삭개오는 회개함으로써 무서운 심판을 면했습니다. 부동산 투기는 좋은 예입니다. 누군가 투기로 불로소득을 얻으면 그만큼 피해를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부동산 투기는 나라를 좀 먹는 대표적 악입니다. 부통산 투기로 불로소득을 얻은 사람들 가운데 그 불로소득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믿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그 믿음은 착각일 뿐입니다. 불로소득은 일만 악의 하나입니다. 그 악은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그 사람을 해칩니다. 알게 모르게 외모 꾸미는 일에 몰두하는 여자가 배우자로 부자를 찾는다면 그 마음을 먼저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마음속엔 불로소득을 바라는 욕구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부자일수록 영적 생활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이런 내적 자격은 우리의 특정 경제적 상황과 관계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관계가 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부하고 풍요로운 자들은 그들의 생각보다 훨씬 영적으로 가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번영을 누리게 되었을 때 “재물을 얻을 능력”을 포함하여 그들이 누리는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왔다는 사실을 잊지 말도록 주의하라고 경고하셨다(신 8:11~18).
| 적용 |
그대는 ‘대항하지 않은 의인’(약 5:6)에 대한 언급에서 어떤 교훈을 얻습니까? 그리고 그 교훈을 어떻게 자신의 삶에 적용하기를 원합니까?
영감의 교훈
기도
아버지, 우리는 자신의 허물을 감추기 위해 약자에게 잘못을 떠넘기기보다 예수님과 같이 대항하지 않은 순교자의 정신으로 이 세상을 살며 경제적으로 어려워질지라도 신앙 만큼은 결코 양보하지 않는 믿음의 자녀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여섯째 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12월 5일
“돈은 큰 선을 행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가치가 있는 것이다. 돈이 하나님의 자녀의 수중에 있을 때는 그것이 주린 자의 양식이 되고, 목마른 자의 마실 물이 되고, 헐벗은 자의 옷이 된다. 그것은 또 압제받는 자에게 방어물이 되고, 병든 자에게 도움의 방편이 된다. 그러나 돈을 생활필수품을 마련하고, 다른 사람을 축복하고, 그리스도의 사업을 전진시키는 목적 이외에 사용할 것 같으면 그 돈은 모래와 마찬가지로 쓸모없는 것이 된다.
아껴 모아서 사장(死藏)해 둔 재산은 쓸데없는 것일 뿐 아니라 하나의 저줏거리다. 그 재산은 이생에서 하늘 보물에 대한 사람들의 애착심을 빼앗는 올무가 된다.… 자기가 가진 돈이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라고 생각하는 자는 그 돈을 경제적으로 사용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주기 위하여 절약하는 것을 자기의 의무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실물교훈, 351~352).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부자는 가난한 자를 주관하고 빚진 자는 채주의 종이 되느니라”(잠 22:7). “빚을 진 자는 사탄이 영혼들을 잡기 위하여 친 올무에 걸린 것이다”(재림신도의 가정, 392). 사람들이 채무에서 벗어나거나 빚지지 않도록 돕는 것도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의 일환일까요? 그러한 이유 또는 그렇지 않은 이유를 말해 보십시오.
➋ 우리가 돈의 주인인지 돈이 우리의 주인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눅 16:10~13)
➌ 경제적 불평등은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어떤 사람은 고급 저택을 2~3개 또는 그 이상 소유하는 반면 어떤 이들은 나무 조각을 얻어 초가집을 수선하기만 해도 행복해 합니다. 전 세계에 극심한 기근에 허덕이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과식으로 비만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많이 거두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많이 나눌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어떤 이들은 부자가 더 큰 부자가 되면 가난한 자들이 가난을 극복하도록 도울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극도의 빈곤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어떻게 일해야 합니까? 우리가 돕기 위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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