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과 갈등 해결(교사들을 위한 강해와 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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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과 갈등 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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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4일 안식일
일몰:오후 6시 9분
기억절 :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7:1).
도입)
어느 날, 비파행-장한가로 유명한 당나라 시인이요-항주자사인 백낙천(772-846)이 항주 전망산의 도림선사(道林禪師, 741-824)를 찾아가,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을 만한, 한 말씀 주십시오” 하니, 도림은 단 한 마디 “諸惡莫作 衆善奉行(제악막작 중선봉행: 악한 죄 짓지 말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라)” 라고 하였습니다. 대단한 명언을 기대하였던 백낙천은 “그걸 누가 몰라?” 하였습니다. 그러자 도림은 옷매무새를 고치고 단정이 좌정하고 “과연 그러하다. 알기는 세 살 먹은 아이도 안다. 그러나 90 노인도 행하기는 어렵다!” 고 一喝(일갈) 하였습니다. 오늘의 기억 절은 모두가 알 수 있는 성경이지만 “마른 떡 한 조각으로도 화목”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충만한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사람은 당장 보이지 않고 입을 만족시켜주지 않으면 불평과 불만을 나타내는 존재입니다. 그런 사람이 만약 마른 떡 한 조각으로 화목할 수 있다면 성령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사람이 낙천적이어서 즐거운 것이 아닙니다. 상황이 어려워도 즐거워할 수 있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우리의 관심은 낙천적인 사람이 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앙 밖에서 이야기할 일입니다. 성격이 좋든 나쁘든 예수님을 믿고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자신의 성품이 아닌 하나님의 성품이 임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우리가 신성한 성품, 신의 성품, 신의 본성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벧 후 1:3-4) 어려울 때 어렵고, 좋을 때 좋은 것은 충만한 삶이 아닙니다. 상황이 어렵든 좋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울 수 있는 것이 성령으로 충만한 삶입니다. 상황이 어려워서 즐거움을 잃어버린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상황이 어려운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 안에 즐거움이 사라진 것이 더 문제입니다. 마음과 삶에 즐거움이 없는데 어찌 믿음이 있겠습니까? 삶이 어려워도 성령으로 충만하여 즐거움을 잃지 않는다면 훈련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열매가 풍성한 삶입니다.
연구 범위 : 잠 17장, 고전 13:5~7, 요 8:1~11, 잠 18, 19장, 신 24:10~22.
잠언은 외모의 기만을 다시 한 번 규탄한다. 우리는 세상이 제공하는 모든 것, 즉 부와 권력, 쾌락과 명성을 모두 소유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긴장과 불행이 싹튼다. 그런데 이러한 긴장과 불행의 원인은 사람들이 그토록 애써 얻으려 하는 부와 쾌락일 가능성이 크다. 이집트의 잠언에 “행복한 마음으로 먹는 빵 한 조각이 다툼을 일으키는 재산보다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잠언에 따르면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 단계는 우리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깨닫는 것이다. 화목한 관계가 재산보다 중요하다(잠 17:1). ‘내가 얼마나 많이 소유했는가’ 보다 ‘내가 우리 중에서 어떤 사람인가’가 중요하다. 이번 주에 살펴볼 권면들은 이러한 우선순위를 회복하도록 도움을 줄 것이며 행복을 증진시킬 내적 평화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안교·선교부 홈페이지에 다양한 교과 토의 자료가 있습니다.
안교 활동반과 교과 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갈등을 조장하는 말이 무엇인지 확인한다.
➋ 느끼기 : 재산만큼 가족과 친구들을 소중하게 여긴다.
➌ 행하기 : 잠언 17~19장에서 말하는 지혜를 따르기 위해 삶을 재정비한다.
Part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그대의 잘못을 덮어주었던 가족이나 형제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❷ 진실한 우정을 가진 사람은 친구의 잘못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❸ 친구에게 충고가 필요하다고 느낀다면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그에게 충고해야 합니까?
❹ 가려 주어야 하는 죄는 무엇이며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무엇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B. ❶ 마치 나를 위해 준비해 둔 것 같은 말을 들었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❷ 미련한 자와 지혜로운 자의 말하는 습관은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❸ “깊은 물”(잠 20:5)은 말하는 습관에 대해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까?
❹ 우리가 좀더 지혜롭게 말하기 위해 결심해야 할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결론 : 인간의 관계는 언어 위에 수립됩니다. 우리가 서로 주고받는 말은 우리의 관계의 본질을 가리킵니다. 분쟁을 일으키는 분노의 말과 거짓말은 깨진 관계를 나타냅니다. 진리를 드러내는 우아한 말과 격려는 발전적인 관계를 나타냅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오늘(또는 내일) 있을 특별 활동을 최종 확인하고 참여를 권장합니다.
❷ 3월부터 안식일 오후 활동을 시작하기로 결의합니다.
❸ 친교 모임과 오후 활동을 위해 기도합니다.
첫째날(일) 2월 8일 죄와 우정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잠 17:9).
교사강해 1)
잠언 17:9절에서 '허물을 덮어주는 자'와 '이를 거듭 말하는 자', 그리고 '사랑을 구하는 자'와 '벗을 이간하는 자'가 대조되어 있습니다. 타인의 잘못을 덮어 주는 사람은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남의 허물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입니다. 남의 실수를 거듭해서 말하는 사람은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이웃의 허물과 실수를 들추어내고 이를 반복해서 말하여 문제를 더 크게 만듭니다. 이러한 사람은 여기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저기에서는 저렇게 말을 해서 친한 벗을 갈라놓습니다. 사람들은 구타를 당하면 몸에 상처를 입고 고통을 당합니다. 그러나 몸에 난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다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한 말로 인해 받은 상처는 마음 깊은 곳에 남아서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말로 남에게 상처를 입히고, 친한 벗을 이간질하는 사람은 남을 구타하는 일보다 더 잔인한 일입니다. "사람을 이롭게 하는 말은 솜처럼 따뜻하지만, 사람을 상하게 하는 말은 가시처럼 사랑을 찌릅니다. 남을 중상하는 말로 인해 당하는 아픔은 마치 칼에 베인 것처럼 아픕니다" 어거스틴은 때때로 동역자들을 초청해서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그때에 그는 식탁 앞에 이렇게 써 붙였다고 합니다. "여기 함께 있지 않은 사람의 허물을 말하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허물이 허물로 보이지 않습니다. 설령 눈에 확연히 드러나는 허물이 있다 할지라도 그를 사랑하는 사람은 마치 그것이 자신의 허물인 것처럼 민망히 여깁니다. 예를 들어,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라면 남편이 잘못 되기를 바랄 리가 없고 설령 남편의 흠과 티가 보인다 해도 다른 사람들에게 알라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부모 자녀 사이에도 마찬가지이지요. 부모는 자녀가 아무리 흉악한 죄를 지어 감옥에 갔다 할지라도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알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는 부모는 가슴 속에 그것을 깊이 묻어 두고 감옥에서 고생할 자녀 생각에 맛있는 음식을 앞에 놓고도 제대로 먹지 못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또 어떤 부모들은 자녀를 대신하여 속죄하는 뜻에서 겸허하게 이웃을 섬기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이것이 서로 간에 사랑이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가족 간에도 서로의 허물을 드러내고 알리어 피차 힘들게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형제간에도 어떤 허물이 있으면 또 다른 형제에게 이내 그 허물을 알립니다. 누구의 허물을 발견하면 그 생각은 판단하기에 빠르고 그의 마음은 정죄하기에 빠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진리는 바로 사랑이요, 사랑은 상대의 허물과 죄까지도 덮어 주는 것입니다. 흠과 점과 티도 없으셨던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의 허물을 지적하거나 정죄하신 것이 아니라, 먼저 용서를 베푸셨고 병든 자를 치료해 주셨으며 죄인의 허물을 덮어주시고 돌이켜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하물며 하나님 앞에서 많은 죄와 허물을 용서받은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부모, 형제, 남편, 아내는 물론 주 안에서 한 가족인 서로의 허물을 덮어줄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을 지니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잠언 17:9과 19:11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의 요점은 무엇인가? 우리는 타락한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우리는 누군가에게 문제가 생기면 그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며 소문을 퍼트리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그대는 ‘누가 어떻게 했다더라!’라는 식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가? 그러면 우리는 자못 놀란 듯이 행동하지만 그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린다. 이렇듯 우리는 소문에 취약하기 때문에 그런 행동에 대해 경고를 받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절친한 관계에도 불화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친구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다닌다면 그대를 어떻게 친구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친구의 실수를 덮어주라고 권면을 받는다. 그렇다고 마치 아무 일도, 아무 잘못도 없다는 듯이 죄를 숨겨주라는 말은 아니다. 죄는 덮는다고 해서 심지어 감춘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이 표현에서 ‘덮는다’는 의미의 히브리어는 ‘용서’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시 85:2, 느 4:5). 험담보다는 사랑이 다른 사람의 과오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되어야 한다.
잠 17:17, 고전 13:5~7을 읽어 보라. 친구의 과오를 해결하는 데 사랑은 어떤 도움을 주는가?
우리는 친구나 배우자가 완벽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들의 실수와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한다. 우리는 사랑해야만 다른 사람을 정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과실과 부족으로 인해 우리에게도 잘못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저지른 일에 대해 함께 슬퍼하고 그것의 해결을 위해 도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 정도도 할 수 없다면 친구가 좋다는 말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교훈 : 진실한 우정은 친구의 잘못을 들추는 것이 아니라 그를 사랑하여 잘못을 덮어주되 함께 슬퍼하며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주는 것이다.
부가적용)
진정 마음이 선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드러내려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당사자가 없는 곳에서 말을 옮기면서도 자신은 말을 옮긴다고 생각지 않는 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은 이러이러한 잘못이 있는데 나는 다 이해할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경우이지요. 마치 자신은 상대를 감싸 주는 너그러운 사람인 것처럼 말하지만 오히려 허물을 드러내 사람들에게 알리는 결과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상대의 허물을 드러내 알리는 것이 얼마나 큰 악인지 깨달아 결코 그렇게 행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누군가의 허물이 발견된다면 먼저 당사자를 찾아가 사랑으로 권면해 주는 것이 선이요, 의입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봤을 때는 바로 이야기하기보다 기도하면서 잠시 기다려야 합니다. 애정을 담은 권고는 꼭 필요하지만, 친구의 허물과 잘못을 거듭 지적했다가는 우정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친구의 허물을 입에 실어 나르는 이를 이간자라고 질타합니다.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또한 인간을 궁극적으로 변하게 하는 것도 사랑입니다. 직언에 앞서 사랑을 담으십시오. 부부 사이에 의처증이나 의부증이 생기는 이유는 사랑이 지나쳐서라기보다 온전히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부족해서 남편을 못 믿고, 아내를 못 믿고, 자녀를 못 믿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사랑은 모든 것을 믿어주기 때문이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상대의 최선을 믿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랑이 필요하다. 현대사회의 가정에 이런 사랑이 필요합니다. 부부간, 부모와 자식 간에 이런 사랑이 필요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히틀러가 유태인 육백만 명을 한꺼번에 무참히 죽인 사실은 역사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훗날 연합군이 그들이 갇혀 있던 지하 감방을 수색하던 중에 그 참혹한 감방의 벽에서 다음과 같은 글귀를 찾았다고 합니다. 다윗의 별이 그려진 아래에 “비록 태양은 내게 비춰오지 않으나 나는 태양이 있음을 믿는다. 나는 비록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으나 진실한 사랑이 있음을 믿는다. 비록 하나님은 지금 내게 침묵하고 계시지만 나는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에 오늘날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이 있었음에 우리는 천국을 소망하며 하나님의 자녀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친구의 허물을 덮어줌으로 그대가 감수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집단 따돌림 현상에는 비난이나 조롱의 표적이 되는 사람과 동류로 취급당할 위험성 때문에 주변 인물들이 그와의 접촉을 꺼리는 심리가 작용합니다. 그런 사람의 친구가 되는 것 또는 그에 대한 험담을 피하는 것은 사회생활의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일입니다. 또한 그런 사람과 우정을 유지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보다 훨씬 힘든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오시고 죄인의 친구가 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
| 적용 |
그대는 현재 친구가 저지른 잘못을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노력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진정한 관심을 보여야 할 때 - “어떤 형제가 잘못한다면 그때는 그에게 대한 그대의 진정한 관심을 보여야 할 때이다. 친절하게 그를 찾아가서 그리스도께서 그의 구속을 위하여 지불하신 무한한 대가를 기억하며 그와 함께 그리고 그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와 같은 방법으로 그대는 한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고, 허다한 죄를 덮어 줄 수 있다”(교회증언 5권, 58).
기도
죄인의 친구이신 주님, 우리의 죄와 허물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다만 십자가 위에 넓게 펴신 팔로 덮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이 사랑을 제 마음에 담아 가족과 친구, 동료의 잘못을 덮어주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둘째날(월) 2월 9일 공의롭게 하라!
“한 마디 말로 총명한 자에게 충고하는 것이 매 백 대로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히느니라”(잠 17:10).
교사강해 2)
총명한 사람은 충고를 달게 받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총명한 자'는 '사리를 분별하는 지혜를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지혜자는 한 마디의 책망만 들어도 즉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바른 길로 돌아섭니다. 총명한 사람은 충고를 달게 받고 그 충고를 받아들입니다. 이 일에 있어서 다윗은 좋은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하고 이를 숨기기 위해서 우리야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나단을 보내서 다윗의 죄를 책망했습니다. 다윗은 그 책망을 듣고 즉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용서를 구했습니다. 이로 인해 다윗은 사망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자는 큰 형벌을 받아도 결코 죄에서 돌이키지 않습니다. 미련한 자는 남이 충고하면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 합니다. 그는 타인의 지적을 받을 때에 진노하여 충고하는 자를 비난하고 공격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고 계속해서 죄에 거하기 때문에, 결국 큰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할 때에 말씀과 양심을 통해서 책망하십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러한 책망을 받을 때에 즉시 회개하고 돌아서지만, 미련한 자는 그 책망을 듣지 않고 계속해서 죄를 행합니다. 그러므로 지혜자는 용서와 구원을 받지만, 우매자는 심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책망을 멸시하는 미련한 자녀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책망을 귀중히 여기고, 즉시 죄에서 돌이키는 지혜로운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눈 먼 사랑이 아니다. 누군가의 잘못을 사랑으로 덮어주라는 말은 그것을 죄로 인정하거나 간주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사랑과 공의는 병존해야 한다. 공의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체데크’는 ‘사랑’과 ‘긍휼’을 뜻하기도 한다. 공의롭지 않다면 참으로 동정할 수 없고, 반대로 동정과 사랑 없이 공의로울 수 없다. 두 개념은 반드시 양립해야 한다.
예를 들어 가난한 자들을 동정하는 것은 공의를 포기한 채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해서 편벽되이 두둔하지 말”(출 23:3)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가난한 자들을 돕도록 우리를 강권할지라도 그들이 잘못했을 때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비호한다면 그것은 공의롭지 못한 처사이다. 따라서 공의와 진리는 사랑 또는 긍휼과 병립해야 한다. 잠언이 강조하는 하나님의 법, 즉 ‘토라’의 특징이 바로 이런 지혜로운 조화이다.
잠 17:10, 19:25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책망과 대립의 필요성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가? 잠 17:10이 사랑으로 실수를 덮어주라고 호소했던 잠 17:9의 바로 뒤에 나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사랑과 관련하여 “충고”를 언급한 이유는 바른 관점에서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문맥상 이것은 강한 책망을 암시한다.
요 8:1~11을 읽어 보라. 공개된 죄를 예수님은 어떻게 다루셨는가?
“이 여인을 용서하시고 고상한 생활을 하도록 격려하신 이 일 가운데서 예수의 성품은 완전한 의의 아름다움으로 빛났다. 예수께서는 죄를 가볍게 하시거나 죄책감을 경감시키지 않으시는 동시에 정죄하려 하지 않으시고 구원하려고 노력하신다. 세상은 이 곁길로 나아간 여인에게 멸시와 조롱밖에는 주지 않았지만 예수께서는 위안과 희망의 말씀을 주셨다”(시대의 소망, 462).
교훈 : 우리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친구의 잘못을 덮어주되 절대 공의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공의가 사라진 동정은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
부가적용)
책망과 충고에 대해 귀를 막는 사람은 매우 미련한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권면을 듣습니다. 더구나 미련한 자의 매 100대보다 지혜로운 자에게 하는 한마디의 충고가 더 깊이 박힙니다. 따라서 미련한 사람과 함께하는 것만큼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미련한 자와 함께하느니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나는 것이 낫다고 할 만큼 성경은 이를 경계하고 있습니다(12절). 그들은 상대의 허물을 짚어서 공론화하고 감정적인 대립만을 일으킬 뿐입니다(9절).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습니다. 이는 그들의 실수를 이해하고, 그 허물로 해를 입었다고 해도 그를 사랑하고 감싸 주는 것을 말합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리스도인 친구가 해 줄 수 있는 진실한 충고의 조건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다른 사람의 죄를 지적하거나 잘못에 대하여 충고하는 행위는 현대인들에게 일종의 금기가 되었습니다. 도덕적인 문제든지 사법적인 문제든지 개인이 책임질 영역에 뛰어드는 것은 여러 면에서 위험 부담 요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문제를 초월할 수 있는 관계라면 충고와 지적은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사랑의 표현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즉 충고와 지적은 사랑의 관계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 적용 |
예수님이 현재 사랑의 마음으로 그대에게 전하시려는 충고의 말은 무엇일까요?
영감의 교훈
정죄보다는 구원이 목적 - “무죄하신 분은 죄인의 연약함을 동정하시고 그녀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치셨다.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은 비난하였지만 예수께서는 그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당부하셨다”(시대의 소망, 462).
기도
주님, 저는 믿음이 연약하여 쉽게 실망하고 넘어지지만 주님이 사랑으로 전해주시는 책망과 훈계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주의 음성이 친구를 통해 오고 때로 원수를 통해 오더라도 죄와 잘못에서 돌이켜 의를 회복하기를 원합니다.
셋째날(화) 2월 10일 다시 말에 관하여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잠 18:13).
교사강해 3)
땅에는 道路(도로)가 있습니다. 물에는 海路(해로)가 있습니다. 하늘에는 航路(항로)가 있습니다. 書藝(서예)에는 書法(서법)이 있습니다. 모든 운동에는 기본자세가 있습니다. 법대로 하지 아니하면 망하거나, 큰 성취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不學古人 法無一可 竟似古人 何處著我(불학고인 법무일가 경사고인 하처저아: 고수에게 배우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그러나 고수를 닮기만 한다면, 나만의 개성은 어디에서 이룰 것인가?) 라고 하였습니다. 말에도 당연히 言道(언도)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걸 누가 몰라?” 할 만큼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느니라(잠15:28)-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자기 이웃을 축복하면 도리어 저주 같이 여기게 되리라(잠27:14)-지식이 있는 자는 말을 아끼느니라(잠17:27)-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고우니라-말이란 아 해 다르고, 어 해 다르니라 등” 이 그것입니다.
잠언 18장을 읽어 보라. 여기서 다루는 여러 주제 가운데 우리의 언어에 대한 권면에 초점을 맞추라. 우리의 언행에 관하여 어떤 중요한 개념이 제시되는가?
우리는 다시 언어의 본질과 영향력이라는 주제와 마주한다. 여기서 우리는 미련한 자들이 어떻게 입을 잘못 사용하여 실패하는지 알 수 있다. 특히 13절은 교훈적이다. 우리는 신중하게 듣고 들은 바를 파악하기 전에 쉽게 말을 내뱉는다.
듣고 바로 대답하기 전에 신중하게 생각하였더라면 불필요한 고통과 불행으로부터 우리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구할 수 있었던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침묵이 최선의 답일 때가 있다.
잠 18:4을 읽어 보라. 왜 지혜로운 자의 말이 깊은 물과 같은가?
잠언에서 ‘깊은 물’은 지혜를 상징하기 위한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잠 20:5). 그것은 고요함이라는 개념뿐 아니라 심오함과 풍부함의 의미를 내포한다.
지혜로운 자들은 피상적이거나 얄팍하지 않다. 그들의 말은 개인적인 사색과 경험의 깊이에서 우러나온다. 누구든지 지식과 지혜를 가진 자들의 깊은 사고와 통찰력을 접하면 놀라기 마련이다.
잠 18:21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무슨 의미인가?
잠언은 우리가 이미 알아야 하는 사실을 다시 한번 말한다. 언어는 영향력이 크다. 그것은 긍정적인 결과와 부정적인 결과, 심지어 생명과 죽음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엄청난 위력을 가진 이 도구를 매우 신중하게 사용할 필요가 있다.
교훈 : 우리는 언어의 영향력을 고려하여 무슨 말을 듣든지 성급하게 대답하여 고생을 자초하기보다 ‘깊은 물’을 긷는 것처럼 언어를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
부가적용)
어떤 일의 경위를 파악하기 전에 자기 생각대로 판단해서 행동하는 사람은 큰 수치를 겪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일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대화중에 다른 사람의 말을 자리고 자기 생각에 맞추어 아는 척하다가 부끄러움을 당하는 경우가 있지요. 또 다른 사람에 대한 어떤 말을 들을 때 평소 가지고 있던 생각과 감정으로 그를 비방하고 험담하다가 사실이 밝혀진 뒤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하기도 합니다. 무슨 말을 했으면 끝까지 잘 듣고 대답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다 듣기도 전에 “가만 있어봐, 내가 말할게” 하는 사람이라면 신사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다 듣고 나서 한참 생각을 하고, 그리고 나서 말을 해도 늦는 법은 없습니다. 다 듣고 나서 한참 생각을 하고, 그리고 나서 말을 해도 늦는 법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신사적인 사람입니다. 비신사적인 것은 즉흥적인 것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일곱 가지 조건을 갖추었다고 합니다. 첫째, 자기보다 현명한 사람을 만났을 때에 침묵하고 듣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들을만한 말입니다. 해서 마음을 열고 경청합니다. 들을수록 자기에게 이로운 것이니까요. 현명한 사람입니다. 두 번째는 남의 이야기에 절대로 끼어들지 않는 것입니다. 남들이 좋은 말을 하든 나쁜 말을 하든 그 상에 끼어드는 따위의 어리석은 짓은 안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대답할 때에 덤벙대지 않고 언제나 신중히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하고, 이치에 맞는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질문하는 것을 들을 때, 저 사람이 왜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는 경우가 있습니다. 질문을 하는 것인지 제 자랑을 하고 있는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정리되지 않은 짐룬을 합니다. 어째든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하고, 대답을 할 때에는 이치에 맞도록 대답을 한다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해야 할 일을 먼저하고, 미루어도 될 일은 맨 마지막에 하는 것입니다. 순서를 정한다는 그 말입니다. 여섯 번째가 모를 때에는 모른다고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모르면서 아는 체하는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 못됩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똑똑하게 말하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입니다. 일곱 번째는 진실을 인정할 줄 아는 것입니다. 언제나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는 것이 현명한 사람의 태도입니다. 탈무드에는 또 이런 말도 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모든 것에서 배우는 사람이다. 이런 일에든 저런 일에든 모든 것으로부터 배운다.’ 헬라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현명한 사람은 원수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 나를 괴롭히는 원수로부터도 배울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많은 것을 배울 줄 아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지혜로운 대답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사실 우리의 언어습관은 말하기보다 듣기에서 좌우됩니다.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고 그 의미를 천천히 확인한다면 우리는 대화할 때 실수를 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감정이 앞서 상대방의 말을 무시하거나 곡해하면 대립과 갈등이 야기됩니다. 상대방의 말을 듣자마자 대답하기보다는 생각하고 대답하는 것이 좋고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대답하면 훨씬 좋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
| 적용 |
그대가 지혜롭게 대답하기를 원한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
영감의 교훈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충실한 생애 - “ ‘잘 하였도다’라고 칭찬해 주는 사람이 세상에 하나도 없어도 우리는 자신의 사업을 거짓이 없고 성실하게 해야 한다. 우리의 생애는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생애, 곧 선한 말을 하며 친절하고 신중한 행동을 하고 온유와 순결과 사랑을 나타내는 일에 충실한 사람이 되는 그러한 생애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함으로 우리는 세상에 그리스도를 나타내게 된다”(복음전도, 629).
기도
아버지, 제게 말할 수 있는 입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제 입이 귀보다 더디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제 귀는 기도보다 더디기를 원합니다. 깊은 물에서 나오는 생수처럼 진실하고 깨끗한 언어로 말할 수 있게 하옵소서.
넷째날(수) 2월 11일 한 이야기의 두 측면
“미련한 자는 명철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의사를 드러내기만 기뻐하느니라”(잠 18:2).
교사강해 4)
미련한 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의 권고와 지혜로운 친구의 권고를 도무지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미련함에서 벗어날 기회가 있지만 터무니없이 고집을 부립니다. 자기의 행위가 바른 줄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더 좋은 것을 제시해도 자기가 옳다고 여기기 때문에 소용이 없습니다. 이렇듯 듣지는 않으려하고 자기 의견을 내세우며 그것만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미련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은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미련함이 시작됩니다. ‘나만 옳다’는 어리석은 생각이 미련함의 특징입니다. 미련한 자는 사욕을 쫓아 공동체에서 분리되고, "명철"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명철'(테부나)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그것에 대처할 필요를 깨닫는 지혜를 말합니다. 사람들이 사욕을 쫓아 공동체에서 분리되면 여러 가지 어려움에 노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이러한 때에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연구하거나 전문적인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합니다. 지혜자는 이러한 일을 통해서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고 한 단계 더 온전한 상태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미련한 자는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타인의 조언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미련한 사람은 자기 고집대로 밀고 나가다가 문제를 악화시키고, 악순환을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면, 결국 그는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잠 18:2을 읽어 보라. 왜 미련한 자는 그들의 의견을 검토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는가?
미련한 자들은 자기에 대한 확신이 지나친 나머지 다른 이들에게 배우는 데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데 열중한다. 닫힌 생각과 열린 입이 짝이 되어 치명적인 조합을 이룬 셈이다. 우리도 특별히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주제에 대하여 그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할 필요가 있다.
우리 모두는 한때 매우 확신했던 어떤 주제에 대해 나중에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의 의견에서 선명한 색을 빼라는 뜻은 아니다. 이는 단지 우리 중에 아무도 절대적으로 옳은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겸손함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비록 우리의 대답이 옳을지라도 진리는 우리의 이해력보다 더 깊고 미묘한 의미를 내포한다.
잠 18:17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의 요점은 무엇인가?
오직 하나님만이 다른 의견이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분은 이미 진리를 아시며 모든 것을 감찰하시기 때문이다(잠 15:3). 하나님은 어떤 문제든지 모든 면을 보시는 능력이 있다. 반대로 우리는 무엇이든 매우 편협한 관점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특히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에 대해 경직된 입장을 고수할 때에 그러한 관점은 더욱 편협해진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이야기든지 양면 또는 그 이상의 측면이 항상 존재하며, 정보가 더 많을수록 그 주제에 대하여 더 옳은 의견을 수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교훈 : 우리는 자신이 확신하는 것이 진실의 한 면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겸손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한다.
부가적용)
일본 사람은 진흙에 비유하고 한국 사람은 모래에 비유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어디를 가든 하나가 되지 못하고 무리에서 나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도 한국처럼 많은 교파를 가진 나라는 없습니다. 장로교 중에 예장만 하더라도 백개가 넘는 교파가 있다고 합니다. 잠언 저자는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욕심만 채우려 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표준 새 번역에는 명철을 기뻐하지 아니하고를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을 적대시한다고 번역하였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함께 해야 건전한 판단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더욱 교회에서 어울리며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않는 자는 미련한 자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의사는 생각지 않고 자신의 의사를 드러내기만 기뻐합니다. 하나가 되기를 거부하는 자는 이기적이고 교만하고 독불장군인 자입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우리가 지나친 확신을 조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약속에 대한 우리의 확신에 기초해 있습니다. 따라서 확신의 결여는 곧 믿음의 결여입니다. 반면 확신이 자신의 판단과 사고에 기초해 있다면 그것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욥 38:2)고 물으실 때, 욥과 그의 친구들이 고집했던 확신은 모두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들의 확신은 하나님에 대한 것이었지만 너무도 단편적인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 적용 |
그대가 가장 확신하는 것 중 오류의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할 문제는 무엇일까요?
영감의 교훈
다른 의견을 인정하라 - “그대는 그대와 연관된 사람들의 판단과 의견의 자유를 기꺼이 인정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는 위험에 처해 있다. 그대의 것이 그대에게 소중한 것처럼, 그들의 방법과 그들의 의견도 그들에게 소중하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는 다른 이들이 우리에게 동의하지 않을 때 다른 사람들을 비난한다는 이 사실을 잊기가 매우 쉽다”(교회증언 4권, 126).
기도
하나님, 우리의 짧은 지식과 제한된 이해력으로는 절대적인 확신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오직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믿고 기도합니다. 성령께서 펼쳐 보이시는 드넓은 진리의 바다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게 하옵소서.
다섯째날(목) 2월 12일 진실하라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뱉는 자는 망할 것이니라”(잠 19:9).
교사강해 5)
어떤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들을 보고 배가 아파서 근거도 없는 말들을 지어내서 퍼뜨립니다. 성경은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하는 자도 피하지 못하리라(잠 19:5)고 말씀합니다. 거짓말로 남에게 고통을 주고 곤경에 처하게 하는 사람에게는 항상 벌이 따라 오는 것입니다. 남이 잘되는 것을 보고 축하해 주고 칭찬해 주고 복을 빌어주면 그 복이 자기에게 넘쳐 옵니다. 그러나 남이 잘 되는 것이 못마땅해서 약점을 잡아 모욕을 주고 인격을 짓밟으면 반드시 자기에게 화가 되어 다가오는 것입니다. 남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을 심으면서 내 삶에는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비방하고 싶을 때, 혹은 나의 행함을 과정하거나 속이고 싶을 우리는 거짓말에 대한 유혹에 빠집니다. 하지만 아무리 작고 사소하다 해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거짓의 입을 통제하지 않으면 반복해서 거짓을 말하게 됩니다. 일종의 습관이 되어 버립니다. 게다가 한 번 뱉은 거짓말은 점점 부풀려지게 마련입니다. 세상에 수많은 유언비어가 떠도는 이유는 다 거짓의 입을 통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임금이 왕국의 가장 높은 관직에 새로운 신하를 임명해야 했다. 이 일을 위해 그는 누가 제일 거짓말을 잘하는지 겨루는 특별한 거짓말 대회를 개최했다.
하지만 왕은 누구에게도 만족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거짓말이 설득력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은 측근에 있는 가장 신뢰하는 신하에게 물었다. “그대는 왜 대회에 참가하지 않았는가?” 그랬더니 그 신하가 “폐하, 실망을 드려 황송하옵나이다. 허나 저는 참여할 수가 없었나이다.”라고 대답했다.
“무슨 연고인가?” 왕이 묻자 그 신하는 이렇게 다시 대답했다.
“왜냐하면 저는 절대 거짓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옵니다.”
그 말을 듣고 왕은 그를 최고의 관직에 임명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우리는 죄인이라서 생각보다 쉽게 거짓을 말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말에 매우 신중할 필요가 있다.
잠언 19장을 읽어 보라. 잠 19장은 비록 다양한 주제에 대해 언급하지만 그 중 거짓말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가?
잠언은 높은 윤리적 표준을 유지한다. 만약 성공을 얻기 위해 속이고, 거짓을 말하며, 우리의 진실성을 희생시키고(잠 19:1), 신실함을 버려야 한다면(잠 19:22) 우리는 차라리 가난한 상태에 머무는 편이 낫다.
잠 19:9을 읽어 보라. 증인의 책임은 무엇인가?
거짓말은 그 자체로 충분히 나쁘다. 그런데 법정에서 진실만을 말하겠다고 맹세하고 진술한 거짓말은 훨씬 나쁘다. 많은 나라에서 위증은 심각한 범죄이다. 따라서 증인은 진실하게 증언해야 한다.
교훈 : 우리는 성공을 위해 또는 뇌물이나 외부적인 조건에 따라 거짓 증언을 함으로써 우리의 진실함과 정직성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부가적용)
산천초목의 푸름이 짙어지는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찾아오고 어김없이 겨울이 올 것입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질서입니다. 이처럼 우리 삶의 심고 거두는 법칙도 영원불변합니다. 콩 심은데 콩이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늘 하나님 중심으로 살면서 우리의 삶을 낭패와 실패로 이끄는 잘못된 것을 심지 않고 또한 사랑과 섬김의 삶을 산다면 우리는 평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있을 것입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자신이 어떤 면에서 거짓 증인이 될 수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잠 19:9이 “선물 주기를 좋아하는”(6절) 사람에 대한 언급 그리고 친구와 형제들도 멀리하는 가난한 자에 대한 언급(7절) 이후에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즉 증인들이 뇌물이나 그들이 증언해 줄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에 영향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신 24:10~22 참고).
| 적용 |
그대가 거짓 증언했던 순간을 돌아보고 앞으로 비슷한 경우에 어떻게 할지 결심해 보십시오.
영감의 교훈
부끄럽지 않을 말만 하라 - “그대들은 다 같이 품성의 예리한 점들을 부드럽게 하고 하나님의 날을 맞기에 부끄럽지 않을 그런 말만을 할 필요가 있다. 의무의 길에서 전진하는 것을 그대의 삶의 법칙으로 삼으라. 그대를 공격할 수 있는 많은 유혹들에 구애받지 않고 선한 양심과 하나님께 진실하라. 그리하면 그대의 길은 그대의 발 앞에서 평탄해 질 것이다”(교회증언 4권, 502).
기도
아버지, 상황에 굴복하여 거짓과 타협했던 순간들을 뉘우치며 회개합니다. 어느 누구의 유불리를 떠나서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우리가 진실을 말해야 하는 단 하나의 이유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여섯째날(금) 2월 13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험담과 고자질의 정신은 불화와 분쟁의 씨를 심고, 친구를 이간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조의 진실성을 믿는 많은 사람의 믿음을 허물어뜨리고자 하는 사탄의 특별한 계책 중 하나이다. 형제자매들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주신 책망과 경고의 기별을 위축되지 않고 전하는 자들이 갖고 있다고 생각되는 결함과 잘못을 너무 쉽게 이야기한다”(교회증언 4권, 195).
“이 불평분자의 자녀들은 귀를 쫑긋 세워 듣고, 불만의 독을 받아들인다. 그와 같이 하여 부모들은 자녀들의 마음에 접촉할 수 있는 통로를 부지중에 막아 버리고 있다. 얼마나 많은 가정이 의심과 의문을 매일 먹는 음식의 양념으로 삼고 있는가. 그들은 친구들의 품성을 썰어서 맛 좋은 후식으로 내놓는다. 비방의 귀한 부스러기들이 어른들뿐 아니라 자녀들도 촌평을 할 수 있게끔 식탁을 따라 돌려진다. 이런 일 때문에 하나님께서 욕을 당하신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종들을 비방하는 자들에 의해 모욕과 능욕을 당하신다”(교회증언 4권, 195).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우리가 사랑하고 돌보는 자들이 문제를 일으킬 때면 참 곤란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덮어 주려고 애쓰기 쉽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적절한 균형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우리가 실수했을 때 은혜를 받았던 것처럼 은혜를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은혜는 언제나 처벌 없이, 아무 책임도 없이 죄를 지어도 된다는 뜻입니까? 그렇다면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바른 태도는 무엇입니까?
➋ 이번 과에서 배웠듯이 인생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측면이 있습니다. 심지어 잘 되던 일들도 생각보다 더 복잡해 질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런 일에 당황하지 않고 넓은 마음으로 반응할 수 있을까요?
➌ 우리는 어떻게 아무 말 없이도 거짓말을 할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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