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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 과 마음의 우상들 (하나님 품성 중심의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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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 과 마음의 우상들



기억절: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마 18:1)



첫째 날(일) 겸손의 위대함


*도입질문: 하나님 보시기에 위대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사람이 가진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하늘과 땅처럼 다릅니다.(사55:8-9) 생각이 다른 만큼 사용하는 용어의 정의도 다릅니다. 예를 들면, 선과 악에 대한 정의가 다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선은 착한 것, 악은 악한 것이지만 하나님이 생각하는 선은 생명이고, 악은 사망입니다.(눅6:9)


하나님이 보시는 사람은 나면서부터 죽은 자입니다.(엡2:1) 죽은 자란 없는 자입니다. 없는 자는 그 자체가 없기 때문에 그가 하는 모든 것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없는 것이며, 죽은 행실(히6:1)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모든 행위는 죄(사망, 없는 것. 롬14:23)입니다. 죄의 상태에서의 모든 행위는 죄의 열매들일 뿐입니다.(마7:17-18)


생명이신 예수님을 선택하는 자만이 하나님 보시기에 산 자입니다.(요일5:12)

산 자의 모습일 때가 하나님 보시기에는 가장 위대한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실 때 최고의 관심의 초점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사단 연결되어 태어남으로 본성적으로 사단의 자녀이며, 사단의 영향력 속에서 사는 우리들의 상태를 성령의 깨우치심으로 잘 알게 되고, 성령의 인도하심과 그 영향력으로만 새로운 생명의 삶을 살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될 때가 가장 겸손한 때이며 하나님 보시기에는 가장 위대한 때입니다.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을 단순하게 받아들이고 따르는 선택을 할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위대하며 겸손한 모습입니다.



둘째 날(월) 용서의 위대함


*도입질문: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잘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사랑이나 용서 등은 우리 스스로 해낼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사랑을 받아야 그 사랑이 흘러넘칠 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요일4:7-8)

용서를 받았다는 확신이 들 때, 다른 사람에 대하여서도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마18:23-33: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함으로,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에게 빚을 갚도록 촉구한 것입니다.)


스데반이 자신을 향해 돌 던지던 사람들을 용서하고 그들이 사함 받기를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용서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남을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나오는 열매입니다.



셋째 날(화) 마음의 우상들


*도입질문: 마19장에 나오는 젊은 관원이 갖고 있었던 치명적인 문제점은 무엇이었나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젊은 관원이 갖고 있었던 구원관은 행위주의에 입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19:16)라고 질문하였습니다. 이런 구원관의 기초에는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품성은 조건적 사랑을 하시는 분이므로, 하나님이 구원을 주시는 조건으로의 선한 일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행위에 기초된 구원관으로 살고 있던 젊은 관원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선한 분이신 하나님께 초첨이 맞춰져 있습니다.(마19:17)


선한 분 즉 생명이신 하나님은 스스로의 생명으로 존재하시는 창조주이시고, 창조주는 조건을 내세우시는 분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사랑을 하시는 분이어야 함으로 명령의 율법을 말씀하시지 않고, 율법의 말씀대로 하나님 자신이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시는 분이어야 합니다. 계명이 하나님의 품성의 사본이므로 계명 속에 담긴 사랑을 주셔서 계명을 우리 속에서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시는 선한 그분을 바라보고 신뢰하게 될 때 그것이 바로 생명이 됩니다.(마19:17)


율법을 지키는 조건으로 구원을 주신다면 그런 하나님은 조건적 품성의 하나님임에 틀림없습니다. 율법을 지키라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이라면 그런 하나님은 조건적 품성의 하나님임에 틀림없습니다. 율법을 지킬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사랑을 주셔서 율법의 내용을 이루어내시겠다고 약속하시는 분이어야만 무조건적인 사랑을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율법을 명령이 아닌 약속으로 받아들일 때,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동이 우리로 하여금 마음속에서 율법을 따라 살고자 하는 마음이 솟구치게 되어 율법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은혜와 율법이 하나가 됩니다.



넷째 날(수)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도입질문: 예수님을 따르게 되면 얻게 되는 영생은 조건에 대한 결과인가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는 말을 오해하게 되면 내가 믿었기 때문에 즉 믿음이란 조건을 이루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댓가로 구원을 주시는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믿음을 내가 만들어내는 어떤 것으로 이야기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하나님께서 이루심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로 이야기 합니다.(히12:2, 행3:16)


예수님을 따르는 선택을 하면 선택했다는 조건 때문에 영생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단의 영향력 속에 있는 우리들에게 성령께서 새로운 생각을 주시고 선택하게 도와주심으로 선택하는 결과가 영생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요14:6)


예수님의 아름다우신 품성을 보고 느끼게 될 때, 그 사랑으로 인해 우리의 마음이 일깨워지고 그 사랑에 감동함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끌리게 되고 예수님을 나의 삶에 가장 중요한 분으로 선택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나의 삶에 중심이 될 때 나의 속에서 생명(영생)은 시작된 것입니다.(요5:24-25)



다섯째 날(목) 할 수 있나이다


*도입질문: 예수님의 영광의 길은 어떤 길이었을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예수님의 영광의 길은 예수님의 품성이 가장 잘 드러나게 하는 길인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사람들의 선택에 대하여 사람을 창조하신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모든 죄를 다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보여졌습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찼고 환하게 보여졌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주의 나라에서 좌, 우의 자리에 앉게 되도록 부탁하였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전혀 알지 못했고, 야고보와 요한 역시 알지 못했습니다.

영광은 화려함에 있지 않고 십자가에 있었습니다. 야보고와 요한이 생각했던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길인 십자가의 길은 사람들이 할 수 있다고 고백함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성령께서 하나님의 품성을 보여주시고 그 사랑에 감동될 때 사랑의 힘이 죽음보다 강하기 때문에 십자가의 길도 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할 수 있게 하십니다.(빌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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