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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 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 (하나님 품성 중심의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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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 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



기 억 절 :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갈 5:13)



첫째 날(일)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음


*도입질문: 우리는 자유롭지 못한 존재였나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우리들은 나면서부터 사단의 영향력 속에서 태어났습니다.(요8:44) 나면서부터 아비인 사단의 욕심을 행하고자 합니다. 그 결과는 사망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과는 원수요, 반대의 입장에 서게 됩니다.(롬8:7)


죄로 끌려지는 본성으로 인해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깨닫는 사람도 없었습니다.(롬3:10-11) 스스로는 우리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절망의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죄의 종으로서, 사단이 주는 악한 영향력 속에 살다가 무가 되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롬6:23, 엡2:2-3)


그런데 “긍휼에 풍성하신 그 큰 사랑”(엡2:4)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셨고, 부활하심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엡2:6)셨습니다.


사단의 영향력 속에서 죄의 종으로 살던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하심으로 예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생명의 자유함을 누리며 살아야 될 사람들이지만, 익숙한 죄의 본성으로 죄의 종노릇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롬7:14-24) 성령으로 자유의 삶을 선택하여 살도록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끄십니다.(롬8:2)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해방하여 자유케 하심으로 성령의 임재와 인도하심을 늘 간구해야 합니다.(눅11:13)



둘째 날(월)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본질


*도입질문: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자유의 근원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사람들은 나면서부터 죽은 자들입니다.(엡2:1, 고전15:22) 죽은 자들이기 때문에 죽은 행실을 합니다.(히6:1) 죽은 자가 행하는 죽은 행실은 사단의 영향력 때문입니다. 나면서부터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고, 대신 사단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 태어남으로 사람들은 사단의 자녀가 되었고(요8:44), 그 아비 사단의 일을 행하게 된 것입니다.


아담의 선택으로 인한 이런 운명은 스스로는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죽은 자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산 자이신 예수님께서 두 번째 아담으로 이 땅에 오셔서 첫 번째 아담의 선택인 영원한 죽음을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해결하셨고, 부활하심으로 새로운 생명과 자유의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형성된 자유이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중심에 지속적으로 계실 때만 우리는 사단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자유한 사람이 됩니다. 우리의 경향이 사단으로 향하여 있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예수님을 우리의 중심에 모실 때에만 사단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셋째 날(화) 위험한 율법주의의 결과


*도입질문: 율법주의는 무엇이고 왜 위험할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율법주의란 율법을 내 힘으로 지킴으로 구원 속에 들어가고자 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구원이며 생명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또한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오해하는 하나님의 품성은 하나님은 율법을 구원의 조건으로 주셨기 때문에 그 조건을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면 구원을 얻을 수가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데 이런 행위를 하나님은 악이라고 정의하십니다.(렘2:13)


악한 행위기 때문에 악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사망을 하나님은 악이라고 정의하시기 때문입니다.(눅6:9) 율법을 지켜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악입니다. 할 수 없는 사망의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오해가 율법에 대한 오해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조건적이 아닌 무조건적이기 때문에 그의 품성의 사본인 율법 역시 무조건적인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을 명령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 율법대로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이루실 약속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나면서부터 죽은 자들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스스로의 힘으로 율법을 지켜 구원에 이르라고 말씀하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에서 하나님의 품성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실 약속을 발견하고 깨달을 때 사람들은 그 사랑에 감동하게 되고, 감동이 될 때 그 약속을 받아들임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율법을 이루어 나가게 됨을 경험하게 됩니다.


믿음과 행위가 다른 것이 아니라 믿음의 힘이 나로 하여금 율법 안에서 살도록 이끌어주시고 율법을 즐겨 따르게 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믿음 속에서 생명의 행함이 나타나게 됩니다.



넷째 날(수) 방종이 아닌 자유(갈5:13)


*도입질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는 왜 방종으로 이끌지 않을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루터는 믿음만 있으면 행위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로 이루어진 신뢰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선택하고 싶어지게 합니다. 지체의 법으로는 하나님과 반대의 입장으로 흐르고 싶지만 성령의 법이 새로운 생명의 길에 대한 갈망을 주셔서 하나님의 길을 선택하게 만듭니다.


성령의 호소는 강하고 간절하여 우리의 마음의 선택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선택하게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만 사람들은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발견하게 되고, 그 사랑에 감동되고, 감동될 때 하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선택하게 됩니다.

성령의 강력한 사랑의 호소로 인해 사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되어 방종으로 흐르지 않고 생명적 자유함을 누리게 됩니다.



다섯째 날(목) 온 율법을 이룸


*도입질문: 율법주의와 율법을 이루는 것과는 어떻게 구별될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율법주의는 스스로의 힘으로 율법을 지켜 구원을 얻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런 생각의 밑바탕에는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오해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조건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오해 속에서의 율법은 구원을 위한 조건이 되어 버립니다. 이런 생각 속에서는 생명이 하나님 자신임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생명이 무엇인지, 사람의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품성을 무조건적인 사랑임을 확신하게 될 때 율법은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이루실 약속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우리가 나면서부터 죽은 자이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는 구원을 행할 수가 없으며, 율법을 지킬 수도없고 율법대로 산다고 해도 그런 행위가 생명을 얻을 수가 없음을 자명하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구원의 조건으로 주실 수가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품성에 대하여 감동되고 감사하게 될 때 우리 마음속에는 자원하여 하나님을 선택하고자 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을 하나님의 품성의 사본으로 이해함으로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이루실 기대감과 믿음으로 바라보게 되고, 우리의 믿음의 크기만큼 하나님은 우리 속에서 율법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율법은 내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약속을 하나님께서 이루신다는 것을 신뢰하고 믿을 때 붙잡는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지킨다는 표현은 바로 붙잡는다는 것입니다.(Keep it ho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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