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이 잘못을 저지른다고 해서 그대가 잘못을 범해도 된다는 핑계는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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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심으로 내가 부끄러워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은
즉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사 50:7)
청년들은 다니엘에게서 한 모범을 얻는바 만일 그들이 원칙과 의무에 충실한다면 그들도 다니엘처럼 교훈을 받을 것이다.
세상의 지혜로 이 문제를 드려다 보는 때에라도 그와 그의 세 동무들은 그들이 취할 수 있는 모든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그들의 첫 시험이 이르러 왔다.
그들의 원칙들은 왕의 규칙과 명령에 서로 위배되었음이 틀림없었다.
그들은 식탁에 놓인 음식을 먹으며 그의 포도주를 먹어야만 했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단 1:18)
이 요구는 반항적인 정신으로 제기된 것이 아니다. 큰 은총을 구하는 것으로써 탄원되었다.…
다니엘과 그의 동무들은 예모 있고 친절하며 경외심이 있었고 또한 온유와 겸손의 은사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제 다니엘과 그의 동무들은 시험을 받게 되었을 때에 그들은 의와 진리의 편에 온전히 자신을 두게 되었다.
그들은 기분이 돌아가는 대로 움직인 것이 아니요 지혜롭게 움직였다.
그들은 과거의 음식 가운데 육식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음으로 미래의 그들의 식사에도 육식을 포함시키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하나님의 사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술을 사용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므로 그들은 그것에 가담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그들은 모든 일에 극기와 절제의 교훈을 따라가면서 하나님의 손 안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었다.
주께서는 다니엘과 그의 동료들로 더불어 협력하셨다.(MS 51, 1898)
“유덕한 여자는 존영을 얻고”(잠 11:16)
설거지, 요리, 테이블을 닦음, 청소, 빨래 등은 우리가 늘 해야 하는 평범한 일이다.
이 일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것이 비록 미천한 일일지라도 가브리엘 천사가 선지자들에게로 보냄을 받았을 때처럼 사명감을 가지고 그 일을 해야 한다.
단순하지만 꼭 필요한 집안일을 하는 가정주부는 천사들이 자신들의 맡은 일에 충실한 것처럼,
자신의 신실함과 순종과 사랑을 보여줄 수 있으며, 또 마땅히 보여 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에 복종함으로써 꼭 영광 받아야 할 일들을 영광되게 할 수 있다.
우리는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땅에 있다.
우리가 하늘에 있게 되는 날, 하늘의 높고 귀한 일을 할 자격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가 시험받고 시련을 당해야 함은 바로 이 땅에서의 일이다.
청년이 짊어진 가장 고귀한 의무는 가정에 관한 것인데,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자매들 모두가 진실한 관심과 애정을 갖게 될 때 축복이 임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들은 남들을 보살피고 남을 위해 일을 할 수 있다는 자아 부정과 무아의 정신을 보여줄 수 있다.
여자는 이런 일로 해서 결코 위신이 깎이지 않는다.
그것은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거룩하고 높은 직무이다.
한 자매가 남자 형제들에게 끼치는 감화력이 얼마나 큰가!
그녀가 올바르면 그녀는 남자 형제들의 품성을 바르게 인도할 수 있다.
그녀의 기도와 온유함, 그리고 사랑은 집안에서 많은 것을 이루게 할 것이다.
이런 고상한 자질들이 그대 속에 들어 있어야만 다른 사람들과 교제를 나눌 수 있다.
마음의 흡족함, 사랑과 부드러움, 그리고 쾌활한 성격은 각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그런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면,
남들에게 해주고자 하는 그대의 마음이 그 속에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마음속에 계시지 않는다면 품성은 추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마음을 다스리지 않으실 경우, 불만이 생기고 도덕적으로 결함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이기심은 자기가 남들에게 주고 싶지 않은 것을 그들에게 요구한다.
자기 확신과 굳은 결심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는 일에 매우 필요한 것이다.
주님께서 그대 곁에 서 계시게 하라. 그러면 그분은 어디서나 그대에게 안위와 위로가 될 것이다. (3증언, 79-81)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눅 21:3
주님의 금고에 두 렙돈을 넣은 가난한 과부는 사랑과 믿음과 관대함을 보여 주었다.
그 여자는 불확실한 미래를 하나님의 보호에 맡기고, 자신이 가진 전부를 드렸다.
그의 작은 예물은 그 날 연보 궤에 들어간 것 중 가장 큰 것이라고 우리 구주에 의해 선포되었다.
그 가치는 은전의 값어치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여자를 고무시킨 동기의 순수함으로 헤아려졌다.
그와 같은 진지한 예물 위에 내리는 하나님의 축복은 그것을 위대한 결과를 가져 오게 하는 요인이 되게 한다.
그 과부의 은전은, 수 세대를 걸쳐 흘러내리면서 그 길을 넓히고 깊게 하며, 수천 가지의 방향으로 진리를 확장시키고 궁핍한 자들을 위로한 작은 물줄기와 같았다.
그 작은 예물의 감화력은 모든 세대의 모든 나라에 살던 무수한 사람들의 마음에 역사하고 또 역사하였다.
그 결과, 셀 수 없이 많은 예물들이 관대하고 자아를 부정하는 가난한 자들로부터 하나님의 보고로 흘러 들어갔다.
또한, 그 여자의 모본은, 안일을 좋아하고 이기적이고 의심하는 수천의 사람들을 고무시켜 선을 행하게 하였으며,
그들의 예물들도 그 여자의 연보가 지닌 값어치를 배가시키는데 사용되었다.
관대함이란 어떤 이유에서도 무시되어서는 안 될 의무이다.
그러나, 부유하든 가난하든 한 순간도, 하나님께 드린 자신들의 예물이 저들이 지닌 그리스도인 품성의 결점을 보상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위대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주님께서 우리의 선물과 예물들을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 속에 관대함의 정신을 일깨우시기 위함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사업을 유지하기 위하여 인간의 재물에 의존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 1886년 1월 21일, 영문 시조.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일이 이른지라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가라사대 가서 우리를 위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여 우리로 먹게 하라" (눅 22:7, 8)
그리스도께서는 서로 밀접하게 연합하여 일하게 될 베드로와 요한을 선택하셔서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게 하셨다.…
"이르시되 보라 너희가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의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 그 집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이 네게 하는 말씀이 내가 네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 …
그리스도께서는, 반역자들이 성만찬에 참석하여 유다가 계획하고 있는 그 행동을 함으로써 야기될 수도 있는 어떤 때 이른 움직임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하기를 원하셨다.
유월절을 지키기 원하는 외지인들을 위하여 대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편의를 도모해 주는 것이 관습이었다.
그 기별은 명령의 형태를 띠었다.
이 두 갈릴리 사람이 전혀 낯선 사람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합당해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예언하신 상황들이 발생했다.
제자들은 물동이를 가지고 가는 한 사람을 만났다 그들이 그를 따라 집으로 들어가서 기별을 전하자 그 집 주인은 선뜻 그렇게 하기로 동의했다. …
이것은 마지막 유월절로서,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들과 함께 지키기 원하셨다.
그분은 그의 때가 이르렀음을 알았다.
그분 자신이 참 유월절 양이셨으며, 유월절을 먹는 바로 그 날 그분은 희생되실 것이었다.
그분은 제자들이 이때와 관련된 상황들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셨다.
그들이 식탁주변에 모였을 떼에 하신 그리스도의 첫 번째 말씀은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였다. …
제자들과 함께 보내는 이 마지막 저녁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하실 말씀이 많았다.
만일 그들이 그분께서 나눠 주시길 갈망한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다면,
그들은 가슴을 찢는 고뇌, 실망과 불신을 면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분께서 하실 말씀을 그들이 감당치 못할 것을 아셨다.
그들의 얼굴을 들여다 보실 때에, 경고와 위로의 말씀이 그분의 입술에 머물렀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예수님은 기다리고 계신 듯이 보였다.
제자들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들이 서로 던지는 눈길들은 질투와 분쟁에 대해 말해주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권세를 주장하시고 다윗의 보좌에 좌정하실 것이라는 그들이 애지중지하는 생각에 굳게 고착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음속에선 여전히 제자들은 각기 그 왕국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를 갈망하였다. (원고 106, 1903)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쭈어 가로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눅 11:1).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으며 종종 그들에게 기도의 필요성을 강조하셨다.
그는 기도의 형식을 배우기 위하여 서적들을 연구하라고 명하지 않으셨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기도하지 말고 그들의 요구를 하나님께 아뢰야만 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가납하시는 기도란 심령의 필요를 느껴, 심령에서 우러나는, 단순하고도 열렬한 탄원임을 가르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의 짐과 우리 마음의 슬픔을 가지고 당신께 나오도록 초청하신다.
죄는 우리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으로써 가득 차게 한다.
우리가 죄를 범하였을 때에는 하나님에게서 우리 자신을 감추고자 노력한다.
우리의 죄가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당신께 나오라고 우리에게 명하신다.
우리 죄를 하나님께 가져감으로써만 우리는 죄에서 자유함을 받을 수 있다.
가인은 하나님의 책망을 받을 때에 아벨을 죽임으로써 그의 죄를 시인하였으나
그는 하나님에게서 도망하였으며 또한 그가 이처럼 도망하면 그의 죄에서 피할 수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
그가 죄의 짐을 가지고 하나님께 도망하였다면 그는 사유함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탕자는 그의 죄와 비참함을 깨닫고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눅 15:18)고 말하였다.
그는 죄를 자복함으로써 아버지의 품에 도로 안기게 되었다.
만일 우리가 가납되는 기도를 올리기 원한다면 우리 죄를 서로 자복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
내가 말로나 행실로써 이웃을 거슬러 죄를 범하였거든 나는 그에게 자복해야만 한다.…
우리가 형제를 거슬러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을 거슬러 죄를 짓는 것이므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만 한다.(Letter 134, 1899)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저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로서.” 스 7:6
에스라 이래…2,000 여년이 흘러갔지만 그러나 시일이 경과했다고 해서 그의 경건한 모본의 감화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수세기를 통하여 그의 헌신한 생애의 기록은 많은 사람들로 “여호와의 율법을 구하고 그것을 준행”하도록 결심하게 하였다.
에스라의 동기는 높고도 거룩했다.
그가 행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그는 영혼에 대한 깊은 사랑에 고무되었다.
죄를 범한 자들에 대하여 그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나타냈던 인애와 자비는 개혁을 일으키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한 실물교훈이 되어야만 한다. …
여호와의 율법을 약화시키거나 강화시키는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과거나 현재나 변함이 없다.
그것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언제나 거룩하고 의롭고 선할 것이다. …
그리스도인들은 머지않아 이 세상에 닥칠 깜짝 놀랄 만한 사건에 대하여 준비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 준비는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연구하고 그 교훈에 그들의 생애를 일치시키려고 노력함으로써 이루어진다. …
구약의 성도들이 그처럼 충성스럽게 증언을 했다면
수세기의 축적된 빛을 받은 오늘의 성도들은 진리의 능력에 대하여 더 뚜렷한 증거를 해야만 하지 않을까? (선지 623-626)
이 하나님의 종의 생애는 우리가 주님을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 섬기도록 우리에게 영감이 되어야만 한다.
우리 각자에겐 해야 할 지정된 일이 있으며 이 일은 헌신적인 노력으로써만 성취할 수 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요구를 우리 스스로 이해하고 다음에 그것을 실천할 필요가 있다. (3 주석 1134)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고후 6:17).
참된 그리스도인은 회심하지 않은 사람을 친구로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시면 우리는 불경건한 사람의 영혼을 둘러싸고 있는 독기서린 영적 분위기를 즐길 수 없다. …
영적인 사물들을 아주 싫어하는 그대의 친구들은 진리를 실천하는 일을 통해서 세련되고 고상하게 되고 향상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지도를 받고 있지 않으며, 암흑의 임금의 검은 깃발 아래 서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은,
그대가 그들을 예수께로 인도할 목적으로 사귀고 있지 않는 한 영성에 이롭지 못할 것이다.
그대가 그들을 향상시킬 수 없다면, 그들의 감화는 그대의 신앙을 타락시키고 오염시키는 감화를 끼칠 것이다.
그대가 그들을 친절하게 대하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그들과 교제하기를 좋아하고 교제하기로 선택하는 것은 좋지 못하다.
이는 그들의 영혼을 에워싸고 있는 분위기를 선택한다면 그대는 예수님과 동행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여 죄를 억누르려고 노력하라.
그러나 결코 한 순간도 그대의 행위나 말이나 침묵으로, 혹은 그대의 참석으로 죄를 승인하지 말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라고 하는 사람이 죄를 묵인할 때마다, 죄에 대한 그의 감각은 둔해지며, 그렇게 하여 판단력은 타락하게 된다.…
주 예수께서는 원수의 땅에 발을 들여 놓고,
그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하나님께 불쾌한 담화와 행동을 선호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지내는 어떤 영혼도 지키실 수 없다.
향상시켜 주는 경향을 가진 사람, 순결하고 거룩한 분위기에 둘러싸여 있는 사람에게 가깝게 달라붙어 있어라. …
하나님께서는 그대의 심령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시고 생각에 더 많이 계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가 세상과 절교했고, 진리에서 그대를 떠나게 할 감화들과 절교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다면 그대는 사단의 올무들에 훨씬 덜 둘러싸일 것이다. (서신 51, 1894년)
“하나님은 나의 견고한 요새시며 나를 온전한 곳으로 인도하시며” 삼하 22:33
우리는 우리가 모든 힘의 근원과 연결될 때에 우리에게 올 힘이 얼마인지를 생각하지 못한다.
우리가 거듭거듭 죄에 빠진다.
따라서 언제든지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우리는 우리의 약점이 마치 어떤 자랑거리나 되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일 우리가 승리하고자 할진대 우리의 얼굴을 부싯돌과 같이 굳게 가지라고 하셨다.
그는 친히 당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를 지고 나무에 달리셨다.
그리하여 그가 주신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세상과 육신과 마귀를 대항할 수가 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이야기하지 말고 그리스도와 그의 능력에 대하여 이야기하자.
우리가 사단의 힘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에 마귀는 그의 힘으로 더욱 굳게 우리를 묶는다.
우리는 전능하신 자의 능력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에 적은 쫓겨 간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가까이 오신다. (청년 132)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안내자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는다. '
이 말씀은 우리 마음과 입술에 항상 있어야 한다.
“기록되었으되”라고 하는 말이 우리의 힘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안내자로 삼는 자들은 인간의 마음이 약하다는 것을 깨닫는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이 모든 불결하고 거룩하지 못한 감정을 정복하는 사실을 알 것이다.
그런 이들의 마음은 항상 기도 가운데 있고 거룩한 천사들의 안내를 받고 있다.
그에게 원수가 홍수처럼 밀려올지라도 하나님의 성령은 기치를 높이 들어 올리신다.
고귀하고 권세 많은 진리의 감화가 뒤덮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이의 마음은 조화가 깨어지지 않는다. (6증언 160, 161)
우리는 성경을 좀 더 명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기록되었으되”라는 말로 사단의 유혹에 대해 울타리를 치자.
우리의 믿음과 용기를 시험하기 위하여 어려움을 만날 것이나
예수께서 주시기를 바라시는 은혜를 통하여 승리하기만 하면 우리는 더욱 강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믿어야 한다.
곧 의심 없이 이 약속을 붙들어야 한다. (믿음으로 산다 8)
“내가 너희에게 … 본을 보였노라” 요 13: 15
우리는 하늘에 가기 위하여 품성을 형성하고 있다.
어떤 품성도 시련과 고난을 통하지 않고서는 완전하게 될 수 없다.
우리는 시험을 받고 연단을 받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당신께서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능력을 통하여
스스로를 위해서 그와 같은 시련을 견딜 수 있도록 우리를 대신해서 품성의 시험을 견디셨다.
그리스도는 인내와 관용과 온유와 겸손에 있어서 우리의 모본이시다.
그분께서는 경건치 않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시고 대항해서 싸우셨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비록 선행에 대한 보답으로 수치스러운 모욕을 받으셨지마는 정욕적이고 난폭한 말과 행동에 굴복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고통과 냉대와 모욕을 당하셨지만 보복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자제와 품위와 위엄을 갖추셨다.
그분께서는 고통을 받으셨으나 잠잠하셨고 모욕에 대해서는 동정과 연민과 사랑을 나타내셨다. …
그러므로 그 모든 일에 있어서 그대의 구주를 본받으라.
상황이 잘못될 때에라도 흥분하지 말며 자아를 드러내지 않도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사태가 바라는 대로 전개되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에는 자제력을 잃게 된다.
다른 사람이 잘못을 저지른다고 해서 그대가 잘못을 범해도 된다는 핑계는 댈 수 없다.
두 사람의 잘못이 하나라도 올바른 것을 만들어 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대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이기셨던 것처럼 이기기 위하여 그대가 쟁취해야 할 승리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불평하거나 불만을 토로하시지 않으셨으며 불쾌한 말이나 분노를 나타내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결코 낙담하거나 실망하지 않으셨으며 당황해 하거나 초조해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가장 극적인 상황이나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라도 인내하면서 평온을 유지하셨으며 침착하게 행동하셨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주위에서 어떤 소동이 일어날지라도 품위와 여유를 잃지 않으시고 당신의 일을 수행하셨으며
다른 사람의 칭찬에 고무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원수의 협박을 두려워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폭력과 죄악과 흥분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태양이 구름 위로 솟아오르는 것처럼 행동하셨다.
인간적인 정욕과 소요와 시련에 대처하여 그분께서는 의연하게 행동하셨다(서신 51. 1874)
“백성들아 너희는 다 들을지어다. 땅과 거기 있는 모든 것들아 자세히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거하시되 곧 주께서 성전에서 그리하실 것이니라.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니라” (미 1:2~3)
품성은 위기를 당하면 드러난다.…
은혜의 시기가 끝나는 때에 최후의 큰 시련이 임하게 될 것인데 그때는 영혼의 필요를 충족하기에는 때가 너무 늦게 될 것이다. (실물 412)
하나님께서는 나라의 행위를 기록하고 계신다.
이 세상 역사의 각 시대를 통하여 악한 일꾼들은 분노의 날을 거슬러 악을 쌓아 오고 있다.
불법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비의 한계까지 차게 되면 그분의 관용은 그칠 것이다.
하늘 기록 책에 쌓인 기록들이 범죄의 한계에 달하면 자비가 섞이지 않은 분노가 나타날 것이다.
그 때에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끝나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드러날 것이다.
나라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폐하는 일에 연합할 때 이와 같은 위기가 올 것이다.
불법이 성함으로 의인들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불탈 때가 올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만이 악인들과 연합한 사단의 오만을 꺾을 수 있지만
교회가 가장 큰 위험 가운데 빠져 있을 때 충성되게 남은 자들은 교회를 위해 열렬한 기도를 드릴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의 죄가 극도에 달하였을 때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오래 참으시지만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실 것이다. (증언 5권 524)
진짜를 가짜로 바꾸는 일은 연극의 마지막 행동이다.
이렇게 바꾸는 일이 세계적인 일이 될 때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나타내실 것이다.
인간의 율법이 하나님의 율법보다 높임을 받고 이 세상의 강국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주일 중 첫째 날을 지키도록 강요할 때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가 온 줄로 알라.
그분께서 위엄 있게 일어나 세상을 무섭게 흔드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 거민들의 불법을 벌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처소에서 나오실 것이다.
세상은 피를 드러내고 죽음을 더 이상 가리지 않을 것이다. (RH 1901. 4. 23)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 25 : 40).
하나님께서는 섭리로 이 땅에 풍성한 자비를 베푸시고, 인생의 창고를 풍요로 채우셨기 때문에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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