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로 성화 된 사람들은...자기들에게 주어진 허락들의 조건에 응하지 못할까봐 항상 두려운 마음으로 자신을 애써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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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하신 분과 접촉함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며 영적 힘을 얻는 비결이다.
다른 어떠한 은사도 기도를 대신하지 못하며 영혼의 건강을 유지하게 하지 못한다.
기도는 사람의 마음을 생명의 샘이신 그리스도와 접촉하게 하며 영적 경험을 더욱 튼튼하게 한다.
기도를 게을리하거나 또 형편에 따라, 기도를 가끔 중단하였다 계속 하였다 하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잃게 된다.
영적 기능은 마비되며, 영적 경험은 원기를 잃고 허약해진다. …
우리가 힘있게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 즉 아무 가치 없는 흠 많은 죽을 인생이 하나님께 구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게 된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사람이 무한하신 하나님과 연합하는 일 보다 무슨 더 큰 능력을 바랄 수 있겠는가?
약하고 죄 많은 인간은 자기의 창조주 하나님께 말할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
우리는 우주를 통치하시는 왕의 보좌에 상달될 수 있는 말을 할 수 있고, 길을 걸어갈 때에도 예수님과 이야기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네 우편에 있노라”고 말씀하신다.
진실한 모든 기도는 응답을 받음
우리는 마음속으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를 벗삼아 길을 걸을 수 있다.
우리가 날마다 직무를 행할 때에도 마음속의 소원을 조용히 기도 드릴 수 있으며, 이 기도가 다른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으나
결코 소리 없이 사라지거나 듣지 못하게 되지 않는다.
아무것도 심령의 기도 소리를 막지 못한다.
그것은 번잡한 거리의 소음과 요란한 기계 소리를 초월하여 위로 올라간다.
하나님께 향하여 기도하는 것이므로, 우리의 기도는 들으시는 바 된다.
그러므로 구하라. 그러면 받을 것이다.
겸손과 지혜와 용기와 믿음의 증가를 위하여 기도하라.
신실한 모든 기도에는 응답이 있다.
응답이 비록 바라는 때에 꼭 바라는 바대로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응답은 그대의 필요를 가장 잘 충족시켜 줄 가장 좋은 방법으로 그리고 가장 적절한 때에 이르러 올 것이다.
고독한 때와 피로한 때에, 또는 시험당하는 때에 드리는 기도가
항상 기대하는 바대로 응답되지는 않을지라도 항상 그대에게 유익 되도록 응답된다. ― 복음 교역자, 249-253.
80. 믿음과 기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품성의 모든 결함은 보충되고 모든 더러움은 깨끗해지고 모든 결점은 교정되며 모든 미점은 발달될 것이다.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골 2:10).
기도와 신앙은 밀접히 관련된 것으로 이 둘을 함께 연구할 필요가 있다.
믿음으로 하는 기도 가운데에는 하늘로부터 오는 학문이 있다.
인생의 활동에 성공하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 학문을 이해하여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되어야 할 것을 명백히 하셨는 바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허락하신 바를 구하고
또한 무엇이나 받을 때에는 그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써야 하는 것이다.
그 조건들이 충족될 때 허락하신 바를 틀림없이 주실 것이다.
우리는 죄사함을 위하여 성령을 받고자, 그리스도와 같은 성질을 받고자, 하나님의 일을 위한 지혜와 힘을 얻고자,
그 밖에 하나님의 허락하신 모든 선물을 받고자 간구할 수 있다.
동시에 우리는 받은 줄로 믿을 것이요, 또 받은 것을 인하여 감사하여야 한다.
우리는 축복의 외면적 증거를 찾을 필요가 없다.
선물은 허락 가운데 있는 것이니,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은 그가 수행하실 것으로 확신하고
이미 받은 선물은 그것이 가장 필요할 때에 실현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우리의 일에 나아갈 것이다. ― 교육, 237.
성화된 생애 제 1 장 이것이 온전한 헌신에 대한 진정한 개념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교회가 이 큰 축복을 누리도록 기원하고 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이 보존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그 자체가 허위요 위험한 감화를 가진 성화의 이론이 종교계 안에 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성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 순수한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있다. 저들의 성화는 말과 의지적 경배에 불과하다.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품성을 참으로 얻고자 하는 사람들은 결코 자기들이 죄없다고 하는 생각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생애는 비난할 여지가 없을 것이며, 그들은 받은 진리의 산 대리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그리스도의 품성대로 살기 위해 마음을 더욱 연마하고 그리스도의 거룩한 형상에 더 가까이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더욱 뚜렷이 홈없는 완전함을 분간할 것이며 더 깊이 자신의 결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저희가 성화되었다고 주장하면 그것은 그들이 아직도 거룩하게 되기에는 멀었다는 충분한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약점과 부족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참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그분의 형상을 반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구주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있을수록 저희의 눈에는 자신들이 더욱 더 의롭게 보인다. 우리가 참회와 겸손한 신뢰를 품고 우리의 죄 때문에 찔림을 당하시고 우리의 슬픔 때문에 비애의 짐을 지신 예수님을 명상할 때에 주님의 발걸음을 따를 수 있게 된다. 그분을 바라봄으로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하게 된다. 이런 일이 마음 가운데 일어날 때에 우리는 자신이 의롭다는 주장을 하지 않을 것이며 예수님만을 높이고 우리의 무력한 영혼은 그분의 공로를 의지하게 될 것이다. 정죄받은 독선(獨善) 우리의 구주께서는 언제나 독선을 정죄하셨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장 고상한 신앙은 그 자체가 은밀하며 겸손한 모양으로 나타난다고 가르치셨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랑의 행동을 은밀히 행하고 과시하지 말며, 장래의 보상을 기대하면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거나 높임을 받으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경고하셨다. 만일 그들이 사람들에게 칭찬받기 위하여 선행을 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아무 보상도 주지 않으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들리게 할 목적으로 기도하지 말라는 교훈을 받았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6).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은 바리새인들 가운데 유행되는 그런 종류의 경건을 시인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분은 산상교훈에서 선행은 고상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며, 또 예배행위는 회개와 겸비 가운데 진정한 마음으로 행해질 때 비로소 가장 고귀한 향기를 발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신다. 순결한 동기는 그 행동을 거룩하게 한다. 참된 성화는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반역적인 생각과 감정은 극복되고, 예수님의 음성은 전신에 미치는 새 생애에로 각성시킨다. 진실로 성화 된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을 옳고 그름의 표준으로 내세우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완고하거나 독선적이 아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허락들의 조건에 응하지 못할까봐 항상 두려운 마음으로 자신을 애써 지킨다. 이성을 대신하는 감정 성화되었다고 공언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 가운데 역사하는 은혜에 대하여 전혀 무지하다. 시험해 보면 그들은 독선적인 바리새인들과 같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들은 남의 말은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이성과 판단을 제쳐놓고, 그들이 한때 경험하였던 감정에 기초를 두어 그들이 성화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감정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그들은 자기가 성결하다는 고집 센 주장을 역설하는 데 완강하고 괴퍅하다. 그러나 이와 같이 말은 많이 하면서 그 증거가 되는 귀중한 열매는 맺지 아니한다. 이 성화되었다고 공언하는 자들은 저희의 가식으로 자신의 영혼을 속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를 갈망하는 많은 사람들을 곁길로 인도하는 감화를 끼치고 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신다! 가르치신다! 나는 죄없이 살고 있다!”고 거듭거듭 되풀이하는 말을 들을 수 있다. 이런 정신을 가진 자들과 접촉하게 되는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암담하고 신비적인 어떤 것에 부닥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유일하신 참 모본이신 그리스도와는 전혀 같지 아니한 것이다. 성경상 성화는 강렬한 감정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오류에 빠진다. 그들은 감정을 척도로 삼는다. 행복감을 느끼거나 감정이 고조될 때 그들은 성화되었다고 주장한다. 행복감 혹은 우울감은 사람이 성화되었다거나 성화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지 않는다. 즉각적인 성화란 있을 수 없다. 참된 성화란 생명이 유지되는 한 계속되는 매일 매일의 과업이다. 매일의 유혹과 더불어 싸우며 자신의 죄된 성향을 극복하고 또 마음과 생활의 성결을 구하는 자들은 성결하다고 하는 자만스러운 주장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의에 대해 주리고 목말라 하고 있다. 죄는 그들에게 몹시 죄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형제들처럼 진리를 공언하는, 자칭 성화 된 사람들이 있다 그들 사이에 구별을 두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점은 있다. 그러나 고귀한 경험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증언은 그리스도의 성령을 회집에서 떠나게 하며, 그 참석한 사람들에게 냉랭한 감화를 끼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참으로 죄없는 생애를 했다면 그들이 참석함으로 그 회집에는 거룩한 천사들이 모이게 될 것이고 그들이 하는 말은 참으로 “은쟁반에 아로새긴 금사과”(잠 25:11)와 같이 될 것이다. 시험의 시기 여름에 아름다운 초록색 외투를 입은 숲속의 나무들을 멀리서 바라볼 때에 우리는 상록수와 낙엽수를 쉽게 구별할 수 없다. 그러나 겨울이 와서 동장군이 낙엽수들의 아름다운 잎들을 떨어 버리며 그의 차거운 포옹으로 그들을 에워쌀 때는 상록수들이 쉽사리 분별된다. 이것은 겸손히 행하며 자아를 신뢰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손에 떨며 매달리는 모든 사람들의 경우도 이러한 것이다 자기를 신뢰하며 자신의 품성의 완전함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시련의 폭풍을 만나면 그들의 가장된 의의 옷을 잃어버리지만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두려워하는 참된 의인들은 역경에나 순경에나 한결같이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는다. 자기부정, 자기희생, 자선, 친절, 사랑, 인내, 불굴의 정신, 그리고 그리스도인적 신뢰는 하나님과 참으로 연결된 자들에게 매일 열리는 열매다. 그들의 행위는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을지도 모르나 그들 자신은 날마다 악과 싸워서 시험과 불의에서 귀한 승리를 얻고 있다. 그들은 엄숙한 서약을 새롭게 하고 간절한 기도와 끊임없는 경계로 얻어진 힘을 통하여 그 서약을 지킨다. 열광자는 이 조용한 일꾼들의 투쟁을 식별하지 못하나 마음의 은밀한 것을 보시는 하나님의 눈은 겸손과 온유함에 미치는 모든 노력을 주목하시고 그것들을 인정하신다. 품성이 지닌 순금과 같은 사랑과 믿음을 나타내기 위하여는 시험의 시기가 필요하다. 교회에 환란과 곤고가 임하게 되면 그리스도를 진실로 따르는 자들의 꿋꿋한 열성과 따뜻한 애정은 계발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자들이 그들은 완전하다는 허망하고 호리게 하는 이론으로 잘못된 길로 빠지는 것을 보고 슬픔에 잠기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을 깨우쳐서 바른 길로 인도하기란 아주 어렵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과 같은 내적 단장은 결여되어 있으면서도 외적인 아름다움과 만족을 구하여 왔다. 시험의 때는 모든 사람에게 다가 올 것인데 그 때에는 그들이 오랫동안 안전하다고 생각해 왔던 그들의 희망이 근거 없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새로운 위치에 처하게 되고 여러 가지 환경에 부닥치게 되면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같이 보이던 사람들이 페인트나 니스칠을 한 썩어 빠진 재목에 불과했었음을 나타내게 된다. 그러나 매일 매일 그들의 영혼을 영원한 반석이신 예수님께 집중시키는 일을 중요하게 느끼는, 마음이 겸손한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련의 폭풍우 가운데서도 요동치 않고 서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 하였느니라”(딤후 2:19) 정상적인 열매를 맺음 자기들의 선행에 주의를 끌려고 애를 쓰며, 끊임없이 자기들의 죄없는 상태를 이야기하면서 신앙적인 업적이 눈에 띄도록 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영혼을 속이고 있을 뿐이다. |
생업에 열중할 수 있고, 혈관에 건강한 혈액이 흐르고 있으며 매일 매일 유쾌한 기분으로 그의 직장에 나가는 건강한 사람은
만나는 사람들 마다에게 그의 몸이 건강하다는 사실에 대해 주의를 끌려고 하지 않는다.
그의 생활에 있어서 건강과 정력은 당연한 상태로서 자기가 그렇게 풍성한 은혜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거의 인식하지 못한다.
참으로 의로운 사람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의 선함과 경건을 의식하지 못한다.
신앙적 원칙이 그의 생애와 행동의 동기가 되며
그가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은 무화가 나무가 무화과를 맺으며 장미덤불이 장미꽃을 피게 하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다.
그의 성품이 하나님과 동료들에게 대한 사랑으로 아주 철저하게 물들어 있기 때문에
그는 기꺼운 마음으로 자원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수행한다.
그의 감화를 받는 모든 사람들은
그의 그리스도인적 생활의 아름다움과 향기를 인식하게 되나 그 자신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그의 감화가 그의 습관과 성향에 일치되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빛을 간구하고 그 빛 가운데 걷기를 좋아한다.
하늘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일은 그에게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이다.
그 생애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숨겨졌으나 이를 자랑하지도 아니하고 또 그것을 의식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하나님께서는 구주의 발자취를 가까이 따라가는 겸손하고 겸비한 자들을 보시고 미소를 띄우신다.
천사들은 그들에게 매혹되어 그들의 길에 오래 머무르기를 좋아 한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고 주장하면서 저희의 선행을 두드러지게 나타내기를 즐기는 자들은
이런 사람들을 거들떠 볼 가치가 없다고 하여 지나쳐 버릴지 모르나
하늘 천사들은 저들을 사랑스럽게 굽어보며 불기둥처럼 그들 주위를 두른다.
왜 그리스도께서는 거절당하셨나?
우리 구주께서는 세상의 빛이셨으나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
구주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길에 빛을 비추시면서 자비를 베푸셨지만
당신과 섞이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비할 데 없는 덕행, 자기부정, 자기희생, 그리고 자선의 행위를 보라고 요구하지 아니하셨다.
유대인들은 그런 생활을 칭찬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의 신앙을 가치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그 까닭은 그것이 저희의 경건의 표준에 일치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저들은 그리스도께서 정신면에서나 품성면에서 신앙적이 아니라고 결정하였다.
그 까닭은 저들의 신앙은 허식과 공중 앞에서 기도하는 것과 효과를 노려서 자선을 행하는 것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화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저희의 선행을 크게 자랑하였다.
그들이 무죄하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이해해 주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온 생애는 이와 직접적으로 대조를 이루었다.
그분은 이득이나 명예를 구하지 아니하셨다.
그분은 당신의 위대한 축복을 받았던 자들의 열성을 제지할 수는 없었지만
할 수 있는 대로 은밀한 방법으로 당신의 놀라운 치료를 행하셨다.
겸비한 행동과 겸손한 태도가 그분의 생애를 특정지웠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용납하지 않은 것은
그들의 태도와는 아주 다르게 예수님께서는 걸으실 때에 거드름 피우며 걷지 않으시고 점잔빼지 않는 태도를 지으셨기 때문이었다.
성령의 열매인 온유
성화의 가장 고귀한 열매는 온유의 은사이다.
이 은사가 영혼을 주관할 때 성벽은 그 감화로 말미암아 형성된다.
그런 사람은 항상 하나님을 모시는 생애를 살며 하나님의 뜻에 자기의 의지를 복종시킨다.
그의 지력은 모든 신성한 진리들을 깨닫게 되며 의심하거나 지체하지 않고 의지를 모든 신성한 교훈에 굴복시킨다.
진정한 온유는 마음을 부드럽게 하며 완화시키고 주입적인 말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준다.
온유는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온유는 루디아와 같이 예수님의 발 앞에서 겸손히 배우는 자가 되게 한다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리로다”(시 25:9)
온유한 사람의 말씨는 거만한 사람의 말씨와는 결코 같지 않다.
그들은 어린 사무엘처럼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9)하고 기도한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군대장관으로서 가장 높고 명예스러운 지위에 앉았을 때 그는 하나님의 모든 원수들을 대항하였다.
그의 마음은 위대한 사명에 대한 고상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하늘의 기별을 통고 받고서 그는 지시를 받기 위하여 자신을 어린아이와 같은 입장에 두었다.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수 5:14) 라고 한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나타나신 후에 바울이 처음으로 한 말은 “주여 내게 무엇을 행하시려나이까”(행 9:6)였다.
그리스도의 학교에 있어서 온유는 두드러진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이다.
온유는 성령께서 성화 된 자에게 주시는 한 은사이며,
온유함을 지닌 사람은 어느 때나 충동적이고 성급한 성벽을 제어할 수 있게 된다.
본성적으로 심술궂거나 조급한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온유의 은사를 마음에 품으면 그들은 저희의 좋지 못한 성격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가장 진지한 노력을 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예수를 불쾌하게 하며 그분을 닮지 아니한 것들을 극복할 때까지 매일 매일 자제할 것이다.
그들은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약 1:19)는 영감적 교훈을 순종할 수 있기까지
거룩한 모범에 동화되어 가게 된다.
사람이 성화되었다고 공언하면서
아직도 말이나 행위 가운데 불결한 샘이 쓰디 쓴 물을 용출(湧出)하듯 나타나게 되면
그 사람은 속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는 그리스도인 생애를 이룩하는 아주 기초적인 것부터 배울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자처하는 어떤 사람들은
악마와 같은 몰인정한 마음을 오랫동안 품어 옴으로
그들이 성스럽지 못한 요소를 좋아하며 또 기분 나쁘게 하고 화나게 하는 말들을 즐겨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당신의 자녀로 인정하시기 전에 회개해야만 한다.
온유는 하나님께서 크게 평가하시는 마음의 단장이다.
사도는 이것이 금이나 진주나 값비싼 옷보다도 더 값지고 고귀하다고 말하고 있다.
외적 단장은 썩어질 육체만을 아름답게 하지만
반면 온유함의 단장은 심령을 단장하여 온유한 사람을 무한하신 하나님과 연결시킨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친히 택하신 장식품이다.
광명한 별들로 하늘을 단장하신 이는
동일한 성령으로 “겸손한 자를 구원하여 아름답게 하심이로다”(시 149:4)라고 약속하셨다.
하늘 천사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고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분과 동행하는 자들을 가장 잘 단장한 자로 기록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도달하여야 할 높은 목표가 있다.
항상 더 높은 목표를 향해 향상할 수 있다
요한은 그리스도인의 특권에 대해 고상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제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요일 3:1)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은 여기에 암시된 것보다 더 존엄하게 될 수는 없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후사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가 되는 특권이 부여되어 있다.
이와 같이 고결하게 된 자들에게는 찾아낼 수 없는 그리스도의 부요함이 전개되고
그것은 세상의 부요함보다 수천 배 이상 고귀한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유한한 인간은 지극히 높임을 받아
하나님과 또한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교제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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